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김미영(Kim Miyeong) 한국동양철학회 2010 동양철학 Vol.0 No.34
현재 한국철학계에서는 다카하시의 철학관을 두 측면에서 평가한다. 한편으로는 식민사관으로 비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근대적 의미의 전통철학 연구의 개척자로 평가한다. 이 양대 평가는 모두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통치과정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1910년대, 1920년대, 1930년대에 걸쳐 나타나는 그의 한국철학관의 변화과정을 중심으로 그의 한국철학관 형성과정과 국가사상 간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1910년대에는 한국이 중국사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향모색의 과정에서 조선의 고유문자나 조선의 고유문학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다. 그러나 1920년대에는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어의 일본어로의 대체를 강조하며, 한국철학사에서 조선어에 의한 창작활동의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유학사 연구의 시발점을 1910년대에는 신라시대로부터 시작하나, 1920년대에는 철학으로서의 유학이라는 측면에서 조선성리학 구명에 중점을 두며 고려말부터 시작하고 있다. 또한 1920년대에는 유학을 철학적 측면으로 다루며 조선성리학에 집중하고, 한국인의 일본에의 동화를 위한 종교정책의 일환으로 불교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반면, 1930년대에 접어들면 조선유학의 특징을 종교성에 두며, 한국인에게 종교적 교화라는 측면에서 불교보다 유학이 적합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 시기에 그는 더 이상 불교연구를 진행하지 않고, 한국유교의 종교성을 구명하는 데 집중한다. 따라서 그는 중국이 근세 쇠퇴한 원인이나 조선이 멸망한 원인을 유교에서 찾으려는 시도를 부정하면서, 조선이 500년간 유지될 수 있었던 힘을 유교에서 찾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한국철학관의 변화는 그의 전통철학 연구대상의 변화를 초래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변화는 20세기 철학사와 국가사상간의 관계를 읽어볼 수 있게 해 준다. 따라서 철학사상이 국가사상을 어떻게 넘어설 수 있는가의 문제는 20세기 전개된 철학사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통해서 가능하게 될 것이다. Takahashi's viewpoint on Korean Philosophy is evaluated from two aspects by Korean philosophers. One is criticized by Colonialism, and the other is evaluated from the standpoint that he was the scholar studying Korean traditional philosophy by modern systems of study. These two aspects are related with the course of colonial regime of Japanese imperialism. So, I study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development process of his viewpoint on Korean Philosophy and the nationalism, laying stress on the change of his viewpoint on it in 1910's, 1920's, and 1930's. In 1910's, he didn't exclude the possibility of Korean traditional character or literature as a way out of Korean Chinese Thought in this time. But in 1920's, he as an assimilationist, stressing the substitution of Japanese for Korean, tried to exclude the possibility of studying Korean philosophy in Korean in the history of Korean philosophy. Accordingly, in 1910's, he put the starting point of Korean confucian history in Shilla, but in 1920's, in the end of Koryo. Also, in 1920's, he focused on Chu Zi's learning of Chosun, emphasizing the confucianism as a philosophical idea, and on Korean Buddhism as a part of a religion policy for the Korean assimilation to Japan. But, in 1930's, he emphasized Chosun confucianism as a religion, not studying the Korean Buddhism any more, but Korean confucianism, from the viewpoint that the confucianism as a religion was more suitable for Korean. This change of his viewpoint on Korean philosophy led to the transition of object of his study and showed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history of philosophy in the 20th century and the nationalism. Therefore, in order for philosophy to overcome nationalism, I think we have to have critical review on his study of the history of Korean philosophy developed in the 20th century.
임찬순(Chansoon Lim) 한국동양철학회 2008 동양철학 Vol.0 No.30
신학적인 방법론에 대한 성찰은 매우 중요한데, 신학적인 방법은 방법 자체를 넘어서 신학의 내용까지 규정하기 때문이다. 이 연구는 이정용의 양면긍정의 신학 방법론을 고찰하는데, 이 양면긍정의 사유는 그의 실존적 신학적 난제를 해결하는 배경이 되었다. 그는 재미신학자로서 동양적 세계관에 근거한 동양적 신학내지는 한국적 신학을 창조하는 구성신학적 작업을 하였다. 그는 서구 신학의 난제들을 발견하면서, 그 난제들을 동양적 사유방식을 통해서 해결하려고 도전하였는데, 그의 작업은 포스트모던 시대에 동서의 지평융합을 지향해야 하는 신학자에게는 매우 의미있는 작업이었다. 포스트모더니티는 도전인 동시에 기회인데, 비서구적인 전통과 문화들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하는데, 기독교는 이제 서구의 종교가 아닌 명실공히 세계종교의 자리를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비서구 전통들이 기독교 속에 융합내지는 제소리를 내지 않으면 세계기독교는 가능하지 않다. 이것이야말로 타자를 포용하고 담아내는 내적인 외적인 스트러글이 없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난제이다. 서구신학이 문화적 상대성과 대화에 주목하게 된 것을 넘어서서, 다른 문화들 이 제목소리를 내면서도 기독교적 정신이 자리할 수 있어야 한다. 유비적 사고는 서구 신학적 전통에서 신과 인간, 신과 세계의 차이를 보충하고 매개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사고였다. 이정용은 관계와 신앙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간극을 초극하려고 했던 칼 바르트의 유비에서 출발해서, 동양 적 음양론으로 그의 신학적 사유를 넓혀나갔으며, 동양적 삼위일체적 사유를 말하는 자리까지 전진했다. 이런 과정에서, 동양적 전통의 언어가 철학적 해석을 통해 신학적 언어로 기능을 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차원을 발견하게 되 었다. 그의 신학적 구성은 동양의 종교적 전통의 일종의 서구화로 읽힐 수 있으나, 기독교의 토착화로 볼 수도 있다. 이것은 그런 작업자체가 양자택일의 길이 아닌 양면긍정의 길이다. 동서는 이제는 더 이상 고정된 틀이 아니다. 이 정용의 신학적 테제에 따르면, 기독교의 본질은 배타성에 있지 않고, 포용성에 있다. 이것이야말로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세계 기독교의 형성을 위해서 기여하기 위해서 우리 자신의 신학적 방법론을 발전시키라는 소명일 수 있다. A reflection on theological method is very important, for a theological method even regulates the content of theology. This study is focused on Jung Young Lee's theological method, both/and way of thinking, which is the background to show his existential and theological conundrums. He was a Korean American constructive theologian who had tried to construct an Asian or Korean theology based on East Asian worldview. Acknowledging conundrums in the W estern theology, he attempted to resolve them through East Asian way of thinking, which is very meaningful for contemporary theologians in the postmoderm age. Postmodernity challenges and gives us opportunities that non-Western traditions and cultures raise their own voices and contribute to constructing Christian culture and theology for the sake of forming a World Christianity. On the other hand, these kinds of theological works could not be accepted universally without serious struggles of embracing others in their own lives and cultures. Analogical thinking was required in the W estern theological tradition in order to complement and mediate the difference between God and human beings. Jung Young Lee's theological journey was started from Barthian analogy based on relation and faith as a neo-orthodoxian. On the other hand, his analogical thinking was expanded to East Asian way of thinking as Yin/Yang and even East Asian trinitarian way of thinking. In this process, his theological construction had been enriched and deepened through embracing East Asian traditions. His theological construction is not only a kind of Westernization of East Asian religious traditions but also a kind of indigenization of Christianity, which seems to go beyond this kind of category. East and W est is not a fixed category any longer. According to his theological These, the essence of Christianity is not exclusivity but inclusiveness, which is a calling for Korean Christian theologians to develop our own theological method and theological creativity for the sake of forming W orld Christianity.
현대 중국의 사상 흐름에 대한 한국 철학계의 연구 동향 - ‘문화열’과 ‘중국학열’에 대한 연구 동향을 중심으로
이철승(李哲承) 한국동양철학회 2006 동양철학 Vol.0 No.25
1978년 ‘제11기 3중전회’를 기점으로 중국의 사상계는 ‘실천이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기준’이라는 관점 아래, 중국 사회를 전면적으로 개혁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실사구시’와 ‘사상해방’을 주장하며, 신‘백화제방’ㆍ‘백가쟁명’의 시대를 열었다. 경직된 사회 구조에서 벗어난 중국의 지식인들은 1980년대에 더욱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직면한 시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관점에서 이론을 펼쳤다. ‘문화열’이란 학계의 이러한 동향을 지칭한 말이다.<BR> 중국의 사상계는 또한 1989년의 이른바 ‘6ㆍ4 천안문 사태’를 경험한 후, 이 사건의 사상적 배경을 ‘문화열’ 때 확산된 서구의 부르주아 자유주의 사조의 만연으로 여기고, 중국의 정체성 회복과 새롭게 펼쳐지는 국제 질서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사상적 대안을 강구하는 과정에 ‘신중화사상’을 토대로 하는 ‘중국학열’을 조성시켰다.<BR> 오랫동안 중국의 현대 사상에 대한 연구보다 전통 사상에 대한 연구에 치중했던 한국의 철학계는 1990년대 초부터 시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유 체계의 확립을 철학의 중요한 역할로 여기는 일군의 학자들에 의해 중국 현대 철학이 지속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했다.<BR> 그들은 그동안 한국의 철학계가 중국 사상을 연구하면서 비실제적인 문제에 관심을 집중시킴으로 인해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면에 한계를 노정시킨 것으로 평가하고, 현대 중국의 사상을 심층적으로 탐구하여 중국에 대한 바른 이해와 합리적인 한중 관계의 정립에 이론적인 기여를 하고자 하였다.<BR> 필자는 이 글을 통해 ‘문화열’과 ‘중국학열’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 현대 사상의 연구 경향에 대한 한국철학계의 연구 동향을 소개하여, 균등하면서도 평화로운 한중 관계의 지속에 필요한 사상적 실마리를 제공하고자 한다.
오경후 한국동양철학회 2018 동양철학 Vol.0 No.50
The Emergence in the Modern and Contemporary Buddhism in Korea and KYUNGUN-WONGI(擎雲 元奇) KYUNGUN-WONGI is a person who has lived the tradition and modernity of Korean history. During this period, Korean Buddhism was also in a great turning point. KYUNGUN is a person who inherited the tradition of Study of Zen and Non-zen Buddhism, Chantingf Buddhism, Vinaya Pitaka of the Korean Buddhism which has been blurred since the 19th century. Because of this, even the Japanese have regarded the Buddhist identity of the Korean Buddhism as a person who has maintained the identity. Although the order of Korean Buddhism was confused by the influx of Japanese Buddhism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rule, The disciples said that they were afraid of their hearts as if they were listening to the commandments themselves. KYUNGUN has also systematized the collapse of Sun-am Temple(仙巖寺). In the future, Choi Nam-seon(崔南善) said that KYUNGUN was a virtuous practice to keep the Vinaya, not to stick to and keep it. He formed Baekryeon-gyeolsa(白蓮結社), even the people who did not know Buddhism had a deep influence on Buddhism. He also played an important role in establishing the direction of Korean Buddhism as well as establishing Buddhism’s Order(Samgha) at the time. At that time, Buddhist denomination's efforts to nurture the post-Buddhist education of the Korean Buddhism and to improve the Propagation were the only reason for the tide to go outside the prose. The disciples of Tongun were outstanding. Han-Young Park( 朴漢永)·Jin Jin Eung(陳震應)·Geumbong byeong-yeon(錦峰 秉演) The disciples followed the tide of Buddhism at that time, and they devoted themselves to the education of Buddhism and to the stability and development of Buddhism in Korea. 경운 원기는 한국 역사의 전통과 근대를 살다 간 인물이다. 이 시기 한국불교 역시 큰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경운은 조선후기 불교계에서 부흥했지만, 19세기부 터 그 명맥이 희미해진 한국불교의 선교학과 염불, 그리고 계율의 전통을 선암사의 스승들로부터 온전히 계승한 인물이다. 때문에 일본인조차도 결연하게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보호 유지해온 인물로 평가하였다. 일제강점기 일본불교의 유입으로 승가 의 질서가 혼란스러웠지만, 제자들은 경운을 보는 자체로 계율을 듣는 것처럼 마음 에 두려움을 느꼈다고 하였다. 경운은 선암사의 무너진 계율을 체계화시키기도 하 였다. 훗날 최남선은 경운이 계율을 지키는 것은 얽매여서 지키는 것이 아닌 좋아서 하는 고결한 실천이었다고 하였다. 그가 결성한 백련결사 역시 불교를 모르는 사람 들조차도 불교에 입문할 정도로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당시 불교계의 교단 설립 과 함께 한국불교의 방향설정에도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당시 불교교단의 한국불 교의 후학 양성과 포교 향상을 위한 노력은 경운이 유일하게 산문 밖을 나가는 이유 였다. 경운의 제자들은 걸출했다. 영호 정호·진응 혜찬·금봉 병연은 경운에게 선 교학을 수학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불교정신을 따르고자 하였다. 제자들은 당시 불 교계에서 경운의 뒤를 이어 후학양성과 한국불교 안정과 발전에 진력하였다.
金是天(Kim, Sicheon) 한국동양철학회 2021 동양철학 Vol.- No.55
한국의 20세기에서 고전 철학의 이해는 중국이나 일본과는 차별화된 성격을 보인다. 예컨대 함석헌 등의 기독교 사상가 계열의 ‘노장’(老莊) 전통은 한편으로는 기독교와 유학, 도가의 회통을 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주의와 인권,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올곧이 담아내고자 하는 철학적, 사상적 실천을 보여준다. 이 글에서 나는 이러한 실천을 규명하기 위해 세 가지에 주목하고자 했다. 첫째는 철학적 텍스트에 대한 논리적 해석에 멈추지 않고, 특정한 철학적 관념이 현실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드러나는 맥락에 초점을 맞추고자 했다. 이는 ‘텍스트 철학’이 아닌 ‘느낌의 합의’ 혹은 보다 쉬운 말로 상식을 대상으로 한다는 말이다. 둘째로 나는, 이러한 목적을 위해 전문 철학자가 아닌 저자들의 텍스트에 주목했다. 김대중과 기세춘 그리고 함석헌의 텍스트를 논의의 중심에 둔 까닭이 이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이러한 두 가지 논점을 포용하는 해석학적 기반을 ‘초월의 해석학’ 이라 이름 붙여 보고자 했다. 이는 특히 함석헌이 말하는 ‘씨의 자리에서 고전고쳐 읽기’는 표현을 가리키는 말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20세기 내내 ‘동양철학’은 하나의 기호로서 혹은 식민지 경험의 유산으로 단지 허명(虛名)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같은 텍스트들을 비교적 관점에서 한국철학 혹은 ‘K-철학’으로 읽고자 할 때 우리는 보다 풍부한 철학적 사유의 여정을 확인할 수 있다. Korea’s understanding of Classical philosophy in the 20th century is differentiated from those of China and Japan. In particular, the tradition of ‘old age’ of Christian thinkers such as Ham Seok-heon, on the one hand, refers to the conversion of Christianity, Confucianism, and Daoism on the one hand, while on the other hand, it aims to convey the values of democracy and human rights, freedom and equality. This is because it shows the philosophical and ideological practice of doing. In this article, I wanted to focus on three things to clarify this practice. First, I tried to focus on the context in which certain philosophical ideas are revealed in the interaction with reality, not stopping on the logical interpretation of the philosophical text. This means that it is aimed at ‘consensus of feeling’, not ‘text philosophy’, or in simpler words, common sense. Secondly, I focused on the texts of authors, not professional philosophers, for this purpose. This is why the texts of Dae-jung Kim and Se-chun Ki, and Seok-Heon Ham were put at the center of the discussion. And finally, I tried to name the hermeneutic basis that embraces these two issues as the ‘transcendental hermeneutics’. This is a word specifically referring to the expression Ham Seok-heon refers to as ‘reading revised classics in the place of ‘people’. In a strict sense, ‘Oriental Philosophy’ throughout the 20th century was nothing more than an empty name as a sign or as a legacy of colonial experience. However, when we try to read the same texts as Korean philosophy or ‘K-philosophy’ from a relatively perspective, we can find a richer journey of philosophical thinking.
한국 유교의 근대적 곤경 - 20세기 초 한국 잡지의 담론을 중심으로 -
양일모 한국동양철학회 2025 동양철학 Vol.- No.63
이글은 20세기 초에 간행된 한국 잡지를 중심으로 한국의 유교가 직면한 근대적 곤경을 둘러싼 지식인들의 담론을 분석하고자 한다. 먼저 근대적 교육 체제의 등장과 맞물려 한국의 유교가 근대적 분과 학문으로 등장한 역사학의 연구 대상이 되고, 동시에 철학 혹은 동양철학으로 재편되는 과정을 검토해보고자 한다. 둘째, 새로운 근대국가를 구상하면서 유교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한편으로는 전통적 문화 자원으로 작동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에 유교를 둘러싼 비판과 기대가 교착되는 과정을 다루고자 한다. 셋째, 메이지 일본의 학계에서 퇴계 이황을 둘러싼 담론이 활성화되고, 그리고 이러한 메이지 학계의 아카데미즘이 한국에 전해지는 과정을 고찰하고자 한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한국 유교가 직면한 근대적 운명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This paper examines the modern predicament faced by Korean Confucianism by analyzing discourses found in Korean magazines published in the early 20th century. First, it explores how Confucianism, under the emergence of a modern educational system, became a subject of historical inquiry as a disciplinary object and was simultaneously restructured as "philosophy," particularly under the name of Eastern philosophy. Second, it investigates the ambivalent role of Confucianism in the process of imagining a modern nation-state?being both a target of criticism and a repository of traditional cultural resources. Third, it analyzes how academic discourses surrounding the Neo-Confucian thinker Yi Hwang (Toegye) were developed in Meiji-era Japan and subsequently transmitted to Korea, revealing the influence of Japanese academism on Korean intellectuals. Through this multi-layered analysis, the study aims to clarify the characteristics of the historical and intellectual challenges that Korean Confucianism encountered in its confrontation with modernity.
이기동 한국동양철학회 2016 한국동양철학회 학술대회 논문집 Vol.2016 No.4
사람이 산다는 것은 밀려오는 고통을 극복해가는 과정이다. 고통을 극복하면 행복감을 느낀다. 행복감의 양은 고통의 양과 같다. 고통을 극복하면 고통의 양만큼 행복해진다. 밥 한 끼를 먹었을 때의 행복감은 밥 한 끼를 굶었을 때의 고통과 같은 양이다. 고통에는 여러 층이 있다. 작은 고통도 있고 큰 고통도 있다. 작은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는 그것이 가장 큰 고통처럼 느껴지지만, 더 큰 고통을 당하면 작은 고통은 고통 축에 들어가지도 않는다. 밥 한 끼를 굶을 때의 고통은 실연의 고통에 비하면 고통 축에 들어가지 않는다. 밥을 굶으면 난동을 부리던 사람도 실연의 고통을 당하면 밥을 주어도 먹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손가락 하나가 잘려 나가면큰 고통을 느끼지만, 팔이 잘려 나간 고통에 비하면 그것은 고통 축에 들어가지 않는다. 팔이 잘려 나갔을 때의 고통은 큰 고통이지만, 병이 들어 죽게 되었을 때의 고통에 비하면 그것은 고통 축에 들어가지 않는다. 행복도 마찬가지이다. 작은 고통을 해결했을 때의 행복은 큰 고통을 해결했을 때의 행복감에 비하면 행복 축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작은 고통을 해결하느라 평생을 소모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 큰 고통을 해결하여 큰 행복을 얻어야 지혜롭다. 그렇다고 큰 행복만을 추구하다가 당장의 고통을 해결하지 못하는 것도 지혜롭지 못하다. 바람직한 것은 당장의 고통을 어느 정도 해결하기만 하면 거기에 머물지 말고 바로 큰 행복을 얻는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런 노력이 철학이다. 동양철학의 큰 범주에는 유학과 불교, 노장사상 등이 있다. 이 중에서 가장 원초 적인 것을 설명하고 있는 철학체계는 노장철학이다. 노장철학은 혼돈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철학이다. 따라서 노장철학은 혼돈에 머물러 있는 한 있는 그대로 살기만 하면 된다. 노장철학에서 말하는 무위자연이 그것이다. 혼돈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한 가지 주의할 것은 감각기관을 작동은 하되, ‘나’라는 허상을 만들어 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라는 허상을 만들어내지 않기만 하면 일체의 고통이 없다. 노장철학에서는 가상세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는 유한한 ‘나’를 부정하는 불교와 유사하다. 또 가상현실에서의 고통에서 철학이 출발한다는 점에서는 유학과 불교가 유사하다. 유학과 불교가 추구하는 종착역 역시 혼돈이라는 점에 서도 유사하다. 오늘날 학자들은 서구 근세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동양철 학을 전공하는 학자들에게도 많이 나타난다. 동양철학의 내용을 머릿속에서 서구의 방식으로 정리만 하기 때문에 자기에게 주어진 근본 고통을 해결한다고 하는 동양 철학 본래의 목적이 많이 희석되었다. 이 때문에 동양철학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 중에는 학문을 통해서 행복해졌다는 사람이 많지 않다. 공자의 인에 대한 논문을 썼어도 어질지 않고, 석가모니의 자비에 대한 논문을 썼어도 자비롭지 않은 학자가 많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오늘날 동양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깊이 한번 반성해볼 때가 되었다.
노하우로서의 倫理 : 프란시스코 바렐라의 인지과학과 동양철학 연구
유권종(Yoo, Kwon-Jong) 한국동양철학회 2010 동양철학 Vol.0 No.34
급진적 구성주의의 학문 연구를 주도했던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인 프란시스코 바렐라(1946~2001)의 강연집 『윤리적 노하우』는 동양의 전통적 가르침이 정립했던 것을 윤리적 노하우라는 관점으로 조명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의 저서는 동양철학 전공자에게 연구의 중요한 진전을 가져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고 있음에 틀림없는 것이다. 본 연구는 바렐라의 견해를 분석하고, 그의 관점과 연구 내용을 동양철학 연구 특히 유교 연구에 적용할 수 있는 가능성과 그 방향을 탐구하였다. 본 연구의 순서는 인지과학의 흐름과 프란시스코 바렐라의 학문, 『윤리적 노하우』의 체계와 주요 관점, 윤리에 관한 지식의 본질, 윤리를 노하우로 보는 것이 타당한가? 동양철학 연구의 새로운 관점의 논의로 구성되었다. 본 연구에서는 동양철학연구에 적용가능한 『윤리적 노하우』의 특징적 구도를 네 가지로 파악하였다. 그 내용은 첫째 현대인의 윤리적 실천의 현실에 관한 그의 문제의식, 둘째 서구철학적 사고 내지는 초기 인지과학의 계산주의적 모델의 극복과 구성주의 모델의 확립, 셋째 존재론적 이원론의 구도를 넘어서는 생명론적 일원론의 구도로의 전환, 넷째 숙련에 의한 자기창조의 원리 등이다. One of leading members of radical constructivism on the basis of cognitive science, Francisco J. Varela's Ethical Know-how, which is a collective publication of his speeches, newly explains the Asian traditional teachings as a very useful and meaningful wisdom depending on a new conception of ethical know-how he developed. It is sure that his work gives a moment to specialists of Asian traditional thoughts. This article is for the analysis of his ideas about the ethical know-how and at the same time for a search for possible way to apply his ideas and methodology to the studies of Asian traditional thoughts. This study is going on with the order as follows; current stream of cognitive science and Varela's researches, the principle of Ethical Know-how and main viewpoints, the essence of knowledge of ethics, the explanary structure of Ethical Know-how, and new viewpoint of Asian philosophical studies. According to this study, his ideas and theoretical points that can be applied to the studies of Asian traditional thoughts are summarized as follow; his strong and consistent willingness to improve the low level practice of ethics in contemporary societies up to a higher level practice, changing the thinking model for the improvement leaving from the Western philosophical tradition or the computational style of the early cognitive science settling to radical constructivist model, establishment of the monistic principle on the basis of the life itself with rejection of the ontological dualism, and construction of autopoiesis(self-organization) by means of mastery of the know-how.
禪敎融合은 어떻게 한국불교의 전통이 되었나 - 擎雲 元奇 화상을 중심으로 -
박재현 한국동양철학회 2018 동양철학 Vol.0 No.50
The harmonic characteristics of Korean Buddhism began from the Goryeo period. This tradition, represented by the concept of both cultivation of samādhi and prajña(定慧雙修), enabled Buddhism to survive in the turning point of power, which was the end of the Goryeo and Joseon dynasties. Through the Joseon Dynasty, harmony between Chan and the Teachings was expanded or strengthened by the harmony of the Confucianism, Buddhism and Daoism If the former were limited to the category of Buddhist practice theory, the latter included the category of soteriology. It was a process in which Buddhism actively accepted and embodied the Confucian sutraism based on loyalty and filial piety. The harmony between Chan and the Teachings converged to the Pure Land Doctrine through the late Joseon Dynast. Kyungun - Wongi (擎雲 元奇, 1852~1936) and Samoonilgwa (沙門日課) are representative of this tendency. 한국불교에서 융합적 특징은 고려시대부터 본격화 되었다. 정혜쌍수로 상징되는 선 교융합의 기조는 여말선초의 권력전환기에 불교에 비판적인 성리학자들의 눈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조선에서 불교를 유지하는 명분으로 그리고 실제적 기준으로 기 능할 수 있었다. 이후 조선조를 거치며 선교융합의 기조는 삼교융합으로 확장 내지 는 보강되었다. 선교융합이 수행론의 범주에서 국한된 것이라면 삼교융합은 구원론의 범주까지 포섭한 것이었다. 삼교융합의 기저에는 유학적 구원론이 깔려있다. 그것은 충효를 근간으로 하는 유학적 세상 구원론을 적극 수용하고 불교적으로 체화하는 과정이 었다. 선교융합의 기조는 조선후기와 구한말을 거치며 정토를 융합하는 방식으로 확장 되 어나갔다. 이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이 선암사의 경운 원기 화상이었 고, 그의 저술로 되어 있는 『사문일과』라는 문헌이다. 본 논문에서는 특히 『沙門日 課』에 대한 세밀한 분석을 통해 선교융합의 기조가 한국불교의 특징으로 자리 잡는 과정을 밝혔다.
김윤수(金侖壽) 한국동양철학회 2008 동양철학 Vol.0 No.30
한국 최초의 본격 도교 扶鸞의 鸞壇인 無相壇은 信仰 仙으로 關聖帝君, 文昌帝君, 孚佑帝君의 三聖帝君을 한국적 특색으로 최초로 통합 숭배하고 신앙하며 鸞書, 善書를 편찬, 간행, 보급, 전파하였다. 無相壇이란 명칭을 사용하기 전 壇이란 존재로 徐珽이 關聖帝君聖蹟圖誌全集, 關聖帝君聖蹟圖誌續集, 海東聖蹟誌 통칭 關帝三誌를 간행할 때 난단활동을 전개하여 丁鶴九, 劉雲, 崔煥 등과 함께 하였다. 이를 무상단 直前派로 구분한다. 無相壇은 고종 14년(1877,정축) 봄에 성립되었다. 무상단이라는 명칭이 최초로 등장한 문헌은 현재로선 동년 3월 경에 문창제군이 “乃下雲頭於無相壇”이라고 한 衆香集의 서문이다. 無相壇 直前派와 本派 출신 道士들은 三聖에 대한 통합 신앙서와 개별 신앙서를 출판하여 보급하였다. 개별적 신앙서로는 關聖帝君에 대한 것으로 過化存神 등 4종, 文昌帝君에 대한 것으로 南宮桂籍 등 모두 6종으로 가장 많이 간행되었다. 孚佑帝君에 대한 것으로는 心學正傳 등 3종이 있다. 三聖에 대한 통합 신앙서로는 三聖寶典이 있다. 無相壇의 구성원은 壇下八士, 곧 壇下八弟子이니 무상단 8도사라고 하겠다. 모두 8명으로 좌반과 우반으로 분반되었고 우반의 영수는 淸虛子 丁鶴九이다. 헌종, 철종 시대부터 善書 보급에 큰 공을 세운 妙虛子 崔晃 본명 崔煥 (1813~1891)이 무상단 직전파부터 본파를 거쳐 무상단 중건파에 이르기까지 무상단 3단계에 가장 오래, 다 참여하였다. 관성제군, 문창제군 仙 신앙의 도입과 보급에 큰 역할을 한 사람은 남관왕묘 도사 淸寧子 徐珽이다. 淸蓮子 劉雲(1821~1884)은 일명 劉聖漢, 자는 岫卿, 호는 無心翁, 蓮華齋, 법호는 光居士, 일호는 光堂學人, 법명은 普圓, 도호는 如是觀主人, 淸蓮子, 劉淸蓮法師 등이다. 본관은 강릉(고호 溟州)이다. 嘉義大夫 行龍衛護軍의 무관직 고관으로 東關王廟의 관리 道官이었다. 劉雲은 순조 21년(1821)에 태어나 고종 21년(1884)에 향년 64세로 별세하였다. 29세 때인 憲宗 15년 (1849)에 불교거사로 삼교회통사상가인 月窓居士 金大鉉(~1870)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불교의 妙蓮社의 난단활동에도 활발히 참여하여 불교의 난서를 편찬하였다. 善書로 昨非菴詩話를 편집하였다. 유운은 道佛會通의 전형을 보여준 居士 겸 道士라고 하겠다. 울진군의 寧靜樓에서 玉皇上帝를 모시는 난단 활동을 하던 徐蘭瓊은 서울등지로 이주하여 조석린의 開化壇에서 활동하고 이어서 이진순의 照廣壇에서 활동하다가 독자적으로 光三壇을 개설하여 활동하였고 곧바로 무인년(1878,고 종15) 가을에 중단된 無相壇을 계미년(1883,고종20) 7월에 중건하여 활동하였다. 여러 鸞壇에서 활동하던 도사인 徐蘭瓊이 본래 옥황신앙의 소유자라서 無相壇을 중건하여 활동한 뒤로 무상단은 三聖 信仰에서 玉皇 信仰으로 다변화되었으니 변모된 것이다. 이를 이전의 무상단과 달리 보아 無相壇 重建派라고 별칭하여 연구의 편의를 도모한다. 無相壇 重建派도 활발한 난서 출판 활동을 벌여 중건 이듬해인 고종 21년(1884,갑신)에 6종의 난서 도경을 편간하였다. 무상단 도사들은 대부분 관성묘 道官들이다. 조선 전기 국립 도교 기관인 昭格署의 존재를 유학자들이 증오하여 기어이 혁파시켰는데 임진왜란 때 명군의 관왕신앙 전파에 의해 설치된 관왕묘가 이후 국립 도교 기관으로서 역할하더니 마침내 결실하여 조선말기 난단도교가 이에서 발흥하고 많은 선서와 난서들이 편찬, 간행되었으니 關王廟는 조선후기 유일의 道觀이라고 할 것이다. 관왕묘를 통하여 한국도교사의 3단계 곧 官方道敎, 修鍊道敎, 鸞壇道敎 가 정립될 수 있었으니 고마운 존재이다. 無相壇의 설치 장소 및 徐珽, 劉雲, 徐蘭瓊 등 무상단 도사들의 전기자료와 무상단 간행 난서들의 실체나 思想的 특징이라든가 무상단과 무상단 중건파와의 전환 관계 및 고종 이전이나 이후의 다른 난단 도교 정황 그리고 고종황제의 도교신앙 등 밝혀야 할 과제들이 있다. 韓國最初本格道敎鸞壇, 乃是無相壇。他所信仰的乩仙, 乃是關聖帝君, 文昌帝君, 孚佑帝君之三聖帝君。最初統合而崇拜之信仰之, 這是韓國的特色。 以其鸞書, 善書編纂而刊行之, 普及而傳播之。 朝鮮末期本格的鸞壇道敎於是展開。 無相壇未成立前, 以無名之乩壇, 展開活動, 徐珽刊行關帝三誌時, 與丁鶴九, 劉雲, 崔瑆煥等共參鸞壇, 名此無相壇直前派. 無相壇是高宗14年(1877,丁丑)春始成立。無相壇的名稱, 最初所載文獻, 乃是同年3月降云“乃下雲頭於無相壇”的衆香 集文昌帝君序。無相壇直前派及其本派出身道士, 對于三聖統合信仰書與個別信仰書, 出版而普及之。個別信仰書有關聖帝君過化存神等4種, 文昌帝君南宮桂 籍等6種, 孚佑帝君心學正傳等3種。統合信仰書有三聖寶典。 無相壇成員是壇下八士, 或云壇下八弟子, 乃是無相壇八道士。總共8人, 分左班與右班。右班領袖是淸虛子丁鶴九。憲宗, 哲宗朝普及善書大有功的崔瑆煥(道名崔晃,1813~1891), 最長且多參加無相壇直前派本派與無相壇重建派的三段階活動。 對于關聖帝君與文昌帝君乩仙信仰, 大有功於導入與普及之人, 乃是南關王廟道士徐珽。 淸蓮子劉雲(1821~1884)一名劉聖漢, 字岫卿, 號無心翁, 蓮華齋, 法號葆光居士, 一號葆光堂學人, 法名普圓, 道號如是觀主人, 淸蓮子, 劉淸蓮法師, 貫鄕江陵(古號溟州)。 他是嘉義大夫行龍驤衛護軍武官職高官, 乃是管理東關王廟的道官。劉 雲29歲時憲宗15年(1849), 受學于佛敎居士三敎會通思想家月窓居士金大鉉(~1870)門下。 活潑潑地參與佛敎妙蓮社之鸞壇活動, 纂述佛敎鸞書。他編輯善書 昨非菴詩話劉雲是有道佛會通典型的居士兼道士。 徐蘭瓊原來在蔚珍郡寧靜樓, 侍奉玉皇上帝, 展開鸞壇活動。自移住漢城以後,活動于趙錫麟之開化壇, 李瑨淳之照廣壇。獨自開設光三壇而活動之。戊寅年 (1878,高宗15)秋旣已中斷的無相壇, 癸未年(1883,高宗20)7月他自重建而活動之。 衆多鸞壇活動道士徐蘭瓊, 本來有玉皇信仰者。自重建無相壇以後, 無相壇從三 聖信仰擴于玉皇信仰多邊化。此與以前無相壇有相異處, 名曰無相壇重建派, 以供 硏究者便宜。無相壇重建派亦展開活潑潑的鸞書出版活動, 重建的翌年高宗21年 (1884,甲申)編刊6種鸞書道經。 無相壇道士大槪是關聖廟道官。朝鮮前期國立道敎機關是昭格署。儒學者嘗憎惡之,畢竟革罷之。壬辰倭亂時明軍以關王信仰傳播于朝鮮, 設立關王廟。以後以國立道敎機關的身分大有功於道敎信仰活動。朝鮮末期鸞壇道敎發興於此, 衆多善書鸞書編刊於此, 關王廟乃是朝鮮後期唯一道觀。因此關王廟, 定立韓國道敎史三段階卽是官方道敎, 修煉道敎, 鸞壇道敎, 宜所感謝之存在。 無相壇設置場所尙無知之, 及其徐珽, 劉雲, 徐蘭瓊等無相壇道士傳記資料又其 無相壇所刊鸞書實體及思想的特徵尙無明徵之, 無相壇本派與無相壇重建派轉換關 係及高宗以前以後其他鸞壇道敎情況, 而且高宗皇帝道敎信仰, 尙待考究, 以期後 日詳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