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검색결과 좁혀 보기

      선택해제
      • 좁혀본 항목 보기순서

        • 원문유무
        • 음성지원유무
        • 학위유형
        • 주제분류
        • 수여기관
        • 발행연도
          펼치기
        • 작성언어
        • 지도교수
          펼치기
      •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와 모스크바장로회신학대학교의 교회개척

        한재희 호남신학대학교 대학원 2001 국내석사

        RANK : 249679

        본 논문은 다음과 같이 요약 할 수 있다. (1) 서론부분에서는 다음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오늘날까지 수행해 온 선교에서 교회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선교를 하고 있는가에 대한 대안으로 교회의 진정한 선교를 위해서 선교의 근원을 하나님 자신이라는 점과 선교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점에서 시작했다. 연구방법으로는 삼위일체의 하나님 안에 있는 교회와 하나님의 선교를 찾으려했다. 연구절차로는 러시아교회 특히 모스크바장로교 신학대학교에 의해서 개척된 교회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선교 안에서 러시아 교회개척을 살펴보았다. (2) 교회론의 변화에서 교회의 정의를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찾고자했다.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성령의 전으로서의 교회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물론 이것은 사도 바울이 본 교회이다. 여기서 교회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는 점과 교회는 제도가 아니라 에클레시아인 하나님의 백성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성령의 전안에서 교회의 속성을 갖는다. 교회의 속성은 하나된 교회로서 하나됨과 거룩한 교회로서 거룩성과 보편적인 교회로서 보편성과 그리고 사도적인 교회의 사도성이다. 하나님의 선교는 사도성 안에서 계속되는 보냄을 갖는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부르심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되며 성령의 전이된다.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로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선교적인 사명을 수행하는 가운데 교회의 존재의 근거를 갖는다. 과거의 선교에 있어서 교회를 위한 선교나 선교열정으로 인위적인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와 다른 제도적 교회가 행한 선교의 한 모습이었다.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인 에클레시아 역시 하나님의 선교로 부름을 받고 있으며 에클레시아인 교회는 그 부름에 응답해야 한다. 하나님의 선교에 응답하는 교회만이 참된 교회로 하나님의 백성이다.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교회만이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종말론적 공동체가 된다.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 관계에서는 교회는 곧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부활의 빛 속에서 '이미' 온 하나님의 나라를 선취한 교회가 세상 속에서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야 한다. 세상은 하나님이 사랑한 세상으로 교회는 세상 가운데서 그 역사성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어 가야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교회와 세상과 선교, 교회와 이성과 하나님의 나라, 교회와 역사와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교회와 정치와 하나님의 나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3) 러시아 개신교회에서는 먼저 러시아 정교회를 먼저 밝혔다. 왜냐면 러시아는 러시아 정교회의 영향 속에서 이루어진 백성이기 때문이다. 러시아인들에게 러시아 정교회는 종교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으므로 러시아 개신교회 역시 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러시아 정교회와 러시아에 대해서는 러시아와 정교회, 러시아국가교회, 그리고 동방 정교회의 중심된 선교신학를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러시아 개신교회에 대해서는 먼저 러시아 개신교의 전래와 전파지역 그리고 선교의 대상, 오늘의 개신교의 성장을 이루어낸 지하교회의 고난과 소망 속에서 승리한 러시아 개신교회로 보았다. 이는 초대교회가 로마의 핍박을 딛고 일어난 것처럼 러시아 개신교회가 갖고있는 신앙의 전승 속에서 오늘날까지 러시아교회가 남은 자로서 성장하는데 큰 바탕을 이루었다. (4) 본론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하나님의 선교에서 본 러시아 교회개척인데 먼저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개념을 정리했다. 즉,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도구이며, 선교의 근원은 하나님 자신에게 있고 그 선교의 내용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을 통한 교회의 참여이다. 교회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하나님의 선교공동체이며 성령은 교회가 하나님의 선교를 이루도록 인도하고 이루시는 분이다. 따라서 인위적이거나 제도적 교회에 의한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에서 배제된다. 이 같은 하나님의 선교의 관점에서 모스크바 장로교신학대학교에 의한 교회개척을 살펴보았다. 특히 교회개척의 의미를 하나님의 선교와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복음과의 관계에 비추어 찾고자 했다. 여기서 교회개척은 단순한 양적 증가의 의미보다는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복음의 활성화와 러시아 교회의 요청에 의한 상황화이며 한국교회의 지속적인 협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모스크바 장로교신학대학교의 교회개척은 '러시아인에 의한 러시아선교'의 과정이며 신학교육의 장으로 신학과 교회의 유기적 상호관계 속에서 열매를 맺어가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모스크바 장로회신학대학교에 의한 교회개척은 러시아 개신교회의 활성화에 참여하는 역동적 기능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러시아 교회개척의 방법과 성장에 있어서 러시아 교회의 성장은 양적인 교회성장보다는 러시아교회에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응답하는 유기적인 신앙공동체가 될 때 하나님의 선교 안에서 바른 교회의 바른 성장이라는 것이다. 러시아교회의 특징으로는 신학적 특징으로 러시아 정교회의 영향 속에서 성례전의 중시와 사랑의 신학 그리고 도덕성과 부활의 신학을 들 수 있다. 예배학적 특징으로 러시아 교회가 지니고 있는 신앙전승 속에는 말씀의 선포뿐만 아니라 찬양과 시 낭송 등 신앙고백적인 적극적인 참여를 들 수 있다. 목회학적 특징은 공동체정신을 바탕으로 친교공동체로서의 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러시아 교회의 선교 신학은 과거 핍박의 시기를 지나는 동안 교회들은 기본적으로 에큐메니칼 정신을 공유하고 있다. 개척교회의 분류는 러시아교회의 신앙전승을 토대로 하는 교회들과 모스크바 장로교 신학대학교에 의해서 개척된 교회들로 나눌 수 있다. 개척된 러시아교회들은 비록 한국교회의 협력 속에서 개척되고 있을지라도 러시아 교회가 지니고 있는 신앙의 전승 속에서 러시아적인 장로교회로 태어나야 한다. 러시아 교회는 러시아에서 역사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러시아 교회는 러시아에서 요구되는 개인의 영혼구원과 함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선취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예배 공동체인 교회는 세상과의 관계에서는 선교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 본질이 선교적이며 선교적이어야 한다. 선교적인 교회만이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교회가 된다. 하나님의 선교는 한국교회 뿐만 아니라 오늘 러시아교회에서도 요구된다. 러시아 교회개척과 러시아 교회의 성장은 교회의 제도나 교회에 대한 단순한 개종을 넘는다. 이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선교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개종하는 교회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이 세상에서 실천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함으로서 새로운 변화를 찾을 수있다. 그 동안 양적 성장을 거듭한 한국교회에게 교회 갱신의 필요성과 교회갱신 기회를 갖게 한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질적인 성장을 위한 선교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참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가운데 자기를 돌아보고 반성하며 쇄신하는 겸손한 자기 비움을 경험하게 할 것이다. 한국교회는 러시아교회와 파트너쉽(partnership)의 선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되고 성령의 전이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된 세계교회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러시아교회의 개척은 하나님의 선교 안에서 개교회 차원의 단순한 한국교회의 이식과 확장이 아니라 러시아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지체로서 의미를 가진다. 러시아교회는 러시아의 정교회의 영향 속에서 그 동안 성장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러시아교회는 러시아 정교회에도 충격을 줄 수 있도록 개인구원과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 특히 상대적으로 우월한 도덕성을 계속 전승해야하고 다양한 계층에서 요구되는 삶의 질문에 대해서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응답 해야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삶으로 모두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 가야한다. 이를 위해서 러시아 교회는 특히 정교회의 선교신학 가운데 하나인 사랑의 신학으로 모두를 포용하는 선교를 해야한다. 오늘날 선교의 내용과 활동도 변하고 있다. 이것은 세상과의 관계 속에 있는 교회도 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근본적이고 선교의 큰 틀인 하나님의 선교 안에서 러시아교회가 열린 마음으로 러시아라는 세상과 친교를 이루어 갈 때 러시아 교회는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강한 믿음과 소명의식 그리고 리더쉽(leadership)과 책임감을 가진 목회자들과 선교사들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한국교회는 러시아교회를 통해서 나눔과 친교공동체로서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고 있음을 기억해야한다. 하나된 교회를 위해서 한국교회는 값비싼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 있어야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을 나누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보여주어야 한다. 다양하고 활발한 선교활동가 곧 값비싼 은혜는 아니다. 교회와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교회는 값싼 은혜 속에 있다. 오늘 한국교회에게 필요한 것은 한국교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값비싼 은혜를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가운데서 구해야한다. 한국교회는 값비싼 은혜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남기고 자기비움으로 경계를 넘어가는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해야 한다. 우리를 변화시키고 화해시키는 하나님의 선교는 한국교회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편애하시는 가난한 사람들과 약한 자들과 억압받는 자들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나누고 치유하는 교회가 되도록 할 것이다.

      • 하나님의 전신갑주에 대한 영적권위 : 에베소서 6:10-17절을 중심으로

        김승철 호남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1999 국내석사

        RANK : 249663

        일반적으로 생각했던 영적 권위를 가진 그리스도인에 대한 신학자들의 통적인 의견은 성령은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령을 소유한 사람들은 인격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인것이라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영성을 하나의 관계성 속에서 이해하는 오성춘 교수는 먼저 영성의 의미를 4가지로 나누어 말한 것을 요약해 보아도 알 수 있다. 첫째로 기독교 영성은 그리스도의 삶의 구현이다. 둘째로 기독교 영성은 '성령의 능력으로 사는 삶'으로서 기독교 영성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인 안에 오셔서 이루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며, 성령의 능력을 따라 살 때에만 가능하다. 셋째로 기독교 영성은 주 예수 님과의 인격적 교제의 삶으로서 예수 님과의 만남과 교제는 삶 자체의 변화를 가져온다. 넷째로 기독교 영성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기독교 영성은 하나님이 먼저 찾아와 우리를 부르시고 은혜를 베푸실 때 그것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의 응답을 필요로 하는 쌍방의 상호 작용이며 필생의 삶의 과정임을 강조하고 있다. 김경재 교수는 오성춘교수와 같이 기독교 영성 이해를 '관계의 개념'으로 정의 내리고 있으며, 그는 인간의 영성을 '관계의 개념이며 영이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나타난 생명현상'으로 말하며, 영성이란 하나님의 형상을 구현한 참 인간성이라고 정의한다. 그는 영성이란 하나님의 형상을 구현한 참 인간성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김경재 교수는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차원보다 수평적인 차원을 더 강조한 것으로서, '절제와 나눔의 삶'이란 "건강한 인간의 본래적 모습이며, 하나님의 형상의 구체적 구현 형태이고, 다가오는 시대의 성숙한 인간의 영성이어서 인간의 개체와 공동체가 함께 구원받는 유일한 길" 이라고 절제와 나눔의 삶을 기독교 영성의 핵심으로 제시하고 있다. 에베소서에서 말하고 있는 영적인 삶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이 이루어져 있을 때 성도는 사단의 공격에서 이길수 있으며, 하난미안에서 성령 충만한 삶으로 살 수 있다. 목회자가 가지는 성령 충만한 삶은 하나님 안에서 사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산다는 것은 하나님처럼 될 수도 없고, 하나님처럼 되어서도 않되고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교만해지게 두시지 않는다. 이렇게 교만해지지 않을 수 있는 길이 인격적인 삶의 모습이 뒷받침될때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할때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곳에서나 빛을 발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제부터라도 성령의 인격으로 새롭게 변화되어질 수 있는 개혁을 이루는 바람의 주체자들이 되어야 하겠다. 올바른 신학 사상과 올바른 윤리의식으로 우리의 복음의 옷을 갈아 입혀야 하겠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복음 안에서 우리 신앙인 이 가지고 있어야 할 자유함이 있어야 하겠다. 가장 먼저는 신학교에서 올바른 신학사상이 정립된 정규 교육이 이루어지는 교육을 목회자가 훈련되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성경 말씀을 자기의 사상에 꿰 맞추지 말고 자신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로 조명되어지는 삶으로 이루어지는 작은 디딤돌이 되었으면 한다. 하나님의 전신 갑주는 바로 우리의 삶속에 지켜져야 할 또하나의 작은 실천인 것이다. 영성, 성령, 인격, 사랑, 공의, 십자가, 이것들 중 하나만을 강조하다 보면 오류에 빠지기 쉽다. 어느 하나만을 강조하지 아니하며, 삶의 여정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길을 걸어가게 될 때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성령을 소유한 영성은 바로 우리 신앙인의 인격인 것이다. 이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령의 은혜의 선물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더 구체적이고 세심한 연구가 우리에게는 너무나 부족함(자료 및 신학적 연구 )을 이 연구를 통해서 알 수 있었다. 이는 우리의 신학적인 연구 또한 한쪽으로 치우쳐진 것임을 입증하는 좋은 실례라 하겠다. 이제는 우리의 신학이 영성과 함께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할 때라 생각한다. 이에 우리 모두가 열심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 인간존엄에 관한 신학적 논증의 가능성과 한계

        임종태 호남신학대학교 대학원 2018 국내석사

        RANK : 249663

        현대는 다원적 가치가 공존하는 탈종교적 사회이다. 그런 만큼 서로 다른 이념과 사상과 행위를 함께 공유하며 인류의 평화로운 공존을 실현하기 위한 보편적 가치를 필요로 한다. 1948년 12월 10일 유엔총회에서 ‘세계인권선언’이 공표된 이후 인권의 가치와 이념은 인간의 보편적 존엄과 가치실현을 위한 윤리적이며 법적인 기초로 인정되고 있다. 인권은 인간의 존엄성을 전제한다. 그러나 인간의 대한 이해만큼이나 인간이 존엄한 이유에 대한 논의와 주장은 너무 다양하고 이에 대한 이론적 합의도 쉽지 않다. 사회과학적 토의만이 아니라 신학적이며 윤리적 논의에서도 인권논증에 대한 다양한 신학적 논증이 존재한다. 본 논문은 로마가톨릭교회, 러시아 정교회, 그리고 개혁교회의 신학적 입장을 서로 비교하면서 인권의 논증의 가능성과 한계를 탐구하였다. 세 교회는 모두 인간존엄의 신학적 근거를 ‘하나님의 형상’에서 구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존귀하게 지으셨다. 비록 인간이 죄를 짓고 자기파괴와 멸망의 길로 걸어갔지만 하나님은 자기형상대로 지으신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형상, 곧 그리스도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새사람을 입게 하였다. 다만 문제는 이와 같은 신학적 논증이 오직 그리스도인들에게만 배타적으로 적용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봉착하게 된다. 신학적 논증이 이러한 배타성과 종교적 특수성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개방적’으로 논증되어야 한다. 개방적 논증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형상을 다른 문화와 종교의 맥락에서 그 자신의 고유한 방식으로 논증하도록 허락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논증방식을 절대화하거나 완성하지 않으려는 자세이다. 이러한 논증방식이 가능한 신학적 전제는 이웃과 이방인과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할 그리스도인의 소명과 책임에 있다. 이웃, 이방인, 그리고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과 소명은 도덕적 공동체가 자신을 보편적으로 개방하도록 지속시킨다. 결국 개방적 논증을 통해서 종교와 문화 간에 열린 대화가 가능하게 된다.

      • 노르위치 줄리안의 고난과 신학 이해 : 영성지도 신학과 영적 변화

        박신향 호남신학대학교 일반대학원 2022 국내박사

        RANK : 249663

        본 논문은 노르위치 줄리안의 신학과 경험을 근거로 고난의 경험을 다루는 기독교 영성지도가 전제하고 작동되는 신학을 조명하고 영성지도에서 경험하는 영적 변화의 작동기제(mechanism)를 밝히고자 한다. 고난의 시대 14세기 영국의 은수자 노르위치의 줄리안은 신비주의 신학자일 뿐 아니라 동료 그리스도인(evencristen)들을 위한 영적 안내자의 삶을 산 영성지도자였다. 그녀가 남긴 유일한 저작물인 『하나님 사랑의 계시』 는 고난의 상황에서 이루어진 그녀의 삶과 영성지도 실천의 근간이 되는 심오한 조직신학적 내용들을 담고 있다. 또한 기도를 위한 실질적인 가르침과 안내, 그리고 기도 속에서 펼쳐지는 하나님과의 담화와 관상적 역동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따라서 줄리안의 작품은 하나의 탁월한 영성지도 신학과 모본을 제공한다. 본 논문은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노르위치 줄리안의 고난 경험과 신학을 역사적, 현상학적, 학제간 연구방식으로 고찰하였다. 논문은 크게 세 가지 단계적 흐름을 가진다. 첫째는 깊은 인간 고난이 어떻게 경험되고 어떻게 극복 가능한지에 대한 문헌 고찰이다. 이를 통해, 한국적 한(恨)의 ‘삭임’과 기독교 신비주의의 ‘기도’를 동일한 내적 역동을 가진 대안적 길로 발견한다. 둘째는 고난에 대한 영성지도의 신학적 이해와 고난으로 인한 영적 변화의 여정을 줄리안의 신학과 경험을 통해 탐색한다. 이를 위한 역사적 접근과 현상학적 접근을 통해, 줄리안의 고난과 변화 경험을 고찰하는 한편, 그 근간이 되는 믿음의 내용으로 그녀의 신학을 고찰한다. 여기서 특히 줄리안의 정체성의 변화와 성숙의 과정을 탐사하는 한편,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인성회복의 신학적 원리로 “감각(sensuality)”의 회복을 조명한다. 셋째는 영적 변화의 작동기제(mechanism)에 대한 탐색이다. 줄리안의 영성지도를 자기심리학의 자기변형 이론과 비교 연구함으로써, 영성지도 안에서 작동되는 자기 변화의 기제가 하나님을 자기대상으로 경험하는 자기회복의 과정과 같다는 사실을 분석한다. 논문은 다음과 같이 일련의 결과들로써 위의 논지를 뒷받침한다. 첫째, 한과 같은 깊은 인간 고난은 동일하게 깊은 차원에서 다루어지는 ‘삭임’으로서의 기도를 통해서 건설적으로 변화 극복될 수 있다. 둘째, 줄리안이 계시를 통해 깨달은 바, 죄와 고난은 “행복한 오류(felix culpa)”와 같은 역설적 현실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당분간 필요하고 유익한(“behovely”) 것이다. 줄리안의 기도 방식은 고난 중 자기 정체성의 변화 경험을 가져왔다: ‘여성-자기비하’에서 출발했지만 ‘보편적 인간 정체성의 회복’을 거쳐 모성을 하나님의 본성으로 발견할 만큼 ‘모성의 회복과 찬미’에까지 나아간다. 그녀는 십자가 상에서 수난 당하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기도를 통해 고난으로 시작하는 영적 여정을 제언한다: ‘탄식/통회(mourning/contrition)’로 시작된 이 여정은 ‘연민(compassion)’을 통해 그리스도와 하나되고 마침내 ‘하나님을 향한 열망(longing for God)’으로 변화하는 기독교 신비의 여정이다. 셋째, 이 영적 여정을 추동하는 것이 줄리안의 하나님 사랑의 신학이다. 사랑의 하나님은 원죄와 고난이라는 현실을 허락하셨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 같으신 그리스도의 현존과 활동이라는 하나님의 처방(remedy)도 함께 주셨다. 넷째, 줄리안의 경험과 신학에서 발견하는 영성지도는 자기심리학의 통찰에 따른 자기 변화의 모판이다. 영성지도의 영적 변화의 작동기제는 주님을 어머니나 분석치료자로 관계하는 ‘자기대상’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근거로 여기서는 줄리안의 영성지도와 하인즈 코헛의 자기심리학을 비교 분석했다: ‘관상’ 대 ‘공감’, ‘믿음의 덕’ 대 ‘충분히 좋은 어머니’, ‘감각의 회복’대 ‘변형적 내재화’는 모두가 회복을 위한 필수 요소이고 변화의 원리이다. 결론적으로, 본 논문은 기독교 신비주의적 접근으로서의 영성지도는 인간 고난에 대한 건설적인 극복의 길임을 제안하며, 고난 중 자기 변화/회복을 이루도록 작동하는 탁월한 영성지도의 신학으로서의 노르위치 줄리안의 신학을 제시한다. This dissertation demonstrates an operating theology of Christian spiritual direction and the mechanism of spiritual transformation through human suffering formed in reflection of Julian of Norwich’s theology and experiences. Julian of Norwich, an English anchoress in the 14th Century, was a spiritual director as well as a mystical theologian: she not only wrote her spiritual experiences and thoughts in the Showings but also practiced spiritual direction for “evencristen (even Christians)”. As her singular work, Showings contains a profound theology that was reflected in her life and spiritual direction praxis. It also has practical teachings and guidance for prayer, revealing her own contemplations and conversations with God. Julian’s work offers an impactful example and a appropriate theology of spiritual direction, specifically for spiritual transformation through suffering. In this study, I use a historical approach, hermeneutical approach, and interdisciplinary approach, following three phases. First, I conduct a literature review of human suffering aiming to understand how suffering is experienced and constructively resulted. Secondly, I explore Julian’s own experience of suffering and her theology in the Showings, in order to understand both her spiritual transformation and her spiritual direction. Thirdly, I analyze the mechanism of spiritual transformation shown in Julian’s spiritual direction by comparing it to Heinz Kohut’s understanding of self-recovery explained in his Self-Psychology. As the result, I support the thesis in four respects. First, ‘prayer’ in Christian mysticism is a constructive and authentic way of dealing with human suffering that parallels ‘saghim(삭임)’ of Korean han. Secondly, Julian demonstrates a way of praying under suffering that transforms self-identity; this roots in an understanding that sin and suffering is “behovely”, a reality paradox commonly referred to as “felix culpa(happy fault)”. This journey of prayer begins in “mourning/contrition”, turns into “compassion”, then finally transforms into “a longing for God”. In Julian’s experience, her identity transforms from a “woman of self-depreciation” into a “self-awareness of human identity”, and finally into a “woman of maternal self-celebration”. Thirdly, this sequela of a Christian journey is supported by Julian’s theology of God’s Love, especially her anthropology and understanding of “Jesus as our Mother”. God not only allows sin and suffering as human reality but also offers “the remedy” of His motherly presence and activity as the Christian reality. Finally, the self-recovery mechanism of Self-Psychology is also applied in spiritual direction; however, in spiritual direction, the Lord is present and working as the “empathic self object”/“good enough mother”. To support this statement, I compare and formulate the relationships between essential elements of self-psychology and of spiritual direction: empathy versus contemplation, ‘Good enough mother’ versus ‘the virtue of faith’, and transmuting internalization versus sensuality’s recovery. In conclusion, I confirm that Julian of Norwich’s theology is a pre-eminent theology of spiritual direction operating as a matrix for self-transformation under suffering within the Christian context.

      • 21세기를 지향하는 한국교회의 개혁방향에 관한 연구 : 청교도정신을 바탕으로

        김성철 호남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2001 국내석사

        RANK : 249663

        지금까지 살펴 본대로 한국교회는 미국 초창기 선교사들의 청교도 정신을 이어받으면서 성장해 왔다. 특히 한국교회 안에 새겨진 몇 가지 청교도 정신은 한국교회를 성장시키는 긍정적인 역할을 해왔다. 반면 부정적인 영향도 있음을 위에서 살펴보았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한국교회가 청교도들의 개혁정신을 이어받았느냐에 대한 질문이다. 본인은 이 질문에 대해서 부정적임을 밝힌다. 한국교회는 청교도의 영향력을 받았으나 청교도들의 개혁정신을 이어받지는 못했다. 그것은 청교도 운동이 일어나게 된 영국의 시대적 상황과 한국교회가 복음을 받아들이는 역사적 상황이 판이하게 달랐기 때문이다. 이런 상대적 상황 인식에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중요한 것은 21세기를 시작하는 한국교회가 거센 개혁의 요구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이다. 앞부분에서도 언급했듯이 한국교회는 위기 속에 있다. 모 교단의 총회장 금권선거는 교회의 부정부패에 대한 이미지를 깊이 각인 시켰다. 요즘은 대형교회의 목회자 세습문제로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다. 각종 방송 프로그램(MBC의 PD 수첩,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교회의 기복신앙과 부패에 대해서 심각하게 보도하고 있다. 이제 한국교회는 개혁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다다랐다. 그러면 21세기를 지향하는 한국교회는 어떻게 개혁해야 하는가? 본인은 이것에 대해서 한국교회의 정신이기도 한 청교도의 개혁정신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왜냐하면 한국교회는 청교도의 경건과 성경중심의 문화는 받았지만 진정한 청교도들의 정신인 교회 개혁 정신은 이어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청교도의 개혁 정신을 어떻게 한국교회의 개혁을 위한 정신으로 적용할 수 있을까? 첫째, 성경의 원리를 삶 속에 적용했던 청교도들의 실험정신을 본받아야한다. 한국교회는 지금까지도 너무 이원론적 신앙에 물들어있다. 제2회 복음과 상황 포럼에 기조발언을 한 이만열 교수는 이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하나님의 나라와 세속나라의 구분, 하나님의 일과 세속적인 일의 구분은 신자들이 가정생활이나 사회생활, 직장생활이나 기업활동 등 소위 세속적인 일에 대해 기독교적인 의미 부여를 불가능하게 할뿐만 아니라 우리의 이러한 일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기독교적 윤리의식과 죄의식을 심각하게 마비시켜 버린다. 여기에서 우리는 청교도들의 성경적인 원리를 삶 속에 적용했던 성경과 세속의 일원론적인 청교도들의 신앙을 배워야 한다. 특히 성경의 원리를 경제, 정부, 가정, 교회, 인생, 성, 자연, 교육, 그리고 그 밖으로 모든 문제에 적용시켰던 청교도들의 실험정신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한국교회 성도들이 이원론적으로 빠진 것은 지나치게 성경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생각하는 근본주의적 영향력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국교회의 개혁은 이제 성경의 원리를 모든 문제에 적용했던 청교도들의 실험정신을 배우는데서 시작되어야할 것이다. 둘째, 개인경건의 개혁에서 시작해서 가정과 사회와 국가로 변혁을 시도한 청교도들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 개혁하면 거창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사실 청교도들도 교회 개혁을 처음에는 반교회정치 체제에 대한 저항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체제에서 완전히 정치에 패배한 이후 그들의 관심을 개인 경건 운동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서히 사회와 국가 전체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이것이 1640년 영국혁명의 발판이 되었고 올리버 크롬웰의 청교도 통치기를 맛보게 된 것이다. 한국교회의 심각한 위기 앞에서 우리는 당황하고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난감해 한다. 그러나 개혁은 먼저 개인에서부터 시작해서 가정으로 그리고 서서히 사회전체로 저변 확대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다. 개혁의 힘은 개인의 경건한 삶의 실천에서 나온다는 것을 우리는 청교도들에게서 배워야 한다. 한국교회의 위기는 어떻게 보면 성도들의 개인 신앙의 위기인 것이다. 개혁의 시작은 이런 개인의 신앙 각성에서 시작되는 것이 순서다. 그리고 그 정신이 서서히 가정과 사회로 저변확대 되어야 한다. 셋째, 다음세대의 교육을 위해 헌신적인 투자를 했던 청교도들의 교육하는 안목을 배워야 한다. 앞에서도 살폈던 것처럼 한국교회의 신학교육의 문제는 심각한 수준에 와 있다. 99년 11월 16일 국민일보에서는 교회갱신협의회 신학위원회가 서울 신반포교회에서 개최한 '21세기 신학교육을 위한 공개 심포지엄'의 내용을 이렇게 보도했다. “한국교회의 신학은 신학교 난립으로 인한 교육수준의 저하, 신학교와 교회간의 유기적인 협력 부족, 신학대학교와 대학원의 교과과정 중복 등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런 한국교회의 신학교육은 현재 목회자의 수준을 저하시켜 한국 종교계에서도 최하위의 수준임을 앞에서의 자료를 통해 살펴보았다. 이제 한국 교회은 교육의 개혁에 눈을 돌려야 한다. 청교도들은 그들의 개혁정신을 교육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이어나갔다. 처음 청교도의 지도자들은 옥스퍼드나 캠브리지 대학을 중심으로 청교도의 정신을 심어나갔다. 미국 개척기의 청교도들은 교역자 양성을 중심으로 1636년에 하버드 대학이 설립되었고, 1693년 버지니아에서는 윌리엄 메리 대학을 1746년에는 뉴저지에 프린스턴 대학을 설립하였다. 이런 청교도들의 교육에 대한 열심 때문에 100년 넘게 개혁의 이상을 유지해 올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교회가 개혁의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교육에 대한 헌신적인 투자를 해 나갈 때 21세기에도 새로운 도약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교회를 성경적인 구조로 개혁하고자 했던 청교도들의 개혁정신을 배워야 한다. 청교도들은 당시 가톨릭의 요소를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영국 국교회를 성경적인 교회 구조로 개혁하고자 했다. 이런 그들의 이상은 스코틀랜드에서 장로교를 그리고 나중에 조합교회와 회중교회를 해산시켰다. 중요한 것은 교회구조를 성경적으로 개혁하고자 했던 그들의 개혁정신이다. 청교도 운동은 비성경적인 교회를 보다 순수하게 성경대로 개혁 해보고자 하는 이상에서 시작되었다. 한국교회는 과연 얼마나 성경적인지 이제 우리는 물어야 한다. 물량주의와 개교회주의 그리고 담임목사 세습으로 온통 사회문제화 되다시피 한 한국교회는 과연 성경적인 원리에서 교회가 운영되고 있는지 물어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성경적인 구조로 다시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로 만들어나가야 할 것이다. 개혁은 주재용 교수가 말했던 것처럼 교회 구조에 대한 개혁이다. 성경적인 구조를 인간의 죄악으로 타락시켰다면 청교도들이 품었던 열심으로 개혁의 나팔을 불어야 할 것이다. 다섯째. 교회 개혁의 이상을 품고 모진 박해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신대륙에서 자신들의 개혁의 꿈을 이룬 청교도들의 이상을 배워야 한다. 청교도들은 개혁의 이상을 포기하지 않았다. 때로는 순교를 각오하면서 때로는 감옥으로 들어가면서도 그들의 개혁의 이상은 시들지 않았다. 결국 시민혁명과 명예혁명으로 그들의 이상을 이루어 내었다. 특히 신대륙에서 그들이 이루고자 했던 이상은 오늘 미국이라는 나라를 만들어 내었다. 우리 한국교회 안에 청교도들이 품었던 위대한 교회의 이상이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제 한국교회도 위대한 이상을 가져야 한다. 특히 21세기를 지향하는 시점에서 한국교회가 이 땅에서 성취해야 할 이상을 제시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이상을 실현하고자 개혁자들이 되어서 나가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개혁교회의 원리는 "교회는 항상 개혁하여야 한다."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교회는 단호한 개혁 작업을 착수해야 한다. 오늘 한국교회는 물량주의, 기복신앙, 개교회주의, 신학교육의 질적 저하로 인한 목회자의 자질부족, 그리고 교회의 세습문제와 각종 부정부패의 비윤리적 문제 등 심각한 중병에 걸려있다. 성경보다는 물질이 앞서 있고, 사회의 비리 척결을 외치기에는 교회 안의 비리가 너무나 심각한 상태에 놓여 있어 건전한 사회건설의 첨병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지 이미 오래 되었다. 이제 한국교회는 이런 자신의 병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과감한 개혁을 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리고 이 수술을 위한 개혁의 칼로 본인은 청교도의 개혁정신을 제시했다. 청교도들의 개혁의 이상인 교회를 보다 순수하게 하고자 했던 그들의 개혁의 열망을 우리가 품어야 할 것이다. 이제 한국 교회는 청교도 정신을 재조명하고 개혁정신으로서의 청교도 정신을 이어받아서 21세기를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다가오는 통일의 새 시대에 대처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에게 지워진 개혁의 사명이다.

      •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통해서 바라본 성육신 선교와 교회공동체

        이종일 호남신학대학교 대학원 2001 국내석사

        RANK : 249663

        본인은 성육신 신학을 통하여 선교신학을 새롭게 접근해 보았다. 예수의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 구원이 이루어졌다는 선교의 출발점이 된다. 즉 인간이 선교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선교의 근거를 제시해 준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를 강조하고 선교의 주체를 삼위일체의 하나님에게서 찾는다는 점에서 성육신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를 더욱 구체화시킬 수 있는 선교적 패러다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성육신 사건은 오늘을 사는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을 사랑하시어 이 땅에 성육하신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여 이 땅의 상황에 참여해야 할 사명을 가지도록 한다. 그러나 아직은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의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살아가는 교회가 선교에 임해야 하는 종말론적인 희망을 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선교가 교회에 주어진 피할 수 없는 명령이라면, 선교를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성육신 선교에 대해서 물음으로서 선교를 출발해야 하며, 인간의 상황 안에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선교가 교회를 통해서 계속될 수 있도록 종말론적인 희망에 대해서도 물어야 할 것이다. 본인은 성육신 선교를 통하여 전통적인 한국교회의 선교를 극복하고, 한국 사회뿐만 아니라 인류공동체에 헌신할 수 있는 선교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인은 (1) 한국교회의 기존의 선교에서 나타난 문제점을 지적하고, (2) 성육신 선교를 통하여 기존의 한국교회의 선교를 극복할 수 있는 실천적인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한국교회는 개인구원과 교회성장에 치중하면서 복음의 본질적인 내용인 통전적 선교에서 균형을 잃어버렸다. 교회의 언어는 개인구원에 치중한 나머지, 비정치화되고 비사회화된 메시지로 변하였다. 또한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단순히 교회의 사회봉사의 차원에 국한시켜 교회의 사회행동에 대해서는 그리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가 자기 안에 갇혀 개교회 중심주의의 지배하에 놓이도록 하였으며, 인간을 지배하고 충성을 강요하는 각종 정치이념과 성장제일주의 등에 의해서 복음의 빛을 잃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예수의 성육신 선교는 인간이 살고 있는 '집'(οικοσ)에 거하시어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하신 정치적이며 경제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성육신 선교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인간의 응답을 요구하며, 예수를 따르는 삶을 요구한다는 맥락에서 교회는 사회에 대한 책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교회의 언어는 성육신 선교를 통해서 개인의 회심과 구원을 넘어, 인간의 상황에 하나님의 뜻과 경륜이 구체적인 인간의 상황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증언해야 한다. 둘째, 한국교회의 배타적인 성격의 선교는 교파분열과 교회들간의 갈등을 초래했다. 한국교회는 다른 교회들의 전통과 신앙고백에 대해서는 배타적이면서, 자신들의 교리를 절대시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성육신 선교의 개방성과 보편성은 다른 교파들에 대해서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게 하며, 나누어진 교회가 하나가 될 수 있는 희망을 열어준다. 성육신 선교는 모든 교회로부터 그의 백성을 모으고, 그 때문에 교파의 경계를 넘어 하나의 백성으로 화합되는 것이 근본적으로 가능하게 하도록 이끌어 준다. 성육신 선교가 하나님을 향해 개방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의지한다고 한다면, 인간에 대한 어떠한 판단과 경계를 긋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교회의 신앙에 어긋난 것이 되며,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하나된 교회를 이루지 못하는 것은 불신앙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게 된다. 셋째, 한국교회의 선교는 문화선교의 과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며, 문화영역을 우리 시대의 중요한 선교과제라고 자각하지 않고 전통적인 좁은 개념의 선교이해에 머무르고 있다. 또한 한국과 같은 종교다원사회 속에서 기독교와 타종교와의 긴장과 갈등은 날로 더 심각해 가는 경향이 있어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고 있다. 성육신 선교는 이러한 지역의 문화에 대해서 무시하고, 타종교에 대해서 배타적인 선교를 지양하도록 해 준다. 성육신 선교는 하나님이 경륜해 오신 우주적 종교에 대한 개방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스라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계시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고백적 참여는 갈등적 관계이거나 양자택일할 선택 강요의 문제가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한다. 성육신 선교의 육화는 인간의 상황과 문화를 중요시해야 하고, 선교지의 문화와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면서 기독교의 복음을 풍요롭게 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요구한다. 물론 타종교가 궁극적인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에 들어와야 한다는 최종적인 선교적 사명을 간과해서는 안되지만, 하나님의 선교 개념이 복음전파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시는 세상에 대한 교회의 응답을 포함하고 있다는 광의적인 선교 개념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는 타종교에 대해서 배타적인 선교방법을 취하기 보다는 대화와 타협속에서 인류공동체가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나아가기 위해서 공동의 노력을 추구해야 할 사명이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넷째, 한국교회가 진행시켜온 해외선교는 세계교회로부터 많은 격려와 칭찬이 있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선교 구조적으로 일방적인 선교를 지향해 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선교지 교회는 선교교회인 한국교회의 신학과 신앙, 예배 형태 등을 답습하는 현상이 생겨나고 있으며, 많은 부분을 한국교회에 의지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자신들의 상황과 현장을 신학화 하는 작업을 이루어내지 못하고 있다. 반면에 성육신 선교는 일방적인 선교형태를 지양하고, 쌍방적이며 선교협력적인 관계에서 선교를 실천해야 함을 보여준다. 인간의 상황가운데로 들어오신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의 행사이었으나, 이것이 일방적인 주입식 선교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으로 인한 성육신은 인간을 향하여 오시는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와 은총을 의미하며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몸 안에서 그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것은 인간과 하나님의 쌍방적인 계약 관계이며, 협력적인 선교라 할 수 었다. 우리는 성육신 사건을 통하여 타인에 대해서 열려 있는 선교의 개방성을 경험하게 된다. 선교의 현장에서 성육신 선교는 선교의 주체가 하나님이기에 '주는 교회'와 '받는 교회'의 개념을 소멸시키고, 오직 형제애적인 선교를 이끌어 준다. 다섯째, 한국교회는 현재의 최대의 위기, 즉 세계화의 거대한 문제와 지구종말에 대해서 저항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대안공동체가 되지 못하고 있다. 국제적인 경제의 위기는 실업률의 증가와 경기 침체로 이끌고 있으며, 불만족스러운 무역조건과 재정 결핍의 결합으로 제3세계는 경제붕괴의 위협을 겪고 있다. 신자유주의 사회는 "경제체제를 도덕규범과 동일시하고 이 규범을 신성시하며, 과학과 초월화된 시장 경제의 이름으로 인간의 희생을 요구하고 자연을 파괴"하고 있다. 한국교회가 대안공동체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성육신해 오시는 하나님의 선교에 자신을 개방하고 현재의 상황에 대해서 교회자체를 개혁해야 하며, 더 나아가서 모범과 증거로서 교회자체가 대안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성육신 선교는 먼저 교회로 하여금 교회자체의 변화에 순응하도록 이끌어주며, '아직'의 상황속에서 실망할 수 밖에 없는 교회로 하여금 '이미'의 경험을 통하여 실망하지 않고 희망을 갖도록 이끌어준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인간의 상황 안으로 들어오신 성육신 선교는 (1)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와 은총에 있다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으로서의 선교를 선교의 출발점으로 삼게 하여, 하나님의 보편성 앞에서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에 파송받게 되었다는 선교적 사명을 갖게 하며, (2) 인간의 상황에 들어오시어 고난에 함께 참여하시는 예수의 사랑은 우리의 선교가 지녀야 할 선교의 내용이 되어, 타자와 함께 하여 한편으로는 세상을 향하여,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에 대항하여 선교해야 할 교회의 대안공동체적 인식을 일으키며, (3) '아직'의 상황가운데서도 '이미'의 언어를 발견하고 새로운 희망을 갖게 하는 종말론적인 선교로 인하여 선교의 힘을 얻게 하여, 오늘의 상황속에 성육신 사건이 재현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종말론적인 과정으로 나아가게 한다. 성육신 선교는 인간의 상황 안으로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타자성과 개방성을 통하여, 한편으로 교회는 세상에 개방되어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을 향하여 대항해야 하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으로부터 오는 질문에 응답하고 세상으로부터 던져진 질문으로 통하여 교회 역시 개혁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 요한福音의 生命神學 및 生命回復의 關係性 考察

        柳榮泰 湖南神學大學校 神學大學院 2002 국내석사

        RANK : 249663

        요한복음에 나타난 생명에 관련된 말씀들을 중심으로 요한복음의 생명신학을 논해보았다. 생명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과 성서적인 개념을 비교, 설명했으며, 로고스(말씀) 안의 생명과 그리스도 안의 생명, 그리고 에고에이미로 표현된 생명들과 죽어짐의 생명, 중생 등의 신학적인 의미를 요한복음의 말씀들을 가지고 살폈고, 생명위기의 현상과 원인, 그리고 생명회복을 위한 개인과 교회, 사회적인 대안까지를 언급했다. 생명(生命)의 위기(危機)는 어느 날 우연히 찾아온 불청객(不請客)이 아니다. 숫한 나날을 그 위기를 외치면서 경종을 울렸지만 인간은 자신의 욕망과 탐욕에 정신을 뺏겨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아니 들으면서도 한사코 외면하며 살아왔다고 하는 것이 더 솔직한 표현인지 모른다. 과학(科學)도 신학(神學)도 지식(知識)마저도 하나님을 앞서 가지는 못한다. 과학(科學)이 혁명적인 발전으로 의기양양하면서 변혁해 놓은 것은 인간의 지식의 한계선을 넓혀 놓은 것에 불과하다. 다음엔 또 무엇을 찾아내고 인간들 앞에서 오만(傲慢)과 만용(蠻勇)을 부릴지 알 수 없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과학을 부정하는 것도 과학에 도전하는 것도 아니다. 과학은 인간에게 많은 유익을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배면(背面)에는 인간의 파멸(破滅)을 부추기는 죽음의 그림자가 늘 함께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것은 과학의 문제가 아니었다. 인간(人間)의 문제(問題)였다. 인간의 손이 선(善)할 때와 악(惡)할 때 그 용도가 달라짐은 명백하다. 선악과의 비밀이 여기에도 그 실체를 드러낸다. 하나님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침해를 당했을 때 인간은 그 낙원(樂園)을 상실(喪失)했다. 생명을 잃게 된 것이다. 선악과를 따먹기 전의 낙원과 인간의 상태는 어떠했겠는가? 거기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하나님의 사랑이, 자연과 사람과의 사랑과 평화(平和)가 충만(充滿)했을 것이다. 생명(生命)을 회복(回復)하는 것은 사랑을 찾는 것이다. 무관심과 미움으로 대했던 것을 이제는 사랑의 눈으로 관심(關心)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사람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며 관심을 갖자. 자연을 관심을 가지고 사랑하자.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의 의미는 무엇인가? 잃어진 낙원의 비밀, 곧 사랑을 회복하라는 것이다. 사랑은 생명이다. 생명은 사랑이 없으면 죽고 만다. 그래서 사랑을 나누라는 것이다. 이 세상은 사랑이 없으면 파멸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랑의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인간도 사랑이 없기에 곳곳에 죽음과 갈등(葛藤)과 대립(對立)이 있다. 이제 우리 모두가 사랑을 찾아 십자가(十字架)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성육신(聖肉身) 하여 찢으신 그 살과 피를 통해 진정한 생명의 사랑을 부여받아야 한다. 성령(聖靈)의 바람이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불기를 기도(祈禱)한다. 그분의 역사(役事)하심이 있어야 한다. 치유(治癒)의 빛이 비춰야 하리라. 고침의 능력(能力)이 나타나야 하리라. 생명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의 생명을 새롭게 살리는 길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결단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것은 인간의 만용(蠻勇)을 의지하지 말라는 경고(警告)이다. 우리가 지향하는 복지(福祉), 그 하나님의 나라는 회개(侮改)하고 거듭나는 중생(重生)을 통해서만 회복된다는 진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했다. 겸허(謙虛)하게 인류의 미래를 하나님께 의탁(依託)하고 이제는 아끼고 사랑하는 일에 몰두하자. 지혜를 모아 회복의 전선(戰線)에 진력해야 한다. 인간중심(人間中心)의 세계관(世界觀)에서 이제는 신 중심(神 中心)의 사고(思考)와 신앙(信仰)하는 생활의 기쁨을 되찾자. 이 길이 인류의 영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다.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지상 최대의 사건인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신 부활사건(復活事件)을 보도한 제20장의 마지막 부분에 나타난 31절의 이 짧은 단문(短文)은 요한복음 본론(本論)의 마지막 부분이기도 하다. 요한복음을 기록(記錄)한 목적(目的)을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고 있는 본 절은 신학적인 질문에서 시작된 요한복음의 생명신학(生命神學)을 요약(要約) 정리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은 누구인가? 예수는 누구신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의 아들은 누구며,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믿음이란 무엇이며, 예수의 이름을 힘입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생명이란 무엇이며,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 에 대한 답인 것이다. 생명회복의 목적은 인간의 편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하나님 형상(形象)‘의 회복(回復)에 있다면,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과의 일치(一致)는 이 원천으로부터 사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과의 일치(一致), 그리고 어디에서나 만나는 생명 자신에 대한 경외(敬畏)와 함께 이루어질 것이다. 여기에 생명회복의 대안(代案)은 관계성(關係性)을 회복(回復)하는 길 밖에 없음을 우리는 알게 된다. 이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온전히 회복하자.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자. 서로 사랑하자. 서로 사랑해야 한다. 일방적(一方的)인 사랑으로는 우리의 생명을 회복하기에 역부족(力不足)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무력(無力)함을 깨닫고 서로 사랑하면서 하나님의 능력(能力)의 손길을 기다리자. 우리의 가진 바 빛을 가리우지 말자. 우리의 빛을 발하자. 어둠은 빛으로 말미암아 물러나게 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그 말씀은 사람들의 생명의 빛이며 그 가운데 생명(生命)이 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 하나님과의 관계성(關係性)을 회복하고 이웃인 우리 인간(人間)들이 서로 사랑하고 자연(自然)을 사랑하고 만물(萬物)을 사랑할 때 생명은 회복될 것이다. 생명의 위기(危機)는 극복(克復)될 것이다. 그러지 않는다면 우리는 종말(終末)의 죽음을 향(向)하여 질주(疾走)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다시 하나님에게로 회귀(回歸)하지 않으면 안된다. 아무리 과학과 문명이 발전하고 쾌락의 유혹이 심화(深化)되어도 시간(時間)과 우주(宇宙)는 제 길을 가고 있다. 제아무리 복제 인간을 만들어내고 무병장수(無病長壽)의 비결을 찾아 게놈지도를 완성해도 죽음의 두려움을 떨치지 못한다. 생명의 위대함을 격하(格下)시킬 순 없다. 이제는 요한복음 전편(全篇)에 흐르는 생명(生命)의 근간(根幹)인 사랑의 흐름을 느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에 흐르고 성령을 통하여 역사 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救援)하고 인류(人類)의 생명(生命)을 살릴 것이다.

      • 스콜라주의와 M. Luther의 종교개혁 사상

        김수진 호남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2006 국내석사

        RANK : 249663

        중세기가 절정에 달했을 때 모든 교육은 신학과 관련지어 행해졌고 위대한 사상가들은 대부분 수도사들과 성직자들이였다. 그들의 사상은 성경과 초기 기독교 저숙가들의 저작들 그리고 고대 희랍의 고전적 철학을 배경으로 발전했다. 스콜라주의는 중세 수도원과 대성당의 학교, 대학들로부터 명성을 얻었다. 스콜라주의 신학자들이 한 것은 그것을 논리적으로 체계화 시키는 일이었다. 즉 신앙에 대한 추구는 논리적 체계화를 향한 추구였다. 그러나 스콜라 신학자들은 그들 자신들 가운데서 의견의 불일치를 보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보편논쟁과 이성과 신앙과의 관계에 대한 논쟁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들을 열중하게 한 이 질문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그의 사람에 관한 성경의 메시지를 들을 수 없게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스콜라 신학은 그들이 당면한 문제들을 이성을 통해 논리적으로 체계화 하려고 했으나 이성의 역할에 대한 그들의 신념은 오히려 후에 기독교 교리와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또한 정치적인 도구로서 스콜라신학이 사용됨으로서 사회적인 불합리한 구조를 파생하였던 것이다. 1917년 9월 4일 비텐베르크대학에서 스콜라신학에 대항하는 논박의 글 "Disputatio contra scholasticam theologiam"(스콜라 신학에 대항하여 논박)에서 루터는 오랜 중세 신학에 영향을 끼쳐온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기반으로 한 스콜라 신학을 전체적으로 논박했다. 이 글에 나타난 루터의 입장은 그의 95개조 논제보다 더욱 과격했다. 이러한 루터의 스콜라주의에 대한 반박은 종교개혁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통찰이 성서에서 그에게 흘러 나왔다는 것이다. 루터가 교육받았던 사상인 유명론은 이미 성서를 한 점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계시라고 평가했다. 즉 이러한 유명론의 성서 중심 사상은 루터가 성서를 통해 참 구원을 발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우리는 부인할 수가 없다. 반면 스콜라주의 신학은 루터에게 반동의 삶을 역동성 있게 제공했다. 그리고 개혁의 끈을 당기는 원동력으로서의 작용을 했다. 루터의 스콜라 신학의 반박이 종교개혁운동에서 갖는 의의을 살펴보면, 첫째, 스콜라주의에 대한 반박을 통해 루터가 발견한 믿음에 의한 칭의론은 이와 연관된 "만인 사제"의 교리와 더불어 기존의 이권 세력들의 근거를 붕괴시켜 버리는 것이었다. 이로써 모든 신자들은 성서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자는 죄를 용서 받았다는 약속의 말씀을 읽을 수 있으며, 이러한 약속을 되풀이하거나 시행할 어떤 사람도 필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면죄부판매와 연옥의 관념이 비성서적인 것임으로 허구로 배척되었다. 둘째, 만인사제설을 통해 미사에 사제가 있어야 할 필요성을 제거해 버렸다. 이것은 루터가 95개조의 반박문 가운데 주장하고자 했던 면죄부판매 반대에 대한 이론적인 지침이 되었다. 셋째, 루터의 믿음만에 의한 칭의론은 사회적으로 평신도 공제 조합의 운명에 대한 언급으로 드러난다. 평신도 공제조합은 근본적으로 연옥의 존재, 성자들에 대한 숭앙, 그리고 바리아의 중보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 종교적인 것이었다. 믿음에 의한 칭의론은 공제 조합들의 존재 근거였던 죽음과 심판에 대한 잘못된 신념들을 배척함으로써, 이러한 조합들이 존재해야할 필요성을 제거해 버렸다. 그러나 본 논문을 통해 살펴보았듯이 루터 자신이 스콜라주의에 대해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콜라주의는 루터의 신학적 개혁에 도움을 주는 역할을 했다. 즉 루터의 신학 발달에 있어서 아이러니하게도 루터가 원래 스콜라적 기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스콜라적 도구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문제의 도구는 "성서의 사중적 의미"라 불리는 특별한 성서의 해석방식이다. 이것은 성서 본문에 대한 이러한 접근 방식은 동일한 본문에 대해 네 가지 다른 의미를 확정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특히 루터가 '하나님의 의'에 대한 자신의 통찰과 씨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성서의 이러한 영적 의미들 중의 하나에 집중하고, 그 문자적 의미를 가볍게 처리함에 의해 가능했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루터는 스콜라주의와의 결별에 있어서 부분적으로 스콜라적 기술을 이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맥그래스는 다른 어떤 개혁자도 이러한 스콜라적 도구를 이용했던 것으로 보여지지 않으며, 이점에 있어서 루터는 유일한 존재임을 말하고 있다. 루터는 스콜라주의 신학을 그토록 반대 했고 그 신학의 극단의 반대를 통해 종교개혁 사상을 새롭게 정립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변증하기 위해 다시 스콜라신학의 방법론에 귀의했음을 볼 수 있다. 결과론적으로 스콜라주의 신학에 대한 루터의 생각은 종교개혁이라는 폭발음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현대를 사는 한국교회는 스콜라주의의 경직됨으로 굳어가고 있는지 점점해 볼 필요가 있다. 오직 교회를 확장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본 논문은 스콜라주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한국교회의 문제들을 파악해 보고 루터적인 종교개혁 사상을 다시 한번 현대 교회에 세울 것을 제안해 보는 연구가 필요함을 본 논문을 마치면서 과제로 제안해 본다.

      • 한국 교회 찬송가의 토착화에 관하여

        김웅재 호남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2005 국내석사

        RANK : 249663

        이 연구는 한국인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신앙고백을 한국적 가락에 실어 하나님을 찬송하는 한국 찬송가를 전망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즉, 신학과 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기독교적 영성과 한국적 영성의 일치를 위하여 토착화 신학자들이 연구한 토착화 신학에서 한국인의 영성이 무엇인지 찾아보고, 한국 전통음악 학자들이 연구한 한국 전통음악 이론에서 한국인의 영성을 찾아내어, 토착화 신학과 한국 전통음악의 만남을 통해 한국 찬송가의 가능성을 전망해 보려고 한 것이다. 이러한 연구 목적을 위하여 먼저, 2장에서는 초기의 토착화 신학자들을 비롯하여 성(誠)의 신학자인 윤성범의 토착화 신학과 풍류신학자인 유동식의 토착화 신학, 그리고 토착화 신학자인 김광식의 토착화 신학의 형성과 그 사상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3장에서는 한국 교회 찬송가들, 즉, 「찬미가」 (1882년)와 「찬양가」 (1894년), 「찬숑가」 (1908년)와 「신정찬송가」 (1931년), 「찬송가」 (합동, 1949년)와 「찬송가」 (개편, 1967년), 그리고 「찬송가」 (통일, 1983년)를 한국인의 영성의 관점에서 토착화 신학적으로, 그리고 한국 전통음악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고찰하였다. 그리고 4장에서는 한국 교회 찬송가의 대안으로서 한국 찬송가를 제시하면서 한국 찬송가의 성서적 근거와 신학적 근거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5장에서는 결론으로 한국인의 영성을 담고 있으면서, 한국인의 영성을 살리는 한국 찬송가의 미래를 전망해 보았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는 찬송가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서양인들의 신앙고백을 빌려다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서양인들의 민요와 국가와 대중가요 등을 빌려다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고 있다. 이제는 식민지적 예배에서 벗어나 한국인들이 주체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국수주의적 관점에서 일어난 비판이 아니다. 한국인들의 영성을 살리는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한국인으로 창조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하나님이 한국인들에게 주신 가락으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일어난 비판이다. 물론 이러한 일들이 현실의 예배 가운데서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해결되어야 할 과제들도 많다. 교회음악의 전통과 한국음악의 전통이 더 깊은 자리에서 만나는 일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일부 교회에서는 우리 가락 찬송가를 예배시간에 부르고 있기도 하다. 동양과 서양을 지으신 하나님, 즉 우주적 하나님을 하나님되게 하는 것은 서양인들은 서양의 가락으로, 한국인들은 한국의 가락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이제 한국 교회는 사대주의와 열등감에서 벗어나 우리의 것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을 때, 이 세계를 사랑할 수 있고, 한국을 지으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한국인의 영성을 살리는 한국 찬송가는 신학적으로 계속 연구될 것이고, 주체적인 신앙을 찾기 위하여 노력하는 한국인들에 의해 작곡되고 불려지게 될 것이다.

      • 김지하의 생명 사상에 대한 신학적 고찰 : 한국 신학의 실천적 대안으로서

        정영석 호남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1999 국내석사

        RANK : 249663

        요즈음 언론매체를 통하여 가장 많이 등장하고 있는 이슈가 있다면, 아마 생태 문제에 관한 것일 것이다. 개발과 발전이라는 이름아래 마구 자연을 이용하던 인간들이 이제 이러한 행위가 인간의 생존마저 위협한다는 자각을 하게 되었으며,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생태계의 위기가 극복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된 것이다. 이미 강과 바다 속의 물고기들은 수없이 죽어가고 있고, 마음놓고 마실 수 있는 물은 구하기가 어려우며, 공기 또한 오염되어 있어서, 언젠가는 공기마저 사서 먹어야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 대기중의 산소량이 23% 그리고 0.03%의 이산화탄소량이 지구가 생긴 이래로 계속 지속되어 왔는데, 산업혁명이 도래한 이후 지난 200년 사이에 4억만년 동안 동일하게 유지되어오던 산소와 이산화탄소의 비율이 불균형을 이루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대기중의 산소량은 계속적으로 줄어 들어가고 있어서, 일반적으로 대기중의 이산화탄소량이 2배로 늘어난 경우 전 지구는 온실 효과로 인해서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된다고 한다. 이러한 온실효과는 핵무기 보다 더욱 인류를 파멸로 이끌어 가는 직접적인 원인이 될 수도 있다고 한다.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이 자연질서를 유지 먹이사슬구조가 파괴되고 있는 것 또한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미생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전 지구상에는 지금 3000만종의 생명체가 살고 있는데, 그 중에서 학문적으로 연구되어 확인된 수는 10%에 불과한 300만종뿐이다. 그 중에서 하루에 보통 100여종의 미생물들이 소멸해 가고 있으며, 이러한 비율은 알려져 있지 않은 미생물의 수를 고려해 볼 때, 전체 생명체의 소멸의 비율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다. 이 우주에 살아있는 물체는 먹이사슬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이 구조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것이 바로 미생물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미생물들의 소멸은 궁극적으로 모든 생명체의 존속을 위태하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태아를 보호하는 양수막과 같이, 지구를 감싸서 우주내의 방사능으로부터 지구를 보호하여주던 오존층에도 구멍이 생겨서 지구는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현대인들은 프레온가스라는 물질을 사용하여 에어컨, 스프레이, 모기향에 이르기까지 수 없이 많은 상품을 개발하고, 그 결과 이러한 것들이 일곱 개의 층으로 겹겹 이 쌓여 있는 오존층을 벗겨내고 이미 남극과 북극 대륙에 우주의 방사능 물질을 대량으로 투과 시킬 만한 구멍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충격적이 아닐 수 없다. 지구를 죽음의 땅으로 만드는 방사능 물질이 이제 지구에서 핵 발전소 등을 통하여 만들어질 뿐 아니라, 우주로부터 반입되어 들어오게 되는 정도가 커지면 커질수록 우리 인간이 생존하기 더욱 어려운 상태가 되는 것은 자명하다. 17~18세기 이후 서구의 기술과학의 발달은 인간에게 많은 편리함을 가져다주었지만, 동시에 상상할 수 없는 무서운 부작용을 가져다 준 것이다. 올 여름 우리가 경험하는 이상기상은 한국에만 생긴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생겼다. 인도는 가뭄과 함께 50년만의 한파가 몰아쳐 265명의 인명피해를 냈으며, 호주도 사상 최악의 가뭄으로 농작의 극심한 피해를 입었으며, 유럽에서도 폭서를 경험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상기상이 생기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주된 첫 번 째 이유는 지구의 기온이 높아졌기 때문이며, 두 번째는 오존층의 감소 때문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우리의 삶 그 자체를 위협하고 있는 환경오염과 그에 따른 공해 문제를 사실상 인간이 자초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의 신학은 인간을 하나님의 수많은 피조물들 가운데의 한 피조물로 인식하고자 한다. 그는 '창조의 공동체'에 속한 한 '지체'이다. 인간은 다른 피조물을 떠나서 생존할 수 없다. 다른 피조물들과 인간은 서로 의존하도록 되어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으며 다른 피조물를 가꾸고 돌보아할 책임과 사명을 부여받았으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고, 자율성을 가진 존재이다. 그는 세계의 형상이고 하나님 앞에서 모든 다른 피조물들을 대리한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에 대하여 하나님을 대리하고 하나님 앞에서 모든 피조물을 대리한다. 인간의 참 인간 존재는 그 자신의 육체를 다스림에 있다. 인간도 '자연이다'. 오늘날 생태학적 신학은 인간도 자연으로 보며 양자의 관계를 사귐과 섬김의 관계로 본다. 인간은 '자연의 인간화'를 수행하는 동시에 그 스스로 자연화 되어야 한다. 인간의 영혼과 육체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됨 속에서 인간의 존재를 구성한다면 인간은 철저히 '자연적 존재'이다. 자연의 변형과 사용은 자연의 주체성과 균형이 유지되며 '창조의 공동체'가 유지되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고 자연과 상호작용 속에 있으며 연대성 속에 있다. 자연에 대한 관점은 노동과 소유의 관점과 거주와 본향의 관점이다. 우리는 '거주와 본향'의 관점에서 자연을 대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한다. 자연의 세계가 인간의 본향이 되기 위하여 무엇보다 먼저 경제적 정의가 실현되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자비로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어떤 대상을 그의 삶의 세계에서 분리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가 맺고있는 여러 가지 삶의 관계들 속에서 이해할 때 그 대상을 잘 인식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을 위하여 우리는 인식을 유도하는 관심을 변경해야 한다. 대상에 참여하고 사귐을 가지기 위하여 인식하고자 해야한다. 참 인식은 대상을 지배하고 소유하고자 하지 않고 대상과 사귐을 얻고자 한다. 이러한 인식은 대상의 존재에 대한 기쁨과 결합된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였다는 것은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다'에서 알 수 있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귀한 피조물이기 때문에 보호되고 장려되어야 한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하고 하나님에게 상응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고 인간은 단지 인간일 뿐이다. 하나님의 인간창조는 인간의 신격화도 거부하지만 인간 생명에 대한 모든 신화적 저주와 이를 통한 인간 생명의 학대와 억압을 거부한다. 인간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며 그 존재에 있어서 동등하다. 여기서 정치권력의 탈신화화 내지 탈신성화의 초석이 놓여있다. 그러므로 왕의 존재와 권력도 다른 국민과 똑같이 다루어진다. 하나님은 인간이 있는 그곳에 나타난다.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의 '현상 양식'이라면, 하나님의 형상은 바로 이 ‘현상 양식’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동물과 비교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정의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 속에는 '지배의 인간학'이 전제되어 있다. 기독교는 삼위일체론을 믿는다. 즉 하나님과 그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세 신적 인격을 믿는다. 세 신적 인격은 자신의 인격적 주체성과 고유성을 가지지만 분리되지 않고 한 몸 곧 일체를 이룬다. 모든 것을 함께 나누며 모든 일을 같이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사랑'이고 '사회적 관계'속에 있다. 또한 예수의 삶 속에 나타난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삼위일체 하나님과 같이 인간도 자기와 구분되는 자들과 한 몸을 이룬 가운데서 모든 것을 함께 나누며 모든 짐을 함께 짊어지면서 살아야할 인간의 존재규정을 가리킨다. 이 하나님의 형상이 예수에게서 완전하게 나타난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예수의 사회적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사람들과의 관계,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과의 관계로 나눌 수 있다. 자연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권이나 통치권을 뜻한다기보다는 자연과 인간의 '친구관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웃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물론 자연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인간은 자기의 주체성을 가진 존재로서 상대방의 짐을 대신 짊어져야 하며 고난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신학은 생태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심어주어야 한다. 즉 자연 자신이 가진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 그리고 소유의 팽창을 기본 가치로 보는 현대인의 기본 가치관이 변화되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상황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경제정의가 실현되어야 위의 요소가 충족될 수 있을 것이다.

      연관 검색어 추천

      이 검색어로 많이 본 자료

      활용도 높은 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