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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로코피에프(Sergei Prokofieff)의 <피아노 소나타> No.1, Op.1의 분석 연구

        홍정아 강원대학교 2008 국내석사

        RANK : 1871

        본 논문에서는 신고전주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 있는 프로코피에프의 <피아노 소나타> No.1 ,Op.1 작품을 분석함으로써 프로코피에프의 고전성과 현대성을 이해하고 이 작품에서 보여지는 음악성을 고찰하였다. 프로코피에프 <피아노 소나타> No.,Op.1은 그의 초기 작품으로 원래는 3개의 악장을 지닌 곡이었으나, 후에 2개 악장이 제외된 단악장의 소나타이다. 제시부, 발전부, 재현부 그리고 종결부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제선율의 재현에 있어서도 전통적인 패턴을 잘 따르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형식에 있어서 고전적인 전통양식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주부는 4마디에 불과하지만 앞으로 전개될 부분을 가장 적절하고 함축성 있게 표현하고 있고, 곡의 전반에 걸쳐 통일성 형성에 큰 역할을 한 4개의 음형을 찾아볼 수 있다. 이어서 제시부는 제1주제와 제2주제를 지니고 있는데 주제선율 A와 B가 등장하여 변화와 반복을 보여주고 있다. 발전부는 제시부에서 제시되었던 음형과 발전 방법을 이용하여 이루어진 부분으로 크게 3개의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재현부는 제시부보다 확장된 부분과 축소된 부분을 함께 지니고 있다. 마지막으로 종결부는 소종결부의 재현을 통해 변화와 확대를 거치면서 흥미있는 변화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반음계적인 수법과 자유로운 리듬의 변형, 박자와 속도의 변화 등은 그의 강렬한 열정을 나타내 주었고, 반복된 음형이 지속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러한 형태는 상행하거나 하행하면서 악곡의 역동성을 더하여 주고 있다. 또한 비화성음의 사용, 4도음정의 활용, 조성 및 화성의 모호성, 옥타브의 도약, 단악장 소나타를 택하는 등의 현대적인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고는 하나 결국 전통적인 형식에 바탕을 둔 곡이라고 볼 때 이 곡은 프로코피에프의 진취성과 보수성이 잘 조화된 곡이라 할 수 있다. The following thesis examines the neo-classical No.1, Op.1 piece of Prokofiev's <Piano Sonata> to understand the classicism and modernism in his works, and reflects on the musicality of the piece. One of Prokofiev's early works, <Piano Sonata> No.1, Op.1 was originally with three chapters but was later reduced to a single chapter sonata. It is composed of an exposition, development, recapitulation, and coda, and strictly follows by the traditional pattern in reproducing the main melody; in such, it can be seen that the piece wholly inherits the traditional style in form. The introduction section is but four bars, yet expresses what is to follow in the most adequate and significant way. It holds the four figures that plays a major role in unifying the entire piece. The following exposition section holds two themes, where the main melodies A and B changes and varies constantly. The development is largely divided into three parts, and is composed through an expansion of the figures and development techniques introduced in the exposition. There capitulation section has both extended and contracted parts of the exposition. Finally, the coda brings in an interesting set of change through variations in reproducing the codetta. The chromatic technique and variation of free rhythms, and the change of beats and pace all reflect an intense passion, and the constant use of repetitive figures adds to the dynamics of the piece as it ascends and descends. Furthermore, in that the piece is fundamentally based on tradition yet employs modern techniques such as the use of non-harmonic tones, utilization of 4th degrees, a jump of octaves, and the adoption of a single-chapter sonata form, <Piano Sonata> could be said to be a piece where Prokofiev's progressivism and conservatism fall nicely together.

      • 고등학교 미술교과서와 국사교과서의 미술 작품 삽화 제시 방법 비교 연구

        홍정아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2009 국내석사

        RANK : 1855

        본 연구는 제 7차 교육과정에 있는 고등학교 미술교과서와 국사교과서의 삽화 제시 방법에 대해 분석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 교과서에 등장하는 공통된 미술작품이 어떻게 제시되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본 연구의 목적은 오늘날 다양한 시각적 미디어에 익숙해져 있는 학습자들에게 교과서가 외면 받지 않고 흥미 있는 학습교재로 자리 잡게 하기 위한 하나의 점검이라 할 수 있다. 최근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한 의식이 고조되어 대중적인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와 같은 관심의 지속과 역사의식의 발전을 위해서 우리의 역사적 산물인 미술작품에 대한 교육이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교육은 기본적으로 학교에서부터 이루어지며 교과서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비록 미술교과서와 국사교과서의 교육 목적에 차이는 있다. 그러나 우리 미술이 지니는 가치를 교육함에 있어서 미술작품 삽화의 바른 제시는 두 교과서 모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고 연구를 진행하였다.

      • DNA의 금 박막 표면 고정법 개발과 고정 DNA를 이용한 분자생물학적 유용성 검토에 관한 연구

        홍정아 漢陽大學校 大學院 2000 국내석사

        RANK : 1855

        최근에 DNA microarray 등의 DNA chip에 많이 사용되는 유리 위의 고정 DNA는 표면으로부터 제거되기 쉽고, 비특이적 결합이 쉽게 일어난다는 단점이 있다. 이것을 보완하기 위해, 본 연구에서는 Au 표면에 티올 기를 이용한 자발적 공유 결합 형성을 기초로 하여 고체 표면에 DNA의 새로운 고정 방법을 개발하고, 이 고정 DNA를 이용한 분자 생물학적 유용성을 알아보고자 하였다. Au 표면에 DNA을 화학적으로 고정시키기 위해 oligonucleotide의 5' 끝에 티올 기가 연결된 DNA를 사용하였다. Au 표면을 티올화된 DNA로 처리한 후, 티올화된 oligomer와 mercaptohexanol (MCH)의 혼합 단막층을 만들어주기 위해 다시 MCH로 처리하였다. 고정 DNA는 single- stranded DNA와 결합되고, 방사성 동위원소로 표지된 nucleotide의 존재하에 Klenow fragment로 중합되었다. 티올화되지 않은 DNA를 Au 표면과 반응시켰을 때와 티올화된 DNA를 반응시켰을 때를 비교해 보았을 때, 티올화된 DNA가 약 15배 정도 더 Au 표면에 잘 고정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게다가, 이 고정 DNA를 가장 기본적인 분자 생물학적 실험이라고 할 수 있는 제한효소에 의한 절단반응 (digestion)과 ligation에도 적용시켜 보았다. 이때, 제한효소에 의한 절단반응은 약 50% 정도 효과가 있었고, ligation도 고정 DNA에서 완벽히 수행되었다. 결과적으로, 티올 기를 이용하여 Au 표면에 DNA를 고정시키는 것은 원하는 DNA만 선택적으로 고정시키며, 비특이적 흡착이 적다는 면에서 효과적이었다. 앞으로, 이 고정 DNA는 더 많은 분자 생물학적 적용이 가능할 것으로 추정된다. Biotechnology has been hard pressed to develop DNA analytical tools to keep up with the demands of ambitious biomedical goals such as sequencing the human genome, DNA diagnostics, and gene expression monitoring. To be cost-effective, these tools should be as automated as possible and be conducive to massive parallel processing. The technology of this goal is DNA array chip. While DNA array-based technologies hold great promise for rapid and accurate sequence determination and diagnosis of genetic diseases, surprisingly little is known about the surface structures of DNA probes bound on the solid surface. Additionally, DNA immobilized on glass may produce a surface that is prone to nonspecific binding. In this study, we tried to apply and develope a new method of immobilization of DNA on a solid surface. In order to chemically attach DNA on the gold surface, the DNA was functionalized at the 5' end with a thiol group connected to oligonucleotide. Gold thin film was treated with thiolated DNA and the surface was treated again with mercaptohexanol, a short alkanethiol with a terminal hydroxy group, to generate mixed monolayer of the thiolated oligomer and mercaptohexanol. Immobilized DNA was annealed with a single stranded DNA and polymerized with Klenow fragment in the presence of radio-labelled nucleotides. Immobilized DNA served as an effeicient primer for DNA elongation, thus, we could observe that about 15 time more radioactivity in the reaction with immobilized DNA compared to control. We also apply the immobilized DNA to restriction digestion and ligation with other DNA fragment that are basic molecular biological techniques. Both restriction digestion and ligation with other DNA fragment are performed successfully with immobilized DNA. Our data suggest that further molecular biological applications with immobilized DNA will be possible.

      • 유치원에서의 유아 근로정신함양교육에 대한 운영실태 및 교사의 인식

        홍정아 인천대학교 교육대학원 2015 국내석사

        RANK : 1855

        국문초록 유치원에서의 유아 근로정신함양교육에 대한 운영실태 및 교사의 인식 이 연구는 인천지역 국· 공립유치원과 사립유치원 교사 223명을 대상으로 유치원에서의 유아 근로정신함양교육에 대한 운영 실태 및 교사의 인식을 조사 분석함으로써 유치원에서 보다 효율적인 유아 근로정신함양교육을 위한 방향 모색을 목적으로 실시하였다. 연구방법으로는 설문지를 제작 활용하였고, 유치원 교사의 유아 근로정신함양교육에 대한 인식과 함께 근무하는 유치원에서의 교육 실태 및 교사교육과 지원방안에 대하여 교사의 자녀 유·무, 근무지 유형, 경력에 따른 집단 간 차이를 분석하였다. 자료의 분석은 SPSS 18.0을 이용해 통계처리를 실시하였고, 문항별로 빈도수와 백분율을 구하는 빈도분석과 변인별 반응의 차이를 알아보기 위하여 χ2(chi-square)검증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인천지역 국· 공립유치원과 사립유치원 교사들의 유아 근로정신함양교육에 대한 인식과 유치원에서의 교육 실태를 분석한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유치원 교사들은 유아 근로정신함양교육의 필요성을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으며 유아기에는 자아에 대한 이해와 긍정적인 자아개념을 형성해야하기 때문에 유아 근로정신함양교육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유아 근로정신함양교육과 관련하여 관련 연수와 자료의 부족으로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이지는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둘째, 유아 근로정신함양교육의 목표를 살펴보면 일과 직업에 대한 자신의 흥미 인식하기, 다양한 일과 직업에 대해 경험하기, 근로와 직업생활이 개인적 의미와 긍정적 정서 인식하기, 근로와 직업생활에 필요한 능력의 인식과 유능감 갖기 , 근로와 직업생활의 사회적 의미와 협력의 가치 인식하기 , 마지막으로 근로와 직업의 역할 인식하기 순으로 나타났다. 셋째, 유아 근로정신함양교육의 내용이 전체적으로 중요하다고 나타났으며 내용의 중요도는 모든 일이 소중하고, 나와 다른 사람의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존중, 근면, 유능감, 자기조절, 자기도전, 협력, 자기이해 순으로 나타났다. 넷째, 유아교육기관에서의 유아 근로정신함양교육에 대한 연간 계획 없이 생활주제와 관련이 있을 때 실시한다고 하였다. 체계적인 교육계획이 미비한 실정이지만 이야기 나누기나 토의, 관련교육프로그램, 현장학습을 통해 유아 근로정신함양교육을 실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실시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유아 근로정신함양교육에 대한 지식, 교육방법을 잘 알지 못해서라고 답하였다. 이는 유아 근로정신 함양교육에 대한 교사 교육이 시급함을 보여주고 있다. 앞으로 교사 교육을 통해 유아 근로정신함양교육을 위한 연간 교육계획을 수립하고 다양한 내용과 교수-학습 방법을 구안 적용해야 할 것이다. 다섯째, 교사의 유아 근로정신함양교육에 대한 정보습득 방법을 살펴보면 인터넷을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유아 근로정신교육을 위한 다양한 교수자료와 교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유아 근로정신함양교육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연수를 통한 교사교육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이 연구를 통해 유치원 교사들은 유아 근로정신함양교육의 필요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유아들에게 자아에 대한 이해와 긍정적인 자아개념을 형성할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유치원 교육과정 속에 유아 근로정신함양교육을 계획하고 운영하여 효율적이고 체계적으로 유아 근로정신함양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하겠으며, 교사들에게 연수기회와 자료를 보급하여 유아 근로정신함양교육에 대한 인식을 높이도록 해야겠다. 주제어 : 근로정신함양교육, 진로인식, 교사의 역할, 유아, 유치원

      • 조원행 작곡 중주곡 <달 그림자> 분석 연구 : 해금선율을 중심으로

        홍정아 한양대학교 대학원 2015 국내석사

        RANK : 1855

        오늘날 전통음악은 전통 그대로의 모습을 계승하는 한편, 창작활동에 의한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화하며 발전하고 있다. 음악이란 그 시대의 사회, 문화적 현상을 반영하기에 전통음악의 창작활동은 매우 중요하며, 그 방법론에 관하여 연구할 필요가 있다. 본고에서는 조원행 작곡 중주곡 <달 그림자(月影)>의 분석을 통해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전통음악 창작의 한 방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조원행 작곡 중주곡 <달 그림자(月影)>는 단일악장의 곡으로 총 151마디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악곡을 박자와 tempo, 조성의 변화를 기준으로 4개의 단락으로 나누어 분석한 결과를 단락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제 Ⅰ단락은 Intro(도입)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해금 Solo선율로 되어있고, 전체가 tempo rubato로 해금연주자의 다양한 기교와 감정표현력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악곡은 motive의 제시로 시작하며, 주요음과 리듬의 확대로 motive를 발전시킨다. 또한 동형진행리듬과 지속음의 반복, 섬세한 articulation의 사용으로, 정적이고 역동적인 느낌이 반복되며 드라마틱하게 표현된다. 둘째, 제 Ⅱ단락은 제시, 전개, 발달, 절정, 종지의 부분이다. 제 Ⅱ단락의 시작은 가야금 Solo선율의 화성적 요소로 시작하여 제 Ⅰ단락 해금 Solo선율의 선율적 요소와 대비를 이룬다. 각 각의 소단락은 motive를 중심으로 리듬의 확대와 축소, 선율의 진행방향의 변화를 통해 발전한다. 주요리듬으로는 셋잇단음표 리듬이 사용되는데, 전통음악에서 볼 수 있는 2박과 3박이 결합되어 있는 형태를 차용했음을 알 수 있다. 발전된 선율은 가야금의 부피감 있는 화성반주 위에서 절정을 이루고 종지된다. 셋째, 제 Ⅲ단락은 연결구로 제 Ⅱ단락을 정리하고 제 Ⅳ단락을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 제 Ⅱ단락의 정리는 제 Ⅱ단락의 주요음을 통한 하행진행 선율로 이루어지며, F minor에서 C minor로의 조성변화와 주요음을 통한 동형진행리듬으로 제 Ⅳ단락의 조성, 주요음, 주요리듬을 제시한다. 넷째, 제 Ⅳ단락은 제시, 전개, 발전, 절정, 절정의 재현, 종지의 부분이다. 제 Ⅳ단락은 제 Ⅳ단락-1~제 Ⅳ단락-4에서는 뚜렷한 motive의 제시로 각 각의 소단락이 대비를 이루며 전개, 발전된다. 제 Ⅳ단락-5~제 Ⅳ단락-7은 세분화된 리듬, 모방기법, 화성요소로 악곡을 발전시켜 절정을 이루며, 절정부분에서 해금 cadenza는 고조된 분위기 속에 안정적 변화를 한 선율로 내면의 감정이 승화 된 느낌을 표현한다. 이후 악곡은 절정의 재현을 통해 climax를 강조하며 종지한다. 이와 같이 <달 그림자(月影)>는 선율과 화성으로 대비될 수 있는 해금, 가야금을 통해 전통음악적요소와 서양음악적요소가 조화를 이룬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전통음악적요소는 계면조선법, 삼연음 리듬, 산조와 같은 cadenza를 사용했으며, 서양음악적요소는 F minor, C minor의 조성, 자연단음계와 화성단음계의 교차, 화성요소가 사용되었다. 또한 뚜렷한 motive의 제시와 리듬의 세분화, 다양한 모방기법과 새로운 단락이 시작하기 전에 음악적 요소를 미리 암시하는 연결구의 사용은 조원행작곡가의 특징적 작곡기법으로 보여 진다. 본고의 분석을 통해 앞으로 이 곡을 연주할 이들에게 실질적 도움이 되길 바라며, 덧붙여 이 시대의 음악인들이 21세기 창작전통음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연구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길 기대해 본다.

      • 市場平均換率制度下에서의 換率變動 許容幅에 관한 硏究

        홍정아 淑明女子大學校 1995 국내석사

        RANK : 1855

        Korea has performed the market average exchange rate system for four years and six months. as a ex-step to accomodate free floating exchange rate system, the market average exchange rate system has used to experience the free foreign exchange's supply and demand. Band to prevent exchange rate volitality broadens from 0.4% per 0.2% to 1.5% in November 1994. This paper examines the mean and variance to learn whether the exchange rate would move stable as time passes. The main points of the research are as follows ; First, 1% band moves more stable than any other band for the small standard deviation. Also exchange rate exists within 0.3% band and exchange rate beyond 0.3% band exists exceptionally. ◁표 삽입▷ (원문을 참조하세요) Second, monday is expected to have heavy transaction but monday effect shows in volume and not in exchange rate. This preves that exchange rate moves by intrinsic limits. ◁표 삽입▷ (원문을 참조하세요) Third, it is estimated that exchange rate rises in mid month and exchange rate falls in tate month. But exchange rate in early month rises, and it indicates the exchange rate change precedes. ◁표 삽입▷ (원문을 참조하세요) Fourth, in the aspect of exchange rate and volume's stability, variance decreased slowly as time passes. Also the variance in both appreciation and depreciatien decreased slowly. ◁표 삽입▷ (원문을 참조하세요) Two reasons to bring about above result are as follows. If ekchange rate gets to the bounderies of band, people take action previous forecasts and responds. And banks dealing in interbank transaction does not want depreclation. Conclusionally, fluctuations in exchange rate and volume does not increase and specially 1% band moves more safely as band broads. This represents the more wide band does not bring about exchange rate's instability. And exchange rate that moves within 0.3% band hints government's intervention. Hence if a market average exchange rate system as ex-step to accomodate free floating exchange rate system is acomplished, government will adopt the more wide band. And we will cope with the financial freedom propery in the future.

      • 東晉南朝時代 長江中流域 硏究

        홍정아 서울대학교 대학원 2012 국내박사

        RANK : 1855

        长江中游區域('荆州')并不总是用来接收注意力的地区,不过到了南北的"大分裂期",特别東晉南朝時期它发挥自己的力量以引起与建康政权相抗衡的局面。“荊揚之爭"是指東晉南朝時期中央與地方的對立,而研究"荊揚之爭"是硏究東晉南朝政治史當中極其重要的主題之一。本篇論文以"荊州"爲主考察什么是"荊州"力量之源, 还有什么因素造成它的限制等問題來硏究长江中游區域,要导出它的分裂因素及其一体化的努力情况。 首先,笔者在本篇論文上探讨了长江中流域的行政区域的变化,证明了刘宋以来‘分荊’政策实际上不是完全的‘弱荊’方案。虽然刘宋以来行政区分割上体现了一些建康政权的政治意图,但是在较低的行政单位郡-縣的变化来讲,有所不同。郡-縣級分区不仅被影响有关州的变化,而且也考虑该地区内的地形变化、该地区的稳定度、区域发展潜力等等。从不同的角度观看,各级守令(刺史, 太守, 縣令)的数量显著增加,特别州府官职数增加会引起该地区的士族出仕机会扩大的结果。另外,依地域民的立场来看,由‘分荊’政策会分离土著民,流民,蛮民等各民族以增进地域稳定性和行政上的便利,幷且减小他们之间冲突而改善生活条件。长江中流域在当时建康政权的國家防衛方面是一定要掌握的重要战略要地,所以建康政权也不能完全放弃大范围的"荆州"。如果发生意外的事,建康政权就实行了再統合荆州的方案而已。 第二,为了探讨荆州经济开发的特点或者限界,本篇文章以江陵为主,考察江陵的地理环境对经济开发的影响及其限制因素,同时研究经过怎样过程江陵又恢复荆州的统治中心地位的问题。 后汉末政局迅速走向动乱,而且荆州的水系也发生不少的变化,江陵终归失去了域内中心的地位。加之自然灾害对江陵本地经济及其人民生活影响也引人瞩目的。可是大分裂时期来临,荆州也需要治理长江水路网。这时候,江陵的地理位置还是比较有利的,所以通过兩晉时期的治水活动,江陵终于恢复了汉水和长江水系上的中心城市的地位。从东晋中期以后江陵一直保持长江中游的中心地位。 江陵虽然是个荆州的主要生产基地之一,但是更重要的是它以方便的交通为基础,成为货物流通的中心。即在荆州经济方面来说,江陵是有利于商业发展的大城市。人众的江陵必须要从背后地供应粮食。据江陵地区的战争过程来分析,背后地中最重要的路线是江陵-巴陵(湘州)之间。但是,四通发达的交通路一面是使江陵成为统治中心的优点,一面在争夺中难以防守的弱点。所以,江陵周边一被陷落,城内的民情就骚动起来,这来由江陵和背后地隔绝的深忧。换句话说,粮食及其他物资供应问题与江陵人民的向背的关系非常密切。 建康政权来讲,或者长江中游域统治者来说,在与华北政权相持的状况下,是弥补江陵的缺陷的措置所必需的。他们共同认识到这片地区需要维持‘区域综合性’的政治体,其结果东晋南朝时期长江中游域的统治者一定是个大都督(大部分兼荆州刺史的职),在长江中游域不得不设置大区域‘荆州’。并且,其统治中心应当是大区域‘荆州’的通都大邑,就是江陵。 如此,从激活全体区域网的方向发展起来的江陵开发比较适合当地状况和自然地理环境。但是,政治斗争频仍,江陵常常露出失去背后生产地的限制,这会变成‘荆州’全体的限制。‘荆州’的水路网通畅,江陵能保持安静的时候,‘荆州’才能施其所长,十分发挥自己的力量。 第三,“荊州"不仅是由來已久的交通要塞,而且是流民南下的重要途經。由于人口流動性大,定居率低的狀況下,各地域統治者們(包括都督ㆍ刺史)尽量滿足各民族的不同要求,而施以仁政以努力稳定地域民。但是,长江中游地域民上上下下都有擧行暴動的很大可能性。他们的共同点只是大部分排除来自建康政权,所以都有渴望成功的心理而已。不过,他们面对问题的方式各不相同。按照‘侨旧体制论’的分析,東晉南朝时期的历史由那些脱离故乡人,即'侨民'主导的,并且侨旧之间相互交流和接触建立了隋唐帝国。本篇论文经过有些分析,具体证明移住民['侨']和土著民['旧']的关系和状况。从兩晉交替期而来,流入该地区的‘侨民’分明是个外地人,但是他们在特定地方土着而‘世居’,变成了‘旧民’。在东晋王朝体制下,他们与中央派遣的北來侨民士族联合以发挥自己的力量。东晋末以后流入该地区的‘晩渡士族’虽然是关中、洛陽的高門,在该地区与流民一样没有地域基盘,不得不刻苦的努力。在南朝时期长江中流域,移住民和土著民之间一直发生冲突。甚至‘侨旧’之外还存在一些蛮。虽然他们是长江中流域的原住民,但没被吸收在政治体制的外人。他们开始与汉人融合进入政治体制,被看成流民、‘侨’一样。总之,在长江中流域‘侨’和‘旧’的区别不那么简单,只能理解按照变成本地成员的順序来区别而已。 在東晋南朝时期,因为军事地理的特殊性,在长江中流域的社会流动性比其他地区更大。要生存的‘侨’又是些地域发展的动力,而对该地区的地域統治者又是力量的源泉。另一方面,长江中流域是多层矛盾的聚集场所,总是出现‘侨旧’的葛藤。从失败的反乱,我们容易看出这一点。这才是'荆州'的限制。如果有人把‘侨旧’的葛藤可以缝合在一起,比如萧衍一样以能利用长江中流域的力量,能打败建康政权。 第四, 蛮的实体是什么,他们在长江中流域倒底有什么意义呢? 一般来说,他们是对比汉人的少数民族。不过,本篇文章里指出他们是没被吸收在東晉南朝政治体制的外人。探讨蛮的分流和系统,笔者发现他们名义上只有明显的地域区别,而没有明确的系统区别。这现象的原因,第一是蛮的互相混在可能性非常大,第二是因为蛮-汉融合的可能性也大,所以血缘上不太容易区别汉族和非汉族。 在长江中流域,对蛮政策比蛮-汉区别更重要。地域統治者有时取对蛮讨伐方针,有时对他们招抚,反正总是需要武力,即强力的统制力。東晉南朝时期州和校尉府担任对蛮管理。蛮族往往移动北朝和南朝之间,要保存蛮族集团以得到自己的生存权。在长江中流域,蛮是个社会不安的因素,同时是个可利用的劳动力。地域統治者可以随时伐蛮,其结果他们会获得出仕的基础,也会有机会打实战。在长江中流域一些'侨民'变成'旧民'的过程进行后,蛮也受了汉人的影响以'出山'。蛮民实际上与流民一样没有什么基盘,为了生活他们有时擧行暴动,成为阻碍长江中流域一体化的因素。地域統治者們一定需要採取适当稳定的政策,安服他们,利用他门的劳动力。 第五,在这种情况下,对荆楚地域文化的关注和让它发展下去的努力出现了。‘荊楚’是个与后汉末荊州的范围大概一致的文化圈的意义。在那儿我们可以看到一些地域性风俗-‘競渡’和‘牽钩之戏’等,它们都称为由来楚文化,强调自己的地域性。但是,这时期荆楚地域文化风俗习惯实际上是些‘侨’-‘旧’文化融合的结果物。 “荊州”的都督ㆍ刺史与其座僚(即地域士族)共同努力荆楚地域文化的发展,为了统合地域民心,而提高自己的門地以进出中央政界。所以,虽然他们基本上都是‘侨’,终于不能放弃‘楚’的名义。荆楚地域文化会强化‘荊楚人’意识,并且继续保存文化的统一性,虽然实行“分荆”政策,长江中流域维持廣義上‘荊州’。 总之,‘侨’-‘旧’之间发生融合的时候,使他们自己的地域勢力不斷擴大,形成與建康政權相抗衡的勢力。但是,他们之间一旦发生矛盾,就失去自己的力量挫折。到了隋唐统一帝国时期,‘侨’-‘旧’的区别没了历史的意义,并且长江中流域也失去了令人注目的重要性。在“荊州"出现的这种现象,只在南北分裂时期反复出现。 東晉南朝時代 長江中流域 硏究 長江中流域은 어느 시대에나 늘 주목을 받아왔던 지역은 아니었다. 이 지역이 정치적으로 의미있게 등장했던 것은 늘 분열의 시대가 도래했을 때였다. 특히 東晉南朝時代 荊州刺史는 ‘分陝’의 칭호와 함께 建康 조정에 맞설 수 있을만큼 그 역량을 발휘하였고, 長江中流域의 중요성은 더욱 증가하였다. 그 힘의 근원은 무엇이었을까? 또한, 그 내부적인 한계는 없었던가? 필자는 이와 같은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長江中流域에 존재했던 분열적 요소와 그들 간의 통합 노력을 모두 다섯 章에 걸쳐 살펴보았다. 우선 東晉南朝시대 長江中流域의 행정구역에 대해 살펴보고, 과연 ‘分荊’정책이 곧 성공적인 ‘弱荊’이었던가에 대해 탐구해보았다. 그간 荊州의 분할은 실질적으로 荊州刺史의 힘을 크게 약화시켰다고 평가되어 왔다. 東晉代 너무 강해진 荊州의 힘을 분할하기 위해서 劉宋 이래 행정구역의 분할이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실제 州의 분할에는 建康 정권의 의도가 상당히 반영되었다. ‘分荊’정책 시행 이후, 長江中流域을 기반으로 일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기반이 되는 하나의 州만으로는 어려워 반드시 인근 다른 州刺史를 포섭해야했다는 점에서 東晉代와는 차이가 생겼다. 그러나, 荊州 분할정책이 취해지면서도 荊州刺史가 여전히 몇 주의 都督을 겸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고, 유사시에는 荊州로부터 분리되어나간 지역들을 재통합시키는 조치가 행해지기도 했다. 즉, 建康 정권으로서도 軍事 重鎭으로서 長江中流域의 힘을 완전히 와해시킬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 힘을 견제하면서도 또 유지하려고 하는 모순적인 상황이 반복되었다. 또한, 州의 분할에는 중앙-지방 간 갈등 구조 해소라는 정치적 목적이 강하게 반영되었다고 해도, 그 하부 행정단위로서 郡ㆍ縣급 행정구역의 분할 및 廢置는 단순히 建康 정권의 의도에 맞추어 행해진 것이 아니었다. 郡縣급 행정구역 변화에는 州의 분할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 밖에도 전란과 남북 간의 군사적 갈등, 流民의 발생과 그들의 정착 문제, 蠻에 대한 대책, 지역 내 지형의 변화 등이 영향을 주고 있었다. 아울러, 행정의 편의성과 함께 해당 지역의 안정성과 개발 가능성도 고려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荊州 분할에 대해 당시 長江中流域 지방관 및 지역민들의 반대를 찾아보긴 힘들다. 비록 각 刺史 이하 지방관들은 자신이 관할해야하는 지역범위가 협소해졌지만, 분할 조치가 행해질 당시 정황상 반발의 여지가 없었다. 또한, 지역 역량의 기반이 되는 인구는 계속 증가하는 상태였으므로 오히려 관할 지역 개발에 나설 수 있는 기반이 잘 갖추어진 셈이었다. 더구나, 행정구역의 분할로 인해 長江中流域 내 刺史, 太守, 縣令 등 직임의 숫자가 전대에 비해 전체적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州刺史를 정점으로 한 州府 계통의 관직수가 늘어남에 따라, 주로 州府에 진출하였던 長江中流域 士族에게는 출사 기회가 확대될 수 있었다. 또한, 서로 다른 계통의 사람들을 조금 더 작은 행정단위로 분리시킴에 따라서 지역 내 분열적 요소들이 마찰하며 발생할 수 있는 갈등의 소지가 줄어들었으며, 그 결과 지역 내 안정성은 증진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長江中流域의 행정구역 분할은 建康정권의 입장에서 荊州를 축소, 견제하기 위한 의도로 행해졌고 郢州의 예에서 보듯 어느 정도 영향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長江中流域의 지역인들 입장에서도 자신들의 출사로가 확대되고 지역의 개발에도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는 방책이었다. 그렇다면, 長江中流域 전체의 내핵이 되는 지점은 어디였을까? 長江中流域에는 복잡한 물길들이 존재하였으며, 그 중심에 위치한 곳이 바로 江陵이었다. 江陵은 後漢末 정치적 상황과 水系의 변화 속에 일시적으로 지역 중심으로서의 위상을 잃었고 자연재해 역시 적지 않았지만, 地域 내 水路 네트워크의 필요성이 높아졌을 때 여전히 상대적으로 가장 유리한 조건 하에 있었다. 兩晉代에 걸친 治水 사업을 통하여 江陵은 漢水와 長江 水系에서의 중심 도시로서의 위치를 다시금 회복할 수 있었다. 다만, 江陵은 ‘荊州’ 내 주요 생산지로서보다는 편리한 교통을 기반으로 한 물류중심으로서의 의미가 더 컸다. 그 곳은 대규모 유동인구를 수용할 수 있는 항구가 있었고, 배를 갈아타야하는 지점이기도 했으므로 상업 발달에 유리하였다. 비교적 인구가 많았던 江陵은 糧食 공급의 안정적인 배후지가 필요했는데, 가장 두드러진 루트가 江陵-巴陵 선이었다. 비록 江陵 자체의 방어능력이 특별히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홀로 버티기 어려운 경제적 한계로 인해 물길을 통한 배후지로부터의 물자의 공급이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사통팔달의 교통로는 江陵이 지역 중심지로 성장할 수 있게 된 강점임과 동시에, 이 지역에서 쟁탈이 일어날 때는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도 있었다. 江陵이 직접 공격을 받을 경우보다 오히려 그 주변이 함락되었을 때, 江陵의 민심은 바로 동요했다. 그 직접적인 원인은 江陵과 그 경제적 배후지가 단절될 것에 대한 우려, 江陵지역의 식량 및 물자의 공급 문제에 대한 걱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建康정권으로서나 長江中流域의 지역책임자의 입장에서는 南北 간의 군사대치 상황에서 이와 같은 江陵의 약점을 보완하여 長江中流域 전체가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할 조치가 필요하였다. 따라서, 경제적인 면에서도 지역종합성을 완성시킬 정치체의 필요성이 높아졌고, 東晉南朝時代 이 지역의 책임자는 늘 荊州刺史를 겸하거나 거느린 都督이 되었으며, 대지역으로 ‘荊州’를 규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지역 전체의 네트워크를 활성화시키는 방향으로 이루어진 江陵의 개발은 그 자연 지리적 환경에 적합한 것이었다. 비록 정치적 혼란기에는 배후지가 확보되지 않는 한계를 노출하였으나, 江陵이 배후지를 확보하여 안정되고 지역 내 水路 네트워크가 원활하게 움직일 때, 江陵을 축으로 한 長江中流域 전체는 朝廷과 대립할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역량을 갖출 수 있었다. 兩晉交替期 이후 長江中流域에서는 ‘流民’, ‘舊民’, ‘蠻’ 등이 어우러져 새로운 ‘荊州地域民’을 이루어가기 시작했으나, 이들 간의 갈등과 통합노력은 東晉왕조 100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중요 현안으로 남아있었다. 東晉南朝史를 새로운 시각에서 통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제시된 바 있는 ‘僑舊體制論’에서는, 고향을 벗어난 이주민들의 독특한 성격과 활동 양태가 존재함을 지적하고, 또한 ‘僑民’과 ‘舊民’의 갈등과 융합으로 이 시대가 특징지워지며 그 와중에 나타난 민족과 문화 변용이 隋唐통일기로 이어진다고 지적한 바 있다. 東晉南朝史에서 ‘僑’와 ‘舊’의 구분은 대체로 北來士族과 吳姓士族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지만, 建康 방면과는 달리 長江中流域에서는 ‘僑’와 ‘舊’를 간단히 구분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문자적으로 ‘舊民’은 토착민을 가리킬 터이지만 長江中流域에서는 잦은 전란과 인구의 이동으로 인해 東晉 이전의 豪族 집단이 거의 와해되어 버렸다. 그 때문에 兩晉交替期에 비교적 빨리 이 지역으로 유입된 ‘僑民’이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들은 분명 外地에서 유입된 流民이었지만, 한 세대 이상 특정 지역에 정착을 하면서 土着하고 ‘世居’하면서 ‘舊民’이 되어 버렸다. 이들이 중앙조정에서 지방관으로 파견된 또다른 北來僑民士族 집단과 연합하여 東晉王朝 체제 하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東晉의 체제가 어느 정도 정착된 이후 晉-宋交替期 長江中流域에 유입된 이른바 ‘晩渡士族’은, 비록 關中, 洛陽 지역에서 이주해와서 스스로 高門으로서의 인식이 강했던 이들조차 별 기반없는 이주민의 입장에서 새로이 지역기반을 마련하거나 출세를 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할 수밖에 없었다. 요컨대, 長江中流域에서 ‘僑’와 ‘舊’는, 이 지역의 체계 내로 들어와서 구성원이 된 先後의 차이를 표시하는 상대적인 개념으로 이해해야할 듯하다. 長江中流域의 사람들은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이건, 토착한 이들이건 계층적으로 上ㆍ下로 구분이 되건 간에 모두 仕路에서 중앙정계로부터 견제되거나 배제되었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한계를 지녔다. 그 때문에 長江中流域 지역민은 출세 지향이라는 공통의 바람을 가질 수도 있었지만, 그 문제를 풀어나가는 방식은 각자의 입장에 따라 서로 달랐다. 長江中流域 지역민은 토착민과 이주민이 단순하게 분류되지 않는 만큼 그 내부적으로도 다양한 요구와 일치되지 않는 움직임이 있었다. 荊州刺史 劉義宣의 반란과정과 반란에 참여한 사람들의 면면을 통해 ‘僑’와 ‘舊’의 정치적 선택의 차이를 볼 수 있다. 지역적 기반이 미약한 ‘僑’의 입장에서는 반란을 통한 빠른 출세를 지향하였다. 東晉시기를 거치면서 이미 長江中流域의 정치 체제는 완비되었지만, 長江中流域은 군사지리적 특수성과 지형적 특성 등으로 인해 東晉南朝時代 다른 지역에 비해 계속 사회유동성이 컸다. 특히, 이미 고착되어버린 建康의 문벌사회구조보다 상대적으로 기회가 열린 땅이었다. 출세를 모색하다 여의치 않거나, 혹은 중앙 정계와 대립할 만한 출신과 능력을 지닌 지도자를 만나거나, 중앙 조정에서 자신들을 압박하는 행위가 나타나거나 하는 어떤 특수한 상황이 벌어지면, 長江中流域 지역민의 ‘僑’들은 쉽게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여지를 가지고 있었다. 반면, 원래 ‘僑’였지만 舊民化한 ‘舊’의 입장이 되면 보다 안정적인 출사로를 선택하는 경향이 있었다. 중층적인 모순의 집결지로서 長江中流域에는 늘 ‘僑’와 ‘舊’의 갈등이 수반되었고, 그들의 가진 다양성으로 말미암아 개개인과 집단별로 쉽게 합치될 수 없는 정치적 선택의 차이가 드러났다. 하지만, 자기 기반을 닦아 생존하고자 하는 ‘僑’의 움직임은 長江中流域에서 지역 발전의 동력으로, 혹은 해당지역 최고 정치권력자의 힘으로 작용할 수도 있었다. 덕망과 능력을 지니고 지역민의 공통적인 인정과 지지를 받는 지도자가 등장한다면, 그가 설령 長江中流域 출신 인사가 아니더라도 그를 정점으로 長江中流域 전체가 강한 통합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가령, 雍州刺史 蕭衍은 ‘僑’와 ‘舊’, ‘荊’과 ‘雍’을 하나로 묶음으로써 東昏侯에 맞서고 훗날 梁을 건국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즉, 長江中流域 ‘僑舊’가 화합하고 협력한다면 建康 조정을 압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僑民’, ‘僑寓’는 이주민, ‘舊民’은 원래 이 지역의 체제 안에서 살고 있던 주민이라고 하고 그들을 합쳐 ‘僑舊’라고 칭한다면, 長江中流域에는 그 범주에 속하지 못한 蠻이 존재했다. ‘蠻’은 漢族과 대비되는 이민족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東晉南朝라는 漢人 정치체제 밖에 존재한 타인들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적당하다. 蠻에 대한 종족적인 구분이 아예 없거나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기존 사료에서는 그보다 보편적으로 지역적인 구분과 그에 따른 命名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 이유는 첫째, 蠻의 종류가 번다하고, 거주한 지역이 넓어 그들 상호간의 혼재 가능성이 높다는 것과, 둘째, 蠻-漢의 융합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아 이들을 혈통적으로 漢族과 非漢族으로 구분하기 불가능했던 까닭이었다. ‘蠻’이라는 호칭은 南方 소수민족에 대한 범칭으로도 사용되었는데, 그 까닭은 ‘南蠻’에 대한 초기의 認識이 ‘野蠻’이었기 때문이었다. 즉, 蠻은 漢族에 비해 落後된 존재로 평가되었으며, ‘蠻’의 개념은 처음부터 종족적인 구분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漢族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급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관점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長江中流域에서의 對蠻정책은, 蠻族에 대한 討伐과 그들에 대한 招撫로 나타났다. 州 밑에 두어진 左郡, 左縣 및 ‘蠻府’(각 校尉府)가 蠻에 대한 통제와 관리의 책임을 맡았다. 東晉南朝의 州와 校尉府는 蠻에 대한 억압ㆍ강경책과 초무ㆍ유화정책을 동시에 사용하였지만, 招撫와 懷柔정책에도 반드시 武力 기반, 즉 蠻에 대한 강력한 통제력이 갖추어져야 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蠻族의 北朝로의 移動은 南朝에서 행해진 차별대우와 지나친 收奪과 같은 對蠻對策에 대한 반발과 함께, 北朝의 蠻에 대한 유도, 높은 처우에 대한 약속 등으로 촉발되었다. 반대로, 그들의 南朝로의 재이동은 南朝의 유도책과 北朝에서 시작된 蠻 집단에 대한 억압이 원인이 되었다. 다시 말하면, 蠻의 南北으로의 이동은 南北朝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고려를 통해 자신들에 대해 강압적인 정책을 가지고 있는 쪽의 반대방향으로 이주해갔던 것이다. 이러한 蠻의 이동의 내부에는 蠻族의 무리를 보존함으로써 자신의 권리를 인정받으려는 蠻酋의 개인적인 목적이 반영되어 있었다고 생각한다. 長江中流域 蠻은 지역민의 통합을 방해하는 내재적 요소였으며, 도로를 단절시키고 도적이 되어서 사회 불안을 조성할 위험을 가졌기 때문에 지역 관료의 입장에서 보면 통제하고 다스려야하는 대상이었다. 반면, 蠻은 다방면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長江中流域 지역 관료 혹은 지역민들은 수시로 행할 수 있었던 伐蠻을 통해 蠻들을 노동력으로 삼거나 경제적으로 이용할 수 있었으며, 武將으로서 출세의 발판을 마련하기도 하고, 자신들이 지닌 군사력을 實戰에서 시험해볼 수도 있었으며, 심지어 그들에 대한 討伐을 명목으로 내세우며 군사력을 키울 수도 있었다. 이와 같은 蠻은 ‘僑舊體制’라는 큰 틀에서 어떤 존재로 파악되어야할 것인가? 蠻은 長江中流域에 원래 살고 있던 이들이기에 토착민, 舊民으로 볼 수도 있으나, 실제 ‘蠻’, ‘蠻夷’, ‘oo蠻’의 용어와 ‘蠻民’, ‘蠻戶’를 구분해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 前者는 漢族이 중심이 된 지역 정치체제 內에 속하지 않은 異族으로서 그냥 해당지역의 원주민에 불과했다. 그들은 해당 지역의 체제를 이끌어가거거나 세력 기반을 갖추고 있거나 혹은 그 사회를 구성하는 중심요소로서의 ‘舊民’은 아니었다. 後者인 ‘蠻民’, ‘蠻戶’ 등은 ‘出山’과 ‘伐蠻’을 통해서 漢人의 정치 체제 내로 흡수된 이들을 주로 가리킨다. 그러나, 이들은 長江中流域에 이미 일련의 ‘僑民’이 舊民化하여 정착한 이후에 漢人들의 정치 체제로 흡수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流民과 같은 입장에 있었다. 즉, 蠻은 기존 정치 체제 내 흡수되지 못한 외부인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들이 일단 長江中流域의 체제 내로 흡수될 때에는 사실상 流民과 같은 존재로서 이주민, ‘僑’의 입장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들 역시 流民과 마찬가지로 생존을 위한 투쟁과 노력이 필요했으며, 長江中流域에서 사회적 안정과 정치적 통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들에 대한 적극적인 대책이 반드시 요구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荊楚지역문화에 대한 관심과 이를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이 나타났다. 행정구역의 명칭으로서의 荊州는 東晉南朝時代 지속적인 지역적 범위의 축소가 있었음을 언급했지만, 이에 비하여 ‘荊楚’라는 용어는 後漢末 행정구역으로서의 荊州 범위와 대체로 일치하며, 더 나아가 문화와 습속, 지역의식을 공유하는 동일문화권의 의미로서 빈번히 사용되었다. 특히, 이를 통해 ‘吳’로 대표되는 揚州와 구분할 수도 있었다. 荊楚지역의 풍습은 대체적으로는 揚州와 같았다고는 하나, ‘競渡’와 ‘牽鈎之戲’ 등의 고유한 요소들이 존재하였다. 이러한 풍습들은 실제 楚로부터 유래했든, 혹은 楚문화라고 칭해지든 간에 대부분 楚와의 연계성을 강조하며 지역민 누구든 쉽게 볼 수 있는 페스티벌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를 통해 長江中流域 지역민은 ‘荊楚人’으로서의 의식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 長江中流域에 널리 퍼져있던 流民과 蠻의 존재는, 새로운 문화요소가 이 지역에 다양하게 유입되었음을 의미했다. 『荊楚歲時記』 등에 기록된 ‘南人’, ‘北人’의 차별화된 풍습들은, 남쪽에서는 토착인과 流民, 蠻의 영향이 뒤섞이며 발전한 강남문화, 북쪽에서는 화북지역에서 五胡를 비롯한 이민족문화와 결합하여 변화한 화북문화로 보아야할 것이다. 荊楚지역의 문화풍습이란 종래 토착민과 새로운 이주민의 문화가 혼합된 결과물이었다. 東晉南朝時代 변용되었으나, 기본적으로 楚문화를 표방하며 지역문화를 계승, 발전시킨 주체는 出鎭한 지방책임자 및 각급 지방관이었다. 여기에 지역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지방민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地域 門閥 士族들이 협력을 하는 방식으로 지역문화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이 지역은 민심이 쉽게 이반하여 소요를 일으키기 쉽고, 언제든 전쟁이 일어날 수 있어 武를 강조하는 곳이었으므로, 荊楚 지방책임자들은 해당지역의 풍습을 상당히 용인하는 방식으로 지역 안정을 꾀하고 통치 능력을 발휘해야 했다. 또한, 地域 門閥 士族 입장에서는, 門地와 지역성이 강조되는 시대분위기 속에 자기 지역의식을 강화하는 것이 자신들의 명성을 제고하고 나아가 중앙정계로의 진출로를 마련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그들에게는 자신들이 주도하고 있는 지역사회의 인물과 문화습속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이 생겨났다. 이들이 楚문화의 전통을 고수, 혹은 표방했던 것은 지역적 동질감의 문제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겠지만, 더 나아가 당시 상황에서 吳지역(建康정부)의 정치권력이 楚지역(荊楚권역)을 압도한 상황에서 楚지역에 자리잡은 이들로서, 과거 楚가 吳를 통일했음을 강조하고 스스로가 楚문화의 후계자임을 자임하면서 자기들이 그들보다 우월한 면이 있음을 암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지역에 부임한 정치적 야심을 지닌 지방관과 실질적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門閥家門들이 설령 모두 ‘僑’의 입장에 있었더라도,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을 수호하고자 하면서 끝내 ‘楚’라는 이름을 포기할 수 없었던 공통의 원인이었을 것이다. 각급 지방관과 지역의 문벌사족들은 문화풍습을 통해서 서로 다른 내원을 지닌 다양한 사람들에게도 지역 공동체로서의 의식, ‘荊楚人’ 의식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이와 같은 방식으로 문화적 동일성이 지속적으로 보장되었으므로, 행정구역의 분리나 내부 각 重鎭들끼리의 대립구도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長江中流域은 ‘荊楚’文化圈이라는 이름으로 廣義의 ‘荊州’로서 통합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荊楚’文化는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결과적으로 유사시 長江中流域의 응집력을 높이고 역량을 집결시킬 수 있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西魏의 공격으로 梁이 멸망한 뒤에 長江中流域은 더 이상 南朝에 속한 영토가 아니었다. 하지만 분열의 시대가 아직 종결되지 않았기에 長江中流域 역시 완전히 그 의미를 상실하지는 않았다. 隋唐統一期에 들어선 뒤에야 長江中流域은 분열기에 가졌던 지역 전체로서의 중요성을 상실하였던 것이다. 南北분열기에 長江中流域이 의미를 가질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으로는 南北 간의 分界 중 한 부분을 담당하였으며, 首都가 위치한 지역의 상류를 점했던 군사지리적 위치를 꼽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 지역을 발전시키고 만들어간 ‘僑’와 ‘舊’의 존재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된다. 이주민[‘僑’]과 토착민[‘舊’]이 동일한 권력 구조 하에서 구심점을 가지고 잘 융합되었을 때, 長江中流域 지역민은 興起할 수 있었지만, 그들이 갈등을 빚는 순간 한계에 부딪쳐 挫折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僑’와 ‘舊’의 존재는 隋唐통일기에 들어서면서 자연히 하나로 섞여들어 의미와 구분이 무의미해졌다. 통일정권 하에서 갈등이 봉합되고 마무리되자 長江中流域은 자연히 생동하는 이주민의 에너지를 잃어버렸고 전체 속의 일부로서 특별한 의미를 가지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렇듯 長江中流域은 南北 ‘분열의 시대’를 맞이해서야만 중국 대륙의 南北과 東西를 연결하는 십자형 교통의 요지로서, 혹은 강남에 정착한 정권의 군사적 방어벽으로서, 혹은 삶의 기회를 찾아 헤매이던 사람들을 흡수하여 발전하는 기회의 땅으로서 의미를 가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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