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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新唐書⌋ 권214, ?列傳? 139, ‘劉悟’ 譯註

        정병준 동국역사문화연구소 2007 동국사학 Vol.43 No.-

        兩唐書유오전은 여러 가지 면에서 흥미로운 사실들을 전하고 있다. 그 중 몇 가지를 적으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唐代‘割據藩鎭’의 연원과 성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당 조의 통치를 약화시킨 유력한 ‘할거번진’들이 가진 공통점 중 하나는 그들 모두 반란을 일으킨 安祿山의 부하였다는 점이다. 단, 여기에도 두 가지 계통이 존재한다. 하나는 안사의 난 말기에 唐朝에 투항하였다가 다시 당 조를 이반하고 당말까지 당조의 통치를 거부하였던, 이른바 ‘河北三鎭’이 그들이다. 또 하나는 안사의 난 중에 안록산을 이반하여 당조의 일원으로 서 반란군과 싸우다가 반란이 종결된 뒤 당조의 지배를 벗어난, 平盧번진 과 淮西번진이다(鄭炳俊, ?李正己一家이후의 山東藩鎭-順地化過程?, 대외문물교류연구 3, 2004, p.122). 유오는 이정기 일가가 지배하던 평로 번진의 군장으로 복무하였다. 그가 평로 번진에 복무하게 되는 과정과 활 동 내용을 통해 당시 할거번진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세력을 키우고 유지하 였는가를 잘 알 수 있다. 한편, 양당서 유오전에는 유오의 숙부이면서 宣武 節度使가 된 劉全諒이란 인물이 보이는데, 그 역시 요서 평로군 출신이다. 단, 절도사 유전량은 당조에 대해 불손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 KCI등재

        역주(譯註) : 『신당서(新唐書)』 권 214, 「열전(列傳)」 139, "유오(劉悟)" 역주(譯註) -{부(附)} 『구당서(舊唐書)』 유오전(劉悟傳) 역주(譯註)-

        정병준 동국사학회 2007 동국사학 Vol.43 No.-

        兩唐書 유오전은 여러 가지 면에서 흥미로운 사실들을 전하고 있다. 그 중 몇 가지를 적으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唐代`割據藩鎭`의 연원과 성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당조의 통치를 약화시킨 유력한 `할거번진`들이 가진 공통점 중 하나는 그들 모두 반란을 일으킨 安祿山의 부하였다는 점이다. 단, 여기에도 두 가지 계통이 존재한다. 하나는 안사의 난 말기에 唐朝에 투항하였다가 다시 당조를 이반하고 당말까지 당조의 통치를 거부하였던, 이른바 `河北三鎭`이 그들이다. 또 하나는 안사의 난 중에 안록산을 이반하여 당조의 일원으로서 반란군과 싸우다가 반란이 종결된 뒤 당조의 지배를 벗어난, 平盧 번진과 淮西 번진이다(鄭炳俊, 「李正己 一家 이후의 山東 藩鎭-順地化 過程」, 『대외문물교류연구』 3, 2004, p.122). 유오는 이정기 일가가 지배하던 평로 번진의 군장으로 복무하였다. 그가 평로 번진에 복무하게 되는 과정과 활동 내용을 통해 당시 할거번진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세력을 키우고 유지하였는가를 잘 알 수 있다. 한편, 양당서 유오전에는 유오의 숙부이면서 宣武節度使가 된 劉全諒이란 인물이 보이는데, 그 역시 요서 평로군 출신이다. 단, 절도사 유전량은 당조에 대해 불손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둘째는 高句麗 遺民史의 큰 흐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산동의 평로 번진을 지배한 李正己 일가는 고구려 유민이다. 중국 학자 孫慧慶에 의하면 안사의 난 중인 肅宗 上元 2년(761), 이정기는 平盧節度使 侯希逸과 함께 평로의 병사 2만여 명을 거느리고 遼西지역에서 오늘날의 山東지역으로 남하하였다. 그때 그들이 거느린 총인원은 병사 가족들을 포함하여 모두 10만인 정도였을 것으로 추산된다. 그리고 그 10만 중 가장 많은 숫자를 점하는 것은 漢族이었지만, 그 다음으로 많은 숫자가 고구려 유민이었을 것이라고 한다(「唐代平盧節度使南遷之后 議」, 『北方文物』1992-4, p.74). 그렇다면 이정기와 평로군의 남하는 고구려 유민사에서 큰 획을 긋는 일대 사건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 뒤 이정기는 후희일을 몰아내고 스스로 평로군의 藩帥에 올라 3세대 4대에 걸쳐 약 54년 동안 산동지역을 사실상 독립적으로 지배하였다. 그 과정에서 고구려 유민들이 여러 가지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유오는 이정기 일가가 멸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이 역시 고구려 유민사의 일대사건이라 할 수 있다. 양당서 유오전에는 이정기 일가의 멸망과정이 상세히 적혀 있다. 셋째는 이정기 일가가 멸망한 후에도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당조의 지배에 순응하지 않았던 평로 번진의 잔존 세력을 살펴볼 수 있다. 이정기 일가가 멸망한 후 평로 번진은 세 개의 번진으로 분할되어 모두 당조의 명을 받드는 지역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유오는 이정기 일가를 멸망시킨 공으로 昭義節度使에까지 오르자 그 역시 당조에 불손한 태도를 보였으며, 그 자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러한 유오 일가가 의지한 세력이 바로 이전의 평로군에서 데려간 병사들이었다는 점이다. 즉 『資治通鑑』권243, 敬宗 寶曆원년 7월조를 보면 "昭義節度使劉悟之去……州也, 以…..兵二千自隨爲親兵"(p.7844)라고 적혀 있는데, 이때 ……은 평로군을 가리킨다. 또 『新唐書』권193, 「列傳」118, `忠義下·賈直言`에는 유오의 아들인 소의절도사 劉從諫에 대해 기술하

      • KCI등재

        ⌈?新唐書⌋? 권7, 德宗本紀 역주

        정병준 동국역사문화연구소 2012 동국사학 Vol.52 No.-

        당 후기와 오대는 ‘藩鎭時代’라고도 하는데, 이는 당시 번진들이 국가?사회 전반에 걸쳐 큰 세력을 떨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번진이 존속한 시기는 200년간의 ‘당송변혁기’와 꼭 일치하는데, 이는 번진이 장기간의 大변혁에 중요한 작용을 하였음을 나타낸다. 그 안에서도 德宗연간(779∼805)은 번진들의 활동이 가장 왕성한 시기였다. 앞선 代宗(재위; 762∼779)이 번진과의 충돌을 피하며 안주 정책을 펼쳤던 것과 달리 덕종은 즉위 초기부터 강경한 자세를 보였고 그러면서 긴장이 고조되다가 마침내 양자가 정면충돌하였다. 그 결과 유명한 ‘四王二帝’의 반란이 일어나는데, 덕종이 궁지에 몰려 마침내 四王에게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이에 4왕은 일단 반란의 태도를 거두고 당조와의 공존을 바란 듯 보이지만, 2제는 황제를 칭한 만큼 반란을 지속하다가 결국 멸망하였다. ?신당서? 덕종본기는 당시의 상황을 짧으면서도 명료하게 보여주는 사료이다. 관련 사서에서는 각 반란의 시점을 명확하기 기술하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신당서? 본기는 그 시점들을 명확하게 설정하고 있다. 물론?신당서? 본기는 宋代의 명분론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관점에 따라서는 다른 견해가 제시될 수도 있다. 그리고 ?신당서? 본기는 ?자치통감?이나 ?구당서? 본기보다 간략함에도 불구하고, 두 사서에 보이지 않는 기사도 적지 않다. ?신당서?를 관통하는 번진 인식은 方鎭表의 서언에 잘 드러난다. 즉 “당은 中世이후 功을 세우고 난을 수습할 때 비록 항상 번진에 의지하였지만, 나라가 망한 것도 이들에 의해서였으니 어찌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방진표를 만든다”(권64, 1759쪽)라고 한다. 번진의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동시에 지적하면서도 결국은 경계의 대상으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송대에 주류를 형성하였을 뿐 아니라 그 후 중국인의 번진론에 큰 영향을 미쳐 번진을 ‘할거세력’으로 보는 전통적 인식의 기반이 되었다(정병준, ≪日知錄≫ ‘藩鎭’ 기사를 통해 본 唐末五代의 藩鎭像,?중국학보? 44, 2001 등 참조). 이 역주의 주된 관심사는 덕종이 번진 개혁에 나선 즉위 초기부터 2제의 난이 종결되는 정원 2년(786)까지에 있다. 이 기간에 덕종은 번진 정책 외에도 여러 가지 개혁을 시도하였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양세법의 제정이다. 양세법도 번진개혁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여러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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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대(唐代) 요서(遼西) 평로군(平盧軍)의 남하(南下)와 전신공(田神功)의 활동(活動)

        정병준 충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3 인문학연구 Vol.46 No.4

        현종 천보 14재(755) 11월 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키자 다음 해 遼西 평로군은 안록산을 이반하여 당조에 귀순하였는데, 이때 전신공도 거사에 참여하였다. 757년 정월 董秦·田神功은 보병 3천을 이끌고 河北으로 남하하여 德州·체州 등을 점령하였다. 하지만 같은 해 하북이 다시 반란군(사사명) 수중에 떨어지면서 두 사람은 河南으로 남하하였다. 같은 해 10월 당군은 하남의 낙양을 수복하였다. 759년 3월 동진·전신공과 9절도사 연합군이 相州에서 사사명에게 대패하였다. 또 9월 판州가 사사명에게 함락될 때 두 사람은 포로가 되었다. 그러자 사사명이 전신공에게 江淮 지역을 공략하게 하였지만, 전신공은 남하 도중 宋州에서 다시 당으로 투항하였다 이후 전신공은 동진과 분리되어 따로 활동하였다. 760년 11월 강회에서 劉展이 반란을 일으키자 다음 달 전신공은 淮南東道節度使 鄧景山의 요청으로 강회로 남하하여 761년 정월 반란을 평정하였다. 그 공로로 같은 해 6월 전신공은 徐州刺史에 임명되었다가 762년 정월 淄靑節度使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때마침 侯希逸이 이끄는 요서 평로군 본대가 그곳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같은 해 5월 전신공은 연운節度使로 옮겼다. 이어 당군이 史朝義 토벌전을 펼칠 때 전신공은 선봉에서 큰 공을 세웠다. 763년 9월 토번이 장안을 침공하자 대종이 陝州로 피신하였는데, 때마침 전신공이 입조하였다가 대종을 극진히 호종하였다. 요서에서 함께 남하하였던 邢君牙·陽惠元 등은 이때 전신공과 분리되어 神策軍에 예속되었다. 764년 전신공은 河南節度使에 임명되어 판·宋 등 8주를 관할하였다. 이후에도 전신공은 여러 차례 입조하여 충절을 보였고 또 공손함으로 칭송을 받았다. 동진(즉 李忠臣)은 淮西節度使가 된 후 충성심과 약탈성을 동시에 보이면서 회서 번진이 할거 세력으로 나아가는 연결점의 역할을 하였던 데 비해, 전신공은 ‘변송’ 지역을 안정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唐玄宗天寶十四年(755)十一月, 安祿山發動叛亂, 翌年平盧軍反叛安祿山, 歸順唐朝。此時, 田神功也根隨平盧軍的隊伍。757年正月, 董秦和田神功率步兵三千, 向河北南下, 攻克德州·체州等地。但759年三月, 董秦·田神功與9個節度使的聯合軍在相州大敗于史思明。同年9月, 在史思明攻占판州時, 董田兩人被其부虜。史思明讓田神功攻奪江淮地區, 但田神功진此機會在宋州再次投降唐朝。從此以後, 田神功與董秦分道揚驃。760年十一月劉展在江淮發起叛亂, 田神功應對鄧景山的請求, 向江淮南下, 在761年正月平定叛亂。同年六月, 田神功曆任徐州刺史, 762年正月升爲淄靑節度使。同年五月, 田神功調任爲연운節度使。安史之亂平定以後, 于763年九月, 吐蕃侵占長安, 代宗至陝州避難。田神功正恰入朝, 盡心竭力地扈從代宗。此時, 在遼西一起南下的邢君牙和楊惠元等人與田神功也各行其是,隷屬于神策軍。764年, 田神功被任命爲河南節度使, 管轄판·宋等八州。由此以來, 田神功屢次入朝表示忠誠, 其謙恭的態度頗得世人稱頌。董秦(卽李忠臣)被任命爲淮西節度使之後, 其擧動一方面表現出忠誠, 령一方面帶有掠奪性的色彩, 使得淮西藩鎭進而成爲割據勢力, 起到承上啓下之用。與此相反, 田神功對“판宋”地區的穩定作出了傑出貢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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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唐 憲宗의 藩鎭改革과 魏博節度使 田弘正

        정병준 중국사학회 2023 中國史硏究 Vol.- No.143

        魏博節度使 田弘正은 절도사에 오르자(되자) 바로 朝廷에 귀순하였는데, 거기에는 대략 세 가지 원인이 있었다. 즉 첫째는 어려서부터 유학을 좋아한 부친으로부터 이어받은 개인적 성향이고, 둘째는 시대 추세를 보고 내린 결단이고, 셋째는 藩鎭 내부의 모순상황에 따른 것을 들 수 있다. 전홍정은 조정에 귀순한 후 위박을 대대적으로 개혁하였다. 즉 “魏州自承嗣已來, 館宇ㆍ服玩有踰常制者, 悉命徹毀之, 以正廳大侈不居, 乃視事于採訪使廳. 賓僚參佐, 請之於朝”. 이는 諸侯的 地位에 맞게 행동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후 헌종이 成德을 토벌하고 淮西를 토평할 때 적지 않은 공헌을 하였으며, 특히 平盧를 토벌할 때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평로의 토벌로 헌종의 번진개혁은 일단 완성되었다. 穆宗 시기에 河北三鎭은 다시 割據藩鎭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조정의 위협이 되지 못하였고 이후 번진체제는 한동안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이 점에서 헌종의 번진개혁은 큰 의미를 지녔는데, 그 과정에 전홍정의 귀순이 상당한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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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의 한반도 정책과 대응

        정병준(?炳俊) 신라사학회 2019 新羅史學報 Vol.0 No.45

        중국 왕조의 대외정책에서 가장 우선한 것은 북방 유목민이고 그 다음이 서역이며, 한반도를 포함한 동방은 그 다음이었다. 당조 역시 기본적으로 그러한 순서에 따랐지만, 서남방의 吐蕃을 방치하여 큰 후환을 남긴다. 당조가 토번을 방치한 가장 큰 이유는 한반도 공격을 위해서였다. 물론 당조가 토번이나 서역을 전혀 방치한 것은 아니었지만, 적극적이지 않았다. 이는 당시 당조가 서방보다 한반도를 우선한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 결과로 당조의 서역 지배는 토번 등에 의해 위기를 맞고 한반도마저 방기하게 된다. 한반도에 대한 집착이 대외전략의 실패로 이어졌던 것이다. 당의 기미주부 제도는 한반도에서 큰 변화를 보였다. 특히 663년 4월 당조가 신라를 雞林州都督府로 삼은 것은 기미주 제도의 일대 변화이다. 기미주는 원래 이민족들을 여러 단위로 세분하여 분할 지배하는 제도지만, 계림주에 이르면 하나의 국가가 하나의 기미주로 되어 사실상 冊立과 차이가 없게 된 것이다. 그 전에도 몇몇 지역에서 변형된 기미주가 출현하였지만, 계림주는 그 종결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것은 뒤에 발해에도 적용되어 홀한주도독부가 설치되었다. 계림주와 홀한주라는 형식은 당과 신라 · 발해의 상호 이해관계를 충족시켜 화평관계를 유지하는 매개가 되었다. 즉 신라 · 발해의 입장에서는 형식적 기미주가 되는 대신에 일반의 책립관계보다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어 교류상 이점을 얻을 수 있었고, 당의 입장에서는 두 나라를 기미주로 삼았다는 명분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당의 입장에서 ‘기미주 관계’는 오랫동안 속박되었던 ‘군현회복론’에서 벗어나는 효과도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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