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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游錄」 所在 漢詩에 나타난 韓溪 李承熙의 文明意識

        송지현 영주어문학회 2023 영주어문 Vol.53 No.-

        This study is to figure out Lee Seung-hui’s Civilization Consciousness(文明意識) in the poem of 「Seoyurok(西游錄)」. Lee seung hui is a korean independence activist during the colonial period. In 1909, He established a base of independence movement which is called ‘Han heung dong(韓興洞)’ in Mishan of Jilin province, but he m oved a base of independence movement to Andong of Fengtan province. He found out Gonggyo Movement(孔敎運動) in Andong, so he established Korean Organization of Confucius Religion in Manchuria(東三省 韓人孔敎會). His branch was officially approved by Gonggyohoe (孔敎會) where there is a main branch in Beijing, which made him visit Qufu. 「Seoyurok」 is the record of journey in Beijing and Qufu. It is the travel essay, and he expressed his feeling about his journey in the poem . We found out Lee Seung-hui’s Civilization Consciousness in the poem of 「Seoyurok」. When he moved from Andong to Beijing, he mentioned Dangun and Gija. He said that Dangun founded the country and Gija is the person who transmitted civilization and gave edification. In addition, it showed that Consciousness of Native Land(故土意識) which recalls previous territory that was part of Korea through Dangunand a sense of self-esteem(自尊意識) that Korea is the only one country with authenticity of confucian culture through Gija. He had a pride of Confucian culture through Dangun and Gija. When he experienced westernized china and western culture, he worried about the future, but at the same time he accepted westernization from the perspective of Sinocentrism. Lee Seung hui tried to keep korean history and tradition, even though he was in difficult situation. A lot of his works he had performed in China could be highly appreciated as a kind of independence movement that dreamed of new beginning and revival of our nation. 이 연구는 한계 이승희의 「서유록」 소재 한시에 나타난 문명의식을 찾기 위해 시도되었다. 이승희는 우리나라가 일제의 통치를 받게 되자, 중국으로 망명했던 인물이다. 그는 1909년 길림성 밀산부에 ‘한흥동’이라는 정착촌을 건설하였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1913년 봉천성 안동현으로 이동하였다. 안동현에서 중국의 공교 운동에대해 알게 된 이승희는 동삼성한인공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는 곧장 북경으로 가서 공교회의 지부로 승인을 받았으며, 이를 계기로 하여 곡부도 다녀오게 되었다. 안동현을 떠나 북경과 곡부를 둘러본 여정을 담은 기록이 바로 「서유록」이다. 「서유록」 은 이동 경로와, 각 공간에서 느낀 바를 쓴 한시를 수록한 일기체 기행문이다. 「서유록」의 한시를 통해 이승희의 문명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 안동현에서 북경으로 이동할 때 단군과 기자가 종종 언급되었다. 기본적으로 단군은 나라를 세운 국조로, 기자는 문명을 전달하고 교화를 펼친 인물로 인식하였다. 단군을 통해 고대의 영토를 떠올리는 고토의식이 주로 드러났으며, 기자를 통해 우리나라가 유교 문화의 정통성을 가진 유일한 나라라는 자존의식이 나타났다. 이승희는 단군과 기자를 통해서우리나라의 오랜 역사를 잊지 않고 유교 문화에 대해 자긍심을 갖는 태도를 보였다. 또한 이승희는 서구화된 중국의 현실을 맞닥뜨리고 서양인을 직접 접하면서, 서구화에 대한 우려와 안타까움을 표출하였다. 동시에, 중화의식의 기준에서는 서구를 인정하는 유연한 태도도 보였다. 서구에 대한 낯섦과 거부감을 중화의식으로 극복하며, 우려와 기대가 공존하는 의식을 드러냈다. 이승희는 암울했던 시대적 상황과 험난한 타국에서의 현실 속에 우리나라의 역사와 전통 의식을 지키려 노력했던 인물이다. 그가 우리 민족의 새로운 시작과 부흥을꿈꾸며 펼쳤던 중국에서의 다양한 활동들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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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계 이승희의 『달폐일기(達狴日記)』의 창작 배경과 인물형상 연구

        한길로 ( Han Gil-ro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20 嶺南學 Vol.0 No.74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수많은 민중들과 유림들이 이에 저항했다. 구한말 한주학파(寒洲學派)를 이끈 이진상(李震相)의 아들 이승희(李承熙) 역시 이등박문으로 대표되는 일본 세력과 을사오적과 같은 매국대신을 매섭게 성토하며, 오적(五賊)을 척결하고 조약을 파기하라는 상소를 올리려 상경했다. 하지만 이후, 대구경무서(大邱警務署) 소속의 순사(巡査)와 순검(巡檢)의 손에 이끌려 1905년 12월 6일(음력) 대구옥(達狴)에 갇힌 수인이 된 이승희는 이듬해 4월 7일까지, 약 103일간의 옥고를 치르게 된다. 『달폐일기』는 수인이 된 그가 ‘대구옥’에서 경험한 것들을 담고 있다. 『달폐일기』는 일기라는 표제와 형식을 갖고 있지만, 보통의 일기와는 다른 특징을 갖고 있다. 하루하루의 일과 그에 대한 자신의 사유를 차분하게 ‘기록’하여 소장하려는 의지보다는, 자신이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경험하고 느꼈던 것들을 타인에게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한 의지가 깊게 반영되어 있었다. 일기 속 이승희 자신은 일본 경찰의 겁박을 모두 물리치고 나아가 심문과정에서는 을사조약의 합법성과 통감부 설치의 정당성을 모두 논박하는 인물이었다. 또한 계속되는 겁박과 회유에도 그는 자신의 “직분”을 다할 뿐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결국 감옥에서도 그는 자신의 직분을 다하며 일본과 투쟁했던 경험을 ‘일기’의 형식을 통해 자신의 문중과 그리고 식자층에게 전하고 있었다. 국가는 존망의 위기에 직면했지만 개인은 그것에 굴복하지 말고 자신의 “직분”을 다하며 함께 국난을 극복하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요컨대 그의 일기는 일기라는 표제와 ‘형식’을 하고 있지만, 기존의 ‘일기’류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빼어난 현장감과 생동감 있는 ‘내용’을 전하고 있었다. 즉 이 작품은 을사조약 직후 저항 유림의 구국의지와 불굴의 정신을 대단히 잘 보여주는 ‘대화체 한문일기’라고 할 수 있다. When the “Treaty of Eulsa(乙巳條約)” was signed in 1905, many people and Confucian scholars resisted. Lee Seung-hee also rejected Japanese rule and strongly criticized the “Five Eulsa Traitors(乙巳五贼)”. He wrote to the king, asking him to destroy the treaty and punish the Five traitor. However, he failed to do this and he went to Daegu Police Station with Japanese police. The theme of this diary is Lee Seung-hee's prison experience and records conversations with Japanese police in prison. He lived in a prison at Daegu Police Station from December 6, 1905 to April 7, 1906, and all of them lived in prison for 103 days. In his diary 「Dalpe-ilgi(達狴日記)」, Lee Seung-hee was threatened by Japanese police, but with confidence and dignified attitude, he tolerated their threats. He also argued that the treaty of 1905 should be destroyed, saying that it was illegal and irrational. In this background, his diary is different from the diary in the general sense. So it is not an individual record but a historical record, and the narrative structure is more like a novel than a diary. Through his diary, he told him not to grieve about reality, but to resist it with courage, and that he would do it if he had to. n other words, you have to be faithful to your “personal duties(職分)”. He thought it was the only de facto way to rescue and advance a difficult country. In summary, his diary is not highly complete. But he showed a more realistic and lively literary sense than a diary. His diary is a representative novel diary that shows the spirit of resistance Confucianists and the beliefs of the cou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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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계 이승희(韓溪 李承熙)의 북경행의 배경과 교유시의 일면 -「서유록(西游錄)」을 중심으로-

        한길로 ( Han Gilro ) 성균관대학교 인문학연구원(성균관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21 人文科學 Vol.- No.80

        을사조약이 늑약 체결된 1905년 이후, 나라의 붕괴와 균열상을 지켜만 볼 수 없었던 지식인들은 국외 이주를 도모하게 된다. 이 행렬은 이민족의 지배 하에서 유가적 이상을 실현할 수 없을 것으로 전망했던 유림들이 중심이 되었다. 한주학파를 이끌며 항일운동을 전개했던 한계 이승희 역시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1908년(당시 62세) 해삼위로 향해 그곳에서 유교 공동체 구성과 독립운동 기지 구축에 전념했다. 1911년 신해혁명 이후에는 ‘공교(孔敎) 운동’의 중심에 서며 이른바 ‘재중(在中) 유림’을 대표하는 인물로 거듭난다. 1913년 그는 당시 한인 사회의 갈등과 국난극복 해결을 기대하며 동삼성한인공교회를 설립하였다. 지회 승인을 위해 직접 북경으로 건너가 공교 간부들과 만난 이승희는 공교 문제와 더불어 세계정세나 중국의 현안, 그리고 ‘근대(성)’에 관한 문제를 놓고 진지한 필담과 문필을 이어갔다. 이 과정에서 탄생한 「서유록(西遊錄)」 속의 시문들에서 이승희는 ‘소중화나 모화(慕華)사상’의 견지를 넘어, 확고한 ‘(유교적) 주체의식’을 표출하였다. “아동(我東)”이 아닌 “아화(我華)”로 진화한 것이다. 또한 중국의 중심으로 건너가 자신의 이상을 직접 실천하고 적극적으로 구현하려던 근대 유림의 사상적 무장과 실천적 면모를 잘 보여줬다. 그리고 「서유록」은 양국 유림(문인)들의 교유 국면에서 한국유림에 대한 달라진 위상을 담고 있는데, 과거 다소 고압적이었던 중국 관료(문인)들의 모습은 사라졌고 이승희는 유도의 담지자 및 전수가로서 매우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즉 이 자료는 이승희로 상징되는 근대 유림의 새로운 방식의 중국기행과 변모된 위상을 보여주는데 특히 한국 공교 운동의 배경·전개·추이를 잘 반영하고 있다. 동시에 근대 한중 유림의 인적교류 국면과 그 이면에 담긴 내면을 생생히 기록하고 있다. 요컨대 이 책은 이른바 ‘연행’루트를 벗어난 근대기 유림의 중국 기행(체험)을 잘 보여주는 ‘근대 중국(북경) 기행문’의 시원(始原)에 해당되면서 근대기 한중유림의 합작과 공조의 초기 모습을 선명히 증언하고 있다. In 1905, Japan forcibly signed a treaty with the Korean Empire. The fall of the country and the collapse of Confucianism were so shocking that intellectuals at the time considered immigration. Lee Seunghee (李承熙), the leader of the Hanju School (寒洲學派), was also one of the intellectuals who considered immigration. In 1908, 62-year-old Lee Seung-hee took a ship bound for Vladivostok, the border between Russia and China, where he devoted himself to establishing a Confucian community and building a base for the independence movement. In 1911, when the Xinhai Revolution broke out in China, he became a central figure in the Confucius Religion Movement (孔敎運動) and also grew to represent the Confucian scholars living in China. In 1913, he founded the Korean Organization of Confucius Religion Church of the Three Provinces in Northeast China (東三省韓人孔敎會) in anticipation of overcoming the conflict and national crisis in the Korean community at that t ime. I n the w orks in Seoyoulok (西遊錄; The Records of Travels in the West), Lee manifested his own Confucian spirit and active will to put it into practice, neither resorting to minor Sinocentrism nor showing a trait of a Sinophile. At the same time, the book vividly records the reappearance and the elevated status of Korean Confucians in modern China. In short, the book marks a new beginning of the Modern China (Beijing) Travel Literature, which records the Korean Confucians’ travel to China in the new modern period, not based on the so-called previous routes, and shows an early appearance of the collaboration and cooperation between Confucians in Korea and China of the modern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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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말(韓末) 대계(大溪) 이승희(李承熙)의 한시에 나타난 저항과 번민의 일면 - 대구경찰서 투옥 전후를 중심으로

        한길로 전남대학교 인문학연구소 2020 용봉인문논총 Vol.- No.57

        This thesis focuses on Lee Seung-hee's poems among Confucians who fought against Japan after the Treaty of 1905. Lee Seung-hee is an important Confucian intellectual and Hanju school(寒洲學派) in Gyeongbuk areais one of the leaders. In 1905, he heard that Japan forced the treaty by threatening the Korean Empire government. He recognized it very critically and decided that it should be destroyed immediately. After signing the treaty, he sent a document to the king asking him to punish the traitor and nullify the treaty. He went to Seoul with 300 colleagues and tried to meet the king in person, but failed. Returning home, he was arrested by Japanese police and imprisoned in a prison at Daegu Police Station. Because of this incident, he spent about 103 days in Daegu prison from December 6, 1905 to April 7, 1906. In prison, he expressed his willingness to resist through poetry and expressed his feelings of sadness. Although he was saddened by the reality of the Korean Empire, which was about to be defeated, he was seen fighting against Japan until the end. In his poem, the sentiment of his agony and sorrow was very well illustrated, representing the sentiments of Confucian intellectuals at that time. His poems express Confucianism's will to resist very well and also show efforts to solve the problems of the times without ignoring them. Even through his poems we can see the pain of intellectuals and also the possibility of exile abroad. In conclusion, his poem can be defined as a representative work showing the inner side of the Confucian people of the time. 본 논문은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이후, 대일투쟁을 전개한 여러 사대부들 가운데 한주학파의 지도자 이승희(李承熙)가 남긴 한시에 주목한 논문이다. 이른바 상소투쟁을 전개하다 옥고를 치른 기간 동안 창작된 그의 한시는 당시 일본에 적극 투쟁했던 사대부들의 저항의지와 함께 복잡다단한 감정과 고뇌의 면모를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을사조약 체결 소식을 듣고 약 300여 명의 지역 유림과 함께 상경한 그는 ‘오적을 주살하고 조약을 파기’하라는 내용의 상소를 고종에게 직접 전하려 했다. 하지만 일본의 직·간접적 저지로 끝내 이 일을 성사시키지 못했고 이내 고향으로 내려와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려 했다. 하지만 이 일을 계기로 12월 6일(양력 1906년 1월 19일) 수인(囚人)이 된 이승희는 이듬해 4월 7일(양력 1906년 5월 1일)까지, 약 103일간의 옥고를 치르게 된다. 상소투쟁에 이은 옥중투쟁의 과정 속에서 그는 당대 대한제국의 상황을 오랑캐였던 원나라에 의해 패망했던 남송 말기의 상황과 비견하며, 마지막까지 투쟁했던 송나라의 충신들의 정신에 주목했다. 그들의 숭고한 정신을 지속적으로 환기하면서, 단순한 비관과 한탄을 극복하고 옥중 투쟁의 ‘동력’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는 이를 떠올리며 저항의지를 견고히 가져갔지만 동시에 보호국 처지가 된 조국의 참담한 상황을 외면할 수 없었기에, 비탄과 통한 가득한 심사를 시를 통해 표출했다. 출옥의 순간에는 치욕과 굴종만이 가득한 대한제국에서 더 이상 온전한 자신의 삶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의사를 내비치며, 해외 망명이라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는 일면도 노출하였다. 결론적으로 이 시기 작성된 그의 시들은 일본에 대한 비분강개한 저항의지를 잘 보여준다. 동시에 비탄과 절망, 감상(感傷)과 회한의 정조로 통한의 세월을 보내면서도 나름의 대안을 모색해야 했던 당대 유림의 절절하고도 치열했던 삶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즉 직면한 시대의 문제를 회피하거나 그것에 편승하지 않고 대의명분을 관철시키기 위해 온 몸으로 부딪치며 ‘행동’으로 나아갔던 당대 지식인의 실천적 면모를 대단히 잘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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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계 이승희의 곡부(曲阜) 방문 소회와 현실인식 고찰 - 『서유록(西游錄)』 소재 한시를 중심으로 -

        한길로 ( Han Gil-ro ) 한국문학언어학회(구 경북어문학회) 2021 어문론총 Vol.87 No.-

        과거 연행로 밖의 중국 지역을 방문하는 조선 지식인은 매우 드물었다. 유교의 본향(本鄕)이라 할 수 있는 산동성 곡부를 다녀온 인사들도 또한 극히 소수로, 곡부는 그 상징성에 비해 관련 작품 또한 대단히 적었다. 하지만 20세기라는 특수한 환경이 도래하면서 곡부에도 한국 유림의 발걸음이 점차 다다르게 되었다. 『서유록(西遊錄)』(1914)은 한계 이승희(韓溪李承熙, 1847∼1916)의 곡부 방문을 담고 있는, 근대 초기 곡부 관련 한문학 작품이다. 본서는 곡부를 방문하여 그곳 인사들과 교류하며 향후 한 · 중 유림의 협력과 합작의 기초를 닦던 이승희의 모습과 함께, 풍전등화와 같던 시대 배경 하에서 곡부를 바라보는 한국 근대 유림의 시선을 대표적으로 담고 있다. 즉 근대기 한국 유림의 곡부방문의 맥락과 실정을 담고 있는 초기의 기록이자, “연행록” 이후 중국과 관련된 한문 기행문 창작 양상을 대단히 잘 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특히 그의 시에는 선현(先賢)들의 자취를 직접 몸소 체험하게 된 것에 대한 기대와 설렘의 감정과 함께, 신해혁명 이후 세도의 변천으로 위기에 빠진 ‘현실적’ 상황에 대한 우려와 불안이 누차 표출되었다. 더욱이 목도한 곡부의 실상 역시 그의 예상과 다소 어긋나자, 성지에 대한 기대에는 점차 실망과 한탄이 더해져 보다 복잡해져 갔다. 즉 이제 곡부(曲阜)는 과거와 같은 단순한 동경이나 사모의 대상이 아닌 한·중 유림의 ‘합작’을 통해 지켜야 할, 존망의 기로에 놓인 불안한 ‘성역(聖域)’임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In the past, Korean intellectuals could not visit China, which was not an official route. The Qufu of Shandong Province, which is regarded as the sacred place of Confucianism and the origin of Chinese civilization, was also not easily accessible. It was a space that could not be easily visited unless it was under special circumstances, but it was a place of longing for many intellectuals to visit. In other words, after the 20th century, there was an opportunity to visit Qufu. Lee Seung-hee is a Confucian scholar of the modern era who visited Qufu for the first time, and 「Seoyoulok(西遊錄)」is the first book related to Qufu during the colonial period. This book is a literary work that records the exchange of Confucian scholars from Korea and China and the appreciation of visiting Qufu. Lee Seung-hee, who visited Qufu in 1914, witnessed the Confucian holy site and expressed his feelings through poetry. However, the 20th century was a crisis in Confucianism and a time when Confucius' authority fell. Therefore, he expressed his concerns and anxiety about the present and future. For him, Qufu was a place of admiration, but it was a sacred place to be preserved at the same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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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계 이승희의 한시에 나타난 도해(渡海) 전후 시정(詩情)의 전개

        한길로 ( Han Gilro )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2020 人文論叢 Vol.77 No.4

        본고는 1908년 해삼위로 건너가 한인 공동체와 독립운동기지를 구축하고 또 공교(孔敎) 운동을 전개하며 유도의 복원을 도모했던 한계 이승희(韓溪 李承熙, 1847-1916)의 한시를 검토하는 논문이다. 특히 도해(渡海)를 결정하고 그것을 이행하는 과정과 도해 이후의 다양한 활동 속에 담긴 그의 내적 고뇌와 번민의 일면에 주목하고자 한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말미암아, 대한제국은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당시 이승희는 이 조약의 위법성과 부당성을 규탄하고 ‘을사오적’의 주살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게 되는데 그는 이 일로 옥고를 치르게 된다. 이 일을 계기로 도해(渡海)를 결심하게 된 당시 그의 심사는 한시에 여실히 녹아 있었다. 해삼위로 떠나기 전에 창작된 그의 시는 미증유의 현실과 마주하게 된 비통과 분한이 가득했다. 각종 개혁조치로 인해 ‘종사와 강상(綱常)이 땅에 떨어지고, 오랑캐와 같았던 일본의 수중에 강토가 넘어가고 말았다’라는 상황인식 하에서 그의 내면은 끝을 알 수 없는 탄식과 애탄이 뒤엉켜 있었다. 특히 신하이자 지식인으로서 다가오는 ‘부끄러움’은 결국 그가 해외 이거(移去)를 결정하게 만드는 중요한 감정이 되었다. 도해 이후 그의 시에는 임금을 잃은 유신(遺臣)의 통한과 함께 ‘유민(遺民)이자 유민(流民)’의 처지로 전락해 버린 방랑객의 정서가 대단히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요컨대 그의 시는, 대한제국을 떠나기로 결심한 지식인의 고뇌와 함께 이역에 머물며 고군분투하던 한 유림의 우국우세(憂國憂世)의 일면을 잘 보여준다. 나아가 비록 몸은 타향에 있지만, 자신의 고유성과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또 한인들의 역량을 강화하여 독립운동에 일조하기 위해 헌신했던 근대 초기 재외지식인들의 분투를 담고 있다. 특히 그 당시 자신의 내면에 찾아온 고독감과 비애 그리고 조국애와 향수의 면모를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즉, 초기 이산문학의 원형적 면모를 담고 있는 그의 한시는 이방인을 자처했던 근대기 재중 지식인들의 치열했던 삶과 지적 고뇌의 일면을 여실히 웅변하고 있다. In 1908, Hangyue Lee Seung-hee (1847-1916) went to Vladivostok to establish a Korean community and an independence movement base. He was also a Confucian scholar who sought to restore Confucian teachings through the Confucius movement. In this paper, his Chinese poems are analyzed and reviewed. The literary characteristics, values, and literary significance, especially before and after exile, of the poems will be examined. The state and dynastic situation had become so unsettled that he decided to seek asylum abroad. At that time, he spent his daily life grieving and agonizing, acknowledging the reality. These characteristics are easily found in his poems; his heart, which had to leave his hometown and country, was very bitter and sad. His time overseas was spent in Vladivostok, Russia, and Manchuria, China; he spent approximately eight years overseas prior to his death. As he began to live abroad, some changes took place in his poems. His longing for the motherland and hometown in- creased, and the sorrow of asylum seekers without fixed dwellings was further enhanced. In summary, his poems show the anguish of an intellectual who decided to leave the Korean Empire for failing to withstand the collapse of the dynasty and the fall of the state. It also shows the psychological pain and grief of Confucian intellectuals struggling in a different space. Also, his literature shows the early and original aspects of Korean Diaspora literature. Furthermore, it is meaningful that his poems demonstrate both resistance and self-reliance that were never created in colonial Joseon, which was locked in colonial control and strict censorsh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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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태진(丁泰鎭)의 선택과 독립운동사에서 가지는 위치

        김희곤 연민학회 2022 연민학지 Vol.37 No.-

        Jeong Tae-jin was born in 1876, people in the same age group accepted republicanism along with the enlightenment movement and aimed for a democratic system in the 1900s, but Jeong Tae-jin maintained the traditional framework of monarchy. In addition, his group began to pioneer a base in Manchuria, but rather than cultivating independent forces or launching an independent war, he aimed for a Korean-Chinese solidarity based on Neo-Confucianism. In addition, he participated in the independence petition movement in 1919, but this was also a moderate route compared to the innovative Neo-Confucian scholars who exiled to Manchuria and pursued the independence war. Jeong Tae-jin's choice in the history of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shows the tendency of moderate conservative Neo-Confucian scholars. This is the same tendency as a member of Lee Seung-hee's academic background. In short, Jeong Tae-jin briefly participated in the construction of an independence movement base and the independence petition movement during the days of national crisis, but was more focused on academic exploration to find the roots of humans. 정태진이 참가한 독립운동은 덕흥보(德興堡) 개척과 파리장서운동으로 대표된다. 앞의 것은 1910년 국치 전후의 독립운동기지 건설이고, 뒤의 것은 1919년 파리강화회의를 겨냥한 유림들의 독립청원운동이다. 여기에서 정태진은 이승희를 비롯한 한주학맥의 성향을 고스란히 유지하였다. 정태진이 1876년생인데, 그 또래에서는 1900년대 들어 계몽운동과 함께 공화주의를 받아들이면서 민(民)이 주인 되는 체제를 지향하기도 했지만, 정태진은 군주주의라는 전통적인 보수의 틀을 유지하였다. 또 그가 속한 그룹이 만주에 기지를 개척하는 데 나섰지만, 독립군을 양성하거나 독립전쟁을 펼치기보다는 유교를 근본으로 삼는 한중연대를 지향했다. 또 1919년 파리장서에 서명하여 독립청원운동에 나섰지만, 이것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전쟁을 추구하던 혁신유림들에 견주어보면 온건한 노선이었다. 한국독립운동사에서 보는 정태진의 선택은 온건 보수 유림의 성향을 보여준다. 이것은 자신이 속한 이승희 학맥의 구성원과 같은 성향이다. 줄여 말하면 정태진은 국가 위난의 시절에 잠시 독립운동기지 건설과 독립청원운동에 참가했지만, 인간의 근본을 찾는 학문 탐구에 더 중점을 둔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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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과 그 학파(學派) 연구(硏究)의 현황(現況)과 전망(展望)

        李炯性 한국유교학회 2010 유교사상문화연구 Vol.39 No.-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은 19세기 영남 성주(星州)에서 줄곧 살며 학문을 탐구하다가, 30대 후반기에 들어 후학을 양성하기 시작하였다. 이진상은 학문적으로 사단칠정논(四端七情論)과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을 치밀하게 검토하면서, 그 논쟁의 문제점과 원인을 탐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주희(朱熹)의 사상을 시기별로 분류한 다음, 주자학의 본질이 그의 만년설(晚年說)에 있음을 간파(看破)하고 이를 토대로 논쟁이 되었던 성리사상을 심도 있게 분석하며 리(理)와 심(心)의 주재적(主宰的) 측면을 강조하여 심즉리설(心卽理說)을 체계화하였다. 이진상은 이러한 성리설에 입각하여 경학(經學)·역사학(歷史學)·역학(易學)·예학(禮學) 등을 연구하면서도, 선현의 저서에 대한 차의(箚義)를 통해 자신의 확고한 학문적 논지를 피력하였다. 이진상은 일찍이 아들 이승희(李承熙)에게 학문을 전수하기는 하였지만, 후 학을 양성하기 시작한 것은 30대 후반기부터이다. 그는 젊어서 후학을 양성하는 데 전념하기보다는 성리사상 이론 구축에 치력하였다. 때문에 그의 나이 50대 이전까지는 문인들이 많지 않았다. 그의 학문이 무르익은 53세 이후, 많은 후학들은 그에게 나아가 성리학을 배우며 그가 중시한 심즉리설을 수용하면서 한주학파(寒洲學派)를 형성하게 되었다. 당시 인근의 타학파들이 심즉리설을 비판하자 한주학파는 적극적으로 대웅하고 옹호하였다. 더욱이 그들은 현실의 위기적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항일운동(抗日運動)을 전개하여 국권(國權)을 수호하고자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의 대표적 문인은 아들 이승희를 필두로, 곽종석(郭鍾錫) 허유(許愈) 이정모(李正模) 이두훈(李斗勳) 윤주하(尹胄夏) 김진호(金鎭祜)장석영(張錫英) 등을 들 수 있다. 세간에서는 이들을 ‘주문팔현(洲門八賢)’이라 일컫는다. 그의 재전제자들은 이병헌(李炳憲), 이인재(李寅梓), 김창숙(金昌淑), 장지연(張志淵), 하겸진(河謙鎭), 최익한(崔益翰), 김황(金榥)을 들 수 있다. 이들 역시 항일의지를 가지고 당시 핍박받고 있는 현실을 타개(打開)하고자 하였다. 본 논고는 이진상과 한주학파에 대한 연구의 현황과 전망을 위해, 먼저 이 진상의 학문활동과 주요논저를 살펴본 다음, 한주학(寒洲學)에 대한 여러 연구업적들을 시기별로 구별하여 그 연구논문의 특성을 약술·소개한 것이다. 그리고 한주학을 계승한 한주학파, 즉 초전제자인 주문팔현과 재전제자에 대한 여러 연구논문을 살펴보아 그들의 사상을 점검해 보았으며 끝으로 한주학에 대한 연구 심화를 위해 몇 가지를 제안하는 것으로 마무리하였다. 十九世紀, 李震相居住於嶺南星奸哪幷開始于學問的探究. 在理學上, 他强調了理和心的主宰性, 進一步确立了‘心卽理說’. 他立足理學后, 主要硏究體系爲經學歷史學易學酵等, 通過比較先賢著書, 從而將备犠形式披露了自身學問的論旨. 李震相將此學問傳受於愛子李承熙, 自三十代後半期始傳于弟子. 五十三歲後, 傳敎于其他門人; 雖然形成了寒洲學派但受到周邊其他學派對此'心卽理說'的批判. 寒洲學派對姒責極地對應幷擁護了期币說, 他們又爲克復現實的危機狀況而展開了抗日運動, 欲守國權. 他的代表門人始自李承熙, 擴展到郭鍾錫許愈, 李正模·李斗勳·尹胄夏·金鎭路·張錫英等. 世人后稱爲洲門八賢, 李震相的再傳弟子爲李炳憲·李寅梓·金昌淑·張志淵·钶謙鎭·崔益翰·金榥等. 他們亦以抗日意志欲打開了當時被逼迫人民的現實. 本論文是針對李震相及其學派硏究現況與展望進行了考察. 論文先次考察李震相的學問活動和主要論著, 然後以硏究時期爲區分, 對於寒洲學的論文進行了略述并介紹了論文的特性. 其次是對寒洲學派和再傳弟子的硏究論文的考察, 從而 點檢了他們的思想. 最後爲對寒洲學的硏究深化而提案了數箇內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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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주 이기원의 삶과 한주학(寒洲學) 전승의 일면 고찰 : 독립운동 조력과 문집발간을 중심으로

        한길로(Han, Gil-Ro)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21 한국민족문화 Vol.78 No.-

        삼주 이기원(三洲 李基元)은 한주 이진상(寒洲 李震相, 1818~1886)의 손자이자 한계 이승희(韓溪 李承熙, 1847~1916)의 장자이다. 이러한 태생적 조건으로 말미암아 그에 대한 삶과 행적은 거의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그 역시 근대기 한주학, 특히 일제 강점기 한주학파의 활동과 전승에 있어서 간과해서는 안 될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그의 삶은 을사년의 ‘늑약’ 이후 수많은 지식인들이 고국을 떠나 만주·연해주를 포함한 해외로 이주한 역사적 사건 뒤, 국내에 남아있던 유림계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삶을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승희의 해외활동이 시작되자 국내에 남아 부친을 보좌하는 역할을 했다. 부친의 사후에는 학문의 계승과 지속을 위해 매우 절실히 요구되는 문집 발간을 주도했다. 일제의 검열 하 『대계집』 발간과 『한주집』 중간을 주도하며 한주학 계승의 교두보를 마련한 것이다. 동시에 부친과 더불어 선배 한주학파 지도자들이 보여준 일본에 대한 저항과 현실 참여 정신을 계승하며, 3.1운동과 영남 일대의 독립군 군자금 모금활동에 동참했다. 이 두 사실은 곧 한주학이 강조한 의리정신의 구현과 전승의 측면과 ‘접맥’된다. 즉 식민지배 하 급격히 근대로 전환되는 사회 속에서 그가 보여준 삶의 궤적은, 종장(終章)을 향해 흘러가고 있던 한국유학사의 끝에 위치한 사실상 마지막 유림 세대의 삶과 내적 고뇌를 다소나마 유추하게 만든다. Lee Gi-Won is the grandson of Lee Jin-Sang and the son of Lee Seung-Hee. Due to this background, there is not much research on Lee Gi-Won, and it is also briefly mentioned. However, he is also a member of the Hanju school during the modern era, and is especially a notable figure who has worked hard on the activities and succession of the Hanju school. His life reflects the lives of families who left Korea and moved abroad. It is also a symbol of Confucian scholars who have worked hard to maintain tradition in Korea. He assisted his father who went abroad and maintained his family by serving as the head of the household. When his father died, he tried to publish his literary works and reissued his grandfather"s literary works. At the same time, he resisted Japanese imperialism and devoted himself to Korean independence and self-esteem. At that time, Confucianism in Korea was toward the end, and his life illustrates the life of modern Confucian intellectuals and the efforts of traditional succe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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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계(白溪) 이기인(李基仁)의 「밀산추억기(蜜山追憶記)」연구

        한길로 ( Han¸ Gil-ro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21 嶺南學 Vol.0 No.76

        본고는 독립운동사 뿐만 아니라 한인 이주사에도 상당한 상징성을 갖고 있는 공간인 ‘밀산 한흥동’에 주목하며, 한계 이승희의 차남 李基仁(1894∼1981)이 남긴 「蜜山追憶記」를 분석하는 논고이다. 이 책은 부친을 만나기 위해 1910년 7월(음력) 부산을 출발하여 해삼위를 거쳐 밀산부에 도착, 1913년 경영상의 문제로 그곳을 떠날 때까지를 기록한 일종의 회고록(회상기)이다. 이 자료는 먼저 국내에서 韓興洞까지의 이동 경로를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어 당시 한국인들이 어떠한 경로를 통해 해삼위와 북만주 밀산까지 당도했는지, 또 그 과정에서 어떤 어려움에 봉착했는지를 비교적 상세히 담고 있다. 동시에 연해주 일대 지도자와 각 단체 사이의 현실인식에 관한 ‘온도차’나 대립의 일면 또한 생생히 기술하고 있다. 요컨대, 그의 회고는 이미 공개된 독립운동 관련 자료들이 미처 조명하지 못했던 지점을 보완하는 의미가 있고 당시 상황을 실감나게 기술하고 있어 그 때의 실정을 예측하게 만든다. 더불어 한문글쓰기를 통해 당대 상황과 분위기의 안팎을 생생히 기술하고 있어 『한계유고』를 포함한 한흥동 관련 기록과 기록 사이의 공백을 메워내고 있다. 즉 국내외를 오가며 묵묵히 독립운동에 이바지한 독립운동가 2세들의 인고와 고초 가득했던 삶을 파악하고 이해하는데 요긴한 자료라 할 수 있다. This paper analyzes the 「Memoirs of Millsan」Written by Baekgye Lee, Gi-in (1894-1981), the second son of Lee Seung-hee. In 1910, he went to Vladivostok from Busan to see his father. He then moved to Milsan, North Manchuria, where he eventually met his father. In 1913, the last story was about moving from Milsan to Andong due to economic problems. In this paper, I analyzes the Lee Gi-in's memoir. In particular, This paper is focused on his experience in traveling and how he remembered the situation in Milsan. First, The book also details the route from Busan to Vladivostok and the route to Millsan. And In particular, they explain what they experienced and how they solved many problems. At the same time, it includes a phase of division and conflict in the Korean community living in Maritime Province(沿海 州). In particular, His book shows the lives and activities of the descendants of independent activists. Through this work, I expect new discoveries and in-depth interpretations of similar 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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