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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웨슬리와 루터의 구원론 비교 : 믿음과 선행의 관계를 중심으로

        김시편 감리교신학대학교 대학원 2006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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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터는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베푸시는 엄청난 용서의 은총을 믿기만 하면,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을-수동적으로 낯선 손님 같은 의(aliena institia)를 - 옷 입게 된다는 사실을 어거스틴의 『영과 문자』(DeSpiritu et Littera)에서 그리고 바울의 로마서 1:17 에서 발견하였다. 루터에게 있어서 의는, 심판하시고 정죄하시고 저주하시는 의로만 생각되어 로마서 1: 17을 가장 미워하였으나, 이 깨달음을 통하여 가장 사랑하게 되었고, 그의 구원론이 결정되는 바, 곧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능동적인 선행과 노력은 아무런 효과가 없고, 오직 철저히 십자가의 은총을 믿을 때에만 의롭다 함을 얻고 - 신앙의인화, justification by faith - 비로소 구원이 가능함을 강조한다. 구원을 향한 인간의 모든 지혜와 능력을 십자가 앞에서 끝장내어 버리고 십자가 속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역사하기 시작한다. 이런 측면에서 루터는 1518년 '하이델베르그 논쟁'(Heidelberg Disputation)에서 자신의 신학이 '십자가의 신학'임을 밝히고 있고, 라이프찌히(Leipzig) 논쟁(1519) 이후에도 죽음이 엄습하는 것을 느끼고 오직 십자가만을 붙들고 십자가 위에서만 그의 신학을 수립하였다. 웨슬리는 바로 이러한 루터의 의인화와 십자가 신학을 그의 신학의 기본적인 전제로 삼는다. 웨슬리의 1738년 5월 24일의 올드스게이트 사건은 루터의 로마서 서문이었다. 웨슬리의 구원론의 출발은 철저히 루터적, 종교 개혁적 전통에서 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웨슬리는 루터의 의인화 사상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루터는 죽는 날까지 성도는 '용서받은 죄인', '의로워진 죄인', '용서받고 의로워졌으나 죄 지을 가능성이 있는 죄인'(simul justus et peccator)임을 주장하였으나, 웨슬리는 imputation (extra nos, 죄가 전가되어 구원 받음, 수동적) 뿐 아니라, impartation (in nobis, 하나님의 의에 동참하는 것, 적극적)까지도 강조한다. 즉, 의롭다고 법적인(forensic) 인정을 받을 뿐 아니라 의로운 사람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해석한다. 그래서 우리의 본성마저도 하나님의 형상을 힘입어야 한다. 따라서 의인이 되기 위해서는 행동해야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 믿음이다. 하나님의 의에 동참하는 것(impartation)은 우리의 죄악 된 본성이 갱신되고 하나님의 형상, 곧 의로움과 성결함에 동참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이 하는 선행은 구원의 확신을 위해 필요한 것이며, 성령의 열매가 풍성한 크리스천, 이는 곧 완전한 크리스천인데 완전한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본성의 파트너까지 될 수 있으며 동참자가 된다. 웨슬리에게 선행은 구원의 확신을 위해 필요하다. 구원을 확신하는 한 가지 방법은 영적이고 신비적이다. 곧 성령이 인간의 영에게 확증시켜 주는 신비적, 영적 체험이다. 그러나 구원을 확신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선행이다. 또한 선행은 구원의 완성을 위해 필요하다. 구원의 시작은 믿음에 의해서 이루어지지만, 구원의 완성은 선행으로 이루어진다고 웨슬리는 해석한다. 루터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총인'믿음으로 의롭다 함'만을 강조하나, 웨슬리는'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다음에는 성만찬뿐 아니라 사람이 하는 행위, 즉 기도, 성서 읽기와 듣기 등도 성화의 은혜를 받는 수단이다. 물론 구원의 조건은 아니다. 구원의 조건은 오직'믿음' 이다. 마치 삭개오가 뽕나무에 올라가는 열심을 내듯이 열심히 마음의 문을 열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믿음은 어디까지나 은총으로 다가오는 선물인 것이다. 그러나 모라비안주의나 루터 신학은 이를 거부한다. 신앙의인화(信仰義認化)의 은총이나 성화의 은총을 위해서는 가만히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stillness) 그러나 웨슬리는 이 선물인 믿음의 은총이 오기까지 가만히 기다려서는 안되고 ‘열심히 사모해야 한다.’는 것이 - 루터를 기본 전제로 하지만 - 루터에게서 보다 발전된 사상이다. 루터에 있어서, 의인은 그 말이 뜻하고 있는 바대로‘의롭게 여겨진다’ 는 것으로, 그 주체는 하나님이요, 그 본질은 그의 호의이다. 이에 대해 인간은 수동적인 자세를 취한다. 여기서 어떤 인간적인 행위나 공로가 배제되는 것은 물론이다. 인간은 순전히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며, 하나님 앞에서 그의 모든 행위는 무위로 끝난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공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다시 말해서‘그리스도의 의’에 의해서 의롭다 하심을 입는 것이다. 이와 같은 수동성 은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 실존이며 인간에 (passivity) 대한 실존에 있어서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루터에 의하면, 이제 인간은 의인이후 실재로 능동적일 수 있다. 이 능동적 혹은 행위는 ‘믿음’이다. 믿음은 인간의 수동성을 말하지만,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그렇다는 것 일뿐이므로, 거기서부터 사랑은 자연스럽게 이웃을 향해 흘러나가데 된다. 그러므로 사랑은 곧 행위로서 이미 믿음을 통해 받은 바를 이웃에게 주는 실천적인 윤리의 원리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랑개념이 성화의 기초가 될 수 있다.루터에게 있어서 성화란 개념은 그리 탐탁치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중세의 전교리가 바로 이성화위에 세워져 있었음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루터는 성화에 대해 말하지 않고 의인의 과정적 성격을 말함으로써 우리를 다소 당혹시킨다. 더욱이 그의 사상은 역설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이 부분적 의와 완전한 의 사이의 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유사성화적 이해는 명쾌한 설명을 허락하지 않는다. 인간은 성화 된 다기 보다는, 오히려 동시에 죄인이며 동시에 의인으로서 하나의 투쟁적 삶을 영위해 나간다. 그러나, 루터가 사랑의 실행을 강조함으로써 행위 내지는 성화를 전혀 무시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 따라서 그는 흔히 비판받듯이 수동적 인간상에 입각한 정적주의자로서 일방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웨슬리는 루터와 달리 의인과 성화 사이의 연결에 더 관심하였다. 루터가 일찍부터 의 문제에 모든 자아를 몰두 시켰다면, 웨슬리는 성화문제를 가지고 오래 투쟁하였다. 물론 웨슬리도 루터처럼 자기의의 추구로서 성화가 좌절된 후 외적 행위 즉 공로에 의해 의인화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체험하였으나, 회심 이후 도리어 성화를 더욱 강조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루터와 갈라진다. 웨슬리의 의인 이해에 있어서 루터와 다른 점은 다음과 같다. 물론 웨슬리 역시 의인을 입혀지는 그리스도의 의로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웨슬리에 있어서는 인간편에서의 믿음이 강조되고, 또한 ‘pro me’ 라는 말이 함축하고 있듯이 주관적 확신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이는 아마도 모라비아교를 통해 흘러들어 온 경건주의의 요소로 보아야 할 것이다.그리하여 웨슬리에게는, 루터가 보여주고 있는 하나님 앞에서의 실재적인 예리한 의인이해가 결여되고 있다. 이와 같이 의인이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반면 웨슬리의 성화 개념이 주목될 수 있다 그는 믿음이 깊이 인격적으로 되기 전에는 참된 믿음이 될 수 . 없다고 생각하였고, 그와 같은 것은‘의인’이라는 한 순간의 사건만으로 불충분하고 오히려 성화의 과정을 통해 성장하는 기독교인의 삶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여기서, 인간은 현실적인 의를 촉진하기 위해 실재적 존재가 되어야 한다. 웨슬리는 인간이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주권의 예정에 의해 불가항력적으로 움직여지는 수동적 기계가 아니라, 그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윤리적 행위주의로서 자신을 이해라는 존재라고 보았다. 따라서 루터와 달리 웨슬리는 의인을 구원의 terminus a quo 로, 성화를 terminus ad quem 으로 보고, 성화의 최종목표를 기독교인의 완전에 두었다. 여기에서 웨슬리는‘사랑’을 이 모든 성화일반을 포괄하는 원리로서 내세웠다. 그래서 완전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식의 수직적인 고양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사랑으로 묘사되었으며, 하나의 목표의 구실을 하게 되었다. 루터가 이와 같은 완전에 대하여 들었다면 아마 그것을 로마 카톨릭교의 반복이라고 하며 꺼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루터에게 있어서 점점 완전하여져서 죽는 순간 바로 이전에 완전에 도달하게 된다는 웨슬리의 생각은 매일 매일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으로서 투쟁적이고도 역설적인 실존을 영위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자신의 생각과는 매우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으로 느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보기에, 루터는 의인을 강조하였고, 반면 웨슬리는 성화를 강조하였다. 이는 두 사람의 시대적인 배경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 루터는 성화로 가득 찬 중세의 왕국을 꼭 벗어나야 되겠다는 일종의 사명 같은 것을 느꼈으며, 거기서부터 당연히 역사상의 그 어떤 다른 신학자도 미칠 수 없을 정도로 깊이 발견된 의인개념을 제창하였다. 반면 웨슬리의 배경은 다르다. 그는 이미 말했듯이, 다소 종합적인 신학자였으며, 그로 인해 당시 그에게 흘러들어온 모든 경향을 나름대로 소화 흡수하였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 좀더 균형 있고, 조화 있는 해결책을 제시해 보려고 했다. 그는 루터처럼 중세 같은 거대한 본체의 전교리를 헐고 다시 세울 필요가 없었다. 그는 또한 루터처럼 홀로 기독교적 진리를 위해 싸우는 개척자가 아니라,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함으로써 자신에게 허락된 청중을 구원시키고 성장시켜야 할 복음의 전도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웨슬리에게는 기독교인의 삶이 루터 이상으로 중요한 신학의 장이 되었다. 이러한 전제 아래, 다음과 같이 우리는 말할 수 있겠다. 루터는 의인을 기독교 전체를 포괄하는 교리로 보고 성화조차 그 아래 종속시키려하였다. 따라서, 이 의인교리가 그의 사상의 주류이고, 행위는 비주류로 남는다. 다시 말해서 사랑은 믿음에서 흘러나온다. 또한 사랑조차 믿음에 의해 그 존재이유를 끊임없이 찾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하여 기독교인의 전생애는 끊임없이 이 terminus a quo 로서의 의인에 의해 점철된다. 이에 비해 웨슬리에게는 성화가 기독교 전체를 포괄하는 교리가 된다. 의인은 terminus a quo 이지만 terminus ad quem 으로서의 성화를 향한 terminus a quo 이다. 따라서, 그것은 루터처럼 기독교적 삶 전체를 지배하지 않으며, 오히려 사랑에 의한 성화, 그리고 그 목표로서의 완전이 더욱 더 중요하다. 우리는 루터가 사랑을 동기 중심으로 보는 것에 찬성해야 할 것 같다. 이것은 웨슬리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본다면 성화는 웨슬리의 말대로 순수한 의도에 입각한 사랑이어야 하겠다. 그런데 이 사랑의 동기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어떤 도덕적인 의무일까 혹은 감정의 발로일까? 이에 대하여 루터, 웨슬리는 모두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곧 칭의라고 생각한 것 같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은사를 말하면서, 가장 좋은 길, 가장 귀한 은사가 곧 사랑의 은사라고 하였다. 바울의 말처럼, 성화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성령이다. 그러므로 의인, 즉 죄의 용서와 신인 관계의 회복으로서 화해의 주체인 하나님은 삼위일체로서의 성령을 통해 성화를 일으키신다. 또 한편, 성화는 칭의와 같이 기독론적으로도 언급되어야 한다. 이 점에서는 오히려 루터가 웨슬리보다 더 낫다. 왜냐하면 루터는 그리스도의 의를 기독교인의 생활일반에 적용시켜 그 역할을 강화했지만, 웨슬리의 성화개념은 그리스도론적으로 별로 정위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왜 성화가 기독론적인 의미를 가져야 하는가 하는 점이 논의되어야 하겠다. 칭의는 이미 보았듯이 인격적인 관계의 회복과 함께, 인간이 새로운 존재가 되는 방향이다. 이에 뒤이어 성하는 인격과 함께 이제 생활을 변화시키는 생의 목표가 된다. 여기서 우리가 이 삶을 역사로 볼 때 그 역사변화의 중심을 어디에 둘 것인가? 물론 그것은 그리스도의 삶과 업적이다. 그리하여 성경에는 성화가 그리스도의 온전하심까지 성장해 나가는 기독교인의 삶으로 묘사되고 있다. 칭의, 곧 화해의 말씀이 보편적이듯이, 성화의 말씀도 더욱 보편적이어야 할 것이다.그리하여 성화는 믿는 자들의 삶에만 반영되지 않고, 역사와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 즉 전 피조물의 변화의 원동력이 되어야 하겠다. 그러므로 성령의 나라는 곧 하나님의 나라요, 그 나라는 칭의와 성화를 두 기둥으로 가지는바, 그 둘 모두가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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