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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

        왕부지의 ‘衣裳’觀 고찰

        김진근 동국대학교 동서사상연구소 2023 철학·사상·문화 Vol.- No.42

        In this thesis, I argued Wang Fuzhi's view of 'costume' revealed in Zhouyiwaizhuan 周易內傳 and Zhouyineizhuan 周易外傳 , and examined its objectivity, validity, and significance. In Chapter Ⅱ, I considered Confucianism and Huaxia people's view of 'clothes'. Along with the meaning and origin of the word ‘Hwaxia 華夏’, it was considered that the superiority of ceremonies and the nation was reflected in the word ‘Hwaxia’. In Chapter Ⅲ, I discussed Wang Fuzhi's 'costumes', which say that the core of clothing is to reflect rites in clothing, that splendor of clothing is its natural consequence, and that practicality in wearing, convenience in production, and its functionality can be compromised. From this point, I dealt with the fact that only the costumes of the Huaxia people are costumes, and the costumes of other peoples cannot be called costumes, and that the change of costumes from Han Chinese costumes to Manchurian costumes itself means the end of the world. Chapter Ⅳ, I examined the objectivity and validity of Wang Fuzhi's view of 'costume'. Here, should the convenience and practicality of clothing be conceded to rites? Can’t peoples other than the Huaxia people be included in the category of people, and since they do not adopt the rites of the Huaxia people and do not wear their costumes, have they to create a barbaric society? Discussed what to reveal. Thus, it was discussed that there is a problem with Wang Fuzhi's view of 'costume'. Lastly, this thesis also discusses the positive significance of Wang Fuzhi's view of 'costume'. 이 논문에서는 왕부지의 주역내전 과 주역외전 에 드러나 있는 그의 ‘의상’관을 고찰하고, 그 객관성·타당성 및 의의를 검토하였다. 제2장에서는 유가와 화하족의 ‘의상’관을 고찰하였다. ‘華夏’라는 말의 뜻 및 그 유래와 함께, 이 ‘화하’라는 말속에는 禮와 민족에 대한 우월성이 반영되고 있다고 함을 고찰하였다. 아울러 이 ‘의상’관에는 ‘夷夏之辨’이라는 민족 차별이 자리 잡고 있음을 논하였다. 제3장에서는 주역내전 · 주역외전 에 드러나 있는 왕부지의 ‘의상’ 관련 언급들을 구체적으로 다루었다. 이 장에서는, 의상의 핵심은 의상에 예를 반영하는 것이고, 의상의 화려함은 그 자연스러운 귀결이며, 입는 데서의 실용성·제작함에서의 편의성 및 그 기능성은 양보할 수도 있다고 하는 왕부지의 ‘의상’관을 밝혔다. 이러한 측면에서 화하족의 의상만이 의상이고 다른 민족들의 의상은 의상이라 할 수 없다는 것, 의상이 한족의 의상에서 만주족의 의상으로 바뀐 그 자체가 말세임을 의미한다고 하는 왕부지의 관점 등을 다루었다. 제4장에서는 이러한 왕부지의 ‘의상’관에 대한 객관성과 타당성을 검토해보았다. 여기에서는, 의상이 갖는 편의성과 실용성을 꼭 禮에게 양보해야 하는가, 화하족 이외의 민족들은 사람의 범주에 들 수 없으며, 이들이 화하족의 예를 채택하지 않고 그 의상을 착용하지 않기에 꼭 야만의 사회를 드러내는가 하는 점을 논했다. 그리하여 왕부지의 ‘의상’관에 문제가 있음을 논하였다. 끝으로 이 논문에서는 왕부지의 ‘의상’관이 갖는 긍정적 의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아울러 논의하였다.

      • KCI등재

        의상(義相) 이이상즉설(理理相卽說) 논의의 비판적 고찰

        박보람(Park, Bo-Ram)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2022 佛敎學報 Vol.- No.100

        의상이 그의 주저인 『일승법계도』에서 단 한 번 언급하는 구절인 ‘이이상즉(理理相卽)’은 예로부터 많은 이들에게 호기심 내지는 의구심을 불러 있으켰으며 끊임없이 논의가 계속되어 왔다. 특히 현대에 이르러 여러 연구자들이 이 구절의 사상적 의미와 사상사적 유래 및 변천을 규명하고자 연구를 꾸준히 진행했으며 많은 성과를 이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이상즉이 설해지는 맥락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탓에 의상 화엄사상의 전체 틀에서 이이상즉을 고찰하지 못하였고, 논의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각각의 그리고 공통의 오류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선행 연구의 주장은 수정 ․ 보완될 필요가 있다고 논자는 생각한다. 의상의 이이상즉 등 4구는 『일승법계도』 「법성게」의 마지막 게송 중의 “예로부터 움직이지 아니함[舊來不動]”을 예로부터 부처를 이룸으로 풀이하면서 일체 연기법의 실상인 다라니법을 관(觀)하는 방편으로 시설된다. 그런 의미에서 의상의 상즉은 그의 육상설 및 수십전법과 같은 목적을 지닌 다른 방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방편들에 의해서 드러나는 연기법의 실상은 여러 가지로 표현될 수 있겠지만 그 가운데 대표적으로 무분별(無分別) ․ 부주(不住)를 들 수 있다. 그러므로 의상의 이이상즉을 논의할 때 유의해야 할 사항은 의상의 이이상즉설이 무분별 ․ 부주 등으로 표현되는 연기의 실상인 다라니법을 관(觀)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의상의 이이상즉에 관한 대다수의 선행 연구는 이러한 맥락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이이(理理)’의 의미 분석에 치우친 바가 없지 않다. 그러다보니 상즉은 복수를 대상으로 한다는 상즉의 복수성을 기초로 궁극의 [법계]와 이로부터 개념화, 파편화된 [이(理)와 사(事)]라는 이중 구조를 집 위에 집을 짓듯이 구축하여 대치(對治)의 대상을 대치의 수단으로 삼는 오류에 빠지고 말았다. 상즉을 법성(法性)의 집에 들어가기 위한 유위(有爲)의 행위로 보거나 법성의 집 가운데 중도의 평상에 예로부터 앉아 있는 무위(無爲)의 사태로 파악하는 두 입장이 가능하다면 법성성기와 구래불 등으로 대표되는 의상 화엄교학의 맥락에서 볼 때 의상의 상즉은 법계에 들어가기[入於法界] 위한 행위가 아니라 들어감이 곧 법계[入卽法界]인 불행(佛⾏)의 측면에서 파악해야 한다고 논자는 생각한다. The mutual identity of principle and principle (理理相卽, hereafter The Mutual), a phrase Uisang (義相) mentions only once in the Seal-diagram symbolizing the dharma realm of the one vehicle (『一乘法界圖』), has been a subject of curiosity and discussion. In modern times, several researchers have steadily conducted research to find out the ideological meaning behind this phrase, the origin and transition of ideological history, and have achieved many results. Nevertheless, revising and supplementing previous studies in the following two points is necessary. First, since previous studies did not sufficiently consider the context in which The Mutual was established, The Mutual could not be considered in the entire framework of Uisang’s Hwaeom ideology. Second, prior research is based on each common error in the process of discussion. Uisang’s The Mutual is explained as a means of observing dhāraṇī, the true characteristics of all conditionally arisen dharmas, while interpreting the “unmoved from times long past (舊來不動)” in the last poem of Beopseongge as the attainment of Buddhahood from times long past (舊來成佛). In that sense, The Mutual can be said to be another method with the same purpose as the theory of the Six Characteristics (六相說) and the method of counting ten coins(數十錢法). The true characteristics of conditionally arisen dharmas revealed by these measures can be expressed in various ways, but representation of them are “without distinctions (無分別)” and “non-abiding (不住).” Therefore, it is noteworthy that while The Mutual is to see dhāraṇī, the true characteristics of all conditionally arisen dharmas expressed as “without distinctions (無分別)” and “non-abiding (不住).” Most of the preceding studies on The Mutual have been biased toward the analysis of the meaning of “principle and principle (理理)” without sufficiently considering this context. Resultantly, most preceding studies made two errors and built a house on top of the house. First, The Mutuals plurality, which deals with the plural objects, and second, a dual structure consisting of the ultimate [dharmadhātu] and [principle (理) and phenomena (事)] conceptualized and fragmented from the [dharmadhātu]. Like the theory of the Six Characteristics, The Mutual can be viewed as an act of conditioned dharmas for entering the house of the dharmadhātu or as a situation of unconditioned dharma sitting on the middle of the house of the dharmadhātu from times long past. Considering Uisang’s entire thoughts generally represented by “the unconditioned arising which is the Dharma nature (法性性起)” and “buddhas from times long past (舊來佛),” The Mutual should be understood as the buddha’s actions in which entering is the dharmadhātu itself (入卽法界), not an act to enter the dharmadhātu (入於法界).

      • 영화의상 스타일에 관한 연구 :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드라큐라〉를 중심으로 Focused on <Bram Stoker's Dracula> directed by Francis Ford Coppola

        박은순,이재정 한국기초조형학회 2002 기초조형학연구 Vol.3 No.2

        본 연구는 영화의상의 상징적인 표현성을 연구하기 위한 논문으로써, 대표적인 공포영화 <드라큐라>를 선정하여, 등장인물을 중심으로 인물의 성격이 의상을 통해서 어떻게 상징적으로 표현되었는지 살펴보고, 영화의 주제와 이미지, 반전을 암시하는 극적 효과로서의 의상 스타일을 실루엣과 색채, 디테일을 중심으로 분석하여 영화의상의 상징적인 의미를 살펴보았다. 영화 <드라큐라>는 예술적 완성도가 높은 작품으로 흥행에도 성공했으며, 시대물인 동시에 공포 장르로서 복식사적 고증을 바탕으로 한 디자이너의 창의적인 의상 스타일이 강조되었고, 神와 악마, 인간의 내면적 갈등을 주제로 한 이 영화에서 영화의 추상적인 주제를 상징적인 의상으로 표현하여 영화의상의 시각적, 심미적 효과가 부각되었다고 사료된다. 이와 같이 영화 <드라큐라>에서 표현된 의상스타일은 영화의상의 상징적인 가치와 더불어 공포영화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기여하였음을 본 연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The Study on <Bram Stocker's Dracula>, one of most popular horror movies, examined closely how personalities of the characters were symbolized through their costumes, and then analyzed the consume as a dramatic effect suggesting theme, image and reversal of the movie focused on silhouettes, colors and details, in order to study symbolic expressions in fashions of the movie. The movie, <Bram Stocker's Dracula> with high artistic completion was successful in the box-office record and highlighted creative costume of the designer based on historical investigation of the costume as a horror genre as well as a historical movie, In this movie, on the theme of internal conflicts among God, Satan and human beings, it was thought that the visual and aesthetic effects of the costumes were highlighted by expressing in the movie,<Bram Stocker's Dracula> contributed greatly to not only enhancement of aesthetic and symbolic value but also accomplishment of the horror movie.

      • KCI등재

        일반논문 : 『당법장치신라의상서(唐法藏致新羅義湘書)』에 대해서

        김임중 연민학회 2013 연민학지 Vol.19 No.-

        의상(義湘)은 용삭(龍朔) 원년(661)에 당(唐)에 건너가 중국 화엄종의 제2대종조(宗祖) 지엄(智儼)의 문하에서 법장(法藏)과 함께 수학하였다. 그리고 10여년간 화엄교학을 배워서 귀국한 뒤 태백산에 화엄근본도장인 부석사(浮石寺)를 건립하여 화엄사상을 널리 알려 해동화엄의 창시자로서 많은 존경을 받았다. 같은 문하의 법장은 지엄이 입적(入寂)한 지 2년 후에 태원사(太原寺)에서 출가하여 화엄교학을 선양하여 중국화엄종을 집대성하였다. 이 두 사람은 동문이었지만 의상과는 18세의 연령차가 있고 학문의 조예로 말한다면, 법장은 의상을 장형(長兄)으로 사모하였고 의상이 신라로 돌아간 후에도 항상 선배로 대하며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 이 두 사람의 교분이 두터웠던 것은 의상이 귀국한 후에 보내왔다는 법장의 서간(書簡)에서도 엿볼 수가 있다. 신라의 의상에게 보내 온 법장의 친필 편지는 ‘현수국사(賢首國師) 해동(海東)에 보내는 서(書)’라는 제목으로 고려시대의 대각국사 의천(義天)의 『원종문류(圓宗文類)』 권22와, 『삼국유사(三國遺事)』 권4 ‘의상전교(義湘傳敎)’에 그 전문과 별폭(別幅)이 수록되어 있다. 이 편지에 의하면 법장이 의상과 헤어지고 나서 이미 20여년이 지나가 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을 나타내고 있다. 게다가 의상이 신라로 돌아간 뒤 화엄의 깊은 뜻을 설법하고 화엄교학을 널리 펼치고 있는 것에 대해 찬탄한다. 그리고 법장은 스승인 지엄이 저술한 장소(章疏)는 법어(法語)의 뜻은 풍부하지만 문장이 간결하여 후세사람들이 잘 이해를 못하므로 스승의 가르침을 자세히 기록하여 ‘의기(義記)’로 만들어서 신라의 승려 승전(勝詮)에게 부탁하여 자신이 쓴 서적에 대해서 잘못된 곳이 있으면 비판하고 지도해 주길 간곡히 청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최치원(崔致遠)이 편찬한 『法藏和尙傳』에 의하면, 의상은 법장으로부터 편지와 함께 보내온 『華嚴探玄記』 등의 서책을 접하자, 마치 스승의 교훈을 듣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방에 들어가 며칠간을 탐독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런데 이 법장의 편지는 중국의 베이징 리우리창(瑠璃廠)에서 홀연히 나타나 많은 수집가들의 손을 거쳐 일본에 건너가 현재는 텐리(天理) 도서관에 소중히 보관되어 있다. 본래라면 반드시 한국에 전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왜 중국에서 발견되었을까, 참으로 이상한 일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가 없다. 본고에서는 한국과 중국의 불교교류사에 있어서 매우 주목해야 할 법장의 편지가 한국에는 현존하지 않고 왜 중국에 다시 전래되게 되었는가, 그 역사적 배경과 경위에 대해서 이 편지의 내용과 『法藏和尙傳』, 유기(劉基)의 발문(跋文) 등을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義湘は龍朔元年 (661) 歲の時に入唐し, 中國華嚴宗の第二祖智儼の門下で法藏と共に師事した。 そして, 10余年間華嚴敎學を極めて歸國した後, 太白山に華嚴根本道場の浮石寺を建てて華嚴宗を宣揚し, 海東華嚴の初祖と仰がれた。 同門の法藏は智儼の入寂後2年 (670) 太原寺において出家し, 華嚴敎學を宣揚して中國華嚴學の大成者となった。 この2人は同門であったけれども, 18歲の年齡差や學問の造詣からいえば, 法藏は兄弟子として義湘を慕っており, 義湘が新羅へ歸ってからも, 常に先輩として禮を欠くことはなかった。 この2人の交流が深かったことは, 義湘歸國後に送ったという法藏の尺牘 (書簡) から窺い知ることができる。 新羅の義湘に送った法藏眞筆の書簡は, 「賢首國師海東に寄する書」 と題され,高麗時代の大覺國師義天撰の 『圓宗文類』卷22と, 『三國遺事』卷 「義湘傳敎」に, 全文と別幅の文章が收められている。 この書簡によると, 法藏が兄弟子義湘と別れてからすでに20余年になったことを感慨深く語っている。 さらに, 義湘が新羅の地に歸った後, 華嚴の奧義を開演し, 華嚴敎學を弘めていることを稱贊する。 そして, 法藏は師智儼の書いた文章が簡略なので, 師の敎えの要旨を 「義記」 に作って新羅の僧勝詮に託し, 自分の著した書物に對する批判を懇切に請うているのである。 崔致遠 『法藏和尙傳』によると, 義湘は法藏から書簡と共に送り屆けた 『華嚴探玄記』などの書物を接すると, あたかも師智儼の敎訓を聞くような思いをなして一室に籠もって數日間これを讀んだと記されている。 ところが, この法藏の書簡は中國の北京で現われ, 多くの好事家の手を經て日本に渡り, 現在は天理圖書館に秘藏されている。 本來なら當然韓國に傳わるはずなのに, どうして中國で發見されたのか, 不思議なことであるとしか言えない。 本稿では韓國と中國の佛敎交流史において大變注目に値する, 法藏書簡が韓國に傳わらなく, なぜ中國に傳來されたか, その歷史的背景や經緯をめぐって, この書簡の內容と 『法藏和尙傳』, 劉基の跋文などを檢討しながら, 私見を述べてみたい。

      • KCI등재

        의상의 계율관

        이자랑 ( Lee Ja Rang ) 한국사상사학회 2019 韓國思想史學 Vol.0 No.61

        화엄사상가로 유명한 의상(義湘, 625∼702)은 계율 수지에서도 남다른 철저함을 보여 지계의식이 뛰어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의 계율행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적어 사실상 지금까지 구체적인 연구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에 본고에서는 의상의 전기를 전하는 자료에서 계 율과 관련된 대표적인 세 기록을 발췌하여 재음미하고, 이를 통해 의상 이 실천한 계율행의 내용을 조금이나마 명확히 해보고자 하였다. 첫째, 고구려 승려 보덕(普德)을 통해 알게 된 『열반경』의 존재이다. 당나라 유학 후 신라로 돌아온 의상은 부석사(浮石寺)를 짓고 화엄 공동 체를 설립하여 활동할 때 『열반경』에서 설하는 ‘팔부정재(八不淨財)’를 근거로 국왕의 전장(田莊)과 노비 보시를 거절하고 있다. 이 배경에는 필시 팔부정재의 축재를 교단 타락의 주된 원인으로 보며 엄격하게 금지 하는 『열반경』의 가르침이 작용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둘째, 당대(唐代)의 대표적 율승(律僧)인 도선(道宣, 596∼667)과의 만남이다. 의상은 지엄(智儼, 602∼668) 밑에서 수학하는 동안 도선율사 와 만날 기회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교류 가능성 은 도선의 제자였던 신라승 지인(智仁)의 존재를 통해서도 유추 가능하 다. 또한 황복사의 탑 구조나 사천왕사호탑신의 존재 등을 근거로 의상 이 도선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음을 지적하는 최근의 연구 성과 역시 이 두 사람의 교류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셋째, 도선과 더불어 당대를 대표하는 율승 가운데 한 명이었던 의정 (義淨, 635∼713)의 영향이다. 『송고승전』 「의상전」에는 “또한 항상 ‘의 정의 세예법’을 실천하고 있었다.”라고 하여 의상이 의정의 영향을 받았 을 가능성을 암시하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 나오는 ‘의정의 세예법’이 무 엇을 의미하는지 아직 명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는데, 아마도 불살생을 실천하는 하나의 방법은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이 세 가지 전승에 대한 검토 결과에 근거해서 볼 때, 의상은 삼의일발 (三衣一鉢) 등 수행자로서 유지해야 할 기본적인 생활양식을 철저히 유 지했고, 나아가 불살생이나 소욕지족, 평등 등 불교 계율의 근간을 이루 는 핵심적인 이념을 중요시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Silla新羅monk Ŭisang(義湘, 625∼702), who lived around the latter half of the 7th century, is well known for keeping buddhist precepts strictly. However, since there is not enough data to confirm his practice of precepts, we do not actually understand the details. In this paper, I will review on Ŭisang’s view of buddhist precepts, examining three representative cases from the data conveying Ŭisang’s biography. First, it is the relation with the Northern Edition of the Nirvāṇa Sutra北本涅 槃經which he learned through Goguryeo高句麗monk Bodeok普德. After returning to Silla after studying Tang, Ŭisang builds Buseoksa浮石寺 and establishes Huayan華嚴community. At this time, He rejected the offering of land and slavery by the king on the basis of the teaching of the Nirvāṇa Sutra. I think he knew the Nirvāṇa Sutra’s position that the accumulation of the eight kinds of dirty goods is a major cause of the corruption of the buddhist order. Second, it is a meeting with Toseon 道宣, a representative vinayadhara律師of the Tang Dynasty. The Ŭisang seemed to have had a chance to meet him during the study period under Zhiyan智儼. The possibility of exchange between the two persons can also be inferred through the existence of the Silla monk Zhiyin智仁, who was a disciple of Toseon. Third is the influence of Yijing義淨, who was one of the vinayadhara representing Tang withToseon. Song Gaoseng zhuan宋高僧傳also said, “He was always practicing ‘how to wash the dirty’ of Yijing,” which suggests the possibility that Ŭisang was influenced by Yijing. It is not yet clear what the meaning of ‘how to wash the dirty’ here is, but it is presumed that it was a way of practicing ahiṃsā不殺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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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상(義湘)의 행로(行路)와 사상적 변화에 대한 고찰

        석길암(Gil Am Seok)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2011 佛敎學報 Vol.0 No.59

        본 논문에서는 의상의 생애를 지엄과의 만남, 귀국의 동기, 부석사행, 그리고 부석사 시절의 사상적 경향과 특징이라는 네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검토하였다. 검토의 결과를 간단히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첫 번째는 스승인 지엄과의 만남은 유식에서 화엄가로의 사상적 전환을 의미하는 사건이다. 두 번째는 중국 화엄교학의 기초자인 지엄의 입적 및 동문의 사제인 법장과의 갈등을 계기로 이루어진 귀국인데, 이 귀국은 지엄 이후 의상과 법장을 대표로 하는 海東華嚴敎學과 中國華嚴敎學의 사상적 분기점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는 浮石寺行인데, 이 부석사행은 의상이 중국 화엄의 전래자가 아니라 해동화엄사상의 開祖로 나아가는 계기로 작용한 사건이다. 가정이지만 의상이 왕경인 경주 인근에서 주석하였다면, 이후 의상계 화엄 혹은 해동화엄이라 불리는 독특한 사상적 전통의 형성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단언하기는 쉽지 않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의상계의 문헌들은 대부분 이두를 사용하여 작성되었고, 스승과 제자로 이어지는 깨달음의 전승방식 등 당시의 신라 불교계 혹은 중국 화엄종과는 대단히 다른 독특한 사상전통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독특한 전통은 좀더 오픈되어 있었을 신라 왕경의 불교계에서 독자적으로 형성되기는 조금 무리이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논자의 의견이다. 또한 의상의 제자들이 좀더 당시 王京 경주의 주류불교의 흐름에 익숙했던 王京 출신의 상류층으로 구성되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의상계만의 독특한 전통은 역시 형성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곧 부석사행은 일정 부분 신라 왕경 지역 불교계의 흐름과 격리되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그것은 역으로 의상계 화엄이라는 독특한 전통을 형성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네 번째는 부석사 시절의 독특한 사상적 경향에 대해서인데, 부석사 시절의 사상에는 북종선과 지론종 그리고 삼계교의 사상적 영향이 훨씬 더 구체화되는 특징을 보인다. 특히 의상과 그의 직전제자들에게서는 지론종 그 중에서도 대단히 특징적이고 예외적인 흐름으로 생각되는 지론종의 『七宗禮法』및 교리집성문헌 Φ180의 영향이 보인다. 이들 예외적이고 독특한, 그리고 지엄의 입적을 전후해서 의상에게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이는 지론종 一派의 사상은, 부석사 시절 제자들에게 사상이 전승되는 동안 더욱 구체화되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이를 계기로 성기사상이 더욱 강화된 것은 물론 구제론적이고 구체적이면서 실천적인 화엄의 형성이라는 방향으로 나아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동아시의 불교사상의 한 주류를 이루는 화엄사상의 성립과 그 양대 조류의 분기점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In this paper, I divided Uisang(義湘)`s life into four periods: his visiting Zhiyan (智儼), his motive of returning to homeland, his entering Buseoksa(浮石寺) Temple, and his ideological tendency and characteristics in Buseoksa Temple. The brief result is as follows: First, his visiting his teacher of Zhiyan was an ideologically transformative event which changed the Weishi(唯識) scholar into Huayan(華嚴). Second, his returning to homeland, which was brought by the death of Zhiyan, the drafter of Chinese Huayan Thoughts, and by conflict with Fazang(法藏), a fellow student under Zhiyan, could be a ideological watershed, after Zhiyan, between Korean Hwa-eom Thoughts with Uisang as the representative and Chinese Huayan with Fazang. Third, his entering Buseoksa Temple was an event that invested him with the founder of Korean Hwa-eom Thoughts, not the successor of Chinese Huayan. If he had dwelled near the capital city of Gyeongju, we cannot assert easily that the unique ideological tradition, which is called Korean Hwa-eom or Uisang-line Hwa-eom, could have been able to be formed. As is generally known, Uisang-line masters wrote most their books in Idu(吏讀) system, which is old Korean notation with Chinese characters before inventing Korean own characters, and they formed specific tradition including the way of which enlightenment was passed down from a teacher to a student, which was very different from Silla buddhism or Chinese Huayan School in that time. They might have had difficulties to form such specific tradition by themselves, I think, if they had been within buddhist world near the capital city which had been even opener than Buseoksa Temple. Also, I think, if Uisang`s students had been from the high class, more familiar with main stream of Buddhism of the capital city, they could not have built their own specific tradition as we know now. In a word, Uisang`s entering Buseoksa Temple brought about a result of isolation from Buddhist tendency of the capital city to some degree, and inversely, this isolation would be benefit for them to form their unique tradition of Uisang-line Hwa-eom. Fourth, his ideological tendency in Buseoksa Temple was characterized as much more concretized ideological influence of Northern Zen, Dilun(地論) School, and Sanjiejiao(三階敎). Especially, Uisang and his direct students were affected from Dilun School, and their thoughts show influence from the Qizonglifa(七宗禮法, the Seven Kinds of Worship) and the Collected Texts of Doctrine Φ180 which are taken as extraordinary and exceptional Dilun texts. These exceptional and specific thoughts of one sect of Dilun School seem to exert influence on Uisang before or after Zhiyan`s passing away, and seem to more concretize while being transmitted to his students at Buseoksa Temple. With this as a moment, they was not only thought to tighten their thoughts of Nature Arising(性起) up, but also to build their soteriogical, concrete, and practical Hae-eom thoughts. These established, we can see, specific Hwa-eom thought which became mainstream of East Asian buddhist thoughts, and played a role of a sort of watershed between Fazang line and Uisang line, two major trends of East Asian Huayan thoughts.

      • 의상계 화엄의 禪的경향성에 대하여

        石吉岩(Seok Gil-Ahm)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10 한국고대사탐구 Vol.4 No.-

        의상과 의상계의 화엄사상은 중국 화엄교학과는 구별되는 독자성을 가지고 있다. 이 같은 독자성은 신라 下代로 갈수록 더욱 강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본 논문은 이 같은 의상계 화엄의 독자성이 성립된 원인의 하나로서 ‘禪的 경향성’에 주목하였다. 본 논문에서는 의상 및 의상계 화엄의 ‘禪的 경향성’의 사례로 다음의 네 가지 사항을 지적하였다. 첫째, 이 선적 경향성의 원천으로, 의상의 『화엄일승법계도』 에 나타나는 북종선 문헌 『大乘五方便門』의 영향을 지적할 수 있다. 즉 의상의 화엄사상은 성립과정에 이미 북종선의 영향을 받고 있다. 둘째, 師資相承의 계보의식이 나타난다. 사자상승의 전승의식이 비교적 명확하게 드러나며, 그 계승의 증표로 ‘法界圖印’을 사용한 사례가 있다. 이것은 선종의 사자상승 및 전승의식과 유사하다. 셋째, 북종선에서 사용되었던 指事問義의 방식을 의상계 화엄에서도 역시 즐겨 사용하고 있다. 넷째, 의상계의 華嚴性起은 부분적으로 선종의 영향 아래 성립된 것이며, 따라서 신라 下代에 선종이 전래되었을 때 의상계 화엄승들이 쉽게 선종으로 전향하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이상의 사례 검토를 통해서 , 의상계의 화엄사상이 중국 화엄교학 및 여타의 화엄사상과 구분되는 독자성을 가지게 된 배경의 하나로 선종의 영향을 주목해야 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의상계 화엄의 ‘선적 경향성’은 의상뿐만 아니라 의상계 화엄의 해석에 중요한 요인의 하나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The Huayan thought of Euisang or Euisang line has characteristics distinguishable from the doctrines of Chinese Huayan System. Such distinctive characteristics seem to have consolidated itself even strongly towards the last days of Silla dynasty. This article focuses upon its tendency toward Chan Buddhism as one of its bases for such distinctive characteristics. This article points out the following four particulars as the examples of this tendency. First, the original source for this tendency toward Chan Buddhism can be found in the influence of the Dachengwufangbienmen(大乘五方便門), a text belonging to the northern Chan(禪) tradition, in Euisang’s Hwaeomilseungbeopgyedo(華嚴一乘法界圖). That is, the establishment of Euisang's Huayan thought is already in debt to the influence of the northern Chan. Second, there appears the consciousness of the inheritance from mentor to disciple(師資相承) in it. Comparatively clear is such a consciousness, evidencing it through the use of the seal of the Beopgyedo(法界圖印) for example. This is similar to such a consciousness in the tradition of Chan Buddhism. Third, the style of zhishiwenyi(指事問義, the style of illuminating a meaning by the medium of a concrete object), which was usual in the northern Chan, is also used frequently in the Huayan Buddhism of Euisang line. Fourth, the thought of Huayanxingqi(華嚴性起) in Euisang line is established partly due to the influence of Chan Buddhism, which seems to have caused the Huayan monks of Euisang line to convert easily to Chan Buddhism when Chan Buddhism was transmitted to Korea in the last days of Silla dynasty. From the above examples, it can be ascertained that the influence of Chan Buddhism might be focused as one basis of the distinctive characteristics of Huayan thought of Euisang line apart from Chinese Huayan doctrinal system and other Huayan thoughts. Shortly, the tendency toward Chan Buddhism in the Huayan thought of Euisang line should be considered as one of important factors in interpreting the Huayan thought not only of Euisang but also of Euisang 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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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Sex & the City"의 의상 디자인 발상에 관한 연구-여자 주인공 4명을 중심으로(캐리, 사만다, 샬롯, 미란다)-

        김정아 ( Kim Jung Ah ),손영미 ( Shon Young Mi ) 한국디자인트렌드학회 2009 한국디자인포럼 Vol.25 No.-

        본 논문은 미국 대중문화에 한 획을 그었으며 전 세계에 미국 드라마 열풍을 불러온 최초의 작품이자 다양한 패션을 보여주면서 많은 유행을 창조한 인기 드라마 < Sex & the City >를 영화화한 작품 `Sex & the City`에 나타난 의상을 분석하고 4명의 여자 주인공의 영화의상을 디자인한 것이다. 연구 방법은 문헌 자료와 잡지를 중심으로 문헌 연구를 하였으며 영상자료,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검색하였다. 연구 내용으로는 먼저 영화의상의 정의와 기능을 고찰하였다. 영화의 배경인 뉴욕의 2008 S/S와 F/W 유행 경향을 분석하고, 뉴욕의 유행을 선도하는 디자이너들의 대표적인 디자인에 대하여 고찰하였으며, 영화의 배경과 줄거리, 등장인물의 성격과 영화 속 여자 주인공 4명의 의상을 분석하였다. 마지막으로는 드라마에 비하여 영화 속 의상에는 각각의 등장인물의 성격과 개성이 뚜렷하지 않은 점을 보완하고자 영화의 배경이 된 뉴욕의 2008년 유행 경향을 고려하여 등장인물의 성격과 개성, 직업 등을 뚜렷이 나타내 줄 수 있는 영화의상을 디자인·제작 하였다. 각 등장인물의 영화의상 디자인의 특징 중 첫째 캐리의 의상은 프리랜서답게 자유스러우면서도 뉴욕의 세련됨과 화려함을 가미하여 4명중 가장 트렌디하게 디자인하였고 둘째 사만다의 의상은 그녀의 섹시함을 강조하여 그녀만의 정열적인 성격을 나타내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셋째 샬롯의 의상은 그녀의 여성스러운 매력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아하고 우아한 패션 스타일로 고급스럽고 여성스러운 느낌을 나타내는 데에 중점을 두어 디자인 하였고 넷째 미란다는 변호사라는 직업을 염두에 두어 의상을 지적이고 세련되게 디자인 하였다. 본 연구를 통하여 영화에 있어서 영화의상은 영화의 분위기를 좌우할 뿐 아니라 등장인물에 대한 표현 수단이며 많은 유행을 창조한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또한 영화를 분석함과 동시에 등장인물들의 삶의 배경인 뉴욕의 트렌드를 연구하여 그에 따른 의상을 강조함으로써 영화의상 디자인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였다. This study analyses costumes in the film, "Sex & the City," which is adapted from one of the best hit American dramas also titled as "Sex and the City." This drama had a significant impact on American popular culture revealing a variety of fashion styles, including significant costume presence of the four main actresses. A bibliographical research was carried out based on bibliographical data and magazines, and also through photographic data and Internet sites. This study is also to examine the definition and the function of movie costumes. The function of a film was categorized into symbolic and fashion creations, and movie costumes into comedy, music and science fiction costumes as well as costumes periodically. In addition, the fashion trends of spring, summer, fall and winter in 2008 were analyzed as well as representative designs of leading designers in New York, plot and background of the movie, personalities and costumes of the four actresses in the film, "Sex and the City." Finally, to overcome unclear representation of actresses` personalities and characteristics in the movie, this study designed and produced costumes based on the fashion trend of New York in 2008 that can reinterpret the qualities of the actresses. Firstly, of all the characters` costumes, Carry`s outfits are of a free style design, characteristic of a freelancer, further imbued with New York`s sophistication and color. Carry therefore is seen as the trendiest of the four characters. Secondly, Samanda`s costume represents her sexuality and focuses on presenting her own passionate character. Next, Charlotte`s costume features an elegant and graceful fashion style, which illustrates well her feminine charm, with a focus on luxury and femininity. Lastly, Miranda`s costume style represents an intellectual and sophisticated design, with consideration given to her profession as a lawyer. Through this study, the significance of costumes in a film was revealed as they not only portray the mood of the film but also contribute to creation of many trends. Costumes work as representing characters and through looking into the New York fashion trend and putting an emphasis on the importance of clothing, movie costumes provide a comprehensive view as they lead to a potential growth of film costume design.

      • KCI등재

        의상(義湘)의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 圖)』의 교육사(敎育史)적 의의

        박재영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 2012 동아시아불교문화 Vol.11 No.-

        본 연구는 7세기 신라의 불교지성인 의상(義湘)의 생애와 사상을 집약한 저서인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의 교육사적 의의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또한 의상을 그 시대를 이끌어 간 교육자로서 그리고 의상 사상의 결정체인 『법계도(法界圖)』를 교육적 텍스트로서 봄으로써 신라 불교교육의 전통을 복원하고 나아가 유교중심의 한국 교육사 서술과 인식의 편향성을 바로잡으려는 연구자의 의도를 보이고자 한다. 의상의 삶은 종교의 관점에서 볼 때 구도자로서의 삶의 모범이지만, 교육의 관점에서 볼 때 전형적 교육자의 삶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득도 이전의 그의 삶은 치열한 학습자의 모습 그것이고, 득도 이후 그의 다양한 교화행(敎化行)은 교육실천가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특히 주목하고자 하는 『법계도(法界圖)』는 그가 중생교화, 즉 교육적 의도로 만든 텍스트(Text) 혹은 그 이상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교구(敎具)인 것이다. 이러한 의상의 『법계도(法界圖)』의 교육적 의미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법계도(法界圖)』는 단순한 화엄사상의 요약집이 아니라 의상에 의해 정교하게 고안된 교육 미디어(Media)다. 둘째, 『법계도(法界圖)』는 형식과 내용의 두 면에서 모두 교육적 효과를 거둘 수 있도록 고안되었으며, 학습 목표의 제시에서부터 학습자의 특성과 학습의 방법, 학습의 효과 등을 모두 종합적으로 제시한 텍스트다. 셋째, 『법계도(法界圖)』는 한국교육사에서 처음으로 고안되고 제시되었다는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넷째, 『법계도(法界圖)』는 단지 이론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교육 현장에서 실제 활용하여 그 효과를 검증한 교육미디어다. 그리고 의상의 사상과 『법계도(法界圖)』의 교육사적 의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교육의 관점에서 보면 의상은 그 당시 학습자인 중생들이 참다운 인간성을 발현하도록 기여한 획기적인 교육 사상가이자 실천적 교육자였다. 둘째, 미디어(Media)의 관점에서 보면 의상의 『법계도(法界圖)』는 완결된 형태의 텍스트로서 가치를 지녔고, 의상은 학습의 전 단계에 걸쳐 도인(圖印)을 교육적으로 최대한으로 활용하는 독창성을 보였다. 또한 교육 미디어로서의 불교 사원, 즉 교화의 공간 조성에도 노력하였다. 셋째, 동아시아 불교문화사의 관점에서 보면 의상은 신라가 그 당시 고대사회의 자기중심적인 편협함을 탈피하여 동아시아 문화의 보편성을 지향하는 데 기여한 측면이 크다. 이처럼 의상(義湘)은 『법계도(法界圖)』를 창조적으로 활용하여 지식의 확장과 평등화를 촉진하며 7세기 신라인들의 인성(人性) 형성과 교육문화 형성에 공헌한 불교지성이었다. 本硏究旨在闡明濃縮了7世紀新羅高僧--義湘的生平及思想的《華嚴一乘法界圖》這一著作的敎育史意義。此外,硏究者將義湘描繪成引領其時代的敎育家幷將其思想的結晶--《法界圖》作爲敎育課本來看,希望借此還原新羅佛敎敎育的傳統;進而糾正韓國敎育史以儒家思想爲核心進行斜述和認識傾向。義湘的生平以宗敎的立場來看是求道者生活的典範,而從敎育的觀點來看其生涯可以說是一位典型的敎育工作者的人生曆程。換句話說,在得道前他的人生是以狂熱的學習者的姿態出現的,而在得道之後他那豊富多樣的敎化活動就完全是一個敎育實踐家的所爲了。這裏想特別關注的《法界圖》是義湘對芸芸衆生進行敎化(卽,依其敎育意圖編寫的課本,或是可以조從中出超出其上的意義)的敎具。可將義湘《法界圖》的敎育意義進行如下整理。第一,《法界圖》不是單純的華嚴思想的摘要,而是依고思考硏究創造出的精巧的敎育媒介。第二,撰寫的《法界圖》在形式和內容兩個方面都收到了敎育成效的同時,在學習目標提示,學習者的特性與學習方法,學習效果等方面都進行了綜合性的揭示。第三,在韓國敎育史上《法界圖》具有被首次硏究創造幷提出的曆史意義。第四,《法界圖》幷不是僅僅停留在理論層面的,而是在敎育現場實際使用幷已檢驗了其效果的敎育媒介。義湘的思想和《法界圖》的敎育史意義如下。第一,從敎育人的角度來看,義湘是在當時爲讓衆多學習者發現진正的人性而做出了卓越貢獻的劃時代的敎育思想家,實踐敎育家。第二,從媒介的角度來看,義湘的《法界圖》作爲完成形態的課本是흔有價値的,幷且可以看出在涉及到的全部學習階段中,義湘都將圖印最大限度地運用到敎學中的獨創性。而且爲建造作爲敎育媒體的佛敎寺院(卽,敎化空間)做出了努力。第三,從東亞佛敎文化的角度來看,義湘對讓新羅從當時古代社會自我中心的狹隘中脫離出來,走向東亞文化的普遍性這一點上做出的貢獻是巨大的。義湘是一位對《法界圖》進行了創造性運用,幷在促進了知識的廣泛傳播和敎育平等化的同時,對世紀新羅人的素質和敎育文化的形成做出貢獻的高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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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청(艾靑)과 주광잠(朱光潛)의 이미지(Image) 시론비교(詩論比較)

        박남용 韓國世界文學比較學會 2009 世界文學比較硏究 Vol.29 No.-

        在二十世紀三,四十年代中國現代詩歌理論史上, 艾靑和朱光潛兩位是最著名詩人和美學家, 也是最重要的詩論家. 艾靑以豊富的創作成果和堅實詩歌理論, 爲了抗戰時期詩歌理論建設起了重要的作用和深遠的影響. 朱光潛以豊厚的傳統知識和西歐文化體驗, 爲了中國詩歌理論和美學理論起到了重要的作用. 本論文對艾靑與朱光潛的意象詩論進行了他們理論上的比較硏究. 在他們的詩歌理論上, 他們的詩論有了多種多樣的詩歌理論色彩和批評方式之間的同異點. 艾靑提出了作爲詩人型的詩學理論, 朱光潛提出了學者型的詩學理論. 本論文共分五章, 第一章是序論. 第二章主要硏究了中國的意象詩論的形成和展開過程, 在這裏, 筆者提出了中國古代詩學上和現代詩學上的意象詩論之間的同異點. 第三章主要硏究了朱光潛的意象詩論的內容和特點. 朱光潛互相融合了以王國維境界爲傳統詩論和西歐美學思想, 創造了獨創的意象理論. 第四章主要硏究了艾靑的意象詩論的內容和特點. 艾靑提出了以眞善美的統一爲詩歌理論, 相當重視了詩歌創作上的意象理論. 五章主要硏究了艾靑和朱光潛詩論的同異點. 他們不旦重視了詩歌意象和詩的語言, 而且重視了詩人情趣和意象之間的關係. 可是, 艾靑主要主張詩歌的社會作用, 提出了詩人的社會責任和使命, 朱光潛主要主張詩歌的審美作用, 提出了美的遊戱說和詩的移情作用. 第六章是結論. 總而言之, 通過本論文的艾靑朱光潛的意象詩論比較硏究, 筆者可以了解三,四十年代中國現代詩論史上的重要詩論的內容和特點. 在詩的本質, 詩的語言和詩歌形式問題上, 意象問題是相當重要的, 詩人通過具體的意象創作作品, 讀者通過多樣的意象欣賞作品. 如此, 筆者主要硏究了在中國現代詩歌理論史上的艾靑朱光潛的意象詩論的重要性和獨創性問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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