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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현 한국서원학회 2024 한국서원학보 Vol.19 No.-
안동의 西磵祠는 淸陰 金尙憲(1570~1652)을 제향한 祠宇이다. 서인-노론은 정권을 장악한 이후 영남지역에 영향력을 확대하는 방편의 하나로 서원을 활용했다. 영남의 기존 서원을 서인-노론계 서원으로 전향시키는 한편, 서인-노론의 주요 인물을 제향하는 서원과 사우를 건립하였다. 하지만 안동은 영남 남인의 주요한 지역으로 다른 곳에 비해 완고한 곳이었다. 이때 김상헌이 소환되었다. 김상헌은 본관이 안동이고, 생전 두 차례 안동에 우거한 이력이 있었다. 또한 지역 명사들과 교류를 통해 다수의 묘도문자를 찬술하였으며, 문중 사업의 정비에 힘쓰기도 했다. 이런 김상헌의 안동에서의 활동은 그 후손들 역시 종종 안동에 머무르며 김상헌의 행적을 회고하는 시를 짓고 학습의 장소로 삼기도 하는 등 안동과 유대를 지속해 나갔다. 이는 안동의 서인-노론계 사족들이 활동 공간으로 서원을 마련하는데 제향 인물로 김상헌을 주목했던 배경이었다. 1738년(영조 14) 안동 법상동에 김상헌을 제향하는 鶴東書院을 마련하려 했지만 안동 남인계 사림에 의해 폭력적인 방법으로 파괴되는 일이 발생했다. 안동의서인-노론계 사족들은 이후 다시 김상헌을 제향하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西磵書堂을 건립하고 사액서원으로 전환하기 위해 노력했다. 결국 1786년(정조 10) 사액 사우로 전환에 성공하게 된다. 비록 서원으로 사액을 받지는 못했지만 당시 서원과 사우의 구분이 강고하지 않았던 점을 상기해 볼 때 이는 영남의 주요 지역에 노론의 영향력 확대 노력이 효과적이었음을 알 수 있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位于庆尚北道安东市丰山邑的西磵祠是祭祀清阴金尚宪(1570~1652)的祠宇. 对于金尚宪来说, 安东不仅是他的贯乡, 也是其经济基础得以确立的地方. 金尚宪的先代在首尔建立了根据地, 在中央活动的同时, 与安东保持联系, 这种家风也遗传给了金尚宪及其后代. 金尚宪除了使用“清阴”作为号外, 还借用他生活过的地名, 使用了“石室山人”·“西磵老人”等号. 其中“西磵老人”是他晚年在安东生活时使用的. 金尚宪曾两次在安东隐居. 1618年, 宣祖的继妃仁穆王后被幽闭于西宫[德寿宫], 当时围绕废妃问题展开论议, 金尚宪因此迁居安东. 1637年, 由于丙子胡乱(1636)的余波, 朝鲜向清投降, 主战论者金尚宪从南汉山城出来, 直接前往安东. 因此, 安东是金尚宪在经历政治浮沉时隐居的地方, 至今仍留有西磵祠・木石居等相关遗迹. 安东是岭南南人的主要根据地. 在西人系掌握政权后, 西人尝试进入岭南各地, 并取得了一定成果. 岭南的南人结集于退溪学派, 通过与近畿南人的结盟来应对老论的影响力扩张. 然而, 由于仕途受阻・老论的怀柔与包摄・戊申乱的影响等多种原因, 许多人及家族在英祖时期前后从南人转向老论. 岭南各地建立祭祀西人系人士的书院的事实反证了这一点. 然而, 被称为南人本山的安东地区, 南人的抵抗比其他地区更为激烈. 在此期间为了向安东扩张势力, 老论召唤了金尚宪. 西人-老论掌握政权后, 岭南南人难以进入中央. 岭南南人探索了多种保持士族地位的方法. 其中之一是通过书院掌握乡论. 岭南的士族和有力家门确保祭祀先祖中以学德闻名或在中央有活动履历的人物的祠宇或书院, 并通过这些祠宇或书院主导乡论. 如果难以单独设立祭享祠宇或书院, 则通过学脉配享于现有书院. 这种岭南地区的倾向也被西人-老论用作扩大其在岭南地区影响力的方法. 安东地区的西人-老论系士族需要一个能让安东地区士林接受的人物, 以建立他们可以活动的书院. 李滉曾提出应在有书院配享人物遗迹或缘故的地方建立书院. 在安东的西人-老论系士族看来, 金尚宪正是符合这些要求的人物. 1738年(英祖14年), 几乎建成祭祀金尚宪的鹤东书院, 但被安东儒生动用武力强行破坏. 此后, 主导鹤东书院建立的安东西人-老论系士族持续努力, 试图建立祭祀金尚宪的书院. 他们通过建立西磵书堂, 确保讲学空间, 努力收敛地区社会舆论. 这也是参考当时现有书院从书堂或精舍起步升格为书院的事例的结果. 在此过程中, 通过与在中央活动的安东金氏壮洞派的联系, 以及中央派遣的老论出身地方官的支持, 成功获得了西磵祠的赐额. 西磵祠未能获得书院的名义, 但考虑到当时书院的讲学功能已弱化, 与祠宇的区分变得模糊, 这一意义仍然重大. 正祖虽未允许西磵书堂升格为书院, 却给予了祠堂的名称. 然而, 这仅是安抚岭南士族的修辞而已. 安东西磵祠的建立和赐额是老论在岭南核心地区渗透成功的象征性事件.
정성식 동양고전학회 2011 東洋古典硏究 Vol.45 No.-
본 논문의 목적은 17세기 초 김상헌과 최명길의 양면적 역사인식을 고찰하여 그들의 사상적 특성이 각각 어떠하였으며, 그 양면성의 융합과 지양의 가능성을 탐색하는데 있다, 김상헌은 의리사상과 춘추정신을 사상적 기반으로 하여 인간의 행위와 가치의 기준으로서의 인도를 지켜 나가는 경상의 원리를 강조하며 청나라 군대에 의한 굴욕적인 타협을 거부하고 ‘척화(斥和)’를 주장하였다면, 최명길은 나라와 민족을 위기에서 구출하고자 이념적 대의에 앞서서 현실의 타개를 우선적으로 중요시하여 잠시 명분을 굽혀서라도 국가와 백성을 보존하고자 하는 실제적 논리를 전개해 후일을 도모하고자 ‘주화(主和)’를 선택하였다. ‘척화’와 ‘주화’로 상반된 양인의 입장은 상도(常道)와 권도(權道)로 요약될 수 있으며, 두 사람의 현실대응 방법이 달랐던 근본토대는 ‘척화’를 주장한 김상헌의 입장이 명분과 의리를 추구하는 주자학적 사유체계에서 도출된 것이었음에 비해 ‘주화’를 주장한 최명길의 입장은 실천적 주체의 확립과 주체적 판단을 중시하는 양명학적 사상을 기반으로 드러난 것이었다. 김상헌의 ‘척화론’과 최명길의 ‘주화론’의 갈등은 단순히 과거에 한정되는 것만은 아니라고 보며, 이들의 각각의 입장과 그 양면적 역사인식을 조화롭게 지양함이 우리들이 풀어가야 할 남겨진 숙제라 하겠다. 즉 이념성과 현실성, 경상과 권변을 어떻게 발전적으로 소통하고 융합시켜야 나가야 하는지 관심과 노력이 시대적 과제로 요청된다. 다양한 가치관의 갈등을 안고 있는 현대사회에 있어서 의리와 실리의 조화라는 철학적 방향을 추구하고자 함에 본 논문의 일정한 의의를 두고자 한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look about ambivalent recognition of history of Kim, Sang-Hun(金尙憲) and Choi, Myung-Kil(崔鳴吉) in early 17th and characteristics of their ideological How were each of its two-sided castle to explore the possibilities of convergence and is avoided, ‘Advocacy of war(척화)’ and ‘Advocacy of peace(주화)' contrary to the stance of an optional topcoat(常道) and Kwondo(权道) can be summed up, the two methods differed from the reality of the corresponding fundamental foundation ‘Advocacy of war’ justification for the alleged admission of Kim, Sang-Hun and loyalty schemes to seek reasons for Neo-Confucianism was derived from the well compared to the ‘Advocacy of peace' of the alleged admission Choi, Myung-Kil practical importance of the subject to establish and subjective judgments derived from philosophy of Yang-ming(陽明學) system was the reason.
조선 세 중신(重臣)의 심양(瀋陽) 구류와 교유 ― 김상헌(金尙憲)·최명길(崔鳴吉)·이경여(李敬輿)의 경험
오항녕 ( Oh Hang-nyeong ),최옥형 ( Cui Yu-heng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9 大東文化硏究 Vol.105 No.-
청나라 수도 瀋陽에는 병자호란 이후 조선에서 잡혀 온 포로와 인질, 분주히 오가는 사신들이 머물렀다. 침략과 패배를 겪은 조선인에게는 특수하고 복합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이었다. 본고에서는 심양에 억류되었던 조선의 세 重臣인 김상헌, 최명길, 이경여를 중심으로 심양살이의 실제와 의미를 살펴보았다. 특히 ‘척화(=항전)와 주화’의 당사자들이 심양에서 같은 곳에 구금되어 서로 이해하고, 그 경험이 이어지는 과정에 주목하였다. 심양은 치욕과 분노의 공간이기도 했지만, 현실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간은 서로의 마음만 쳐다볼 수 있는 시간이 되기도 하였다. 병자호란 전후의 노선을 ‘經權’의 관점에서 풀었던 김상헌과 최명길은 심양 구금 생활을 통해 오해를 풀고 정당성을 얻었다. 여기에 이경여도 간여하면서, 현실 대응이 달랐을 뿐 명분과 지향은 같았다는 인식에 도달하였다. 심양의 경험은 이후 송시열, 남구만, 이민서, 김수항, 김수증 등 세 중신의 후손이자, 조선의 정치-사상계의 주역들에게 전해졌다. 김상헌은 의리의 표상을 굳건히 하였고, 최명길은 한켠의 의심을 씻고 나라를 구한 공을 인정받았으며, 이경여는 온후함으로 이들 사이의 지렛대가 되었고 復讐雪恥의 또 다른 기둥으로 떠올랐다. 심양의 영향은 이들 중신 집안의 혼인과 교유에서 나타났다. 그러나 己巳士禍와 갑술환국을 거치면서 심양의 경험과 기억은 파탄났다. 최명길의 손자 최석정이 김수항의 賜死를 주도했던 오시수 등을 천거하여 등용한 일이었다. 김수항의 아들 김창협, 김창흡은 최석정에게 절교 편지를 보냈다. 이 절교는 20여 년 뒤 최명길의 손자 최석항이 앞장서서 김상헌의 증손자 김창집 등과 이경여의 손자 이건명, 이이명 등을 무고하게 죽이는 신임사화에서 더 악화된 모습으로 재현되었다. Shenyang, the capital of Qing China, was the place of the captives, hostages, and envoys of Choson after the Qing Invasion in 1636. For the people of Choson who defeated Shenyang was also the place of complex sentiments with indignity and dishonor. I studied the life and reconciliation of the three persons of Choson who did a leading role at the dispute during the Namhan-fortress resistance and were interned in Shenyang one by one. Kim Sang-heon, Choi Myeong-gil and Yi Kyeong-yeo were transferred and imprisoned with different reasons and times each other. For them Shenyang was the place of rage and resentment and the chance to reflect the idea of the others because of the time of unable. The conflict between the cause and response could resolve in this time. The experience of Shenyang prison transferred and reminded Song Si-yeol, Nam Gu-man, Yi Min-seo, Kim Su-hang who were their descendants and followers with positive memories strengthening the representative of Kim Sang-heon of the cause in the resistance 1636, recognizing the merit of the negotiation of Choi Myeong-gil, endowing the new face to Yi Kyeong-yeo. The experience appeared in marriages and relationship among them. However the favorable relationship was ruined in the course of the calamity of literati in 1689. After the restoration of 1694 Choi Seok-jeong, a grandson of Choi Myeong-gil, recommended Oh Si-su, Yi Seo-wu etc. who insisted the death penalty on Kim Su-hang, a grandson of Kim Sang-heon, and Yi Sa-myeong, a grandson of Yi Kyeong-yeo in 1689. Kim Chang-hyeop and Kim Chang-heop sent a letter breaking off friendship. The break in 1698 resulted in the disastrous false accusation and oppression of the Soron to the Noron in 1721~1722.
지두환(Ji, Doohwan) 포은학회 2017 포은학연구 Vol.20 No.-
조선전기 주자성리학이 심성논쟁을 거치며 심학화된 조선성리학으로 변모해갔다. 이를 반영하듯 서원이 건립되기 시작하였다. 명종 9년에 영천에포은 정몽주를 모신 임고서원이 사액을 받으니 선조 6년에 개성에 숭양서원을 세워 선조 8년에 사액을 받는다. 인조반정이 일어나 정묘 병자호란을 거치며 척화를 주장하던 청음 김상헌이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살아 돌아와 효종대에는 북벌론을 주도하여 다음 세대에게 물려준다. 현종대에 종법논쟁인 예송이 일어나 서인과 남인이 대립하여 1차예송은 서인이 승리하여 정국을 주도해간다. 이에 현종 9년에 숭양서원에 김상헌을 배향하여 포은 정몽주의 충절을 계승해간다. 김상헌의 손자인 문곡 김수항, 곡운 김수증, 증손자인 농암 김창협, 현손인 미호 김원행으로 이어지며 숭양서원은 서인이 주도하는 서원으로 자리잡는다. 그러나 2차 예송에서 서인 패하고 숙종 초반 남인이 정국을 주도하다가 숙종 6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다시 정국을 주도하게 되자 이를 반영하듯 숙종 7년 잠곡 김육, 포저 조익을 숭양서원에 배향하여 숭양서원은 다시 서인이 주도하는 서원으로 굳건히 자리잡는다. 영조대 두문동 72현의 절의를 추모하며 개성에 추모비를 세우자, 두문동 72현을 대표하는 정몽주를 모신 숭양서원에 우현보, 조견, 이고 등 두문동72현을 숭양서원에 배향하자는 논의가 일어나 정조 8년 우현보를 대표로 배향하였다. 이에 도곡 이의현이 주도하여 포은 문집도 내고 제향도 주도하였다. 이를 이어 청음의 현손인 김원행이 위패를 고치고 제향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남유용은 숭양서원에서 삼선생춘추향축문(三先生春秋享祝文)을 지어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이렇게 영조 정조대 노론이 주도하던 숭양서원은 순조 23년(1823)에 유수 김교근(金敎根, 1766∼?)과 김이재(金履載, 1767∼1847)가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를 중건하고 사우와 강당을 중수하는 등 순조 이후에는 안동 김씨 등 노론이 주도하는 서원이 되었다. Neo-Confucianism of early Joseon Dynasty transform into JoSeon Neo-Confucianism after a series of Mind-Nature controversy(心性論爭). Reflect this change, the Seowon(書院) began to build. In the 8th year of King Myungjong s reign, Imgo Seowon(臨皐書院) in Yung-cheon(永川), where Jung-MongJu(鄭夢周) enshrined, bestowed the title board. In the 6th year of king Seonjo’s reign, Sungyang Seowon(崧陽書 院) was built and bestowed the titel board in the 8th year of king Seonjo’s reign. ‘King Injo Restoration’ has occurred and After Byungjahoran(the Manchu invasion), Chung-eum Kim-Sangheon(淸陰 金尙憲), who claim reject negotiations with Qing dynasty, was taken prisoner in captivity. Kim-Sangheon(金尙憲) led theory of Northern Expeditions(北伐論) after returning to Joseon, and pass down his theory to the next generation. In King Hyeon-jong’s reign, Ritual Controversy(禮訟論爭) broke out between Seo-in party(西人) and Nam-in party(南人). In the first Controversy, Seo-in party(西人) won and led the political situation. Accordingly, in the 9th year of King Hyeonjong’s reign, Kim-SangHeon(金尙憲) enshrined in Sungyang Seowon(崧陽書院) and Succeed to Jung-MongJu’s loyalty. On that account, Sungyang Seowon(崧陽書院) led by Seo-in party of Moongok Kim-SooHang(文谷 金壽恒) and Gokwoon Kim-Soojeung(谷雲 金壽增) (Kim-SangHeon’s Grand Sons), Nongam Kim-ChagHyeop(農巖 金昌協)(Kim-SangHeon’s great-grandson). Miho Kim-Wonhang(渼湖 金元行) (Kim-SangHeon’s great-great grandchildren). But in the Second Controversy, Seo-in party(西人) lose an argument. So in king SookJong’s early reign, Nam-in party(南人) led the political situation. In the 6th year of king Sookjong’s reign, Seo-in party(西人) led the political situation again. Then in the 7th year of King Sookjong’s reign, Jamgok Kim-Yook(潛谷 金堉) and Pojeo Jo-Yeek(浦渚 趙翼) enshrined in Sungyang Seowon(崧陽書院). In King Yeongjo’s reign, monument for cherish Doomoondong 72 loyalists(杜門洞 72賢) built in Geaseong(開城). Accordingly, discussion of ‘72 loyalist’s enshrined in Sungyang Seowon’ arose. In 8th year of King Jungjo’s reign, Woo-HyeonBo (禹玄寶) elected representative of Doomoondong 72 loyalists(杜門洞 72賢) and enshrined in Sungyang Seowon. Following that Dogok Lee-EuiHyeon(陶谷 李宜顯) compiled Poeoun’s collection of literary works. Kim-Wonhang(金元行) mended ancestral tablet(位牌) and led ancestral rites. Nam-YooYong(南有容) wrote written prayer(samseonsang-choonchu- chookmoon, 三先生春秋享祝文). Like the preceding, Sungyang Seowon(崧陽書院) led by No-ron(老論) party in Yeongjo’s reign and Jungjo’s reign. In 23rd year of king SoonJo, Kim-Gyogeun(金敎根) and Kim-YeeJae(金履載) reconstructed Dongjae(東 齋, Studying room in the east), Seojae(西齋, Studying room in the west), Sawoo(祠宇, shrine) and lecture hall(講堂). After King Soonjo’s reign, Sungyang seowon led by No-ron party like the Kims of Andong(安東 金氏).
18세기 서원건립을 둘러싼 향촌사회의 갈등관계-영조 14년(1738) 안동 김상헌서원 건립문제를 중심으로-
정진영 조선시대사학회 2015 朝鮮時代史學報 Vol.72 No.-
This study reviewed the confrontation and conflicts between Namin Party and Noron Party over the issue of establishing Kim Sang-Heon Seowon in Andong in the 14th year of King Yeongjo’s reign (1738) under the political conditions including the status of Namin Party in Yeongnam region in the early 18th century, the actual power of Namin Party, the suppression policy of Noron Party against Namin Party and the control policy of Noron Party through protection of Soron Party for Namin Party. The biggest key part of the measure of Noron Party for Namin Party in Yeongnam region was to transform Namin Party into Noron Party whereby Namin Party is divided and dismantled. Therefore, the local society in Yeongnam region focused on Andong in the early 18th century had to face the issue of the advent of new Noron Party. They could compete and confront with the existing Namin Party under the support and sponsorship of the local officials including governors and auditors as well as the central officials of Noron Party. Noron Party showed their presence by dominating Hanggyo, the Confucian temple and school, and establishing Seowon that paid tribute to the figures of Noron Party and enshrining them. Such activities were very useful means to dominate the power of the local society as well as to advance into the central political world. The situation was not very different in Andong, which was so-called the key area of Namin Party. The new Noron Party in Andong that was turned from Namin Party to Noron Party established Kim Sang-Heon Seowon with an active cooperation and support by the local officials and the central ruling power of Noron Party. However, Namin Party who couldn’t overlook broke down the building with physical force. Noron Party defined such Namin Party as disturbing people(亂民). Namin Party members in Andong were under disadvantages. They had little methods to deliver their positions. They had to fully rely on one member of Soron Party, Park Moon-soo. This was the situation in Yeongnam region at that time. Noron and Soron Parties were fiercely confronted with each other in the government over the issue of the damage of Kim Sang-Heon Seowon. The key issue was about reconstructing the destroyed Seowon. The Seowon was not permitted to be reestablished in King Yeongjo’s reign but was rebuilt as a shrine named Seogansa in the 10th year of King Jeongjo’s reign (1786). However, Noron Party members in Andong were exercising their political voice by dominating Hyanggyo, which had been the basecamp of Namin Party. On the other hand, the status of Namin Party in Andong greatly shrank in the local society as well as Yeongnam region. Hyanggyo in Andong was kept under the control of Noron Party since then. 이 연구는 영조 14년(1738) 안동에서 김상헌서원 건립을 둘러싼 남인과 노론의 대립․갈등을 18세기 전반 영남의 남인이 처한 사정, 곧 남인의 실세, 노론의 남인 억압책, 소론의 남인 보호를 통한 노론 견제책 등의 정치적 상황 속에서 검토해 본 것이다. 노론의 영남 남인에 대한 대책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남인의 노론화와 이를 통한 남인의 분열과 해체였다. 이로써 18세기 전반기 안동을 중심으로 한 영남의 향촌사회는 신생노론의 등장이라는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수령과 감사 등 지방관, 나아가서는 중앙의 노론 당국자들의 지지와 지원을 통해 기존의 남인세력과 경쟁․대립할 수 있었다. 노론세력은 향교의 장악과 노론계 인물의 서원 건립이나 배향을 통해 그들의 존재를 드러냈다. 이러한 활동은 향권의 장악뿐만 아니라 중앙정계로의 진출에도 아주 유용한 수단이었다. 남인의 핵심지역으로 일컬어지던 안동에서도 사정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남인에서 노론으로 전향한 안동의 신생노론은 지방관과 중앙 노론 집권세력의 적극적인 협조와 지원을 받아 김상헌서원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이를 묵과할 수 없었던 남인은 물리력을 동원하여 이를 부셔버렸다. 노론은 이런 남인을 亂民으로 규정했다. 안동의 남인들은 불리했다. 그들의 입장을 전달할 방법이 별로 없었다. 소론인 박문수에게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당시 영남의 처지였다. 김상헌서원의 훼파문제를 두고 노론과 소론은 조정에서 격렬하게 대립했다. 그 핵심은 파괴된 서원의 재건문제였다. 서원의 재건은 영조 연간에는 허락되지 않았지만, 정조 10년(1786)에 마침내 서간사라는 사당으로 마무리되었다. 이것은 정조의 남인 활용을 위한 정치적 포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김상헌서원 건립 사건은 이후의 향촌지배세력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간 남인들의 근거지였던 향교는 이제 노론의 수중에 있었고, 노론은 향교를 통해 정치적 발언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따라서 안동 남인의 위상은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에도 안동의 향교는 여전히 노론의 근거지로 남아 있었다.
청음 김상헌의 시에 나타난 심양 체험과 그 인식 : 『설교집』을 중심으로
김기림 이화어문학회 2015 이화어문논집 Vol.37 No.-
청음 김상헌(1570-1625)은 청을 황제국으로 인정하지 않고 반청의식을 강하게 주장했던 조선 중기 문인, 정치인이었다. 그 대가로 압송되어 청의 감옥에서 갇혀 살아야 했다. 이 경험을 그는 시집인 『설교집(雪窖集)』에 기록하였다. 『설교집(雪窖集)』은 『청음집』 권11-13에 해당된다. 각각 『설교집』, 『설교후집』, 『설교별집』 등의 제목이 있다. 이 시집에서 김상헌은 청나라 감옥에 갇힌 자신을 촉백(蜀魄), 적선(謫仙), 골짜기에 떨어진 명홍(冥鴻) 등에 비유한다. 나라를 떠나 귀국하지 못하는 신세, 임금으로부터 버림받아 이역에 떨어진 신세, 포부는 크나 인정받지 못한 신세 등을 상징한다. 또한 선우 땅에서도 한나라에 대한 충정을 지켰던 소무(蘇武)나 초에 대한 마음이 변치 않았던 종의(鍾儀)에 비견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김상헌은 조선과 전혀 다른 심양이란 공간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재인식하는 시간을 갖게 되면서 조선인임을 더 뚜렷하게 자각했다. 그러면서 심양을 오랑캐의 공간, 호구(虎口)와 같아 기피하는 공간, 새조차 날지 않고 바람만 불어 모래 가득하고 생명이 없는 땅으로 인식했다. ‘氈城’, 조선아이, 중국 계집아이, 오랑캐 아이(羌兒) 등으로 병치시키면서 오랑캐임을 부각하고, ‘모래 언덕 망망하니 새조차 날지 않고 하얀 연기 피는 구탈 바라보니 흐릿하네’, ‘북녘 바람 불어와 오랑캐 사막 어둑하고 저녁 빛은 처량하여 차가운 해 잠겨 있네’ 등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이는 청나라가 김상헌에게는 죽음의 땅이며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없는 공간임을 의미한다. 이러한 심양에서 일탈하여 고향의 공간-조선, 신선의 공간, 꿈의 공간으로 이동하는 의식을 보인다. 심양 공간에 발을 내딛지 않고 오랑캐 땅으로부터 벗어나 자신만의 깨끗한 공간에 머물고자 하는 욕구를 표출한다. 심양 공간에서 ‘떠 있는’ 삶을 스스로 선택하는데 이는 의리정신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 청을 황제국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여 ‘땅에 대고 절하지 않음’으로써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즉 그의 ‘조선인’이라는 의식은 힘의 원리를 거부하고 의리를 지키며 오랑캐 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중화문명을 계승, 고수하고자 하는 의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Kim Sang-heon was a literary man, statesman in Chosun Dynasty period. He resisted against the Qing Dynasty so had been arrested and imprisoned for it. seolgyojip is a book of poems which he wrote in Qing jail. This book was a set of three volumes-seolgyojip(설교집), seolgyohujip(설교후집) seolgyobyeoljip(설교별집). There were five hundred theree poems in seolgyojip(雪窖集). Kim Sang-heon likened himself to So-moo(蘇武) who was person in Han Dynasty and lived as a prisoner in land of Suwoo- north barbarians but never changed his royalty to Han Dynasty. Also Kim Sang-heon likened himself to a cuckoo which the bird regarded as the ghost of emperor of Chok(蜀) who couldn’t come back to home. He regarded Shenyang(瀋陽) as a wasteland, the place of north barbarians, the lion's den. This means that the land of Qing was place of death to Kim Sang-heon. He reality had been threatened by the emperor of Qing. Kim Sang-heon imagined that he escape from Shenyang to hometown and dream. This signified he resisted against the Qing Dynasty. This thought was rooted royalty to Chosun Dynasty and Ming Dynasty. So he showed a national pride.
성인근(Sung-in geun) 한국서예학회 2021 서예학연구 Vol.39 No.-
조선의 전각은 임진왜란 이전 주로 장인의 손에 의해 제작되었고, 16세기를 기점으로 명대풍의 수용으로 문인전각이 비롯되었다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조선 중기에 다양하게 나타나는 인장문화가 명대풍의 전래만으로 온전히 설명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이 논문을 작성하게 된 배경이다. 이 논문에서는 17세기 서인계와 남인계로 대별되는 김상헌과 허목 전각의 연원과 지향점을 살펴보고, 주로 서인계 인풍의 성립배경과 특질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였다. 전서에서 철저한 소원주의를 표방한 미수와 달리 당시 연구ㆍ출간된 ‘전서 38체’ 관련 서적의 보급이 서인계 전서와 인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파악하고, 전서 관련 서적들의 출간과 당대인들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또한 안동김씨 가문에서의 전승양상을 비롯하여, 다른 문중에서의 수용과 확산양상까지 확인하여 동시기 두 방향으로 나누어진 인풍의 서예ㆍ전각사적 의미를 재고해보고자 했다. 우선 김상헌을 중심으로 한 서인계의 전각풍을 살피기에 앞서 당시 유행한 ‘전서 38체’란 무엇이었고, 어떠한 자료로 생산 ㆍ 유통되었으며, 특히 서인계를 중심으로 수용 ㆍ 확산되었는지를 살폈다. 이와 달리 남인계에서는 허목을 필두로 한자의 모형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진전해 서인계와 차별화하고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양자 모두 한자의 초기 모습인 전서를 추종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전서와 인장에서 나타난 인식을 축약하여 서인 계열은 ‘상고주의(尙古主義)’, 남인 계열은 ‘소원주의(溯源主義)’로 구분하고자 하였다. 필자는 기존 논문에서 미수 허목의 인장 자료를 조사하여 미전에 나타난 전서인식과 인풍의 특질을 기술한 바 있다. 이 글에서는 주로 16-17세기 전각의 다른 한 축인 김상헌을 중심으로 한 서인계열의 인풍과 안동김씨 안에서의 영향관계, 그리고 다른 문중으로의 확산 양상을 확인하고자 하였다. 김상헌 중심의 서인계열 인풍에서는 우선 ‘전서 38체’의 적극적인 수용과 전각에서의 다양한 시도를 눈여겨보았다. 이를 크게 ‘자체(字體)의 특징’과 ‘장법(章法) ㆍ 양식(樣式)의 특징’으로 분류하였고, 세대별, 인물별, 문중별 수용과 계승양상을 확인하고자 하였다. 据悉,朝鲜的篆刻在壬辰倭乱前主要由匠人制作,以16世纪为起点,因明代风格的收容,由文人篆刻组成。但是,关于朝鲜中期出现的各种印章文化能否仅以明代风格的传入完整地说明的问题,是撰写这篇论文的背景。 本论文考察17世纪西人系和南人界的金尚宪和许穆篆刻的渊源和指向点,主要就西人系印风的成立背景和特质进行论议。与篆书中彻底的遡源主旨的眉篆不同,当时研究、出版的38体篆书籍的普及对西人系篆书和印章产生了决定性影响,希望观察篆书相关书籍的出版和上代人的反应。 确认38体的收容和对西人系的影响,正式确认始于金尚容、尚宪兄弟的西人系列印风的特质。 另外,包括安东金氏家族的传承面貌在内,扩大在其他门中的收容范围,希望重新思考同时期分为两个方向的印风的书艺、篆刻史的意义。 笔者曾在现有的论文中调查许穆的印章资料,记述了眉刻上出现的篆书认识和印风的特质。 本文主要以16-17世纪篆刻的另一个轴心金尚宪为中心,确认西人系列的印风和安东金氏内部的影响关系,以及扩大到其他门中的扩散相。在金尚宪为中心的西人系列印风中,首先关注了 38体篆书 的积极采用和篆刻上的各种尝试。大体上将其归类为 字体特征 和 章法、样式 的特征,以确认各代、人物别、门中的收容和继承形态。
황만기(黃萬起) 한국국학진흥원 2012 국학연구 Vol.0 No.20
본 논문은 청음 김상헌이 안동에 우거하면서의 활동상황과 그의 문학적인 측면을 살펴본 논문이다. 청음이 안동에 머물렀던 기간은 약 7년이다. 체류한 시기는 두 차례로 확인된다. 첫 번째는 1618년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해야 한다는 북인정권의 혼정에 모든 것을 단념하고 어머니 이부인을 모시고 풍산으로 낙향하여 1621년 봄 양주 석실로 돌아가기까지 3년간 체류하였다. 이때 청음은 청원루에 기거하면서 삼구정이나 주변의 경치나 인물들을 탐방한 것으로 확인된다. 두 번째는 병자호란이 발발한 지 한 달 만에 인조가 성하지맹城下之盟을 맺고 남한산성을 나갈 때 그는 병든 몸으로 하직인사를 고하고는 마침내 정축년(1637) 2월 7일 풍산으로 낙향한 것이다. 이듬해 서미동 목석거로 은거해서 1640년 11월 심양으로 압송되기 전까지 3년 9개월간의 생활이다. 문학적 활동은 두 번째 시기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두 번째 시기에서 청음은 북벌에 대한 의지를 다지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형식적으로는 은거생활을 지향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청에 대한 복수심을 불태우는 시간이었다. 이후 청음은 1640년 12월 심양으로 압송되어 그곳에서 6년간 억류되어 있으면서 북벌에 대한 집념은 더욱더 확고하게 된다. 그리고 심양에서 돌아온 이후부터는 북벌에 대한 구체ㅈ거인 행동실천방안을 모색하게 된다. 이런 그의 북벌사상은 효종의 국가통치이념과 맞물려 한층 더 급물살을 타게 된 것이다. 그러나 북벌의 꿈을 이루기 전에 청음은 세상을 떠난다. 비록 생전에 꿈을 성취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이런 사상은 문인인 우암 송시열을 통해 최고조의 상황까지 도달하게된다. 이 북벌사상이 연암시대에 와서는 국제성세의 흐름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는 등 북벌 자체가 가지는 한계도 있었지만, 독립국가체제형성을 위한 격분의 아우성이었음을 감안하면 소홀히 취급할 수 없는 부분이다. 결국 이 북벌北伐 사상이 한 세기 뒤에 와서는 북학北學사상으로 변화된 것이다. 왜냐하면 18세기 연암의 시대에는 청이 국제적으로 우수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청은 더 이상의 복수의 대상이 아니라 선진문물을 본받아야 할 모태가 된 것이다.
강동호 한국교육사상학회 2022 敎育思想硏究 Vol.36 No.3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plore the Gongbu theory of Cheongeum Kim Sang-heon—who lived during a period of upheaval in the Joseon Dynasty—to promote an understanding of his life and thoughts. Cheongeum Kim Sang-heon made 'Joncheonligeoin-yog(存天理去人欲)' the essence and purpose of his study. Regarding methods of study, he emphasized the fundamentals through 『Xiao-xue(小學)』 and 『Book of Rites(禮記)』. He pursued the study of maintaining peace of mind through poetry and slience, and by praising Seon-hyeon—who lived a life of loyalty all his life—he made them a guide for life. Furthermore, it was possible to confirm the orientation toward discussion and mutual learning. In this way, Kim Sang-heon's Gongbu theory did not show much difference from other Confucian scholars in the Joseon Dynasty. However, the characteristics of Cheongeum’s Gongbu theory could be confirmed in the details of the study contents and methods, such as the emphasis on 『Book of Rites(禮記)』, the study of cultivation through poetry, respect for historical figures, and emphasis on discussion and mutual learning. This study strives to be helpful in understanding the thought and life of the Royalty Spirit(義理思想). 본 연구는 조선의 격변기를 살아간 청음 김상헌의 공부론을 탐색하여 그의 삶과 사상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청음 김상헌은 ‘존천리거인욕’을 공부의 요체이자 목적으로 삼았다. 존덕성 공부의 일환으로 『소학』과 『예기』를 통한 근본을 강조하였으며, 시를 통한 함양과 고요함 속의 공부론을 추구하였다. 도문학 공부는 평생 의리적 삶을 살아온 선현(先賢)을 추존함으로써, 그들을 삶의 지침으로 삼았다. 그리고 토론과 상호학습을 지향하는 모습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렇게 볼 때 청음 김상헌의 공부론은 조선시대 다른 유학자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지만, 『소학』을 중시하면서도 ‘경’을 두드러지게 드러내지 않은 점과 『소학』의 ‘예학적’ 면모를 중시한 점 등은 청음 공부론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예기』의 강조, 시를 통한 함양 공부, 역사 인물에 대한 존숭, 토론과 상호학습의 강조 등 공부 내용과 방법의 세밀한 부분에서도 청음 공부론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청음은 이러한 공부론을 바탕으로 앎과 실천을 일치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는 병자호란 등 국난기에 실천적 의리사상으로 구체화된다. 본 연구가 청음의 사상과 삶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되었기를 기대해본다.
가사 <운림처사가(雲林處士謌)>에 나타난 강호 인식의 양상과 도선(道仙) 지향
송재연(Song Jae-yeon) 국문학회 2022 국문학연구 Vol.- No.45
이 논문은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문학적 생애 가운데 광해(光海) 혼정기(昏政期) 안동(安東) 풍산(豐山)에서의 은거 양상을 재구하고, 이를 토대로 해동유요(海東遺謠) 소재 가사 <운림처사가(雲林處士謌)>에 나타난 강호 인식의 양상과 도선(道仙) 지향 의식을 고찰하고자 작성된 것이다. 당쟁과 전란이 연속되었던 혼란기를 보냈던 김상헌은 의리와 절의를 중시하는 도학자적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환로(宦路)에 들어선 후부터 광해군을 비롯한 대북파 세력과 정치적으로 대립하며 부침(浮沈)을 거듭했던 그는, 1618년 사회의 혼란과 집권 세력의 박해를 피해 안동의 풍산으로 내려가 3년 동안 이곳에서 은거하였다. 풍산으로 낙향한 김상헌은 청원루(淸遠樓)에서 은거 생활을 시작했다. 청원루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는 삼귀정(三龜亭)이 있었는데, 삼귀정 주변의 아름다운 산수자연의 경치를 완상하며 세상의 시름을 잊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곳은 피세(避世)를 위한 은일의 공간으로서 의미를 가진다. 뿐만 아니라 이곳은 지인들과 교유하며 회포를 푸는 풍류의 장(場)으로 심적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안동 풍산 은거기에 창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가사 <운림처사가>는 광해 혼정기의 현실에 대한 실망으로 산수자연에 은거한 처사의 삶을 노래한 작품으로, 풍산 삼귀정 일대의 자연경관을 완상하며 풍류를 즐기는 삶을 통해 속세의 번민에서 벗어나려는 피세적(避世的) 위안과 주어진 분수에 만족하며 천명(天命)에 순응하려는 삶의 태도가 구현되어 있었다. 또한 정치적․사회적으로 혼란스러운 당대 현실을 부정(否定)함으로써 삼귀정 일대의 승경을 ‘선계(仙界)’라는 대리 만족의 공간으로 설정하고, 현실에서 불우(不遇)한 자아가 신선이 된 것처럼 선계를 즐기며 안식과 위로를 얻고자 하는 선취적(仙趣的) 삶을 지향하고 있었다. 아울러 가사 <운림처사가>의 작품 양상은 창작연대와 작자 미상의 상태로 전해지는 처사가 계열의 작품군과는 차이를 보였다. 처사가 계열의 작품군에서는 운림처사로 은거하게 된 상황에서 자연경관의 아름다움과 그곳에서 느끼는 흥취를 추상적으로 표출하고 있을 뿐 은거의 계기나 당대 현실에 대한 인식, 이러한 현실에 대응하는 방식이나 이념적 지향은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반면에 해동유요 소재 <운림처사가>에서는 광해 혼정기 현실에 대해 부정함으로써 야기된 천명에 순응하는 운명론적 사고를 바탕으로 ‘선계’라는 이상적 공간을 설정하여 불우(不遇)한 자아가 유선적(遊仙的) 삶을 지향함으로써 위안을 얻고 있었다. This thesis is written to reconstruct Kim Sang-heon s life in seclusion in Pungsan, and to examine the aspects of nature perception and Tao-oriented consciousness expressed in his Unlimcheosaga in Haedongyuyo. Having spent a period of chaos in which political party strife and war continued, he lived a moral life that valued loyalty and incisiveness. From the beginning of his official duties, he was politically opposed to the ruling forces, including King Gwanghae-gun, and in 1618, he went down to Pungsan to live there to avoid social turmoil and persecution of the ruling forces. He was able to forget the troubles of the world while admiring the beautiful natural scenery around Samgwijeong in Pungsan, so this place is meaningful as a space for seclusion. Not only that, this place was also a place where you could get mental comfort as a place of taste for the arts to socialize with your acquaintances. His Unlimcheosaga is about the life of a scholar who lived in nature in disappointment with the reality of the time during the reign of King Gwanghae-gun. It embodies the aspect of escaping from the troubles of the world through enjoying the natural scenery and the attitude of living to conform to fate. In addition, by denying the politically and socially chaotic reality of the time, the beautiful scenery around the Samguijeong is set as a space of surrogate satisfaction called the world of Taoist hermit with miraculous powers , and in reality, as if a lonely self became a Taoist hermit with miraculous powers, enjoy the beautiful scenery and give them rest and comfo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