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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하워드 요더의 신학적 윤리에 관한 연구 : 한국교회의 정치 참여에 대한 반성의 관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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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T11583211

      • 저자
      • 발행사항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 2008

      • 학위논문사항
      • 발행연도

        2008

      • 작성언어

        한국어

      • DDC

        261.7 판사항(21)

      • 발행국(도시)

        서울

      • 형태사항

        iii, 134 p.; 30cm

      • 일반주기명

        참고문헌: p.127-134

      • 소장기관
        • 장로회신학대학교 도서관 소장기관정보
        • 호남신학대학교 도서관 소장기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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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필자는 지금까지 재세례파 혹은 메노나이트의 신학과 윤리를 재탐구하고 기독교 평화주의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존 하워드 요더의 신학적 윤리 사상과 윤리적 방법들을 고찰하였고 그것...

      필자는 지금까지 재세례파 혹은 메노나이트의 신학과 윤리를 재탐구하고 기독교 평화주의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존 하워드 요더의 신학적 윤리 사상과 윤리적 방법들을 고찰하였고 그것을 한국 교회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 지 다루어 보았다. 각 장별 주요한 내용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Ⅱ장에서는 요더의 생애와 배경에 대한 연구에 집중하였다. 존 하워드 요더는 1927년 오하이오 주 스미스빌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센 대학에 교수 벤더의 영향을 많이 받아 그의 신학적 정체성을 발견하였다. 그는 유럽에서 다양한 학자들에게 수학하는데, 그 중에서 쿨만과 바르트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그 밖에도 ‘컨선’ 그룹을 통해 메노나이트 전통에 관하여 고민하였고, NAE, NCC는 물론 WCC 및 각종 회의와 컨퍼런스를 통해 다양한 주제로 신학적 담론의 현장에 함께 했다. 그는 주로, 메노나이트 성서신학대학원, 고센 성서신학대학원, 그리고 노틀담 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하면서 메노나이트 연구소 부위원장, 메노나이트 역사학회의 이사, 기독교윤리학회 회장, 종교 윤리학 저널 편집위원, 메노나이트 계간 평론, 체류자들의 객원 편집자직등 다양한 위치에서 영향력을 나타냈다. 그는 결국 1997년 12월 30일 그의 생일 다음날 그가 가르치던 노틀담 대학에서 심장 질환으로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요더는 『예수의 정치학』으로 대표되는 그의 사상을 통해 세속문화에서 그 기초를 찾는 대부분의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의 교회 윤리학이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 윤리학적 성격을 잃어버린 것으로 비판하면서, 참된 기독교 윤리학이란 세속문화에 근거를 두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치적이었던 실제적 삶과 가르침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요더를 구성하는 배경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 요더에게 있어 메노나이트 신학은 깊은 연관성을 가진다. 그것은 신앙의 외적인 표현으로서의 도덕적 삶을 매우 강조하며, 신학과 윤리의 통일성을 지향한다. 둘째, 요더에게 있어서 또한 중요한 배경은 복음주의인데, 그는 사상적인 측면에서 복음주의 전통과 직간접적으로 교류하였으며, 때로는 실천적인 복음 전도자로 때로는 복음주의의 대변자로 때로는 복음주의의 비평가로 그들의 세계와 대화하였다. 셋째, 요더에게 있어서 마지막 주된 관심은 에큐메니즘(Catholic Ecumenism)이었다. 요더는 기존의 에큐메니칼적 대화를 비판하는 견지에서 대안적인 에큐메니즘을 주장한다. 그것은 분파주의로 소외되어온 그의 메노나이트 신학을 주류 신학의 지도 안에 그려 넣으려는 노력의 일환이었으며 실제로 그는 노틀담에서의 수많은 세미나와 WCC와의 관계를 통해 에큐메니칼 운동에 앞장서려고 노력하였다.
      Ⅲ장에서는 요더의 신학적 윤리의 내용으로 세 가지를 다루었다.
      첫째는, 기독론으로써 요더는 예수 그리스도를 실제적 가르침이나 윤리적 기준에서 제외하고 단지 우주적 그리스도로만 묘사하는 기독론은 우주론적 기독론이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우주론적 경향은 ‘영지주의 유혹’에 가깝고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결론적으로, 기독론은 ‘예수론(Jesusology)’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요더에 의하면, 예수는 도덕주의자도 아니었으며, 영적 삶만을 가르친 사람도, 단지 희생 제사를 준비하던 어린 양도, 그의 신성이 우리로 하여금 그의 인성을 무시하도록 만드는 그런 존재도 아니다. 예수의 모든 사역은 단 한가지 의미, 즉 정치적인 함의를 가진다. 요더는 예수의 공적 사역의 근간을 이루는 요소로서 인간 예수가 거듭하여 직면했던 유일한 유혹들은 모두 배제되었다고 말한다. 즉, 폭력적 방법들을 활용하여 정당한 혁명을 도모함으로써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려는 유혹, 사회적 도피로서의 유혹, 기득권 체제에 동조하면서 보수적으로 사회 책임을 행사하려는 사두개파식의 유혹에 대한 예수의 삼중적 거부(threefold rejection)가 의미하는 것은 예수의 삶의 정치적 관련성이 궁극적으로 향하는 지점, 바로 십자가이다.
      둘째는, 요더는 교회론으로써 그는 교회라는 단어 ‘에클레시아’가 공동체의 일을 다루기 위한 정치적인 모임을 의미했다고 설명한다. 오늘날 현대 용어를 빌리면, 회의, 의회, 시 위원회와도 같다. 따라서 교회는 단지 신자들의 모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들이 주님이신 예수로부터 배운 것을 실천하고자 하는 정치적 모임이다. 또한 이것은 모든 사람의 행동이 어떠해야 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소수 공동체의 행동에 관한 것이다. 이 소수 집단의 윤리적 태도는 세속적 삶과의 분리가 아니라 세속적인 삶의 가치와 패턴을 본받지 않고 살아가려고 하는 자들의 독특한 삶의 모습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요더에 의하면, 이러한 ‘교회의 타자성’은 연약함이 아니라 강함에 기반을 둔 태도다. 세상을 향한 교회와 제자들의 사명은 소수 공동체로써 세상과 다르게 살아갈 때 그 선교적인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사회의 모든 구조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복음으로 무장되어 있는 성도 공동체’라는 구조로만 가능하다.
      셋째는 종말론으로써, 요더는 인간 역사를 근본적으로 반대되는 두 개의 시대들이 서로 공존하는 것으로 특징짓는다. 즉, 현 시대는 그리스도 이전의 죄에 의해 특징 지워지는 인간이 중심이 되는 시대이고 반면에 다가올 시대는 그리스도 안에서 궁극성을 찾는 그러한 구속적 실재가 펼쳐지는 역사의 시대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새로운 시대를 연 창시자로서의 예수가 하나님 앞에서 순종의 모델이 되신다. 반역적 권세를 원칙적으로 패배시키고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신 것은 바로 예수의 십자가였듯이, 기독교인들은 십자가로 인도했던 예수의 무저항적 사랑의 사회적 자세를 본받아야 한다.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교회의 역사의 가장 큰 실패는 바로 콘스탄틴 대제 이후의 교회의 변화이다. 콘스탄틴 시대에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로, 교회는 신약성경을 통하여 주어진 그리스도의 모델을 무시하거나 중시하지 아니해 왔으며 또는 윤리적인 삶의 모델로서의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려했던 초대교회의 윤리적 모델을 버렸다. 콘스탄틴주의는 ‘이미’와 ‘아직 아님’의 이중성을 제거함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했던 그리스도에 대한 모방을 요구하는 기독교인의 삶을 타락시켰으며 기독교윤리를 국가에 봉사하도록 만들게 하였다.
      Ⅳ장에서는 주로 요더의 윤리의 방법론을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다루었는데 첫째는 기독교 공동체의 확산이고 둘째는 기독교 평화주의이다.
      첫째, 요더에 의하면 십자가는 정치적 예수가 세상의 권세에 굴복하지 아니하고, 무력함으로 거두어낸 어린 양의 승리의 상징이다. 그것은 제자도를 소유하여,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패턴을 충실히 따라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윤리의 기준이 된다. 그런데, 어린 양이 죽임을 당하는 것의 의미, 그리고 그 후 우리가 그를 두고 “권세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라고 찬송하는 것의 의미는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 아래 처형당하신 사건이 품고 있는 의미와 나눠질 수 없다. 사실상 역사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칼이 아니라 십자가이며, 무자비한 힘이 아니라 고난이다. 이러한 예수의 모습을 따른다는 것은 고통만 있고 패배만 있을 것 같지만, 그러나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어린 양의 종국적 승리에 참여하게 되는 승리적 고통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현 세상 질서의 미래적 모습이다. 교회는 현 세상에서 종말론적인 질서를 보여주고 있는 유일한 장소이고 증거자들의 공동체인데 이러한 교회는 우리는 ‘신자들의 교회(Believers' Church)’ 혹은 ‘자유 교회(Free Church)’라고 명명한다. 자유 교회가 이 시대에 대안적인 전망을 줄 수 있는데, 그들은 신자들의 공동체와 다른 공동체들, 즉 세속적인 사회적 실재에서의 계약 공동체와 그것이 존재하는 한 가운데 안에 있는 세속적인 사회적 실재 사이의 구별을 강조하는 관점을 가지기 때문이다.
      둘째, 인간애적 평화주의와 실용주의적 평화주의와는 달리 기독교적 평화주의는 철저히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따라야 하기 때문에 폭력과 전쟁을 받아 들일 수 없다는 주장이다. 4세기 전반까지의 교회의 지배적인 태도는 평화주의였다는 것이 다수의 교회사가들의 견해다. 전쟁은 하나님의 사랑의 의지에 대한 인간의 구조화된 타락의 분명한 상징이다. 물론, 모든 경우에 폭력의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도 자신의 합법적인 모든 목적들을 얻을 수 있다고 보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세상의 폭력과 무력과 권세에 대해서 칼로 맞서지 아니하시고 권세 없는 자의 모습을 취하신 것 같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제자도는 악의 힘에 악과 폭력으로 대항하지 말고 무력을 포기하는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하는데, 이것을 일컬어 혁명적인 복종(Revolutionary Subordination)”이라고 한다. 한편 요더는 누가가 기록하고 있는 물질과 소유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은 구약성경의 희년에 대한 완성으로 해석한다. “네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그것으로 구제하라”라는 예수의 계명은 단순한 성화를 위한 조언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실행되어야 할 희년의 율례라는 것이다. 이것은 네 가지의 요구를 포함하고 있는데 그것은 땅의 휴경, 빚의 탕감, 노예의 해방, 가족 재산의 환원이라는 측면에 내포되어 있는 암시들이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팔레스타인 땅에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실제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으로서 일어났으며, 그러한 사고는 예수 당시에 희년 선포까지도 구체성을 가진 것으로 이해되어지게 하였다.
      Ⅴ장에서는 요더의 입장을 긍정적, 부정적인 관점에서 평가하고 그것을 한국 교회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에 관하여 고찰하였다.
      먼저, 긍정적인 관점은 다음과 같은데, 첫째, 요더의 신학과 윤리의 공헌은 당시의 주류 기독교 윤리와는 다른, 새로운 개념으로서 바르트의 영향을 받아 예수의 삶과 말씀을 실천가능한 윤리적 규범으로 설정한 데 있다. 헤이스(Hays)에 의하면 요더는 1970년대 초반 성경 학계에서 접할 수 있는 최선의 통찰들을 세밀하게 활용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둘째, 요더는 니버의 고전적인 유형론에 날카로운 비판을 가함으로서 교회의 사회적 책임과 사회참여 같은 중요한 주제에 있어서의 획일적인 이해에 새로운 통찰을 제공하였다.(Hauerwas, McClendon) 셋째, 요더의 공헌은 기독교윤리에 있어서 교회 공동체의 중요성을 일관성 있게 강조한 점이다.(Hauerwas) 넷째, 요더의 신학의 공헌은 폭력과 전쟁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서 예수의 제자도로서 비폭력, 무저항의 사랑을 강조한 점이다.(Hays)
      또한 요더의 사상에는 부정적 관점이 나타나는데, 첫째, 요더가 진지하게 다루던 성서해석에 있어서 ‘예수의 정치학’에서 누가복음만을 주석의 대상으로 삼는 것에 첫 위험의 여지가 내포된다.(Hays) 또한 그는 ‘에클레시아’의 의미를 자의적으로 해석함으로 인해 그것이 가지고 있는 종말론적인 함의를 무시하였다.(신원하)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그가 지신 십자가를 일관되게 정치적인 위치에서만 이해하려는 그의 기독론에 다른 한계를 가지고 있다.(Mott, Sider) 셋째, 그가 사회의 관계에 있어서 구별된 공동체적 삶을 강조하는 선교적 영향력에 대한 부정적 관점이다. (R. Niebuhr), 넷째, 그가 가지고 있는 권력과 국가의 모든 형태를 단순히 강제나 폭력적 조정으로 환원시키는 문제점이 있다.(Hauerwas, Lemasters), 다섯째, 비폭력 무저항의 평화주의의 문제점이다. 요더의 사회윤리의 심각한 문제는 현실에서 무죄한 희생자들이 당하게 되는 현재적 고통 혹은 죽음을 묵과하게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Wogaman, Ramsey, Bonino, Dussel, Bennett, Hauerwas)
      이와 같이 요더의 생애를 바탕으로 신학적 윤리를 소개하고, 그가 핵심적인 위치에서 주장하는 기독교 공동체의 확산과 기독교 평화주의라는 방법은 긍정적으로 또는 부정적으로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지에 관하여 다루었다. 또한 이러한 것을 종합하여 보았을 때, 요더의 사상은 한국 교회의 정치 참여 문제에 있어서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한국 교회는 정치 참여의 문제에 있어서 보수와 진보로 대표되는 상이한 방식으로 관련을 맺어 왔는데, 주목할 것은 그 상이성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으로 한국 교회는 정부와 사회 참여 문제에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이며, 때로는 이러한 관련성이 지나치고 왜곡되어 교회의 정체성을 잃게 되는 현상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요더에 의하면 이러한 현상을 콘스탄틴주의라고 명명하는데, 즉 교회가 세상의 체계와 동일시되어 가는 것이다. 이러한 콘스탄틴주의 사상 근저에는 루터의 ‘두 왕국론’의 영향이 내재해 있는데, 틸리케는 이 ‘두 왕국’에 있어서 나타나는 문제를 세 가지, 이중윤리의 위험성, 세속화의 위험성, 세속권세에 대한 묵종주의 경향성으로 분석했다. 그런데, 일부 한국 교회에서도 이러한 위험성의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 교회를 향한 요더의 신학의 적용은 다음과 같다. 세 가지 관점에서 말하자면, 첫째, 한국교회에 있어서 요더의 윤리가 적용되는 영역은 교회 내부적 체계에 우선한다. ‘교회를 교회답게 하라(Let the church be the church)’는 요더의 주장은 교회와 사회 관계의 문제를 다루는 방법론적 차이들을 간주하더라도, 여전히 한국 교회에 절실한 울림으로 여겨진다. 둘째, 요더 윤리의 실천은 일치와 연합을 위한 에큐메니칼 운동의 활성화이다. 교회의 연합과 일치는 한 하나님을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당위적인 신앙의 실천으로 이해해야 한다. 셋째, 한국 교회는 전보다 더 진지하고 심도있게 평화주의와 정당전쟁 이론에 관하여 고찰하여야 한다.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엄청난 재앙이 도래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세계를 망가뜨리는 참혹한 비극이 나타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지 한반도 내에서의 긴장이나 전쟁의 위험을 제거해야 하며, 평화를 유지해야 하며, 더 나아가 두 조국으로 나뉜 민족이 다시 하나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궁극적으로 책임 윤리의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피조물들을 나의 문제로 반응하게 하는 고백적인 해석이요 자기 성찰적인 실천이며, 이러한 인식이야말로 남과 북의 구성원들의 여러 가지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사회적인 연대를 이루어 내는 동기를 부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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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인류 역사 속에서 전쟁과 분쟁은 끊임없이 지속되어 왔다. 게다가, 한반도는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분단국가이며, 남과 북의 관계는 냉전과 우호를 반복하며 우리에게 직접적인 긴장감을 형...

      인류 역사 속에서 전쟁과 분쟁은 끊임없이 지속되어 왔다. 게다가, 한반도는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분단국가이며, 남과 북의 관계는 냉전과 우호를 반복하며 우리에게 직접적인 긴장감을 형성케 한다. 그러나 어떤 형태든지 한반도에서의 전쟁과 분쟁을 정당화할 만한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한반도에서의 원칙이라면 그러한 원칙은 세계 모든 지역에서도 동일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대다수의 인류는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갈망한다.
      20세기 기독교 평화주의의 선구자로 여겨지는 요더는 이러한 현상들이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평화주의가 아닌 정당전쟁론을 취함으로 초래된 결과라고 분석한다. 그는 평화주의라는 주제를 기독교윤리학의 영역에 소개한 가장 대표적인 신학자이다. 또한 그는 중대한 논란을 일으켰는데, 그것은 당시 에른스트 트뢸취부터 리처드 니버까지 내려오던 주류 신학 영역에 정면으로 도전했기 때문이다. 그는 교회와 사회의 관계에 관한 유형론적 연구와 철학적인 방법으로 윤리적인 규범을 설정했던 기존의 기독교윤리학의 방법론을 비판하면서 오직 성서에서 발견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을 기독교 윤리의 규준으로 설정하였다.
      이러한 사상을 담은 그의 대표작『예수의 정치학(The Politics of Jesus)』은 20세기 기독교윤리학과 신학 분야에서 가장 유명한 저서 중 하나가 되었다. 물론, 그가 급진적인 메노나이트 신학자였다는 특수성은 보편적인 신학과 기독교윤리학의 영역에서 우리가 그를 다루기에 주저하게 만드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무성의하게 분파주의라고 규정하기 전에 혹은 반대로 성급하게 주류 신학을 비평하기 전에, 우리는 진지하게 요더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했던 내용이 무엇이며, 논쟁 속에서도 여전히 빛나고 있는 그의 사상을 지금 이 자리에서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통찰들은 20세기의 미국적인 상황에서 뿐만 아니라,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지금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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