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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인(官人)으로서의 김이교(金履喬)

        임선빈(Yim Seonbin)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2021 충청학과 충청문화 Vol.31 No.1

        본고는 조선후기 정조와 순조조에 40여년간 관직에 있었으며, 1811년 신미통신사행의 정사로 일본 대마도에 다녀온 김이교의 관직 생활에 대해 살핀 글이다. 김이교는 신안통김씨인 선원 김상용의 7세손으로 대조인 김광현부터 충청도 홍주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그의 집안은 충청도 내포지역과 서울이 주된 근거지였다. 노론 시파에 해당하는 김이교 집안은 노론 벽파의 정순왕후 가문인 경주김씨와 심한 갈등이 있었으며, 김이교의 관직생활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정조조에 과거를 통해 벼슬길에 나아간 김이교는 일찍이 정조로부터 제술 능력을 인정받았으며. 전임사관과 사간원·홍문관 경연 등의 청요직으로 근무하면서 실무를 익히고, 외직 경험도 쌓았다. 그러나 순조가 즉위하고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하면서 5년간 유배 생활과 향리로 방축(放逐)되는 위기를 겪기도 했다. 정순왕후 사후 노론 시파 정권으로 바뀌자, 김이교는 1806년에 43세의 나이로 다시 서용되었다. 이후 승정원 승지, 호조참의, 강원도관찰사, 병조참지,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부제학 등의 당상관직을 두루 거치고, 1811년에는 신미통신사행의 정사가 되어 일본의 대마도에 다녀왔다. 4개월에 걸친 일본 견문은 이후 김이교의 관직생활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김이교는 통신사행을 수행한 포상으로 종2품인 가선대부에 가자되었으며, 이후 호조참판, 사역원제조, 평안감사 등에 제수된 것도 신사행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50대 이후의 김이교 관직은 사헌부 대사헌, 승정원 도승지, 홍문관부제학, 오위도총부 도총관, 한성부 판윤, 공조판서, 형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 판의금부사, 수원유수 등 중앙 주요부서의 장관직과 의정부의 좌.우 참찬 등을 두루 지냈으며, 외직으로는 평안도 관찰사를 지냈다. 그런데 가장 특기할 만한 것은 63세부터 문형(文衡)으로 일컬어 지는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임한 실이다. 제술 능력이 뛰어났던 김이교는 수시로 효의왕후 행장, 순조의 반교문, 중궁전 옥책문 등을 제술함으로써 가자(加資)를 비롯한 포상을 여러 차례 받았다. 68세에 의정부 우의정에 오른 김이교는 69세로 타계하기 직전까지 국정 운영에 헌신했으며, 마지막 반년간은 영의정과 좌의정이 공석인 상황에서 혼자 국정을 도맡아 수행했다. 사후 김이교는 ‘문정(文貞)’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순조 묘정에도 배향되었다.

      • KCI등재후보

        조선 선조대 이산보의 관직생활

        임선빈 ( Yim Seon-bin ) 청계사학회 2021 청계사학 Vol.23 No.-

        본고는 16세기 후반 선조대의 동서분당과 임진왜란 초기의 중요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학계에서 큰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던 이산보의 관직 생활에 대해 살폈다. 이산보는 문집을 남기지 않았고, 그가 주로 활동했던 선조대의 실록은 실록편찬을 위해 작성하여 춘추관에 보관하던 시정기조차 모두 왜란으로 불타 없어진 상태에서 실록을 편찬했기 때문에, 연구에 활용할 자료의 한계가 많다. 본고는 정엽이 지은 이산보 행장,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 그 외의 관련 자료들을 습유하여 비판적 검토를 하면서 이산보의 가계와 생장, 관직에 나아가는 과정과 당하관까지의 실무 관직 생활, 당상관직 재임과 정치 활동, 임진왜란 발발 이후 전란 수습을 하기 위해 동분서주 하던 중 병을 얻어 타계하기까지의 관직 생활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산보는 고려말 조선전기 혁혁한 가문인 한산이씨로, 목은 이색의 7대손이다. 이산보의 선계는 이곡-이색-이종선-이계전-이우-이장윤-이치-이지무-이산보로 이어지며, 조부인 이치부터 충청도 보령에 거주했다. 이산보는 숙부인 이지함으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며, 30세에 문과를 통해 관직에 나아갔다. 이산보는 예문관 검열을 시작으로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 등 삼사의 요직과 이조 정랑을 지냈으며, 45세에는 정3품 당상관인 승지에까지 이르렀다. 이후 53세까지는 정치관료로서 활발한 활동을 했으며, 52세에는 성절사 정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러한 이산보의 관직 제수에는 선조의 특지가 여러 차례 작용하였다. 그런데 이 시기가 동서분당이 이루어진 직후로 동인과 서인간의 당쟁이 치열했기 때문에 기축옥사와 건저의 사건 등에서 이산보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유배까지 다녀오지는 않았지만 여러 차례 파직을 경험했다. 임진왜란 발발 당시 파직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던 이산보는 전쟁이 발발하자 평소의 충성스런 관직자답게 피난길에 오른 선조를 찾아가 의주까지 호종했으며, 전란의 와중에서 중책인 이조판서에 제수되어 전란극복을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활동하였다. 55세에는 의정부 좌참찬에 제수되어 무군사 당상으로 왕세자인 광해군을 모시고 최전방에서 전란 극복에 애쓰다가, 56세인 선조 27년 4월에 과로로 쓰러지고 병이 들어 타계하였다. 이와 같은 이산보의 헌신적인 삶은 조선시대 전형적인 문신 관료의 삶이면서도 충성스런 관직자의 삶이었다. 명곡 이산보(1539~1594)는 토정 이지함의 학문 영향을 받았으며, 율곡 이이(1536~1584)), 우계 성혼(1535~1598), 송강 정철(1536~1593) 등과 같은 서인의 당색을 지니고 있었다. 반면에 이산보와 사촌이며 동갑으로 어려서 숙부 이지함으로부터 함께 학문을 익혔던 아계 이산해(1539~1609)는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임진왜란 발발 초기에는 이산보의 활약과는 달리 서인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기도 했다. 선조대의 초기 동서분당 과정에서 한 집안이면서도 각각 서로 다른 길을 걸었던 이산보와 이산해의 관직 생활을 이해하는 데에도 본고가 다소의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문집이 남아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관찬 자료인 실록조차 내용이 소략하고 편파적인 선조대 전반기의 인물에 대해서, 관련 자료를 습유하여 비판적 검토를 하면서 수행한 본 연구가 이 시대 인물의 사례연구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This paper examines the official life of Yi San-bo during King Seonjo’s reign in the latter half of the 16th century. When the factional split between Easterners and Westerners developed and the Japanese in-vasions, or Imjin War, occurred, he was an influential figure but has never drawn much attention in academia. Worse, there are few histor-ical data left about him. He does not have a literary collection and moreover, all of the historians’ daily record of events in the bureau of state records for the Annals of King Seonjo were burnt up during the Imjin War. Thus, research had to be based on the other related materials such as the restored Annals of King Seonjo, the Revised Annals of King Seonjo, and Jeong Yeop’s “Biographical Account of Yi San-bo.” The in-formation collected from them is compared with each other and or-ganized as follows: his birth, lineage, and growth, his years before gov-ernment service, years in office as a low ranking official, years in office as a high ranking official and of political engagement, and his last years taking care of the aftermath of the Imjin War. All of them are inves-tigated in this article. On top of that, his life is portrayed, contrasted with his cousin Yi San-hae who studied under the same teacher Yi Ji-ham but belonged to the opposite faction.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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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경노씨 三義士의 ‘역사적 實在’와 ‘記憶된 역사’

        임선빈(Yim, Seon-bin) 한국역사민속학회 2015 역사민속학 Vol.0 No.47

        본고는 임진왜란 때 중봉 조헌의 휘하에서 의병으로 활약하다가 금산전투에서 순절했다고 알려져 있는 만경노씨 三義士가 실제로는 임진왜란 때 죽지 않았다는 역사적 사실을 밝히고, 나아가 역사적 實在와 다르게 기억되고 서술된 후대의 집단기억과 變造된 기록물에 대해 그 과정과 의미를 살핀 글이다. 16세기에 충청도 공주의 한 마을에서 태어난 만경노씨 삼형제는 임진왜란 때 중봉 조헌의 의병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고, 임란이 끝난 후에도 수 십년간 공주 고을을 대표하는 유생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노응탁은 선조조에 五賢의 문묘종사 논의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고, 광해군 즉위 후에는 충청도를 대표하는 유생으로 조헌의 사당이 표충사라는 사액을 받는 일을 주도하였다. 나아가 광해군 원년(1609)에 생원시에 입격하였으며, 광해군 13년(1621)에는 별시 문과에 응시하여 당당히 합격하였다. 그러나 당해 과거시험은 광해군 처가의 인물들이 대거 급제한 부정행위가 지목되어 인조 반정 후 罷榜되었다. 인조 원년(1623) 혐의가 없는 급제자를 대상으로 재시험이 설행되었지만, 노응탁은 아쉽게도 바로 전해인 광해군 14년에 죽었기 때문에 改試榜에 참여하지 못했다. 이러한 광해군 재위시기 노응탁의 활동상에 비추어 볼 때, 만경노씨 가문은 임진왜란 때 왕세자로 공주에 80여일간 머물면서 撫軍司를 진두지휘 하는 등 선조를 대신해 전란극복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광해군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상의 역사적 실재와는 달리 18세기 중엽에 편찬된 『중봉집』 중간본의 부록에 수록된 『幕佐門生同日死節錄』에 만경노씨 삼형제의 한명인 노응환이 임진왜란의 금산전투에서 의병장 조헌과 함께 순절한 것으로 기록되기 시작하며, 19세기 초 성해응에 의해 찬술된 『錦山殉節諸臣傳』에서는 노응환의 입전과 함께 노응탁도 거명되고 있다. 나아가 이 시기에 만경노씨 문중에서는 공주의 사족 및 충청 도내 유생들의 공론을 바탕으로 삼의사 충절에 대한 추숭사업을 1세기 간에 걸쳐 적극적으로 추진한다. 10여 차례 等狀을 작성하여 공주목사와 충청도관찰사 및 예조에 올렸으며, 그 결과 노응환 노응탁은 1831년에 旌褒되었고, 노응호는 1892년에 증직되었다. 특히 1870년에 당대의 巨儒였던 임헌회가 『萬頃盧氏三義士行狀』을 찬술한 것은 삼의사 추숭사업의 畵龍點睛이었다. 이와 같이 만경노씨 삼의사에 대한 후대의 기억이 역사적 實在와 다르게 變造되고, 나아가 변조된 집단기억의 사회화가 진행된 연유는 무엇일까? 아마 임진왜란 때 공주에 장기간 머물면서 국난극복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광해군과 매우 밀접한 연고를 지녔던 것으로 추측되는 만경노씨 가문에게는,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축출된 이후 인조와 그의 血孫들에 의해 통치되는 정치상황이 계속되고, 18세기 이후 孝悌와 忠節이 강조되는 시대분위기가 조성되자, 이제 광해군과의 인연을 씻어내고 새로운 충신가문으로 거듭나기 위한 과정이 필요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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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업설계이론 발달에 기초가 된 교수-학습이론에 관한 이론적 고찰

        임선빈(Yim, Sun-Bin) 성신여자대학교 교육문제연구소 1995 교육연구 Vol.29 No.-

        The need for better methods of instruction dose not end with public education. Instruction is concerned primarily with how to teach. On the most general level, the area of instruction can be viewed as being comprised of five major activities : design is, as it is to optimizing the process of instructing, concerned with understanding, improving, and applying methods of instruction. An aspect of instructional design have developed out of learning theory, and the other aspect have developed out of media, communications. But the media and communications tradition's contributions to instructional design have been in the from of isolated strategies and principles rather than integrated models and theories (Reigeluth, 1983). The major portion of instructional design's antecedents comes from the traditional learning theory Instructional design's conception can be primarily attributed to Skinner, Gagn?, Bruner, Ausubel. Thish paper reviews these traditional instruction-learning theories based on the instructional design theory. These Theories have had important roles in the development of instrustional design. Skinner's operant conditioning motivated the scientific investigation of instruction as it empirically tested model of instruction. And Skinner developed programmed instruction applied operant conditioning principles Gagn?'s learning hierarchies has provided instructional designers with a rational and procedures for determing what prerequiste knowledge is necessary to support present learning. Brunner proposed a prescriptive instructional theory because instruction was to prescribe optimal methods of increasing learning effect. And he developed a model of instruction based on discovery methods and stages of intellectual development. The essential criterion for discovery learning is that the learner organize into final from the material to be learned. Ausubel developed a model of instruction based on expository methods and cognitive structures. And he proposed the subsumption theory the concept of subsumer, conbinational subsumption, anchoring ide and learning set.

      • KCI등재

        특집 : 명재 윤증의 학문과 사상; 명재종택전래자료(明齋宗宅傳來資料)의 현황과 성격

        임선빈 ( Seon Bin Yim )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2009 儒學硏究 Vol.20 No.-

        이 논문은 파평 윤씨의 노성 정착과정과 명재 종택 거주 인물의 가계, 명재 종택 전래자료의 조사 현황 및 최근의 유물 기탁과 소장현황에 대해 살피고, 명재 종택 전래 고문서를 유형별로 정리하여 소개하였다. 명재 종택 전래 자료는 양적으로 방대할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최근 대부분의 명재 종택 전래 자료가 공공기관에 기탁되었으나, 일부는 종택에서 유출되어 흩어져 있다. 이와 같은 종택 전래자료의 조사와 수집이 긴요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마이크로필름 촬영자료(1989)와 국사편찬위원회의 촬영자료(2002, 2004) 및 최근의 기관 기탁문서 등의 철저한 비교를 통해 종합적인 정리작업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특히 전래 고문서의 정리 및 분석은 연대기 자료 및 문집에 기초하여 이루어지고 있는 기존 연구의 한계를 극복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This study examined the settlement of the Yun clan of Papyeong in Noseong, the family line of people who resided in Myeongjae`s head house, the present status of materials which have been transmitted in the head house, the head house`s recent entrusting of its relics to public institutions and the relics being currently held by the head house. In addition, the study arranged and introduced ancient documents by the type which have been handed down in the head house. Materials that have been handed down in Myeongjae`s head house are not only quantitively huge but also very valuable in quality. Recently, most of the materials have been entrusted to public institutions, but some were drained from the head house and then scattered. The research and collection of the materials in the head house is important. A comprehensive work to arrange the materials should be carried out through the thorough comparison of microfilm material(1989) by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film materials(2002, 2004) by the National History Compilation Committee and materials that had been transmitted in Myeongjae`s head house until recently when they were entrusted to public institutions. Especially, the arrangement and analysis of the ancient documents of the head house will assist a lot in overcome the limitations of present studies being carried out based on chronicle materials and collections of works.

      • 조선전기 洪任의 관직 활동

        임선빈 ( Yim Seonbin ) 한국계보연구회 2023 한국계보연구 Vol.13 No.0

        본고는 15세기 중엽부터 16세기 초기까지 관료로 활동한 홍임에 대해 가계와 초기 사환, 성종대 목민관으로서의 활동, 연산군·중종대 정치 격변기의 관직 생활에 대해 살펴보았다. 홍임의 선대는 고려 중·후기에 고위직 관료로 많은 활약을 했으나, 고려말에는 쇠락하였고, 조선 초기의 인물인 홍임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사적(史籍)에서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음관으로 벼슬길에 나아간 홍임은 뛰어난 무재(武才)와 이재(吏才)를 지니고 있었으며, 성종대에 서반직과 목민관으로 활약하면서 서서히 조선왕조의 새로운 관료군에 편입되어 갔다. 특히 아버지의 사환을 배경으로 문과에 급제한 아들 홍경주가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일등공신으로 책훈되자, 이후 홍임은 공신의 아버지로서 음직 가자(蔭職加資)까지 더하게 되었고, 재상급 관료로 중앙조정의 정책논의에도 참여하면서 정치 관료로서의 역할도 수행했다. 이와 같은 홍임의 관직 진출과 활동은 남양홍씨 가문의 이해는 물론, 홍임-홍경주 부자의 관력(官歷)을 통해 여말선초에 한때 쇠락했던 가문이 득세하는 과정을 볼 수 있으며, 조선왕조 관료제 사회의 일면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 This article examines about Hong Im, who served as a bureaucrat from the mid-15th century to the early 16th century, in the field of his family tree, his early governmental job, his activities as a Mokmin-gwan during King Seongjong's reign, and his life as a public servant during political upheaval in Yeonsan-gun and Joongjong periods. Hong Im’s predecessors played a lot of political roles as a high office during the middle and late Goryeo Dynasty, but their prestige collapsed with the end of the Goryeo Dynasty. Hong Im’s father and grandfather, who were figures of early Joseon Dynasty, were not found in any historical records. Hong Im held a government post by benefiting from ancestors’ virtue system(Um-suh system). He had outstanding abilities both in martial arts and governing people, so he gradually incorporated himself into the new bureaucracy of the Joseon Dynasty while he worked as Surban-jik and Mokmin-gwan during King Seongjong’s reign. In particular, when his son Hong Kyung-ju, who had passed the civil service examination in the background of his father’s governmental post, was awarded as Prime Jooonggook Gongshin for participating in the Joongjong Rebellion, Hong Im, as a father, was elevated to higher position in public office in a way called Umjik-Gajah. As a result, he held a role high as a prime minister and participated in policy discussions on central coordination. Hong Im’s activities as bureaucrat can help understanding not only in the way of studying the Namyang Hong Family, but also in the way of how once-decreased family in early Joseon can regain its power back by using Hong Im and Hong Kyung-jus’ governmental power. Furthermore, it helps in understanding the aspects of Joseon Dynasty’s bureaucratic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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