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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근대불교학의 탄생』에 대한 고찰

        조병활(Cho Byung-Hwal) 영남퇴계학연구원 2019 퇴계학논집 Vol.- No.24

        근대시기 중국에서 일어난 불교학(불학)의 발흥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한국의 중국학 연구자들이 크게 주목한 분야는 아니었다. 그러나 중국정부가 현재 불교와 불교학의 진흥을 적극 지원하고 있고, 수많은 중국의 대학들에서 매년 적지 않은 수의 불교 관련 박사학위논문들이 출간되고 있다는 점에서 중국 근대불교학의 태동을 소홀히 해서도 안 된다. 특히 현대 중국의 불교학은 대체로 중국 근대불교학의 연장선상에 서있다는 점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중국 근대불교학의 탄생󰡕은 이런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충분한 저서다. 그래서 중국역사에서 근대시기를 언제부터로 보아야 되는지, 중국 근대불교학의 발생에 일본불교학이 끼친 영향은 어느 정도인지, 중국의 티베트학을 어떻게 볼 것인지, 중국학자들의 불교학 연구방법론에 대해 검토할 사항은 없는지, 우리나라에서 이뤄진 근대시기 중국(불교)사상에 대한 연구 성과는 무엇이 있는지, 고전 한문 해석을 어떻게 하는 것이 보다 적확(的確)한지 등의 관점에서 [중국 근대불교학의 탄생]을 검토하고 고찰했다. How to view the rise of Buddhist Studies in China during the modern period was not an area that Korean researchers of Chinese Studies paid much attention to. However, the Chinese government is actively supporting the promotion of Buddhism and Buddhist Studies at present, and many Chinese universities are publishing a number of doctoral dissertations related to Buddhism every year, so it should not neglect the birth of Chinese modern Buddhist Studies. In particular, it is also necessary to note that the Buddhist Studies of contemporary China is largely an extension of modern Buddhist Studies in China. The birth of Modern Buddhist Studies in China is a book worth paying attention to in this regard. Therefore, from the perspective of when the modern period would be begun in Chinese history, how much of the influence of Japanese Buddhist Studies on the development of modern Buddhist Studies in China, how China s Tibetan Studies would be viewed, is there anything to examine the buddhist research methodology of Chinese scholars, what are the results of research on the modern Chinese (Buddhist) thought in present-day Korea, and how to interpret classical Chinese texts is more accurate, I examined and analyzed The birth of Modern Buddhist Studies in China.

      • KCI등재

        불교지성의 연구활동과 근대불교학 정립

        이봉춘(Bong Choon Lee)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2008 佛敎學報 Vol.0 No.48

        근대 불교지성의 연구 활동과 근대 불교학의 정립을 살피는 일은 곧 한국불교의 근대정신 및 근대성을 이해하는 작업으로서도 일정한 의미를 갖는다. 근대 불교학은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한국불교가 처한 대전환기적 시대상황과 함께 불교지성의 다양한 동향 속에서 싹트고 성장해 왔다. 즉 근대사회로의 급격한 변화와 일본의 식민정책 하에서 교육·문화·불교개혁·외국유학 활동 등 불교지성들의 근대적 지적 동향을 바탕으로 근대 불교학이 싹트고 성장해 온 것이다. 근대 불교학을 이끌어 온 주역들은 물론 그런 시대상황과 동향 속에서 형성된 일단의 불교학자들이었다. 근대 불교학자군에 포함시킬 수 있는 인원은 대략 20명 내외로 헤아려지며, 학문적 배경 및 연구 성향에 따라 이들은 다시 몇 그룹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전통교학자, 실천적 교학자, 유학 출신 신진학자의 그룹이 그것이며, 한국불교학 연구에 기여한 일본인 학자들도 한 그룹을 이룬다. 이들 근대불교학자들은 몇몇을 제외하고 는 거의 대부분이 在俗者로서 생활했던 승려신분으로, 이런 현상은 당시 한국불교의 한 특징적인 時流를 반영한다. 어쨌든 종교적 과제를 안고 있는 승려이자 학문적 과제를 추구해야할 불교학자로서 이들의 신분적 자각은 불교학 연구 활동의 기본적 배경이 되었다. 또한 일본의 불교문화 및 근대화된 불교학의 영향 그리고 불교 지성계 전반의 근대에 대한 시대인식 속에서 표출되고 있는 활발한 불교개혁론의 제기, 신학교기관을 통한 청년교육 활동, 근대적 지적활동으로서의 다양한 불교잡지의 간행과 논문 발표 등은 불교학 연구의 또 다른 배경을 구성한다. 근대 불교학자들이 이룩한 연구업적은 양적인 면에서 의외로 방대하며 연구주제 와 내용 또한 다양하고 풍부한 편이다. 근대 불교학의 정립은 곧 이같은 학문적 업적과 성과를 말함이다. 따라서 그것을 ①불교학 기본자료 ②한국불교·한국불교사 ③교학 및 불교사상 ④석가모니·인도불교 ⑤불교신앙 및 포교 ⑥종교사·종교학 ⑦불교사회·문화·기타의 주요 연구분야로 묶어 검토할 때, 우리는 근대불교학의 대략적인 윤곽을 그려볼 수 있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주목할 만한 분야는 ②와 ③이다. 근대 불교학 연구의 출발 계기와 주요 과제가 우선 한국불교의 정체성 확립에 있었다 할 때 한국불교 및 한국 불교사 분야에 연구의 관심과 노력이 집중되고 있음은 당연한 현상이다. ②의 분야가 주로 전통교학자들에 의해 큰 성과가 나왔다면, ③의 교학 및 불교사상 분야에서는 신진학자들의 연구 개척 노력이 돋보인다. 근대불교학은 물론 그 자체로서 완성태는 아니다. 근대정신 및 근대성에 합당한 연구 업적과 성과를 충분하게 이루었다고 말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연구들을 통해 근대 불교학이 정립함으로써 이를 기반으로 이후 한국불교가 불교학 연구에 더욱 새로운 지평을 열어갈 수 있게 되었음은 분명한 일이다. Observing carefully the research activities of Korean Buddhist intellectuals and the establishment of Korean Buddhist studies in modern ages has some meaning as the work to be able to understand both the modern spirit and the modernity of the Korean Buddhism. Modern Korean Buddhist studies has been sprouted up and grown up by various research activities of Buddhist intellectuals with the trend of the times and the great turning point of Korean Buddhism between the end of the nineteenth century and the early of the twentieth century. In other words, under the Japanese colonial policy and rapid change into modern society, modern Korean Buddhist studies has been built up and grown up by the Buddhist intellectuals based on their modern intellectual trend such as education, culture, Buddhist reformation and the activities during their studying abroad. In brief, the leading Buddhist intellectuals of modern Korean Buddhist studies were such Buddhist scholars as were built up in the trend and circumstances of the times. Those who belong to the modern Buddhist scholars are roughly estimated some 20 and they are able to be divided into a few groups by their scientific backing or their research disposition. Traditional Buddhist scholars, practical Buddhist scholars, new Buddhist scholars who studied abroad, and Japanese Buddhist scholars who contributed to the Korean Buddhist studies form those groups. Those modern Buddhist scholars were mostly married Buddhist monks except some, which reflected the Japanese Buddhist tradition and such tradition was the characteristic current in the Korean Buddhism of the times. Anyway, though they were the Buddhist scholars who had religious problem as the priest and obliged to investigate academic task, the awareness of their social status became the basic background on the research activities concerning Buddhist studies. In addition, the Japanese Buddhist culture, the influence of Japanese modernized Buddhist studies, and the awareness of the Korean Buddhist intellectuals of the times formed the other background on the research of Buddhist studies. The research achievements of modern Buddhist scholars are not only unexpectedly massive in terms of quantity, but the subjects and contents of studies are also various and plentiful. For the reasons stated above, the formation of modern Buddhist studies stands for the research achievements and the results on Buddhist studies. Accordingly, we would be able to grasp the general outline of modern Korean Buddhist studies as follows: ①Basic materials for Buddhist studies ②Korean Buddhism and the history of Korean Buddhism ③Buddhist studies and Buddhist thought ④Sakyamuni and Indian Buddhism ⑤Buddhist faith and missionary work ⑥The history of religion and the science of religion ⑦Buddhist society, Buddhist culture, and other subjects. Among the above ② and ③ are especially remarkable fields of study. As the start opportunity and main problem for modern Buddhist studies were chiefly the establishment of the identity for the Korean Buddhism, it was natural phenomenon that modern Korean intellectuals exerted all possible efforts on both fields of Korean Buddhism and the history of Korean Buddhism. While traditional scholars produced good results on both fields of ②Korean Buddhism and the history of Korean Buddhism, on the other hand new intellectuals had excellent results on both ③Buddhist studies and Buddhist thought. It is true that modern Korean Buddhist studies might not be a complete state in itself, for it did not accomplish perfectly the research achievements and results in terms of modern spirit and modernity. And yet, as modern Korean Buddhist studies could be settled through the above all possible efforts on various research activities by modern Korean intellectuals, it is obvious that on the basis of the above research activities the Korean Buddhism has been able to open a new skyline on the Korean Buddhist studies and research activities.

      • KCI등재후보

        일본의 근대불교학 형성과 대승 비불설(非佛說) 문제

        조승미(Cho, Seung Mee) 한국불교연구원 2009 불교연구 Vol.30 No.-

        대승 비불설(非佛說), 즉 ‘대승경전은 불설이 아니라’라는 주장은 메이지시기 불교학이 근대 학문으로 정립되어가면서 대두된 주제였다. 이것을 주장한 대표적인 학자는 도쿄제국대학 문과대학 강사들이었던 무라카미 센쇼(村上專精)와 아네자키 마사하루(姉崎正治)였는데 이들의 입장차이와 그 논리전개를 통해 메이지 시대 일본불교학의 형성과정을 살펴보며, 이와 아울러 ‘서구 근대’불교학의 문제점을 검토해 보았다. 아네자키의 일련의 불교관련 저서 『불교성전사론』(1899), 『현신불과 법신불』(1901), 『근본불교』(1910)는 그가 서구 불교학의 관점을 수용함에 따라 불교관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보여준다. 즉, 실증주의 역사관과 성서비평의 과학적인 입장에서 대승불설이 비판되었으며, 불교의 ‘원천’을 규명하고자 하는 불교문헌학은 ‘사료’로서 부정확한 대승불교를 비판했다. 마지막으로 ‘근본불교’에서는 붓다의 인격을 중심으로 재편한 신앙에 대승불교가 소멸되어 있다. 한편, 근대불교학의 고찰에서 잘 조명되지 않았던 이노우에 테츠지로의 동양철학으로서의 서구 인도철학은 아네자키의 서구 수용적 불교학의 배경이 되었다. 무라카미 센쇼의 불교학은 전통불교의 근대적 재편으로 평가되는데 그의 서구 수용에 영향을 미친 것은 이노우에 엔뇨와 난죠분유였다. 그런데 그의 서구 수용은 항상 제한적이었는데, 인간이상의 붓다와 개발적 불교로서의 대승신앙 등이 그것이었다. 그의 『불교통일론』(1901)에서의 대승 비불설은 근대역사주의의 우위에서 전통신앙 영역을 포섭하는 것이었는데, 이후 『대승불설론 비판』(1903)에서는 역사를 신앙의 대칭축으로 배치하는 변화를 보인다. 이러한 변화는 그가 서구 과학주의 눈이 현실불교를 폄하하는 데에 대한 저항이었다. 따라서 그의 ‘불완전한’ 불교학은 근대불교학의 태생적 한계라고 할 수 있는 불교의 타자화문제에 의구심을 던진 것으로 재평가될 필요가 있다. 아네자키와 무라카미의 불교학은 메이지시대를 반영하면서 동시에 현대불교학에 그 영향을 남기고 있는데, 즉, 이들은 각각 불교를 순수와 타락으로 보는 관점과 발전과 일관으로 읽는 관점을 제안했는데 이러한 이질적인 시선의 공존과 함께 신앙과 역사의 문제, 서구불교학의 타자화 문제 등은 현대불교학의 과제로 남겨졌다. The concepts of Mahayana considered heterodoxy was important issue of Japanese buddhist study in Meiji Period. The representative advocate of this theory were Anejaki Masaharu(姉崎正治, 1873~1949) and Murakami Sensho(村上專精, 1851~1929) who were scholars of Tokyo Imperial University. But, they had different viewpoint respectively. Anejaki Masaharu has criticized orthodoxy of Mahayana buddhism from a view of biblical criticism and historic science that was the principal methodo- logy of western buddhist study. He could be said to be a perfect type of modernist. The other side, Murakami Sensho threw doubt on western style buddhist methodology, because it show contempt to Japanese buddhist thoughts and culture based on Mahayana buddhism. So, he approved the concept of Mahayana considered heterodoxy only in the field of history, disapproved it in the province of religious belief. He accepted, so to speak limitedly the modernity of buddhist study. The divergence of opinion like this reflects the characteristic of Japanese buddhist study, that is the coexistence of conflicting viewpoints. Anejaki’s buddhism was western-oriented, so aimed at the ‘Fundamental Buddhism’ that has searched for the original buddhist sermon. Consequently the Mahayana buddhist traditions has been regarded as degraded ones. But, Murakami’s interpretation was a contrast to Anejaki’s. He proposed Mahayana buddhism as developed thought, and intended to preserve the traditional world and the worth of religious experience. So, his buddhism has been criticized as incompletely modernized, but it is also needed to reevaluate for resistance against western moder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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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구 문헌학적 연구방법론의 수용과 인도 불교학의 성립

        배상환 한국선학회 2009 한국선학 Vol.24 No.-

        본 논문은 언어학과 해석학을 통하여 형성된 서구 불교문헌학의 연구 방법론과 이를 통하여 형성되고 발전한 인도불교학의 성립을 살펴보았다. 서구 불교문헌학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는데, 하나는 필사본 연구와 번역이며 다른 것은 필사본 연구를 통하여 형성된 철학사적 연구이다. 서구에서 필사본 연구와 번역은 19세기에 접어들어서야 가능해 졌고, 그 중심에는 뷔르누프가 있다. 그는 당시 생소한 산스크리트 사본과 팔리어 사본을 문헌학적 연구 방법론을 통하여 비교함으로서 실질적인 서구 불교학의 창안을 이루어 냈다. 뷔르누프 이후 수많은 서구 불교학자들이 출현하게 되는데, 그 중에는 서구 유럽을 대표하는 리즈 데이비드, 레비, 뿌생, 프르찔루스키 등이 주목된다. 문헌학적 연구와 비교하여 철학사적 연구 방법론을 주도한 학자는 세나르와 올덴베르그가 있다. 세나르의 연구방법은 불교의 중심 주제들을 신화적인 관점에서 해석하고자 하였고, 반면 올덴베르그 철저하게 역사적, 사실적 관점에서 불교를 해석하고자 하였다. 이 두 학자의 연구방법론을 통하여 서구의 근대불교학에서 많은 철학사적 연구가 진행되었는데 막스 뮐러, 로젠베르그, 체르바츠키 등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음을 살펴보았다. 다음으로 서구문헌학의 연구 성과를 기반으로 하여 인도 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를 살펴보았다. 서구불교학의 근간이 산스크리트와 팔리어 필사본을 채집하고 편집하는 문헌학적 연구에 국한되었다면, 인도 근대불교학은 제역대조 교정본에 근거하여 텍스트의 교정연구에 보다 비중이 주어졌다는 것을 검토하였다. 또한 인도 근대불교학이 지역적인 특색을 가지고 서구불교학을 수용하였다는 것을 동인도, 서인도, 북인도, 남인도로 구분하여 각 지역의 불교학 연구 성과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마지막으로 서구 불교문헌학에 토대를 둔 인도 근대불교학은 다양한 연구 방법론을 채택하여 서구 불교학이 이룩한 성과보다 교리적, 지역적, 철학적, 예술적 범주로 확대되었음을 고찰하였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research the figure of modern Buddhist study focusing on the western scholars, who have left representative study results in the field of Buddhist philology. In addition, it’s another purpose was to research the trend and category of India's modern Buddhist study, which was created through the effect of western Buddhist study. Western Buddhist study was the result of reflecting Buddhist study to philological and linguistic study, which was shown in the view of Orientalism. From another viewpoint, western Buddhist study was created by many dedicated works such as edition and translation of Buddhist text, publication of grammar book, writing of dictionary, reorganization of forgotten past age and creation of knowledge based on experimental verification for several centuries. Western Buddhist study can be explained by two viewpoints. One is philological study and another is philosophical study. For philological study, its decisive motive was prepared through the achievement of Burnouf in 1877. Through his achievement, critical view and comparison between Pali and Sanskrit literature were available in the study of western Buddhist philology. As kinds and volumes of Pali and Sanskrit literatures were enlarged, his successor had no choice but to major only one field or one language from the viewpoint of original text's criticism and interpretation. Therefore, except several extraordinary scholars, who read Sanskrit, Pali, Chinese and Tibetan sutras extensively, such as Levi, Poussin and Przyluski, the Buddhist scholars of the 19th century should devote themselves to Pali and Sanskrit philology. As a result, western Buddhist study was led to the study on grammar, vocabulary and philosophy naturally through philological methodology and philosophical discussions such as nirvana and rebirth as well as the concept of Buddha were heterogeneously reflected to the western society. India's modern Buddhist study showed more matured figure through the philological study achieved by western Buddhist study. From the aspect of study methodology, however, it is hard to deny that India's modern Buddhist study has followed the achievement, which was produced by western Buddhist study for few centuries, as it was. In the other aspect India's modern Buddhist study, which had the local characteristic, experienced the historical process that it was developed from East and West India and then it was enlarged into North and South India. India's modern Buddhist study, which was originated from East India, has the meaning that it escaped from the step to adopt philological methodology of western Buddhist study and made Buddhist study as an independent study system. India's modern Buddhist study deducted study achievement by focusing on interpretational study and introduction of Pali and Sanskrit literature, but it has made various efforts to restore original form of Sanskrit from Chinese or Tibetan sutra. And moreover India's modern Buddhist study archived collect & translates Tibetan literature, establish the relation between Indian philosophy and Buddhism and display philosophy of Mahayana Buddhism by enlarging its denotation. In other words, it produced many achievements by enlarging the achievement of western Buddhist philology into doctrinal, regional, philosophical and artistic categories.

      • 근대 일본불교에 대한 연구 동향과 과제

        원영상 한국일본불교문화학회 2015 일본불교문화연구 Vol.- No.12

        본 연구는 근대 일본불교에 대한 연구 동향을 살펴보고, 이를 기반으로 그 과제를 제시한 것이다. 먼저 근대 일본불교의 역사적 지형으로는 세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폐불훼석에 대한 근대 불교계의 대응양상, 근대문명에 대한 불교계의 대응 양태, 그리고 일본의 근대역사가 지속적인 대외전쟁과 영토 확장을 향해 진행되고 있으며, 일본불교 또한 이에 적극적으로 동조해갔다는 점이다. 이러한 역사적 관점 위에서 근대기 일본불교계의 학술연구 및 출판 동향을 고찰했다. 특히 관서의 종학과 관동의 관학이 나타난 것과, 서양학문의 영향을 받은 불교학의 방법론의 발달, 문헌학의 성립, 국체론적 불교학의 등장 등을 그 특징으로 보았다. 이를 이어 근대 일본불교에 대한 분야별 연구 동향을 세부적으로 살펴 보았다. 역사적 연구, 문화적 연구, 사상적 연구, 그리고 학제 간 연구 및 자료집성에 대해 근대불교연구의 전체적 동향을 제시했다. 근대 일본불교 의 연구 성과를 총괄하는 것은 물론, 보편적인 연구방법의 범주에 입각한 것이다. 역사적 연구에 있어서는 폐불훼석(廢佛毁釋) 이후 근대 일본불교 계가 새로운 국가체제에 대응해 가는 양상을 필두로 전통불교가 근대사 회를 배경으로 어떻게 변모해 갔는가 하는 불교근대화에 대한 연구가 이 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화적 연구에서는 앞의 역사적 연구와 연동하여 개혁과 결사, 해외포교 등에 대한 연구, 식민지와의 관계 등에 대한 연구가 주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상적 연구는 근대불교학의 수립과 전개, 특히 불교철학과 전통불교학과의 관계, 불교사상의 근대적 모색 등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학제 간 연구 및 자료집성에서는 근대사회문제에 직면한 불교계의 대응에 대한 연구, 근대불교계의 동향과 관련된 자료의 집성 등이 이루어지고 있음 을 살펴보았다. 근대 일본불교 연구의 과제로써는, 사회적 변화에 대한 대응 연구, 동아시아 불교권과의 관계 연구, 일본불교학에 대한 비판적 연구를 제시했다. 앞의 두 과제는 이전의 연구 위에 외연의 확장을 주장한 것이다. 세 번째에서는 불교의 철학화와 논리실증주의적 불교학의 문제, 국가주의 교학의 문제, 폐쇄적인 종학 문제에 대한 연구와 그 해결방안을 찾을 것을 주장한 것이다. 일본 근대불교연구는 한국과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불 교연구와도 밀접한 관련을 가진 연구 영역임과 동시에 현대의 불교연구 에도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본다.

      • KCI등재

        동아시아 근대불교의 지향과 굴절

        조명제 ( Cho Myung-je )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 2016 동아시아불교문화 Vol.0 No.27

        근대불교는 서구 근대에 대응하는 전통의 축이며, 단순히 전통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근대에 새롭게 재구축된 종교, 사상이었다. 또한 동아시아에서 근대불교는 각국의 상황에 따라 형성되고 전개되었지만 공통적인 양상도 존재하였다. 이 글에서는 동아시아 불교계에서 근대불교학의 수용과 재가주의 불교의 전개를 통해 불교의 근대화가 어떻게 모색되었으며, 그 한계가 무엇인가를 검토하였다. 일본불교는 유학생을 통해 19세기 유럽에서 형성된 문헌학적 근대불교학을 수용하였으며, 제국대학과 불교계 사립대학을 통해 근대불교학의 제도적 기반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일본불교는 불교학계가 현실에 무관심하거나 불교계가 자신만의 영역을 고수함으로써 불교학과 불교계가 분리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문헌학적 불교학의 성격과 관련되지만 근본적으로 일본불교계가 근대불교의 방향과 관련된 문제의식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하였던 한계, 나아가 국가권력과 유착하여 내셔널리즘에 경도되었던 사회인식의 한계와 관련된다. 중국의 지식인들은 서양사상을 이해하고 그것에 대항하는 기초로서 불교에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유식학을 높게 평가하면서 참된 불교로 돌아가자는 사상운동을 전개하였다. 불교는 내셔널리즘과 연계하여 중국의 국민국가 형성을 위한 이데올로기로 활용되었다. 식민지조선에서는 일본 유학을 통해 근대불교학을 수용하였고, 지식인 승려들이 불교 근대화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한국불교는 식민지라는 현실, 제도적 기반의 한계 등으로 인해 근대화의 추진이 굴절되었다. 한편, 재가주의 불교는 기성 교단의 틀에 구애되지 않고, 적극적인 사회 참여를 모색하였다. 재가주의 불교의 대두는 동아시아에서 공통적인 현상이지만 일본불교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일본의 재가불교는 청년 지식인층이 주도하고 다양한 결사운동과 잡지 발행을 통해 전개되었으며, 신불교운동은 그 대표적인 흐름이다. 또한, 재가불교는 니치렌계 불교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며, 특히 다나카 치가쿠의 국주회를 중심으로 한 니치렌주의 운동으로 대표된다. 치가쿠의 니치렌주의 운동은 민중적, 종교적 내셔널리즘이면서 국가신도에서 보편적 성격이 결여된 한계를 보완하는 성격을 갖고 있다. Modern Buddhism is an axis of the tradition in response to modern West, and not just a succession of tradition but a religion and philosophy newly reconstructed in the modern age. Although modern Buddhism in East Asia was formed and developed in a variety of forms according to the situations of different countries in the region, there are some common aspects. This paper examines how modernization of Buddhism was pursued through modern Buddhist studies and secularist Buddhism, which characterized modern Buddhism in East Asia, and what its limitations are. Through students who went over to Europe for study, Buddhism in Japan embraced modern Buddhist studies centered on philological aspects which developed in the nineteenth-century Europe. It continued to build the institutional foundation of modern Buddhist studies via Imperial University and private colleges of Buddhism. Due to the separation of Buddhist studies and Buddhist faith, however, Japanese Buddhism showed limitations that Buddhist studies ignored the social reality or those who practiced Buddhism confined themselves to their own known territory. This may be related to the nature of Buddhist studies focusing on philological approach, but ultimately it pertains to the limitations that Buddhist scholars had no well-informed perception of the direction of modern Buddhism. Japanese Buddhism also readily compromised with the state power to be exploited as a national ideology. The intellectuals of China took interest in Buddhism as a basis to understand and stand against Western thoughts. While esteeming Yogacara Thought, they spread ideological movements arguing for return to authentic Buddhism. Linked to nationalism, Buddhism was mobilized as an ideology for the formation of the nation state of China. Korea under the colonial rule of Japan accepted modern Buddhist studies by the hands of those who went over to Japan for study, and the intellectual monks who mostly studied in Japan sought modernization of Buddhism. However, due to the reality of colonial rule as well as insufficient institutional foundation, Buddhism in Joseon showed clear limitations in its pursuit of modernization. Meanwhile, secularist Buddhism, which is a common feature of modern Buddhism, did not sick to the frame set by conventional Buddhism and groped for active social participation. Although secularist Buddhism is a phenomenon commonly observed throughout the East Asian region, it is particularly prominent in Japanese Buddhism. Secularist Buddhism in Japan was led by young intellectuals and expanded its area through diverse movements and organizations as well as publication of magazines. The Movement of New Buddhism is typical of such efforts. On the other hand, secularist Buddhism is particularly manifest in the Buddhist denominations of the Nichiren school, represented by Kokutyukai(國柱會) led by Danaka Chigaku. Buddhist movement of the Nichiren school was popularist and religious nationalism, yet at the same time it was a complement to the limitations of national Shinto which lacked universality.

      • KCI등재

        (연구논문) 허영호의 전쟁 협력의 담록과 근대불교

        조명제 부산광역시 시사편찬위원회 2011 항도부산 Vol.27 No.-

        허영호는 부산 동래 출신의 사회운동가, 불교학자로서 활동한 인물이다. 그의 생에는 식민지와 분단이 고착화되는 시기를 거쳤던 만큼 시대적 질곡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그는 20대 청년기에 지역의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동래 지역에서 범어사가 주도한 3.1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렀으며, 이후 동래 지역의 사회운동에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동래청년연맹과 신간회 동래지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한편, 그는 1926년에 독자적으로 문예지인 『평범』을 창간하여 발행인 및 편집인으로 활동하였다. 그가 잡지를 간행한 것은 1920년대에 사회 담론을 주도한 매체로 잡지가 유행하였고, 당시 사회, 문화운동의 흐름에서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그가 동래 지역에서 실천적인 사회운동과 함께 개인적으로 전국 판매를 지향한 대중 잡지를 간행한것은 그러한 점에서 의의가 적지 않다. 하지만 허영호 자신의 1인 잡지라는 성격과 제한된 독자층, 그리고 출발부터 드러난 재정난 등이 겹쳐 잡지는 3호로 종간되었다. 이와 같이 잡지 간행이 실패하고, 지역 사회운동이 약화되는 등 사회 실천의 길이 한계를 맞으면서 그는 1929년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도쿄의 다이쇼 대학 불교학과를 졸업하였다. 그는 유학중에 만당 동경지부에 참여하였고, 귀국 후에는 범어사 출신 승려들과 함께 불교계의 근대화 문제에 앞장섰다. 이후 그는 1933년에 교무원의 주도권 문제로 인해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동래로 돌아와 몇 년간은 인자중하였다. 그러다가 1937년에 『불교』지가 속간되면서 그는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활약하면서 1945년까지 중앙 불교계의 주요 인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그는 일본의 전쟁에 협력하는 담론을 제시하면서 다양한 "친일" 행적을 남겼다. 해방 이후에 그는 동국대학장으로 선임되었고, 불교계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다양한 사회 단체에 참가하였고, 제헌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다음 선거에서 낙선하고 1952년에 북한에서 파라만장한 생을 마감하였다. 허영호가 제시한 전쟁 협력의 담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내선일체론에 입각하여 일본의 동화정책에 추종하는 논리이고, 또 하나는 일본의 전쟁이 확대되면서 식민지 조선인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충동원 담론이다. 전자는 그가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한 국체론을 수용하였으며, 특히 진호국가, 왕버불법론에 입각한 황도불교론을 기본으로 제시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 후자는 전쟁을 후방에서 지원하는 총후보국론과 지원병 등의 형태로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축구하는 논리로서, 일본의 총력전 수행을 대변한 것이었다. 그런데 허영호의 전쟁 협력 담론은 그 자신이 새롭게 개발한 논리가 아니라 당시 일본의 사상계에서 제시된 담론을 그대로 수용한것이었다. 대표적인 담론이 동아신질서와 동아협동체론이었고, 그것은 태평양전쟁으로 확전되면서 대동아신질서의 주창과 대동아공영권으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담론은 일본 불교계에도 그대로 수용되었고, 나아가 낡은 근대적 질서를 해체하고 새로운 세계사적 원리를 지도하는 일본정신의 하나로서 불교를 거론하는 방향으로까지 나아갔던 것이다. 다음으로 허영호의 현실인식이 갖는 문제는 결국 그가 일본 유학을 통해 수용한 근대불교학과 깊이 관련된다. 일본의 근대 불교학은 19세기 유럽에서 언어학, 문헌학적 지식을 토대로 형성된 것이었다. 아카데미즘 불교학은 연구대상을 텍스트에만 두고, 역사적 현실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으므로 자연히 현실적으로 무력한 존재로 전락하였다. 반면, 현실의 불교계는 종파와 개조와 전통적 교의에만 관심을 갖게 되어, 양자는 서로에 대해 무관심하고 자신만의 영역을 지키게 되었다. 곧 일본 불교는 불교학과 불교계의 분리라고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결국 근대 이후 일본의 불교계가 국가와 타협하고 권력과 결탁하면서 식민지 지배를 지원하는 방향이나 전쟁에 찬성하는 등 국가불교로의 길로 나아갔던 흐름과 관련된다. 따라서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 유학을 통하여 근대 불교학을 수용한 이들이 일본불교의 한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허영호의 경우, 그러한 사례를 단적으로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특히 그가 제시한 전쟁 협력의 담론은 근대 일본의 사상계에서 제시된 담론을 토대로 한 것이며, 특히 일본의 근대 불교학이 걸어갔던 경향과 한계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이러한 한계는 일본의 불교계보다 봉건적인 유산이 강하고, 식민지라는 현실까지 겹치면서 불교의 근대화 노력이 결코 쉽지 않았던 상황과 관련된다고 하겠다. 許永鏑は釜山の東萊出身の社曾運動家であり、佛敎學者として活動した人物である。彼の生涯は、植民地と分斷が固着される時期を經て時代的な桎梏がそのまま投影されている。彼は20代の靑年期に地域の社曾運動に積極的に參加し樣□な活動をしていたが、東萊地域において梵魚寺主導の3·1運動に參加して監獄される。以後、彼は東萊地域の東萊靑年連盟と新幹曾の東萊支會などに主導的に參加するようになった。反面、彼は1926年に濁自的に文芸誌である『平凡』を創刊し、發行人でありながら編集人としても活動していた。彼が雜誌を刊行したのは1920年代において社曾の談論を主導したメディア雜誌が流行しており、また當時前社會、文化運動の流れの影響を大きく受けたのである。 彼が東萊地域において社會運動であるとともに個人的に全國を對象として販買された大衆雜誌、を刊行したことは意義が少なくない。しかし、許永鎬本人の一人雜誌、という性格とともに制限された讀者層、また出發顯から顯れた財政難などによって雜讀誌は3號で終刊されてしまった。 彼は、雜誌の失敗、地域社曾運動の弱體化などによって社曾的な實踐が出來なくなり、1929年に日本へ留學。東京の大正大學の佛敎學科を卒業した。留學時節に彼は万黨の東京支部に參加し、歸國した後に梵魚寺出身の쾌侶達とともに佛敎界の近代化問題に努力した。その後1933年に敎務院の主導權の問題のせいでソウルから東萊に태ることになり、敷年聞は隱忍自重していた。 ところで、1937年に『佛敎』 誌、が績刊され、彼は發行人及ぴ編集人として活躍し1945年まで中央佛 敎界の主な人物として活動した。そしてかかる時期において彼は日本の 戰爭に協力する談論を提示しながらも樣□な``親日``行績を殘した。解放以後、彼は東國大學の學長に就任、佛敎界を代表する人物として樣□な社曾團體にて參加し、制憲國曾議員として活動した。しかし、彼は次の選擧に落選、1952年に北韓にて波亂万丈な人生が終わるのである。 許永鏑の提示した戰爭に協力する談論は、主に二つである。一つは內鮮一體論によって日本の同化政策に追從する論理であり、もう一つは日本の戰爭が擴大され、植民地朝鮮人を戰爭に動員するための總動員談論である。前者は彼が天皇制イデオロギ一の基礎になる國體論を受け入れており、特に鎭護國家佛敎, 王法佛法論に立つ皇道佛敎論を基本として提示したことからよく現われる。後者は戰爭を後方から支援する銃後報國論と支援兵など 戰爭に積極的に參如することを促がす論理として日本の縮力戰を代弁したのである。 ところで、許永鎬の戰爭に協力する談論は彼が新しく開發した論理ではなく、當時日本の思想界から提示された談論をそのまま受け入れたことであった。その代表的な談論は東亞新秩序と東亞協同體論であって、それは太平洋戰爭へ擴戰されてから大東亞新秩序の主唱と大東亞共榮圈へ擴大された。かかる談論は日本の佛敎界にもそのまま受け入れられており、なお古い近代的秩序を解體して新しい世界史的原理を指導する日本精神の一っとして佛敎を擧論する方向へ進んでいっ たのである。 そしてかかる許永鎬の現實認識がもっ問題点は、結局彼が日本留學を通じて受け入れた近代佛敎學と深く鬪わる。日本の近代佛敎學は19世紀ヨ一ロッパにおいて言語學、文獻學的知識を基盤として形成されたことである。アカデミズン佛敎學は、硏究封象をテキストだけに限定され、歷史的現實に對しては興味を持たかったので現實的に無力な存在になった。これに反して現實の佛敎界は宗派の開祖と傳統的な敎義にだけ興味をもったため、兩者は相對して無關心で、あり、自分の領域だけを護ることになった。卽ち、日本の佛敎は佛敎學と佛敎界の分離という結果になったのである。このような傾向は近代以後日本の佛敎界が國家と妥協し、權力と結託しながら植民地支配を支援する方向へ行っており、戰爭に贊成するなど國家佛敎の道へ進んで、いった流れと鬪わっていく。 從って、植民地朝鮮から日本留學を通じて近代佛敎學を受け入れた僧侶達がかかる日本佛敎の限界から自由になることは難しかったと思われる。許永鎬はそのような事例の代表的な人物であるといえる。彼が提示した戰爭に協力する談論は近代日本の思想界から提示された談論を基盤としたことであり、特に日本の近代佛敎が進んでいった傾向と限界がそのまま反映されている。このような限界は日本の佛敎界より封建的な遺産が强く、植民地という現實にある朝鮮佛敎の近代化の努力が易しくない狀況と鬪わると思われ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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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30년대 허영호의 현실인식과 근대불교학

        조명제 대각사상연구원 2010 大覺思想 Vol.14 No.-

        허영호는 부산 동래에서 태어나 동래 동명학교 고등과와 범어사 지방 학림을 졸업하였다. 그는 10대 시절에 이러한 근대 교육을 경험하면서 식민지 지배라는 민족의 현실에 눈을 뜨게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후 그는 20대 청년시절을 지역의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다양 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먼저 그는 동래 지역에서 일어난 3·1 운동에 다 른 범어사 승려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1년형의 옥고를 치르고 나온 후에 다양한 근대적인 이념이 수용 되고 식민지 조선사회의 격동적인 변화가 모색되던 20대 전반을 보내면 서 내면의 고민과 갈등을 겪으며 몇 년간 사회 활동에서 한 발 물러서 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20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동래 지역의 사회운 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동래청년연맹, 신간회 동래지회 등을 설립하고 집행부의 주요 간부로 활동하였다. 한편, 그는 1926년에 문예잡지『평범』을 창간하여 발행인 겸 편집인으 로서 대중용 잡지 간행에 의욕을 가지기도 하였다. 『평범』은 일반 민중 을 대상으로 한 문예 글이 가장 많이 실렸던 만큼 일반 민중을 주된 독 자층으로 겨냥한 잡지였다. 허영호가 동래지역에서 잡지 간행을 시도하 였던 것은 지역의 사회운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물론 그의 잡지 창 간은 1920년대에 잡지가 시대 담론을 주도하였고, 다양한 잡지가 창간되 고 유행하였던 시대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다만, 제한된 독자층, 광고와 판매의 한계 등으로 인한 재정난으로 잡지 경영은 3호로 마감되었다. 더 욱이 허영호 1인 잡지라는 성격은 그 자신이 근대적인 사상과 문화 흐 름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당시의 잡지 문화를 따라가 거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만한 역량을 갖추지 못하였던 한계를 애초 부터 가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잡지 간행의 실패라는 경험과 동래 지역의 사회운동이 침체되면서 허 영호는 지역 사회운동을 접고 1929년에 일본 다이쇼 대학 불교학과로 유학을 떠나 근대불교학의 수용과 불교 근대화의 길로 나아갔다. 그는 일본 유학을 통해 산스크리트어, 빠알리어 등을 배워 인도 불전을 해독 할 수 있는 언어학적, 문헌학적 지식에 대한 갈증을 해결하였다. 이후 그가 근대불교학의 성과로 제시한 것은 거의 대부분 반야부 경전을 비롯한 인도 불교의 원전과 한역 대승경전에 대한 번역 작업이었다. 그의 번역은 이전에 단순히 어학적인 전환 수준에 그친 번역이 아니라 근대 불교학의 성과를 반영한 것이고 근대불교의 대중화 차원에서 의의가 있 다고 하겠다. 또한 그는 불교의 근대화를 위해 중앙 불교계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 였으며, 근대불교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불 교 근대화를 위한 노력은 교단 내외의 상황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 가 놓여 있었고, 1937년 이후 일제에 협력하는 방향으로 전환하면서 보 수적, 퇴행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와 같이 그의 불교 근대화의 길이 결 국 굴절된 모습을 보였던 것은 그가 추구한 근대불교학이 가진 한계와 관련된다. Heo, Yeong-Ho was a Buddhist scholar from Dongrae, Busan and dedicated his life to leading social movements and modernizing Buddhism. When he was in the 20s, he actively participated in the social movements in Dongrae area. He participated in the 3․1 Movement and was confined in prison for a year. Later, he established Dongrae Youth Federation and Singanhoe Dongrae Office to act as one of the major leaders. In the mean time, he founded 『Pyeongbeom』, a literary magazine, in 1926 to publish this public magazine as a publisher and editor. He did this because in the 1920s magazines led the social discourse and various magazines were published and popular across Korea. However, he was only able to publish three issues due to financial issues. The underlying reasons were limited reader group and advertising opportunities. This failure was also because he did not have the capacity to lead the local culture as he did not have profound insights in modern ideologies and cultural trends. As his magazine failed and social movements in Dongrae entered stagnant stage, Heo went to Japan in 1929 to study Buddhism at Daisho University. While studying in Japan, he learned the Sanskrit language and the Pali language to quench his thirst for linguistic and literary knowledge to interpret Buddhist scriptures written in Indian. Later, he contributed to Modern Buddhism mostly by translating Banyabu Scriptures, the original text of Indian Buddhism, and Mahayana Sutras into Korean. Also, he promoted various activities in the Central Buddhist Sector to modernize Buddhism and suggested directions for the development of Buddhism. However, his efforts were essentially interrupted by social circumstances surrounding the Buddhist Sector, and he turned to cooperating with Japan in 1937. His cooperation with Japan was related to Japan‘s coercive deployment in war and cooperation with its imperial rule over Joseon, of cour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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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金法麟과 한국 근대불교

        김상현 한국불교학회 2009 韓國佛敎學 Vol.53 No.-

        Beomsan Kim Beop-rin (梵山 金法麟 1899~1964) was an intellectual who studied in France, independence activist, and leader of Korean Buddhist society at the time of his country’s restoration of independence. He also served as the president of Dongguk University and the Minister of Culture and Education. He is regarded as one of the most important person in Korean modern Buddhism. Thus this study aims to elucidate his place and role in the history of modern Korean Buddhism by analyzing his approach to modernized Buddhist studies and his idea of popular Buddhism. He pointed out that the modernization of Buddhist studies was an important and urgent task. “With a new approach and a new standpoint, we should improve Buddhist studies to keep pace with current thoughts and new thoughts of people.” said Kim Beoprin, stressing the need of a new approach to Buddhist studies. The new Buddhist study he asserted was focused on original Buddhist scripts. This is distinct from the traditional Buddhist studies which were focused on Chinese translated Buddhist scripts. His understandings on the science of bibliography was pioneering at the time. He once opened classes of history and Buddhism in Dasolsa Temple, Haeinsa Temple, and Beomeosa Temple to enhance nationalism. Especially the school in Dasolsa Temple was distinct from the existing pre- modern schools at the time. It was established on the purpose of cultivating men of ability by teaching general knowledges which Buddhists can apply in their real life. In July 1963, he assumed the presidency of the Dongguk University and tried to enhance Buddhist studies. He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Buddhist education. But, unfortunately, he passed away before he accomplished his goals. He led Korean Buddhist society as the president of Buddhist Association right after Korea regained independence. At the time, the Buddhist society was divided into groups; Kim Beoprin’s group and reformist Buddhist groups. His group aimed to enhance popular Buddhism for the general public while the other groups tried to establish a Buddhist sect which is constituted only with a Buddhist monk, not anyone else. Even though he experienced modernized Buddhist studies and presented new approach to the studies, he couldn’t get successful results from his own study. His trial of new Buddhist education in 1930s couldn’t last for a long time, and his idea of popular Buddhism was totally excluded from Buddhist society after 1950s. Regardless of his failure, his approach to modernized Buddhist studies and his idea of popular Buddhism can be evaluated as a pioneering one. 한국 근대불교를 논의하려 할 때 梵山 金法麟(1899~1964)은 그 대상에서 빼기 어려운 인물이다. 그는 프랑스에 유학을 다녀온 지식인이면서 독립운동가였고, 해방 직후의 불교교단을 선두에서 견인했을 뿐만 아니라, 문교부장관 및 동국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던 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김법린이 제창했던 근대불교학의 연구방법과 그가 구상했던 근대적인 대중불교 등을 검토함으로써 한국 근대불교사에서의 그의 위치와 성격을 규명하고자 했다. 그는 불교학의 현대화 문제는 중대하고 긴급한 것임을 지적하면서, “새 입장, 새 방법으로서 시대의 새 정신과 대중의 새 의식에 적응하고 이해되도록 교학을 새롭게 천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하면서 불교학 연구 방법의 개선을 주장했다. 그가 강조한 신불교학은 漢譯 중심의 전통 불교학에서 탈피한 원전연구가 그 중심인데, 그의 문헌학적 연구방법론에 대한 이해는 당시로서는 선구적인 것이었다. 김법린은 多率寺, 海印寺, 梵魚寺 등의 講院에서 불교와 역사 등을 강의하며 독립의식을 고취시키기도 했다. 특히 ‘현대 불교도에게 필요한 일반 학술에 관한 지식 기능을 교수하여 실제생활에 적절한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설립했던 다솔사강원은 전통강원과는 다른 근대적 강원이었다. 불교교육사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그는 1963년 7월 동국대학교 총장에 취임하여 학문 제일주의를 표방하며 노력하다가 1년도 못되어 순직함으로써 꿈을 접었다. 해방 직후 불교교단은 김법린을 중심으로 한교단 측과 불교혁신단체들과는 서로 입장을 달리했는데, 교단 측은 대승불교의 건설을, 혁신단체는 비구승단의 건설을 지향하고 있었다. 해방공간에서 김법린 등이 건설하고자 했던 대승불교는 구체적으로는 대중불교였다. 서구의 근대불교학을 직접 접하고 문헌학적 연구방법론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김법린, 그러나 그 자신은 학문적 성과를 내지 못했다. 1930년대 전반 김법린이 시도했던 새로운 강원교육도 지속되지 못했고, 해방공간 그가 건설하고자 했던 대중불교도 1950년대 이후의 불교계에서는 철저히 배제되었다. 그러나 성공과 실패의 문제를 떠나 그가 제시했던 근대불교학 연구방법과 그가 건설하고자 했던 대중불교는 선구적인 것이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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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타니 료타이와 후카우라 세분의 학문과 방법

        정유식 한국불교학회 2016 韓國佛敎學 Vol.78 No.-

        Japan began its modernization in the Meiji(明治) period in the late 19th century. At that time, the Japanese Buddhist community sent student monks to Europe where they studied modernized European Buddhism and brought it back to Japan. Hatani Rōtai(羽溪了諦) and Hukaura Seibun(深 浦正文) studied this modernized European Buddhism at the end of the Meiji era or in the early Taishō(大正) era, taking them away from traditional Buddhist research. They devoted themselves to their research. They recognized the importance of linguistics, bibliography, and history, which were necessary for such study, and they had the ability to apply them. They also thought that knowledge of archeology, philosophy, literature, and art were necessary for the study of Buddhism. They also suggested that the world of Buddhist thought needed to be explained and presented integrated and balanced results of their research, which included everything from bibliography to art. However, as monks of the Jōdoshinshū School(淨土眞宗), they did not consider Buddhism only a subject to be researched. For example, in the debate over whether Mahayana concepts were heterodoxy or orthodoxy, Hukaura perceived Buddhism from within, not without.(I’m not sure what this implies.) He insisted that Mahayana Buddhism was not pure Buddhist doctrine in the historical sense, but more of a dogma. 19세기 말, 메이지 유신을 통해 일본은 근대화를 시작했고, 이 시기에 불교계에서는 난죠 분유 등, 해외 유학승들을 서구로 파견했다. 유학승들은 본래목적대로 서구 근대 불교학을 습득하여 일본에 유입하는 데 성공했다. 그 20 년쯤 후에 해당하는 세대가 본 논문에서 다룬 하타니 료타이(羽溪了諦)와 후카우라 세분(深浦正文)이다. 이 두 학자는 메이지(明治) 시대 말기 혹은 다이쇼(大正) 시대 초기에 이미 서구 근대 불교학을 학습했고 전통적인 불교 연구법에서 벗어났다. 하타니와 후카우라는 근대 불교학 연구법에 매우 충실했다. 서구 근대 불교학의 기본 도구인 언어학, 문헌학, 역사학의 필요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으며 운용할 능력도 구비하고 있었다.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고고학, 철학, 문학, 예술에까지 관심의 폭을 넓혀 나갔다. 자칫 세분화된 영역에 함몰될 수있는 불교 연구의 위험성을 자각하고 있었기에, 통섭적인 불교의 사상체계를천명하라고 제안하거나, 문헌과 예술을 아우르는 균형 잡힌 연구를 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토진종의 승려였던 후카우라에게 불교는, 언제까지나 他者이자연구 대상일 수만은 없었다. 예를 들면, 그는 대승불설비불설 문제에 관한 논의 속에서, 대승 불교를 단순한 학문의 대상이 아닌 신앙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입장을 잘 보여준다. 그는 대승이, 역사적인 측면에서는 佛說일 수 없다고인정하지만 교리적인 측면에서는 여전히 불설이라고 주장한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하타니와 후카우라의 방법론은 현대 불교학의방법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제한적이긴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통해, 현대 불교학의 방법론 속에 근대 불교학의 방법론이 계승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대승불설비불설 논의에 나타난 후카우라의 견해는, 불교가 단순히 학문의 대상이 아니었던 대승불교도들의 현실적인 고민을 이해하려는 현대 학자들에게 하나의 단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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