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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곤의한국적 연극지향과 극작술의 상관관계 연구

        김숙경 한국극예술학회 2008 한국극예술연구 Vol.0 No.27

        Many directors and play writers have pursued ‘Korean style theater’ since 1970's.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xamine Myung Kon Kim who has pursued ‘Korean style theater’. Myung Kon Kim is a playwriter and director and one of the representative writers who have created ‘Korean style theater’ since 1980's. I make, his early works, “Kabose Kabose”, “Jum-a Jum-a Konjum-a”, “Kyek-jung-man-ri” an objects of this study. His initial interests of ‘Korean style’ originated in the Ma-Dang-Kuek Movement. Ma-Dang-Kuek was handed down by the success of Tal-Chum(Mask play). He transformed Ma-Dang-Kuek into the style on the stage theater. The materials of his plays are basically focused to social subjects and historical matters of Korea like Dong-Hak revolution, Gyang-Ju demonstration, The Korean War, the division of Korean and unification of North and South, and Korean theater history. He often applies the plot of epic theater and Ma-Dang-Kuek. In the aspects of plots, the quality is not so excellent, because the principles of theater on the stage and Ma-Dang-Kuek clashsed in his works. Moreover he intends to put too many materials, stories, and characters into a play. Therefore it is not easy to communicate the message of the play. He cares much for ‘theatrical ways’ in writing and directing, which are movement, song and dance, the participation of the audience, play within the play, masks and dress, and spectacle. He takes good ideas on theatrical ways from traditional drama and culture like the technique of traditional theater and play, Pan-So-ri and Korean folk songs, traditional dance, original korean objects and dress. The theatrical ways cover the problems of the writing in the performance and make the audience feel easy. However the misapplication and frequent insertion of theatrical ways make a paly worse and complicated. In this case, Myung Kon Kim may cause misunderstanding that he intends to depend on the formal and easygoing way in creating ‘Korean style theater’. 본 논문은 ‘한국적 연극’을 지향했던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김명곤의 초기 작품을 대상으로 ‘한국적 연극’을 지향하는 그의 연극관이 극작술에 어떻게 반영되고 실현되는가를 살펴보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연구대상 작품은 <갑오세 가보세>, <점아 점아 콩점아>, <격정만리>이다.김명곤은 마당극의 무대화를 통해 ‘한국적 연극’을 추구한다. 주로 동학농민혁명, 광주항쟁, 6.25전쟁, 분단과 통일, 한국연극사와 같은 당면한 사회문제나 민족수난사에서 극의 소재를 취해 리얼리즘적 현실 깨닫기를 지향한다. 김명곤은 민중 지향적이고 진보적인 시각에서 주제의식을 부각시키고 있다. 작품의 구성에 있어 연구 대상 작품들은 상호 공통된 특성들을 보여주고 있다. 해설자를 등장시키는 서사극적 구조나 앞풀이-각 장-뒤풀이 식의 마당극적인 구조, 그리고 연대기적 구성은 두 작품 이상이 갖고 있는 공통된 구성 방식이다. 마당극과 무대극 모두를 개방적으로 수용하겠다는 창작의 방향을 표방하지만, 초기 극작품에서는 마당극의 영향이 더 강하게 나타나며, 이는 이후까지도 김명곤의 극작술의 한 특성으로 지속된다. 초기 작품에서는 마당극의 구성원리와 무대극의 구성원리가 적절하지 않은 지점에서 충돌하기도 한다. 해설자 진행 방식이 극을 상투적이고 평범하게 만드는가 하면, 총체적 접근이라는 목적 하에 다수의 짧은 장면들을 연대기적으로 나열시켜 극의 효과를 떨어뜨리기도 한다. 또한 내용과 구성방식이 유기적으로 관련 맺지 못하는 측면도 발견된다.이러한 구성의 문제는 일정 부분 ‘연극적 방식’의 활용으로 공연에서 보완될 가능성을 마련하고 있다. 그가 즐겨 사용하는 ‘연극적 방식’은 대부분 한국의 전통연희나 전통극, 판소리와 민요, 한국의 전통춤(몸짓), 한국 고유의 오브제나 의상 등 ‘한국적 연극’ 지향과 깊은 연관성을 맺고 있다. ‘한국적’이고 ‘연극적’인 방식의 활용은 구성의 밋밋함이나 느슨함을 보완해주고, 대중적인 친근함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때로는 지나치게 잦은 삽입으로 표면상 ‘한국적’ 분위기를 내는 데에 그치기도 한다. 이런 경우 ‘한국적 연극’을 만드는 정형화되고 안이한 연출 방식에 기대고 있다는 오해를 받을 소지가 크다.‘마당극의 무대화’, 또는 ‘마당극과 무대극의 절충적 계승’은 김명곤의 ‘한국적 연극’을 이해하는 핵심 개념이자, 김명곤의 연극미학을 결정짓는 주요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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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철의 「하믈레트」 번역과 그 의의

        윤민주 한국극예술학회 2014 한국극예술연구 Vol.0 No.46

        현철의 번역희곡 「하믈레트」는 한국의 셰익스피어극 수용사 중에서도 가장 특징적인 위치를 점한다. 우선 1920년대에 수용된 여타의 셰익스피어극과는 그 번역 양상과 번역의 목적이 가장 이질적이라는 점에서 시대적 특이성을 보인다. 1920년대에 이루어졌던 셰익스피어극 수용 과정을 일별해 보면 크게 두 가지 경향을 띠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한 가지는 ‘소설적 수용’이고 한 가지는 ‘연극적 수용’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적 수용’은 주로 찰스 램(Charles Lamb)의 『셰익스피어 이야기(Tales from Shakespeare)』를 저본으로 하여 독서용으로 번역한 것이다. 찰스 램의 저작물 자체가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원작의 대사를 살린 산문체 형식으로 바꾸고 복잡한 구성을 간결하게 추림으로써 일반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개작한 것이기 때문에, 이를 번역의 저본으로 삼은 가장 큰 목적은 셰익스피어극에 대한 한국인 독자들의 접근과 이해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데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연극적 수용’은 현철의 「하믈레트」에서 나타나는 경향으로 당시의 주류적 경향이었던 ‘소설적 수용’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현철의 「하믈레트」는 실질적인 공연을 의식한 공연용 대본으로서, 희곡이라는 장르 자체가 제대로 번역되지 않은 상황에서 희곡을 문학의 하위 장르로서뿐만 아니라, 나아가 연극의 하위 장르라는 인식을 분명히 하는 실제적인 실례로 제공되었다. 이는 희곡 장르의 번역과 더불어 연극 대본으로서의 지위를 분명하게 표명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차별화된 번역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소설적 수용’이 셰익스피어극의 내용에 대한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이해를 제공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면, 현철의 「하믈레트」가 보여주는 ‘연극적 수용’은 희곡의 번역을 한국의 근대극 수립을 위한 근대극 운동의 일환과 관련시켜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리고 현철의 「하믈레트」가 갖는 시대적 가치는 일본의 셰익스피어극 수용 과정과 비교해 볼 때 보다 선명해 진다. 1920년대까지 일본 내에서 진행된 셰익스피어극 수용 과정은 크게 네 단계로 구분하여 살펴볼 수 있는데, 가부키적 수용에서 신파극적 수용으로, 그리고 다시 신극적 수용을 거쳐 대학 강단의 학문적 수용으로 변모되어 나갔다. 그리고 1911년에 쓰보우치 쇼요의 ‘후기 문예협회’가 공연했던 <하무렛토(햄릿)>(1911.5)를 기점으로 셰익스피어극은 사실상 더 이상 공연되지 않게 되었다. 셰익스피어극이 더 이상 공연되지 않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1911년에 공연되었던 <하무렛토>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그 배경에는 서구식 근대극의 연극적 성공과 일본 내에서의 영문학 위상의 제고 등과 같은 복합적인 이유가 작용함으로써 1920년대가 되면 일본 내에서 셰익스피어극이 근대극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고전극으로 치부되었기 때문이다. 현철의 「하믈레트」는 바로 일본 내에서 셰익스피어극이 근대극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한 시점에서, 그리고 마치 일본의 전통 연극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옛날의 연극이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던 쓰보우치 쇼요의 <하무렛토> 공연에 사용되었던 번역본 『하무렛토』를 번역의 저본으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여러 가지 의아함을 불러일으킨다. 1920년대는 한국의 근대극이 본격적으로 태동하는 시기로, 한국의 근대극이 일본의 근대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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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한운사의 광복절 특집드라마 <기다려도 기다려도> 해제

        정현경 한국극예술학회 2015 한국극예술연구 Vol.0 No.49

        한운사(본명은 한간남(韓看南), 1922~2009)의 방송극은 선택된 사실 기록으로서의 역사가 미처 담아내지 못한 인간의 삶과 역사의 속내를 허구라는 틀 속에 담아 그려내며 시청자로 하여금 가려진 역사 속 진실과 대면하게 한다. 정현경, 『한운사의 방송극 연구』, 충남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9, 24~26면 참조. 일제의 강점으로 시작된 20세기를 산 한국인들 모두가 그러하였듯이 한운사는 파란만장한 한국사를 그의 인생에서 현재로 살아왔다. 80여 편에 달하는 한운사의 방송극은 그의 인생 여정인 동시에 그가 살아온 질곡의 역사에 대한 미메시스(mimesis)라고 할 수 있다. 극작가로서의 한운사가 추동해내는 상상력의 구심점이 그가 살아온 ‘한국사’에 맞닿아 있는 것은 그의 문학관과 관련이 깊다. 그는 문학이나 영화를 자기가 살아본 세상에 있었던 일, 그때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였느냐는 이야기, 그런 것을 재현해 내일 어떻게 사는 게 좋은 가를 상의해 보는 장으로 인식하였다. 한운사, 『구름의 역사』, 민음사, 2006, 112면. 더불어 그는 식민과 전쟁으로 인한 민족의 트라우마(trauma)를 ‘소화’하지 않고서는 국가의 건강도, 개인의 건강도 유지할 수 없다고 보았다 위의 책, 126면. . 한운사에게 있어 ‘악몽’과도 같았던 민족사는 같은 역사를 공유한 민족의 ‘트라우마’이자 반드시 치유되어야 할 ‘독소’와도 같은 것이었다. 한운사가 끊임없이 ‘한국사’를 소환하고 있는 이유는 문학이 독자/시청자로 하여금 불행했던 역사로서의 민족적 ‘트라우마’를 직면하도록 하여 그것을 극복하고 치유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할 수 있다는 믿음에 근거한다. 한운사의 극작은 일제강점기와 8.15광복, 한국전쟁 그리고 4.19혁명과 5.16쿠데타로 대표되는 정치적 갈등과 모순의 1960~1970년대로 이어지는 질곡의 한국사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한운사의 작품 중, 「기다려도 기다려도」는 광복 이후에도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향한 노모(老母)의 기다림과 죽음을 통해 민족의 수난과 비극을 극화한 ‘광복절 특집드라마’이다. 1970년대에 8.15광복을 기념하는 특집극으로 방영된 한운사의 TV 방송극은 모두 4편이다. 광복 30주년 기념 특집극으로 방영된 「미싯가루」(TBC, 1975)를 비롯하여 「기다려도 기다려도」(MBC, 1977)와 같은 해인 1977년에 우리나라 최초로 3부작으로 제작되어 미니시리즈의 가능성을 보여준 「나루터 3대」(KBS, 1977) 그리고 「파도여 말하라」(TBC, 1978)가 그것이다. 1970년대에는 계몽과 선전선동의 목적극이 주류를 형성하였는데, 이들 특집극을 통해서 목적극의 실상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억압과 통제의 방송 현실에서도 소극적이나마 현실에 대한 비판 의식을 견지하고자 했던 작가 정신도 발견할 수 있다. 윤석진, 「광복 30주년 기념 특집극 <미싯가루> 해제」, 『한국극예술연구』 제37집, 한국극예술학회, 2012, 231면 참조. 한운사는 광복 기념 특집극들을 통해 일제강점으로 인한 민족의 수난을 극화하는데 그치지 않고 비판적인 시각에서 민족의 아픔과 고통을 극복하고 치유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데 주력하였던 것이다. 「기다려도 기다려도」는 광복 이후 30여 년이 흐른 서울의 종로를 극적 배경으로 설정하여 1970년대 후반의 한국 사회 어딘가에서 실제 일어날 수 있는 일임을 강조해 동시대성과 리얼리티(reality)를 획득하고 있다. 극의 전개는 교회의 교육관을 짓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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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월회」 연극의 근대성과 전근대성

        한국극예술학회 2011 한국극예술연구 Vol.0 No.34

        <P>이 논문은 한국 근대극 형성기에 있어 「토월회」의 위치를 재고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한국 근대극 형성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 단체로 「극예술연구회」를 꼽고 있으나, 「토월회」의 역할도 높이 평가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토월회」가 공연한 전체 작품을 모아보면, 전근대적인 작품과 근대적인 작품이 혼재되어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전근대적 작품 때문에 「토월회」를 상업성이 강한 극단으로 치부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검열을 통과하고 대중성을 확보한 작품으로 극의 교화성을 최대한 발휘하는 공연을 추구했던 「토월회」의 근대극 지향점에서 그 점을 새롭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P><P> 「토월회」의 1기와 2기 공연에서는 일본의 근대극운동을 동류화하는 입장을 취했다. 일본에서 흥행에 성공한 작품을 골라 공연함으로써 교화의 대상인 관객도 확보하고, 공연 수익도 높이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의도한 바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식민지조선의 관객들이 정서적으로 희극보다는 비극에 가깝다는 사실과 서양 근대극의 번안으로 관객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P><P> 「토월회」의 3기와 4기는 근대극운동의 고유화를 추구하였다. 「광무대」를 전용극장으로 임대하여 의욕적으로 출발하였으나, 극단과 극장의 운영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대중성이 강한 작품을 계속해서 공연해야하는 모순에 빠졌다. 결국 「조선극장」에 전속극단으로 활동해야 할 만큼 세력이 위축되지만, 그동안 공연 경험을 통해 ‘조선정조가 넘쳐흐르는 의미심장한 시대극’에 이르게 된다. 「토월회」의 <아리랑고개>는 한국 근대극 형성기에 아주 중요한 작품인데, 슬픔 속에서도 희망을 놓치지 않는 긍정적 인식이 돋보인다. 서양 근대극의 번역 공연에 머물지 않고, 식민지치하에서 공연 가능한 근대극의 실체를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한국근대극 형성에 미친 「토월회」의 영향을 높게 평가하여야 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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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일 표현주의극의 전유 방식 비교 연구 -김우진과 오사나이 카오루를 중심으로-

        윤민주 한국극예술학회 2012 한국극예술연구 Vol.0 No.36

        이 논문은 김우진이 표현주의극을 어떠한 관점에서 이해하고 창작하였는가 하는 주체적인 측면에 주목한 논의를 확장시키는 차원의 연구로, 김우진의 표현주의극 이해를 보다 구체적이고 객관적으로 검증해보기 위해 동시대 일본의 표현주의극을 비교 지표로 삼고자 하였다. 이러한 논의는 서구의 표현주의극이 한·일 양국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전유(專有, appropriation)되어 나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비교해 보는 기회를 제공해줄 수 있으며, 동시에 김우진의 표현주의극이 갖는 탈식민적 의미를 확인하여 한국 근대극의 독자성과 선구성을 회복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오사나이 카오루와 「츠키지소극장」은 번역의 시대를 상정하고 이 기간 동안 표현주의극 상연을 통해 당대 일본의 연극 토대와 단절된 신극을 수립하겠다는 적극적인 의지를 실천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표현주의극은 새로운 정신을 상실한 채 새로운 기교로만 경도되어 스스로 번역의 시기에 갇힌 무대상의 표현주의극에 그치고 말았다. 반면에, 김우진의 표현주의극은 작가의 철리(哲理)와 ‘이즘(-ism)’을 찾아나가는 예술로서 새로운 정신을 중시하는 창작활동으로 구체화되어 나타났다. 작가의 주의·주장은 시대적, 역사적 현실 맥락 속에서 발현되는 것으로 ‘조선’이라는 현실적 토대가 없이는 도저히 성립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조선은 식민과 근대라는 두 가지 대립의 상황이 교차되고 있던 과도기적 공간으로, 현상태를 높은 단계로 고양시키고자 하는 자연 발생적 의지로서의 개인의 내적 생명력을 사회 발전을 위한 사회적 생명력으로 고양시킬 수 있는 연극이 요구되었고, 그러한 필요성에서 표현주의극이 적극적으로 창작되었던 것이다. 한·일 표현주의극 전유 방식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차이는 탈식민적 인식의 차이를 노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소 거칠게 말하는 것이 되겠지만, 1920년대 일본의 표현주의극은 적극적으로 ‘서양화 되기’를 시도한 전유라는 점에서 스스로 타자화 되고자 한 방식이며, 서구적 오리엔탈리즘에 종속된 상태를 스스로 자초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스스로 설정한 번역 시기에만 갇혀 새로운 정신을 제시하는 표현주의극 작품을 산출하지 못 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시기의 김우진은 서구를 모방하는 것은 물론 일본식 근대화를 모방하는 것만으로는 조선의 문학이 성립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현실에서 나타나는 과도기적 대립 상황을 직시할 수 있는 생명력의 예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작품 창작을 통해서 새로운 정신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나가고자 했다. 이점에서 1920년대 한국의 표현주의극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명확히 하는 전유 방식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표현주의극의 주체로서 표현주의극의 정신을 한국의 역사적 맥락 속에 적용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탈식민적 인식을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 KCI등재

        공연으로 다시 쓰는 극예술연구회―김남석, 『조선 신극의 기치, 극예술연구회1』, (연극과인간, 2023)

        이정숙 한국극예술학회 2024 한국극예술연구 Vol.- No.81

        극예술연구회에 대한 새로운 연구서가 간행되었다. 『조선 신극의 기치, 극예술연구회1』는 극예술연구회 연구에 대한 완전판이라는 부제를 붙일 수 있을 정도로 방대한 자료를 활용하여 극예술연구회의 공연을 재구성하고 1930년대 연극사에서 극예술연구회의 활동을 평가한 연구서이다. 극예술연구회의 공연에 관한 사진자료들을 활용하여 당시의 연극공연이 어떠했는지를 설명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특정 인물과 작품에 집중되었던 기존의 연구 경향과 달리, 소외되었던 공연들의 위치도 찾아주었다. 대중극단과의 관계를 의식하고 극예술연구회의 공연을 설명한다는 점도 의미 있다. 방대한 양의 자료들로 채워진 극예술연구회史는 책 자체로 극예술연구회에 대한 자료집의 역할을 할 수 있을 정도이며, 극예술연구회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가능해지는 계기로도 의미도 있다.

      • KCI등재

        한국 유성기음반에 관한 음반문헌학적 연구의 결실 ―배연형, 『한국 유성기음반 문화사』(지성사, 2019)

        송미경 한국극예술학회 2020 한국극예술연구 Vol.0 No.70

        배연형의 『한국 유성기음반 문화사』는 1897년부터 1945년 사이 한국의 유성기와 유성기음반, 그리고 이것을 둘러싸고 벌어진 문화적 현상의 전모를 담아낸 책이다. ‘제1부. 한국 유성기음반의 역사’, ‘제2부. 유성기음반과 사회’, ‘제3부. 유성기음반 시대의 음악’의 전체 3부로 구성된 이 책에는 해당 시기 한국 유성기음반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이 총망라되어 있으며, 방대한 분량의 한국 유성기음반 관련 시각자료와 문헌 기록을 한 자리에 집대성했다는 의미도 있다. 이 책에서 한국 유성기음반에 관한 내용을 정리하고 분석한 이론적, 방법론적 토대가 된 것은 이른바 ‘음반문헌학’이다. 이는 저자가 30여 년 전 발표한 「한국음악의 음반문헌학(Discogrophy) 서설(1)」을 통해 학계에 처음 제기된 개념으로, 후에 ‘음반 문헌 연구’, ‘과학 기술적 연구’, ‘음반의 내용 연구’, ‘파생적 연구’ 등으로 다시 구체화였다. 『한국 유성기음반 문화사』는 이러한 방법론을 발전적으로 아우른, 음반문헌학적 연구의 훌륭한 결실이다. 저자가 시도한 것은 한국 유성기음반에 관한 사적 고찰로서의 음반문헌학 연구로, 음반사적 접근, 문화사적 접근, 음악사적 접근이 차례로 논의의 중심에 놓인다. 제1부 ‘한국 유성기음반의 역사’에서는 ‘음반 문헌 연구’를 주요한 방법론, ‘과학 기술적 연구’를 보조적인 방법론으로 삼아 한국 유성기음반사를 구축․정립하였으며, ‘제2부 유성기음반과 사회’에서는 한국 유성기음반을 둘러싼 제 현상을 문화사, 특히 대중문화사적 관점에서 풀어냈다. ‘제3부 유성기음반 시대의 음악’은 ‘음반 문헌 연구’에 따른 성과를 토대로 ‘음반의 내용 연구’를 본격화한 논의인데, 특히 3장 ‘판소리와 창극, 가야금병창’에는 그동안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연구 업적을 이뤄온 저자의 내공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다. 한편 저자가 이 책을 마무리하며 힘주어 강조하는 것은 시대적 과제로서의 유성기음반 공공화이다. 그리고 『한국 유성기음반 문화사』가 이룩한 음반문헌학적 연구의 성취는, 음반의 연구와 음반의 수집․활용이 별개의 문제가 아님을,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문제가 아님을 설득력 있게 보여 준다.

      • KCI등재

        이현화의 초현실주의적 사유와 극중극

        이은하 한국극예술학회 2013 한국극예술연구 Vol.0 No.39

        a 이 연구는 이현화의 <카덴자>를 중심으로 한 후기작들에서 나타나는 극중극의 기법에 대한 해명을 위해 작가의 초현실주의적 사유를 고찰하였다. 작가는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맥락에서의 현실이나 우리가 안정적이라고 믿는 세계에 대한 의문을 강조한 작품을 많이 창작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인간의 병리적인 내면과 성적 욕망을 포함한 무의식의 세계에 대한 탐색이다. 이현화는 신춘문예 당선소감에서 앵그리 영맨이나 “라이징 제네레이션의 저항”이라는 표현을 통해 당대 극계의 사실주의의 전통에 날선 비판을 가했다. 사실주의는 세계를 물리적으로 인식하며 인과관계를 통해 합리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으로 상정하는데 이러한 세계 인식에 극도의 혐오감을 나타낸 초현실주의자들처럼 이현화 역시 물리적 실재(reality)계가 아닌 무의식과 인간의 과학적 인식 너머의 세계를 탐색했다. 그의 이러한 관점은 극중극의 기법을 통해서 나타난다. 그의 극중극은 서사극의 소외효과와 상관없이 초현실주의의 목표와 연관되어 있다. 그의 극중극은 끊임없는 연쇄와 반복으로 그러한 무대의 경계를 무화시킨다. 우리가 실재라고 믿는 가시적 세계와 허구 세계가 분리되지 않았다는 그의 초현실주의적 사유가 형식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의 극중극의 작품들이 내용적 측면보다 무대와 관객의 경계가 반복되는 양상에 더 집중되는 이유는 이현화의 초현실주의적 사유가 연극이 가지는 허구이면서 동시에 현존하는 그 이중성과 맥락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이현화의 극중극은 이현화의 초현실주의적인 사유를 통해 연극의 이중성을 구체적 형식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초현실주의가 서구의 근대적 예술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 것과 마찬가지로 이현화의 초현실주의적 사유 역시 한국 극계의 예술적 전통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1960-1970년대 정치적․사회적 현실에서 사실주의극의 운신은 넓지 않았는데 제도권에서의 연극활동은 당시 작가의 예술적 자유를 보장해 주지 않았다. 때문에 이현화의 초현실주의가 서구의 집회와 결사를 통해 조직된 아방가르드의 예술운동과 다른, 개별적인 것으로 성취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의 극중극은 한국의 아방가르드 작가의 실천이라는 의의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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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치진의 도쿄 구상 실천과 극예술연구회의 <포기>(Porgy)

        김재석 한국극예술학회 2017 한국극예술연구 Vol.0 No.55

        This report is aimed at analyzing the process and result of performance of Porgy by Gukyesulyeonguheo, the theatrical group in colonized Chosun in 1937, relating it with Yoo Chijin’s practicing his theatrical ideas in Tokyo. Yoo Chijin embodied his theatrical ideas in Tokyo, namely the ways to develop modern drama in colonized Chosun while he had stayed in Tokyo from May in 1934 until he came back home next April. The core of his ideas can be summarized three points ; first the theme of drama should never be revealed on stage directly, dealing with the real problems in colonized Chosun, secondly the dramas with comic mood should mainly be created to catch the audience’s interest, and last the foreign dramas which are interpreted in the way of Chosun should be performed. Yoo Chijin who had come back home from Japan began to practice his ideas, managing the performances as the executive secretary of practice department of Gukyesulyeonguheo. His trials including the performance of So, the first creative drama based on his ideas in Tokyo were cut off by Japanese censorship of performance which was strengthened at that time. To practice his theatrical ideas well, he had to search the way to cope with two conditions (the reflection of reality in colonized Chosun and passing Japanese censorship) at the same time. After thinking over two ways to find the subject matter of drama from history and to create satirical dramas, he chose historical dramas and the result of such pursuit was the performance of Chunhyangjeon. In the performance of Chunhyangjeon, he perceived the possibility of “romanticism based on realism”, tried to find foreign dramas with such tendency and finally selected Porgy. In Porgy there are the romantic love and the criticism of reality in the story and the stage with many thing to see, consisting of songs and dances like Chunhyangjeon. Through the performance of Porgy, he believed firmly that performing dramas of “romanticism based on realism” in big theater would be the future of modern drama of colonized Chosun. It is also very important that Yoo Chijin suggested Porgy, the drama of “romanticism based on realism” as substance of performing foreign dramas centered on audiences. Nevertheless it is his limitation that he could not practice continuously the dramas of “romanticism based on realism” hardened through the performance of Porgy. The reason is outlined as two causes. First he could not afford to apply himself to creating works, owing to the reality of theatrical world much more worsened like Gukyesulyeonguheo’s being broken up. Second he explained three conditions such as the performance in big theater, romantic dramas and the criticism of reality as a matter of course, but had not enough creative discussion on how to structure them. So the ambiguity of methodology appeared and this ambiguity caused Resurrection, the work having little to do with Gukyesulyeonguheo to be performed by Seo Hangseok’s direction in 1937. To Yoo Chijin, Porgy is one of ideal dramas of “romanticism based on realism”. So he tried to perform it repeatedly after the 1945 liberation, which showed that he did not give up practicing dramas of “romanticism based on realism” and tried to keep on practicing them continuously. 이 논문에서는 1937년에 극예술연구회가 공연한 <포기>를 유치진의 도쿄 구상 실천과 연관시켜서, 공연의 과정과 결과를 분석하였다. 1934년 3월부터 다음 해 4월까지 도쿄에 머물면서 유치진은 식민지조선 근대극 발전의 방안, 즉 도쿄 구상을 마련하였다. 식민지조선의 현실 문제를 다루면서도, 그것이 무대상에 직접 노출되는 것을 피하여야 하며, 관객의 흥미를 놓치지 않기 위하여 희극적 정조를 주로 하는 극을 창작하여야 한다는 것, 그리고 조선적으로 해석된 외국극 공연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 도쿄 구상의 핵심이다. 귀국한 유치진은 실천부 책임간사로 극예술연구회의 공연을 주관하면서, 그의 도쿄 구상을 실천해나가기 시작하였다. 도쿄 구상에 입각한 최초의 창작극인 <소>를 필두로 한 그의 시도는 그 무렵에 강화된 일제의 공연 검열에 막혀버렸다. 유치진이 도쿄 구상을 제대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식민지조선의 현실 반영’과 ‘검열에 대한 대응’이라는 두 조건을 동시에 넘어가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유치진은 작품의 소재를 역사에서 취하는 방법과 풍자극 창작이라는 두 가지 방안 중에서 역사극을 선택하였다. 그러한 모색의 결과가 <춘향전> 공연이었다. <춘향전>에서 시도했던 “리알리즘을 토대로 한 로만틔시즘”의 발전적 모습이 <포기>이다. 낭만적 사랑 이야기에 담긴 현실 비판, 그리고 노래와 춤으로 이루어진 볼거리 많은 무대(spectacle stage)를 가진 <포기> 공연을 통하여, 유치진은 자신이 구상하고 있던 식민지조선 근대극의 실체에 좀 더 가까이 다가 갈 수 있었다. 유치진은 <포기> 공연에서 “리알리즘을 토대로 한 로만틔시즘” 극의 대극장 공연이 식민지조선 근대극의 미래라는 점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가 주장했던 ‘관중본위’의 외국극 공연에 대한 실체로 “리알리즘을 토대로 한 로만틔시즘”의 <포기>를 제시했다는 점도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 공연을 통해 확고해진 “리알리즘을 토대로 한 로만틔시즘” 극을 그 후에도 계속 실천해나가지는 못한 것이 그의 한계이다.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1938년 3월에 극예술연구회가 해산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크게 악화된 연극계의 현실로 인하여 그가 창작극에 전념할 여유를 갖지 못한 것이다. 두 번째는 대극장 공연과 낭만주의적 작품, 그리고 현실 비판이라는 세 조건이 당위적으로 설명되고 있을 뿐 어떤 방식으로 구조화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창작적 논의가 결여되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애매함이다. 극예술연구회의 목표와 거리가 먼 듯이 보이는 <카추샤>가 1937년에 서항석의 연출로 공연된 것도 유치진 방법론의 애매성에 그 원인이 있다. 유치진에게 있어서 <포기>는 “리알리즘을 토대로 한 로만틔시즘”의 이상적 작품 중의 하나였다. 그가 해방 후에 거듭하여 <포기>의 공연에 애를 쓴 것에서 “리알리즘을 토대로 한 로만틔시즘”의 실천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수행하려 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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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 30주년 기념 특집극 <미싯가루> 해제

        윤석진 한국극예술학회 2012 한국극예술연구 Vol.0 No.37

        1970년대 방송계는 경제 성장을 알리기 위해 정책 홍보성 드라마들이 대거 방영될 정도로 계몽과 선전선동의 목적극이 주류를 형성하던 시기였다. 1972년 유신헌법 선포 이후 방송계는 유신 체제를 옹호하기 위한 박정희 정권의 방송정책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유신과 긴급조치의 억압과 통제의 틀에 순응 또는 적응하면서 반공드라마를 강화하고, 새마을운동을 홍보하는가 하면, 한국 경제의 발전상을 보여주면서 이웃 간의 화합과 이상적인 사회 모습을 강조하는 작품들이 주류를 형성했던 시기가 바로 1970년대였다. ‘동양방송(TBC-TV)’의 <토요무대> 제 15화이자 ‘광복 30주년 기념 특집’으로 1975년 8월 9일 방영된 <미싯가루>는 1970년대 목적극의 실상을 잘 보여주는 동시에 억압과 통제의 방송 현실에서도 소극적이나마 현실에 대한 비판 의식을 견지하고자 했던 작가 정신이 내재되어 있는 단막극이다. 한운사가 극본을 쓰고, 연극무대에서 방송극으로 자리를 옮긴 심현우가 연출을 맡은 <미싯가루>는 광복 이후 30년의 세월이 흐른 서울을 배경으로 태평양전쟁 당시 생사를 함께 했던 한국인과 일본인의 우정을 담고 있다. 일제강점기 태평양전쟁 당시 아사(餓死) 직전에 조선인 학도병 ‘박완수’가 건네준 ‘미싯가루’를 먹고 생명을 건진 일본군 ‘사이토오[齊藤]’가 은혜를 갚기 위해 광복 30년이 되던 해에 한국을 찾아와 민족을 초월한 우정을 나누면서 미래 지향적인 한일 관계까지 모색한 특집극이 바로 <미싯가루>이다. 발표하는 작품마다 청취자와 시청자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한운사(1923~2009)는 방송극을 통해 전쟁과 남북 분단의 상처는 물론, 일제강점기의 고통과 아픔, 전후 사회의 혼란과 세대 갈등 등을 치유하고 극복함으로써 한국의 새로운 미래상을 모색하고자 했던 1세대 방송극작가이다. 1960~1970년대 한국 방송극의 형성기를 이끌었던 한운사의 민족을 초월한 인간의 본성에 대한 문제의식은 이미 1960년 라디오드라마로 방송된 <현해탄은 알고 있다>에서 극적으로 표현된 바 있다. <미싯가루>는 일제강점기의 고통과 아픔을 극복하고 한국과 일본의 새로운 미래를 지향하고자 했던 한운사의 문제의식이 여전함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미싯가루>는 일본인 ‘사이토오’가 아들 ‘젠사쿠’와 함께 김포국제공항에 도착하여 서울 시내로 들어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사이토오’의 한국 방문 목적이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태평양전쟁 당시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 ‘박완수’를 찾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젠사쿠’는 아버지와 달리 일본의 도쿄와 다를 바 없이 번화한 서울의 모습에 감탄을 금치 못하며 관광에 나선다. 번화한 서울의 모습에서 과거 일제강점기의 풍경을 기억해내는 아버지와 일제강점기를 경험하지 못해 서울의 현재 모습에 감탄하는 아들의 시선에서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던 한국의 비약적인 발전상을 강조하려는 작가의 의도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미싯가루>는 광복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목적극’이라는 특성상 계몽극으로서의 교조성에 갇혀 있는 한계를 드러내기도 하다. ‘사이토오’의 아들 ‘젠사쿠’와 역사학자가 된 ‘박완수’의 딸 ‘박인옥’이 서로에게 호감을 갖는다는 설정을 통해 일제강점기의 고통을 극복하고 미래 지향적인 한일 관계를 지향해야 한다는 작가의 목적의식이 교조적으로 강조되고 있기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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