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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주삼의 "구신약전서총론" 에 대한 해석학적 고찰 : 신학세계 제 1권, 2권을 중심으로

        김충진 감리교신학대학교 대학원 2009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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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한국인 최초의 구약학 논문인 양주삼의 “구신약전서총론”에 대해서 세밀하게 연구해 보았다. 양주삼은 Ⅱ장에서도 언급했듯이 지금의 기독교대한감리회를 있게 한 탁월한 교회 행정가이며 지도자였다. 뿐만 아니라 일찍이 미국에 유학하여 당대의 세계적인 신학을 수학하였고, 남감리회 선교의 중심인물이 되었으며 1930년 한국에서 남북감리회가 합동하여 ‘기독교조선감리회’를 조직할 당시에는 초대 총리사가 되어 명실상부 한국 감리교행정의 총괄자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감리교협성신학교에서 신학생들을 열과 성을 다해 가르치는 교수였다. 그가 감리교협성신학교에 재직하던 당시에 한국 최초의 신학전문 잡지인 『신학세계』를 1916년에 창간한 인물이었다. 이는 장로교 평양신학교의 『신학지남』보다도 2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기독교가 처음 전파되던 그 당시에는 미국의 선교사들이 근본주의 신학을 심어주고 그것을 철저히 지키게 하였다. 특히 성서무오설, 축자영감설 등의 신학이 장로교뿐 아니라 한국교회의 주류신학을 이루었다. 장로교의 경우는 『신학지남』출간 이후에도 철저히 선교사들에 의해서 논문이 실리고 연구되어졌다. 그러다가 1928년이나 되어서야 겨우 한국인이 『신학지남』에 논문을 실을 수 있었다. 그러나 감리교의 경우는 처음부터 양주삼이라는 한국인에 의해 『신학세계』가 창간되었고, 『신학세계』는 창간된 1916년부터 한국인과 외국인의 글이 함께 자유롭게 실렸다. 심지어는 학생까지 논문을 실을 수 있는 등 매우 자유로운 학문 연구의 지평을 열어 주었다. 바로 여기서 1916년과 1917년 2년에 걸쳐 『신학세계』제 1권 1,2,3,4호와 제 2권 1,2,3호 총 7회 또한 연재된 방대한 양의 한국인 최초의 구약학 논문이 바로 “구신약전서총론”이라는 것이다. “구신약전서총론”은 제 1편 총론, 제 2편 구약전서총론, 제 3편 신약총론 으로 총 3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구약과 신약을 총망라 하여 서술한 당대의 성서학 개론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구신약전서총론”의 전체의 내용에 대해서 연구한 이는 없었으며 간혹 “구신약전서총론”을 언급한다고 하더라도 전체의 문맥이 아닌 어떤 일부의 몇 문장만을 인용하여 그것이 마치 “구신약전서총론”의 전체의 내용인양 취급해 버리는 오류를 범한 것이 많았다. 뿐만 아니라 한국 감리교회 성서신학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구신약전서총론”을 곡해함으로 말미암아 한국 감리교회 전체의 신학을 자유주의로 이해하여 평가 절하해 버리는 악영향을 낳게 되었다. 지금도 대한민국의 남쪽에서는 감리교회를 이단이라고 말하며, 감리교회 신학교는 자유주의에 물들은 이단 사상을 수혈하는 곳이라는 편견이 만연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무지로 비롯된 것이며 양주삼의 “구신약전서총론”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위의 주장과 같은 감리교회에대한 편견은 불식되고 말 것이다. 양주삼의 “구신약전서총론”을 세밀히 연구한 결과 제 1편 총론에서는 그가 성경을 최고의 권위 있는 책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귀한 복이 바로 성경임을 강조하고 있다. 성경은 다룬 어떤 문화의 것과도 견줄 수 없는 최고의 가치 있는 책으로 설명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사상이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임도 알 수 있으며, 성경의 성령에 감화된 증거 까지 이야기 한다. 뿐만 아니라 성경의 형성된 과정 가운데 약간의 사람의 뜻과 오류가 있음을 과감하게 지적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성령의 섭리로 이루어진 것임을 강조하면서 최종형태의 본문에 권위를 가장 중요하게 여김을 밝히고 있다. 제 2편 구약전서총론 에서는 모세오경의 저작이 정확히 누구인지 확실치 않으나 그것이 성경의 권위에 문제가 되지 않음을 밝히고 있으며, 육경설 또한 소개하고 있다. 또한 성경의 후대 편집의 부분을 이야기하면서도 그 과정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강조하면서 역시 최종적으로 형성된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구약이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예언한 것이라는 확고한 그의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 성서신학사상도 엿볼 수 있다. 제 3편 신약총론 에서는 신약성경이 장구한 세월동안 진화발전 되었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또한 신약의 정경화 과정이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졌지만 그 안에서 섭리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그는 더욱 강조하였다. 그리고 구약과 신약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고 있기에 가장 소중한 것이라는 그의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을 발견할 수 있다. (자세한 사항은 본 논문의 제Ⅲ장을 참고.) 이상의 연구결과를 통해 당시 선교사중심의 ‘근본주의신학’사상이 주류를 이루던 한국교회, 특히 ‘근본주의신학’의 강한 봉쇄아래 수많은 교단 분열을 초래한 한국장로교회와 비교하여 한국 감리교회의 양주삼이 “구신약전서총론”을 통해 이루어 놓은 업적과 신학적 특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결론을 내리겠다. 1. 성경의 개방적연구와 성령의 감화성: 양주삼은

      • 공명하는 생명신학 : 선순화 목사의 생애와 신학사상

        이진영 감리교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2009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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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순화는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장학금으로 공부하면서 서울대와 대학원에서 오랫동안 임학분야에서 공부하였다. 미국유학을 가서도 임학을 공부하다가 삶의 한 과정에서 전환점처럼 신학을 만나 공부하였다. 그는 서구에서 신학을 하였으나 서구이론을 그대로 답습하는 자가 아니라 한국의 무속에 대한 여성 신학적 접근과 노동현장에서 고통 받는 여성들의 현실에 대한 관심을 통하여 살아 숨 쉬는 학문의 길을 가고자 하였다. 그의 학위 논문인 [Women, Religion, Power]는 이를 잘 반영해 주고 있으며 그 후의 신학적 관심사들도 대부분 사회적 약자들인 여성 민중과 가난한 이웃, 그리고 수탈당하는 자연으로 확대되어 갔다. 그는 지구화로 인해서 약자들이 고통 받고 자연이 수탈당하는 세계에서 하나의 대안으로서 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높았으며 이를 생명신학에서 체계적이고도 종합적으로 조명하려 하였다. 특히 여성 신학적 관점에서 여성의 경험과 몸을 중시하면서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폭넓은 자연과학적 지식과 소통하였다. 선순화의 학문적 관심은 고통 받고 있는 생명체 어디든지 뻗어 나갔다. 여성, 가난한 자, 그리고 자연까지. 그리하여 그는 생명신학을 기획하였고 그의 생명신학은 일찍이 공부한 생명과학에 속하는 임학의 토대와 여성과 가난한 이웃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신학과 결합하여 잘 뻗어나가려다 귀천하였다. 그는 학문은 살아있는 삶과 연결되어야 하며 그리스도의 신앙은 일상의 삶을 성화시킴으로써 고양된다고 믿었다. 그러기에 그는 지구화로 인해서 약자들이 사회경제적으로 고통 받고 있으며 자연 역시 과도한 개발과 소비지상주의적 삶의 양식으로 수탈당하는 현실의 대안으로 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그의 공동체에 대한 관심은 생명신학에 대한 실천적 영역이었다. 또한 여성의 경험과 몸을 중시하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소통하는 신학을 형성하고자 하였으며, 실천과 현장에 대한 관심은 여성단체의 활동으로 이어졌다. 그는 아주 체계적이고도 종합적인 완성도를 가진 종교이론과 여성신학을 바탕으로 한 생명신학을 형성 할 수는 없었으나 적어도 21세기를 열어가는 시점에서 그가 지향한 신학적 방향만으로도 우리는 많은 삶의 통찰과 신학적 지혜를 배울 수 있다. 무교와 기독교의 비교를 통한 여성 사제자들의 영성의 동질성과 연결고리를 밝힌 “선순화는 목사나 박사로서가 아닌 한 인간으로, 한 민중으로, 한 아시아인으로 그리고 한 한국인으로” 살다 가시며 우리 모두의 하나 됨을 강조하였다. 선순화는 생명, 삶, 생태. 신앙, 신학, 여성, 민중, 민족, 동양, 문화를 삶의 풍토에서 통전하려 노력했던 인물이다. 필자는 이 통전의 신학함을 바느질이라는 용어로 표현하고 싶었다. 다른 색깔, 다른 문양, 다른 천들의 조합으로 만들어지는 조각보의 탄생, 또 다른 작품의 탄생은 이 모든 삶의 낱말들을 통전할 때 재탄생한다. 이것은 일상이며 살림이고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이다. 틈 사이에서 모든 그물망을 껴안는 여성성의 부드러움으로 우리 모두 함께 가야 하는 삶의 길인 것이다. 1) 일상성 - 살림의 영역 돌봄과 양육, 섬김과 나눔 등 살림의 가치들은 여성적 가치들과 일치한다. 여성이 일상의 살림을 통해서 실천하여 온 가치들이 생명문화 형성의 중요한 가치가 되는 것이다. 살림은 일반적으로 가사노동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가사노동의 의미를 넘어 죽임의 반대말로서의 살림의 적극적이고 포괄적인 철학과 사상이 담긴 말이다. 생명은 하느님의 선물이며 은혜의 신비이며 그것은 살림, 모든 가치의 근거이다. 살림의 일은 하찮고 작은 것들이다. 그러나 생명을 지속시키고 살려내는 힘이다. “밥상을 차리는 부엌에서의 노동이야말로 위대하다. 세상의 어떤 일보다도 생명의 밥상을 위한 노동은 거룩하다. 부엌은 사람을 살리는 자리이다. 온 식구들이 한상에 모여 밥을 나누면, 그것이 곧 생명을 나누는 거룩한 자리이다.” 공동체성의 추구와 타자에 대한 배려는 일상의 실천 속에 중요한 원리가 되어 자신과 함께 사람들을 풍요롭게 성장시킨다. 살림의 공동체성은 지속적인 관계와 끊임없는 교감 속에서 생명을 살리는 지속적 실천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다. 기여민 활동을 통해 가난한 여성들과 함께 울 수 있는 여성이 되었다는 한 회원은 자신의 삶이 아이들 뿐 아니라 가난한 엄마들을 당당하게 살게 하고픈 소망을 가지고 활동을 한다고 했다. “나는 하루 종일 아이들과 함께 놀고, 밥하고. 설거지하고, 밥 먹이고 재우고, 걸레질한다. 난 이러한 일들을 기꺼이 내 운동의 영역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남들 볼 때 하찮다고 생각되는 일을 나는 저버릴 수 없는 시대의 요구로 생각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인류 문명과 근대를 통해서 이러한 여성의 ‘살림살이’는 올바르게 평가받지 못하고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종속된 열등한 존재로 부수적인 역할밖에 하지 못하는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 별것도 아닌 것을 꾸준히 끝까지 밀고 나가 성과를 내는 것이 여성생명운동의 특징이다. 늘 자신을 돌아

      • 팬데믹 상황에서의 온라인 예배 연구 : 감리교신학대학교 [나눔의 예전학회]의 사례를 중심으로

        최영록 감리교신학대학교 대학원 2022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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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논문의 주제는 팬데믹 상황에서의 온라인 예배 연구이다. 이름에서도 드러나듯 굉장히 동시대적인 주제이다. 코로나19라는 사상 유례없는 펜데믹으로 인해 전 세계의 정치, 사회, 경제 등 모든 분야에 큰 변화의 물결이 드리우게 되었다. 이천 년 역사 동안 수많은 변화를 겪어왔던 기독교 예배도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피해갈 수 없었다. 예배는 그 태생부터 공동체적 행위였기에, 예배 모임은 기독교 공동체의 정체성과도 같았다. 그렇기에 온라인으로의 예배 전환은 교계에 엄청난 논쟁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었지만, 대부분 찬반에 대한 이론적 입장 정리나, 교회와 사회적 변화에 관한 현상학적 연구에 그치고 말았다. 또한, 이미 온라인 예배를 시작한 교회 현장에서는 온라인 예배의 방법론 탐구에만 몰두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에 연구자는 온라인이라는 방법론을 탐구하기 전에, 예배라는 본질이 무엇인지에 우선 집중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예배의 본질이 계속해서 변화하는 시대적인 상황과 다양한 방법론 속에 어떻게 왜곡되지 않고 담길 수 있을지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실천적 제언을 통해, 실제 예배 현장에서도 온라인 예배가 선용(善用)될 수 있도록 돕고자 한다. 예배는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다양하게 정의될 수 있으나, 그것들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하나님과 인간 존재의 만남’이라 할 수 있다. 그 신비한 만남에는 두 가지 큰 축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와 그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다. 그렇다면, 과연 온라인상에서도 예배의 두 축인 ‘하나님의 계시’와 ‘인간의 응답’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어떠한 이유로 가능하며, 또 무엇을 통해 가능한가. 예배는 단순히 보고 듣는 시청물이 아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일어나는 장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의 모든 감각을 활용하여 느낄 수 있으며, 느껴야만 한다. 이에 대해 연구자는 예배가 오감(五感)을 넘어, 영적인 감각까지 포함된 육감(六感)을 통해 이루어져야 함을 주장한다. 예배자로서의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의 응답은 단순히 개인적 행위가 아닌 공동체적 행위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예배가 온라인으로 전환되면서 많은 예배자들이 예배에서의 다 감각성과 공동체성을 잃어버리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역자들은 기술적인 방법론이나 새로운 컨텐츠를 찾지만, 우리에게는 이미 가장 좋은 해결책이 주어져 있다. 그것은 바로 성찬이다. 예배에서 성찬을 회복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예배의 본질을 회복할 수 있다. 하지만 온라인에서도 성찬이 가능한지에 대해 여전히 의문을 품는 예배자들이 있다. 그러므로, 연구자는 실제 온라인을 통해 성찬예배를 드린 모범적이고, 실천적인 예시를 제공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감리교신학대학교 나눔의 예전학회(지도교수: 박해정)에서 코로나19 팬데믹의 한복판에서 진행했던 “대면-향기로 잇다” 예배이다. 이를 통해, 각 교회의 온라인 예배가 단순히 보고 듣는 시청물이 아니라, 맛보고 경험하는 예배로 회복되고 갱신되기를 기대한다. 또한, 본 연구와 사례를 통해 단순히 이번 팬데믹으로 인한 온라인 예배에서뿐만 아니라, 앞으로 맞이할 다양한 사회적 위기와 변화 속에서도 우리의 예배가 그 본질을 건강히 지킬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 청인의 입장에서 본 감리교 농인사역의 현장과 과제

        정지선 감리교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2012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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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논문은 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 농인교회의 실태를 파악하고 농인목회 현장에서의 문제점들에 대해 조사해 봄으로써 농인선교 활성화를 위한 농인과 청인의 협력 방안들을 모색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홀 선교사로부터 100여년, 최초의 농인교회 설립 이후 65년의 긴 역사만큼이나 농인선교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선교주체의 변화이다. 선교초기 외국인 선교사에서 점차 한국인 청인목회자로, 현재는 농인목회자로 선교주체가 변화되었다. 선교의 현장도 학교에서 교회로, 청인교회 농아부에서 독립된 농인교회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농인들만의 특수한 언어와 문화를 전면수용하면서 그들이 가장 잘 수용할 수 있는 언어적, 문화적 접근으로 선교하기 위한 발전적 변화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농인선교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단절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선교주체와 선교방법이 모두 농인 중심이 되면서 청인들은 농인선교에 대한 사명으로부터 조금씩 멀어져갔다. 그 결과, 활발하게 변화, 발전해오던 농인선교는 주춤해졌고 농인목회자들도 인적, 물적 자원의 한계는 물론 청인목회자들과의 의사소통 문제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러므로 농인선교 활성화를 위해서는 현재의 농인선교실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문제점과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농인과 청인의 협력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 논문에서 주로 사용된 연구방법은 조사방법으로, 설문지법을 사용하였다. 전국 감리교회 농인교회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여 농인사역의 실태와 청인의 농인사역에 대한 시각 및 농인과 청인의 원활한 커뮤니케이션과 선교동역을 위한 방법에 대해 알아보았다. 조사결과는 다음과 같다. 1. 지역별 농인 수에 비해 농인교회수가 턱없이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2. 20-30대 목회자가 전무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목회지망생도 점차 줄어들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3. 농인목회자 양성 활성화 방안으로, 대학원에 전문 수어통역사를 파견해 줄 것과 농인교수 및 강사를 통한 목회실제에 대한 강의를 수강할 수 있도록 해 줄 것을 제안하였다. 4. 목회자들의 사역희망지역이 대체로 도시지역으로 나타나 앞으로도 농어촌지역 농인선교가 활성화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측되었다. 5. 교인구성을 보면 성인은 농인이 대부분이며, 아동은 청인이 대부분이었다. 즉, 농인교회라 하더라도 교육 분야에서는 청인목회자가 필요하다는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 6.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최저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사례비를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7. 의사소통의 문제로 교육 참여나 교역자 회의 및 지방 행사참여가 매우 어려운 것으로 나타났다. 8. 청인목회자가 있는 농인교회는 많지 않으나 90% 이상의 목회자들이 농인교회 내 청인목회자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본 논문의 연구결과를 토대로 한 농인선교 활성화 방안들은 다음과 같다. 1. 농인교회와 농인목회자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2. 신학대학교의 과제로 전문 수어통역사 양성, 장애인 선교 및 농인 선교 과목 개설, 교육개발 및 교육 참여 기회 확대 등이 필요하다. 3. 지방회 및 연회, 교단 차원의 과제로서 농인교회에 대한 재정 및 인력지원, 수어성경제작의 교단적 협력, 교단 내 농인선교 체계의 구축 및 교단차원의 전문수어통역사 양성 등이 필요하다. 4. 지역 교회의 과제로서 자막예배 및 지역 농인교회를 위한 인력지원, 난청인과 후천성 농인 및 그 가정을 위한 사역이 필요하다. 이 논문을 통해, 농인선교를 농인들의 몫으로만 생각해왔던 현재까지의 사고가 전환되길 기대한다. 또한 이 논문을 기반으로, 농인들의 언어와 문화를 올바로 이해하고, 농인과 청인이 협력하여 이루어가는 농인선교의 구체적이고 활발한 연구들이 지속적으로 전개되길 기대한다.

      • 17-18세기 교회 안의 작은 교회(Ecclesiola in Ecclesia) 형성사 연구 : 슈페너, 진젠도르프, 웨슬리를 중심으로

        이동호 감리교신학대학교 대학원 2008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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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페너의 ‘경건 소모임’(Collegium Pietatis)은 ‘교회 안의 작은 교회’(Ecclesiola in Ecclesia)를 실현해 보고자 했던 최초의 시도였다는 점에서 불멸의 의의를 지닌다. 그는 제도적 교회의 틀 안에 소규모 공동체를 형성하고자 힘썼는데, 이는 중세 교회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고, 종교개혁 이후에도 “루터가 신학적인 담론으로만 남겨두고 한 번도 실천해 보지 못한 것” Beckham, 173) 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경건 소모임’은 근대적 소그룹의 효시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슈페너는 평생을 제도권 교회의 목회자로서 살았던 만큼, 이러한 모임을 이끄는 데 있어서도 ‘작은 교회’보다는 ‘교회’ 중심적이었다. 그런만큼, 경건 소모임이 분리주의의 온상이 되는 등 부작용이 나타나자, 자신이 시작한 경건 소모임을 과감히 포기하고 교리문답 교육, 심방, 가정예배 등 ‘교회 안의 작은 교회’를 실현하기 위한 다른 방안들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결국 소규모 공동체 자체로서의 생명력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오히려 ‘작은 교회’로서의 경건주의 운동의 진가는 사회적 영역에서 그 진가를 발휘하였다. 슈페너의 후계자 프랑케는 일생 동안 할레를 중심으로 학교, 고아원 등을 설립하고 사회사업에 힘썼으며, 이것이 연쇄망을 통해 유럽 전역에 알려짐으로써, 사회 성화에 대한 관심이 자라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소규모 공동체로서의 ‘작은 교회’가 그 자체로서 생명력을 갖고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진젠도르프 백작을 중심으로 한 헤른후트 형제단이 등장하면서부터였다. 슈페너의 ‘경건 소모임’과는 달리, 헤른후트 형제단은 진젠도르프 사후에는 물론, 오늘날까지도 사라지지 않았으며, 웨슬리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교파를 초월하여 매우 광범위한 영향력을 미쳤다. 헤른후트의 가장 큰 교회사적 의의는 거미줄 같은 조직망을 구성했다는 것이다. 소규모의 자발적 공동체인 ‘반’은 물론, 형제단 전체를 성별과 연령, 결혼 여부에 따라 나누고, 이렇게 나누어진 각 그룹마다 별도의 조직을 두는 ‘콰이어’ 체제를 운영함으로써, 형제단원들은 이중 삼중의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이러한 조직 형태는 기독교 역사상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이들은 또한 선교하는 공동체였다. 1720년대부터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하여 1760년에는 이미 226명의 해외 선교사가 파송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이는 ‘근대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영국의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 1761-1834)의 인도 선교보다 50년 이상 앞선 것이었다. 하지만, 헤른후트 형제단은 본래 루터교회 밖에서 시작된 운동이었던 만큼, 루터교회가 국가 교회로 자리잡고 있는 상황 속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결국 헤른후트는 끝끝내 루터교회 안으로 편입되지 못하고 루터교회와 공존함으로써, 제도적 ‘교회’와 공존하는 ‘작은 교회’로 머물 수밖에 없었다. 또한, 형제단의 지나친 공동체 중심적 구조 또한 부작용을 낳았다.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책임지는 ‘콰이어’ 체제 속에서, 전통적인 가족 질서가 붕괴되고, 일부 콰이어들은 본래의 종교적, 인격적 의미가 상실된 채 경제적 이익 집단으로 변질되어 갔던 것이다. 이러한 한계들은 존 웨슬리를 중심으로 한 감리교 신도회에 의해 어느 정도 극복되었다. 감리교 신도회는 개신교 역사상 최초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교회 안의 작은 교회’, 즉 제도적 교회 안에 자리잡은 소규모 공동체를 이루어 낸 운동이었다. 물론, 웨슬리 사후 감리교 신도회가 ‘감리교회’가 되면서 사정은 달라졌지만, 그 이전까지 50여 년 동안이나 감리교 신도회는 영국 국교회로부터 분리되지 않은 채 국교회 내부의 갱신운동으로 남아 있었다. 감리교 신도회는 또한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책임지는 ‘콰이어’ 체제 대신 자신들의 삶의 자리를 지키면서 정기적인 모임을 통해 공동체성을 유지함으로써, 헤른후트의 지나친 공동체 중심적 구조를 탈피할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상호 책임의식을 바탕으로 한 속회, 반 등의 거미줄 같은 소그룹 조직이었다. 또한, 이러한 조직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세운 평신도 지도력은 감리교 부흥운동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데 가장 큰 밑거름이 되었다. 이러한 감리교의 소그룹 조직은 현대 소그룹 운동의 원형이 되었고, 평신도 지도자의 활용은 현대 평신도 사역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 하지만, ‘민족을 부흥시키고, 특별히 국교회를 부흥시키며, 그리고 온 땅에 성서적 성결을 전파하는 것’이라는 웨슬리 본래의 목적에 비추어 볼 때, 감리교 신도회가 걸어간 길에는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국교회를 부흥시킨다는 본래 의도와는 달리 감리교는 결국 국교회로부터 분리되어 나왔고, 민족을 부흥시킨다는 취지와는 달리, (최소한 영국에서) 감리교는 지리적 사회적 분포가 고르지 못한 소수집단으로 남게 되었다. 미국의 감리교가 영국의 감리교에 비해 훨씬 더 크게 부흥되기는 했지만, 미국의 감리교회는 웨슬리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감독(bishop)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갖

      • 감리교 생태유아교육 대안 탐색 : "Waldorf 생태유아교육학과의 대화를 중심으로"

        황보현 감리교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2008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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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연구자는 몇 가지의 질문 제기를 통해서 논문의 주제에 관심하였다. ‘하나님께 서 창조하신 피조세계가 신음하며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창조의 영성을 가진 우리 감리교인들이 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실천 방안 마련에는 무관심할까?’, ‘왜 침 묵하고 있을까?’ 이에 대해 ‘세상의 ‘편리성의 원리’에 익숙해지고, 영성이 무뎌졌기 때문이라’고 답할 수 있다. 즉,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토대로 인간의 편리를 위해 자 연을 개발해도 된다는 의식이 자리하게 된 것이다. 이는 바로 인간에게 있던 본연의 “생태적 영성”이 “파괴적 영성”으로 변질되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우리 는 생태적 영성의 회복을 위해 감리교 웨슬리 신학의 회심의 신학, 코이노니아의 신 학, 성령 체험의 신학을 살피고, 그 실천적 대안으로 발도르프 생태유아교육학을 살 폈다. 이들의 만남을 통해서 감리교 생태유아교육학이 전인적이고 생태학적 패러다 임의 전환을 이루도록 해야 할 것이다. Ⅰ장에서는 20세기 말부터 극심한 생태적 질서의 파괴와 생태계 위기의 문제가 전개된 상황의 원인 즉, 이원론적인 세계관과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 과학기술문명, 대량생산과 소비 체계, 불평등한 국제관계, 국내 정치구조와 인성구조, 교육제도와 교육 내용 등의 다양한 요인들이 있음을 소개하였다. 다양한 요인들 중에서, 우리는 교육제도와 교육의 내용의 부분에 집중하여 생명의 질서를 회복할 수 있는 살림의 신학, 교육실천, 생태학적 패러다임의 전환을 목적으로 내용을 전개함을 밝혔다. Ⅱ장에서는 감리교 생태유아교육의 신앙의 모태가 되는 웨슬리의 사상과 감리교 신학, 한국 감리교신학과 기독교교육의 역사적 고찰을 하였다. 또한, 생태적 위기와 위협의 시대에 감리교 유아교육의 방향성이 어떠한지 살펴보기 위해 7군데 교회를 선정하여 -아현, 마포중앙, 낙원, 베다니, 삼양, 종교, 기쁜 교회 등- 실태를 조사하 였다. 감리교신학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통해 회심의 신학, 코이노니아 신학, 성령 체험의 신학에서 생태적 영성의 단서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감리교 기독교교 육의 실제적인 현장에서는 생태적 영성을 키울 수 있는 실천적인 교육의 내용과 방 법이 없음을 보게 되었다. Ⅲ장에서는 20세기 초엽부터 지금까지 범세계적인 영향력을 끼치며 발전, 연구되 고 있는 루돌프 슈타이너의 인지학적 인간 이해와 구체적 실천으로써의 독일의 발 도르프 생태유아교육을 살펴보았다. 또한, 현재 한국의 발도르프 유아교육 기관 중 에 서남 재단에 소속되어 있는 서울의 “서남발도르프어린이집”을 소개하였다. 실제 적으로 인지학적 인간 이해가 어떻게 드러나며, 발도르프 생태유아교육의 모습과 비 교해볼 때 어떠한 의의가 있는지 살펴보았다. Ⅳ장에서는 감리교 생태유아교육이 발전해야 할 방향성을 네 가지의 대안을 제시 하며 밝혔다. 발달론적 인간 이해에 대한 관점을 가지고 유아를 바라보고, 삶의 패 턴에 맞는 교육의 일정을 개발하자고 하였다. 또한, 유아에게 내재되어 있는 자유를 인정해주는 교육을 지향해야 하며, 생태적인 환경 구성과 환경에 대한 철학을 가져 야 함을 밝혔다. 이 대부분은 발도르프 생태유아교육학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기 때 문에 꾸준한 대화와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유아교육은 개인의 우열의 순서를 바꾸어 놓을 뿐만 아니라 인종 간 또는 국민 간의 우열의 순서를 바꾸어놓 을 수 있는 힘122)을 지니고 있으므로, 감리 교 기독교교육 안에서 유아교육을 재조명하고, 특별히 이 시대가 생태적 위기와 위 협으로부터 자유해질 수 있도록 하는 생태학적 패러다임의 유아교육이 필요하다. 유 아교육에서 생태학적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것은 거창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 다. 자연을 바라보는 눈과 사유하는 방식이 종래의 것과 다른 ‘생명의 고귀함’을 알 게 하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만이 아니라, 자연, 이웃, 모든 피조물의 생명이 고귀하 고 특별하다는 것을 알게 하면 된다. 또한, 감리교 생태유아교육은 회심, 코이노니아, 성령 체험에서 생태적 영성의 단 서를 가지고 있는 감리교 신학을 중심으로 실천적인 범위 안에서 21세기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자연과 인간의 관계 회복을 꾀해야 한다. 다양한 교육적 방법과 원리, 교육목적과 목표를 제시하고 교육의 내용을 구성하며, 현실의 문제 특 히, 생태계의 위협과 더불어 생겨나는 많은 문제, 인간의 물질화 등에 정면 승부할 수 있는 생태적 영성의 회복과 전인적이고 생태적인 패러다임에 근거한 신학과 교 육의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우선은 감리교가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에 맞는 생태적인 영성을 회복하고, 자연과 인간,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에 대한 새로운 코이노니아적 관계를 형성해야 한 다. 이러한 감리교 신학에 대한 재해석은 성서신학, 역사신학에서 더 구체적으로 제 시되어야 하겠다. 우리는 발도르프 생태유아교육의 교육원리인 리듬생활, 자유의 원 리, 생태적 원리의 내용을 감리교 생태유아교육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고민해 보아야 하고, 감리교 생태유아교육이 바르게 정립될 수 있도록 지속적인 연구가 필 요하겠다. 또한, 이러한 감리교 생태유아교육이 발도르프 생태유아교육을 넘어서 전 우주적인 생태적 영성을 회복하는 감리교 기독교교육으로 자리 잡기를 바란다.

      • 개신교회 주일 예배 형식 변화의 역사적 고찰과 미래적 한국 감리교 주일 예배 형식의 제안

        김명신 감리교신학대학교 대학원 2008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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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연구는 기독교의 예배에 있어서 형식을 초점에 두고 그 형식상에 어떠한 역사적 흐름을 가지고 변화하여 왔는지를 살펴보았다. 초대교회를 비롯된 중세교회, 종교개혁 시대, 종교개혁 이후, 영국 성공회, 웨슬리 예배, 초기 감리교회 및 현대 감리교회 예배까지 그 예배들의 형식적 특징들과 형성적 배경들을 언급하고 설명하였다. 연구를 통해 필자가 발견할 수 있었던 사실은 기독교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예배의 형식들은 성서적 기초 위에 있었으며, 그 시대에 필요한 진지한 신학적 고민이 담겨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각 시대의 예배 형식은 수정, 보완 되면서 다른 예배 형식에로의 태동에 영향을 주게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웨슬리의 예배 형식 태동에는 그 배경에 성공회 예배 형식에 대한 이해의 바탕이 있었기에 가능하였고, 초기 한국 감리교회 역시 미국 감리교회의 예전적 모습들을 답습한 이후에 한국적 감리교회 예배 형식을 만들어 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하기에 필자는 예배 형식 형성의 역사적인 흐름들과 특별히 감리교적 예배 형식의 발전상들을 통해 오늘날 한국 감리교회 예배 형성에 바탕이 되는 형식적 요소들을 발견하고자 하였다. 또한 오늘날의 한국 감리교회의 주일 예배 형식들을 『새 예배서』와 비교, 연구, 평가해 봄으로 예전적 이해와 의미가 상실되어 버린 지금의 감리교회 주일 예배 형식을 비판하고 성서학적, 신학적, 전통적, 감리교적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새로운 예배 형식으로의 갱신 방향성과 새로운 예배 모델을 제시하였다. 제시한 예배 형식의 모델을 통해 한국 감리교회 가운데 예배의 형식이 가지는 중요성이 각인되며, 보다 감리교적이고, 보다 건설적인 한국 감리교회의 주일 예배 형식의 정착을 위한 작은 기초석을 옮겼다는 것에 본 본문의 연구를 평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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