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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연극 〈은세계〉 연구

        김기란(Kim Ki-ran) 한국근대문학회 2007 한국근대문학연구 Vol.8 No.2

        본 논문에서는 한국 근대연극사의 ‘사건’으로 이야기될 수 있는 1908년 신연극 〈은세계〉 공연이 ‘신연극’으로 수용될 수 있었던 당대의 연극사적 맥락과 신연극의 지향점을 살펴보고 그러한 지향점이 이후 어떤 과정과 결과를 통해 새로운 연극사의 변화 단계로 접속하게 되었는가를 고찰했다. 이인직이 기획한 1908년의 신연극 〈은세계〉 공연은 이인직이 일본 유학 시절 경험한 일본 연극개량론의 내용이 1900년대 조선의 사회적 장(場)이 구성한 연극개량론이라는 계열 속에 번역, 배치됨으로써 한국 근대연극사를 구성하는 중요한 ‘사건’으로 작동할 수 있었다. 신연극 〈은세계〉 공연은 내용면에서는 이인직의 신소설 『은세계』를 바탕으로 사회적 현실을 다루었고 공연 형식상으로는 전통극을 개량한 판소리 분창 형식의 창극으로 공연되었는데 이러한 요소는 이인직이 경험한 일본 연극개량론의 진행 즉 사회적 현실을 다룬 각본과 가부키를 개량한 신가부키 형식을 정확히 반영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신문연재소설을 각본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이인직의 발견은 신소설과 서사내용을 공유하는 실사(實事)를 바탕으로 한 각본의 존재를 부각시킬 수 있었으며, 이러한 각본의 존재 때문에 〈은세계〉 공연은 새로운 연극 즉 ‘신연극’으로 수용될 수 있었다. 각본의 유무는 〈은세계〉 공연 이후 조선 연극계를 신연극과 구(연)극의 구도로 재편해내는데 주요한 요소로 작동했다. 한편 신연극 〈은세계〉에서 각본으로 사용된 텍스트는 1908년 11월 공연 시작 후 간행된 동문사 본(本) 신소설 『은세계』가 아니라 그에 앞선 1908년 6월 신택영이 필사한 필사본으로 추정된다. 인쇄본 『은세계』와 필사본 『은세계』에서 나타나는 가장 큰 차이는 작품의 시공간과 중심인물이 이동하는 전반부와 후반부 연결부분의 서사 구성의 차이라 할 수 있는데, 연극 무대화의 특성을 생각해 볼 때 순차적으로 서사를 배열한 필사본이 각본으로 활용되기에는 더욱 효과적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인직의 신연극 〈은세계〉 공연이 한국 근대연극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사실에 기반한 현실적인 이야기’를 담은 각본의 중요성을 자각시켰다는 점이다. 각본의 중요성을 자각하게 됨으로써 1910년대의 연극개량 논의는 희곡문학의 등장을 예비하는 단계까지 정교화될 수 있었고 상관적으로 연동했던 신소설과 각본은 번안과 번역의 과정을 함께 통과, 분화하며 본격적인 근대소설과 근대희곡을 준비하게 된다. The dissertation is the study on the 〈Yeun-Se-Gae은세계〉, which has been performed as the first 'Shin-yeun-Guik'(New-Theater, 신연극) in 1908 in Korea. 〈Yeun-Se-Gae은세계〉 was planed by Yi In-Jik, who had studied in Tokyo Political School and had been on the assistance staff of a newspaper. While studying at the school and working in newspaper office, he had been influenced by the Theater Reform Project in Japan. His experience in Japan was translated into the situation of Chose on, especially into the field of Literature and Theater, which had been found as new Media to Yi In-Jik. My interest lies on this point how Yi In-Jik translated the cross-cultural situation between Japan and Korea. That is, putting limit on the modem theater history in Korea, how Yi In-Jik's translation was come out as the 〈Yeun-Se-Gae은세계〉 Performance in 1908. The 〈Yeun-Se-Gae은세계〉 was the outcome affected by his experience of the Theater Reform Project in Japan. The significance of the 〈Yeun-Se-Gae은세계〉 Performance in the modem theater history in Korea is to find the importance of a play script based on the social reality, which was to be said to be accomplished in Theater Reform Project in Korea in 1900s. The play script of 〈Yeun-Se-Gae은세계〉 was based on the Shin-So-Soe1 『Yeun-Se-Gae은세계』, whose material was the 1900s' social reality. After emerging the play script of 〈Yeun-Se-Gae은세계〉, its being was the most important factor constituting the play. In addition, the play script of 〈Yeuu-Se-Gae은세계〉 performance have been known to be dramatized with Shin-So-Soel 『Yeun-Se-Gae은세계』 publisched in November 1908, the another Shin-So-Soel 『Yeun-Se-Gae은세계』 manuscript was found. The latter was made a manuscript by Shin Taek-Young in June 1908, which was earlier than the former, so that it is thought that the latter is the the play script of 〈Yeun-Se-Gae은세계〉 performance.

      • KCI등재

        한일 신연극성립기 창작담론과 영향관계 연구

        서연호,부백 한국극예술학회 2010 한국극예술연구 Vol.0 No.32

        이 소론은 희곡창작과 실험적인 공연이야말로 연극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점을 전제로 하여, 한일 신연극성립기의 창작담론과 영향관계를 규명해 보려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일본의 신연극운동은 1886년 8월 연극개량회의 결성에서 비롯되었다. 이로부터 1909년 4월의 문예협회, 같은 해 11월의 자유극장이 결성되기 이전의 시기를 신연극성립기로 볼 수 있다. 가와카미 오도지로오는 신연극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한국의 신연극운동은 1902년 협률사의 설립에서 비롯되었다. 이로부터 1920년 봄에 극예술협회가 결성되기 이전의 시기를 신연극성립기로 볼 수 있다. 임성구는 신연극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운동의 출발은 양국 사이에 16년의 차이가 있지만, 단순비교만으로는 신연극성립의 내막과 과정과 실질을 파악할 수 없다. 그러므로 당시의 창작담론과 작품공연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신연극의 대안으로서 연극개량론이 제기되었는데, 개량의 대상(改良對象)이 무엇이었느냐 하는 문제다. 일본에서는 가부키(歌舞伎)가 대상이었던 데 비해서 한국에서는 개량의 대상이 분명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일본의 신연극을 모방하는 것이 개량이라는 막연한 개념으로 출발했음을 알 수 있다. 가부키가 아닌 새로운 연극을 창조하려는 모색은 필연적으로 연극창작론, 희곡창작론을 활성화하고 연극논쟁을 치열하게 부채질 했다. 가부키는 에도시대에 확고한 전통을 수립했다. 그러므로 가부키에 대신하여, 과연 새로운 연극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은 일본 사람 누구나 지니고 있었고, 심지어는 신연극을 논의하는 사람조차도 그 가능성을 확신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태에 대한 강한 반동이 서구 연극에 대한 열정적인 체험과 탐구와 수용을 몰고왔다고 할 수 있다. 현재도 쉽게 가능하지 않은 해외체험과 해외순외공연, 해외유학과 해외작품의 번역 및 번안 공연을 당시에 감행한 것이 이를 입증한다. 1893년에 가와카미 오도지로오는 멀리 프랑스에 가서 프랑스의 낭만주의 연극을 관극했다. 그는 이런 연극을 통해서 스테이지 리얼리즘(stage realism)을 처음으로 실감하게 되었다. 6년 후에 다시 그가 극단을 인솔하고 미국과 유럽을 순회공연하며 체험한 것은 현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연주의와 리얼리즘 연극들이었다. 그가 애초의 동지들과 어울려 신파극을 만드는 데 가담하지 않고, 그들과 결별하여 지속적으로 사실극(寫實劇)을 시도한 것은 재차 2년 간에 걸친 유럽연극체험이 원동력이었다. 정말 값지게 얻은 지적 체험이었다. 1909년에 이전에 이루어진 서구 드라마의 번역과 번안, 희곡론의 수용 역시 주목해야 할 역사적 사건이다. 메이지정부 지도자들의 연극개량에 대한 의지는 새로운 극장을 증설하는 데 기여했다. 한국의 임성구는 동시대성(同時代性, contemporaneity)이라는 측면에서 선구적인 업적을 이룩했지만, 세계연극사라는 측면에서 동시대의 문화환경과 더불어 한계성을 지니고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양식적으로 혁신(革新)의 대상이 막연하였다는 점이다. 일본 연극인들과는 달리 서양의 드라마에 대한 정보도 가진 것이 없었다. 당시 신문에 보도되는 연극담론이나 창작론은 일종의 문명개화론으로서 막연하기 그지 없었다. 그가 체험하고 알 수 있는 정보라고는 가끔 서울에 순회공연 오는 일본 신파극단들의 무대공연을 보는 것이 전부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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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淸末民初改良戱曲文學體制的선變

        趙得昌 중국어문연구회 2001 中國語文論叢 Vol.20 No.-

        1902년 '소설계혁명'과 동시에 전개된 '연극개량운동'중 발표된 개량연극은 그 내용에 있어 현실변혁에 대한 요구로서 점철되어 있다. 이 현실변혁에 대한 요구에서 기인하여 극작가들은 서양연극의 체제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청말민초 개량연극의 문학체제는 그 변화의 양상을 보인다. 주로 극본의 편폭, 구성과 '排場', 각색과 행당, 가사와 대사, 언어스타일 등에서 전통연극의 규범체계에서 일탈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당시 개량연극의 극작가들은 대부분 연극의 사회작용에만 중점을 두었을 뿐 연극예술형식의 본연적인 규율을 등한시하여 이 시기 개량연극의 문학체제는 대부분 일관된 체계가 없이 상당히 무질서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비록 이러한 결점이 존재하지만, 이 시기 개량연극 문학체제의 변혁은 당시 시대조류를 잘 반영하고 있으며, 또한 중국연극이 고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형태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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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계몽기 한국연극사의 전통담론 연구 Ⅱ

        백현미 한국공연문화학회 2009 공연문화연구 Vol.0 No.18

        This paper examines the tradition discourses in Korean modern drama of the late 19th and the early 20th. It focuses particularly on how key intellectuals differentiated the definition and interpreted ‘Theater-Improvement’ while they insisted on improving traditional performance. Tradition discourse focused on how to improve its contents of performances. There were three categories in discussion. First, Confucian intelligent insisted that traditional performance should be discarded, because it led to customs disorder among the public. Second, patriotic and progressive intellectuals led by Sin Chae-Ho(신채호) and Bak Yen-Sik(박은식), preferred the reformed content of traditional Korean performance dealing with historical heroes. in order to stimulate patriotism in the Korean. Third, Lee In-Jik(이인직) who had worked at a popular newspaper company in Japan tried to make ‘New Theater’ criticizing decayed officials and the stupid nation. He did not concern about the colonialism of Japan. In the late 19th and the early 20th in Korean modern drama history, tradition discourses faced different directions, dependent on their political positions, familiar foreign cultures, and their view on traditional cultures. 근대계몽기 한국연극사의 전통담론은 대개 전통(연희)에 대한 내용개량의 성격이 강했다. 근대 진입기이면서 국권상실기였기 때문에 개량의 방향은 애국과 개화의 문제에 초점이 맞춰졌다. 논의의 주체는 유교적 지식인, 애국계몽론자, 그리고 식민주의에 침윤된 개화지식인으로 나눌 수 있고, 이들은 각각 상풍패속론, 극계개량론, 신연극론을 주창했다. 을사조약 체결 이듬해인 1906년, 유교적 예악론자들은 협률사의 전통연희가 민심을 어지럽힌다고 비판하면서 상풍패속론을 전개했다. 이 상풍패속론은 국권 수호를 위한 절박한 문제의식을 지닌 지식인들이 유교적 예악론을 근거로 하여 연희 일반에 대한 부정론을 편 것이다. 외래극장문화와 공연문화에 대한 한국의 전통적 의식의 충돌을 보여준 이 상풍패속론은 극장문화의 시대적 의미와 역할에 대한 사유를 보여주는 첫 예로 주목할 수 있다. 1907년 정미7조약 체결 이후 애국계몽론자들은 중국 량치차오 논의를 수용 재해석하면서 ‘국권 수립을 실현할 민족영웅’을 소재로 한 전통연희 개량 극의 출현을 앙망하며 ‘극계개량’을 외쳤다. 그리고 1908년 이인직은 판소리 전통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은세계>를 원각사에서 공연하면서 ‘신연극’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관리의 탐학과 우매한 백성들을 비판하며 개혁에 초점을 맞추는 논의를 전개했다. 이렇게 1908년을 전후해 일본 신연극과의 연관 속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신연극에 대한 논의는 곧 ‘연극개량’ 논의와 구별 없이 사용되었고, ‘극계개량’이라는 용어를 대체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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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장 풍속개량론과 경찰 통제의 극장화

        우수진 한국극예술학회 2010 한국극예술연구 Vol.0 No.32

        Before and after 1910, the police regulation began in earnest and it has been regarded mainly as a colonial rules on the Korean theatres. However, this thesis tried to describe the course of the police control and its effects, not to focus on the relation of the colonial/colonized and oppression/resistance. The necessity of the control on the theatres must have been posed by the Japanese discouse of the theatre/manners. However it had been also posed by Korean intelligents in the newspapers. The police control on the theatres had not been posed by the Japanese power ex parte, but cooperated with the public opinion in Korea and conducted as a policy for the theatre reformation. Especially, hygiene and manners reformation was the necessary course of the modernization and civilization of the theatre. However, in the course of it, the theatres had been not only represented as a malificient space in the society of for, but also presented the Japanese colonial control on the colonized Korean as its modernizaion and civilization. 식민지라는 상황은 연극장에 대한 경찰 통제를 무엇보다도 조선연희의 말살을 위한 식민통치의 일환으로 바라보는 근거로 작용했다. 하지만 이 논문에서는 그동안 충분히 강조되었던 식민/피식민, 탄압/저항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그것이 본질적으로는 근대적인 현상이라는 인식 하에 연극장 통제의 과정을 기술적(記述的)인 방식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연극장 통제에 대한 요구는, 물론 그것이 일부 일본의 연극/풍속 담론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겠지만, 당시 문명개화 지식인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었다. 즉 경찰의 연극장 통제는 일제에 의해 일방적으로 강제된 것이었다기보다, 당시의 여론과 일정 부분 공조했던 일종의 관 주도 연극개량이기도 했다. 특히 연극장의 위생과 풍속 개량은 극장환경의 근대화, 문명화를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과정 속에서 연극장은 사회적으로 상풍패속의 장으로 표상화되면서, 동시에 조선사회에 대한 일제의 통제를 문명화, 근대화 과정으로 극장화하는 공간으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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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청말민초 신조연극”의 연극사적 의의와 동아시아 근대연극

        김종진 중국문화연구학회 2024 중국문화연구 Vol.- No.63

        중국 연극사는 전근대는 단일한 희곡(전통 연극)의 시대, 근대 이후는 화극과 희곡의 이원구도의 시대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이 이해는 근대 전환기 중국에 서양식 연극이 전해지면서 화극이 탄생하고 희곡이 크게 변화하던 양상을 담아낼 방법이 없었고, 이 근대 전환기의 연극은 오랫동안 중국 연극사 연구의 관심 밖에 놓여 있었다. 1990년대 이후가 되어서야 이 시대의 중국 연극 연구가 시작되었으나 화극-희곡의 이원구도는 이 시대의 다양한 연극 역시 이원적으로 오해하게 했다. 그리고 이는 문명희, 개량희곡, 시장신희 등 복잡하고 다양하여 화극과 희곡으로 양분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이 시대 중국 연극 연구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위안궈싱(袁國興)은 새 연극사적 개념인 “청말민초 신조연극”을 제기하여 근대 전환기 중국 연극의 다양한 연극적 스펙트럼을 화극-희곡의 이원적 구도가 아닌 통합적 관점으로 이해할 것을 제안했다. 근대 전환기 중국 연극 연구자뿐 아니라 중국 희곡 및 중국 현대문학 연구자의 동의를 거쳐 제기된 “청말민초 신조연극”은 이후 꾸준한 후속 연구가 뒤따르고 있지만 근대 이후 중국 연극을 화극-희곡의 이원구도로 이해하는 학계의 관습과 중국 현대문학이 인정하는 현대성의 협소함으로 인해 이 새 단어가 원래 갖고 있던 기획 의도를 잘 구현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 단어가 가진 통합적 시야의 가치와 중국 연극사를 넘어 동아시아 연극사로 확장될 가능성을 고려하면 향후 동시대의 우리 연극사 연구에도 적용해 볼 가치가 있을 것이다. The history of theater in China is understood in terms of the unitary structure of Xiqu (戱曲, Chinese traditional theater) in the pre-modern period and the dichotomous structure of spoken plays and Xiqu in the post-modern period. This understanding, however, does not capture how spoken plays were created and Xiqu was greatly transformed with the introduction of Western theater to China during the country’s transition to the modern period. As a result, theater during the modern transitional period has not received much research attention in the field of Chinese theater history for a long time. Although research on Chinese theater in this period began in the 1990s, the dichotomous structure of spoken plays and Xiqu resulted in the misunderstanding that theater during this period was binary. However, it was actually complex and diverse, including civilized dramas(文明戱), reformed Xiqu(改良戱曲), and Xiqu in contemporary dress(時裝新戱) which makes it much more difficult to study Chinese theater during this period as it cannot be categorized binarily into spoken plays or Xiqu. To overcome this problem, Yuan Guoxing(袁國興) proposed a new concept of the new-trend theatre movement in the late Qing Dynasty and the early Republican period(淸末民初 新潮演劇) in theater history to understand the diverse theatrical spectrum of Chinese theater during the modern transitional period from a holistic perspective rather than a binary one. Although there have been follow-up studies on the new-trend theatre movement in the late Qing Dynasty and the early Republican period, which was proposed based on a consensus among both researchers of Chinese theater in the modern transitional period and researchers of Chinese Xiqu and contemporary Chinese literature, the term is not always implemented as originally intended due to conventions in academia, where Chinese theater in the modern period is understood as a dichotomy of spoken plays or Xiqu, and the narrow recognition of modernity in Chinese modern literature. Considering the value of the term’s holistic perspective and its potential to extend beyond Chinese theater history to East Asian theater history, it would be worth applying it to future research on Korean theater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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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비극의 일본 초창기 수용 연구

        김사량 ( Sar Yang Kim ) 한국공연문화학회(구 한국고전희곡학회) 2014 공연문화연구 Vol.0 No.28

        에도막부(江戶幕府) 체제가 무너지고 메이지 신정부가 수립되자 일본은 ``탈아입구(脫亞入歐)``의 구호아래 서구화정책을 폈고, 그 결과 온갖 생활면에 있어서서구문화가 한꺼번에 일본으로 들어오게 됐다. 서양근대문화의 물결은 일본의전통문화나 극계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는데, 즉 당시 여전히 민중의 오락물이었던 가부키(歌舞伎)의 낡은 풍습들(특히 엽기적이고, 선전적인 연출양식과 짙은관능묘사)을 일소하여 그것을 서양의 연극처럼 고상한 것으로 탈바꿈시키려고``연극개량회``가 발족하였고, 그 여파로 지식인과 극계 사람들을 중심으로 일련의연극개량운동이 일어나게 됐다. 연극개량운동 초기에는 가부키의 실질적인 개량보다도 정부 주도적인 개량론으로 인해 극장, 대소도구, 분장, 배우의 연기 등을 중심으로 시각적이고 피상적인 변화만을 보였으나, 그 반동으로 연극을 진지하게 개량하려는 각본개량 우선론과 함께 희곡이론에 대한 심충적인 탐구가 이루어지게 됐다. 그 과정에서 그리스비극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을 보다 정확하게 이입시키려는 노력들이이루어졌으며, 새로운 연극과 극작가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높아졌다. 이런 사회분위기 속에서 가와카미 오토지로(川上音二郞)는 자신의 새로운 작품을 위해 프랑스에서 직접 <오이디푸스 왕> 등의 대본을 입수하고 일본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비극의 번안공연을 올렸다. 그런 공연형태로 된 일차적인 그리스비극작품의이입은 나중에 게이주쓰자(芸術座)의 번역극 <오이디푸스 왕> 공연으로 이어졌다.결국 그리스비극의 일본 초창기 수용과정을 보면 처음에는 이론을 중심으로독일, 러시아 그리고 그리스의 전공자들과 그 나라들에서 귀국한 이론가들에 의해 이입되기 시작했고, 그 다음 주로 프랑스, 미국을 통해 상연의 형태가 들어오게 됐다. 이렇듯 그리스비극은 간단한 소개부터 시작해 비극론(아리스토텔레스『시학』), 번안공연, 극작술의 모티프 활용, 번역공연이라는 일련의 수용형태를거치면서 30년 남짓 사이에 많지는 않지만 이론과 공연이 차근차근 체계적으로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비극 일본 초창기 수용의 의의는 예컨대 진지하게 아리스토텔레스의『시학』개념을 이해하려고 했던 ``자이카논쟁(罪過論爭)``의 성과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근대연극이 시작되는 첫 단계에서 서양연극의 원전이라는 하나의 흔들리지 않는 기둥을 세워 이후의 연극발전에도 핵심적 역할을 했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As Edo period was ended and the Meiji government was formed, Japan launched westernization policy influenced by the idea of an intellectual, Yukichi Fukuzawa who wrote the influential an essay called ``Datsu-A Ron(Leaving Asia)``. As a result, Japan was dramatically changed in its internal politics, social structures and economy. Wind of modernized culture also changed Japanese traditional theater. Kabuki, the most popular entertainment at that time, was considered as a lascivious and pulp one by intellectuals and modernized theatrical people. Therefore its theatrical conventions were targeted to be changed to western style and as a result, theater reformation movement was occurred. Because theater reformation movement was lead by meiji government at first, primary stage of the movement focused on changes of visual and external aspects of theater such as stage, set, properties, costumes and acting. As a reflection of this atmosphere, drama reformation movement was commenced in order to carry out in-depth analysis of play scripts. During this movement, profound study of western playwright and drama was performed and as a result, new style of drama became liable to be accepted based on theatrical circle`s precise understanding of Greek tragedy and Aristotle`s poetic. Among this social atmosphere, Kawakami(川上音二郞) obtained play scripts of ``Oedipus, the King`` and other greek tragedy from France and first performed Greek tragedy in Japan. Adaptation of Greek tragedy continued to Geijyutsuza(芸術座)`s translation version of Oedipus. After all, when we look at the process of Greek Tragedy`s acceptance in Japan, it was first accepted academically by returned students from German, Russian and Greece, and then its forms of the stage performance were accepted through France and America. It must have played a key role in the subsequent development of japanese modern theat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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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계몽기의 연극개량론과 서사문학에 나타난 국민국가 인식

        이상우 ( Sang Woo Lee ) 민족어문학회 2006 어문논집 Vol.- No.54

        본고는 근대 계몽기의 연극개량론이 당시 서사문학과 매우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그 연결고리는 근대 국민국가 담론에 있다는 사실을 밝히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근대 계몽기 한국의 연극개량론은 1880년대 일본에서 나타난 연극개량론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당시 일본의 연극개량론은 메이지 정부의 이토 히로부미 내각이 주도한 것으로서 불평등 조약의 개정을 목적으로 서양 제국에게 근대 문명국가의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 추구한 극단적 서구화주의 담론의 일환이었 In 1900`s, the theatre reform debate was closely related with narrative literature works at that time. The point of contact between both was the nation-state building discourse how to build independent and modern nation-state. At that time, narrative l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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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福地桜痴의 演劇改良論과 『相馬平氏二代譚』

        李京愛 한국일본학회 2001 日本學報 Vol.46 No.-

        明治時期의 저명한 저널리스트였던 福地櫻痴는 明治政府가 皇國思想과 忠孝를 敎化普及하는 과정에서 演劇을 활용하려 하자 이에 호응하여 정부의 의도에 충실한 演劇論을 펼치면서 그에 걸맞는 作劇 활동을 하였다. 그는「東京日日新聞」의 社說을 통하여 近松門左衛門의 完本을 최상의 문예로 인정하고 진흥시킬 것, 황당무계하고 천박한 내용을 담은 完本을 改良할 것, 狂言 작자의 지위를 높일것, 지식인이 직접 붓을 들어 각본의 저작에 나설 것, 歌舞技를 改良할 수 있을 정도로 일본 전통의 完本에 정통할 것 등을 역설하였다. 그가 社說을 통해 펼쳤던 演劇改良論은 전통과 인습을 고집하던 演劇界에 改良의 기운을 촉진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는 近松의 작품을 그대로 상연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만큼 改作해야 한다면서 近松의 時代淨琉璃 작품 4편을 活歷의 소재로 삼아 직접 改作했는데 忠臣, 孝行, 烈婦, 義士 등을 다룬 것이었다. 近松의 작품「關八州繫馬」의 凉作인「相馬平氏二代譚」에서 福地櫻痴는 주인공 平良門의 입을 빌어 일본 外史의 勤王論을 역설하였다. 原作의 구성이 인간적인 情에 얽매이는 것인데 비해 改作物은 忠臣을 갈등 해결의 모티프로 삼았다. 그 과정에서 原作의 낭만적인 분위기가 엷어지고 세련미가 부족하게 되었으며 이렇다 할 갈등이 없는 무미건조한 작품이 되고 말았다. 그는 또한 作劇에서 史實主義를 제창하였는데 平將門가 關東地方의 國分化를 지향하여 병사를 일으킨 것을 改作物에서는 조정을 위해 藤原一家의 횡포를 저지하기 위해 싸운 것으로 고쳤고, 결말도 源氏一家가 平良門를 멸망시킨 것이 아니라 조정의 평화를 위해 두 家門이 힘을 합세하여 藤原氏를 타도하기로 했다는 식으로 史實과 다르게 바꾸었다. 勤皇意識을 드러낸 改作이었던 것이다. 그의 活歷劇은 狂言작자가 만든 舊時代物과 새로운 局外 문학자의 史劇 내지 희곡활동을 연결하는 과도적인 作品群으로 이해할수 있다.

      • KCI등재

        한말 연극 인식과 연극개량운동

        주운화 ( Ju Woon Wha ) 한국사상사학회 2017 韓國思想史學 Vol.0 No.57

        문화계몽운동의 영향 아래에 있었던 연극개량에 대한 논의들은 문화와 정치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한말의 연극개량운동은 조선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민족주의 계열과 통감부에서 견지하고 있는 저마다의 노선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교육의 기회가 주어지기 힘든 현실에서 연극을 통한 계몽은 매우 긴요한 수단으로 인식될 수 있었다. 이제 대중을 계몽시키기 위해서는 적절한 컨텐츠 즉 국민의식을 발휘시킬 수 있는 충국열사, 애국지사들을 소재로 한 각본이 필요했다. 통감부는 비단 극장뿐만이 아니라 대중들을 상대로 하는 문화전반을 장악하고 있었다. 연극개량회를 통한 극장의 정치적 통제를 이미 경험했던 일제는 조선의 극장 운영에 대해 전반적인 통제를 하였고 이인직의 ‘은세계’ 공연은 통감부의 문화에 대한 인식이 반영된 것이었다. 그의 신연극 은세계는 조선의 지배질서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신소설 은세계는 여기에 더하여 일본의 시정개선을 찬양하는 내용이 더하였다. 그러나 통감부의 의도아래 기획되었던 탓에 이인직은 더 이상의 공연작품은 남기질 않았다. This article examines the various discussions on the drama reform, which were under the influence of the Cultural Enlightenment Movement, as a good example of the nexus between culture and politics in the late Korean Empire. The Theatre Reform Movement reveals two very different visions that each of the Korean Nationalists and Japanese Residency-General of Korea had on Korea’s future. Under the circumstance of educational inequality, the Nationalists viewed drama as an efficacious means of enlightenment. They needed proper cultural contents for the enlightenment of the masses, such as the dramas based on the stories of loyalists and patriots, which could arouse the national sentiments of Korean people. However, the Residency-General maintained tight control over the overall domains of popular culture as well as theatres. Japanese colonial authorities, which had already have an experience of political control over Japanese theatres through the Theatre Reform Society (Engeki kairyo kai), attempted to regulate overall management of Korean theatres. The staging of Yi In-jik’s A Silver World (Eunsegye 은세계) reflected Residency-General headquarter’s concern on contemporary culture. This “New Drama” (Sinyeongeuk) was a criticism over the dominant social order in Joseon, and the admiration of the development of Korea under the Japanese rule was added to Yi In-jik’s “New Novel” (Sinsoseol) A Silver World. However, this was Yi In-jik’s last work staged in a theatre as the performance was planned by colonial author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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