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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적 존재로서의 여성인식에 대한 성서적 신학적 모색 : 요한복음과 로즈메리 류터를 중심으로

        김민아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 2020 국내석사

        RANK : 248651

        본 논문은 독립적 존재로서의 여성인식에 대한 성서적, 신학적 모색을 목적으로 한다. 독립적 존재로서의 여성인식을 이야기하기 위하여 종속된 존재로서의 여성인식에 대한 역사를 되짚어 본다. 철학적 연원인 이원론적 사고와 사회학적 연원인 가부장제로 인하여 여성인식이 왜곡되었고 이러한 역사는 지속되어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을 독립적인 존재로 인식한 모범을 살펴보며 성서적 모색을 해 나간다. 성서적으로는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과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살펴본다. 신학적으로는 1세대 여성신학자인 로즈메리 류터의 신학을 살펴본다.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독립적 존재로서의 여성인식에 대한 방법으로써 인식하기, 상호교류하기, 공동체 형성하기를 제안한다.

      • 로즈메리 류터의 하느님 이해

        한진경 협성대학교 신학대학원 2004 국내석사

        RANK : 232303

        로즈메리 류터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임과 동시에 자유한 영혼의 소유자였던 어머니의 영향 가운데에서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을 탐구하며 살도록 격려받았다. 또한 그녀는 유대인 숙부를 통하여, 고등학교 역사 선생님을 통하여, 유대인과 인종차별주의에 대한 관심의 눈을 떳다. 그후 학부시절 그녀의 비판적, 지적, 실천적 사고 속에서의 교회 역사의 연구는 그녀로 하여금 기독교의 진실성에 대하여 회의를 품으며 지적 사고의 전환 시기를 맞이했다. 민권운동, 베트남 전쟁,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페미니즘의 부활이 태동한 시기인 1960년대부터 그녀는 시민 운동가로 활약했다. 1965년부터 워싱턴의 하워드 대학교 신학교인 흑인 신학교의 경험을 통하여 그녀는 또한 신학적 사고와 사회적 실천과의 상호적인 관계를 접합시켜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한 그녀의 신학적 관심은 반유대주의, 성차별, 계급주의, 생태학 등의 다양한 분야에 걸쳐서 나타나지고 있다. 16세기 종교개혁기의 개혁은 그다지 급진적이지는 않았지만, 급진적 종교개혁의 교회들은 강압된 종교개혁의 교회들과 구별되면서 독특한 교회론과 인간론을 제시한다. 그들은 인간의 본성을 타락한 역사적 본성에서가 아니라 본래의 창조된 본성에서부터 이해되어야 한다고 본다. 또한 그들에게 있어서 교회는 세속적 사회에 대립한 새로운 몸의 모임으로서 세속적 도시를 떠나 실존의 대립된 원칙에 의해서 사는 새로운 공동체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개방되어 나타날 새 하늘과 새 땅의 메시아적 공동체를 인수할 교두보로서 현재 안에 내재해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묵시문학적 전통의 내적인 흐름은 재세례파가 재구성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의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자와의 본질적 유사성을 지니게 창조하였다. 인간이 비록 죄 가운데로 타락하였을지라도 그이 진정한 본성으로 남아있는 하느님과의 유사성은 상실치 않고 보존하고 있다. 하느님 앞에 자유한 인간의 영혼은 도래할 하느님 나라를 기대하며 이 땅에서의 순례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유지하고 있다. 그들은 최후의 심판에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와 이 땅의 죄인들을 정결하게 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느님 은 창조자이며 동시에 심판자로 오실 메시야였다. 르네상스에서 18세기 후기와 19세기에 있었던 자유주의 혁명에 이르는 기간 동안은 민주적, 세속적, 과학적 기반으로 그리스도교가 대체되는 기간이었다. 이 시기에 하느님의 자기계시는 자연의 법칙과 질서 속에서 보다 분명하게 보여졌다. 하느님은 더 이상 아브라함의 하느님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서의 하느님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하느님은 우주의 원형인 최고의 존재로서 질서와 합리성의 관계에서만 증명될 수 있을 뿐이었다. 합리주의 사상에 기초해 18세기에 점진적으로 출현했던 것들은 천년 왕국의 새로운 세속적 표현으로 그 천년 왕국이 역사 안에서 발생하기 시작했다. 하느님의 은총 또한 모든 인간과 모든 실체를 완성시키기 위하여 역사 안에서 일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신칸트주의 신학에서는 지상의 도덕적 왕국으로서 하느님의 나라를 해석하는 것이 새로운 자유주의적 정통주의 가운데 세워졌다. 로즈메리 류터는 19세기대륙의 자유주의 신학에서 그리스도교 사회주의의 제안자로 로베르트 라멘나를 언급하고 있다. 라멘나는 개량된 사회를 창조론과 하느님의 부성과 인간의 형제애의 기초 위에서 발견하였으며, 그러한 것은 궁극적으로 새로운 사회를 수립하는 역사를 지배하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보았다. 그리스도교 사회이론은 호레이스 부쉬넬과 월터 라우센부쉬 등에 의해서 미국의 부흥주의 그리스도가 사회윤리에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것은 교회와 세상 사이의 옛 구분을 지우고, 성령이 단순히 교회 안에서만 역사하는 분이 아니라 사회 안에서 인간을 위한 투쟁 가운데서 역사하는 분으로 이해했다. 하느님은 역사 안에서 일하시는, 역사를 최종적 목적에로 인도하시는 내재적인 성령으로 이해되었다. 제 1차 세계 대전 후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을 가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위기 신학, 신정통주의 신학 등으로 알려진 바르트가 꼽힌다. 바르트는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을 계시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계시는 인간이 신에게 이르는 길이 아니라, 신이 인간에게 이르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러한 신정통주의는 1920년대 후반기에 미국의 사상계에 들어가기 시작했고, 그에 있어서 대표적인 학자로는 라인홀드 니버를 들 수 있다. 그는 복음의 자율성을 옹호하면 서 또한 정치의 자율성도 생각하면서, 신정통주의가 정치적 행동주의의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주려고 하였다. 인간은 은총을 통해서 그 자신의 손으로 만든 우상들을 초월할 수 있는 새로운 삶에로 구원 받을 수 있는데, 이러한 은총의 근거는 역사를 넘어서는 절대적 초월자에게 있다. 인간이 하느님만을 믿고 신앙 안에서 살 수 있을때, 인간이 진정한 역사적 존재에로, 새로운 미래로 향한 영원한 개방성에로 구원될 수 있다고 보았다. 제 2차 세계대전의 경험이후 사람들은 폭탄과 집단살해로 전체적인 삶과 가치가 파괴되는 대파국을 초래했던 현실에 대하여 비판할 만한 어떤 가치도 전혀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여기에서 류터는 이러한 시대상황 속에서의 다양한 광기의 형태를 직접 바라보려고 하였던 알베르 까뮈를 언급한다. 까뮈는 초월적인 신과 거룩한 미래의 희망에 대한 신앙의 도약과 함께 자살 역시도 우리가 지닌 모순의 딜레마의 실체를 회피하는 것으로 본다. 그는 결합에 대한 인간의 요구와 현실이 부적당성 사이의 갈등 속에서 인간은 그 자신의 본성 안에 내재하는 가치를 확인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자기 긍정을 통한 모순에 대한 반항적 인간에 관한 연구 속에서 모든 생명의 가치를 포함하는 차원에서 개인의 삶의 가치에 관한 질문을 야기시킨다. 억압에 대항하는 개인의 반항운동에 들어있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주장은 모든 인간의 공동의 인간성을 구상한다. 이런 인간 공동체에 의해서 반항자가 자신에 대한 존경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모든 인간이 서 있는 공동의 인간성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항은 인간 사이의 침묵을 파괴시킨다. 즉, 까뮈의 판단은 하늘에 대한 반항은 정의와 질서의 이름으로 불공정한 우주를 만들어낸 창조자를 거부하는 것이다. 형이상학적 반항자는 하느님에 대한 무신론자라기보다는 하나의 모독자이다. 형이상학적 반항자는 정의의 이름으로 불공정한 창조자를 비난하고, 악과 파국과 무분별한 학살을 행하는 우주의 창조자를 심판한다. 까뮈는 인간의 선과 아름다움이 초월에 대한 반항에서 나온다고 선언한다. 인간의 희망은 신의 부재에 대한 견고한 신앙 위에, 그리고 이 세계를 초월해 있는 신적 세계와 신성에 대한 야망에 있다. 은총은 인간의 업적을 상대화시키고 인간의 가변성을 받아들이는 능력이다. 절대자는 인간 한계의 보장자로서 작용한다. 구원받은 인간이란 자신의 존재를 어떤 절대자와도 일치시키지 않으면서 피조된 현실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말하고 있다. 역사의 흐름 속의 하느님은 종교개혁기를 거치면서 묵시사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을 부여하시며 하늘로부터 내려와 이 땅의 죄인들을 정결케 하시고, 모든 악을 타파하며 심판자로 오실 하느님을 볼 수 있다. 르네상스에서 자유주의 혁명에 이르는 기간에서는 민주적, 세속적, 과학적 기반 속에서 하느님은 자연의 법칙과 질서 속에서 자기계시를 하시는 분으로 이해되어진다. 하느님은 우주의 원형인 최고의 존재인 것이다. 합리주의사상에 기초해 천년 왕국은 역사 안에서 발생하기 시작했고, 하느님의 은총 또한 역사 안에서 일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자유주의 신학에서 역시 궁극적으로 새로운 사회를 수립하는 역사를 지배하는 하느님의 능력을 본다. 그것은 하느님의 영이 단순히 교회 안에서만 역사하는 분이 아니라 사회 안에서 역시 역사하는 분이 되신다. 하느님은 역사를 최종적 목적에로 인도하시는 내재적인 성령으로 이해된다. 1차 세계 대전 후 그러한 자유주의 신학은 비판을 받고 하느님은 역사를 넘어서는 절대적 초월자로 이해되어진다. 2차 세계대전후 하느님은 절대적 초월자로 이해되어지지만 거기에서의 절대자는 인간 한계의 보장자로 작용한다. 결국 절대자는 인간의 신이 되려는 욕망을 파괴하고 인간을 그의 유한성에로 되돌려 보낸다. 서구 기독교의 문화들이 남성적이고 유일신론적인 하느님의 개념과 하느님을 우주의 창조자로 해석하는 방법이 남성의 여성에 대한 지배가 사회적 그리고 상징적 지구에 대한 지배에 중요한 연결점을 제공해 주고 있다. 또한 이런 지배는 가부장적 문화 안에서 남성을 하늘, 지성 그리고 초월적 영과 연결시키고, 여성은 지구, 물질 그리고 자연과 연결 시키는 경향을 제공하고 있다고 본다. 로즈메리 류터는 이것에 있어서 신화 속에 나타난 하느님(절대자)의 이해를 통해서 설명해 주고 있다. 우주와 신들의 근원인 최초의 어머니로 시작하는 수메르 세계의 초기 이야기들에 기초해 있는 바빌로니아 창조 이야기는 처음에 우주의 몸에서 최초의 모체인 하늘과 땅이 나타나며, 그 다음 최초의 우주적 힘인 물, 공기, 식물 그리고 도시 국가의 지배 계급을 대표하는 인격화된 신과 여신들이 나타난다. 고대의 어머니 여신 티아맷과 마르둑의 이야기에서 티아맷은 마르둑에게 폐한다. 결국 마르둑의 아버지인 에아의 발생 안에서, 종속적인 남성 배우자들을 지닌 여성 지배적인 세계는 종속적인 여성 배우자들을 거느린 남성 지배적 권력 세계로 대체되었다. 마르둑은 유한한 인간 피조물을 강제로 노예화 시키는 반면에, 신들을 자유롭게 쉬게한다. 그는 인간으로 하여금 신들에게 봉사할 책임이 있게 만들어서, 이로 인하여 편하게된 신들은 성전과 궁전에 거하는 한가한 귀족 사회의 불멸의 구성원들이 되어, 들판과 작업장에서 땀 흘리는 농노들의 노동 생산물을 몰수한다. 몰수된 노동에 기초해 있는 여가는 농노와 노예들의 하층 계급으로부터 귀족 계급을 분리시켜서 신과 동일시했다. 헤브루 창조 이야기 안에서 창조자는 우주의 최초의 물질과 공존하면서 그 과정을 조용히 관리한다. 창조자와 최초의 어머니 사이의 갈등이 제거되고, 대신에 어머니는 형상은 없지만 창조자의 명령에 즉시 반응하는 유순한 물질이 되었다. 헤브루 창조 이야기에서 창조자는 6일 동안 빛과 어둠, 하늘과 궁창, 식물, 별, 달, 물고기와 새, 동물과 인간 등 우주를 형성시킨다. 또한 하느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져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에게 고기, 새 그리고 육지 동물을 포함하는 지구에 사는 모든 동물에 대한 지배권이 주어진다. 이야기의 본문들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남성과 여성의 평등의 여지를 열어 놓지만, 하느님과 아담을 지칭하는 대명사의 남성적 호칭은 남성이 이런 하나님을 집단적으로 적절하게 대표하며, 여성은 이런 집단적인 인간 주권의 혜택을 함께 나누지만 동시에 남성 가장(家長)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플라톤의 창조이야기인 티마이오스는 보이지 않는 영원한 사고의 영역과 보이는 유형의 영역으로 구분한다. 이 두 영역 사이에 창조자는 우주의 장인이었다. 이 이야기의 데미우르고스 역시 무엇인가를 만들어서(making) 창조한다. 그는 공간을 근원적 요소들인 불, 공기, 물 그리고 흙으로 형성하고 이것들로 우주와 더불어 세상의 영역, 세계 영혼을 만든다. 그런 후에 데미우르고스는 약간 희석된 형태의 요소들로써 인간 영혼을 만든다. 인간의 영혼들은 영원한 본질 안에서 하늘의 교육을 받게 되고, 그들이 하늘의 진리를 받으면 남성의 몸으로 구체화된다. 그러나 몸과 그 감각에 대한 통제에 실패 하면, 그 영혼은 다시 육체의 모습을 갖고 다시 태어나 여자가 된다. 여기서 플라톤은 실재를 마음과 몸으로 구분했다. 여기서 마음은 근원적이고 영원하고 선하며, 몸은 이차적이고 파생적이며 악의 근원으로 정신(마음)에 의해 지배되어진다. 정신이 몸을 지배하는 이런 계층구조(hierarchy)는 남성의 여성에 대한, 인간의 동물에 대한 그리고 지배자의 노동자에 대한 계급 계층 구조 안에서 되풀이된다. 서구 기독교는 하느님과 우주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형성시킨 창세기 1장의 설명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고대근동, 헤브루, 그리스와 기독교의 개념들을 종합하였다. 기독교 신학은 하느님이 최초의 물질로 우주를 형성할 뿐만 아니라, 이 최초의 물질을 창조하는 분으로 이해했다. 또한 기독교 견해에 있어서 하느님은 완전히 별개의 스스로 있는 영원한 존재로 이해된다. 그렇지만 신과 우주의 연결 고리로서 창조를 하느님의 존재로부터 발생하여 그 존재가 실존 안에 거하는 것으로 본다. 기독교에 있어서 여성과 남성에 대한 관점은 남성을 합리적 영혼으로, 여성을 몸과 열정으로 보고 있지만 각 영혼에 있어서 신성함과 구원에 대한 동일한 능력을 가진 존재로 하느님에 의해 독특하게 창조된 것으로 본다. 신화 속에서 이해된 하느님은 모권사회에서 부권사회로의 이동, 지배와 종속 관계에 있어서의 지배자로 이해된다. 또한 그 속에서의 하느님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지배구조에 대한 정당함을 뒷받침하려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참 이스라엘의 회개와 순종은 하느님의 은총의 수혜자가 되도록 자격을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순종에 대한 요구, 그리고 이스라엘이 그에 상응하는 삶을 살지 못했을 때 백성들의 재난은 그들의 배반과 그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의 표시이기도 하다. 하느님은 이 남은 자들을 근본으로 삼아 이스라엘 백성이 새롭고 정화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교회와 이스라엘 사이에 단절을 초래했던 것은 바로 파기적인 계약원칙으로서의 메시아 예수에 대한 신앙을 고양시킨 것이었다. 육적 이스라엘에 대한 기독교의 이 입장은, 유대교의 가정된 정체성이었던 하느님의 현존으로서, 예수에 대한 신앙을 마지못해 하나의 지속적인 이스라엘의 계약 안에 두려고 했던 기독교의 입장을 구체화시키는 것이었다. 베드로 교회는 첫 번째 미드라쉬가 하느님은 이방인들 속에서 한 백성을 스스로 조성해 내고 있었다는 개념을 포괄하기 위하여 부연되었다. 바울 역시 한 비밀(롬11:25)을 발견했다고 선포함으로써 유대인들의 불신앙에 대한 그러한 종교적 의미와 또한 자신의 백성을 최종적으로 구원하려는 하느님의 계속적인 관심을 시인할 수 있는 자신의 길을 발견하고 있다. 이 비밀에 의하면 유대 종교 공동체는 완악해졌고, 이방인들은 그 결과로써 구원받게 되었다. 이것은 뚜렷이 은혜로운 하느님의 행위다. 교부들은 유대인의 외면성을 완전히 자유스럽게 묘사해서, 유대인들이 기독교 금욕주의와 대조적으로 마치 실제로 육체의 악에 중독되어 있었던 것처럼 생각했다. 유대인들은 모세부터 예수 시대까지 항상 성령을 훼방했던 백성이다. 그들은 한사코 하느님을 용납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의 계약은 실패로 끝났다. 그것은 마침내 하느님, 예언자들 그리고 메시아를 받아들였던 저 백성을 위한 것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기독교의 승리와 메시아적인 회집에 대한 좌파적 사고는 유대인은 배척당하고 추방당했으며, 반유대인 전승에서 자명한 것은 유대인이 받을 형벌은 영원하며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이다. 유대인의 율법은 그들이 배척당한 표시로 하느님에 의하여 폐기되었지만, 그들은 사악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그 법을 준수하려고 한다. 율법을 반대하는 기독교의 주장에는 모세의 율법은 폐기되었으며,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더 이상 그것을 준수할 필요가 없다는 것과 그것은 또한 이미 영적으로 실현되었다는 사상이 포함되어 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은 참 이스라엘로서 하느님의 계약의 백성이었다. 하느님은 그들의 순종과 회개의 요구 속에서 그들에게 시련을 허락하신다. 그렇지만 기독교적, 교부들의 관점에 있어서 유대인들과 하느님의 계약은 파기되어진 것이었다. 그러한 하느님에 의해 유기된 유대인들은 그러한 관점 하에 역사 속에서도 유기되어 질 수 밖에 없음을 로즈메리 류터는 나타내고 있다. 로즈메리 류터의 하느님 이해를 정리하면서, 류터의 폭넓은 시각과 관점을 살펴 볼 수 있었다. 단순히 개인과 관계된 나의 하느님, 우리의 하느님으로 하느님이 구속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신화, 문화와 삶 속에 존재하시며, 그 하느님이 바로 나 개인의 삶과 연계되어지는 하느님임을 본다. 그와 관련하여 류터는 하느님이 우리의 관계 속에 거하시며, 그 관계 속에서 치유를 낳는다고 한다. 그 관계는 단순히 인간들의 관계가 아닌 역사와 인류, 자연과의 전지구적인 관계라 할 수 있다. 또한 그 속에서의 하느님 이해를 통해서 우리 삶의 사회체제를 구성하고 이해할 수 있으리라 본다. 본 논문은 기존의 로즈메리 류터의 여성생태 신학을 중심으로한 관점과는 달리 하느님 이해라는 시각으로 보았다는 점에 있어서 새로운 이해를 도우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본 논문에 있어서 폭넓고 광범위한 자료 조사에의 미흡함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느님은 역사와 사회, 문화와 온 삶 속에서 관여하고 계시며, 우리는 그 하느님을 나의 하느님의 시각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하느님이며 나의 하느님은 어떠한 분이신가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 생태론적 창조신학에서의 인간과 세상의 관계 : 교도권의 가르침과 로즈마리 류터의 신학을 중심으로

        윤찬용 수원가톨릭대학교 대학원 2023 국내석사

        RANK : 232267

        현대 사회에서 생태계 파괴로 인한 문제는 전 지구적인 것으로 인식된다. 이는 주로 생태계에 대한 인간의 무분별한 착취로 발생된 문제들이며 기술의 발전과 인간 삶의 질 향상을 위한다는 명목하에 이루어짐을 바라보게 된다. 이와 같은 문제는 동물과 식물에 대한 피해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에 전 세계적으로 다양한 정책과 방안을 마련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위기에 대한 가속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일부 서구의 생태학자들은 생태계를 향한 인간의 무분별한 착취가 그리스도교 문화와 교리에 있다고 말하며 이 책임을 넘기려는 동향도 보인다. 그 이유는 창세기에 등장하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자연지배 명령이 자연 착취와 억압을 정당화하는 논거로 작용되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망 안에서 1장은 교회의 기본이 되는 두 계시, 성경과 성전을 분석한다. 고전적이고 단편적인 전망 안에서 자연의 지배 명령은 타당할 수 없으며 가톨릭 교리서의 표현처럼 '인간이 자연을 다스림'으로 인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상호 보완적인 관계 회복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다. 피조물 사이의 위계 개념은 존재하면서 이것이 힘의 논리가 아니라 각자 창조된 그 위치의 역할을 강조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2장은 1장의 논증을 교황들의 문헌으로 알아본다. 바오로 6세는 선진국이라 불리는 나라가 발생 시키는 오염에 대해 후대 인류를 위한 지속 가능한 개발을 언급한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생태계 회복의 이유를 우주 만물이 하느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이라 말하며 공동선의 가치 실현을 위해 하느님과 세계, 인간 사이의 새로운 연대를 주장한다. 베네딕토 16세는 자연을 하느님의 작품으로 소개하며 인간은 이 작품을 돌보며 관리하는 존재로 소개한다. 이를 고려하지 않는 생태계의 훼손은 하느님의 소명을 저버리는 행위로 규정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통합 생태론을 주장하며 환경 파괴의 원인을 인간의 복합적인 문제와 연관이 있음을 밝혀낸다. 자연 환경을 넘어 사회의 억압과 착취구조를 분석하였으며 관계회복을 위한 회개, 회심을 촉구한다. 3장은 통합 생태론의 구체적인 실현 방법으로 생태 여성 신학을 조명한다. 이 장에서는 생태 여성 신학의 접근을 위해 생태학을 살펴보고, 에코 페미니즘 신학으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고찰한다. 특히 로즈마리 류터라는 생태 여성 신학자르 선정하여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 회복의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한다. 4장은 이 장에서는 로즈마리 류터의 신학을 집중 조명하며 다른 신학자들과의 차별성, 그리고 생태 위기 특별히 생태적 관계 회복을 위해 끌어낼 수 있는 신학적 사상을 검증한다. 특히 그가 주장한 가이아 이론은 온 자연 사물과 통교하시고 지구에 살아있는 생명력을 부여하여 역동적인 관계를 맺으시는 하느님으로 나아가게 하는 모델로써 지구 안에서 인간의 위치를 생각하게 하고 지구와 인간을 연결하게 한다. 위와 같은 연구 결과로 생태계의 창조 질서 회복을 위해 사회 전반에 일어나는 차별과 착취에 대해 저항하고 공동의 집에서 살아가는 인간 모두가 참여해야한다는 사실을 이끌어낸다. 하느님의 피조물들이 형제이고 누이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부여된 지배 명령은 그들을 잘 다스리는 것, 돌보는 것으로 전환되게 되는 것이다. 또한 교도권의 문헌과 류터의 제언에서도 등장하듯이 이 전환, 회개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모두가 노력할 때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올바르게 세우게 된다는 희망의 메시지 또한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의미와 성과를 평가하며 본 고가 생태계 파괴는 내 가족, 나의 혈육이 파괴되고 있다는 의식을 갖게 해줌으로써 생태계가 인간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지금 바로 행동하고 회개하여 이 공동의 집을 지켜나가야 한다는 실존적인 연구라 말할 수 있겠다.

      • 여성-교회론 연구 : 로즈마리 R. 류터와 엘리자베스 S. 피오렌자를 중심으로

        서옥희 한신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2003 국내석사

        RANK : 232255

        누구나 여성해방론자가 되면 될수록 교회에 나가는 일은 더욱 어렵게만 된다고 한다. 위계질서적이고 남성중심적 교회 구조와 성직의 특성이 성 평등 사회를 지향하는 현대의 성도들에게는 갈등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2003년 월 한 목사의 설교는 이러한 교회의 성차별 문제의 심각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다. 현재 교회의 수많은 성차별 문제와 구조의 남성우월적 위계질서는 교회론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필요로 한다. 교회를 인간 구원(해방)을 위해 헌신하는 공동체로 이해할 때, 여성신학의 교회론은 미래의 교회에 대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여성신학의 교회론의 실천인 여성-교회 운동과 이에 대한 신학 이론화 작업이 중요한 것은 현재 교회의 상황에 대한 비판적 평가에 있다. 종교개혁, 계몽주의, 가톨릭의 제2차 바티칸공의회, 1968년 WCC의 하나님의 선교신학, 해방신학은 모두 그리스도교의 개혁적인 해방 지향의 성격을 지향하는 노력들에 일환이었지만 21세기인 현재까지 계속되는 교회의 문제들은 온전한 평등과 해방의 실천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선교 도구로 사용되는 교회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건강한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위해 그리스도교 교회의 새로운 전망은 교회와 신학에서 여성-교회가 필수적이고 완성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여성신학의 교회론으로 제시된다. 피터 C. 핫즈슨은 대표적인 여성신학자들인 피오렌자, 류터의 연구에 의존하여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평등주의와 포괄적 특성의 발견, 여성 교회 운동의 출현을 포함한 교회 지도자 직분에서의 여성의 역할 변화, 언어 혁명이라는 세 요소가 새로운 유형의 교회 신학에 의미 있는 기여를 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로즈마리 R. 류터와 엘리자베스 S. 피오렌자는 모두 여성해방을 위한 에클레시아의 실천에 근본적으로 같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피오렌자의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 재구성은 역시 교회 지도자 직분을 여성과의 관련성을 탐구해 낸 것이고, 류터의 교회사 연구 또한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발견된 평등주의와 포괄주의의 발견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교회를 위한 전망은 세 가지 요소 모두 성서에서 그 해방적 요소를 찾아내어 새로운 전망으로 삼는데 여성-교회 운동이 이 세가지 요소를 모두 포함하는 중요한 교회론의 주제가 된다. 이것이 본 논문의 논지인 새로운 교회를 위한 교회론으로써 여성-교회론 논의를 시작하게 된 주요 동기이다. 이러한 여성해방론의 교회론의 중요성을 바탕으로, 본 논문은 대표적인 두 여성신학자 로즈마리 R. 류터와 엘리자베스 S. 피오렌자의 교회론을 통해 여성신학의 교회론이 갖는 핵심 주제를 이끌어 낼 것이다. 이를 통하여 이들의 여성-교회론의 입장이 왜 중요하며, 어떻게 다르며, 또한 두 학자의 여성-교회론이 서로 어떤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가 등등을 제시할 것이다. 본 논문은 여성-교회론에 관한 전체적 전망을 위한 논문으로써 가치를 갖는다. 가톨릭 전통에 서 있는 본 논문의 연구 대상인 두 여성신학자를 선택한 동기는 여성신학의 에큐메니칼적 특성에 있다. 즉, 여성-교회 운동의 시발점이 가톨릭의 안수 문제로부터 나왔지만 여성신학이 갖는 독특성은 교파를 초월하여 갖는 공통된 문제를 갖고 있다. 한스 큉은 자신의 저서 『그리스도교』 에서 역사상 교회 제도들을 조망하고 있는데,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칼빈의 장로제적, 협의제적 교회 제도가 비교적 민주주의에 공헌했음을 설명하는 중에 교회 제도들을 그림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1천년 기의 교회들의 공동체와 11세기 로마 가톨릭 교황 교회, 16세기부터의 루터파 공권력 교회, 그리고 16세기부터의 개혁파 공동체 교회 제도들이다. 그런데 여기서 요약하고 있는 네 가지 교회 제도들은 모두 피라밋 형태의 질서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또한 로즈마리 류터에 의하면 조합 교회적인 프로테스탄트 교회 안에는 비록 교회에 대한 여성해방적 이해를 전개시키려는 성직자와 혹은 그 일이 수반하게 될 교회 갱신으로부터 오는 위험성을 떠맡을 수 있는 성직자가 거의 없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개신교회의 여성 목회자들이 있지만 그들 자신이 전통적인 제도 교회의 현상 유지나 교인들의 저항으로 적극적으로 변혁을 시도하지도 못하고 있는 형편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피오렌자도 자유주의 개신교 기관에서 활동하면서 그곳에도 가부장적 차별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으며, 오히려 여자들을 노골적으로 혐오하는 태도가 자유주의 형태를 띠는 그것보다 차라리 맞서 싸우기 쉽다는 사실을 동감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신학의 교회론의 문제는 교파를 초월하는 모든 그리스도교의 문제이며 나가서는 성서 종교 전체의 문제이다. 교황 교회 제도가 이단적이라면 개신교의 목회자 중심주의 또한 복음과 반대되는 개인 우상에 떨어질 위험에 직면한다. 최근에 개신교 측에서도 WCC에서 실행하는 Being Church 프로그램을 통해 교회에 대한 새로운 시도들을 하고 있다.

      • 로즈마리 류터의 인간이해

        윤지혜 협성대학교 신학대학원 2007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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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서는 그 당시의 문화, 정치, 사회를 반영한다. 그리고 21세기의 시점에서 우리는 그 시대를 다시금 해석한다. 그래서 우리는 성서의 시대가 남성 유일신적인 세계관을 토대로 가부장제의 옷을 입고 있었던 사회임을 밝혀냈다. 남성 중심적인 구조를 가지고 성서의 배경이 되었던 시대. 그리고 그 성서의 영향을 받았던 서구 국가들의 모습. 우리는 그 속에서 인간이 생태계를 파괴했다는 현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상황이 합리화가 되어 버린 가슴 쓰라린 역사를 경험한다. 무엇보다도 이 연구에서는 '인간'의 위치를 다루고 있는데, 인간의 위치는 다른 피조물들과는 분명 구별되어지는 자리에 있다. 무엇보다도 그 이유를 하나님과의 관계성으로 설명되어 지는 하나님의 형상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은 '상징(symbol)'을 만들어 내는 존재라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인간만이 상징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때로 인간의 상징 언어는 설명되어지는 다른 것을 제한하기도 한다. 이러한 제한 속에서 상징은 가장 간결하고도 가장 정확한 인간의 언어가 되어 사물이나 상황을 재정립해준다. 그동안 인간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명확한 상징 속에 남성 혹은 여성이라는 역할을 철저하게 구별하면서 각 성에 대하여 획일적인 제지를 가했다. 그리고 각 성에 대한 역할을 부여 했다. 또한 동일한 방법으로 인간 혹은 자연이라는 차이에 대해서도 그 역할을 뚜렷이 구별함으로 지배와 예속이라는 역할을 부여 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인간의 상징체계는 남성과 인간 중심이라는 위계질서로 정립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처음 창조에서 자연 세계를 만들었다. 처음에 하나님이 지은 세계는 아름답고 선한 상태였음을 창세기를 통해서 짐작해 볼 수 있다. 하나님은 거듭하여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향하여 보기 "좋았다"라고 감탄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완전한 세계 속에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 인간을 창조하였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은 하나님이 세계를 선하게 창조한 의도에 부합하여 하나님이 맡겨 준 세계를 선하게 치리해야 하는 책임이 있는 존재이다. 하지만 인간의 자유 의지는 창조설화에서는 죄를 짓는 급한 발이 되었으며, 도시 문명의 시작에서는 남성 우월주의의 가부장제라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기독교의 경전인 성서는 최초의 여성 하와가 죄를 범하여 인류 전체가 타락한 존재, 하나님과 분리된 존재가 되게 하였다는 주장을 뒷받침 해주는 역할을 해왔다. 그리스의 신화에서도 여성으로 인해 인간의 고통이 시작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성서에서는 여성의 죄를 창조 설화 부분에 실어 넣음으로서 그 의미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신약성서에서는 그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대속되었음 명확히 보여주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여성은 인간 세상에 죄를 이끌어 들인 존재로, 하등한 존재로 파악되고 그로 인해 지금까지도 차별 받고 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에는, 연좌제라는 법이 있었다. 연좌제는 한 사람의 죄에 대하여 특정범위의 사람이 연대책임을 지고 처벌되는 제도였다. 처벌 대상은 대부분 가족이었다. 그러나 이 처벌법에는 개인의 인권이 존중되지 않는 다는 이유로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에 이 연좌제 제도를 공식적으로 폐지하였다. 이 규정은 현행 헌법 제13조 3항에 그대로 이어져 있다. "모든 국민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라고 말이다. 과거에는 중요성의 초점이 여성을 감추고 남성을 드러내었던 '가문'이었다면 시대가 발전하면서 오늘날에는 그 초점이 남성과 여성 모두를 포함한 '개인'으로 옮겨져 왔다. 그러나 21세기 현재에도 여성에게는 하와의 죄가 연좌제와 같이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아직도 여성을 죄인으로 옭아매려는 합리화가 기독교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기독교는 여성을 이해함에 있어서는 아직도 고대 혹은 중세에 머물러 있다. 로즈마리 류터는 생태학적 여성 신학적 관점에서 인간을 '가문', 혹은 '개인'을 넘어서서 '공동체'로 이해한다. 이 공동체 안에는 남성과 여성이 포함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이 지구의 생명체 까지도 함께 묶는다. 이 점에서 유의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의 개체 개체가 존중되는 가운데에 공동체가 이루어 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개체들은 상호연관 되어지는 하나의 유기체이다. 류터의 의하면 이 유기체들은 자연스럽게 호흡하고, 질서 지워져야 하며, 이 관계 안에서는 가부장적 위계질서와 군사적 통치는 존재해서는 안 된다. 만약 위계질서나 통치, 통제의 영역이 생긴다면 그것은 파괴를 이끌어 내는 것이 될 것이고, 그것은 '죄'라고 말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를 토대로 하여 류터가 만약 하나님을 어떤 성(性)에 입각하여 설명해야 한다면 차라리 하나님을 생명을 품고 키워 냈던 여성의 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이해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류터는 하나님을 이 지구와 대지를 품고 있는 '가이아'에 비유한다. 고대의 사상에서는 여성을 하등한 존재로, 그 여성으로 비유된 자연을 하등한 영역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21세기에 새로운 고찰을 한다. 여성의 성도 하나님에게서 나온 고귀한 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연에 대해서도 새로운 고찰을 한다. 인간이 자연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존재인 것처럼 자연 또한 인간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연 또한 하나님의 선한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그리고 우리가 자처하는 기독교인으로서 마땅히 그 인간의 본분을 다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지은 모든 세계와 인간 사이에 샬롬의 평화를 구축하는 것이다. 인간 중심 중의에서 모든 피조물이 중심이 되는 그 평화를 실현시킴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중재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 정신분석학과 에코페미니즘 신학을 통한 기독교 구원론의 재구성 : 라캉의 삼원구조와 류터의 지구 치유를 중심으로

        강민석 연세대학교 대학원 2016 국내석사

        RANK : 232237

        Christian doctrine ought to be worked in a specific and practical area. It applies for Soteriology as well. The understanding of salvation should be presented in the field of life. Therefore, christian soteriology is better constructed by the praxis theory. To prove the fact, this article makes an attempt at interdisciplinary approach between psychoanalysis and ecofeminist theology, because these two studies consist of praxis theory. This article especially emphasizes Jacques Lacan's Tripartite Theory and Rosemary R. Ruether's Earth Healing. While Tripartite Theory is used as the hermeneutics tool, the Earth Healing constructs the contents of soteriology. It is the combination of paradoxical comprehensive and dialectical comprehensive. Ruether thought salvation is not acquired after death, but in specific time during human life. According to her, the purpose of soteriology is to overcome the discrimination and repression, and make community of earth recover mutuality. This is possible thanks to the presence of The God that is both transcendent and inherent. It is dialectically comprehensive. Ruether's description can be elaborated by Lacan's Tripartite Theory. Lacan suggests the structure of three orders, imaginary-symbolic-real, to interpret the human psychology and the world. The imaginary related to ego is the scope of fantasy and pleasure, but causes a misunderstanding. The symbolic is realm of actualities, such as language, law, system, and so on. Human being is constitutionally restricted in this order, but must stay in it. The real is both fundamental and menace of the symbolic, and the outside which human can't encounter as well as the inside that always irrupt into the symbolic. This mystic order present the principle of existence. Tripartite interaction is the principle of interpret which is paradoxically comprehensive. In conclusion, this article asserts that salvation should be understood by the dynamics. Salvation is the one that overcomes the patriarchal property, which changes from self-centeredness to relativeness, which pursuits the relative appropriateness, and which is experienced in the participation in consideration for others. The meaning of church and Jesus needs to be re-understood on this Soteriology. It is not until church is rescued that church rescue the world. It means church needs to be rescued. Jesus's life and death is not the thing that church looked on. Church can't be rescued in the armchair. As Jesus have asked his disciples to follow him, the christian faith ought to follow Jesus’ say. 모든 기독교 교리는 특정하고 구체적인 영역에서 작동해야 한다. 구원론 또한 마찬가지다. 구원에 대한 기독교의 이해는 현실적인 삶의 현장 속에서 제시되어야 한다. 따라서 기독교의 구원은 프락시스 이론으로 구성되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이다. 프락시스적인 구원론을 제시하기 위해, 본 연구는 정신분석학과 에코페미니즘 신학의 간학문적 연구를 시도한다. 이 두 학문은 프락시스를 기반에 두는 학문들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본 연구는 자크 라캉(Jacques Lacan)의 삼원구조와 로즈마리 류터(Rosemary R. Ruether)의 지구 치유를 중점에 두었다. 삼원구조를 해석학적 틀로 지구치유를 재조명 해본 것이다. 이러한 간학문적 연구는 변증법적 종합을 통해 구성된 구원론을 역설적 종합의 방법론으로 정밀하게 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류터는 구원이 죽음 이후에 획득되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현장 속에서부터 이뤄지는 것으로 본다. 류터에 의하면 차별과 억압을 극복하고, 상호관계성을 회복한 지구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이야말로 기독교 구원론의 핵심이다. 이러한 구원은 초월성과 내재성이 변증법적으로 종합되는 하나님의 현존을 통하여 가능하다. 라캉의 삼원구조는 이 구원론을 정교하게 함으로써 추가적인 타당성을 제공한다. 라캉은 인간 내면과 세계를 해석할 수 있는 틀로 3가지의 질서, 곧 상상계-상징계-실재계를 제안했다. 상상계는 환상의 영역이며, 본능적인 쾌락을 얻는 영역이지만, 근본적으로 오해의 영역이다. 상징계는 언어, 법, 제도 등과 같은 질서의 영역이다. 이 영역은 인간이 현실이라고 느끼는 영역이며 인간을 제한하는 영역이지만, 동시에 반드시 거주해야만 하는 영역이다. 실재계는 상징계의 토대이면서도 상징계의 균열인 영역, 상징계에서 조우될 수 없는 외부면서도 상징계에 항상 침입해 들어와 있는 내부인 영역이다. 이 신비한 영역은 탈존의 원리가 된다. 이 3가지의 질서, 상상계-상징계-실재계의 작용은 역설적 종합을 제시할 수 있는 해석학적 틀이 된다. 결론적으로, 이 둘의 연계를 통하여 본 연구는 가부장적 이원론을 극복하는 것, 자기중심성을 상호 관계성으로 바꾸는 것, 상대적 적절성을 추구하는 것, 그리고 타자의 고통에 참여하는 가운데 경험되는 것을 구원으로 제시한다. 또한 이러한 구원론의 토대에서 교회와 예수에 대한 의미가 전달돼야 한다고 본다. 세상을 구원하기 전에 먼저 교회가 구원을 받아야 하며, 예수의 삶과 죽음에 대한 교회의 이해 및 태도는 관조적인 것이 아닌 참여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본 연구의 제안이다.

      • 해방적 구원에 대한 생태문화적 접근 : 서남동과 로즈마리 류터 비교연구

        박정우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2015 국내석사

        RANK : 232219

        본 논문은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 확장 속의 한국 그리스도교와 신학에서 출발한다. 한국 그리스도교는 허위의식의 물화적 구원을 바탕으로 신자유주의 지배구조의 정당화와 확산의 도구로 기능하고 있다. 한국 그리스도교가 추구하는 물화적 구원은 상품형식으로 대상을 왜곡하고, 도구적 관심에 기초하여 자기 이익의 실현을 위해 대상을 지배착취하도록 조장한다. 그리고 한국 그리스도교는 물화적 구원을 통해 실현되는 주체의 이기적 욕망을 그리스도교 신앙의 종교적 구원으로 상정한다. 한국 그리스도교 번영신학의 물신주의적 구원관은 이러한 물화적 구원이 기능하는 구체적인 예이다. 한국 그리스도교 신학은 이를 옹호하는 지적 도구로 기능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 그리스도교와 신학의 물화적 구원은 ‘죄’이자, 그리스도교의 왜곡이다. 물화적 구원은 만물의 상호의존성을 파괴하며, 초월의 하나님을 욕망의 실현도구로 전락시킨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욕망 실현의 안내자로 취급하며, 그리스도교의 구원을 신앙주체의 이기적 욕망의 최종적 실현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이유에서한국 그리스도교와 신학은 경건과 순종의 이름으로 허위의 물화를 확산하는 죄적 도구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죄적 도구로 전락한 한국 그리스도교와 신학은 철저한 반성적 성찰의 입장에서 자신의 모순을 인식하고, 모순을 수정해야만 한다. 성찰과 재구성의 근간은 왜곡된 관계 양상을 그리스도교의 신앙으로 둔갑시킨 물화적 구원의 해체이다. 물화적 구원의 해체는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교 신학의 구원이 해방적 구원임을 드러낸다. 죄인 물화의 구조 하에서 구원은 허위의식의 물화로부터의 해방이며, 피지배의 고통을 받는 존재의 구원은 해방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을 토대로 본 논문은 한국 그리스도교와 신학에 시급하게 요청되는 해방적 구원을 모색한다. 먼저, 본 논문은 해방적 구원을 인식의 변증법적 방법론, 실천으로서의 윤리, 궁극적 희망이자 실현을 의미하는 종말론으로 구성한다. 변증법적 방법은 왜곡된 그리스도교와 신학의 구원 이해로부터 탈피하는 신학의 방법이다. 변증법적 방법은 왜곡과 모순의 구원 이해와 사회 비판의 방법이다. 실천의 윤리는 해방적 구원이 단순히 지적 담론의 차원에서 전개되는 상아탑만의 진리가 아니라 철저한 실천에 의해서만 실현되는 윤리적 과제라는 점을 지시한다. 그러기에 해방적 구원의 윤리는 구체적 역사의 조건에서 실천을 통해 구원을 실현시키는 방법이다. 끝으로, 종말론은 해방적 구원의 궁극적 목적이자 이끌어 가는 원동력이다. 지배와 허위의 물화에선 불가능으로 간주되는 해방적 구원이 가능성의 희망으로 실현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방적 구원의 구성작업을 토대로 본 논문은 서남동의 민중신학과 로즈마리 류터의 생태여성신학의 구원이해를 비교연구하며 해방적 구원을 구체화한다. 민중신학의 민중 해방적 구원과 생태여성신학의 생태여성 해방적 구원은 허위의식의 물화를 옹호하고, 확산시키는 한국 그리스도교와 신학에 요청되는 대안의 구원론이다. 그러기에 본 논문은 두 해방적 구원을 인식의 변증법적 방법론, 실천의 윤리, 궁극적 희망이자 실현을 의미하는 종말론으로 구성하여 이해를 구체화한다. 동시에 본 논문은 두 해방적 구원이 차이점과 공통점을 살피며, 두 해방적 구원의 종합적 이해를 추구한다. 이러한 두 해방적 구원의 비교 및 종합 연구를 통하여 본 논문은 오늘날 한국 그리스도교와 신학이 추구해야 할 해방적 구원으로 생태문화 해방적 구원을 제시한다. 구체적으로, 생태문화 해방적 구원의 구상을 통해 병폐적 구원을 토대로 허위의식의 물화에 편승하고, 이를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한국 그리스도교와 신학이 다시금 상호의존성을 회복하고, 이를 통한 물화 극복의 가능성을 살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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