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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세기 江右文人의 鄭蘊 인식 -某里 漢詩를 중심으로-

        강정화 경상국립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2022 남명학연구 Vol.74 No.-

        본고는 경상국립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남명학연구소가 추진하는 강우지역 전통선비마을 연구의 일환으로 ‘거창 강동마을’ 기획에 의해 집필되었다. 강동마을은 桐溪 鄭蘊(1569-1641)으로 대표되는 草溪 鄭氏家의 세거지이다. 정온은 조선 역사에서 매우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았고, 그의 생애 또한 평범하지 않은 굴곡진 삶이었다. 역사 속 그의 위상도 가볍지 않았다. 그는 南冥 曺植(1501-1572)의 高弟인 來庵 鄭仁弘(1535-1623)의 문인으로, 인조반정 이후 강우지역의 학술을 대표하던 인물이다. 반정이 있기까지 10년 간 제주에 유배되었고, 병자호란 때는 그 치욕을 감당치 못해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으며, 이후 낙향하여 某里에 은거하였다. 사후 강우지역의 후학들이 정온의 節義를 숭상하여 그곳에 某里齋를 짓고 그 뜻을 표상하였다. 그러나 그의 玄孫인 鄭希亮이 가담한 戊申亂(1728)으로 인해 정온도 모리도 모두 역사에서 잊혔다. 이후 2백여 년도 더 지난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갑자기 수많은 지식인이 모리를 찾아와 정온의 절의를 추숭하고, 또 많은 遊記와 한시를 남겼다. 19-20세기 강우문인들은 오랜 시간 중앙정계에서 소외되어 재야 지식인으로 존재하였다. 그들 앞에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라는 국난기가 전개되었고, 그들은 혼란 속에서도 지식인으로서의 책무와 역할을 해야만 했다. 그동안 고수해온 전통유학의 이념과 급변하는 시대 상황에의 괴리는 그들의 처세와 태도에 무력감을 안겨 주었고, 그 결과 國恥로 귀결되는 현실에 울분과 분노를 표출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강우지역의 선현인 정온은 강우문인에게 삶의 지표를 제시하는 표상이 되었고, 수많은 강우문인이 모리를 찾지 않을 수 없었다. 갑작스레 많은 사람이 찾아와 多作이 산출되는 특이한 경우였고, 의외로 이 시기 모리 한시에 투영된 정온 인식은 거의 일관되게 나타났다. 형식상으로는 정온의 모리 시에 차운하여 읊은 것이 많고, 내용상으로는 정온 당대의 삶을 회고하거나, 자기 시대에 필요한 절의 정신을 그에게서 찾는 것으로 표출되었다. 이를 통해 19-20세기 강우문인이 인식한 정온에 관한 인식뿐만 아니라, ‘모리’가 지닌 장소의 정체성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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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ght Intensity and Photoperiod Influence the Growth and Development of Hydroponically Grown Leaf Lettuce in a Closed-type Plant Factory System

        강정화,Sugumaran KrishnaKumar,Sarah Louise Sua Atulba,정병룡,황승재 한국원예학회 2013 Horticulture, Environment, and Biotechnology Vol.54 No.6

        Effect of light provided by various light intensities combined with different photoperiods on the growth and morphogenesis of lettuce (Lactuca sativa L.) ‘Hongyeom Jeockchukmyeon’ in a closed-type plant factory system were evaluated in this study. Four light intensity treatments, i.e., 200, 230, 260, and 290 µmol·m-2·s-1 PPFD, provided from light-emitting diodes (LEDs), with a combination of three different photoperiods 18/6 (1 cycle), 9/3 (2 cycles)or 6/2 (3 cycles) (light/dark) were used. The combination of 290-9/3 (light intensity-photoperiod) showed the highest plant height and fresh shoot weight, while plants grown at 290-18/6 exhibited the greatest root fresh weight, leaf dry weight, and longest root length. The greatest leaf width, maximum number of leaves, and greatest root dry weight were observed in the treatment combination of 290-6/2. Anthocyanin content was found to be highest in the 290-6/2and lowest in the 200-6/2 treatment, whereas chlorophyll fluorescence was observed to be highest in the 260-6/2 and the lowest in the 290-9/3 treatment. Our data showed that providing a high light intensity of 290 µmol·m-2·s-1 PPFD with a shorter photoperiod of 6/2 (light/dark) resulted in good plant growth and development of lettuce, whereas growth at light intensities of 230 or 260 µmol·m-2·s-1 PPFD with longer photoperiods of 18/6 and 9/3 (light/dark)resulted in good growth as well as higher photosynthetic capa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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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崗 安益濟의 문학에 나타난 몇 가지 특징

        강정화 경상국립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2018 남명학연구 Vol.60 No.-

        Seogang(西崗) Ahn Ik-je(安益濟, 1850~1909) was one of the greatest scholars in the Uiryeong area of Gyeongsangwoo Province at the end of Joseon. Even though he lived in the Gangwoo region where the magnetic field of Nammyeonghak(南冥學) remained for generations, he did not exhibit the tendencies of the Nammyeonghak School. Given the tendencies of the Ahn family of Tamjin, he was in the line of Hanju Lee Jin-sang(李震相, 1818~1886) but showed no clear schools of thoughts or theories related to it. He was an outstanding man of letters with innate literary talent. He led a life as a scholar out of power during the difficult times in the 19th and 20th century, leaving no eminent achievements. He, however, created a large amount of literary works across various genres, taking advantage of his remarkable literary talent. In terms of materials, he did not neglect everything in daily life carelessly and sublimated them into works. He used a single stone and flower in his surroundings as a literary material and projected his fierce scholarly consciousness onto everyday materials so that trivial things in the surroundings would come alive in his works. As his unique learning attitude and conscious tendency were added to them, his works demonstrated differentiating characteristics. He left detailed records of the local culture by adopting an article writing method instead of the date-based one. His particular affection for the local culture was accompanied by his comprehensive and delicate study, which led to the development of an attitude of correcting errors. It was a rare phenomenon among Gangwoo scholars before him. Furthermore, his academic attitude of answering his own questions was very refreshing and effective. Losing a chance for learning due to his poor household economy, he tried to make academic achievements in his own way. The present study, however, did not cover some of his life stories. It, for instance, lacked in the investigation of his relations with Yeokhak that dominated his entire life and the origin of his scientific thinking demonstrated at Yanghak and Chilbulsa Yeongji. It was estimated that he had a strong tendency of family studies, but the present study had a difficult time shedding light on it based on his works. This is left as a task for follow-up study. 西崗 安益濟는 한말시기 경상우도 의령지역의 대표적 士人이다. 남명학의 磁場이 남아있는 강우지역에 세거하였으나 그에게서 남명학파의 성향은 드러나지 않았고, 耽津安氏家의 문중적 성향으로 보면 寒洲 李震相(1818~1886)의 계열임에도 이와 관련한 師承이나 학설이 보이지도 않았다. 다만 그는 타고난 문학적 자질을 지닌 뛰어난 문학가였다. 안익제는 19-20세기 어려운 시대에 재야사인으로서의 삶을 살아 현달한 치적을 남기진 않았지만,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활용해 다양한 장르에서 양적으로도 적지 않은 문학작품을 창작하였다. 소재 면에서도 일상에서 접하는 모든 것들을 허투루 지나치지 않고 작품으로 승화시켜 표현하였다. 주변의 돌 하나 꽃 한 송이도 모두 문학적 소재로 활용하였고, 특히 치열한 士意識을 일상의 소재에 투영함으로써 주변의 소소한 것들이 그의 작품 속에서 살아 숨 쉬도록 만들었다. 여기에 그의 독특한 학문태도와 의식 성향이 더해져, 그의 작품은 차별적 특징을 드러내었다. 날짜 중심이 아닌 記事 서술 방식을 통해 지리산권역에 대한 세세한 기록을 남겼고, 지역문화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광범위하고도 섬세한 공부가 있었으며, 이에서 파생된 오류 정정의 태도 등은 이전 시기 강우학자에게선 보기 드문 현상이었다. 더욱이 自問自答의 학문태도는 매우 참신하면서도 유효한 방식이었다. 貧寒한 가정형편으로 배움의 기회마저 잃은 士人이었지만, 이처럼 자신만의 방식으로 학문적 성취를 구현하고 이를 문학작품으로 표출하였다. 그러나 본고에서 미처 수렴하지 못한 아쉬운 부분도 있다. 예컨대 그의 일생을 지배했던 易學과의 관계, 특히 洋學과 七佛寺 影池에서 보인 객관적 사고의 근원이 어디인가에 대한 규명 등이 부족하였다. 뚜렷한 師承 관계도 확인되지 않기 때문에 家學的 성향이 짙을 것이라 짐작되지만, 그의 작품에서는 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이는 차후의 과제로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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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내 재난 환경에서 상향링크 NOMA 기반의 Fair UAV MAC 프로토콜의 성능 분석

        강정화,김재현 한국통신학회 2022 韓國通信學會論文誌 Vol.47 No.4

        Unmanned aerial vehicles (UAVs) serve as aerial base stations when cellular networks are disrupted in indoor disaster situations. Non-orthogonal multiple access technology is being used as a technology to increase throughput and spectrum efficiency. In this paper, we propose a UAV scheduling algorithm using non-orthogonal multiple access technology for efficient communication in indoor disaster environment. The proposed algorithm considers a realistic environment using a new path loss model. The proposed algorithm can guarantee better throughput and fairness through scheduling. In simulation results, we confirm that the proposed algorithm can improve throughput and fairness than conventional MAC protocol. Unmanned aerial vehicles (UAVs)는 실내 재난상황에서 셀룰러 네트워크가 중단될 때 공중 기지국역할을 한다. 비직교 다중접속 기술은 처리율 및 스펙트럼 효율성을 증가시키기 위한 기술로 사용되고있다. 본 논문에서는 실내 재난 환경에서의 효율적인통신을 위해 비직교 다중접속 기술을 사용한 UAV 스케줄링 알고리즘을 제안한다. 제안하는 알고리즘은새로운 경로손실 모델을 고려하여 보다 현실적인 시스템 모델을 제공하며, 스케줄링을 통한 높은 처리율과 공정성을 보장한다. 시뮬레이션 결과, 제안하는 알고리즘은 기존의 MAC 프로토콜들에 비해 처리율과fairness 측면에서 성능이 향상되는 것을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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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頭流全志』 속 한시에 대한 고찰

        강정화 경상국립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2016 남명학연구 Vol.50 No.-

        Kim Seon-shin's Duryujeonji is the only remaining geography book about Mt. Jiri. Multi-disciplinary researches were planned across geography, Buddhism, and literature to investigate the culture of Mt. Jiri zone with a focus on his Duryujeonji. This study presents the research findings of literature field, examining the Chinese poems in "Cheopsanshihwa" in Volume 11 of Duryujeonji. There are total 100 Chinese poems in "Cheopsanshihwa" with approximately 80 of them keeping their complete formats intact. Those works were selected from Donggukyeojiseungram, which Kim consulted when writing Duryujeonji, and from the chronicles of ten towns in the Mt. Jiri zone. They were written by about 50 writers, spanning from the period of Three Kingdoms to middle Joseon. The term "Cheopsan" means "the surroundings or margins of Mt. Jiri leaning against the mountain," which indicates that the Chinese poems in "Cheopsanshihwa" depict the stories of people around the mountain rather than those of the mountain itself. Over 90% of those Chinese poems talk about the surroundings of the mountain rather than the mountain itself as part of excursion. Kim's consciousness behind the selection process in "Cheopsan- shihwa" is highly unique compared with the formats of other mountain records. Juwangsanji and Cheongryangsanji, for instance, introduce records and poems of a mountain excursion under the title of "Jeyeong" or "Records." Duryujeonji, on the other hand, contains no single excursion record to Mt. Jiri and only a small handful of excursion poems about the mountain. Kim described the "Mt. Jiri zone" rather than "Mt. Jiri" itself because he wanted to show the lives and culture of people living with the mountain in it and pass down the complete virtue of the mountain to following generations. 김선신의 『두류전지』는 현전하는 유일의 지리산 지리서이다. 지리산권 문화를 연구하기 위한 일환으로 『두류전지』를 중심에 둔 지리·불교·문학 등 다양한 분과별 연구가 기획되었는데, 이 글은 그 중 문학 분과의 연구 성과로, 『두류전지』 제11편 「貼山詩話」 속 한시를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첩산시화」에는 모두 100여 개 항목의 한시가 수록되어 있으며, 그중 온전한 체재를 갖춘 작품은 대략 80수이다. 이들 작품은 김선신이 집필에 활용한 『동국여지승람』과 지리산권역 10개 지역의 읍지에서 선별한 것이다. 모두 50여 명 작가의 작품이고, 시기적으로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중기까지이다. ‘첩산’이라는 말은 ‘지리산에 기대어 있는, 지리산의 주변이나 가장자리’를 뜻한다. 이는 「첩산시화」에 수록된 작품이 ‘지리산’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주변 사람의 이야기를 담은 한시라는 의미이다. 「첩산시화」 속 한시 가운데 9할 이상이 지리산의 주변을 노래하고 있다. 「첩산시화」에 드러나는 김선신의 이러한 선별 의식은 여느 山誌의 체재와 비교해 보아도 매우 독특하다. 예컨대 『주왕산지』나 『청량산지』에는 ‘題詠 또는 記錄’ 등의 제목 아래에 해당 산을 유람한 유람록과 유람시가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두류전지』에는 지리산유람록을 한 편도 실지 않았고, 유람시 또한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처럼 김선신이 ‘지리산’이 아니라 ‘지리산 권역’을 읊은 것은 그 속에서 지리산과 함께 살아가는 인간의 삶과 문화를 드러내고, 그들과 함께 지리산이 지닌 온전한 덕을 후세에 전하고 싶었던 의도라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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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弄月亭과 尊周大義

        강정화 순천대학교 남도문화연구소 2012 南道文化硏究 Vol.0 No.23

        Nongwoljeong was a pavilion built by Park Myeong-bu(1571-1639) in the spectacular landscape of Hamyang Hwarimdong in order to quit his lifelong service in office and lead a leisure life in nature in his later years. However, he passed away a while after its completion. The pavilion was lost in people's memory along with his death. After remaining as a resting place for his descendents for about 200 years, Nongwoljeong was transformed into a place of chivalrous spirit with the spirit of Jonjudaeui immersed in it in the 19th and 20th century, when it was regarded as one of the representative places of Daemyeonguishik along with Mori, the base of Donggye Jeong On, among the Gangwoo scholars. The changing factors of perceptions projected into Nongwoljeong were examined in several aspects. The Sadaeuishik, which prevailed throughout Joseon, started to be replaced with the reinforcement of Jonjuuishik around the period. In line with that policy flow, they engaged in specific activities to reinforce Jonjudaeui along with the goal of reinforcing the family status in the Gangwoo region. Good examples include Daemyeonghwa of the Nampyeong Mun family and the illumination of Park Jin-yeong by the Haman Park family. The period also witnessed special worship practices for the local sage, Jeong On. They particularly highlighted his practice of Daemyeonguiri during the Byeongjahoran. The Gangwoo scholars, who agonized over their conduct of life and roles as intellectuals in the difficult reality home and abroad at the end of Joseon when things were rapidly changing, were in desperate need of the establishment of Jongjudaeui. Park Myeong-bu had the same spiritual and ideologicalorientation as Jeong On. The need for worshiping Jeong On during the period made people perceive Nongwoljeong as a place filled with the spirit of Jonjudaeui. The pavilion was not widely known among the Gangwoo scholars until that time. With the rapid emergence of Jeong On, it also emerged along with Park Myeong-bu. More and more people then started to look for it. Nongwoljeong, which used to be a private place of Park Myeong-bu, was transformed into the space of collective spirit of the times called "Jonjudaeui" in the 19th and 20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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