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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리교 생태유아교육 대안 탐색 : "Waldorf 생태유아교육학과의 대화를 중심으로"

        황보현 감리교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2008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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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연구자는 몇 가지의 질문 제기를 통해서 논문의 주제에 관심하였다. ‘하나님께 서 창조하신 피조세계가 신음하며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창조의 영성을 가진 우리 감리교인들이 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실천 방안 마련에는 무관심할까?’, ‘왜 침 묵하고 있을까?’ 이에 대해 ‘세상의 ‘편리성의 원리’에 익숙해지고, 영성이 무뎌졌기 때문이라’고 답할 수 있다. 즉,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토대로 인간의 편리를 위해 자 연을 개발해도 된다는 의식이 자리하게 된 것이다. 이는 바로 인간에게 있던 본연의 “생태적 영성”이 “파괴적 영성”으로 변질되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우리 는 생태적 영성의 회복을 위해 감리교 웨슬리 신학의 회심의 신학, 코이노니아의 신 학, 성령 체험의 신학을 살피고, 그 실천적 대안으로 발도르프 생태유아교육학을 살 폈다. 이들의 만남을 통해서 감리교 생태유아교육학이 전인적이고 생태학적 패러다 임의 전환을 이루도록 해야 할 것이다. Ⅰ장에서는 20세기 말부터 극심한 생태적 질서의 파괴와 생태계 위기의 문제가 전개된 상황의 원인 즉, 이원론적인 세계관과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 과학기술문명, 대량생산과 소비 체계, 불평등한 국제관계, 국내 정치구조와 인성구조, 교육제도와 교육 내용 등의 다양한 요인들이 있음을 소개하였다. 다양한 요인들 중에서, 우리는 교육제도와 교육의 내용의 부분에 집중하여 생명의 질서를 회복할 수 있는 살림의 신학, 교육실천, 생태학적 패러다임의 전환을 목적으로 내용을 전개함을 밝혔다. Ⅱ장에서는 감리교 생태유아교육의 신앙의 모태가 되는 웨슬리의 사상과 감리교 신학, 한국 감리교신학과 기독교교육의 역사적 고찰을 하였다. 또한, 생태적 위기와 위협의 시대에 감리교 유아교육의 방향성이 어떠한지 살펴보기 위해 7군데 교회를 선정하여 -아현, 마포중앙, 낙원, 베다니, 삼양, 종교, 기쁜 교회 등- 실태를 조사하 였다. 감리교신학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통해 회심의 신학, 코이노니아 신학, 성령 체험의 신학에서 생태적 영성의 단서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감리교 기독교교 육의 실제적인 현장에서는 생태적 영성을 키울 수 있는 실천적인 교육의 내용과 방 법이 없음을 보게 되었다. Ⅲ장에서는 20세기 초엽부터 지금까지 범세계적인 영향력을 끼치며 발전, 연구되 고 있는 루돌프 슈타이너의 인지학적 인간 이해와 구체적 실천으로써의 독일의 발 도르프 생태유아교육을 살펴보았다. 또한, 현재 한국의 발도르프 유아교육 기관 중 에 서남 재단에 소속되어 있는 서울의 “서남발도르프어린이집”을 소개하였다. 실제 적으로 인지학적 인간 이해가 어떻게 드러나며, 발도르프 생태유아교육의 모습과 비 교해볼 때 어떠한 의의가 있는지 살펴보았다. Ⅳ장에서는 감리교 생태유아교육이 발전해야 할 방향성을 네 가지의 대안을 제시 하며 밝혔다. 발달론적 인간 이해에 대한 관점을 가지고 유아를 바라보고, 삶의 패 턴에 맞는 교육의 일정을 개발하자고 하였다. 또한, 유아에게 내재되어 있는 자유를 인정해주는 교육을 지향해야 하며, 생태적인 환경 구성과 환경에 대한 철학을 가져 야 함을 밝혔다. 이 대부분은 발도르프 생태유아교육학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기 때 문에 꾸준한 대화와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유아교육은 개인의 우열의 순서를 바꾸어 놓을 뿐만 아니라 인종 간 또는 국민 간의 우열의 순서를 바꾸어놓 을 수 있는 힘122)을 지니고 있으므로, 감리 교 기독교교육 안에서 유아교육을 재조명하고, 특별히 이 시대가 생태적 위기와 위 협으로부터 자유해질 수 있도록 하는 생태학적 패러다임의 유아교육이 필요하다. 유 아교육에서 생태학적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것은 거창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 다. 자연을 바라보는 눈과 사유하는 방식이 종래의 것과 다른 ‘생명의 고귀함’을 알 게 하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만이 아니라, 자연, 이웃, 모든 피조물의 생명이 고귀하 고 특별하다는 것을 알게 하면 된다. 또한, 감리교 생태유아교육은 회심, 코이노니아, 성령 체험에서 생태적 영성의 단 서를 가지고 있는 감리교 신학을 중심으로 실천적인 범위 안에서 21세기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자연과 인간의 관계 회복을 꾀해야 한다. 다양한 교육적 방법과 원리, 교육목적과 목표를 제시하고 교육의 내용을 구성하며, 현실의 문제 특 히, 생태계의 위협과 더불어 생겨나는 많은 문제, 인간의 물질화 등에 정면 승부할 수 있는 생태적 영성의 회복과 전인적이고 생태적인 패러다임에 근거한 신학과 교 육의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우선은 감리교가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에 맞는 생태적인 영성을 회복하고, 자연과 인간,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에 대한 새로운 코이노니아적 관계를 형성해야 한 다. 이러한 감리교 신학에 대한 재해석은 성서신학, 역사신학에서 더 구체적으로 제 시되어야 하겠다. 우리는 발도르프 생태유아교육의 교육원리인 리듬생활, 자유의 원 리, 생태적 원리의 내용을 감리교 생태유아교육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고민해 보아야 하고, 감리교 생태유아교육이 바르게 정립될 수 있도록 지속적인 연구가 필 요하겠다. 또한, 이러한 감리교 생태유아교육이 발도르프 생태유아교육을 넘어서 전 우주적인 생태적 영성을 회복하는 감리교 기독교교육으로 자리 잡기를 바란다.

      • 유연한 예배공간 구성에 관한 연구

        양희성 감리교신학대학교 2016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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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임스 화이트는 예배 공동체의 교회 설계나 공간 배열에 대해 책임을 진 사람은 예배 공동체에 새로운 생명을 줄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한 교회를 설계하는 것이 교회 갱신을 하게 하는 촉매제가 될 수 있음은 분명하다. 예배공간으로 하여금 기독교 예배의 형식을 반영할 뿐 아니라 동시에 기독교 예배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이 논문은 예배공간을 예배의 특성에 따라 유연적으로 구성하고, 필요에 따라 예술물과 상징을 사용함으로 예배의 활력을 가져오는 것을 목적으로 둔다. 기독교 예배공간에 단절되었던 예술의 영역을 예배공간으로 가지고 옴으로 현대 기독교 예배공간에 맞춰 재해석하는 것이다. 단순히 예배공간의 구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정체되어 있는 예배공간에 활력을 불어넣음으로, 예배의 갱신까지 다다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이 연구를 통해 기대할 수 있는 바이다.

      • 팬데믹 상황에서의 온라인 예배 연구 : 감리교신학대학교 [나눔의 예전학회]의 사례를 중심으로

        최영록 감리교신학대학교 대학원 2022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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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논문의 주제는 팬데믹 상황에서의 온라인 예배 연구이다. 이름에서도 드러나듯 굉장히 동시대적인 주제이다. 코로나19라는 사상 유례없는 펜데믹으로 인해 전 세계의 정치, 사회, 경제 등 모든 분야에 큰 변화의 물결이 드리우게 되었다. 이천 년 역사 동안 수많은 변화를 겪어왔던 기독교 예배도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피해갈 수 없었다. 예배는 그 태생부터 공동체적 행위였기에, 예배 모임은 기독교 공동체의 정체성과도 같았다. 그렇기에 온라인으로의 예배 전환은 교계에 엄청난 논쟁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었지만, 대부분 찬반에 대한 이론적 입장 정리나, 교회와 사회적 변화에 관한 현상학적 연구에 그치고 말았다. 또한, 이미 온라인 예배를 시작한 교회 현장에서는 온라인 예배의 방법론 탐구에만 몰두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에 연구자는 온라인이라는 방법론을 탐구하기 전에, 예배라는 본질이 무엇인지에 우선 집중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예배의 본질이 계속해서 변화하는 시대적인 상황과 다양한 방법론 속에 어떻게 왜곡되지 않고 담길 수 있을지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실천적 제언을 통해, 실제 예배 현장에서도 온라인 예배가 선용(善用)될 수 있도록 돕고자 한다. 예배는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다양하게 정의될 수 있으나, 그것들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하나님과 인간 존재의 만남’이라 할 수 있다. 그 신비한 만남에는 두 가지 큰 축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와 그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다. 그렇다면, 과연 온라인상에서도 예배의 두 축인 ‘하나님의 계시’와 ‘인간의 응답’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어떠한 이유로 가능하며, 또 무엇을 통해 가능한가. 예배는 단순히 보고 듣는 시청물이 아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일어나는 장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의 모든 감각을 활용하여 느낄 수 있으며, 느껴야만 한다. 이에 대해 연구자는 예배가 오감(五感)을 넘어, 영적인 감각까지 포함된 육감(六感)을 통해 이루어져야 함을 주장한다. 예배자로서의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의 응답은 단순히 개인적 행위가 아닌 공동체적 행위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예배가 온라인으로 전환되면서 많은 예배자들이 예배에서의 다 감각성과 공동체성을 잃어버리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역자들은 기술적인 방법론이나 새로운 컨텐츠를 찾지만, 우리에게는 이미 가장 좋은 해결책이 주어져 있다. 그것은 바로 성찬이다. 예배에서 성찬을 회복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예배의 본질을 회복할 수 있다. 하지만 온라인에서도 성찬이 가능한지에 대해 여전히 의문을 품는 예배자들이 있다. 그러므로, 연구자는 실제 온라인을 통해 성찬예배를 드린 모범적이고, 실천적인 예시를 제공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감리교신학대학교 나눔의 예전학회(지도교수: 박해정)에서 코로나19 팬데믹의 한복판에서 진행했던 “대면-향기로 잇다” 예배이다. 이를 통해, 각 교회의 온라인 예배가 단순히 보고 듣는 시청물이 아니라, 맛보고 경험하는 예배로 회복되고 갱신되기를 기대한다. 또한, 본 연구와 사례를 통해 단순히 이번 팬데믹으로 인한 온라인 예배에서뿐만 아니라, 앞으로 맞이할 다양한 사회적 위기와 변화 속에서도 우리의 예배가 그 본질을 건강히 지킬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 Deborah van Deusen Hunsinger의 Karl Barth 이해 : Karl Barth의 교회 교의학 Ⅲ/2 §46 인간론을 중심으로 한 신학과 심리학의 대화

        이재영 감리교신학대학교 대학원 2009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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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론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보았다. 첫번째는 바르트와 헌싱거 대화의 타당성, 두번째는 평가이다. 첫번째, 바르트와 헌싱거의 상호학문 대화의 타당성은 헌싱거가 시도한 신학과 목회상담의 이론적 접근이 타당했는가를 물어보는 것이다. 헌싱거가 시도한 상호학문의 이론적 접근은 그 자체로서도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바르트 스스로가 심리학과의 대화를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노력은 이미 값어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와 함께 본인이 연구하면서 느꼈던 몇 가지의 견해들을 밝혀 보고자 한다. 두번째로는 이 논문을 마치면서 스스로에 대한 반성도 해 보고, 이 후에 더 깊이 있는 연구들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논문을 평가해 보고자 한다. 1. 바르트와 헌싱거의 상호학문 대화의 타당성 헌싱거가『신학과 목회상담』의 제일 마지막에 하고 있는 이야기는 바르트와의 대화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잘 요약해 주고 있다. 바르트적 관점에서 볼 때, 신적인 존재와 피조물을 체계적으로 통합시킬 수 있는 전체성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목회상담이 다루게 되는 복잡한 자료들의 경우에도 역시 전체성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연관성이 발생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연적이고 특별한 것이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도권과 자유에 근거한 것이다. 하지만 이 우연적인 연관성을 기초로 해서 간접적으로는 두 학문 사이에. . . 상호성이 가능해진다. 게다가, 신과 피조물 사이의 관계를 지배하는 비대칭성은 비록 심리학적 해석으로부터 신학적 해석으로 나아가는 길은 전혀 없지만 반대로 신학적 해석으로부터 심리학적 해석으로 나아가는 길은 존재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 . 유비적으로 해석될 수가 있다. 이런 식으로 어느 한 쪽을 다른 한 쪽으로 환원시키는 일없이 허용하면서, 신학적 자료와 심리학적 자료를 서로 연관짓는 가운데, 교회 사역 가운데 하나인 목회상담을 수행할 수 있는 새로운 상호 학문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이 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헌싱거는 매우 조심스러운 방법으로 신학과 목회상담의 대화를 이론적으로 접근시켰다. 그녀는 하나님의 우선성, 인간의 피조성을 잘 인식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는 바르트의 인간 이해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따른 것으로서 끝까지 이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바르트가 제시한 인간 이해의 구조는 헌싱거의 이론에서 타당성을 갖는가? 우선 유비 구조를 통한 방법론적으로 볼 때 헌싱거의 이론은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바르트는 인간 이해의 구조를 영혼과 육체의 상호관련성, 영혼과 육체의 독자성, 영혼과 육체의 순서 이 세 가지로 이야기 하였다. 이와 대응하는 헌싱거의 이론은 용해될 수 없는 차별화, 분리될 수 없는 일치성, 파괴될 수 없는 순서였다. 이 각각의 이론들은 유비적으로 잘 적용되었다. 상호관련성은 구조적으로 일치성을 가지고 있다는 이론과 충돌되지 않고, 독자성은 차별화라는 기능상의 이해와도 맥을 같이하고 있다. 그리고 영혼과 육체의 순서는 신학과 심리학의 순서를 “비대칭성”이라는 용어로 설명한 것처럼 영혼과 육체를 비대칭성으로 설명해도 그 의미가 왜곡되지 않는다. 이렇게 헌싱거는 유비라는 방법을 통하여서 바르트의 인간 이해의 구조를 알맞게 적용시키고 있다. 두번째로는 바르트의 전반적인 인간 이해에 있어서도 타당성을 가질 수 있다. 바르트는 인간 예수에게서 발견되는 특징을 가지고 인간의 구조를 이해하려고 시도한다. 그리고 인간 예수의 특징을 설명하는 단어는 전일성(oneness, wholeness)이었다. 바르트“그는 영혼일 뿐만 아니라 육체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는 정돈된 단일성 안에 있는 영혼과 육체 둘 모두이다.” 라는 말을 통해서 예수의 전일성을 설명하는데, 이는 인간 예수의 모습을 통전적으로 이해해야 함을 암시하는 말이다. 헌싱거는 자신이 왜 바르트에 대하여 매력을 느끼게 되었는지 『신학과 목회상담』의 전반부에 설명하고 있다. 그녀는 심리학이 인간의 모든 상황들을 설명하지 못하고 있음을 어느 순간 깨닫게 되었다. 융의 사상이 예술사, 비교문학, 종교학, 문화인류학, 심지어는 현대무용에 이르는 이 모든 분야의 관심사들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결국에는 심리학이 인간의 내면의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기 보다는 미로속의 쥐를 관찰하는 것처럼 인간을 현상적으로 다루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즉 그녀에게 융은 육체의 관심은 설명해 주었지만 영혼에 대한 갈급함은 채워주지 못한 것이다. 또한 목회상담을 통한 내담자들의 요구도 헌싱거의 욕구와 같았음을 보았다. 이렇게 헌싱거는 인간을 이해함에 있어서 영혼과 육체가 통전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통전적 시각을 가진 목회상담이 필요함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바르트의 전반적인 인간 이해와도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바르트는 영혼과 육체의 통전적 시각을 가지고 있고, 이에 따라 헌싱거는 신학과 심리학이 인간에게 있어서는 어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욕구임을 밝히고 있다. 헌싱거의 이러한 노력은 그 자체만으로도

      • 웨슬리와 루터의 구원론 비교 : 믿음과 선행의 관계를 중심으로

        김시편 감리교신학대학교 대학원 2006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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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터는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베푸시는 엄청난 용서의 은총을 믿기만 하면,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을-수동적으로 낯선 손님 같은 의(aliena institia)를 - 옷 입게 된다는 사실을 어거스틴의 『영과 문자』(DeSpiritu et Littera)에서 그리고 바울의 로마서 1:17 에서 발견하였다. 루터에게 있어서 의는, 심판하시고 정죄하시고 저주하시는 의로만 생각되어 로마서 1: 17을 가장 미워하였으나, 이 깨달음을 통하여 가장 사랑하게 되었고, 그의 구원론이 결정되는 바, 곧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능동적인 선행과 노력은 아무런 효과가 없고, 오직 철저히 십자가의 은총을 믿을 때에만 의롭다 함을 얻고 - 신앙의인화, justification by faith - 비로소 구원이 가능함을 강조한다. 구원을 향한 인간의 모든 지혜와 능력을 십자가 앞에서 끝장내어 버리고 십자가 속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역사하기 시작한다. 이런 측면에서 루터는 1518년 '하이델베르그 논쟁'(Heidelberg Disputation)에서 자신의 신학이 '십자가의 신학'임을 밝히고 있고, 라이프찌히(Leipzig) 논쟁(1519) 이후에도 죽음이 엄습하는 것을 느끼고 오직 십자가만을 붙들고 십자가 위에서만 그의 신학을 수립하였다. 웨슬리는 바로 이러한 루터의 의인화와 십자가 신학을 그의 신학의 기본적인 전제로 삼는다. 웨슬리의 1738년 5월 24일의 올드스게이트 사건은 루터의 로마서 서문이었다. 웨슬리의 구원론의 출발은 철저히 루터적, 종교 개혁적 전통에서 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웨슬리는 루터의 의인화 사상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루터는 죽는 날까지 성도는 '용서받은 죄인', '의로워진 죄인', '용서받고 의로워졌으나 죄 지을 가능성이 있는 죄인'(simul justus et peccator)임을 주장하였으나, 웨슬리는 imputation (extra nos, 죄가 전가되어 구원 받음, 수동적) 뿐 아니라, impartation (in nobis, 하나님의 의에 동참하는 것, 적극적)까지도 강조한다. 즉, 의롭다고 법적인(forensic) 인정을 받을 뿐 아니라 의로운 사람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해석한다. 그래서 우리의 본성마저도 하나님의 형상을 힘입어야 한다. 따라서 의인이 되기 위해서는 행동해야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 믿음이다. 하나님의 의에 동참하는 것(impartation)은 우리의 죄악 된 본성이 갱신되고 하나님의 형상, 곧 의로움과 성결함에 동참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이 하는 선행은 구원의 확신을 위해 필요한 것이며, 성령의 열매가 풍성한 크리스천, 이는 곧 완전한 크리스천인데 완전한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본성의 파트너까지 될 수 있으며 동참자가 된다. 웨슬리에게 선행은 구원의 확신을 위해 필요하다. 구원을 확신하는 한 가지 방법은 영적이고 신비적이다. 곧 성령이 인간의 영에게 확증시켜 주는 신비적, 영적 체험이다. 그러나 구원을 확신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선행이다. 또한 선행은 구원의 완성을 위해 필요하다. 구원의 시작은 믿음에 의해서 이루어지지만, 구원의 완성은 선행으로 이루어진다고 웨슬리는 해석한다. 루터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총인'믿음으로 의롭다 함'만을 강조하나, 웨슬리는'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다음에는 성만찬뿐 아니라 사람이 하는 행위, 즉 기도, 성서 읽기와 듣기 등도 성화의 은혜를 받는 수단이다. 물론 구원의 조건은 아니다. 구원의 조건은 오직'믿음' 이다. 마치 삭개오가 뽕나무에 올라가는 열심을 내듯이 열심히 마음의 문을 열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믿음은 어디까지나 은총으로 다가오는 선물인 것이다. 그러나 모라비안주의나 루터 신학은 이를 거부한다. 신앙의인화(信仰義認化)의 은총이나 성화의 은총을 위해서는 가만히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stillness) 그러나 웨슬리는 이 선물인 믿음의 은총이 오기까지 가만히 기다려서는 안되고 ‘열심히 사모해야 한다.’는 것이 - 루터를 기본 전제로 하지만 - 루터에게서 보다 발전된 사상이다. 루터에 있어서, 의인은 그 말이 뜻하고 있는 바대로‘의롭게 여겨진다’ 는 것으로, 그 주체는 하나님이요, 그 본질은 그의 호의이다. 이에 대해 인간은 수동적인 자세를 취한다. 여기서 어떤 인간적인 행위나 공로가 배제되는 것은 물론이다. 인간은 순전히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며, 하나님 앞에서 그의 모든 행위는 무위로 끝난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공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다시 말해서‘그리스도의 의’에 의해서 의롭다 하심을 입는 것이다. 이와 같은 수동성 은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 실존이며 인간에 (passivity) 대한 실존에 있어서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루터에 의하면, 이제 인간은 의인이후 실재로 능동적일 수 있다. 이 능동적 혹은 행위는 ‘믿음’이다. 믿음은 인간의 수동성을 말하지만,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그렇다는 것 일뿐이므로, 거기서부터 사랑은 자연스럽게 이웃을 향해 흘러나가데 된다. 그러므로 사랑은 곧 행위로서 이미 믿음을 통해 받은 바를 이웃에게 주는 실천적인 윤리의 원리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랑개념이 성화의 기초가 될 수 있다.루터에게 있어서 성화란 개념은 그리 탐탁치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중세의 전교리가 바로 이성화위에 세워져 있었음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루터는 성화에 대해 말하지 않고 의인의 과정적 성격을 말함으로써 우리를 다소 당혹시킨다. 더욱이 그의 사상은 역설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이 부분적 의와 완전한 의 사이의 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유사성화적 이해는 명쾌한 설명을 허락하지 않는다. 인간은 성화 된 다기 보다는, 오히려 동시에 죄인이며 동시에 의인으로서 하나의 투쟁적 삶을 영위해 나간다. 그러나, 루터가 사랑의 실행을 강조함으로써 행위 내지는 성화를 전혀 무시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 따라서 그는 흔히 비판받듯이 수동적 인간상에 입각한 정적주의자로서 일방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웨슬리는 루터와 달리 의인과 성화 사이의 연결에 더 관심하였다. 루터가 일찍부터 의 문제에 모든 자아를 몰두 시켰다면, 웨슬리는 성화문제를 가지고 오래 투쟁하였다. 물론 웨슬리도 루터처럼 자기의의 추구로서 성화가 좌절된 후 외적 행위 즉 공로에 의해 의인화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체험하였으나, 회심 이후 도리어 성화를 더욱 강조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루터와 갈라진다. 웨슬리의 의인 이해에 있어서 루터와 다른 점은 다음과 같다. 물론 웨슬리 역시 의인을 입혀지는 그리스도의 의로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웨슬리에 있어서는 인간편에서의 믿음이 강조되고, 또한 ‘pro me’ 라는 말이 함축하고 있듯이 주관적 확신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이는 아마도 모라비아교를 통해 흘러들어 온 경건주의의 요소로 보아야 할 것이다.그리하여 웨슬리에게는, 루터가 보여주고 있는 하나님 앞에서의 실재적인 예리한 의인이해가 결여되고 있다. 이와 같이 의인이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반면 웨슬리의 성화 개념이 주목될 수 있다 그는 믿음이 깊이 인격적으로 되기 전에는 참된 믿음이 될 수 . 없다고 생각하였고, 그와 같은 것은‘의인’이라는 한 순간의 사건만으로 불충분하고 오히려 성화의 과정을 통해 성장하는 기독교인의 삶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여기서, 인간은 현실적인 의를 촉진하기 위해 실재적 존재가 되어야 한다. 웨슬리는 인간이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주권의 예정에 의해 불가항력적으로 움직여지는 수동적 기계가 아니라, 그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윤리적 행위주의로서 자신을 이해라는 존재라고 보았다. 따라서 루터와 달리 웨슬리는 의인을 구원의 terminus a quo 로, 성화를 terminus ad quem 으로 보고, 성화의 최종목표를 기독교인의 완전에 두었다. 여기에서 웨슬리는‘사랑’을 이 모든 성화일반을 포괄하는 원리로서 내세웠다. 그래서 완전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식의 수직적인 고양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사랑으로 묘사되었으며, 하나의 목표의 구실을 하게 되었다. 루터가 이와 같은 완전에 대하여 들었다면 아마 그것을 로마 카톨릭교의 반복이라고 하며 꺼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루터에게 있어서 점점 완전하여져서 죽는 순간 바로 이전에 완전에 도달하게 된다는 웨슬리의 생각은 매일 매일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으로서 투쟁적이고도 역설적인 실존을 영위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자신의 생각과는 매우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으로 느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보기에, 루터는 의인을 강조하였고, 반면 웨슬리는 성화를 강조하였다. 이는 두 사람의 시대적인 배경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 루터는 성화로 가득 찬 중세의 왕국을 꼭 벗어나야 되겠다는 일종의 사명 같은 것을 느꼈으며, 거기서부터 당연히 역사상의 그 어떤 다른 신학자도 미칠 수 없을 정도로 깊이 발견된 의인개념을 제창하였다. 반면 웨슬리의 배경은 다르다. 그는 이미 말했듯이, 다소 종합적인 신학자였으며, 그로 인해 당시 그에게 흘러들어온 모든 경향을 나름대로 소화 흡수하였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 좀더 균형 있고, 조화 있는 해결책을 제시해 보려고 했다. 그는 루터처럼 중세 같은 거대한 본체의 전교리를 헐고 다시 세울 필요가 없었다. 그는 또한 루터처럼 홀로 기독교적 진리를 위해 싸우는 개척자가 아니라,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함으로써 자신에게 허락된 청중을 구원시키고 성장시켜야 할 복음의 전도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웨슬리에게는 기독교인의 삶이 루터 이상으로 중요한 신학의 장이 되었다. 이러한 전제 아래, 다음과 같이 우리는 말할 수 있겠다. 루터는 의인을 기독교 전체를 포괄하는 교리로 보고 성화조차 그 아래 종속시키려하였다. 따라서, 이 의인교리가 그의 사상의 주류이고, 행위는 비주류로 남는다. 다시 말해서 사랑은 믿음에서 흘러나온다. 또한 사랑조차 믿음에 의해 그 존재이유를 끊임없이 찾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하여 기독교인의 전생애는 끊임없이 이 terminus a quo 로서의 의인에 의해 점철된다. 이에 비해 웨슬리에게는 성화가 기독교 전체를 포괄하는 교리가 된다. 의인은 terminus a quo 이지만 terminus ad quem 으로서의 성화를 향한 terminus a quo 이다. 따라서, 그것은 루터처럼 기독교적 삶 전체를 지배하지 않으며, 오히려 사랑에 의한 성화, 그리고 그 목표로서의 완전이 더욱 더 중요하다. 우리는 루터가 사랑을 동기 중심으로 보는 것에 찬성해야 할 것 같다. 이것은 웨슬리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본다면 성화는 웨슬리의 말대로 순수한 의도에 입각한 사랑이어야 하겠다. 그런데 이 사랑의 동기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어떤 도덕적인 의무일까 혹은 감정의 발로일까? 이에 대하여 루터, 웨슬리는 모두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곧 칭의라고 생각한 것 같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은사를 말하면서, 가장 좋은 길, 가장 귀한 은사가 곧 사랑의 은사라고 하였다. 바울의 말처럼, 성화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성령이다. 그러므로 의인, 즉 죄의 용서와 신인 관계의 회복으로서 화해의 주체인 하나님은 삼위일체로서의 성령을 통해 성화를 일으키신다. 또 한편, 성화는 칭의와 같이 기독론적으로도 언급되어야 한다. 이 점에서는 오히려 루터가 웨슬리보다 더 낫다. 왜냐하면 루터는 그리스도의 의를 기독교인의 생활일반에 적용시켜 그 역할을 강화했지만, 웨슬리의 성화개념은 그리스도론적으로 별로 정위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왜 성화가 기독론적인 의미를 가져야 하는가 하는 점이 논의되어야 하겠다. 칭의는 이미 보았듯이 인격적인 관계의 회복과 함께, 인간이 새로운 존재가 되는 방향이다. 이에 뒤이어 성하는 인격과 함께 이제 생활을 변화시키는 생의 목표가 된다. 여기서 우리가 이 삶을 역사로 볼 때 그 역사변화의 중심을 어디에 둘 것인가? 물론 그것은 그리스도의 삶과 업적이다. 그리하여 성경에는 성화가 그리스도의 온전하심까지 성장해 나가는 기독교인의 삶으로 묘사되고 있다. 칭의, 곧 화해의 말씀이 보편적이듯이, 성화의 말씀도 더욱 보편적이어야 할 것이다.그리하여 성화는 믿는 자들의 삶에만 반영되지 않고, 역사와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 즉 전 피조물의 변화의 원동력이 되어야 하겠다. 그러므로 성령의 나라는 곧 하나님의 나라요, 그 나라는 칭의와 성화를 두 기둥으로 가지는바, 그 둘 모두가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지는 것이다.

      • 공명하는 생명신학 : 선순화 목사의 생애와 신학사상

        이진영 감리교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2009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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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순화는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장학금으로 공부하면서 서울대와 대학원에서 오랫동안 임학분야에서 공부하였다. 미국유학을 가서도 임학을 공부하다가 삶의 한 과정에서 전환점처럼 신학을 만나 공부하였다. 그는 서구에서 신학을 하였으나 서구이론을 그대로 답습하는 자가 아니라 한국의 무속에 대한 여성 신학적 접근과 노동현장에서 고통 받는 여성들의 현실에 대한 관심을 통하여 살아 숨 쉬는 학문의 길을 가고자 하였다. 그의 학위 논문인 [Women, Religion, Power]는 이를 잘 반영해 주고 있으며 그 후의 신학적 관심사들도 대부분 사회적 약자들인 여성 민중과 가난한 이웃, 그리고 수탈당하는 자연으로 확대되어 갔다. 그는 지구화로 인해서 약자들이 고통 받고 자연이 수탈당하는 세계에서 하나의 대안으로서 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높았으며 이를 생명신학에서 체계적이고도 종합적으로 조명하려 하였다. 특히 여성 신학적 관점에서 여성의 경험과 몸을 중시하면서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폭넓은 자연과학적 지식과 소통하였다. 선순화의 학문적 관심은 고통 받고 있는 생명체 어디든지 뻗어 나갔다. 여성, 가난한 자, 그리고 자연까지. 그리하여 그는 생명신학을 기획하였고 그의 생명신학은 일찍이 공부한 생명과학에 속하는 임학의 토대와 여성과 가난한 이웃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신학과 결합하여 잘 뻗어나가려다 귀천하였다. 그는 학문은 살아있는 삶과 연결되어야 하며 그리스도의 신앙은 일상의 삶을 성화시킴으로써 고양된다고 믿었다. 그러기에 그는 지구화로 인해서 약자들이 사회경제적으로 고통 받고 있으며 자연 역시 과도한 개발과 소비지상주의적 삶의 양식으로 수탈당하는 현실의 대안으로 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그의 공동체에 대한 관심은 생명신학에 대한 실천적 영역이었다. 또한 여성의 경험과 몸을 중시하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소통하는 신학을 형성하고자 하였으며, 실천과 현장에 대한 관심은 여성단체의 활동으로 이어졌다. 그는 아주 체계적이고도 종합적인 완성도를 가진 종교이론과 여성신학을 바탕으로 한 생명신학을 형성 할 수는 없었으나 적어도 21세기를 열어가는 시점에서 그가 지향한 신학적 방향만으로도 우리는 많은 삶의 통찰과 신학적 지혜를 배울 수 있다. 무교와 기독교의 비교를 통한 여성 사제자들의 영성의 동질성과 연결고리를 밝힌 “선순화는 목사나 박사로서가 아닌 한 인간으로, 한 민중으로, 한 아시아인으로 그리고 한 한국인으로” 살다 가시며 우리 모두의 하나 됨을 강조하였다. 선순화는 생명, 삶, 생태. 신앙, 신학, 여성, 민중, 민족, 동양, 문화를 삶의 풍토에서 통전하려 노력했던 인물이다. 필자는 이 통전의 신학함을 바느질이라는 용어로 표현하고 싶었다. 다른 색깔, 다른 문양, 다른 천들의 조합으로 만들어지는 조각보의 탄생, 또 다른 작품의 탄생은 이 모든 삶의 낱말들을 통전할 때 재탄생한다. 이것은 일상이며 살림이고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이다. 틈 사이에서 모든 그물망을 껴안는 여성성의 부드러움으로 우리 모두 함께 가야 하는 삶의 길인 것이다. 1) 일상성 - 살림의 영역 돌봄과 양육, 섬김과 나눔 등 살림의 가치들은 여성적 가치들과 일치한다. 여성이 일상의 살림을 통해서 실천하여 온 가치들이 생명문화 형성의 중요한 가치가 되는 것이다. 살림은 일반적으로 가사노동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가사노동의 의미를 넘어 죽임의 반대말로서의 살림의 적극적이고 포괄적인 철학과 사상이 담긴 말이다. 생명은 하느님의 선물이며 은혜의 신비이며 그것은 살림, 모든 가치의 근거이다. 살림의 일은 하찮고 작은 것들이다. 그러나 생명을 지속시키고 살려내는 힘이다. “밥상을 차리는 부엌에서의 노동이야말로 위대하다. 세상의 어떤 일보다도 생명의 밥상을 위한 노동은 거룩하다. 부엌은 사람을 살리는 자리이다. 온 식구들이 한상에 모여 밥을 나누면, 그것이 곧 생명을 나누는 거룩한 자리이다.” 공동체성의 추구와 타자에 대한 배려는 일상의 실천 속에 중요한 원리가 되어 자신과 함께 사람들을 풍요롭게 성장시킨다. 살림의 공동체성은 지속적인 관계와 끊임없는 교감 속에서 생명을 살리는 지속적 실천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다. 기여민 활동을 통해 가난한 여성들과 함께 울 수 있는 여성이 되었다는 한 회원은 자신의 삶이 아이들 뿐 아니라 가난한 엄마들을 당당하게 살게 하고픈 소망을 가지고 활동을 한다고 했다. “나는 하루 종일 아이들과 함께 놀고, 밥하고. 설거지하고, 밥 먹이고 재우고, 걸레질한다. 난 이러한 일들을 기꺼이 내 운동의 영역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남들 볼 때 하찮다고 생각되는 일을 나는 저버릴 수 없는 시대의 요구로 생각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인류 문명과 근대를 통해서 이러한 여성의 ‘살림살이’는 올바르게 평가받지 못하고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종속된 열등한 존재로 부수적인 역할밖에 하지 못하는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 별것도 아닌 것을 꾸준히 끝까지 밀고 나가 성과를 내는 것이 여성생명운동의 특징이다. 늘 자신을 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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