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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도함수에 관한 연구

        조은경 용인대학교 2001 국내석사

        RANK : 247807

        준 우도함수의 사용은 일반적 우도함수의 근사적 대용방법이나 비해석적인 경우에 사용하고 있다. 특히 관찰자의 분포함수의 평균과 분산의 비례관계에 의하여 준 우도함수의 형태가 결정되어지고 추정하고자 하는 모수도 준 우도함수를 이용하여 구할 수 있다. 이러한 장점을 활용하면 추정에 있어서 보다 좋은 결과를 유도할 수 있다. 우도함수의 대체 방법인 준 우도함수 방법은 추론에 있어서도 우도함수가 갖는 성질을 그대로 유지시키며 모수를 추정할 수 있다. 본 논문에서는 평균과 분산구조의 형태에 따라서 모형의 모수를 경험적 추정방법으로 추정이 가능함을 보였다. 우도함수의 형태를 모형의 모수에 따라 조정함으로서 평균과 분산의 구조식을 찾아내어 준 우도힘수의 형태로 바꾸어 모수 추정 방법에 사용할 수 있다. Qusai 우도 함수의 특성을 활용한다면 복잡한 구조식을 갖는 우도함수를 간단한 형태의 우도함수로 조정이 가능하다. 모수의 구조식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모형을 가정할 수 있다. 어떤 모형이 적합한가에 대하여 모델의 선택 방법에 대하여 보다 연구가 필요하다. 검정부분에서도 확장된 우도함수방법을 사용하면 우도비 검정에 이용 할 수 있을 것이다.

      • 정당화 증거론과 우도주의

        권준형 연세대학교 대학원 2023 국내석사

        RANK : 247807

        본 글에서 우도주의(Likelihoodism)적 견지에서 정당화 증거론(Evidentialsim)이 발전되고 옹호된다. 본 글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번째 부분에서는, 우도주의를 소개하고, 우도주의가 다른 이론과 비교했을 때 인식적 정당화에 있어서 더 나음이 논증된다. 그 과정에서, 객관적 확률에 대한 한 가지 입장이 소개된다. 그리고 베이즈주의와 관련하여 베이즈주의적 인식론이 가질 수 있는 난점들이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소개된 후, 세 난점을 중심으로 베이즈주의적 인식론에 대한 비판이 제시된다. 난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베이즈주의적 확률 해석 문제. 둘째, 베이즈주의적 합리성 문제. 셋째, 사전확률 할당의 문제. 본 글의 두번째 부분에서는, 우도주의를 통해 정당화 증거론을 해명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그 과정에서 정당화 증거론과 신빙론이 논의되며, 각자의 주요한 통찰을 우도주의적 견지에서 합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 후, 이렇게 정교화된 우도주의적 증거론이 신빙론과 같은 다른 정당화 이론보다 나음이 논증된다. 그 과정에서 신빙론의 확률 해석 문제, 일반성 문제, 천리안 문제에 대한 우도주의적 증거론의 답이 제시된다. 이후, 우도주의적 증거론이 정당화 정합론에 우호적임을 보이고, 정당화 정합론에 제기되는 문제들이 문제가 되지 않음이 논증된다. 우도주의적 증거론이 해결하는 문제는, 고립 반론, 대안적 체계 반론, 믿음 체계의 진리개연성(truth-conducive) 문제이다. 특히 세번째 반론과 관련해서는 주로 확률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클라인(Klein)과 워필드(Warfiled)의 반론에 답하는 형식으로 제시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도주의적 증거론이 정당화 이론으로써 매력적인 이론이라는 점을 보인다. In this thesis, I advocate a version of evidentialism for epistemic justification, what I call "Likelihoodist Evidentialism for Epistemic Justification." Likelihoodism is a view that emphasizes the relation of supportedness between hypothesis and evidence, as demonstrated by likelihood and the law of likelihood. I argue that Likelihoodism is the best way to formalize and elaborate evidentialism. The thesis consists of two chapters, each containing six sections. The first chapter focuses on Bayesian epistemology, where I argue that likelihoodism is a better approach to understanding epistemic justification than Bayesian epistemology. I present three main points to support this claim. First, I discuss the interpretation of probability, suggesting that objective probability is preferable to subjective probability employed by Bayesians. Additionally, I propose an alternative way of understanding objective probability that addresses concerns about its interpretation. Second, I critique Bayesian rationality, arguing that it is too strong for epistemic rationality. I propose likelihoodist rationality as a better alternative if it exists. Third, I address the problems associated with priors and their impact on epistemic justification. I argue that likelihoodism is not bound by priors, rendering these problems irrelevant for likelihoodism. In the second chapter, I formalize and develop evidentialism using the likelihood method. I begin by defining the concept of epistemic justification and subsequently refine evidentialism. I employ the concept of likelihood to analyze propositional justification and doxastic justification. After addressing potential counterarguments, I assert that likelihoodist evidentialism is a superior theory of justification compared to other concepts. I argue that it surpasses reliabilism, as the problems faced by reliabilism do not apply to likelihoodist evidentialism. The problems reliabilism has confronted are the problem of the interpretation of probability, the generality problem, and the clairvoyance problem. Furthermore, I advocate for a version of epistemic coherentism, a theory that faces three key challenges: the isolation objection, the alternative system objection, and the problem of belief system's truth-conduciveness. I propose that these problems can be resolved by utilizing the law of likelihood. Finally, I contend that my theory is a non-linear model rather than a holistic one within the context of coherentist theory. Through this thesis, I argue that likelihoodism and likelihoodist evidentialism present an attractive theory of epistemic justification.

      • 호남우도농악 담양굿의 전승과 활용

        이수현 공주대학교 문화유산대학원 2022 국내석사

        RANK : 247807

        담양굿은 호남우도농악의 영무장농악권에 속하며 사)우도농악담양보존회(현.담양와우농악보존회)가 연행하는 농악이다. 본 연구는 시대를 반영한 농악의 변천사를 통해 담양굿의 전승 과정을 살펴보고 담양굿의 미래를 모색하는 목적을 갖는다. 담양은 지리적으로 우도농악과 좌도농악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어 그 양상과 특징이 매우 다양한데 담양군 봉산면 와우리에서 행해졌던 와우리 농악은 김동언보유자(전남무형문화재 제17호)를 중심으로 창단된 우도농악담양보존회가 전승하고 있는 담양굿의 전신이 된다. 본 연구자는 1993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현 광주광역시무형문화재 제8호 광산농악단과 우도농악담양보존회 활동을 거쳐오면서 장구놀이인 ‘설장구’와 농악의 소고놀이를 춤으로 재구성한 ‘우도설소고춤’을 개인 브랜드화하여 현대에 맞게 활용하고 있다. ‘우도설소고춤’을 창작할 당시 전승과 활용을 어느 맥락에서, 어떻게 수용해야 하는지 고민을 하게 되었고 ‘우도설소고춤’의 바탕이 되는 담양굿의 원형적 본질은 어디에 있고 어떻게 변천해왔는지를 살펴보며 「호남우도농악 담양굿의 전승과 활용」이라는 주제에 도달하게 되었다. 농악이 현대화되는 과정은 사회 전반적인 변화와 관련이 있다. 현대화를 수용한 무대화는 계속 발전했고 활용의 상황과 조건은 시대의 변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에 활동 사례를 통해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다. 단락은 ‘호남우도농악의 전승 및 변천’, ‘담양굿의 전승과 활용사례’, ‘담양굿의 미래모색’으로 장을 구분하였고, 김동언류설장구와 판굿을 중심으로 담양굿의 특징과 변화 양상을 파악하였다. 또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재발견한 담양풍장놀이의 가치와 의미는 김동언보유자의 다양한 민속연행의 역량을 재발견하는 성과로 이어졌고 우도설소고춤의 창작 과정에서 느끼고 정리한 바를 공유하게 된 것 또한 본 연구의 성과라 할 수 있다. 결론인 담양굿의 미래모색에서는 전승과 활용의 패러다임을 정의하여 담양굿의 가치를 밝히며 활용에 관한 제안을 하였다. 본 연구를 통해 담양굿이 가진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와 예술적 가치가 재조명되어 궁극적으로 담양굿의 미래가 모색되길 바란다. 또한, 모든 무대 실연자들에게는 창작 과정에서 전제되는 원형의 본질에 대한 주체적 고민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는다.

      • 조선후기 경상우도 사족의 分化와 動向

        박소희 영남대학교 대학원 2022 국내박사

        RANK : 247807

        조선후기 경상우도 사족은 남명학파라는 학문적 동질성을 기반으로 정파(政派)상 북인의 입장을 표방하였다. 이들은 학문의 실천을 강조했던 남명의 가르침에 따라 임진왜란이 발생했을 때 의병이 되어 왜적을 물리쳤다. 전쟁이 종결된 후에는 피폐해진 향촌사회를 성리학적 질서로 복구하는데 앞장섰다. 이러한 공로로 이들은 북인으로서 광해군 즉위와 함께 집권세력으로 부상하였다. 정인홍을 중심으로 한 문인들은 대거 중앙관료로 진출하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스승에 대한 존숭작업을 진행하여 1609년(광해군 원년) 남명을 제향하는 덕천·신산·용암서원이 동시에 사액을 받게 된다. 광해군 집권기 우도 남명학파는 이들 서원을 출입하며 학파·정파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여론을 주도해갔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북인은 실각하면서 학파·정파의 불가분 관계로 인해 우도 남명학파는 새로운 활로를 모색해야만 했다. 그 선택지는 정온을 중심으로 한 중북계 인사들을 통해 남명학파가 재결집하거나, 집권세력인 남·서인으로 편승하는 방법이었다. 집권세력으로의 편승은 곧 퇴계학과 기호학의 수용으로 이어졌다. 중북계로의 결집은 반정 직후 가장 원로 격인 동계 정온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그는 반정 이후 용암서원의 원장을 지내는 한편, 덕천·신산서원에서 하항·김우옹을 추향하려 할 때 자문해주기도 했다. 그의 문인들은 대체로 정인홍과 관련있거나 중북계에 해당하는 인물이 많았다. 무민당 박인 역시 생전에는 대북에 반대한 전력으로 남명학파 내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지는 못했다. 그러다 반정 이후부터 용암서원의 원규를 새로 작성하고 남명문인록인 『산해사우연원록』을 편찬하는 등 남명학파 내 위상도 높아져갔다. 이에 박인은 합천 사족의 결속력 강화를 위해 수구계를 결성하고, 용연재를 건립하여 문인을 양성했다. 퇴계학으로의 전도는 퇴계·남명 양 문하에서 수학한 정구를 매개로 이루어졌다. 정구는 남명학파의 일원이기도 했지만, 광해군 집권기 정인홍과 대립하며 이미 남인의 종장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정구 이후에는 진주·단성·함양·함안 일대 남명학파의 가문에서 장현광의 문인이 되기도 했다. 이 무렵 상주 일대에서는 정경세를 중심으로 학단이 형성되고 있었다. 우도에서는 합천의 강대수와 고령의 박응형이 문인으로 확인되었다. 17세기 후반 남인계는 이현일을 중심으로 한 갈암학단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현일은 유배에서 풀려나 1년간 진주에서 머물렀는데, 이때 40여 명의 우도 문인들을 규합하였다. 이 중 절반은 선대부터 정구·장현광의 문인으로서 퇴계학을 계승한 경우이고 나머지는 새롭게 문인이 된 경우였다. 여기에는 남명 후손과 남명학파 핵심인물의 후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18세기 우도 내 퇴계학통은 더욱 확대되어 이상정·정종로의 문인도 다수 배출되었다. 이상정 문인은 단성·밀양을 포함하여 13개 지역에서 확인되며 이들은 스승에게 선조에 대한 현양 문자를 청하기도 했다. 이상정이 찬술해준 문자를 보면, 퇴계학파적 시각에서 내용이 기술되고 있었다. 반면 정종로의 문인은 진주·함안을 포함하여 8개 지역에서 확인된다. 정종로는 이상정과 달리 남명학파에 대해 비교적 개방적 시각에서 기술해주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시기 퇴계학통의 확대에는 근기남인 이만부의 역할도 컸다. 바로 1721년·1724년 그가 덕천서원의 원장을 역임하면서 우도의 침체된 학풍을 다시 일으켰던 것이다. 이때 이만부와 교유한 인물은 서원이 소재한 진주권 유림들이 대부분이었다. 한편 우도의 서인화는 삼가의 팔계정씨 정지린·함양의 남원양씨 양홍주가 그 시초라 할 수 있다. 이들은 남명학파 내에서도 비중 있는 인물로, 정지린은 남명의 생질이자 남명의 첫 제자이기도 했다. 또 양홍주는 정인홍의 처남이었다. 우도의 서인화가 남명·정인홍과 인척관계인 이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점이다. 이이의 학통은 김장생-송시열·송준길-권상하로 이어져 이들에게 사사한 우도 문인 수는 약 47명이었다. 이중 가장 비중이 높은 지역은 삼가로, 팔계정씨·안동권씨·은진송씨 가문에서 27명이 확인된다. 문인록에는 확인되지 않지만, 1637년 송준길의 우거를 계기로 안음 일대 서인화도 상당히 진행되어 있었다. 특히 삼가의 문인들은 송시열 변무소·사계 승무소·양송문묘종사와 관련된 정치적 현안에 있어 우도 서인계를 대표하며 상소를 주도해 나갔다. 18세기 우도의 기호학통은 호론계 윤봉구·송환기 문인과 낙론계 이재-김원행·송명흠 문인이 배출되면서 더욱 확대되어 갔다. 윤봉구·송환기 문인은 약 46명, 낙론계 문인은 약 29명 확인되었다. 17세기는 삼가를 중심으로 문인이 형성되었다면, 이제는 거창을 비롯한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가문의 인물들이 확인된다는 것이 특징이다. 한편 경상우도 사족들의 학파적 분화와 함께 그들의 자치기구인 서원 역시 정파적으로 변화해갔다. 북인계 서원으로 분류되는 합천 용연서원은 인조반정 이후 박인을 제향하는 서원으로 건립되었다. 그런데 성주·거창 일대에서 박인이 정인홍 문인이었다는 것과 회퇴변척에 동조했다는 혐의로 서원의 건립과 사액 여론에 반대하고 있었다. 이에 서원 측에서는 두 혐의에 대한 변무를 끊임없이 해야만 했다. 이후 용연서원은 남인계 성향을 보이면서 남명학파권 서원과의 교유도 지속하였다. 진주 덕천서원과 함양 남계서원은 우도 남명학파를 대표하는 서원으로 정인홍 문인들의 참여도 높았다. 그렇기 때문에 두 서원은 반정 이후 정치적 부침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덕천서원은 하홍도 문인들이 중심이 되어 정인홍이 관여했던 『남명집』을 훼판하면서 대북과의 연결을 차단시켰다. 이후 이만부·채제공·정종로 등 남인계 인사들이 원장을 지내며 서원은 친남인화 되어갔다. 남계서원은 1685년까지 『경임안』에 원장이 없어 운영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후 이 서원은 노론화한 정여창의 후손들이 서원 운영을 주도하면서 서원 역시 노론화하였다. 이처럼 중앙 정계로의 진출이 막힌 상황에서 우도의 사족과 서원은 학파·정파를 달리하며 집권세력에 편승해갔다. 그 과정에서 남·서간의 갈등을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공조의 모습도 나타났다. 밀양에서는 사림파의 종장인 선산김씨 김종직의 후손과 여흥민씨 민구령 후손들이 혼반에 있어 정인홍을 비롯한 남명학파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런데 대북에 반대했던 남인계 인사들이 반정 이후 향론을 주도하면서 이들은 노론계로 전향하였다. 반정 이후 남인계가 밀양 향론을 주도하다보니, 17세기 후반 노론계 부사의 부임은 자연스레 갈등으로 이어졌다. 밀양의 신흥 노론세력들은 수령과 짜고 남인계 인사들을 모함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창녕조씨 조광익의 후손들은 소론의 영수였던 윤증의 힘을 빌려 위기를 해결하였다. 한편 19세기 초반 밀양 출신 송계 신계성 가문에서는 후손 신호인을 중심으로 『송계실기』 편찬에 들어갔다. 신호인은 기호학통을 계승한 송환기의 문인이었는데, 이 가문은 삼가의 팔계정씨 가문과의 혼반을 계기로 밀양에서 삼가로 이거해왔다. 한편 밀양에 남아 있는 신계성 후손들은 남명학파적 면모를 보이다가 한강 정구를 매개로 남인화했다. 실기 편찬을 주도했던 신호인은 밀양 종중으로부터 신계성과 관련된 자료를 받는 등 서로 협력의 모습을 보였다. 반면 실기의 발문에 있어서는 이견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실기에 남·노 인사의 발문이 함께 실렸다는 점에서 신호인의 남·노에 대한 개방적 시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결국 19세기 당론에 따른 갈등 보다는 신분제 해체와 같이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향촌 내 사족들의 결속이 우선시 되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 李可染의 牛圖 鑑定 硏究

        이승진 明知大學校 文化藝術大學院 2004 국내석사

        RANK : 247806

        李可染(1907년-1989년)은 20世紀 中國滄書史에 있어서 名實精努한 暴高의 巨匠이다. 이러한 그의 美씬史的 價値는 逆說的으로 美術品 市場에서 鑛造品의 量産을 초래하였다. 李可染에게 있어서 간판격인 그림은 半圖인데, 現在 美術品 市場을 가장 어지럽히는 것도 率圖 僞作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의 牛圖에 대한 硏究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아 이 또한 僞造考들이 쉽게 僞作을 만들고 販路를 재척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本 論文은 지금 이 순간도 한없이 생산되는 僞作으로 인하여 극도로 混亂스러워지고 있는 李可染 牛圖의 藝術世界를 올바르게 理解하고 整理하기 위해서 지금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은 李可染 牛圖作叢의 眞僞를 鑑定할 수 있는 知識과 能力을 갖추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李可染 牛圖의 藝씬風洛의 變化 發展, 李可染 牛圖에 대한 眞僞 鑑定 要領을 면밀히 考禦해 보았다. 大略的 統計에 의하면 李可染이 깐노에 남기고간 全體 作品 數는 800장 미만이며, 그 중에서도 牛圖는 100 작품 정도에 불과하다. 本 論文은 李可染藝術基金會의 嚴示圖錄이나 眞品만을 嚴選한 作晶圖錄 등을 基礎로 하여, 먼저 眞品임에 틀림이 없는 牛圖作品 79장을 選定하고 具懼的으로 硏究를 진행하였다. 李可染 牛圖의 튄씬風格을 보면, 前期는 비교적 筆致가 가벼줬고, 後期에는 소를 뚜렷하게 못글씨를 쓰듯이 寫하였다. 前期의 귀업고 익살스러줬던 牧童은 後期에는 어느새 大3然 속에서 誇情을 느끼는 牧童으로 變化하였다. 이는 農村 風姜畵로서의 傳統的인 牛圖를 貌代的 感覺의 街情誇로 變化 發嚴시킨 것이다. 李可染이 生存했을 당시에도 이미 國內外에 자신의 작품을 僞造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아서 수많은 牛圖 僞造이 제작되었으며, 그들이 사용하는 圖章, 印朱가 진짜와 똑같이 제작되어 사용되었다. 일적이 李可染은 僞作이 자신의 藝術世界의 面貌를 毁損한다고 擴慨하였다. 지금 제작되고 있는 僞作의 수준은 가히 眞品과 區別이 되지 않을 정도의 수준이다. 專門 書畵家의 偏造의 參與는 우리에게 어려운 問題로 이미 握되었다. 특히 李可染의 藝姉뜨텄를 소개하고 연구하는 專門書籍에 버젓이 알게 모르게 僞作을 싣는 것은 閣題가 상당히 크다고 하겠다. 현재 李可染의 僞作에 있어서는 完全僞造인 拏, 臨, 倣의 방법이 주로 쓰이고 있으며 造의 경우는 거의 없다. 李可染 작품의 拏本 僞作은 그다지 많지않으며, 暮本으로 제작한다 하더라도 原本과 완전히 같게 하기보다는 조금의 變化를 주었다. 어떤 拏本은 한 作品을 藍木으로 하여 拏한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서 서로 다른 作品에 있는 소들을 모은 것이다. 지금까지의 경우를 보면 李可染의 鑛作 중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이 臨本이다. 僞造者들도 專門書籍에 소개된 旣存의 僞作을 藍本으로 정하고, 이에 의거하여 鑛造하였기 때문에 정작 李可染의 眞作으로부터 더 멀어지는 경우가 많이 있다. 李可染의 倣本 僞作에서 보이는 특이한 현상으로는 僞造考가 自身의 筆力 不足으로 인한 決敗를 줄이기 위하여 일반인들에게 비교적 生疎한 李可染의 前期 譜風을 做本의 대상으로 했다는 것이다. 倣本 중에는 옛날에 書書著錄을 이용한 總造의 방법을 지금에 맞게 본받은 것도 있다. 지금의 僞造者들은 大部分 나름의 職業意識을 가지고 作家의 길씬딴썼를 脚究하며 奪門的으로 騎造에 참여하고 있다. 조금만 救心하면 僞作을 眞品으로 나아가서 名業으로 誤認할 수가 있다. Li Keran (1907-1989) is undoubtedly the master of masters in the Twentieth Century Chinese Painting History. Paradoxically, his reputation and artistic values have caused mass production of counterfeits in the art market. Li Kerari s representative works are his buffalo paintings, which have the largest volume of counterfeit pieces, bringing about a lot of confusion in market. it is partly because total absence of study on his buffalo paintings has contributed to the atmosphere in which forgeries are easy and forgers easily find a market. This study claims that the most urgent task to organize and establish right understanding of Li Kerari s world of art in buffalo paintings, which is in chaos due to endless production of counterfeit pieces, is to raise knowledge and skills to appraise real pieces created by Li Keran. Thus, it offers close consideration of changes and development of buffalo paintings in Chinese painting history, changes and development of Li Kerari s artistic features and methods to appraise real pieces of Li. Rough statistics show that the number of the whole artwork Li Keran left behind is less than 800, among which buffalo paintings are only 100 pieces. This study, based upon the list of exhibitions works of Li Kerari s 1~rt Foundation and the list of real works, first selects 79 buffalo paintings which are real works without fail and conducts specific research on them. In terms of the artistic features of Li Kerari s buffalo paintings, he had relatively light touches in his early years while he painted buffalos clearly like letters in caligraphy in the later years. Herdboy who had been lovable and humorous in his early years turned into mature figures who exchange communion with the nature in his later years. That is, he changed and developed traditional buffalo paintings as agricultural landscapes into lyrical poems with modern sensibility. Even while Li Keran was alive, many forgers produced a number of counterfeit buffalo paintings, and they even forged the seals and stamping paste on the paintings. Li Keran was indignant that those counterfeits were damaging his artistic values. The counterfeits these days are so real that it is difficult to tell them from real ones. Professional artists evolvement in forgery is emerging as a big problem. Especially, there are serious cases that they stealthily include counterfeits even in research books that introduce and explore Li Kerari s world of art. Nowadays, perfect counterfeit methods of copies, transcripts and imaginary reproductions account for most cases with few cases of extreme fakery. T'he number of copies of Li Kerari s works is small, and, if any, they are modified a little rather than they are exactly identical to the originals. Some copies are created not by copying a work as a sample but by copying each different element from many different works. So far, transcripts account for the largest number of counterfeits. Sometimes as forgers create ounterfeits with a sample of the existing counterfeits introduced in professional works, they tend to be distant from the originals. One peculiar feature of imaginary reproductions is that the forgers copied Li Kerari s early styles which are rather unfamiliar to general public to hide his lack of brush force. In addition, some imaginary reproductions adopt forgery methods of the oid times in which they use books of paintings. Forgers have participated in creating counterfeits with their own professionalism, studying Li Kerari s world of art in depth. Thus, there are possibilities that counterfeits are mistaken for real ones, even classics.

      • 호남 우도 농악 판굿의 구성 원리

        시지은 경기대학교 일반대학원 2013 국내박사

        RANK : 247806

        이 논문은 호남우도농악 판굿의 구성 원리를 밝히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진행되었다. 호남우도농악은 이리ㆍ김제ㆍ부안ㆍ정읍ㆍ고창ㆍ영광 등 전라도 평야지역의 농악을 말한다. 농악 중에서 판굿은 농악의 꽃이라고 할 정도로 뛰어난 기예가 총화되어 있는 연행예술이다. 특히 우도농악은 근대 이후 판굿이 가장 발달한 지역이라는 평을 들을 만큼 판굿이 잘 짜여져 있다. 판굿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인 장단과 진풀이의 전개와 결합 양상에서 긴장과 이완의 짜임새가 통일적이고 유기적으로 보이는 것이 호남우도농악 판굿의 특징이다. 이러한 짜임새에 일정한 구성 원리가 작동하고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진행한 이 논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밝힐 수 있었다. 첫째, 정읍을 중심으로 한 우도농악이 특별히 발달할 수 있었던 몇 가지 기반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00년대 초반에 정읍 보천교에서 농악을 적극 권장하고 장려한 사실과 고창의 거부(巨富) 정방규가 농악인들을 적극 후원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조건을 기반으로 호남우도농악은 1900년대 초반에 비약적인 성장과 왕성한 활동을 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해방 이후 우도농악은 위기를 맞게 된다. 경연대회가 활성화되었지만, 우도농악을 토대로 한 여성농악단의 활동과 전통 굿판의 상실이라는 시대적 변화로 인한 농악 명인들의 이주 때문이었다. 그러나 1985년 이리농악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후 부안ㆍ영광ㆍ정읍ㆍ김제ㆍ고창 등의 농악이 보존과 전승을 유지하게 되면서 우도농악은 재기하여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둘째, 호남우도농악의 전승지 중에서 이리ㆍ정읍ㆍ김제ㆍ부안ㆍ고창ㆍ영광 6개 지역 판굿의 편성과 차림새, 연행 순서와 내용을 비교하여 호남우도농악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정리하였다. 호남우도농악 판굿의 보편성은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 특징으로 정리된다. 1) 어름굿, 오채질굿, 오방진굿, 호호굿, 구정놀이 다섯 개의 마당으로 구성되었다. 2) 주요한 세 마당은 삼채굿이라는 독립적인 단락으로 마무리된다. 3) 오채질굿과 좌질굿, 호호굿 장단 등 다양한 혼소박 형태의 장단을 공유하고 있다. 4) 쇠잽이들은 홍동지기를 입고 부포상모를 쓴다. 5) 고깔소고수의 편성과 고깔소고춤이 발달하였다. 셋째, 호남우도농악 판굿에서 핵심적인 구성요소인 장단과 진풀이의 전개와 결합 양상을 살펴본 결과 다음과 같은 구성 원리가 있음을 밝힐 수 있었다. 1) 판굿에서 각 마당의 장단은 기경결해(起輕結解)와 같은 개념인 ‘내고 달고 맺고 푸는’ 전개양상을 나타낸다. 2) 장단과 결합하는 진풀이는 시각적이고 집단적인 차원에서 기경결해 양상으로 전개되어, 장단과 진풀이가 결합했을 때 각각의 마당은 기경결해 전개 양상이 통일적이고 유기적으로 반복된다. 3) 장단과 진풀이가 결합하여 구성되는 각각의 마당에서 기경결해의 양상은 차이가 있다. 오채질굿 마당에서는 네 개의 단락으로, 오방진굿 마당에서는 두 개의 단락으로, 호호굿 마당에서는 하나의 단락으로 기경결해의 양상이 전개된다. 4) 판굿을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휘모리로 끝나는 어름굿 마당과 구정놀이 마당이 처음과 끝에서 수미상관의 관계에 놓여있고, 삼채굿으로 끝나는 오채질굿ㆍ오방진굿ㆍ호호굿 마당은 긴장과 이완이 고조되었다가 점차 하강하는 추세로 진행된다. 넷째, 호남우도농악 판굿의 구성 원리로 인해 우도농악 판굿의 특징과 미학적 생성원리가 드러나게 되었다. 1) 다른 권역의 농악과 달리 마당 구성에 통일성과 유기성이 있다. 2) 삼채굿이라는 단락 요소가 마당 구성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3) 우도농악 판굿의 전체적인 구성, 마당별 구성, 삼채굿이라는 단락 요소의 구성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기경결해의 전개 양상은 판소리ㆍ시나위ㆍ산조를 중심으로 한 호남음악과 세습무계 출신 농악 명인들의 활동과 깊은 상관 관계가 있다. 호남우도농악 판굿의 구성 원리를 밝히고자 진행된 이 논문은 판굿의 구성 원리 뿐 아니라, 우도농악 판굿의 보편성과 특수성, 판굿에서의 미학적 생성 원리를 밝히는 성과까지 얻게 되었다.

      • 진주 삼천포 농악과 호남 우도 농악의 설장고 가락과 춤사위 비교 연구

        채리희 단국대학교 2006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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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folk dance Chumsawi of the Nongak category, Seoljangunori, features uniqueness and significance particular to its form, and retains a characteristic elegance dubbed “still center movement”. Chumsawi and the equally important Seoljanggu rhythm together constitute the distinct traits of this group. This characteristic elegance is central to these styles of traditional Korean folk dance, appearing in the Nongak forms of both the Kyungsang-Do Jinju Sampcheonpo and Jeonla-Do Udo regions. A comparison of these forms as they vary within these two locations will shed light on the origins of particular regional differences as a whole. For reference material, this analysis primarily relies on the dance compositions of! Mr. Park Yuam (Mubo and Cheabo) for the analysis of the Jinju Sampcheonpo Seoljanggu form, and Mr. Lee Young Sang’s work for Honam Udo Seoljanggu. The most striking dissimilarity appears in the traditional dance costume of the two regions. Jinju Sampcheonpo and Honam Udo Seoljanggu both exhibit the white zeogoli dress, but the colors of the haengjeon vary: stripes of red, yellow, and green for the former; yellow, red, and blue with a blue dogeli for the later. Jinju Sampcheonpo’s traditional costume lacks a Dogeli altogether. Honam Udo ! Seoljanggu’s attire includes a peaked hood, the Gokal, which replaces the Sangmo. The sequencial ordering of the rhythms in the two dances varies as well. With a total performance time of 3:20 JinJu Samcheonpo Seoljanggu unfolds as follows: Huimoli(opening), Samchea, Medojin, Huimoli, Yunpoongdae, Huimoli (closing). With a total performance time of 7:20 the Honam Udo Seoljangu ordering differs: Huimoli (opening), Da’sreum Dongsalpuli (o’banjin), Hudulook, Goodgeli, Samchea, Hohegood, Hudulook, Medojin, Yunpungdae (closing). It goes without saying that the Honam Udo Seoljangu has developed into the more complex of the two. But this assessment depends on the presence of the Sangmo and the level of Chumsawi competence displayed by the performers. The largest difference between the two forms derives from the Chumsawi’s Cheasangmo. Jinju Samcheonpo Seoljanggu requires the use of the Chesangmo and accompanying chea, which the performer rotates. More experienced performers are capable of rotating the Cheasangmo at high velocities. The Honam Udo Seoljanggu requires the performer to wear a peaked hat, the gokal while making small graceful movements. These graceful movements, and the variety of Cheabaillim gained from the inclusion of the Sangmo, strengthen the performance’s overall effect on the audience. 농악에 나타나는 설장고 놀이의 독특한 춤사위는 농악의 춤연구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이다. 동시에 민속춤의 한 특성을 밝히는데 있어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설장고는 한국 민속놀이 중 음악과 춤이 고루 섞여 표현되는 한국 민속예술이 지닌 정중동의 미를 가장 잘 내포하고 있다. 본 연구는 경상도의 진주 삼천포농악과 전라우도 농악의 설장고 가락과 춤사위를 비교분석하여, 지역적 특성에 따른 한국무용 정서의 뿌리를 찾고, 이를 자료로 정립하는 것에 그 목적을 둔다. 따라서 본고는 진주삼천포 설장고는 박염선생의 영상자료를 토대로, 또 호남우도 설장고는 이영상선생의 영상자료를 토대로, 각각 무보와 채보를 작성하였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첫째, 진주 삼천포 설장고의 복색은 흰색 저고리와 바지를 입고 행전을 매며, 빨강, 노랑, 연두 삼색의 띠를 착용하지만 더거리를 입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호남 우도 설장고의 복색은 흰색 저고리와 바지를 입고 행전을 매며 소매에 색동이 달린 남색 더거리를 착용하고 노랑, 빨강, 청색의 삼색의 띠를 두르며 머리에는 상모대신 고깔을 쓴다. 둘째, 진주 삼천포 설장고의 주요가락은 ‘휘모리(입장)-삼채-매도진-휘모리-연풍대-휘모리(맺음)’의 순서로 구성되어 있으며, 호남 우도 설장고의 주요가락은 ‘도입(입장)-휘모리-다스름-동살풀이(오방진)-후두룩-굿거리-삼채-호허굿-후두룩-매도진-연풍대-맺음’의 구성으로 이루어진다. 또한 진주 삼천포 설장고의 연주시간은 약 3분 20초이며, 호남 우도 설장고의 연주시간은 약 7분 20초이다. 따라서 호남 우도의 가락은 가락구성과 다양성에 있어서 보다 발달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춤사위 특히 상모의 유무와 장구의 역할 차이로 파악해야 한다. 셋째, 진주 삼천포 설장고와 호남 우도 설장고의 춤사위에 있어서 가장 큰 차이점은 채상모의 유무에 있다. 진주 삼천포의 설장고는 채상모를 쓰고 이를 돌리면서 연주하므로 일정한 박자로 힘차게 가락을 연주한다. 따라서 상체를 이용한 춤사위보다 간결하고 힘찬 발걸음과 넓은 동선을 활용한 춤사위가 발달된다. 반면에 호남 우도의 설장고는 고깔을 쓰고 연주한다. 이는 작은 동작에서 큰 움직임을 보여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며, 상모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채발림과 발동작에서 보다 다양한 춤사위가 가능해 진다. 위와 같은 결론을 통해 진주 삼천포 설장고와 호남 우도 설장고는 지역적 특성에 따라 복색과 가락구성, 춤사위에 있어서 현저한 차이점이 있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설장고 놀이는 지역과 관계없이 음악과 무용의 조화를 통해 멋이 우러나와야만 한다는 점도 간과 할 수 없다. 농악의 한 부분인 진주 삼천포 설장고와 호남 우도 설장고에 나타나는 민속춤 본래의 기능을 계승 발전시켜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과제라고 본다.

      • Genotyped-Proband Design에서 침투율의 추정방법에 관한 연구

        명성민 연세대학교 대학원 2002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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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논문에서는 유전자에서 희귀한 변이(mutation)의 침투율(penetrance)을 추정하기 위하여 지원자(volunteer), 또는 시조(proband)를 이용하는 단면 연구(cross-sectional study)의 다른 형태인 GPD(Genotyped-proband design)를 이용하고, 그 중에서 Moore 등(2001)이 제시한 유사우도함수(pseudo likelihood function) 와 Chatterjee 등(2001)에 의하여 제안된 주변우도함수(marginal likelihood function)를 이용한 침투율의 추정에 관한 내용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통계프로그램(S-PLUS)을 이용한 모의실험기법에서는 유사우도를 이용한 추정기법에 대한 평가를 하기 위하여, GPD에 기초한 모의자료를 멘델리안 계산(Li, 1976)을 적용하여 생성하였고, 유사우도추정기법과 환자-대조군 연구(case-control)에 기초한 추정기법을 비교했을 때,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첫째, 유사우도추정기법은 기존의 연구에 비해서, 조사해야 할 시조의 수(number of proband)에 덜 민감하다. 둘째, 변이가 드문 경우, 즉, P(A)가 작은 경우에도 침투율을 추정하는데 있어서 보다 정확하게 추정치를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In the thesis, we developed the Genotyped-Proband Design(GPD), an alternative cross-sectional study that used volunteer or probands, for estimating the penetrance of a rare mutation. Especially, pseudo-likelihood(Moore et al, 2001), marginal-likelihood(Chatterjee et al, 2001) were main parts of the thesis about estimating penetrance. For the analysis of simulated data using S-PLUS, we generate pedigree data with respect to GPD, using Mendelian calculation in order to evaluate estimating method of pseudo-likelihood. Comparing to estimating method based on pseudo-likelihood and case-control, we found two conclusions. First, Pseudo-likelihood estimating method is less sensitive number of probands than case-control estimating method. Second, Pseudo-likelihood estimating method is more consistent estimate of penetrance than based on case-control approach in a rare mutation, small allele frequency 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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