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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대학원의 실천적 교육과정 개발에 관한 연구 :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중심으로

        신동호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 2008 국내석사

        RANK : 249727

        이 논문은 한국교회의 문제는 목회자의 문제에서 시작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구조적으로 볼 때, 목회자가 중심이 되어 교회를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회자 후보생은 목회자로 나서기 전에 목회자에게 필요한 훈련이 충분히 제공되어야 하고 교육되어야 한다. 목회자의 영성, 신학, 인격 등에 영향을 줄 수 있으면서 실제 사역 속에서 요구되며 필요한 내용으로 교육과정이 편성되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문제를 극복하고 한국교회가 변화를 이끌려면 목회자를 교육하는 신학교육부터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하여 2004년 이후 전국 주요 신학대학이 모여 신학교육개선공동연구협의회를 두고 공동연구를 하고 있다는 것은 기쁜 소식이다. 그러나 이것이 협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각 분과별로 전문적인 연구와 조사를 통해 한국교회를 살리는 연구가 되어야 할 것이다. 타일러의 논리는 명시적 교육과정으로서 목적 중심의 교육과정을 추구하는 것으로 모든 교육 논리의 기본이다. 이 논문은 일반교육학에 널리 알려진 이론인 타일러논리(Tyler Rationale)를 이용하여 신학교육에 적용한다. 또한 잠재적 교육과정을 통해서 타일러 논리가 놓치고 있는 교육적 요소를 살펴본다. 교육목표를 세우는 방법에서부터 학습경험을 선정하여 조직하고 평가한다는 과학적 원리를 찾아 신학대학원 교역학 과정(M. Div)에 적용하여 교육과정 작성의 원리를 찾았다. 찾아진 원리로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육과정을 분석하여 비판하였고, 여기서 살핀 내용을 중심으로 신학대학원 교육과정의 대안적 모델을 제시하였다. 이 연구 과정 속에서 찾아진 학문적 성과는 몇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교육과정에는 명시적 교육과정과 잠재적 교육과정이 모두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교육과정을 말할 때 명시적 교육과정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명시적 교육과정을 운영할 때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잠재적 교육과정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 교육과정 설계에 있어 잠재적 교육과정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교육과정 설계자가 원하는 교육과정이 구현될 수 없다. 본 논문에서는 이 두 이론을 수렴하여 보완적 입장에서 제안하였다. 둘째, 목회학 과정 속에 왜 신학적 요소를 줄어들고 목회학 관련 학문이 교육과정으로 편성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였다. 이 연구 과정 속에서 교육목적 및 교육 목표를 세우기 위해 다루어져야 하는 요소들을 찾을 수 있었고, 학습경험을 선정하고 조직하기 위해 필요한 원리들을 찾을 수 있었다. 목회학 연구를 행함에 있어 ‘사회적 요구에 대한 연구’가 더욱 필요함을 알 수 있었고, 신학생에게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목회자를 세우기 위해 꼭 필요한 교육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연구가 더욱 필요함을 알게 되었다. 셋째,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의 교육목표 및 교육목적, 교육과정을 분석하여 비판하였다.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의 교육과정은 목회자를 양성한다기보다는 신학자를 양성하는 데에 더 비중이 있는 교육과정이라는 것을 지적하였다. 신학이 목회자에게 비중있게 다루어져함에도 불구하고 신학은 학부나 대학원 과정의 몫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현재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의 교육과정은 타과정과 중복됨으로 해서 목회학의 특성을 살리지 못하고 있다. 목회학의 전문성을 기하는 과정으로 바뀌어 전문 목회자 양성에 초점을 맞추는 쪽으로 방향을 정해야 할 것이다. 넷째, 신학대학원 교육과정에 대한 대안적 모델을 제시할 수 있었다. 현재의 신학대학원의 교육과정이 신학에 치우쳐 있으며 교육목적에 부합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방향을 잡아야 할지에 대한 대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목회자 양성에 집중할 수 있는 교육목적과 교육목표를 제안하였고, 교육과정의 선정 및 조직에 대한 이론을 적용하여 교육과정의 필수 과목을 제시했다. 대안적 모델은 각 영역에 대해 관계로서 설명될 수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목회자가 개인적 삶에서나 목회에서 부딪히는 모든 영역을 관계 속에서 설명할 수 있었다. 다섯째, 잠재적 교육과정도 교육과정 설계자가 교육내용 속에 의도적으로 편성할 수 있다는 점을 발견하였다. 그동안 잠재적 교육과정은 의도될 수 없는 것으로 인식되었지만, 교육과정 설계자가 자신의 교육적 의도에 따라 주제를 선정하고 그에 따른 교육과정 혹은 프로그램 도입을 제안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잠재적 교육과정에 대한 연구를 더욱 함으로서 완전한 교육과정 편성이 가능하게 된다.

      •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생들의 정치의식과 영성의 관계에 관한 연구

        배성훈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2012 국내석사

        RANK : 249695

        본 연구는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정치의식과 영성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사회과학 척도를 사용하여 검증해보고자 하였다. 특별히 우리의 정치 의식이 영성의 수직적 측면인 종교적 안녕과 수평적 측면인 실존적 안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밝히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하여 본 연구에서는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생들의 인구사회학적 변수에 따라 영성의 정도를 살펴보았다. 다음으로 신학대학원생들의 인구사회학적 변수와 정치의식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정치의식이 영성에 미치는 영향력을 파악하기 위하여 인구사회학적 변수들과 정치 의식을 단계적으로 투입하여 다중회귀분석을 실시한 후 정치 의식이 영성과의 관계에 미치는 설명력을 살펴봄으로써 정치의식과 영성과의 관계를 확인하였다.

      • 존 하워드 요더의 신학적 윤리에 관한 연구 : 한국교회의 정치 참여에 대한 반성의 관점에서

        김종화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 2008 국내석사

        RANK : 249679

        필자는 지금까지 재세례파 혹은 메노나이트의 신학과 윤리를 재탐구하고 기독교 평화주의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존 하워드 요더의 신학적 윤리 사상과 윤리적 방법들을 고찰하였고 그것을 한국 교회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 지 다루어 보았다. 각 장별 주요한 내용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Ⅱ장에서는 요더의 생애와 배경에 대한 연구에 집중하였다. 존 하워드 요더는 1927년 오하이오 주 스미스빌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센 대학에 교수 벤더의 영향을 많이 받아 그의 신학적 정체성을 발견하였다. 그는 유럽에서 다양한 학자들에게 수학하는데, 그 중에서 쿨만과 바르트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그 밖에도 ‘컨선’ 그룹을 통해 메노나이트 전통에 관하여 고민하였고, NAE, NCC는 물론 WCC 및 각종 회의와 컨퍼런스를 통해 다양한 주제로 신학적 담론의 현장에 함께 했다. 그는 주로, 메노나이트 성서신학대학원, 고센 성서신학대학원, 그리고 노틀담 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하면서 메노나이트 연구소 부위원장, 메노나이트 역사학회의 이사, 기독교윤리학회 회장, 종교 윤리학 저널 편집위원, 메노나이트 계간 평론, 체류자들의 객원 편집자직등 다양한 위치에서 영향력을 나타냈다. 그는 결국 1997년 12월 30일 그의 생일 다음날 그가 가르치던 노틀담 대학에서 심장 질환으로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요더는 『예수의 정치학』으로 대표되는 그의 사상을 통해 세속문화에서 그 기초를 찾는 대부분의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의 교회 윤리학이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 윤리학적 성격을 잃어버린 것으로 비판하면서, 참된 기독교 윤리학이란 세속문화에 근거를 두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치적이었던 실제적 삶과 가르침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요더를 구성하는 배경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 요더에게 있어 메노나이트 신학은 깊은 연관성을 가진다. 그것은 신앙의 외적인 표현으로서의 도덕적 삶을 매우 강조하며, 신학과 윤리의 통일성을 지향한다. 둘째, 요더에게 있어서 또한 중요한 배경은 복음주의인데, 그는 사상적인 측면에서 복음주의 전통과 직간접적으로 교류하였으며, 때로는 실천적인 복음 전도자로 때로는 복음주의의 대변자로 때로는 복음주의의 비평가로 그들의 세계와 대화하였다. 셋째, 요더에게 있어서 마지막 주된 관심은 에큐메니즘(Catholic Ecumenism)이었다. 요더는 기존의 에큐메니칼적 대화를 비판하는 견지에서 대안적인 에큐메니즘을 주장한다. 그것은 분파주의로 소외되어온 그의 메노나이트 신학을 주류 신학의 지도 안에 그려 넣으려는 노력의 일환이었으며 실제로 그는 노틀담에서의 수많은 세미나와 WCC와의 관계를 통해 에큐메니칼 운동에 앞장서려고 노력하였다. Ⅲ장에서는 요더의 신학적 윤리의 내용으로 세 가지를 다루었다. 첫째는, 기독론으로써 요더는 예수 그리스도를 실제적 가르침이나 윤리적 기준에서 제외하고 단지 우주적 그리스도로만 묘사하는 기독론은 우주론적 기독론이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우주론적 경향은 ‘영지주의 유혹’에 가깝고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결론적으로, 기독론은 ‘예수론(Jesusology)’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요더에 의하면, 예수는 도덕주의자도 아니었으며, 영적 삶만을 가르친 사람도, 단지 희생 제사를 준비하던 어린 양도, 그의 신성이 우리로 하여금 그의 인성을 무시하도록 만드는 그런 존재도 아니다. 예수의 모든 사역은 단 한가지 의미, 즉 정치적인 함의를 가진다. 요더는 예수의 공적 사역의 근간을 이루는 요소로서 인간 예수가 거듭하여 직면했던 유일한 유혹들은 모두 배제되었다고 말한다. 즉, 폭력적 방법들을 활용하여 정당한 혁명을 도모함으로써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려는 유혹, 사회적 도피로서의 유혹, 기득권 체제에 동조하면서 보수적으로 사회 책임을 행사하려는 사두개파식의 유혹에 대한 예수의 삼중적 거부(threefold rejection)가 의미하는 것은 예수의 삶의 정치적 관련성이 궁극적으로 향하는 지점, 바로 십자가이다. 둘째는, 요더는 교회론으로써 그는 교회라는 단어 ‘에클레시아’가 공동체의 일을 다루기 위한 정치적인 모임을 의미했다고 설명한다. 오늘날 현대 용어를 빌리면, 회의, 의회, 시 위원회와도 같다. 따라서 교회는 단지 신자들의 모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들이 주님이신 예수로부터 배운 것을 실천하고자 하는 정치적 모임이다. 또한 이것은 모든 사람의 행동이 어떠해야 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소수 공동체의 행동에 관한 것이다. 이 소수 집단의 윤리적 태도는 세속적 삶과의 분리가 아니라 세속적인 삶의 가치와 패턴을 본받지 않고 살아가려고 하는 자들의 독특한 삶의 모습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요더에 의하면, 이러한 ‘교회의 타자성’은 연약함이 아니라 강함에 기반을 둔 태도다. 세상을 향한 교회와 제자들의 사명은 소수 공동체로써 세상과 다르게 살아갈 때 그 선교적인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사회의 모든 구조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복음으로 무장되어 있는 성도 공동체’라는 구조로만 가능하다. 셋째는 종말론으로써, 요더는 인간 역사를 근본적으로 반대되는 두 개의 시대들이 서로 공존하는 것으로 특징짓는다. 즉, 현 시대는 그리스도 이전의 죄에 의해 특징 지워지는 인간이 중심이 되는 시대이고 반면에 다가올 시대는 그리스도 안에서 궁극성을 찾는 그러한 구속적 실재가 펼쳐지는 역사의 시대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새로운 시대를 연 창시자로서의 예수가 하나님 앞에서 순종의 모델이 되신다. 반역적 권세를 원칙적으로 패배시키고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신 것은 바로 예수의 십자가였듯이, 기독교인들은 십자가로 인도했던 예수의 무저항적 사랑의 사회적 자세를 본받아야 한다.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교회의 역사의 가장 큰 실패는 바로 콘스탄틴 대제 이후의 교회의 변화이다. 콘스탄틴 시대에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로, 교회는 신약성경을 통하여 주어진 그리스도의 모델을 무시하거나 중시하지 아니해 왔으며 또는 윤리적인 삶의 모델로서의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려했던 초대교회의 윤리적 모델을 버렸다. 콘스탄틴주의는 ‘이미’와 ‘아직 아님’의 이중성을 제거함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했던 그리스도에 대한 모방을 요구하는 기독교인의 삶을 타락시켰으며 기독교윤리를 국가에 봉사하도록 만들게 하였다. Ⅳ장에서는 주로 요더의 윤리의 방법론을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다루었는데 첫째는 기독교 공동체의 확산이고 둘째는 기독교 평화주의이다. 첫째, 요더에 의하면 십자가는 정치적 예수가 세상의 권세에 굴복하지 아니하고, 무력함으로 거두어낸 어린 양의 승리의 상징이다. 그것은 제자도를 소유하여,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패턴을 충실히 따라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윤리의 기준이 된다. 그런데, 어린 양이 죽임을 당하는 것의 의미, 그리고 그 후 우리가 그를 두고 “권세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라고 찬송하는 것의 의미는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 아래 처형당하신 사건이 품고 있는 의미와 나눠질 수 없다. 사실상 역사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칼이 아니라 십자가이며, 무자비한 힘이 아니라 고난이다. 이러한 예수의 모습을 따른다는 것은 고통만 있고 패배만 있을 것 같지만, 그러나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어린 양의 종국적 승리에 참여하게 되는 승리적 고통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현 세상 질서의 미래적 모습이다. 교회는 현 세상에서 종말론적인 질서를 보여주고 있는 유일한 장소이고 증거자들의 공동체인데 이러한 교회는 우리는 ‘신자들의 교회(Believers' Church)’ 혹은 ‘자유 교회(Free Church)’라고 명명한다. 자유 교회가 이 시대에 대안적인 전망을 줄 수 있는데, 그들은 신자들의 공동체와 다른 공동체들, 즉 세속적인 사회적 실재에서의 계약 공동체와 그것이 존재하는 한 가운데 안에 있는 세속적인 사회적 실재 사이의 구별을 강조하는 관점을 가지기 때문이다. 둘째, 인간애적 평화주의와 실용주의적 평화주의와는 달리 기독교적 평화주의는 철저히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따라야 하기 때문에 폭력과 전쟁을 받아 들일 수 없다는 주장이다. 4세기 전반까지의 교회의 지배적인 태도는 평화주의였다는 것이 다수의 교회사가들의 견해다. 전쟁은 하나님의 사랑의 의지에 대한 인간의 구조화된 타락의 분명한 상징이다. 물론, 모든 경우에 폭력의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도 자신의 합법적인 모든 목적들을 얻을 수 있다고 보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세상의 폭력과 무력과 권세에 대해서 칼로 맞서지 아니하시고 권세 없는 자의 모습을 취하신 것 같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제자도는 악의 힘에 악과 폭력으로 대항하지 말고 무력을 포기하는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하는데, 이것을 일컬어 혁명적인 복종(Revolutionary Subordination)”이라고 한다. 한편 요더는 누가가 기록하고 있는 물질과 소유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은 구약성경의 희년에 대한 완성으로 해석한다. “네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그것으로 구제하라”라는 예수의 계명은 단순한 성화를 위한 조언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실행되어야 할 희년의 율례라는 것이다. 이것은 네 가지의 요구를 포함하고 있는데 그것은 땅의 휴경, 빚의 탕감, 노예의 해방, 가족 재산의 환원이라는 측면에 내포되어 있는 암시들이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팔레스타인 땅에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실제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으로서 일어났으며, 그러한 사고는 예수 당시에 희년 선포까지도 구체성을 가진 것으로 이해되어지게 하였다. Ⅴ장에서는 요더의 입장을 긍정적, 부정적인 관점에서 평가하고 그것을 한국 교회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에 관하여 고찰하였다. 먼저, 긍정적인 관점은 다음과 같은데, 첫째, 요더의 신학과 윤리의 공헌은 당시의 주류 기독교 윤리와는 다른, 새로운 개념으로서 바르트의 영향을 받아 예수의 삶과 말씀을 실천가능한 윤리적 규범으로 설정한 데 있다. 헤이스(Hays)에 의하면 요더는 1970년대 초반 성경 학계에서 접할 수 있는 최선의 통찰들을 세밀하게 활용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둘째, 요더는 니버의 고전적인 유형론에 날카로운 비판을 가함으로서 교회의 사회적 책임과 사회참여 같은 중요한 주제에 있어서의 획일적인 이해에 새로운 통찰을 제공하였다.(Hauerwas, McClendon) 셋째, 요더의 공헌은 기독교윤리에 있어서 교회 공동체의 중요성을 일관성 있게 강조한 점이다.(Hauerwas) 넷째, 요더의 신학의 공헌은 폭력과 전쟁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서 예수의 제자도로서 비폭력, 무저항의 사랑을 강조한 점이다.(Hays) 또한 요더의 사상에는 부정적 관점이 나타나는데, 첫째, 요더가 진지하게 다루던 성서해석에 있어서 ‘예수의 정치학’에서 누가복음만을 주석의 대상으로 삼는 것에 첫 위험의 여지가 내포된다.(Hays) 또한 그는 ‘에클레시아’의 의미를 자의적으로 해석함으로 인해 그것이 가지고 있는 종말론적인 함의를 무시하였다.(신원하)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그가 지신 십자가를 일관되게 정치적인 위치에서만 이해하려는 그의 기독론에 다른 한계를 가지고 있다.(Mott, Sider) 셋째, 그가 사회의 관계에 있어서 구별된 공동체적 삶을 강조하는 선교적 영향력에 대한 부정적 관점이다. (R. Niebuhr), 넷째, 그가 가지고 있는 권력과 국가의 모든 형태를 단순히 강제나 폭력적 조정으로 환원시키는 문제점이 있다.(Hauerwas, Lemasters), 다섯째, 비폭력 무저항의 평화주의의 문제점이다. 요더의 사회윤리의 심각한 문제는 현실에서 무죄한 희생자들이 당하게 되는 현재적 고통 혹은 죽음을 묵과하게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Wogaman, Ramsey, Bonino, Dussel, Bennett, Hauerwas) 이와 같이 요더의 생애를 바탕으로 신학적 윤리를 소개하고, 그가 핵심적인 위치에서 주장하는 기독교 공동체의 확산과 기독교 평화주의라는 방법은 긍정적으로 또는 부정적으로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지에 관하여 다루었다. 또한 이러한 것을 종합하여 보았을 때, 요더의 사상은 한국 교회의 정치 참여 문제에 있어서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한국 교회는 정치 참여의 문제에 있어서 보수와 진보로 대표되는 상이한 방식으로 관련을 맺어 왔는데, 주목할 것은 그 상이성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으로 한국 교회는 정부와 사회 참여 문제에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이며, 때로는 이러한 관련성이 지나치고 왜곡되어 교회의 정체성을 잃게 되는 현상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요더에 의하면 이러한 현상을 콘스탄틴주의라고 명명하는데, 즉 교회가 세상의 체계와 동일시되어 가는 것이다. 이러한 콘스탄틴주의 사상 근저에는 루터의 ‘두 왕국론’의 영향이 내재해 있는데, 틸리케는 이 ‘두 왕국’에 있어서 나타나는 문제를 세 가지, 이중윤리의 위험성, 세속화의 위험성, 세속권세에 대한 묵종주의 경향성으로 분석했다. 그런데, 일부 한국 교회에서도 이러한 위험성의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 교회를 향한 요더의 신학의 적용은 다음과 같다. 세 가지 관점에서 말하자면, 첫째, 한국교회에 있어서 요더의 윤리가 적용되는 영역은 교회 내부적 체계에 우선한다. ‘교회를 교회답게 하라(Let the church be the church)’는 요더의 주장은 교회와 사회 관계의 문제를 다루는 방법론적 차이들을 간주하더라도, 여전히 한국 교회에 절실한 울림으로 여겨진다. 둘째, 요더 윤리의 실천은 일치와 연합을 위한 에큐메니칼 운동의 활성화이다. 교회의 연합과 일치는 한 하나님을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당위적인 신앙의 실천으로 이해해야 한다. 셋째, 한국 교회는 전보다 더 진지하고 심도있게 평화주의와 정당전쟁 이론에 관하여 고찰하여야 한다.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엄청난 재앙이 도래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세계를 망가뜨리는 참혹한 비극이 나타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지 한반도 내에서의 긴장이나 전쟁의 위험을 제거해야 하며, 평화를 유지해야 하며, 더 나아가 두 조국으로 나뉜 민족이 다시 하나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궁극적으로 책임 윤리의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피조물들을 나의 문제로 반응하게 하는 고백적인 해석이요 자기 성찰적인 실천이며, 이러한 인식이야말로 남과 북의 구성원들의 여러 가지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사회적인 연대를 이루어 내는 동기를 부여할 것이다. 인류 역사 속에서 전쟁과 분쟁은 끊임없이 지속되어 왔다. 게다가, 한반도는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분단국가이며, 남과 북의 관계는 냉전과 우호를 반복하며 우리에게 직접적인 긴장감을 형성케 한다. 그러나 어떤 형태든지 한반도에서의 전쟁과 분쟁을 정당화할 만한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한반도에서의 원칙이라면 그러한 원칙은 세계 모든 지역에서도 동일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대다수의 인류는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갈망한다. 20세기 기독교 평화주의의 선구자로 여겨지는 요더는 이러한 현상들이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평화주의가 아닌 정당전쟁론을 취함으로 초래된 결과라고 분석한다. 그는 평화주의라는 주제를 기독교윤리학의 영역에 소개한 가장 대표적인 신학자이다. 또한 그는 중대한 논란을 일으켰는데, 그것은 당시 에른스트 트뢸취부터 리처드 니버까지 내려오던 주류 신학 영역에 정면으로 도전했기 때문이다. 그는 교회와 사회의 관계에 관한 유형론적 연구와 철학적인 방법으로 윤리적인 규범을 설정했던 기존의 기독교윤리학의 방법론을 비판하면서 오직 성서에서 발견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을 기독교 윤리의 규준으로 설정하였다. 이러한 사상을 담은 그의 대표작『예수의 정치학(The Politics of Jesus)』은 20세기 기독교윤리학과 신학 분야에서 가장 유명한 저서 중 하나가 되었다. 물론, 그가 급진적인 메노나이트 신학자였다는 특수성은 보편적인 신학과 기독교윤리학의 영역에서 우리가 그를 다루기에 주저하게 만드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무성의하게 분파주의라고 규정하기 전에 혹은 반대로 성급하게 주류 신학을 비평하기 전에, 우리는 진지하게 요더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했던 내용이 무엇이며, 논쟁 속에서도 여전히 빛나고 있는 그의 사상을 지금 이 자리에서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통찰들은 20세기의 미국적인 상황에서 뿐만 아니라,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지금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 장신신학 형성에 영향을 미친 미 남장로교 선교사 신학 : - 조직신학 교수 레이놀즈와 크레인의 신학사상을 중심으로 -

        김영웅 장로회신학대학교 일반대학원 2023 국내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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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초록 및 주제어 본 연구는 장로회신학대학교(이하 장신대, 1901-현재)의 신학 형성에 영향을 미친 초 기 선교사의 신학, 특히 미국 남장로교의 선교사 신학에 대하여 고찰한다. 선교사들은 초기 장신대의 발전에 중대한 기여를 하였으나 연구자들은 이들의 신학에 대하여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며, 이들의 신학은 지금까지 부정적으로 평가되었다. 요약하면 이들의 신학은 보수적이고 근본적이라고 간주되었고, 이러한 점이 한국의 장로교회와 신학교의 분열을 가져왔다고 알려져 왔다. 그 이유는 J. C. 크레인의 신학과 같은 대표 적인 예를 볼 때 초기 선교사 신학이 매우 다양했음에도 불구하고 W. D. 레이놀즈와 그의 충실한 제자 박형룡의 신학이 한국 장신신학의 주류라는 관점에서 주로 선교사 신학을 평가해 왔기 때문이다. 크레인은 평양에 위치한 장로회신학교(장신대의 전신, 1901-1938, 1938[1940]-1949) 에서 레이놀즈의 후임으로 1937-1938년까지 조직신학을 가르쳤으며, 다시 총회신학교 (평양장로회신학교를 계승, 1951-1959)에서 1954-1956년까지 조직신학을 가르쳤다. 그 는 조직신학 교수였으며, 최초의 공식적인 교과서인 『조직신학』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그의 신학은 주목받지 못했다. 지금까지 그의 생애와 종말론에 관한 몇 편 의 연구들 외에는 그의 신학에 대한 전반적인 연구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신학을 연구 할 필요가 있다. 본 연구는 먼저 1901-1940년까지 장신대에서의 신학교육과 한국의 근대 신학적 상 황 및 장신대의 반응을 고찰한다. 이와 더불어 레이놀즈와 크레인의 생애 및 신학사상 을 살펴보고, 양자를 비교하여 이들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분석한다. 레이놀즈와 크레인 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개혁교회의 신조를 강조,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계시에 대한 관점에 대해서는 공통점을 가진다. 신학 교과서로서의 차이, 아르미 니우스주의에 대한 태도, 장로교 신학에 대한 강조, 전천년설에 대한 견해 및 현대 신 학 사조에 대한 태도와 영세(靈洗) 개념의 사용, 필리오케의 사용과 같은 주요 개념들 에 대한 차이가 있다. 결론적으로 본 연구는 첫째 크레인의 신학에 대한 고찰을 통해 초기 장신대의 한국 신학 형성에 영향을 미친 초기 선교사의 신학이 다양했음을 밝힌다. 둘째 본 연구는 한 국 장로교 신학에서 초기 선교사 신학에 대한 기존의 이해에 대한 철저하고도 새로운 평가가 이루어져야 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한다. 크레인은 남장로교 전통에 기초하여 신 학을 전개하였으며, 크레인은 개혁신학에 비추어 현대 신학 사상의 일부 중요한 사상을 수용하였으므로 그의 신학은 보수적이지만 포용적이며 개방적이었으나 레이놀즈는 배타 적이고 폐쇄적이었다. 마지막으로 본 연구는 그동안 소외되었던 크레인의 신학을 조명 한다. 실제로 그의 신학에 대한 연구는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가 있으며, 또한 한국의 조직신학의 신학 발전에 대한 정확한 기술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주제어: 장신신학, 초기 선교사 신학, J. C. 크레인, W. D. 레이놀즈, 남장로교 전통, 『조직신학』 ABSTRACT The Influence of American Southern Presbyterian Missionaries’ Theology on the Formation of the Theology of the Presbyterian University and Theological Seminary: With Special Reference to W. D. Reynolds and J. C. Crane This study mainly investigates early missionary theology, in particular American Southern Presbyterian missionaries’ theology, that influenced the formation of the theology of the Presbyterian University and Theology Seminary(hereafter PUTS, 1901-present). It is believed that while missionaries made a major contribution to the development of the PUTS in its early years, scholars paid scant attention to their theology and it has been negatively evaluated until now. In sum, their theology is considered conservative and fundamental, which led to the division of the Korean Presbyterian church and seminary. It is because their theology has mainly been viewed from the perspective that theology of W. D. Reynolds and his faithful follower, Hyungryong Park, is the mainstream of Korean Presbyterian theology, while there was a rich variety of early missionary theology, with J. C. Crane’s theology as a representative example. Crane taught systematic theology at the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 in Pyungyang (hereafter PTS; the forerunner of the PUTS, 1901-1938, 1938[1940]-49) after Reynolds from 1937 to 1938 and again at the General Assembly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 in South Korea (the decendent of the PTS in Pyungyang, 1951-1959) from 1954 to 1956. In general, his theology has been unheeded, even though he was professor of systematic theology and wrote the first official textbook Systematic Theology. In this sense, it is necessary to study his theology because besides a few articles regarding his life and eschatology, there has been no overall study on his theology. This study first reviews theological education at the PUTS from 1901 to 1940, the Korean modern theological situation and the response of the PUTS. In addition, this study explores the lives and theologies of Reynolds and Crane, and compares these two theologies to investigate similarities and differences between them. While Reynolds and Crane agreed on the following points such as the Scripture as God’s words, the creed of the Reformed church, the absolute sovereignty of God in salvation, and the perspectives on revelation, they showed differences in those aspects including referential theological textbooks, the attitude towards Arminianism, the emphases of Presbyterian theology, perspectives on modern theological thoughts, and primary concepts like baptism with the Holy Spirit, the use of Filioque, and the opinion regarding premillennialism. In conclusion, this study reveals firstly that there was a diversity in early missionary theology which influenced Korean theology at the early PUTS through the examination of Crane’s theology. Secondly, it insists that a new thorough evaluation of the existing understanding of early missionary theology in Korean Presbyterian theology needs to be carried out. Crane built his theology on the basis of the Southern Presbyterian tradition, and his theology was conservative but inclusive and open-minded since he accepted some valuable ideas of modern theological thoughts in the light of Reformed theology, while Reynolds was exclusive and closed-minded. Last but not least, it sheds light on Crane’s theology which has been ignored. Indeed, the study of his theology has a significant meaning in itself and is also necessary for the correct description of the development of systematic theology in Korea. Key words: theology of the PUTS, early missionary theology, J. C. Crane, W. D. Reynolds, Southern Presbyterian tradition, Systematic Theology.

      • 복음전도와 사회참여를 중심으로 살펴본 서울대 기독인 연합의 신학

        임현우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2014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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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개신교가 경험하고 있는 위기는 87년형 복음주의의 위기로도 볼 수 있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달성되던 87년 무렵,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고자 등장한 복음주의자들은 로잔 선언을 바탕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이전의 기존의 정교분리를 주장하는 보수 개신교와 달리 사회 참여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사회참여를 강요했던 로잔 계열의 87년형 복음주의는 사회적인 영향력이 미미한 반면, 정교분리를 주장하던 보수 개신교 세력이 더욱 적극적으로 사회 문제에 개입하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공적인 공간에서 복음주의는 그 영향력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이러한 문제 의식을 바탕으로 사회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대학 사회 속에서 복음주의 개신교인들의 활동 속에 전제된 신학적인 입장을 살펴보고자 한다. 기독교인의 자기 이해와 타자에 대한 이해는 결국 신학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공적인 공간에 나타나는 신앙의 모습은 타자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타자에 대한 입장은 크게 선교 아니면 사회참여로 나눌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학내에서 개신교인들이 취한 입장과 그 밑에 내재된 신학적 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 신학생의 다면성별의식과 성역할정체감에 관한 연구 :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신학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황성결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2014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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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연구는 신학생의 양성평등의식 수준을 알아보기 위해 신학생의 다면성별의식과 성역할정체감을 조사하였다. 이와 더불어 신학생이 교육받고 있는 현장인 신학교 교육과 다면성별의식과 성역할정체감의 상관성을 밝힘으로 신학교 교육이 성평등적 교육을 지향하는지 점검하였다. 이를 통하여 양성평등적 학교 문화 형성의 도움이 되는 기초 자료를 제시하는데 본 연구의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하여 본 연구에서 다룬 연구 문제는 신학생의 적대적 성별의식과 온정적 성별의식 그리고 성역할정체감을 조사하고, 다면성별의식과 성역할정체감의 관계를 밝히고 양성평등교육 경험에 따른 다면성별의식과 성역할정체감의 변화가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다. 또한 신학교 교육이 다면성별의식과 성역할정체감의 변화를 일으키는지와 신학생들은 양성평등교육을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 밝히는 것이다. 본 연구는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신학과 학생 381명을 대상으로 설문지를 통해 자료를 수집하였다. 설문지는 다면성별의식검사와 한국 성역할검사로 구성되었다. 본 연구를 통해 나타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신학생의 적대적 성별의식과 온정적 성별의식은 남학생이 여학생보다 높았다. 적대적 성별의식의 성별 차가 온정적 성별의식의 성별 차보다 컸다. 연령에 따른 차이는 적대적 성별의식에서만 유의미하였는데, 20대가 가장 낮은 평균점수를 보였다. 양성평등교육 필요도에 따른 차이는 적대적 성별의식에서만 유의미하였으며, 양성평등교육이 불필요하다는 집단에서 적대적 성별의식이 높게 측정되었다. 둘째, 성역할정체감은 미분화 > 양성성 > 남성성 > 여성성 정체감으로 순으로 나타났다. 성별에 따른 차이는 남성은 미분화 유형이, 여성은 양성성 정체감이 가장 많았다. 학년에 따른 차이는 통계적으로 무의미하였으나, 학년이 높아질수록 미분화 유형도 늘어나는 모습을 보였다. 20대, 30대는 미분화 유형이, 40,50대는 양성성 정체감이 많았다. 셋째, 다면성별의식과 성역할정체감의 관계는 온정적 성별의식, 보완적 성역할 분화, 친밀한 이성애에서 유의미하였다. 양성성 정체감 집단이 온정적 성별의식, 보완적 성역할 분화, 친밀한 이성애를 지지하였다. 넷째, 신학교 교과목 중 다면성별의식과 성역할정체감의 의미 있는 변화를 주는 과목은 없었다. 다섯째, 신학생 73.6%가 양성평등교육이 신학교 안에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연구 결과를 토대로 본 연구의 의의와 제한점, 추후 연구를 위한 제언을 하였다.

      •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생들의 의식변화

        조윤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2010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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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제1기, 제2기, 제3기의 신학춘추를 통하여 신학생들의 의식의 흐름과 관심, 행동들을 살펴보았다. 신학적 관심으로 제1기에서는 현대신학에 대한 관심을 보았고 제2기에서는 성령운동에 대한 관심, 고등비평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응전 등을, 제3기에서는 민중신학, 토착화 신학, 통일신학 등의 발전을 볼 수 있었다. 목회적 관심은 제1기와 제2기에서 농촌목회에 주로 관심을 보였는데 제3기에 이르러 산업선교 빈민선교로 크게 확대되고 여성과 기타 다양한 목회 분야로 넓어졌다. 사회적 관심, 학생운동은 민주주의 차원에서는 3선 개헌반대에서 시작하여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져 나가고 민족의 차원에서는 한일회담반대에서 시작하여 반외세, 자주적 통일 운동으로 발전해 나갔다. 또한 학내에서 여러 진통 가운데 학원 민주화를 위한 움직임들을 볼 수 있었다. 학교발전과정으로는 자립을 거쳐 기타 연구소, 제반 시설을 갖추어 가며 세계적인 신학교로 발돋움해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다음 연구를 위한 참고로 제4기의 내용을 약술하자면 민중신학에 대한 관심은 저조해지고 생태신학 영성신학 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다. 통일 논의는 소련이 해체되고 기타 요인 등으로 북한 경제가 붕괴되면서 점점 힘을 잃어간다. 95년 희년에 맞추어 잠깐 동안 다시 관심이 상승하지만 88년에 보였던 큰 관심에 미치지는 못한다. 이에 따라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도 바뀌어 간다. 제 3기에 이르러 제1,2기의 적대적 시각이 동지적 시각으로 바뀌었는데 제4기에서는 다시 북한 정권을 적대적인 시각으로 바라봄과 동시에 북한 인민을 연민의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다. 이에 따라 북한의 실상을 바로 알자는 움직임이 있다. 80년대 낭만적 시각에 대한 부정과 동시에 북한의 전제 정치는 세계 정치 경제 변화로 인한 필연적인 변화였다는 소극적인 시각도 보인다. 목회적 관심에서는 농촌목회 및 산업선교에 대한 관심과 소외된 자들에 대한 관심이 크게 줄어든다. 동시에 대형교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도 한다. 특히 장신원보는 신대원 중심이 되다보니 목회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기사를 다루면서 실제적인 목회 현장을 많이 다루게 된다. 현장 탐방이라는 이름으로 대형교회 목회자들을 찾기도 하고 사경회 강사를 인터뷰하는 코너가 정기적으로 실리게 된다. 한 편 정원이 큰 폭으로 늘어 목회자 수급 차질을 빚어 졸업생들 진로 고민이 많이 실리기도 한다. 한 편 90년대로 넘어왔던 과제인, 여성 안수가 실현이 된다. 여성 안수 실현 전후에 여성 안수에 관한 기사들이 집중적으로 실리는데 이를 보아 신학춘추가 이를 위한 여론 선도에 앞장섰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외에 목회적 관심은 시대 변화에 따라 다양하게 변한다. 학생 운동은 사회문제보다 학내 문제에 집중한다. 학교이전반대가 가장 큰 관심사가 된다. 이와 관련해 징계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이에 불복하는 운동들이 전개된다. 학교가 지금의 터를 유지하게 된 데에는 그들의 희생이 컸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언론자율화 문제가 급부상한다. 정부의 시책과 학교 당국의 입장에 따라 신학춘추가 휴간과 복간을 거듭하면서 언론자율화가 화두로 등장한다. 학교 외적인 운동에서는 전국적으로 학생조직이 완성되어가면서 정부와 부딪치게 되는데 결국 97년 한총련 출범식 사태를 맞딱뜨리게 된다. 이후 학생운동은 점점 쇠락하게 된다. 학교는 예배당과 본관 등을 건축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어 간다. 여러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기타 연대 사업 등으로 외연을 넓혀간다. 서론에서 밝혔듯이 신학춘추가 학생들의 모든 생각을 담는 것은 불가능하고 이 연구도 마찬가지로 신학춘추의 모든 기사를 담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다만 지나온 역사의 한 흐름을 읽을 뿐이다. 지금까지 본 신학춘추는 단지 교회와 학교의 틀 안에만 머무르지 않았고 시대와 함께 호흡하며 소외된 이들을 품으려 했다. 그리고 주어진 사실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신학, 나라와 사회에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역사의 관찰자일 뿐 아니라 역사의 참여자였던 것이다. 현재 신학춘추의 기치는 ‘세기와 세대를 잇는 신학춘추’이다. 신학춘추는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겠다.

      • 몰트만 신학과 한국신학

        낙운해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 2011 국내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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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논문의 목적은 위르겐 몰트만과 그의 신학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현대 한국 신학에 대한 특질을 해명하는 데에 있다. 즉, 몰트만 신학과 한국 신학과의 접점에 대해서 조명하고 공통점을 해명하며 한국 신학에 대한 몰트만 신학의 영향에 대해 증명하는 것이다. 논문 전체는 2부로 구성되어 있다. 전반부는 몰트만 신학에 관한 부분이고, 후반부는 한국 신학에 관한 부분이다. 우선 전반부에서는, 첫째로, 한국 신학을 고찰하는데 있어서 ‘왜 몰트만인가’라고 하는 물음을 세워 한국 신학을 몰트만 신학과 함께 고찰하는 방법에 대한 타당성을 제시했다. 둘째로, 같은 시대의 대표적 신학자로서 특히 판넨베르크를 비교 대상으로 했다. 여기서는 판넨베르크 신학과 몰트만 신학과의 차이를 양자의 ‘역사 인식’에 대한 방법에서 찾아내어, 거기로부터 양자의 신학적 성격을 ‘테오리아’(판넨베르크)인가 ‘테오리아와 프락시스의 통합’(몰트만)인가 하는 형태로 선명하게 드러내었다. 셋째로, 초기 몰트만의 정치 신학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특별히 󰡔희망의 신학󰡕(1964)과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1972) 사이에 저술된 논문 “Toward a Political Hermeneutics of the Gospel”(1968)에 주목하며, 그 분석을 통하여 몰트만 신학이 초기부터 이미 실천 지향적인 성격을 매우 강하게 갖고 있었음을 확인했다. 넷째로, 몰트만 신학이 이 세상과 이 세상의 역사 안에서 하나님 나라와 에큐메니칼한 미래를 지향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실천적 신학’이라는 특질을 가진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것은 동시에 우주적인 관점으로부터 창조 세계 전체에 대한 책임을 다하려고 하는 점에서 통전적인 성격을 가짐을 지적했다. 후반부에서 다룬 것은 한국 신학이다. 여기에서는 첫째로, 한국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특별히 민중신학, 조용기 신학, 그리고 통전적 신학을 선택한 이유를 밝혔다. 둘째로, 민중 신학을 다루었다. 여기서는 몰트만이 민중 신학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그것에 대해 확인함과 동시에 민중 신학의 특질을 그들이 시도한 신학의 ‘패러다임 전환’에 초점을 맞추어서 분석했다. 또, 몰트만 신학을 한국에 소개한 사람들에게도 주목하였다. 셋째로, 조용기와 그의 신학에 대해 몰트만과의 관계로부터 음미했다. 여기서는 몰트만과 조용기가 삶과 신앙의 경험 그리고 신학에 관하여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또 조용기 신학에 대한 몰트만의 평가를 정리했다. 그 위에 2005년에 일어난 조용기 신학의 놀라운 전환에 있어 몰트만의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 그 부분에 대해 조명했다. 넷째로, 통전적 신학으로서의 한국 신학에 대해 분석했다. 여기에서는 오순절주의 신학, 복음주의 신학, 에큐메니칼 신학의 통전성에 대해 조사함과 동시에 통전적 신학을 추진하는 대표적 한국 신학자로서 이종성과 김명용을 들었다. 그 위에 이 두 명이 속하는 장신대와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의 신학이 가지는 통전성에 대해 구체적인 자료들을 통하여 분석하며, 거기에 보이는 몰트만신학의 영향을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논문 전체에 대한 요약을 통해 몰트만 신학과 한국 신학을 재평가하고, 양자의 공통점이 그 통전성으로 집약됨을 지적한 다음에, 한국 신학으로서의 통전적 신학의 미래 과제를 제시했다.

      •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에 나타난 장 칼뱅의 교회의 본질

        최유진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2011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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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논문은 개혁교회 신앙고백에 나타난 장 칼뱅의 교회의 본질을 살피는데 있다. 다시 말하면, 논문의 목적에 부합한 두 가지 키워드인 개혁교회 신앙고백과 장 칼뱅의 교회론의 연관성을 살피려는 것이다. 그래서 개혁교회가 칼뱅주의 혹은 제네바 교회란 명칭을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개혁교회 신앙고백들이 교회의 사람 칼뱅의 영향 아래 있었다는 것을 이 논문을 통해 밝히려고 했다. 먼저, 칼뱅의 교회의 본질을 살피기 위해 택한 책이 바로 1559년의 칼뱅의 기독교 강요 최종판이다. 이는 칼뱅의 교회론은 다른 교리와 달리 그 전체가 『기독교 강요』속에서 모두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칼뱅의 교회의 본질은 신자들의 어머니로서의 교회,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불가시적 교회와 가시적 교회이다. 신자의 어머니인 교회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신자들을 품어 주고 용서하며 가르치고 양육하는 교회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갖는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 따라서 지체된 성도들은 서로 교통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온전한 몸을 이루어 가게 된다. 이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거룩해야 한다. 따라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인 불가시적 교회와 사악한 자들을 포함하는 가시적 교회로 구별한다. 이것은 두 개의 교회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있는 가시적 교회의 불완전성에 비판적으로 적용하기 위해 불가시적 교회를 대립시키는 것이다. 비록 교회가 이처럼 불완전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 그리스도의 온전한 공동체를 추구해 간다. 이처럼 이 세 가지의 교회의 본질은 유기체처럼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다. 모든 개혁교회 신앙고백들을 살펴보기보다 크게 3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았는데, 이는 종교개혁기 신앙고백, 20세기 신앙고백, 한국교회의 신앙고백이다. 앞의 둘은 시대별로 살펴 본 것이라면, 나머지 하나는 우리의 신앙의 자리가 한국교회이기 때문에 살펴보았다. 종교 개혁기의 개혁교회 신앙고백들 중에 칼뱅의 직·간접 영향 아래서 저술 된, 프랑스의 갈리칸 신앙고백(Confessio Galicana, 1559), 스코틀랜드 신앙고백(The Scottish Confession of Faith, 1560), 네델란드 신앙고백(Confessio Belgica, 1561), 제 2 스위스 신앙고백(Confessio Helvetica Posterior, 1562)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The Heidelberg Catechism, 1563)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1647)을 살펴보았다. 이 시기의 신앙고백들은 대부분 칼뱅의 교회의 3가지 본질들(신자들의 어머니로서의 교회,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불가시적 교회와 가시적 교회)이 각 문서에 깊이 녹아 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20세기 대표적인 신앙고백인 바르멘 신학선언(1934)을 살펴보았다. 이 바르멘 신학선언은 개혁교회의 신학 전통을 살린 신앙고백이라고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칼뱅의 교회의 3가지의 본질들 중에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강하게 들러나는 반면, 신자들의 어머니로서 교회가 약하게 들러난다. 이는 칼 바르트를 비롯한 고백교회가 강조했던 것이 칼뱅 등의 개혁신학 전통의 창조주와 피조물의 무한한 질적 차이를 강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 신앙고백은 그리스도 이외에 히틀러의 나치당의 이념이나 독일 국가교회도 결코 절대적인 충성을 받을 만한 절대적인 가치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본 논문에서 살펴본 한국 교회의 신앙고백서들은 총 3개이다. 한국 장로교회가 분열되기 전의 고백서이자, 최초의 한국 교회의 신앙고백인 한국장로교회의 12신조(1907)와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측의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서(1986) 그리고 같은 교단의 21세기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서(2001)이다. 한국교회 12신조(1907)에 나타난 칼뱅의 교회의 본질은 약하다. 왜냐하면 칼뱅의 교회론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가시적 교회와 가시적 교회에 관한 언급조차 없다. 이는 이 고백이 매우 간략한 요약을 한 신앙고백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칼뱅신학의 교회론에 대한 연구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측의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서(1986)를 살펴보면, 전체적으로 칼뱅의 교회의 본질에 대해 아주 자세하고도 균형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21세기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2001)은 에큐메니컬 신학을 기반으로 한 신앙고백이다. 이 고백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언급을 하나, 신도의 어머니로서의 교회는 약하게, 불가시적 교회와 가시적 교회는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

      • 교단 선교정책과 선교행정조직 간의 협력에 대한 연구 : 대한예수교장로회(PCK)를 중심으로

        김현두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 2008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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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이 행하시는 새로운 일이란 무엇인가? 수백 년 전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새로운 일을 행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뒤를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앞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했다.(사43:19) 그 때 이후로 하나님은 많은 새로운 일을 행하셨고, 지금도 여전히 진행하신다. 이것은 특히 세계복음화에 관련되는 진리이다. 한국교회 선교 역사가 100년, 1세기를 지내오는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전략이 없는 무모한 선교전쟁을 치러왔다. 마치 6.25 전쟁 때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비유할 만한 무조건 보내기 인해전술 선교에만 급급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어느 교단이 선교사를 몇 명 파송했다. 어느 교회가 선교사를 몇 명 파송했다.”는 통계 숫자가 마치 교단이나 교회의 교세와 정비례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다행히 고무적인 것은 한국교회나 교단들이 21세기의 선교에 대하여 새로운 각성을 가지면서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그동안의 선교역사를 재평가하고 선교현장에서 실행되었던 선교정책과 전략들을 수집, 분석하여 이제는 보다 체계적인 선교 정책들을 강구하고자 하는 움직임들이 각 교단별로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한국교회의 선교정책이나 선교신학의 빈곤을 누구의 탓으로 비난하는 것을 자제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하고 있는 미전도 종족과 형식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주위에 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3장 13-14절에서 “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했다. 우리는 지난 선교역사를 통해서 지금의 선교를 반성하고 앞으로 다가오는 1세기를 준비하는 해야 할 것이다. 우리교단은 지난 2006년 6월 4일부터 7월3일까지 약 한 달 동안 선교사 파송 100주년 기념행사로 “2006 세계선교대회”를 열었었다. 이 대회를 통하여 지난날을 반성하고 다가올 선교 100년을 맞이하는 다짐을 했다. 그리고 교단 선교사 100명이 “비전선언문”을 발표를 했는데, 그 비전 선언문은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120여 년 전, 흑암과도 같았던 척박한 이 땅에 알렌과 언더우드 선교사를 포함한 많은 선교사들을 보내사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리며 주께 받은 은혜에 선교 헌신으로 보답할 것을 다짐한다. 1. 우리는 교단 선교사 파송100년을 맞이하여 교회의 본질인 선교를 재인식하고, 선교활성화 및 동력화 운동을 통하여 한국교회부흥을 위한 초석이 될 것을 다짐한다. 1. 우리는 땅 끝까지 선교자원을 확산하여 우리에게 맡겨주신 선교과업의 성취를 위하여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한다. 1. 우리는 80개국, 900여명의 선교사를 파송한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한국교회 10만명 선교정병파송계획에 참여하여 2030년까지 세례교인 300명당 선교사 1인 파송목표달성을 위하여 구체적으로 행동할 것을 다짐한다. 1. 우리는 지역교회가 세계선교의 모판임을 인식하고, 이 비전을 성취하기 위하여 교단교회 모두가 선교에 적극 동참케 함에 총력을 기울일 것을 다짐한다. 1. 우리는 선교창구 일원화 정책을 통해 교회, 선교현장의 현지선교회, 총회가 하나 되어 보다 효과작인 세계선교 사역 수행에 총력을 다 할 것을 다짐한다. 1. 우리는 ‘2006 세계선교대회’를 기점으로 새로운 100년을 향한 ‘바른선교운동’의 기틀확립을 위하여 적극 참여할 것을 다짐한다. 이 비전선언문처럼, 우리는 땅 끝까지 선교자원을 확산하여 우리에게 맡겨주신 선교과업의 성취를 위해서는 우리의 헌신과 선교신학, 선교정책, 그리고 선교행정조직들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세워져야 할 것이다. 그동안 대한예수교장로회(PCK) 교단은 세계선교를 하는 과정에서 많은 문제들과 가지고 100년을 달려 왔다. 선교의 열정은 이러한 문제들의 장애를 넘어서 선교사 1,000명을 파송했다는 기록을 갱신했다. 그러나 지금의 교단의 선교는 방향 감각을 상실한 채 급류를 타고 떠내려가는 보트와 같다. 대한예수교장로회(PCK)는 소위 ‘장자교단’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가지고 한국교회에서 허세를 부려왔다. 그 허세는 세계선교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본 교단세계선교부는 100년 선교의 역사에 선교사 1,000명 파송을 자랑하면서 2030년까지 15,552명을 파송하기 위해서 뒤를 돌아보지 않고 황소처럼 달려가고 있다. 교단에 속해 있는 교회도 마찬가지로, 각 교회마다 우리는 ‘선교사를 몇 명 파송했다.’ ‘선교사를 몇 명을 후원하고 있다.’를 자랑하듯이 교회 주보에 싣고 있지만, 선교사들을 위한 정책이나 돌봄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한국교회가 선교를 향한 열정이 어떤 교회보다 높다고 하지만 그 선교의 열심은 누구를 위한 활동인지 선교의 대상과 목적이 분명하지 못하다. 종종 선교에 있어서 인간의 열정과 하나님의 활동을 혼동하곤 한다. 하나님의 일에 열심을 갖는 것은 중요한 것 이지만 그 동기와 결과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것인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선교에 있어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열정이다. 그리고 외적으로 드러나는 통계적 숫자, 즉 가시적 업적이다. 그리고 이것이 적지 않게 선교의 열정의 동기로 작용을 한다. 마치 한국의 경제가 미친 듯이 달려가다가 외환부족으로 인하여 채무지불유예(모라토리움) 선언을 할 사태에 이르게 되자, 한국정부는 1997년 12월 IMF에 구제 금융을 신청하여, 재정운영을 IMF의 간섭 아래서 집행하는 상황에 놓였던 것처럼, 한국의 세계선교도 선교정책의 IMF를 맞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교단선교의 현실이 거품으로 가득하고, 몸집만 거대하지만 그 속에 상처와 고름이 가득하다. 한국교회의 각 교단의 선교행정담당자들이 이를 인정하고 있다. 침례교 강순관은 한국교회의 선교가 사람 파송하고 돈만 보내는 일에 치중을 하고 있기 때문에 선교사역이 표류하는 길을 걷고 있다고 말했고, 이시영은 한국교회 해외선교정책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다각적인 선교전략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이광순은 아시아가 선교의 주도세력으로 부상하는 21세기의 현 시점에서 한국교회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선교방향을 새로이 설정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러한 선교정책의 부재의 내면에는 한국교회의 선교신학이 일조를 했다고 생각을 한다. 본 교단의 선교신학이 1996년에 작성되어 12년이 지났음에도 선교신학을 새롭게 개정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교단에는 없어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선교신학은 변화되어가는 세계의 흐름에 대처해나갈 선교정책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는데 늦장을 부리면서, 오늘의 선교정책을 탓하고 있는 것 같다. 반대로 선교정책은 선교신학을 외면하면서 고비 풀린 망아지처럼 광야를 달리고 있는 것 같다. 필자는 선교를 가정으로 비유하여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선교가 한 가정이라면, 아버지의 역할이 선교신학이고, 어머니의 역할이 선교정책이며 그 자녀들은 선교현장이요 선교사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정은 가장인 아버지가 바로 서서 가족이 가야할 길을 제시해주어야 하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자녀들을 양육해야 행복한 가정이 될 것이다. 부모의 사랑이 자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선교신학과 선교정책은 선교현장과 선교사들에게 때로는 울타리가 되며, 때로는 자부심이 되는 것이다. 결손가정의 아이들이 바르게 성장할 수 없는 것처럼, 선교신학이 부재되고, 선교정책은 방향 없이 서로 다른 길을 간다면, 선교현장은 결손가정의 아이들이 될 것을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제는 우리의 선교신학과 선교정책이 손을 잡고 21세기의 세계선교를 위해서 함께 가야 할 것이다. 선교신학과 선교정책 그리고 선교현장이 서로 어깨동무를 하여 하나님의 선교를 땅 끝까지,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 날까지 이루어 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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