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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한 말 전통적 동문 의식의 변화

        김영환(Kim, Yeong-Hwan)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4 한국민족문화 Vol.50 No.-

        ‘동문’은 본디 차이나의 한자 글자꼴을 표준화하는 작업을 가리켰다. 본디 뜻은 거의 잊혀진 채 차이나와 같은 글자를 써야 한다거나, 중화 사상의 상징으로서 오랑캐가 중화를 모방하는 것을 뜻하거나 동아시아 국제질서에서는 차이나 중심의 천하 체제 등 넓어진 뜻으로 쓰였다. 조선이 훌륭한 글자를 만들고도 500년 동안 제대로 쓰지 않은 것은 차이나와 다른 문자를 쓰는 것은 동문에 어긋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런 동문 의식은 1876년 이후에도 외교 분야에서는 거의 그대로 남아 있었다. 고종 때의 과거제 폐지와 국문 조칙으로 이미 동문의 질서에 균열이 가고 있었다. 동문 의식이 『독립신문』과 같은 근대 매체에서 전면적으로 부정되었다. 근대적 교육 제도에서도 부분적으로는 국문 쓰기의 전통이 뿌리내렸다. 그러나 그 뒤로 동문 의식은 일본 중심의 개념으로 변화를 겪었다. 한자어를 한자로 적는다는 점에서 같기 때문에 동아시아 세 나라의 공통성을 동문으로 일컫게 되었다. 이는 새로운 뜻의 출현이었다. ‘동문’이란 틀은 그대로 두고 내용은 일본 중심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렇게 보면 이 개념은 아직도 일부에서 말하는 한자 문화권이란 개념과 그 내용이 그다지 다름이 없어 보인다. 근대 이후 동문은 동아, 동종이라는 지역성과 인종주의가 동문과 결합하여 함께 나타났는데 차차 동문이라는 관념적 공통성은 동아, 동종이라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공통성에 자리를 내주고 뒤쪽으로 물러나게 된다. 또 한자 문화권 개념과 일치하여 동문은 이제는 거의 잊혀진 개념이 되었다. ‘동문’의 다양한 뜻은 하나의 개념이라기보다는 차이나 중심과 일본 중심의 두 다른 개념으로 다루는 것이 더 적절하다. 그렇지만 이 개념이 다양한 뜻을 가짐에도 차이나 또는 일본 중심의 제국주의적 질서를 정당화하는 중요한 개념 장치로 기능했다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었다. 유교적 배경을 가진 지식인이 주 독자층이었던 『황성신문』이 동문동종의 아시아 연대에 큰 관심을 나타냈다. ‘동양’ 속에 조선을 잊어버리는 동양주의에 대한 신채호의 비평은 적절해 보인다. 한글만 쓰기로 동문 의식을 청산하는 과제는 20세기 후반에야 이루어졌다. Dong-moon(동문, 同文) originally meant standardizaton of Chinese characters in China, but its meaning is extended to include all barbarians around China use Chinese characters as writing system. It became Sino-centric conception as imitation of Chinse culture by Four Barbarians. In Chosun dynasty, most Neo-Confucian scholars conceived Korean alphabet as Eon-moon, script for vernacular, so they refused to use Korean alphabet as medium of intellectual activity. In foreign diplomacy, Korean alphabet was totally neglected until the decline of Chosun Dynasty in 1910. But in mass media and educational institution, the utility and efficiency of Hangeul became clear and undeniable. The Independence(독립신문) criticized reverence of Classical Chinese, symbol of Dong-moon. Dong-moon became Pro-Japanese concept in modern East Asia as ideological propaganda to hide the imperialistic characteristics of Japan. The meaning of dong-moon transformed as Japan, Korea, China all use Chinese characters orepresent words, probably common to three nations, originated from Chinese characters. The traditional concepton of Dong-moon combined with Dong-a(東亞), Same-race(同種), revealed its regional hegemony or racism against White Man. Modern Korean with Neo-Confucian intellectual background deeply immersed in Dong-a Dong-moon, Dong-moon-Same-race, particularly readers of Hwang-seong Shin-moon. The complete denial of Dong-moon was accomplished in late 20<SUP>th</SUP> Korea, that is the abolition of Chinese characters.

      • KCI등재

        『반패주년표(潘佩珠年表)』를 통해 본 근대초기 동문세계(同文世界)의 일단면(一斷面)

        김용태 ( Kim Yong-tai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6 大東文化硏究 Vol.96 No.-

        본고는 베트남의 저명한 독립운동가 판보이쩌우의 한문 자서전 『潘佩珠年表』를 우리 학계에 처음 소개하고, 이 자료를 통해 동아시아 근대한문학의 면모를 살펴보았다. 본고에서는 『潘佩珠年表』를 통해 당대 베트남에서 한문 글쓰기가 어떻게 재생산되었는지, 동아시아 지식인들이 한문필담을 어떻게 활용하였는지 등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아 20세기 초기까지 한문에 의한 同文世界가 지속되었음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판보이쩌우는 한문필담을 통해 다양한 지식인들과 소통하면서 스스로의 사상을 변화시켜 나갔다. 그는 처음 인종적인 `同文同種論`에 기대를 거는 입장이었는데 후에는 민주공화제와 세계주의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은 동문세계가 동아시아의 근대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증거라 할 수 있다. This paper treats of Phan Boi Chau`s autobiography in classical Chinese, A Chronology of Phan Boi Chau who was a famous independence activist in Vietnam. It is the first time to introduce autobiography of Phan Boi Chau in the academic world of Korea. Moreover, by examining this book we can understand the aspect of modern times` classical Chinese literature in East Asia. In this paper, I took a closer look at how writing in classical Chinese which was generally thought that it had disappeared with the beginning of the modern era was reproduced in the modern Vietnam. Furthermore, I inspected minutely how East Asian intellectuals communicated each other by means of writing in classical Chinese at that time. All of these materials indicate that the same script area which was communicated by one script `classical Chinese` lasted until early 20th century. Drawing on A Chronology of Phan Boi Chau, we can perceive that Phan Boi Chau changed his thought for himself by interacting with various kinds of Asian intellectuals. At first, he based on `the theory of the same script and the same race` for the sake of achieving independence from France. Then subsequently he realized the necessity of `a democratic republican form of government` and `cosmopolitanism`. Coupled with this fact, it would be saidthat the same script area was closely related with formation of modern East Asia.

      • KCI등재

        전통지식인의 친일 담론과 그 형성 과정

        박영미(Park, Young Mi) 한국고전번역원 2012 民族文化 Vol.- No.40

        본 연구는 친일담론의 발화와 수신을 밝히는 연구의 일환으로 기획되었으며 특히 조선과 일본의 인적 네트워크의 형성과 전개를 중심으로 이를 밝혀내고자 하였다. 조선에서는 김윤식, 정만조와 정병조를, 일본에서는 미시마 추수, 스에마츠 겐조, 모리 카이난 등의 예를 들어, 인적 네트워크의 형성 과정과 전개를 구명했다. 다음으로 이 네트워크를 통한 발화와 수신에 대해서도 알아보았다. 조선과 일본의 아시아 주의자들은 아시아연대를 실현하기 위해 선린과 우의를 강조하였으며 이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이것을 실천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제 식민지 이후에는 조선의 아시아주의자들은 일본이 발신하는 식민지 이데올로기에 호명하며, 이를 내면화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개항 이후 조·일간의 인적 네트워크는, 문명개화와 서양에 대한 공동 대응 전선의 형성이라는, 운명 공동체론에 대한 공감에서 시작되었다. 아시아 연대론은, 초기에는 아시아의 通商에 관한 것이었으나, 점차 동양이라는 문명권, 후에 동양이 즉 ‘유교문화권’이라는 문화권역으로 인식이 변하였다. 그러나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화에 따라, 조선의 아시아주의자들이 주장한 ‘同種同文의 아시아’를 위해, ‘斯文의 아시아’를 위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는, 식민지 동화정책의 수식어가 되어버렸고, 조선과 일본의 관계도 ‘형제국’에서 ‘父子國’으로 점차 종속성이 심화 되어 갔다. This paper is one of a research on finding out an utterance and reception of the discourse of Pro-Japanese, particularly, on focusing to the formation and the evolvement of an human network between Cho-Sun and Japan, such as, Kim Yun-Sik, Jung Man-Jo, and Jung Byung-Jo in Chosun, and Mishima Chusu, Semaz Genjo, and Mori Kainan in Japan. Next, the utterance and reception through this network is also investigated. Asianists in Cho-sun and Japan initially emphasized on a good neighborhood and a good friendship for the realization of Asian solidarity, and put into the practice through this human network. However, after the colonial period, Asianists in Cho-sun followed and, futhermore, had a tendency to internalize the colonial ideology which was dispatched by Japan. After open a port, the human network between Cho-sun and Japan was began from the sympathy on a community bound together by a common destiny, which constituted a coorporative confrontation to cultural civilization and the West. The advocacy of the Asian solidarity started initially with the interchange in Asia, but gradually changed the cognition to the Asian cultural sphere, finally, to the confucian cultural sphere. However, according to colonize Cho-sun to Japan, the advocacy of the unification in order for Asia of the same race and language(同種同文) and the Samun(斯文) which is asserted by the Asianists in Cho-sun, was decorated with a tool of the colonial assimilation. Furthermore, the relation of Cho-sun and Japan was gradually deepened to the subordinate relationship, from an equivalent relationship(兄弟國) to the subordinate relationship(父子國).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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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의 한국강점에 대한 일본 언론의 동향 -일본 잡지 『太陽』ㆍ『日本及日本人』ㆍ『中央公論』을 중심으로-

        하지연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0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0 No.64

        The purpose of this thesis is to study the recognition about Korean Annexation of Japanese Imperialism demonstrated in the Magazine 『太陽』,『日本及日本人』,『中央公論』. These Magazines are representing Japanes Press in maiji period. Especially these Magazines are all-around magazines. They asked more powerful control to korean resistsnces against Japan & Japanese and insist immediate Korean Annexation of Japanese Imperialism. Also, these Magazines claimed that the ‘legitimacy’, ‘Justification’, even though Korean Annexation of Japanese Imperialism by force is ‘Inevitabile’. It was based on contempt for Korea & Koreans. And these Magazines distorted Korean History, especially the ancient history, and asserted that the Korea & Korean have no experience of Independence in history. 1905년 일본은 러일 전쟁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전후 악화된 재정 상태와 국제관계를 고려하여 급진적인 한국 병합책에 신중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즉, 적어도 협약이라는 형식을 갖춤으로써 합법적으로 한국을 병합했다는 모양새를 갖추어 강제 병합의 원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 놓고, 자연스런 병탄의 결실을 맺도록 하는 일이었다. 또한 일본 국내의 일간지 및 종합계간지 등 언론을 총동원하고, 한국 내 민족 언론을 통제함으로써 일본의 한국 병합이 합법적이고 더 나아가 시혜적이라는 이미지를 창출해 내는 것, 한국의 과거사를 왜곡하여 이미 고대부터 한국이 일본의 속국 내지 영향력 내에 있었음을 주장하고 유포하는 것, 한국민을 자립할 수 없는 노예적 속성을 가진 미숙아로 왜곡하는 것 등 강제 병합을 합법화시키기 위한 추상적인 역사, 문화적 식민화가 전개되었다. 이 문화적 식민화의 장은 일본의 언론계에서 활동하던 문필가, 신문기자와 역사 및 각 분야의 전문 학자를 동원하여 개인저술의 역사서, 신문 및 잡지 기고문, 소설 등의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이 중에서도 그 파급 효과가 가장 컸던 것은 메이지明治시기 일본의 대중적 여론을 주도해 나간 일본의 대표적 일간지들과 종합잡지, 한국 내 일본인 언론 등이었다. 이 같은 문화적 식민화를 주도한 대표적 일본 내 종합잡지가 『太陽』,『日本及日本人』,『中央公論』 등이다. 물론 한국 내 일본인 잡지 『朝鮮』 역시 같은 역할을 담당하였었다. 본 고찰에서는 일본 내 종합잡지를 분석대상으로 하였는데, 이 3개의 잡지 가운데 『太陽』이 가장 한국관계 기사를 많이 실고 있다. 그러나 이 3개 잡지의 기고자들이 같은 인물인 경우가 많아 그 논조가 매우 비슷하다. 이들 잡지의 기고문들은 주로 일본 내에서 대표적인 학자, 기업가, 정치가의 글들로 이들의 글은 그대로 식민정책 입안에 적극 반영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 자체가 식민정책을 입안하고, 실행에 옮긴 장본인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太陽』,『日本及日本人』,『中央公論』 등의 대한식민정책 및 병합론에 대한 분석은 당시 일본 제국주의의 병합론과 일치한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일본 내 가장 유력했던 계간지들로서 민간인들에 대한 파급효과 역시 컸다. 이들 잡지들은 이토 히로부미의 통감정치가 즉각적 병합을 하지 않고, 한국을 보호국화 하려 한다고 비난하였고, 병합의 시기 및 방법에 있어서도 직접적인 즉각 병합을 주장하였다. 또한 한국 병합을 전후하여 병합의 정당성과 합법성, 필연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한국의 역사가 고대부터 이미 일본의 지배를 받은 경험이 있으며 역사적으로 한국은 독립한 적이 없는 나라라고 왜곡하였다. 더 나아가 민족성에 대한 폄하를 지속적으로 게재하여 일본의 한국 병합은 오히려 한국민을 근대 국가로 이끄는 특혜였다고 까지 주장하고 있다. 병합 이후에는 구체적인 식민통치 방식으로 동화를 주장하고 있는데, 그것은 표면적인 동화를 내건 실질적인 차별의 식민통치책이었다. 일본의 종합잡지들은 이러한 논지 전개면에서 투고자 및 인터뷰 주체가 동일인인 경우가 많았고, 또한 잡지들의 논조 자체도 한국병합을 정당화하기 위한 정책적 선전의 성격을 띠어 대동소이하게 모두 한국병합의 당위성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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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괴남(森槐南)의 경우로 본 애국계몽기 지식인의 대일(對日) 인식

        박영미 ( Young Mi Park ) 근역한문학회 2011 한문학논집(漢文學論集) Vol.33 No.-

        The paper is on the Thought of Chosun intellectual about Japan Empire by A Case of MORI KAINAN(森槐南) in 1905~1910. MORI KAINAN met Chosun intellectual from 1907 to 1909 as Poet and bureaucracy. When he died at 1911, his manody was published on 『Mailsinbo(每日申報)』 From 1911 March 28th until April 2nd. Chosun intellectual who met MORI KAINAN(森槐南) was one of the party of civilization and enlightenment and a bureaucracy in LeeWanYong(李完用)` governments. They had the location which was a duplication, a bureaucracy between Cosun and Japan Empire. They highly evaluated MORI KAINAN(森槐南)` ability as poet than bureaucracy. They known about the level of Japnese literature by MORI KAINAN, then praised his poem. But it choosed Only features of poet to erase MORI KAINAN` features which was a bureaucracy at Japan Empire. And the Chosun intellectual led human replacement by the oriental traditional method which is chinese poem exchange. Though they reproduced the Chinese poem as Signifiant, but it was no more the place of human replacement and communication. It became the place of the Discussion of assimilativeness. Chosun intellectual symbolized him as ``fellowship``, nevertheless MORI KAINAN (森槐南) was a Japan Empire` loyal retai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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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강제병합과 문화적 인종주의

        이정은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연구소 2010 日本硏究 Vol.46 No.-

        本稿の目的は、日本の韓国強制併合を前後にして 「人種主義的なもの」 が朝鮮人を対象にどのように構成されたのか、という問題を検討することである。強制併合の以前には文明化されるべき 「野蛮」 として見なされた対象が、併合を際にしていかなる論理によって統合の対象になったのかを 「人種主義」 の観点から考察してみた。日本は当時の朝鮮に対して、自国の優越さを強調するために、また朝鮮の強制併合や植民化という目的のために、人種主義の論理を積極的に駆使していた。朝鮮の人々は、先天的に未開で野蛮であり、また無能、怠け、悪徳をその属性とする民族として見なされていた。 だが一方、日本と 「併合」 する朝鮮は、未だに 「封建的」 な中国には劣らない民族として位置づける論理も登場していた。結局、韓国強制併合の際に登場した人種主義は、東アジアにおける帝国主義の権力再編を正当化する論理としても使われていたの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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