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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세기 淸州地域己卯士林의 활동과 그 영향

        고수연(Go, Soo-Youn) 역사실학회 2017 역사와실학 Vol.64 No.-

        조선 중기 이후의 湖西地域 士族의 연구는 다소 편향된 연구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첫째, 湖西學派라고도 일컬어지는 西人-老論系 士林을 중심으로 연구되어 왔다. 둘째, 湖西右道 중심으로 검토되었다. 셋째, 17세기 후반-18세기 전반을 중심으로 연구되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균형 있는 호서지역 사족 연구를 위해서 湖西左道 중 청주 지역의 16세기 인물로 己卯士林인 金淨·朴薰·韓忠의 활동과 그 의미에 대하여 검토하였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 16세기 청주지역 출신 인물인 김정·박훈·한충이 기묘사림 黨籍類에 핵심인물로 수록되어 있었다. 둘째, 이들은 모두 기묘사림의 가장 주요 인물인 趙光祖와 깊이 교유하면서, 道學思想과 至治主義를 공유하고 있었다. 셋째, 청주 기묘사림은 그들의 사상을 담고있는 小學과 鄕約의 실천과 국가적 보급에 큰 역할을 하였다. 넷째, 17세기 기호학파의 본격적인 활동 이전인 16세기 중반에 청주 기묘사림을 제향 한 상현서원·신항서원이 호서좌도에 건립되어 지역 사림들에게 영향을 준 것은 물론 조선 서원의 탄생과 확산에도 역할을 하였다. 다섯째, 16세기 청주 기묘사림의 배출로 청주는 물론 호서좌도에는 향약과 『소학』의 실천과 보급이 더욱 강조되고 이를 교육하는 많은 서원이 건립되는 등 사림들이 지향한 성리학적 유교 질서가 지역사회에까지 안착한다. 이것은 金長生·宋時烈·宋浚吉 등으로 대표되는 17세기 호서우도 사림의 활동보다 빠른 것이다. 이러한 청주 기묘사림의 존재와 활동은 기호학파의 시작인 李齊賢·李穀·李穡·權近에서 李珥 사이의 150여 년의 간극을 메워주고 있다. 여섯째, 그러나 청주 기묘사림을 제향한 서원은 17세기 후반 이후에 이이·김장생·조헌·송준길·송시열 등 서인-노론계 인사가 추향되며, 주향으로 위차가 조정되기도 하였다. 또한 사액까지 노론계가 관여하면서 서원 건립 당시 강조되었던 청주 기묘명현의 정신과 영향력은 퇴색하고 서인-노론계의 잠식화가 가속화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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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문(論文) : 16C 기묘사림(己卯士林)의 기몽시(記夢詩) 연구(硏究)

        손유경 ( Yoo Kyung Son ) 한국한문고전학회(구.성신한문학회) 2008 漢文古典硏究 Vol.16 No.1

        1506년 중종반정을 기점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 16C는 훈구파와 사림파의 갈등으로 인하여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기였다. 이들의 첨예하게 대립되는 정치적 입장은 결국 기묘사화로 많은 사림파 문인들이 희생을 당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다. 이 때 희생된 사람들을 己卯士林이라고 한다. 그동안 16세기 사림문학에 대한 연구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왔으며. 그 결과 이 시기 載道文學에 대한 연구는 상당 부분 진척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 성향은 이 시기의 사림 문학 전반을 재도 문학으로 아울러 내는 거시적인 관점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에, 문학 작품의 개별적 분석을 통한 미시적 관점에서의 접근은 미비하였다고 생각된다. 본고는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반 하여 이 시기 사림 문인들에 대한 개별적 작품 분석을 통해 그들의 의식 세계를 탐토해 보고자 하는 큰 연구 목적의 한 작업으로서 16세기 기묘사림들의 記夢詩를 분석한 것이다. ‘記夢詩의 淵源및 定義’에서는 기몽시의 연원을 정리하고, 이를 통해 기몽시의 개념을 추출하여 정리하였다. ‘記夢詩 分類’에서는 16C 己卯士林의 記夢詩를 出仕에의 의지 표출ㆍ정치 현실에 대한 비판ㆍ至親에 대한 그리움ㆍ절망적 상황에의 신세 한탄의 네 가지로 분류하여 분석하였다. 이러한 記夢詩의 분석은 기묘사화 후 개인 작품의 산일과 그들의 짧은 생애로 인하여 그들의식의 내면을 고찰할 방법이 적은 당시 사림 문인들이 유배기의 심리 상태를 살펴볼 수 있다는 데에서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겠으며, 또한 이들의 記夢詩가 16C 후반의 다양한 형태의 기몽시가 창작되는 데에 일정정도의 기여를 하였음을 밝히는데 필요한 작업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본고는 시작품의 분석 대상을 일부 기묘사림의 작품에 국한하고 있다는 한계점을 지닌다. 이러한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記夢詩를 분석하려는 시도는 그들의 의식세계의 일단면을 엿보는 데에 유의미한 작업이라고 생각된다. 추후 이 시기 개별 작가들의 시작품 분석 과정에서 더 많은 기몽시 작품들을 보완하여 논의를 발전시킬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1506 was the time of political confusion owing to the feud of hoongu-pa(勳舊派) and sarim-pa(士林派), which is also the time of sixteenth-century starting from jungjongbanjoeng(中宗反正). This political situation of sharp conflict caused that many sarim-pa men of letters were sacrificed from KIMYOSAWHA(己卯士禍). And people who were sacrificed at that time are called KIMYOSARIM(己卯士林). This manuscript is the analysis of KIMONGSI(記夢詩) of the sixteenth-century KIMYOSARIM(己卯士林) as one of work, which is based on the large purpose of research to investigate and consider their consciousness through the analysis of an individual work about sarim men of letters at that time. ‘In the chapter of the origin and the definition of KIMONGSI(記夢詩)’ the origin of KIMONGSI(記夢詩) has been organized, and through this, the general idea has been abstracted and organized. ‘In the chapter of the classification of KIMONGSI(記夢詩)’ it has been classified and analyzed byfour topics, which are the will expression of KIMONGSI(記夢詩) of the sixteenth-century KIMYOSARIM(己卯士林), the criticism of political actuality, the yearning of friends and the lamentation of hopeless circumstances. This analysis of KIMONGSI(記夢詩) has a meaning that we can see the mental state of sarim men of letters in the period of exile, even though it is hard to consider their inner world owing to their short life and the dispersion of an individual work, and is supposed to be required work to find out that their KIMONGSI(記夢詩) contributed to create various types of KIMONGSI (記夢詩) partly for the later sixteenth-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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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묘당적>과 <기묘록보유>의 저술 의의에 대한 검토

        임상혁 진단학회 2019 진단학보 Vol.- No.132

        I analyzed the contents of the Gimyodangjeog(기묘당적 己卯黨籍 The Gimyo Party's List, mid 16C) and the Gimyorogboyu(己卯錄補遺 The Supplement of the Gimyo Party, late 16C) which have been used as basic materials on the study of Gimyosarim(기묘사림 己卯士林 The scholarly bureaucrats suffered by the calamity in 1519) and till now accepted that the latter just supplemented the former's short story. This kind of view point, however, should be corrected as the result of the analysis. Kim Jeong-gug wrote the Gimyodangjeog in order to define the Gimyosarim as his colleagues who tried to make the ideal society based on the Neo-Confuciusism together until 1519 and to keep them receiving a favorable evaluation in the future. When the Gimyosarim became the name of glory eventually, An Ro wrote the Gimyorogboyu to put the victims of the calamity in 1521(신사옥사 辛巳獄事) into the category of the Gimyosarim, carrying the banner for the supplement of Gimyorog. This calamity arose because of the attempt of purging the King Jungjong's high officials, in which his family members had been mainly involved. Using the book An Ro tried to make victims of the case honorable and to destroy the family of accuser, Song Saryeon and finally achieved the purpose. 본 논문에서는 기묘사림 연구에 기초 자료로 활용되고 있는 『기묘당적』과 『기묘록보유』의 내용을 분석하였다. 이제까지는 양자의 관계에 대하여 전자의 소략함을 후자가 보충한 궤를 같이 하는 저술들로 여겨져 왔다. 분석의 결과, 김정국은 기묘사림을 설정하고 밝혀 그 정당성이 평가되기를 기대하여 『기묘당적』을 저술하였다는 것, 하지만 기묘사림은 조광조 일파를 의미하지 않으며, 조광조 사건으로 불이익을 받은 사람들에 대한 개념으로는 기묘당인이라 보고 있다는 것, 결국 김정국 『기묘당적』에서 설정한 기묘사림은 ‘기묘사화가 일어날 때까지 성리학적 이상에 기반한 개혁을 추구했던 사림 관료들’이라는 것을 논증하였다. 안로의 『기묘록보유』는 『기묘당적』에 빠진 사항을 보충하여 기묘사림의 정당성을 고양하기 위하여 저술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의도적인 중대한 변형이 이루어졌다. 『기묘당적』에서의 분류를 의도적으로 없애고 인명들을 추가하여 열전의 형식으로 만들면서, 결국은 기묘사림의 범주를 바꾸어 버렸다. 곧, 『기묘록보유』는 기묘사화와 신사옥사를 일련의 한 사건으로 병합하고, 그 모든 관련자들을 기묘사림으로 만들었으며, 이를 위해 신사옥사도 없던 일을 송사련이 꾸며서 고변하고 남곤, 심정들이 억지도 엮은 무고 사건으로 구성되었다. 나아가 여기에는 또 이후의 소송으로 송씨 집안을 몰락시키기 위한 기반을 다지는 역할도 수행되고 있음도 살필 수 있었다. 이처럼 『기묘당적』과 『기묘록보유』의 분석은, 이제까지 대체로 분량의 차이가 있을 뿐 동류의 계열이라 여겨져 왔던 두 저술에 대하여 서로 판이한 인식을 바탕으로 현출된 사회적 저작물이라는 것을 밝히게 되었다. 이들 저작에 대한 재인식을 통해 이제까지 당연하게 생각해 왔던 기묘사림과 기묘사화에 대한 기존 인식에 관해서도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해 보는 계기도 만들어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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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訥齋 朴祥의 忠州牧使 시절 기묘사림과의 시적 교유와 그 의의

        박명희(Park, Myoung-hui) 국어국문학회 2019 국어국문학 Vol.0 No.189

        본 논문은 박상이 충주 목사 시절 기묘사림과 교유하던 중 지은 시를 대상으로 그 실상을 살핀 뒤에 그 특징과 의의를 밝히는 것을 목표로 정해 내용을 서술하였다. 박상은 기묘사화가 끝난 지 2년이 채 안 된 시점에 충주 목사로 부임하는데, 필자는 여기에서 기묘사림들과 만나 시적 교유를 한 것은 유의미하다 판단하여 논문을 작성하였다. 박상이 충주 목사 시절에 만난 기묘사림은 공서린, 김세필, 이약빙, 이연경, 이자등 총 5명이다. 이 중에서 이자 · 이연경 · 김세필 등과 관련한 작품을 집중적으로 논의하였다. 이자와 관련한 작품은 총 2제 6수로 집계되었다. 박상은 이자에게 시를 통해 진심어린 위로의 말을 전달했음을 확인하였다. 이연경과 관련한 작품은 총 3제 7수인 것을 확인하였다. 이연경은 광주이씨 명문가 집안으로 박상은 시를 통해 이러한 부분을 부각시켰다. 김세필과 관련한 작품은 총 13제 46수였다. 박상은 바쁜 공무를 보는 틈틈이 김세필이 사는 곳을 자주 드나들며 우의를 다지고, 때로는 열띤 학문의 토론도 했음을 알았다. 본 논고는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교유시의 특징과 의의를 정리하였다. 박상은 충주 목사 시절에 기묘사림들과 시를 통해 진심이 담긴 교유를 하였다. 특히, 김세필과 관련한 시를 수십 편 지어 다른 기묘사림과 대비되는 특징을 보여주었다. 박상을 가리켜 ‘기묘완인’이라 하는데, 필자는 이러한 칭호를 받게 된 계기를 충주 목사 시절의 행적에서 찾았다. 박상은 충주 목사 시절에 기묘사림들과 교유하며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한편, 크게 드러나지 않으나 소신 있는 발자취를 남겼기 때문이다. 또한 기묘사화 이후 사림들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시를 통해 교유하여 결속을 다져 사림 문화의 면모를 보여주었다는 점을 그 의의라고 하였다. This study aimed to investigate poetry Park Sang as Choongjoo minister wrote during having friendship with Kimyosalim through poetry, its characteristics and meaning. The Kimyosalim members Park Sang met as a minister of Choongjoo were Gong Seo-Lin, Kim Se-Pil, Lee Yak-Bing, Lee Yeon-Gyeong and Lee Ja. He wrote a total of 62 poems with 20 themes in respect to the five members, through which what they talked at those times was understood. In particular, this study gave a focus on the poems relating to Lee Ja, Lee, Yeon-Gyeong and Kim, Se-Pil. As for Lee Ja, there were a total of 6 poems with 2 themes. It was confirmed that Park Sang gave sincere consolation through poetry to Lee Ja. As for Lee, Yeon-Gyeong, there were a total of 7 poems with 3 themes. Park Sang emphasized that Lee Yeon-Gyeong came from a prestigious family of Gwangju Lee in his poetry. There were a total of 46 poems with 13 themes relating to Kim Se-Pil. Park Sang frequently visited Kim Se-Pil"s place and had passionate debate on academic topics with him even though he was very busy with his official job. This study investigated the characteristics and meaning of friendship poetry based on the results presented above. Park Sang as Choongjoo minister had true friendship with Kimyosalim through poetry. Also, he wrote a few scores of poems relating to Kim Se-Pil, which were different from those on other Kimyosalim members. It was assumed that Park Sang was called ‘Kimyowanin’ because of his achievements as a minister. He had humane relations with Kimyosalim and had a strong belief even though it was not clearly revealed. It was the meaning of friendship poetry he wrote while working as a minister in Choongj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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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종대 기묘사림의 왕실 혼례 개혁안과 ‘祖宗之法’

        김경래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21 한국학연구 Vol.- No.62

        이 글은 중종대 기묘사림의 왕실 혼례 개혁안을 둘러싼 논쟁의 논점과 논거를 새롭게 검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왕실 혼례 논쟁의 중심에는 親迎禮과 廟見禮가 있었는데, 중종 10년 중종이 새로운 왕비를 맞이하게 됨으로써, 이 논쟁은 특히 국왕 중종의 친영례와 묘현례 실천 여부에 집중되었다. 친영례와 묘현례는 『예기』와 같은 서적에 이른바 ‘고례’로서 등장하는 의식으로, 『주자가례』에도 士庶禮의 하나로 수록되었다. 한편, 조선의 『국조오례의』에 왕세자 등의 혼인 때 시행하는 친영례는 수록되어 있었으나, 국왕 혼인 시의 친영례나 묘현례 규정은 없었다. 사실, 국왕이 직접 친영례와 묘현례를 모두 행한 것은 조선은 물론 古代 이래 중국에서도 前例가 없는 일이었다. 이에 기묘사림이 포진한 대간과 대신 사이에서 이를 둘러싼 찬반 논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기존 연구에서는 이를 ‘고례파’ 對 ‘국조오례파’의 대립으로 정리하였다. 하지만, 논쟁의 내용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친영례 논쟁과 묘현례 논쟁의 논점이 서로 달랐으며, 양측은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보다 다양한 근거와 논리를 동원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기묘사림과 『주자가례』, 양자의 관계에 대해서도 기존의 통설과는 다른 해석이 필요함을 발견할 수 있다. この論文は中宗代の己卯士林の王室婚礼改革案をめぐる論争の論点と論拠を新たに検討することを目標とする。 王室婚礼論争の中心には親迎礼と廟見礼があったが、中宗10年、中宗が新しい王妃を迎えることにより、この論争は特に国王の中宗の親迎礼と廟見礼の実践の有無に集中した。 親迎礼と廟見礼は『礼記』のような書籍にいわゆる「古礼」として登場する儀式であり、『朱子家礼』にも士庶礼の一つとして収録されている。 一方、朝鮮の「国朝五礼儀」に王子ㆍ公主らの親迎礼は収録されていたが、国王婚時の親迎や礼見の規定はなかった。 実際、国王が直接親迎礼と廟見礼をすべて行ったのは、朝鮮はもちろん、古代以来、中国でも前例がないことだった。 これに己卯士林が布陣した臺諫と大臣の間でこれをめぐる賛否論争が活発に展開された。 既存の研究ではこれを「国朝五礼儀派」対「古礼派」の対立として整理した。 しかし、論争の内容を綿密に見てみると、親迎礼と廟見礼の論点がそれぞれ異なり、双方は自分たちの主張を正当化するためにより多様な根幹と論理を動員したことが分かる。また、己卯士林と『朱子家礼』、両者の関係についても従来の通説とは異なる解釈が可能であることが分か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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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文化柳氏嘉靖譜』(1565) 등장 관료의 친족연결망을 통해 보는 조선 전기 사림파의 사회적 배경: 기묘사림을 중심으로

        백광열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21 규장각 Vol.58 No.-

        이 글은 기묘사림에 초점을 맞추어 조선 전기 사림파 관료들의 지배층 내에서의 지위와 성격을 살펴본 것이다. 중앙정계에 진출한 사림은 도학정치를 주장하는 관료집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유교적 이상 못지않게, 지배층으로서의 현실적 존재도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기존 연구에서 사림의 사회적 성격을 경제적, 혈통적 공통성을 이용해서 파악하고자 한 바 있으나, 사림을 단일한 성격을 지닌 집단으로 규정하는 것은 쉽지 않음이 드러나고 있다. 최근에는 도덕정치를 실천하는 ‘운동집단’이나 학문 네트워크로 보는 관점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렇지만 사림의 사회적 배경에 대한 고찰도 포기될 수 없다. 본 연구에서는 1565년에 간행된 『문화유씨가정보』를 당대 지배층의 綜合譜라고 이해한 위에, 기묘사림들이 이 속에서 어떤 위상을 차지하는지 살펴봄으로써 지배층 내에서의 사림의 존재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분석 결과 기묘사림의 핵심 인물들은 대체로 서로 간에 먼 간접적인 혈연, 혼맥으로 이어져 있는 존재들이었다. 또한, 사림 내에 鉅族 배경을 지닌 훈구적 인물들도 존재하는데, 다른 인물들과 비교적 가까운 혈연, 혼인 거리로 연결되어 혈연, 혼인 네트워크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것은 이들이었다. 유교적 도학정치를 지향하는 인물들은 이런 구조적 조건 위에서 학연, 환연 그리고 서울이라는 공간의 매개 등 ‘의지’적 조건을 통해 사림으로서의 연대를 맺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훈구적 배경의 인물들 중에는 사림을 탄압한 인물도 있었지만, 반대로 사림적 성향을 유지한 인물도 있었다. 사림 역시 지배층의 일원이었으므로, 士禍의 시기가 끝난 이후 이들 중 일부의 후손은 부계 인식과 그에 따른 爲先을 통해 名家大族을 형성해 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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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은 정몽주의 학문과 절의

        홍원식(Hong, Won-Sik) 포은학회 2016 포은학연구 Vol.18 No.-

        우리는 포은 정몽주를 대표적인 충신이요 우리나라의 성리학을 연 인물로 기억하고 있다. 실제로 정몽주는 유교의 대의명분을 내세우며 고려 왕조를 지키려다 순절하였으며, 목은 이색은 정몽주의 성리학에 대한 조예가 깊음을 높이 사 ‘동방리학지조(東方理學之祖)’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렇지만 정몽주의 이러한 행적을 기억해내 우리나라의 儒宗으로 삼은 사람은 그 가 죽은 뒤 100년도 더 지나 등장한 기묘사림(己卯士林)들에 의해서이다. 그들은 문묘종사운동(文廟從祀運動)을 통해 정몽주를 우리나라 유종의 자리에 앉힌 뒤 그의 도의와 학문을 이은 정통적 계승자가 한훤당 김굉필이라고 주장하였다. 김굉필은 그들의 스승이자 그들이 가장 존경했던 인물이었다. 이어 그들은 도통론(道統論)을 내세우며 정몽주에서 김굉필로 이어지는 계보를 완성하였다. 그들이 만든 도학의 계보가 이후 유학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지면서, 그들은 조선 왕조 내내 역사적 승자로 군림하였으며, 오늘날 우리도 많은 부분 그 영향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기묘사림들이 기억해낸 정몽주의 모습이다. 이에 대해 오늘날 우리는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는 부분은 고칠 필요가 있으며, 이 시대에 맞게 다시 그를 기억하고 그의 모습을 그려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We are remembering Poeun(圃隱) Jeong MongJoo(鄭夢周) as typical loyalist and figure who opens neo-confucianism of our country. Actually, Jeong MongJoo died for his chastity for trying to insist on just cause of confucianism and to take care of Koryeo Dynasty. Jeong MongJoo was raised as ‘the Master of Oriental Ri-Learning(東方理學之祖)’ by Mogeun(牧隱) Yi Saek(李穡). By the way, GimyoSarim(己卯士林) regard Jeong MongJoo as master of confucianism(儒宗), they are men who are around 100 years later, after Jeong MongJoo had died. They asserted that authentic successor who succeeds to confucian principle and philosophy of Jeong MongJoo is Hanwheondang(寒暄堂) Gim GoingPhil(金宏弼) after seating Jeong MongJoo on master of confucianism of out country through the Enshrinement Movement of Confucian Scholars(文廟從祀運動). Gim GoingPhil is their teacher and is admired the most by them. They stood for the theory of Dotong, completed a genealogy which leads from Jeong MongJoo to Gim GoingPhil. genealogy of Dohak(道學) they make is accepted by the later confucian scholars, they are a leading historic winner throughout the Joseon dynasty, and we are influenced by a large part of him today too. But It is form of Jeong MongJoo that GimyoSarim remember. We need to redress points that are inconsistent with historic fact. we need to remember and to draw up his figure to our 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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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묘사림과 충주의 문화 공간

        이종묵 한국고전문학회 2008 古典文學硏究 Vol.33 No.-

        This thesis focused on the literary meetings held along South Han River in early 16th century. The participants of the meeting were Kim SePil(金世弼), Yi Ja(李耔), and Yi YeonGyong(李延慶) who were retired in ChungJu and YeoJu. Park Sang(朴祥), Kim JeongGuk(金正國) and Shin GwangHan(申光漢) also joined in it. We call them GiMyoSaRim(己卯士林). This thesis made the cultural geographical approach on the Kim SePil's GongJaDang in MalMaRi alongside JiBi river and Yi Ja’s GwaJeong and MongAm in EumAe(陰崖) and ToGye(兎溪). This research on the literary and scientific space could be helpful to find cultural resource in ChungJu. 본고는 기묘사림의 일원인 김세필, 이자, 이연경 등이 충주 일원에 물러나 살면서 박상, 김정국, 신광한 등 또다른 기묘사림들과 충주와 여주 등 남한강 일대에서 벌였던 문학 활동에 대한 연구다. 지비천 가의 말마리에 있던 김세필의 공자당, 음애와 토계에 있던 이자의 과정과 몽암, 탄금대에서 남한강 상류 쪽에 있던 이연경의 용탄 등에 대해서는 문화지리학의 시각에서 자세히 살폈다. 이러한 학문과 문학의 공간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충주 일원의 문화콘텐츠를 확보하는데 일조를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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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국의 『思齋摭言』과 己卯士禍에 대한 서술시각

        이민경 동양한문학회 2019 동양한문학연구 Vol.53 No.-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xamine the viewpoint of description for Gimyo-sahwa(己卯士禍) by Kim Jeong-guk who is one of the Gimyo-salim(己卯士林) in the reign of King JungJong(中宗) after review 『Sajaechuckeon』. 『Sajae-chuckeon』 was written by Kim Jeong-guk when he was retired in Mang-dong(芒洞), Goyang(高陽) after he was dismissed from his position by Gimyo-sahwa, There are some anecdotes and characters related to the current events of the time, especially about Gimyo-sahwa, as well as recording the daily life of Sadaebu(士大夫). The anecdotes related to Gimyo-sahwa which is recorded on 『Sajaechuckeon』 were quoted later in several books that recorded Gimyo-sahwa. Kim Jeong-guk also left 『Gimyodangjuk』 which is the list of victims by Gimyo-sahwa, which is believed to have been a strong part of Kim Jong-guk's consciousness to tell the world about Gimyo-sahwa. 『Sajaechuckeon』 which was built in the first half of the 16th century is following the tradition of the existing Pilgi(筆記) who was recording their daily lives which was formed in the study or living space of Sadaebu. On the other hand, however, it expanded Pilgi’s prospect as a channel for expressing the spirit of the times by highlighting current events such as Gimyo-sahwa and the issues of Yeonsan and Noshan‘s Descendants. The most important factor in current events is Gimyo-sahwa. Kim Jeong-guk criticized Cho Kwang-jo for his overly radical attitude as a prime mover to Gimyo-sahwa, but behind that, he agreed with the goal but expressed regret and self-reflection on how to fulfill it. He also dwelt on Gimyo-sahwa with cautioning the trial by false accusation and criticizing the absurdity of trial, based on his own experience. Finally, as Kim Jeong-guk watched the political ups and downs of himself and his colleagues, he realized the transience of prosperity and decline and put the situation in two letters, "fortune in time" to honor him. 『Sajaechuckeon』 and 『Gimyodangjuk』 from Kim Jeong-guk are similar to the 『Chugangnanghwa』 and 『Sawumyeonghangrok』’s form from Nam Hyo-on who is Neo-Confucian Scholars(新進士類) in the reign of King Seongjong. It seems that the spirit of the times when Nam Hyo-on criticized the political situation of the time led to Kim Jeong-guk, who had a stronger camaraderie among the early Sarim-pa. This camaraderie was later succeeded by 『Muo-Dangjeok』 and 『Gapja-Hwajeok』, which served as the basis for creating a genealogical tree for Sarim-pa. 본고는 중종조 기묘사림의 일원이었던 김정국의 『사재척언』에 대해 살펴보고 거기에 담긴 김정국의 기묘사화에 대한 서술시각을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척언』은 김정국이 기묘사화로 파직된 후 고양 망동에서 은거하던 시절에 저술한 필기이며, 거기에는 사대부의 일상을 담은 笑話뿐만 아니라 당대의 時事, 특히 기묘사화 관련 일화 및 인물이 다소 기록되어 있다. 『척언』에 기록된 기묘사화 관련 일화들은 후에 기묘사화를 기록하는 여러 저서에 全載되었다. 뿐만 아니라 김정국은 『척언』 외에도 기묘사화를 입은 사림들의 명부를 기록한 『기묘당적』을 남기기도 했는데 이는 기묘사림의 일원이었던 김정국이 기묘사화의 사실을 후세에 전하겠다는 의식이 강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16세기 전반에 지어진 『척언』은 사대부 문인의 서재 혹은 생활공간에서 형성되어 그들의 일상을 기록하던 기존 필기류의 전통을 답습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기묘사화, 연산군과 노산군의 후사 문제 등 당대의 시사를 조명하여 시대정신을 발현하는 통로로서 필기의 지평을 확장하기도 했다. 시사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기묘사화이다. 김정국은 기묘사화의 기화자로 조광조를 지목하며 그의 지나치게 급진적인 태도를 비판하면서도 그 이면에는 목표는 동의하지만 그 실현 방법에 대한 안타까움과 자기반성을 담고 있었다. 또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무고로 인한 옥사를 경계하고 옥사의 부조리를 비판하며 기묘사화를 반추하는 한편, 자신과 동료들의 정치적 부침을 지켜보면서 영고성쇠의 무상함을 느끼고 그러한 상황을 ‘時運’이라는 두 글자에 담아 위무했다. 김정국의 『척언』과 『기묘당적』은 성종대의 신진사류인 남효온이 남긴 『추강냉화』와 『사우명행록』의 체재와 닮았으며 이는 남효온이 당대의 정치적 상황을 비판했던 시대정신이 김정국에게 이어져 초기 사림파의 동류의식이 보다 강화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동류의식은 후에 『무오당적』, 『갑자화적』 등으로 계승되어 사림파 도통의 계보를 만들어내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 KCI등재

        심언광의 김안로에 대한 정치적 활용과 그 의도

        구도영(Koo, Do-Young)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5 인문과학연구 Vol.0 No.44

        본고는 조선 중종대의 관료 沈彦光과 金安老가 유착관계를 맺게 된 의도를 분석하여 심언광의 정치행보가 갖는 의미와 성격을 밝히고, 중종대 정치사적 흐름에 대한 이해를 확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조선은 국초에 元妃 사망 후 繼妃를 따로 들이지 않는 것이 관행이었으며 예종, 성종대를 거치며 後宮 중에 계비를 선정하는 것으로 정착되었다. 그러나 중종대에 장경왕후가 원자를 낳고 사망하자, 신료들은 중종이 총애하던 후궁 敬嬪으로부터 원자를 보호하기 위해 계비를 새로이 처녀에서 선택하는 제도 변화까지 이끌어냈다. 그러한 가운데 동궁을 저주하는 ‘灼鼠의 變’이 발생하자 동궁 보호에 대한 조정 내 여론은 극대화되어 동궁의 인척인 김안로가 유배지에서 방환되고, 경빈과 당대 최고 權臣인 심정이 賜死되는 등 급격한 정세 변화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정치적 변환기에 심언광은 東宮輔翼을 주장하며 김안로를 정계로 인진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다. 김안로는 당대는 물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부정적인 평가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에 그가 왜 김안로와 정치적 파트너가 되었는지에 대한 검토는 심언광을 이해하는 데에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김안로가 정계에 복귀하기 이전 당시 정국은 權臣 沈貞이 장악하고 있었다. 심정은 기묘사화를 일으키는 데에도 적극 협조한 인물로, 탐오한 간신이라는 평가가 우세하였다. 심언광은 심정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인식을 감추지 않고 표출하였다. 그러한 언행으로 심정에게 미움을 사게 되자 신변의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고, 이러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정계에서 파출된 己卯士林의 소통을 심중에 두게 되었다. 심언광의 이러한 의중을 알게 된 김안로는 己卯名賢의 원통함을 풀어준다는 감언을 심언광에게 전해지게 함으로써 심언광과 정치적으로 연결되었다. 뚜렷한 죄목 없이 귀양을 간 김안로의 인품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했던 심언광으로서는 기묘사림을 정계에 복귀시키겠다는 김안로가 小人으로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심언광은 심정으로부터의 정치적 보호, 기묘사림 허통 확보를 위한 방안으로 김안로를 호출해 냈던 것이다. 한편 김안로는 왜 심중에 없던 기묘명현 소통을 동조하면서까지 심언광에게 접근하였던 것일까. 그것은 당시 심언광이 언론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안로는 유배지에서 방환되기 위한 언론을 형성해 줄 심언광을 정치적으로 포섭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정치적 관계는 출발부터 동상이몽이었기 때문에 정치적 결별은 수순이었다. 심언광이 김안로를 정계에 인진한 목적은 권세 확장 그 자체가 아니었다. 권세를 마다할 이유는 없으나, 그것은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지키는 범위내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권력 자체를 추종했다면 심정에게 小人이라 비난하였다가 정치적 위협을 느낄 일도 없었을 것이다. 당대에 기묘명현 소통과 권신 심정에 대한 견제는 士類라면 누구나 호의적으로 여길만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심언광이 그를 해결하기 위해 김안로라는 카드를 사용하여 당시 정국에 더 큰 화를 불러왔다는 점에서 심언광에 대한 평가는 늘 ‘안타까움’으로 점철되었다. It was the convention in early Joseon dynasty that King would not get a second wife after the original queen die. It was settled down through King Yejong and Seongjong to select the second wife among the concubines. However, when queen Jangyeong died immediately after giving birth to the original prince and during King Jungjong"s reign, the convention was changed to select the second wife among unmarried young women in order to protect the original prince from a concubine called Kyeongbin(敬嬪) who was loved by King Jungjong. Meanwhile, when "the accident of Jakseo(‘灼鼠之變’)" cursing the original prince broke out, the political opinion to protect the original prince was maximized among the vassals, and consequently abrupt political changes were accompanied including returning of a relative of the original prince Kim An-Ro(金安老) from the exile and the death penalties of Kyeongbin and Sim Jeong(沈貞) who was one of the highest vassals. During such political change, Sim Un-Gwang(沈彦光) asserted protection of original prince and played an important role in inducing Kim An-Ro into the political world. Since Kim An-Ro was evaluated negatively in these days as well as in those days, reviewing why he became a political partner of Kim An-Ro has a significant implication in understanding Sim Un-Gwang. The political arena was governed by Sim Jeong before Kim, An-Ro returned. Sim Jeong actively cooperated in causing the massacre of scholars in Gimyeo year(己卯年), who was evaluated predominantly as a greedy privy councilor. Sim Un-Gwang regarded Sim Jeong critically and expressed his attitude toward him without concealing it. When his behaviors incurred hatred of Sim Jeong, he feared of his safety and planned communications among the scholars who were thrown out during the massacre in Gimyeo year to break through such situation. Kim, Un-Ro who discover the intention of Sim Un-Gwang caused the sweet talks to vent the rage of Gimyeo year to Sim Un-Gwang and was politically connected to him. Sim Un-Gwang who did not know Kim An-Ro who was exiled without clear charge would not regard him as a petty man because he asserted that he would return the scholars of Gimyeo year to the political arena. Finally Sim Un-Gwang called up Kim, An-Ro as a means to protect from Sim Jeong and to ensure the political path for the scholars of Gimyeo year. On the contrary, why did Kim, An-Ro approach to Sim Un-Gwang conforming to the assertion to recover the political path for the scholars of Gimyeo year which he did not have intention for. That is because Sim Un-Gwang had a significant impact on the opinion at that time. Kim, An-Ro intended to embrace Sim Un-Gwang who would shape the opinion to return him from the exile. However, the political relationship between these two was based on different go민 from the beginning, their political break-up was destined. A scholar would regard the communication among the scholars of Gimyeo year and checks against Sim Jeong positively. However, the usage of Kim An-Ro by Sim Un-Gwang to solve such issue invited disaster to the political arena at that time. In this respect, the evaluation of Sim Un-Gwang is dominated by "pitful fee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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