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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주삼의 "구신약전서총론" 에 대한 해석학적 고찰 : 신학세계 제 1권, 2권을 중심으로

        김충진 감리교신학대학교 대학원 2009 국내석사

        RANK : 247647

        지금까지 한국인 최초의 구약학 논문인 양주삼의 “구신약전서총론”에 대해서 세밀하게 연구해 보았다. 양주삼은 Ⅱ장에서도 언급했듯이 지금의 기독교대한감리회를 있게 한 탁월한 교회 행정가이며 지도자였다. 뿐만 아니라 일찍이 미국에 유학하여 당대의 세계적인 신학을 수학하였고, 남감리회 선교의 중심인물이 되었으며 1930년 한국에서 남북감리회가 합동하여 ‘기독교조선감리회’를 조직할 당시에는 초대 총리사가 되어 명실상부 한국 감리교행정의 총괄자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감리교협성신학교에서 신학생들을 열과 성을 다해 가르치는 교수였다. 그가 감리교협성신학교에 재직하던 당시에 한국 최초의 신학전문 잡지인 『신학세계』를 1916년에 창간한 인물이었다. 이는 장로교 평양신학교의 『신학지남』보다도 2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기독교가 처음 전파되던 그 당시에는 미국의 선교사들이 근본주의 신학을 심어주고 그것을 철저히 지키게 하였다. 특히 성서무오설, 축자영감설 등의 신학이 장로교뿐 아니라 한국교회의 주류신학을 이루었다. 장로교의 경우는 『신학지남』출간 이후에도 철저히 선교사들에 의해서 논문이 실리고 연구되어졌다. 그러다가 1928년이나 되어서야 겨우 한국인이 『신학지남』에 논문을 실을 수 있었다. 그러나 감리교의 경우는 처음부터 양주삼이라는 한국인에 의해 『신학세계』가 창간되었고, 『신학세계』는 창간된 1916년부터 한국인과 외국인의 글이 함께 자유롭게 실렸다. 심지어는 학생까지 논문을 실을 수 있는 등 매우 자유로운 학문 연구의 지평을 열어 주었다. 바로 여기서 1916년과 1917년 2년에 걸쳐 『신학세계』제 1권 1,2,3,4호와 제 2권 1,2,3호 총 7회 또한 연재된 방대한 양의 한국인 최초의 구약학 논문이 바로 “구신약전서총론”이라는 것이다. “구신약전서총론”은 제 1편 총론, 제 2편 구약전서총론, 제 3편 신약총론 으로 총 3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구약과 신약을 총망라 하여 서술한 당대의 성서학 개론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구신약전서총론”의 전체의 내용에 대해서 연구한 이는 없었으며 간혹 “구신약전서총론”을 언급한다고 하더라도 전체의 문맥이 아닌 어떤 일부의 몇 문장만을 인용하여 그것이 마치 “구신약전서총론”의 전체의 내용인양 취급해 버리는 오류를 범한 것이 많았다. 뿐만 아니라 한국 감리교회 성서신학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구신약전서총론”을 곡해함으로 말미암아 한국 감리교회 전체의 신학을 자유주의로 이해하여 평가 절하해 버리는 악영향을 낳게 되었다. 지금도 대한민국의 남쪽에서는 감리교회를 이단이라고 말하며, 감리교회 신학교는 자유주의에 물들은 이단 사상을 수혈하는 곳이라는 편견이 만연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무지로 비롯된 것이며 양주삼의 “구신약전서총론”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위의 주장과 같은 감리교회에대한 편견은 불식되고 말 것이다. 양주삼의 “구신약전서총론”을 세밀히 연구한 결과 제 1편 총론에서는 그가 성경을 최고의 권위 있는 책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귀한 복이 바로 성경임을 강조하고 있다. 성경은 다룬 어떤 문화의 것과도 견줄 수 없는 최고의 가치 있는 책으로 설명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사상이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임도 알 수 있으며, 성경의 성령에 감화된 증거 까지 이야기 한다. 뿐만 아니라 성경의 형성된 과정 가운데 약간의 사람의 뜻과 오류가 있음을 과감하게 지적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성령의 섭리로 이루어진 것임을 강조하면서 최종형태의 본문에 권위를 가장 중요하게 여김을 밝히고 있다. 제 2편 구약전서총론 에서는 모세오경의 저작이 정확히 누구인지 확실치 않으나 그것이 성경의 권위에 문제가 되지 않음을 밝히고 있으며, 육경설 또한 소개하고 있다. 또한 성경의 후대 편집의 부분을 이야기하면서도 그 과정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강조하면서 역시 최종적으로 형성된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구약이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예언한 것이라는 확고한 그의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 성서신학사상도 엿볼 수 있다. 제 3편 신약총론 에서는 신약성경이 장구한 세월동안 진화발전 되었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또한 신약의 정경화 과정이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졌지만 그 안에서 섭리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그는 더욱 강조하였다. 그리고 구약과 신약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고 있기에 가장 소중한 것이라는 그의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을 발견할 수 있다. (자세한 사항은 본 논문의 제Ⅲ장을 참고.) 이상의 연구결과를 통해 당시 선교사중심의 ‘근본주의신학’사상이 주류를 이루던 한국교회, 특히 ‘근본주의신학’의 강한 봉쇄아래 수많은 교단 분열을 초래한 한국장로교회와 비교하여 한국 감리교회의 양주삼이 “구신약전서총론”을 통해 이루어 놓은 업적과 신학적 특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결론을 내리겠다. 1. 성경의 개방적연구와 성령의 감화성: 양주삼은

      • 노인의 성차에 따른 기질 및 대처방식과 죽음불안의 관계

        김충진 한신대학교 정신분석대학원 2015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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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is study is a research about the death which is an ultimate anxiety and related coping ways of older adults and to improve their life satisfaction and psychological therapy. This makes older adults be aware about the death correctly and escape from the fear and pains, have positive attitudes about death and live an active and meaningful life. As the anxiety about the death and insufficient preparation for the death of older adults cause serious social problems beyond the problem of the individual, this study is executed to correctly understand the death through psychological therapy and to prepare for the death through individual temperaments of older adults. Study subjects were targeting 114 male and 171 female elderly who are 60s to 80s years old and live in Seoul and Gyeonggi and female subjects were more examined. To examine the temperament and personality test of the subjects, Temperament and Character Inventory- Revised-Short Version(TCI-RS) was used. In order to measure the ways of coping, questions were used including 20 coping factor scales of Stewart and Kenneth(1988) based on the study of Pearlin and Schhooler(1978) and the study of Lazarus and Folkman(1984), 24 overlapped questions between the elderly stress coping scale used in the study of Yun Hyeonhui(1994) and The Ways of Coping Checklist(WCCL) by Davis and others and Gaynel(1985), and Individual Coping Style questions by Stewart and Lyle(1988), and 4 related questions with religious will in Kim Myeongja(1991) coping scales. Death anxiety scale was tried to be measured using Death Anxiety Scale(DAS) of Templer(1970). Analysis results showed as follows. Regarding the gender differences in temperament of male and female elderly, male subjects showed higher stimulation seeking than female subjects, and male subjects showed higher patience than female subjects also in patience as well. Additionally, coping ways of the elderly showed the order of reestablishment of problems, passive aversion, will in beliefs and expression of emotions. And it also showed as male subject's patience is higher in the temperament, their coping methods with the problem reestablishment dropped, and as the fear of male subjects about death related accidents which is one of the sub-factors of death anxiety is higher, it was identified from the male subjects who have higher stimulation seeking and risk aversion temperament . Effects of temperament and coping ways of female subjects to their death anxiety showed as the stimulation seeking and risk aversion temperament of female subjects are higher, the anxiety about the death becomes higher. Implications of this study is psychological program which could give psychological well-being to male subjects who have high stimulation seeking and risk aversion temperament should be provided to reduce their anxiety. In addition, psychological program which could reduce the stimulus and risk factors which are encountered in actual life should be provided for female subjects who have high stimulation seeking and risk aversion temperament, and therapy should be intervened to reduce their death anxiety. This implies the temperamental characteristics of male and female subjects about the death anxiety are also acting and therefore, death anxiety could be reduced by identifying their temperament characteristics, and this also implies the intervention of psychological therapy about their death anxiety could be effective according to their temperament characteristics. And, the coping ways of problem reestablishment implies the necessity of efforts to solve their negative emotions about anxiety through counseling when they face death. Meaning of this study is to suggest the data about death anxiety of the elderly and imply the therapeutic possibility through temperament. KeyWords: TCI, Death Anxiety, Coping, Older adults, Temperament, Locus of control 본 연구는 노인의 궁극적 불안인 죽음과 대처방식에 대한 연구로서 노인의 삶의 만족도와 심리치료를 향상시키기 위한 연구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노인이 죽음에 대해 올바로 인식하여 긍정적 죽음태도를 갖고 극심한 두려움과 고통에서 벗어나 인생을 적극적이고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으로 이는 노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죽음불안 및 죽음준비의 미흡함이 한 개인으로서의 문제를 넘어 심각한 사회문제를 야기함으로 노인의 심리치료를 통해 올바른 죽음의 이해와 개인 노인의 기질을 통한 준비를 하고자 함이다. 본 연구대상은 서울, 경기 남녀노인 만 60세부터 80대까지 전체 남성 114명, 여성 171명으로 여성노인이 더 많이 조사되었으며, 총 285명이 기질 및 성격검사-성인용(Temperament and Character Inventory- Revised-Short Version: TCI-RS)을 사용하였으며, 대처방식을 측정하기 위해 Pearlin과 Schhooler(1978), Lazarus와 Folkman(1984) 등의 연구를 기초로 한 Stewart와 Kenneth(1988)의 20개의 대처 항목 척도와 윤현희(1994)연구에서 사용된 노인 스트레스 대처방식 척도는 Davis외 Gaynel(1985)의 The Ways of Coping Checklist(WCCL)와 Stewart와 Lyle(1988)이 제작한 Individual Coping Style의 문항들 중 중복되는 24개 문항, 김명자(1991)의 대처방식 척도 중 신앙의지와 관련된 4문항, 을 포함한 척도를 사용하였으며, 죽음불안 척도는 Templer(1970)의 죽음불안척도(Death Anxiety Scale:DAS)를 활용하여 측정하고자 하였다 분석결과 다음과 같은 결과를 보였다. 첫째, 남성노인과 여성노인의 기질의 성별의 차이는 남성이 여성에 비해 자극추구가 더 높았으며, 또한 인내력의 기질에서도 남성노인이 여성노인에 비해 인내력이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둘째, 노인이 대처방식의 순서를 살펴보면 문제의 재정립과 수동회피, 그리고 신앙의 의지, 감정표출 순으로 대처방식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셋째, 남성노인의 기질 중에 인내력이 높을수록 문제의 재정립 대처 방식이 떨어지게 되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남성노인의 죽음불안의 하위요인으로 죽음연관 사건에 대한 두려움이 높게 나타날수록, 자극추구와 위험회피 기질이 높은 남성노인에게서 나타났다. 넷째, 여성노인의 기질과 대처방식이 죽음에 대한 불안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 볼 때, 본 연구에서는 여성노인은 자극추구와 위험회피 기질이 높을수록 죽음에 대한 불안도 같이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본 연구의 시사점은 남성노인의 경우 자극추구와 위험회피기질이 높은 노인남성에게는 심리적 안녕감을 줄 수 있는 심리 프로그램을 적용시켜 불안을 완화시켜야 하며, 또한 여성노인의 경우 자극추구와 위험회피 기질이 높은 노인 여성에게는 실 생활에서 마주할 수 있는 자극과 위험요소들에 대한 자극을 줄이는 심리 프로그램을 적용하여 죽음불안을 경감시키기 위한 치료적 개입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는 남,녀 노인의 죽음불안에 기질적 특성도 작용되고 있다는 것을 살펴 볼 수 있음으로, 남,녀 노인의 경우 기질 특성을 파악하여 죽음불안을 경감시킬 수 있으며 또한 기질특성에 대한 파악이 죽음불안에 대한 심리 치료적인 개입이 효과적임을 시사한다. 이는 노인의 죽음불안에 대한 자료를 제시하고 기질을 통한 치료적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 본 연구의 의의라 하겠다.

      • 예수말씀의 환대에 관한 연구

        김충진 장로회신학대학교 목회전문대학원 2022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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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지나가면서 한국사회와 교회 안에 타자에 대한 배제와 단절이 지속되고 있다. 또한, 동성애 논란은 차별금지법으로 이어지면서, 한국사회와 교회 안에서도 의견 충돌이 일어나고 있다. 이에 대해, 한국교회가 세상 문화의 흐름 속에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고, 무엇을 실천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과 그 대안으로서 필자는 환대를 제시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환대는 무엇인가? 환대는 궁핍한 자와 무력한자 심지어 원수라 할지라도 그들의 삶의 필요를 채워주고 도와주는 것이 환대가 가지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그레코-로만의 향연을 살펴보면, 그들만의 환대의 문화 속에 함께한 식탁 교제는, 다신 사상과 함께,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환대가 사용되었으며 그 중심에는 동성애가 있다. 그리고, 동성애는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여기며, 차별과 배제의 문화 속에 남성 간의 동성애가 환대의 문화 속에 자리 잡았으며, 남성 동성애를 통한 사회적 진출과 성공에 중요한 수련의 장으로 인식되면서 사회적으로 고무되고 찬양되기까지 했으며, 자신의 출세의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동성애가 환대의 방법으로 확고히 자리 잡게 되었다. 오늘날 동성애 문화의 확산은 이런 향연의 맥락과 같이하면서, 인권의 가면을 쓰고 차별금지법과 평등법으로 법제화를 시도하고 있다. 그렇다면, 동성애에 대한 교회의 대처와 대안은 없는 것인가? 필자는 마태와 누가의 공통자료인 예수말씀 Q를 중심으로 예수께서 베푸셨던 환대의 모습과 유대 사회 안에 정결례로 차별과 배제되었던, 죄인과 세리와 여성에게 독특하게 베푸셨던 환대의 식탁은 그 당시 정결례의 경계의 벽을 허문 Q의 환대로 필자는 풀어냈으며, 거룩한 식탁으로 바꾸신 예수의 식탁 환대를 Q의 에토스로 조명하였다. 그리고, 잃은 양의 비유와 드라크마의 비유의 Q본문을 통해, 예수께서 잃어버린 생명을 찾아 나선 목자의 마음과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의 마음이 각각의 기쁨으로 이웃을 초대하고, 잔치를 베풀어, 환대하는 여인의 모습 속에 예수의 환대성을 부각했다. 여기에서 예수께서 베푸신 식탁의 환대는 ‘잃어버린 자’의 정체성을 새롭게 구성하고 회복하는 환대의 자리였다면, 그레코-로만의 식사는 동성애를 통해 자신의 쾌락과 유익만을 위한 차별과 배제의 자리였음을 살폈다. 이런 논의를 통해서, Q 환대의 적용으로 오늘날 한국교회가 예수께서 죄인을 향해 베푸신 환대의 자리를 다시 회복하고, 동성애를 회개해야 할 죄로 인식시키고, 교회가 차별과 배제가 아니라, 오늘날 한국교회가 찾아야 할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드라크마로서 교회 안에서 환대의 실천적 모습을 제시했다.

      • 니체의 기독교 비판 : 기독교의 정의, 평화, 선의 관념은 '반응적 힘에의 의지'다

        김충진 성공회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2004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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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을 통하여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음의 결론에 도달한다. (1)절대적인 가치 기준은 없다는 사실. 오직 '힘에의 의지'가 있을 뿐. 따라서 기독교의 진리 역시 '힘에의 의지'에 다름 아니며, 그 배후에는 사제들의 권력욕이 내재하고 있다는 사실. 신의 이름으로 선을 평화를 정의를 부르짖지만 그 가치의 기원은 '신으로부터'가 아니라, 그 가치를 통하여 권력을 획득하기 원하는 사제들의 '힘에의 의지'일 뿐이라는 사실. (2)기독교의 가치전도가 결국 퇴락을 가져온다는 사실. 인간, 현실, 고통, 죽음, 우연, 격정, 용기는 부정되며 그 자리를 신, 도덕, 평안, 영생, 목적, 이성, 동정이 차지하게 되어 결국 삶은 극도의 왜곡을 겪는다. (3)기독교의 정의, 평화, 선의 관념이 인간을 유약하게 만들고, 허위의식을 조장하여 결국 지배권력 재창출을 위한 도구로서 기능한다는 사실. 자신이 확신하고 있는 '가치'를 절대적인 가치라고 장담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사실 누군가의 가치는 수많은 가치들 중 하나일 뿐, 절대적인 가치는 아니다. 자신이 확신하고 있는 가치, 그리고 그 가치를 확신하고 있는 이유는 결국 자신의 '힘에의 의지' 때문이다. 즉 자신의 힘에의 의지가 그 가치를 통하여 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가치를 확신할 수 있으되, 그 가치가 다른 가치보다 우월하다는 망상은 무근거에 근거한 확신일 뿐이다. 어떤 경우 자신의 '힘에의 의지'를 위해서 '악'을 가치라고 생각할 수 있고, 다른 경우 자신의 '힘에의 의지'를 위해서 '선'을 가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어떤 경우 자신의 '힘에의 의지'를 위해서 다른 사람을 돕는 행위를 선택할 수도 있고, 다른 경우 자신의 '힘에의 의지'를 위해서 다른 이를 정복하는 행위를 택할 수 있다. 또한 양자는 자신의 힘에의 의지를 위해서 언제든지 변경가능하며, 어떤 경우 처음부터 끝까지 수미일관하게 유지될 수도 있다. 따라서 어떠한 경우에도 그것이 진위의 차원이라면 상대방의 가치를 비난할 이유도, 자신의 가치를 우쭐될 이유도 없다. 그러나 자신의 가치에 대한 우월성과 타인의 가치에 대한 비난마저도 힘에의 의지의 일환이니, 저지할 이유도 없을 것 같다. 이제 기독교가 안고 있는 몇 가지 문제점을 이와 같은 명제를 통하여 분석, 해명하고자 한다. 이미 선악이 진위의 차원이 아니라, 자신의 '힘에의 의지'를 구현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임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기독교가 안고 있는 문제의 핵심은 여전히 진위의 문제에 대한 견해차이인 것 같다. 자신들의 확신이 참이라는 망상이 그들의 주장 저변에 뿌리내려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오류는 최근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중대한 견해차이로 인하여 많은 논쟁이 불거졌던 '미군철수'문제에서도 잘 드러난다. 미군의 철수를 주장하는 입장의 정의는 위험을 무릎 쓰고서라도 자주를 유지하는 것이며, 미군 철수를 반대하는 입장의 정의는 자주보다는 현재의 안정을 지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양자 모두 자신이 서있는 입장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노력한다. 또한 필요에 따라서는 상대편에 대한 비난과 폭력 사용도 가능하다. 사실 어느 편이 진위에 가까운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아니 진위라는 것이 존재할거라는 확신이 내겐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양자 모두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의 '힘에의 의지' 구현을 위해서 힘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양자 모두는 자신이 처해있는 관점에서 자신의 '힘에의 의지'를 위해 싸우고 있을 뿐, 진위와는 무관하다. 다만 자신의 행위를 위하여 진위의 여부가 필요할 뿐. 따라서 흔히 도용되는 '하느님의 정의', '하느님의 공의'는 그것이 '하느님의 정의', '하느님의 공의'이기 때문에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들의 '힘에의 의지'를 위해서 '하느님의 정의', '하느님의 공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양자는 다른 방식의 입장을 취했을 뿐, 자신의 권력의지를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동등하다. 영혼의 구원을 외치는 교단과 사회참여를 외치는 교단의 문제도 이와 마찬가지다. 한 쪽 에서는 예수의 가르침이 영혼구원에 있다고 확신하며, 그 일들을 위해서 헌신한다. 다른 한쪽에서는 예수의 가르침이 사회구원에 있다고 확신하며, 사회정의를 위해서 헌신한다. 그리고 각각은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노력한다. 때로는 다른 입장을 가진 교단을 비방하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힘에의 의지를 위해서 각각의 입장을 택했다는 사실이다. 한 편에서는 그들의 '힘에의 의지'가 영혼구원을 중요한 것으로 인식하여 그 일을 위하여 헌신하는 형태로 드러나고, 다른 한 편에서는 그들의 '힘에의 의지'가 사회구원을 중요한 것으로 인식하여 그 일을 위하여 헌신하는 형태로 드러난 것이다. 결국 양자 모두는 절대적으로 옳은 진리를 부여잡은 것이 아니라, 각자의 입장에서 각자의 힘에의 의지에 가장 합당한 형태를 부여잡은 것이다. 즉 '영혼구원'이나 '사회구원'중 어느 것이 신의 뜻에 가장 부합한가가 아니라, 자신들의 '힘에의 의지'를 위해서 영혼구원이나 사회구원이 부합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양자는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을 뿐, 자신들의 힘에의 의지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등하다. 나눔과 섬김을 외치는 교단과 교회의 양적 성장을 외치는 교단의 문제 역시 이와 다를 바 없다. 한 쪽에서는 교회의 사명이 '나눔과 섬김'에 있다고 확신하며, 나눔과 섬김에 온 힘을 다하며, 이 일을 위해 힘써주기를 강권한다. 다른 한 쪽에서는 교회의 사명이 양적 성장에 있음을 확신하여 그 일을 위해 온 힘을 다하며, 그 일에 힘써 주기를 강권한다. 또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들의 입장에 대한 지나친 우월감에 상대방의 입장을 비난하기도 하며, 예수의 행적을 통하여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이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 어느 한 입장을 선택하고 있을 뿐, 그것이 진위의 여부와는 무관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적어도 이 점에 있어서는 그 두 교단은 동등하다. 그들은 자신의 '힘에의 의지'를 구현하기 위해서 '나눔과 섬김', 혹은 '교회의 양적 성장'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진보적인 성향의 신학자의 무리와 보수적인 성향의 신학자의 무리 역시 마찬가지다. 각자가 다른 견해를 주장하며, 각각 자신과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 입장을 비난하지만, 결국 그들은 자신의 입장에서 현재 자신의 모습을 형성한 것이다. 이 입장을 형성하는데는 타고난 본성, 자신의 자라온 환경, 관심을 가졌던 학문, 소속되어 있던 교단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결국 그들은 자신의 입장에 우월성과 확신을 가지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진리를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의 힘에의 의지를 위하여 현재 자신이 취하고 있는 입장을 선택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한가지 첨언하자면, 학자들의 무리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만을 말할 수밖에 없는 한계성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다른 앎에 의해서 위태롭게 되지나 않을까 하여 언제나 촉각을 곤두세우는 습벽이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학자라는 무리의 자기존재방식이고, 힘에의 의지의 원형이다. 광학의지! 결국 그들이 어느 입장에 있건 자신들의 '힘에의 의지'가 최종적인 목적이 아니겠는가? 찬전贊戰과 반전反戰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한쪽에서는 찬전의 정당성을 말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반전의 정당성을 말한다. 한 쪽의 입장에서는 전투에 참여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에 어긋난다는 입장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하느님의 뜻이야말로 전투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격렬하게 다투며, 때로는 상대방을 비난하고 폭력행위를 서슴지 않고 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찬전을 주장하는 입장에서도 반전을 주장하는 입장에서도 각각 자신의 힘에의 의지를 충족시키고 있을 뿐이라는 점이다. 양쪽 모두 공히 자신의 입장에 확신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결국 자신의 처지에서 선택한 입장일 뿐, 절대적으로 옳은 주장이라고 할 수는 없다. 따라서 우쭐될 필요도 상대방을 폄하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상대방에 대한 폄하나 자기확신 마저도 힘에의 의지의 일환이니 그 행위를 막을 이유 또한 없을 것 같다. 성서를 중요하게 강조하는 교단과 전통을 중요하게 강조하는 교단의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한 쪽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힘에의 의지'를 강화시키기 위하여 성서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고(루터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다른 한쪽 역시 자신들의 힘에의 의지를 강화시키기 위해서 전통을 강조하는 것이다(가톨릭이 바로 그런 교단이다). 하지만 진실은 성서와 전통의 중요성 여부에 있지 않다. 단지 성서가 중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의 힘에의 의지를 위해서 성서를 요청하는 것에 있다. 마찬가지로 전통이 중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의 힘에의 의지를 위해서 전통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환경운동이니 생명운동을 외치는 기독교인들과 개발과 정복을 외치는 기독교인들 간의 문제 역시 동등하다. 환경운동이나 생명운동을 외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요, 하느님의 자녀 되는 자신들이 추구해야 할 가치며, 개발과 정복을 외치는 기독교인들의 입장에서는 정복과 개발이야말로 하느님의 뜻이요, 하느님의 자녀 된 자들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가치인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 환경이나 생명을 존중하는 것이 선에 가까울 것이라는 일반적인 통념이 크게 작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환경운동이나 생명운동이 추구해야 할 가치이기 때문에 추구해야 한다기 보다는 자신들의 힘에의 의지를 위해서 환경운동이나 생명운동이 가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는 것이다. 또한 파괴와 정복이 진정 하느님의 뜻이기보다는 자신들의 힘에의 의지를 위하여 파괴와 정복이 하느님의 뜻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환경운동과 생명운동에 자신의 삶을 헌신하고 있다며 자랑할 필요도 없고, 개발과 파괴에 자신의 삶을 헌신하고 있다며 자랑할 필요 역시 없다. 자신의 '힘에의 의지'가 환경운동이나 개발을 의지하고 있을 뿐이고, 그 의지를 충실히 따르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양자의 의지는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변화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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