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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종교(中國宗敎)의 새로운 범주화(範疇化) ― 1960년대 이후 구미(歐美)학계의 중국민간신앙(中國民間信仰)에 대한 새로운 인식 ―

        김한신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2014 東洋學 Vol.55 No.-

        Until quite recently, the Chinese popular religions had been treated as just a superstitious beliefs that did not have any clear belief system nor ethical implications. Unlike the institutional religions such as Buddhism, Daoism, and Confucianism, the diffused religions like the popular religions have no religious scriptures and no priest. Moreover, the institutional religions like Buddhism and Daoism did not have dominant influence on the Chinese people's daily lifes, and the Confucianism had just weaker religious features than the others. Therefore, in early 20th century, not only Western scholars but also western oriented Chinese scholars were convinced that Chinese people are nonreligious and have interest only in secular matters of worldly life. Since the 1960s, however, a series of Western Scholars have presented fresh perspectives on the Chinese popular religions. First of all, the Western anthropologists argue that the system of spiritual beings in the popular religions was exactly equivalent to the social position class in the local society. From the sociological perspective, a celebrated scholar, C. K. Yang categorized the Chinese religions into two very different types: the "diffused religions" and the "institutional ones". And then, he demonstrated that in particular, the fist ones were closely connected with the substrate structure of the Chinese society. Contrary to the anthropologists' and the sociologists' studies on the modern Chinese popular religions, which considered them as unchanged custom, the Western Historians traced how the Chinese popular religions have experienced radical transformation since the ancient period. In particular, they emphasized the significance of the Song period (960~1279) as a watershed of the history of Chiense popular religions. Although the Yang's dichotomy helped us to understand the belief system of the Chinese popular religions, in addition, his theory used to ignore the interplay between the popular religions and the institutional religions. Recent scholarship on the popular religions has unearthed that there have been vigorous and continuous interplay between the two types of beliefs. Consequently, due to the Western scholars' researches, the Chinese popular religions became to be categorized as one of the most significant religions in Chinese history. 이 글은 기존에 미신으로만 취급되던 중국 민간신앙이 1960년대 이후 서구학계에서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던 과정에 대해 설명한다. 그들의 연구를 통해 중국 민간신앙은 불교·도교·유교와 같은 제도종교에 비해서 중국의 기층사회구조와 더욱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이 밝혀졌고, 특히 그 의례행위를 통해서 향촌 사회 구성원들의 지역적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중국 민간신앙의 현재적 모습에만 초점을 맞춘 접근방식은 그 사회적 기능에 대해서는 비교적 명확한 해답을 찾을 수 있었지만, 자칫 중국 민간신앙이 원시적 형태에서 변화 없이 유지되어 왔을 것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갖게 할 위험이 있었다. 반면에 중국 민간신앙의 역사적 변천과정에 관한 역사학자들의 연구들은 특히 송대를 전후한 시기에 급격한 변화가 발생한다는 점을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송대에 발생한 사회경제적 상황의 변화와 더불어 민간신앙과 제도종교 사이의 상호작용은 민간신앙의 모습을 급격하게 바꾸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제도종교 또한 이로부터 중대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 중국학의 다른 분야에 비해서 중국 민간신앙에 대한 구미 학계의 공헌은 훨씬 더 절대적인 것이었다. 구미 학계의 다양한 방식의 연구들은 중국 민간신앙을 단순한 미신적 믿음에서 중국 종교의 중요한 범주로 바꾸어 놓았다. 따라서 서구학계의 주요 연구 성과들을 되짚어 보는 것은 중국 민간신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KCI등재

        중국 역사학계의 새로운 해석에 대한 비판적 검토

        우성민 진단학회 2012 진단학보 Vol.- No.116

        당대는 정치, 경제, 문화, 모두 종합적으로 발달하여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세계가 성립되었다. 唐이 세계제국으로 불리는 것은 단지 한민족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적 세계제국을 형성하였기 때문이다. 당전기에는 당과 우호적으로 왕래한 국가가 70여개 국 이상이었고, 당시 상인, 유학생, 승려 등 많은 외국인이 당대의 수도 장안으로 들어와 거주했으며, 鴻臚寺와 같이 외교사무를 담당하는 기구에서는 외국사절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당대의 주변국에 대한 개방과 포용을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 중국은 21세기 세계의 최강국으로 도약한다는 야심을 갖고 중국 역사상 최고의 부국강병을 보여줬던 ‘盛唐시대’를 재현하겠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중국은 제국의 패권을 암시하는 盛唐만을 강조하고, 盛唐에 명실상부하는 세계제국의 ‘융합과 포용’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 국제사회의 일반적인 지적이다. 본고는 부상하는 중국에 대해 세계가 주목하고 국내외 학계에서까지 중국위협론을 제기하는 것을 보면, 중국이 무리한 방법으로 동아시아 질서를 재편하는 것은 아닌지를 재검토하고자 하였다. 개혁개방 이후 경제 발전은 중국 고고학의 발전에 큰 원동력이 되었고, 중국의 다양한 지역에서발굴된 고고학 성과는 중국 역사학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즉 경제 성장의 과실을 누리기 시작하며 되찾은 중국의 자신감과 이에 따른 신중화민족주의의 대두가 대형 학술 프로젝트를 이끌게 되었다. 이러한 대형 학술 프로젝트의 첫 시작이 된 것이 하상주단대공정이고. 이 공정이 성공적으로 완료된 뒤 이어서 동북공정과 중화문명탐원공정이 추진되었다. 하상주 단대공정에서는 서주 공화 원년 이전 시기의 각 왕과 상대 후기 무정 이하 각 왕에 대한 비교적 정확한 연대와 상대 전기에 대한 상세한 연대의 지표를 만들고, 하대의 기본적인 연대의 틀을 제출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중화문명 탐원공정에서는 1000년을 더 소급하여 기원전 3500년으로 확대하였고, 연구대상 지역도 동북지방 요하유역까지 확대하였다. 2011년 8월 중국 정부는 요녕성 조양시 牛河梁 유적지를 곧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는데 이에 대해 중국학계는 우하량 유적을 중국 5,000년 문명사의 상징으로, 동아시아와 전세계를 대표하는 문화로 소개하고 있다. 문제는 이와 같은 ‘역사공정’이 중국 국내에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하량 유적 흥산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요하문명론’의 대표적인 비파동검 등은 고조선의 배경문화로 만주와 한반도를 범위로 한 한민족의 문명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이른바 ‘역사공정’은 시간적 확장뿐만아니라, 중국역사의 공간적 확장을 포함하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장성의 확장이다. 중국역사의 시간적 공간적 확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공정으로 만리장성의 확장이 있다. 2009년에 중국은 이미 만리장성의 동단을 확장하는 주장을 두차례 발표하였다. 만리장성의 동쪽 시작점으로 국내학계에서는 고구려 박작성으로 추정하는 압록강 변의 虎山山城으로 확정하고 있는 것이다. 2012년 장성에는 지린성과 헤이룽장성에 있는 고구려산성과 발해유적이 포함된다. 즉 장성 자체의 성벽, 참호, 보루같은 시설물 등 유산 43,721곳을 모두 합해 장성의 총길이가 2만1196.8㎞로 늘어났음을 발표하였다....

      • KCI등재

        중국 학계의 발해사 연구 동인과 최근 연구 경향 -웨이궈중의 『발해사』를 중심으로

        권은주 한국고대학회 2022 先史와 古代 Vol.- No.70

        The Korea-China history debate, represented by China's "Northeast Project" was sparked by Chinese academia's formalization of discussions to incorporate ancient Korean Northern History into Chinese history, led by Goguryeo history, which was considered a historical "prohibited zone (禁區)". However, the basic description of Balhae Temple in Chinese academia did not change much before and after the 'Northeast Project'. The study of Balhae history in modern China was conducted with the establishment of Northeast History as a means of overcoming the crisis of the frontier in the face of escalating crisis in the Northeast due to the invasion of imperialist powers. Modern China established Balhae as a "local regime of the Tang established by China's ancient minority, Malgal", and established a unified genealogy theory leading to Sukshin - Eupru - Mulgil - Malgal(Balhae) - Yeojin - Manchu(Cheong). The representative researcher at this time was Jin Yu-Fu(⾦毓黻).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in 1949, the appearance of claiming Balhae Temple as Chinese history has subsided. However, after the end of the Cultural Revolution, it was known that North Korea's Park Si-Hyung and Joo Young-Heon claimed Balhae as Korean history as representatives and emphasized it as a country that succeeded Goguryeo, stimulating China's research on Balhae history. Accordingly, from the late 1970s to the 1980s, research on the history of Balhae in China mainly dealt with problems such as the ethnicity, origin, subject ethnic group, and historical attribution of Balhae. And after the establishment of diplomatic relations between Korea and China in 1992, research on the history of Balhae in South Korea stimulated China again. Since then, research on Balhae history in China has grown significantly through the 'northeast process'. For about 40 years since the 1980s, Wei Guo-Zhong(魏國忠) is the one who can represent the study of Balhae history in China. The recent "The history of Balhae(渤海史)" shows not only the perception and issues of Balhae History in Wei Guo-Zhong, but also what the Chinese academic community intends to do through Balhae History research. The conclusion is that it is part of Chinese history that is not related to Korean history, and based on “The unified multi-ethnic Nation theory“, it is not an independent country, but a local government of the party like the "special zone(特區)" today. In addition, while maintaining the perception of Chinese academia in the past three years, Chinese academic research has been undergoing a new transition in conjunction with China's excellent traditional culture, historical policies, and research support in the second period of Xi Jin-Ping's rule. In particular, the Chinese government's policy considerations and academic support at the central and local levels are feared to deepen the gap in research on Balhae history between China and Korea. In this situation, it is necessary to study Balhae history from the perspective of East Asian history beyond ‘a national history’ in order to promote the research on Balhae history in Korea. In addition, it is necessary to deepen academic exchanges with North Korea and Russia, wherethe remains of Balhae arelocated, and to establish a stable support system for emerging researchers.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대표되는 한중 역사 논쟁은 중국 학계가 역사적 ‘禁區’로 여겨지던고구려사를 필두로 한국 고대 북방사를 중국사로 편입하려는 논의를 공식화하면서 촉발되었다. 그러나 발해사에 대한 중국 학계의 기본 서술은 ‘동북공정’을 전후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근대 중국의 발해사 연구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으로 동북 변경 지역의 위기가 고조되는상황에서 변강의 위기를 극복하는 수단으로 동북사를 정립해 가는 가운데 진행되었다. 근대중국은 발해를 ‘중국의 고대 소수민족인 靺鞨이 주체가 되어 세운 唐의 지방 정권’이며, 숙신읍루-물길-말갈(발해)-여진-만주(청)으로 이어지는 일원적 계통론을 정립했다. 이시기 대표적인 연구자는 ⾦毓黻이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에는 유물사관과 북한과의 관계로 발해사를 중국사로 주장하는 모습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런데 문화대혁명이 종결된 이후 북한의 박시형과 주영헌을 대표로 발해를 한국사로,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로 강조한 것이 알려지며, 중국의발해사 연구를 자극하였다. 그 결과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까지 중국의 발해사 연구는발해의 족속, 내원, 주체민족 및 역사귀속 문제 등을 주요하게 다루었다. 그리고 1992년 한중수교 이후에는 남한의 발해사 연구가 또 중국을 자극하였다. 이후 ‘동북공정’을 거치며 중국의발해사 연구는 크게 성장하였다. 1980년대 이후 약 40년 동안 중국의 발해사 연구를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은 魏國忠이다. 최근 나온 『渤海史』는 웨이궈중의 발해사 인식과 쟁점뿐 아니라 중국 학계가 발해사 연구를 통해무엇을 의도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결론은 한국사와 관련이 없는 중국사의 일부이며, ‘통일적다민족국가론’에 입각하여 독립국이 아닌 오늘날 ‘特區’와 같은 당의 지방정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최근 3년간 중국 학계의 발해사 연구는 기존 중국 학계의 인식을 견지하면서도, 시진핑 집권 제2기를 맞아 중국의 우수전통문화와 역사 정책 및 연구지원과 맞물려 새로운전환을 겪고 있다. 특히 중국 정부의 정책적 고려와 중앙과 지방 차원의 학술적 지원은 중국과한국의 발해사 연구 격차를 심화시킬 것으로 우려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내 발해사 연구를진작시키기 위해서는 일국사를 넘어 동아시아사 시각에서 발해사를 연구할 필요가 있으며, 발해 유적이 있는 북한‧러시아와의 학술교류 심화, 신진연구자 육성을 위한 안정적인 지원시스템 등을 갖출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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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국제관계학계의 역사와 내부 논의에 관한 분석

        김상규 서강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2015 社會科學硏究 Vol.23 No.1

        현재 학계의 주류 이론으로 자리매김한 미국 중심의 국제관계학 이론은 두 차례 세계 전쟁을 겪은 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이 국제 사회에서 그 학문적 지위를 공고히 하는 시기와 새로운 국제 체제의 패권 국으로 자리매김하는 과정이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할 때, 중국 역시 현재의 국가 발전과 중국의 국제 관계학계의 발전이 상호 연결될 수 있다 할 것이다. 중국은 개혁 개방 이후 경제성장을 기반으로 가장 적극적인 국제 관계를 수립해 나가고 있는 국가이다. 이 때문에 군사 대국화, 신형 대국 관계, 민족 부흥 등 중국의 국력 증강에 따른 현실적, 가시적 국가 이익 추구의 결과가 주변국들에게 위협으로 인식되는 형국이다. 따라서 중국의 정책 변화는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피할 수 없는 이해관계의 충돌을 양산해 내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대외 국가 관계 속에 발생하는 자발적, 비자발적 문제에 대해 정부의 정책 이외에 학계는 어떤 스펙트럼을 통해 관찰하고 분석하는 이론적 논의를 이끌어내고 있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중국이 국제 사회로 진입하기 이전의 학문 영역과 그 이후는 분명 그 내용과 형식에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고 또한 학계의 발전과 신진 학자들의 유입은 분명 중국의 부상과 어우러져 더욱 다양한 학문적 업적을 축적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학문의 축적은 학계의 자신감을 불러왔을 것이며 그 자신감의 바탕 위에 중국이 추구하는 새로운 세계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고자 할 것이다. 이에 중국 국제관계학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학자들이 어떤 학문적 논의를 통해 중국 국제관계학의 토대를 만들고 있는지 고찰해 보고자 한다.

      • KCI등재

        중국 국제관계학계의 변화와 발전에 관한 연구:학술 논의와 정책연계를 중심으로

        김상규 한양대학교 아태지역연구센터 2022 중소연구 Vol.46 No.1

        This paper studies the theoretical discussion and academic development process within China's international relations academia based on China’s rise in national power. In particular, it analyzes how academic discussions in academia relate to government policy. To this end, a method of reviewing literature data, interviewing experts, and searching for subject words was conducted. As a result of the study, theoretical discussions based on traditional Chinese ideas are still the main research topic in the Chinese international relations academia, but there are different opinions among scholars on the formation of the Chinese school. Since the inauguration of the Xi jinping administration, more studies have been conducted to support the legitimacy and justification of the Chinese government’s policies than theoretical studies. However, China’s international relations community continues to make efforts to research theory and establish a Chinese school, such as securing new research topics and driving methodology. Therefore, Korea should expand exchanges with Chinese scholars, collect and analyze research results, and use them for academic development and effective policy response. 본 논문은 중국의 국력 상승에 기초한 중국 국제관계학계 내부의 이론 논의와 학계 발전과정을 연구한다. 특히, 학계의 학술 논의가 정부 정책과 어떤 연계성을 갖는지 천하체계와 인류운명공동체의 사례를 중심으로 분석한다. 이를 위해 문헌 자료 검토, 전문가 인터뷰, 주제어 검색의 방법을 실시하였다. 연구 결과, 중국 국제관계학계는 중국 전통 사상에 기초한 이론적 논의가 여전히 주요한 연구 주제이지만, 중국학파 형성에는 학자들 사이에 서로 다른 의견이 존재하고 있다. 또한, 시진핑 정부 들어서면서부터 이론 연구보다 중국 정부의 정책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뒷받침하는 연구가 더욱 많아지면서 연계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연구 주제의 확보와 방법론의 추동 등 중국 국제관계학계에서는 이론 연구와 중국학파 성립을 위한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은 중국의 학자들과 교류를 확대하고, 내부 논의와 연구 결과를 수집, 분석하여 학술 발전과 효과적인 정책 대응에 활용해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 KCI등재

        현대 중국의 사상 흐름에 대한 한국 철학계의 연구 동향 - ‘문화열’과 ‘중국학열’에 대한 연구 동향을 중심으로

        이철승(李哲承) 한국동양철학회 2006 동양철학 Vol.0 No.25

          1978년 ‘제11기 3중전회’를 기점으로 중국의 사상계는 ‘실천이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기준’이라는 관점 아래, 중국 사회를 전면적으로 개혁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실사구시’와 ‘사상해방’을 주장하며, 신‘백화제방’ㆍ‘백가쟁명’의 시대를 열었다. 경직된 사회 구조에서 벗어난 중국의 지식인들은 1980년대에 더욱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직면한 시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관점에서 이론을 펼쳤다. ‘문화열’이란 학계의 이러한 동향을 지칭한 말이다.<BR>  중국의 사상계는 또한 1989년의 이른바 ‘6ㆍ4 천안문 사태’를 경험한 후, 이 사건의 사상적 배경을 ‘문화열’ 때 확산된 서구의 부르주아 자유주의 사조의 만연으로 여기고, 중국의 정체성 회복과 새롭게 펼쳐지는 국제 질서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사상적 대안을 강구하는 과정에 ‘신중화사상’을 토대로 하는 ‘중국학열’을 조성시켰다.<BR>  오랫동안 중국의 현대 사상에 대한 연구보다 전통 사상에 대한 연구에 치중했던 한국의 철학계는 1990년대 초부터 시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유 체계의 확립을 철학의 중요한 역할로 여기는 일군의 학자들에 의해 중국 현대 철학이 지속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했다.<BR>  그들은 그동안 한국의 철학계가 중국 사상을 연구하면서 비실제적인 문제에 관심을 집중시킴으로 인해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면에 한계를 노정시킨 것으로 평가하고, 현대 중국의 사상을 심층적으로 탐구하여 중국에 대한 바른 이해와 합리적인 한중 관계의 정립에 이론적인 기여를 하고자 하였다.<BR>  필자는 이 글을 통해 ‘문화열’과 ‘중국학열’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 현대 사상의 연구 경향에 대한 한국철학계의 연구 동향을 소개하여, 균등하면서도 평화로운 한중 관계의 지속에 필요한 사상적 실마리를 제공하고자 한다.

      • KCI등재

        중국정치사상에 대한 중국 내 연구동향

        장현근(CHANG HYON-GEUN)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2004 한국동양정치사상사연구 Vol.3 No.1

        중국의 지적 전통의 주류는 인간중심의 사유를 중심에 놓고 문학/사학/철학이 일체화된 정치학 공부와 그 실천이었다. 현대 중국 내에서 중국정치사상에 대한 연구는 이와 같은 문사철 일체의 인문주의 전통과 맥을 같이 한 ‘계승’적 측면과 봉건적 전통의 타도를 주장하는 ‘단절’적 측면이 겹쳐져 있다. 근대 이전 자신들의 정치사상에 대한 중국내 학자들의 전반적인 입장은 왕권 강화를 통한 사회안정과 유가적 도의에 입각하여 전제왕권에 대한 회의와 반성을 교직해 가는 과정이었다. 오늘날 대만/홍콩에서의 중국정치사상연구는 오리엔탈리즘의 폐해가 일부 있긴 하지만 여전히 전통적 중국 인문주의의 틀 속에서 대체로 문사철 일체의 전통을 견지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대륙에서는 1920년대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하면서 전통정치사상을 유심론으로 일괄 매도하면서 역사의 동력을 생산력과 생산관계라는 기본입장만을 견지한 체 설명하는 경우가 많고, 역사유물론에 입각하여 정치를 경제의 산물로만 보는 등 정치사상사에서의 중국적 성취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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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학계의 한국독립운동사 연구동향과 전망(2016~2019)

        김태국(Jin, Tai Gou)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21 한국독립운동사연구 Vol.- No.73

        중국 내 한국학은 중국의 개혁개방 40여 년을 거치면서 급속하게 성장했다. 그 가운데 한국사는 점차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중국 학계는 한국독립운동사에 주목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중국과 한국이 연합하여 공동의 적이었던 일본 제국주의 등 열강의 침략에 맞섰기 때문이다. 둘째는 중국과 한국의 연합 항일 투쟁사는 한반도를 둘러싼 현재와 미래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2016년부터 2019년까지 중국 학계의 한국독립운동사 연구는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한국 독립운동가, 중국과 한국의 군사협력, 중국 미디어에 비친 한국 독립운동, 중국 공산당과 한국 독립운동의 관계, 중국 동북지역의 한국 독립운동 등 다양하다. 이러한 중국 학자들의 연구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중국의 지지와 성원으로 한국독립운동이 가능했다는 점이 많이 강조되었다. 둘째, 그들은 양국의 공동 항일의 당위성을 발견하는데 주력하였다. 셋째, 그들은 한국독립운동의 최종 목표인 자주독립에 대한 중국의 견해와 승인을 부각하고자 했다. 중국 학자들이 연구 논문에 중국 측의 입장과 관점을 많이 반영하고자 한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다만, 다음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양국 공동항일전선에서 한국독립운동의 역할과 위상을 좀 더 객관적이고 긍정적인 측면에서 평가해야 한다. 둘째, 양국 공동항일전선 구축에 따른 대외적인 상징성과 효과에 대한 적극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셋째, 한국독립운동 세력이 중국인들에게 내비친 항일 이미지를 재조명해야 할 것이다. Korean studies in China grew rapidly over 40 years of reform and opening up in China. Among them, the proportion of Korean history is gradually increasing. In particular, Chinese academia is paying attention to the history of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and the reasons can be summarized in two ways. At first, it was in line with the invasion of the great powers such as Japanese imperialism, which was a joint enemy of China and Korea. Second, the history of the combined anti-Japanese struggle between China and Korea has important present and future implications for the Korean Peninsula. From 2016 to 2019, Studies of the history of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in Chinese academia diverse such as the 3·1 movement and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Korean independence activists, military cooperation between China and Korea,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in the Chinese media,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Chinese Communist Party and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and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developed in the northeastern region of China. The study of these Chinese scholars has several characteristics. First, it was emphasized that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was possible with the support and support of China. Second, they focused on discovering the justification for a joint protest between the two countries. Third, they tried to highlight China’s view and approval of independent independence, the final goal of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It may be natural that Chinese scholars have tried to reflect the Chinese side’s position and perspective in their research papers. However, I would like to point out some of the following problems. First, the role and status of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must be evaluated in a more objective and positive way on the joint anti-Japanese front of both countries. Second, it is necessary to actively review the external symbolism and effects of the establishment of a joint anti-Japanese front between the two countries. Third, the anti-Japanese image that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has shown to the Chinese must be religh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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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학보』 전근대 중국사논문 서평: 한국학계 중국사 연구 60년사 – 연구 영역의 확대와 주제의 심화

        김선민 한국중국학회 2022 중국학보 Vol.100 No.-

        본 서평은 1963년부터 2021년까지 발표된 180여편 논문들의 연구 경향과 추이를 분석한다. 먼저 1963년에 발간된 1집부터 1999년에 발간된 39집까지의 논문을 한국학계 중국사 연구의 초기 단계로 파악하고, 이 시기에 출판된 50여편의 논문들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원로 선학들의 연구”, “한중관계사 연구”, “해외학계의 영향”으로 나누어 소개한다. 이어 2000년 이후에 발간된 41집부터 99집까지 출판된 130여편의 논문을 최근 연구로 분류하고 여기에서 보이는 중국사 연구의 새로운 동향을 고고학 자료의 활용, 주제의 세분화와 정밀화, 그리고 북방 유목 세계에 연구의 심화를 통해 살펴본다. 또한 한중관계사 분야 역시 단지 중국으로부터 한국에 전해진 단선적인 영향을 확인하는 연구에서 벗어나 양측의 상호 작용, 그리고 중국 문화의 복잡성을 설명하는 단계로 발전했음을 지적한다. 한국학계의 중국사 연구는 과거에는 접할 수 없었던 새로운 사료를 활용하여 연구 영역을 확장하고 있으며, 국내외 학계의 오랜 연구 주제를 더욱 심화하여 전문화하고 있다. 나아가 중국학에서 오랫동안 소외되었던 주변부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한중관계에 대한 연구가 쌍방향으로 다각화되는 등 괄목할만한 성장을 보여주고 있다. This paper examines the Korean scholarship of the field of premodern Chinese history during the past sixty years by analyzing about 180 articles published in the Chung Kuk Hak Po during the periods from 1963 to 2021. It explains the years from 1963 to 1999 as the early stage of Chinese Studies in Korea, while the past twenty years since 2000 are discussed as the recent stage of Korean academia. Comparing the articles of the Chung Kuk Hak Po published before and after the year 2000, this paper addresses that Korean research achievements on Chinese history have showed a remarkable growth both in quality and quantity. Recently many Korean scholars have expanded their research topics and scopes by using archaeological evidence and various language materials, a new source that had not been available for the early generation of Korean scholars. At the same time, more specialized questions have been explored in each period of Chinese history. One of the most notable changes in recent studies is increasing scholarly interests in Inner Asian frontiers, a place where has received little attention earlier in Korean academia. We hope that the Chung Kuk Hak Po will continue to make its dedication and contribution to future development of Chinese Studies in Korea.

      • KCI등재

        중국 학계의 『翰苑』 연구

        趙宇然,李毅夫 백산학회 2021 白山學報 Vol.- No.120

        이 글에서는 『翰苑』 殘本이라는 일본에서 발견된 중요한 동아시아 고대사 문헌에 대한 중국학계의 인지와 중국 전래 및 출간 그리고 관련 연구에 대해 살폈다. 『한원』 잔본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이미 일본 체류 중이던 羅振玉에 의해 주목되었다. 한편 그는 『한원』 영인본의 간행과도 연관되어 있기도 하다. 그 후, 金毓黻은 교정 작업을 거쳐 활자본으로 출간했다. 현재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1934년에 김육불이 『遼海叢書』 제8집에 활자본으로 수록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사실 그의 학술일기인 『靜晤室日記』에 따르면 『요해총서』 8집이 간행된 구체적인 시점은 1935년 하반기 무렵이다. 김육불은 『한원』을 중요한 문헌으로 인지하고 있었던 것 같지만, 『정오실일기』에서는 그에 관한 단편적인 언급만 확인할 수 있다. 그 입수 경위나 교정 과정에 관한 내용은 보이지 않아 아쉽다. 따라서 구체적인 전후 맥락 파악은 어려운 형편이나, 다만 1930년대 무렵 김육불이 稻葉巖吉, 內藤湖南 등 일본 학자들과의 왕래가 빈번했던 만큼 이러한 교류를 통해 입수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기존 중국학계의 『한원』 연구는 크게 세 분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편찬 과정, 校釋과 역주, 『高麗記』 및 전거 자료로서의 연구 등이다. 그러나 전문적인 연구 논저는 많지 않다. 중국 학자童嶺은 지난 10년 동안 단지 자신의 몇몇 연구가 중요하다고 自評했는데,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보다 앞선 연구 성과는 미비한 형편이다. 그럼에도 張中澍의 校譯 작업이 있었고, 姜維公, 高福 順 등의 고구려사 자료로서 『고려기』에 초점을 맞춘 연구가 주목된다. 그리고 근년에 남방지역의학자 童嶺이 일본 유학 경험을 토대로 여러 편의 의미 있는 연구 성과를 발표했다. 2016년에 『한원』을 연구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王碩 또한 주목되나, 다만 관련 전적의 수집‧독해 수준은童嶺에 미치지 못한다. 중국 남‧북 학계의 학문 수준 차이를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향후 중국학계의 『한원』 연구와 관련해서는 이 두 젊은 학자의 활약이 주목된다. 本文梳理了中国学界对《翰苑》残本这一重要东亚古代史文本的认知、传入中国、刊行以及相关研究史。《翰苑》残本较早时期已被居住在日本的罗振玉所关注。而且他还与《翰苑》影印本的刊行有密切关联。此后,金毓黼经校订,以活字本形式出版发行。现在学界普遍认为,金毓黼在1934年以活字本形式将《翰苑》收录于《辽海丛书》第8辑中。但据他的学术日记《静晤室日记》,《辽海丛书》第8辑具体刊行时间为1935年下半年左右。虽然金毓黼似乎将《翰苑》残本视为重要的文献,但在《静晤室日记》中,只有简短提及,并没有详细提到取得过程和校订等相关內容。虽然很难得知具体情况,但20世纪30年代,金毓黼与稻叶岩吉、內藤湖南等日本学者来往频繁,因此或许是通过他们取得了《翰苑》。现今中国学界的《翰苑》研究大致可分为三个方向。即,编撰过程、校释与译注、《高丽记》及作为高句丽史料的研究等。但有深度的专门研究论著并不多。正如童岭教授自评,在过去十年的相关研究中,只有童岭的部分研究值得关注而已。总之中国学界的相关研究成果并不丰富。尽管如此,仍有张中澍的校译,姜维公、高福顺等的《高丽记》研究等成果备受关注。另外,近年来南方学者童岭以日本留学经验为学术背景,发表了多篇值得关注的研究成果。2016年以《翰苑》为研究课题,获得博士学位的王硕的研究亦值得关注,但相关原始资料的收集、阅读等学术水平却不及童岭。这反映了中国南北学界学术水平的差距。尽管如此,今后中国学界的《翰苑》研究,需关注以上两位年轻学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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