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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스트로겐 수용체 양성 유방암 세포에서 Silibinin의 p53 발현과 자외선 세포독성에 대한 효과

        이미숙 전북대학교 대학원 2009 국내석사

        RANK : 247647

        Silibinin은 엉겅퀴(milk thistle)에서 추출한 플라보노리그난(flavonolignan)으로 기존의 여러 보고에 의하면 동물 실험에서 전립선과 피부암을 비롯한 다양한 악성 종양의 화학 예방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에스트로겐 수용체 양성인 유방암 세포주(MCF-7 cell line)에서 silibinin의 효과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Silibinin은 그 양과 노출 시간에 비례하여 에스트로겐 수용체 양성 유방암 세포의 활성도를 감소시켰다. Silibinin은 종양 억제 인자인 p53의 발현을 증가시켰으며, 유방암 세포의 세포 자멸사를 유도함을 PARP 분열로 확인하였다. 또한 자외선에 의한 유방암 세포의 세포독성 유도가 silibinin에 의하여 상승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결과는 에스트로겐 수용체 양성 유방암 환자의 치료에 silibinin이 이용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제시한다.

      •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5번 작품 24 <봄>에 대한 연구

        이미숙 청주대학교 2017 국내석사

        RANK : 247647

        Haydn, Mozart and Beethoven are considered the greatest composers of the Classical period. Especially, Beethoven is refered to be the link between the Classical and Romantic eras. He reflected well his own thoughts on his music and tried to compose as creatively and freely as he could, breaking away existed social conditions. This is one of the great accomplishments which he made. L.V. Beethoven wrote a wide range of works like Concerto, Cello Sonata, String Quartet, Missa, Aria, Opera <Fidelio>etc. Though he also composed 10 pieces of violin sonata, No.9 <Kreutzer> and No.5 <Spring> are famous for his best peices among them. The trend of his works can be devided into three parts according to his composing styles and life time. No.5 Op. 24 <Spring> was composed in the first part of them. Unlike earlier established sonata format, it is four-movement sonata format by adding the new Scherzo format, which make it more unique and seem to be more romantic. This work is often called <Spring>because it gives us feeling of delight and brightness. The opening movement starts with 2 different themes and by doing so, it makes a mood of brightness and elegance. The second movement has ternary form. It is lyrical and graceful with feeling of the latter romantic. The third movement is Scherzo with short compound ternary form. It is cheeful and make a sense of humor. The fourth movement is also rondo but it is a transitional rondo form. The piano starts first with being followed by the violin and the accompaniment is more variable each time than other movements. So it creats more exciting. This paper is explaining the objective of my study and the research on the life of L. V. Beethoven with the characteristics of his music. I also made an effort to understand his inmost thoughts through analyzing structures and patterns of each movement. So, the main objective of this paper is to help other performers better understand and play his work.

      • 『源氏物語』の硏究

        이미숙 東北大學大學院 2003 해외박사

        RANK : 247647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의 연구 이미숙 본 논문은 『겐지모노가타리』에 있어서의 「여성들의 이야기(女物語)」에 주목해 그 표현과 방법을 고찰함으로써, 『겐지모노가타리』의 내실과 주제를 보다 더 명확히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논문이다. 『겐지모노가타리』는 히카루겐지(光源氏)를 중심으로 한 정편 41첩, 카오루(薰)를 중심으로 한 속편 13첩, 2부로 구성된 작품인데, 이 모노가타리가 여성 작자에 의해 쓰여진 여성을 주 독자로 하고 있는 작품이라는 데 중점을 두었을 때, 여성 등장인물을 남성의 연애 상대로만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여성쪽에 중점을 두어, 남녀의 사랑 이야기에 초점을 맞춰 작품의 내실을 파악하려는 입장은 작품 전체의 주제를 고찰하는 데 있어서 유효한 방법의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본 논문은 『겐지모노가타리』의 연구분야 중에서 주제론에 해당한다고 생각되지만, 기존 연구에서 많이 지적되고 있는 구성에 따른 변동하는 주제가 아니라, 작품 전체에 일관하는 주제가 작품에 어떻게 형상화되어 있는지를 구체적인 「여성들의 이야기」를 고찰함으로써 검토해본 것이다. 그리고 본 논문에서 지칭하고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라는 것은, 히카루겐지와 카오루를 비롯한 남성과 연애관계에 있는 온나기미(女君), 온나미야(女宮) 들의 이야기를 가리킨다. 온나기미, 온나미야라는 호칭 자체가 그녀들의 신분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겐지모노가타리』에 있어서 「여성들의 이야기」는, 그 시대성, 사회성에 규정된 공통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음과 동시에 그녀들이 제각각 놓인 처지, 즉 존재기반의 차이에 따라 구체적인 사랑 이야기의 내실은 서로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작품 속에서 「여성들의 이야기」란, 하나의 독립된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남성과의 관계 속에서 『겐지모노가타리』에 등장하는 여성 쪽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살펴볼 수 있는, 그 여성과 관계있는 이야기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제1부의 정편에 있어서의 「여성들의 이야기」에서는, 『겐지모노가타리』정편의 여주인공으로서 히카루겐지의 일생의 반려자인 무라사키노우에(紫の上)에 중점을 두어, 『겐지모노가타리』 정편의 구조와 이 작품의 참된 공간, 후지쯔보(藤壺)를 매개로 하면서 전개돼가는 두 사람의 관계와 그 내실, 그리고 무라사키노우에의 부인로서의 지위, 두 사람이 만년에 도달한 심경 등에 관해 3장에 걸쳐 고찰해보았다. 그리고 히카루겐지가 「아마요노시나사다메(雨夜の品定)」에 자극받아 전개되는 우쯔세미(空禪) 모노가타리에 초점을 맞춰 중간계층 여성 이야기의 고유한 문제, 즉 그 계층 여성들의 신분의식이 이 작품에 어떻게 형상화되어 있는지 등에 관해서도 살펴보았다. 또한, 주인공 히카루겐지와의 관계를 그린 이야기가 아니고 방계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여성의 삶의 지난함이라는 테마를 진지하게 묘사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오찌바노미야(落葉の宮) 모노가타리에 주목해, 여성의 신분과 결혼과의 관계, 자기 뜻에 반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여성의 고뇌에 관해서도 생각해보았다. 제2부의 속편에 있어서의 「여성들의 이야기」에서는, 주인공 카오루와 관련돼 등장하는 세 「여성들의 이야기」, 즉 오오이기미(大君) 모노가타리, 나카노기미(中の君) 모노가타리, 우키후네(浮舟) 모노가타리에 관해 고찰해보았다. 오오이기미 노노가타리에 있어서는, 후견인이라는 카오루의 존재성에 의해 규정되는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의 내실과 더불어, 정편의 무라사키노우에 모노가타리와의 관련도 함께 고찰해 『겐지모노가타리』 전체의 유기성에 관해서도 생각해보았다. 나카노기미 모노가타리에서는 이 이야기가 오오이기미 모노가타리와 우키후네 모노가타리를 매개하는 역할만을 지닌 이야기가 아니라, 우지쥬죠(宇治十帖) 처음 단계에서부터 오오이기미 모노가타리를 잇는 여성 이야기로 상정되어 있었다는 것과 함께, 행복한 여성이라는 타인의 규정과는 달리 후견인 없는 여성으로 힘들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나카노기미 모노가타리의 내실에 대해서도 고찰해보았다. 우키후네 모노가타리에서는 히토카타(人形)라는 표현에 규정된 우키후네의 존재성이 모노가타리에 구현돼가는 과정을 분석하면서, 『겐지모노가타리』 마지막 여성 이야기로서의 의미 등에 관해서도 생각해보았다. 본 논문의 구체적인 연구방법으로서는 고찰대상이 되는 여섯 「여성들의 이야기」에 있어서 키 워드가 되는 심정표현, 호칭, 가어(歌語) 등을 비롯한 다양한 표현에 주목해 이러한 것들이 작품 전체에 있어서 어떠한 의미를 띠는가, 또 그것들이 지니는 함의와 상징성에 의해 「여성들의 이야기」의 주제가 어떻게 짜여지고 형상화되어 있는가 등에 관해서 검토해보았다. 작품에 있어서의 구체적인 표현을 중시하는 연구방법은 1930년대부터 1950년대에 걸쳐 미국을 중심으로 유행한 「New Criticism」에서 주창된 것인데, 일본에는 표현분석을 통해 주제가 어떻게 효과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는지를 고찰하는 분석비평이라는 이름으로 수정, 보완된 형태로 도입돼 있다.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기존의 연구방법을 참고로 하면서도 보다 넓게 이 작품의 내실과 방법에 관한 고찰을 시도했다. 따라서, 작품을 분석하는 데 있어서, 표현의 다의성과 상징성만이 아니라 상징적인 장면이나 풍경 등에도 주목해, 그러한 제 요소가 작품 전체를 해석하는 데 있어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 또 그러한 요소들의 분석을 통해 밝혀지는 작품의 성격, 구조 등에 관해서도 고찰해보았다. 나아가 남성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여성들의 내면에도 초점을 맞춰보았다. 이상과 같은 고찰을 통해, 『겐지모노가타리』는 이전의 모노가타리와는 한 획을 긋는 작품으로서, 남성의 호색성과 영화를 다룬 이야기라는 종래의 평가와는 달리, 삶의 문제를 진지하게 다룬 작품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리고 여성을 주 독자로 해 여성 작자에 의해 쓰여진 이 직품의 성격에서, 『겐지모노가타리』의 진정한 주제는, 여성들을 둘러싼 이야기 속에 짙게 담겨져 있으며, 히카루겐지와 카오루라는 남성과의 관계 속에서 작품 속에 위치지어져 있지만 이러한 여성들의 이야기에 주목했을 때 『겐지모노가타리』의 내실이 한층 더 선명히 부각된다고 지적할 수 있겠다. 그리고 부록으로서 『겐지모노가타리』에 큰 영향을 끼친 미찌쯔나노하하(道綱母)의 『카게로일기』에 관한 논문 2편을 첨부했다.

      • 日本 九州地域의 朝鮮 被虜沙器匠 硏究

        李美淑 강원대학교 2008 국내박사

        RANK : 247647

        文禄の役と慶長の役(1592∼1598)の時期に九州の各藩や長州の大名は朝鮮から撤収する過程で競争するように陶工を捕まえて帰って来、それぞれの領内に窯を作らせた。その理由としては、当時、大名たちの間で茶道が流行しており、特に薩摩の島津義弘、豊前の細川忠興、長門の毛利輝元、肥前の加藤清正は皆、千利休の門下茶道人で、各々朝鮮の茶碗、茶を盛る器などを貪って自分の領地内で趣向に当たる茶器を作った。また同時に、陶磁器の生産によって領地の産業復興を図ろうとしたからであった。 朝鮮沙器匠らは当時、良い陶磁器(茶碗など)を持ちたがった日本人たちの長年の所望を非常に熱心に、そして誠意ある努力をもって達成するようにした。 文禄の役と慶長の役が所謂、陶磁器戦争だと称されることもあるが、その理由は、この期間の間、日本全国の大名らによって引っ張られていった朝鮮沙器匠らによって 日本磁器の歴史が始まったからである。 今まで韓国の多くの学者たちがこの時に引っ張られた沙器匠たちによって日本の陶磁器文化が絶対的に発達するようになったと主張しているが、日本の学者たちの中で一部は他の主張をしている。従って、本論文では、当時朝鮮の沙器匠らがどのように引っ張られて定着するようになったのか、それから、果して彼らが日本の陶磁器に及ぼした影響はどの位なのかを考察することに研究の目的がある。 本研究のために現存する文献と史料などを根拠に下の三つの方向から考察・分析を行った。 1.文禄の役と慶長の役(1592∼1598)の時に数多くの被虜人が発生した。これら被虜人が発生した原因について考察してみたいと思う。これら被虜人の中で朝鮮沙器匠が日本九州の各地域へ引っ張られ、有田、唐津、高取、上野、竪野、苗代川などの陶祖になった。これら引っ張れた朝鮮沙器匠らがどの地域に定住したのか、彼らが日本陶磁器に与えた影響について調べたいと思う。また彼らの日本での生活を考察してみたいと思う。 2.日本九州の各地域へ引っ張られていった朝鮮沙器匠の中で一番多い沙器匠が引っ張られた地域は薩摩である。薩摩地域には領主島津義弘によって被虜人の中で一番多い数の朝鮮沙器匠が引っ張られた。 従って、本論文では金海、朴平意などにより始まった薩摩焼を朝鮮沙器匠の史跡と影響を中心に調べてみたいと思う。 3.朝鮮沙器匠李参平により始まった有田焼は九州各地域の陶磁器の中で一番発達した。朝鮮沙器匠の影響以外にも、有田地域で陶磁器が発達することができたもう一つの要因である地理的、時代的特性について考察してみたいと思う。 文禄の役と慶長の役(1592∼1598)の当時、日本軍によって多数の被虜人が発生しており、これら中には多くの数の朝鮮沙器匠があった。 これら被虜沙器匠らは日本九州の各地域で陶磁器業に携わった。これらの中で一部は有田、唐津、高取、上野、竪野、苗代川等の陶祖になった。幾多の朝鮮の沙器匠らが日本に引っ張られていったが、彼らの史料が残っていないので、すべて明らかにすることはできない。名前が明かになった各地域の被虜沙器匠は次の通りである。 (1)福岡県 慶尚南道泗川で加藤清正に捕まって来た尊楷[上野喜蔣]が上野焼の陶祖になり、慶尚北道高霊で黒田長政に捕まって来た八山[高取八山]が高取焼の祖になった。 (2)佐賀県 忠清南道鶏竜山錦江付近で鎬島直茂の家奴に捕まって来た李参平[金ケ江参兵衛]は有田窯の陶祖になった。 慶尚南道金海で後藤家信に捕まって来た宗田[深海新太郎]が内田山諸窯の陶祖になった。百婆仙[百婆仙]は宗田と一緒に捕まって来た彼の妻である。 (3)鹿島県 慶尚北道高霊郡星山島津義弘に捕まって来た金海[星山仲次]は竪野窯の陶祖になった。 慶尚北道高霊郡星山で島津義弘に捕まって来た卞芳中[星山仲次郎]は帖佐窯の創業に携わり、民窯の手始めである竜門司窯の陶祖になった。 全羅北道南原で島津義弘に捕まって来た朴平意[朴氏清右衛門]は苗代川窯の陶祖になった。 申武信[田原万助]と申主碩[田原友助]は金海[星山仲次]を手伝って竪野窯で陶業に携わった。 薩摩に定住した張一六[仲地麗仲]は陶法伝授のために万暦14年(1616)琉球に渡って行き、湧田窯の陶祖になった。 (4)長崎県 慶尚南道昌原郡熊川面で日本武将である松浦鎮信に捕まって来た巨関[今村弥次兵衛]は平戸焼の陶祖になった。 朴正意[小山田佐兵衛]は百実窯の陶祖になった。 大村喜前に捕まって来た李祐慶[中野七郎右衛門]は波佐見焼の陶祖になった。 (5)山口県では被虜沙器匠李勺光が松本で開窯し、李敬は[坂助八]、[高麗左衛門]は李勺光の弟でこれら萩窯の陶祖になった。 これら被虜沙器匠らは九州各諸藩主の領土内で築窯して陶磁器を焼けるように特別な厚遇と保護を受けた。 日本の江戸時代には被虜沙器匠らの待遇が良い方であった。大抵、刀をさすことができる士族に準する身分としてもてなした。付加価置が高い陶磁器を生産する被虜沙器匠らは藩でも貴重な存在に違いなかった。そして被虜沙器匠をリーダーに任命し、彼は士族として待偶した。それ以外の被虜沙器匠らに対しては、それに準する身分を与えた。 始めに、佐賀県へ引っ張られて来た被虜沙器匠李参平は多久藩に任せられ、藩主である家久(安順)の命令で西の原梅野(多久南方)で窯を作り、陶磁器を作り始めた。良質の粘土を求め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ので、藩主の許可を得てだんだん場所を移して窯を作り、製作を試みた。1616年(元和16)李参平が38歳の時に有田上白川の泉山で白磁鉱を見つけ、こちらに天狗谷窯という窯を作った。これが日本磁器の手始めであった。 1616年日本最初に白磁を製作した所として明らかにされた天狗谷窯は丘上に階段式間がある登窯構造で、韓国の広州仙東里窯の階段式登窯を模範としていることが分かる。匣鉢と支釘などの窯道具もやはり似ており、発掘された陶磁片として、白磁鉢、お皿、瓶と青華白磁のお皿、瓶そして青磁等が光州の16世紀後半観音里窯の焼き跡から出た白磁のお皿、瓶、お皿等と底部、形態などが一致している。 1616年(元和16)李参平が有田上白川の泉山で磁鉱を見つけ、その地に天狗谷窯という窯を作って磁器を焼いたのが日本白磁の手始めであった。しかし、伊万里地域の磁器が発達するようになったのは次のような理由があったからだと考えられる。 1.明朝末期の政情不安、動乱に起因した中国の経済変動があった。 2.景徳鎭窯の衰退、明朝の滅亡と共に景徳鎭で陶磁器を生産しなくなった点。 3.国と交易したオランダ東インド会社が交易地を景徳鎭から有田に切り替えた点。ヨーロッパの商人たちが見本を持って来て有田で作るようにした。 4.伊万里港を通じる210年間(1645∼1855)にわたった貿易があった。 本研究を遂行するにあたって序論で明らかにした研究の限界を飛び越え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ことを明らかにしておく。 文献資料や遺物資料に根拠を置かなければならないが、被虜沙器匠の事例を具体的に証明することができる確かな史料を探すことはとても難しい。残念ながら、日本に連行された朝鮮沙器匠に対する韓国側の史料がほとんど残っていない実情である。資料と研究が充分でないせいによって今まで私たちは被虜沙器匠の後裔らを捜そうとする努力が不足であったのではないかと思われる。 本論文で新しい史料が発見されたことではないが、九州地域に分布されている被虜沙器匠らの中で名前を明らかにすることができる人々を整理する作業だけで意義を置きたいと思う。 일본 磁器의 역사는 壬辰倭亂과 丁酉再亂의 기간(1592∼1598) 동안 일본 다이묘(大名)들에 의해 끌려간 被虜沙器匠들에 의하여 日本 磁器의 역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임진왜란은 일명 陶磁器戰爭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많은 학자들이 이때 피납된 조선 피로사기장들에 의해 일본의 도자기 문화가 발달하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그 영향이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연구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당시 피로사기장들이 어떻게 피납되어 정착하게 되었는지와 그들이 일본의 도자기 문화에 끼친 영향은 어느 정도 인지를 고찰하는데 目的이 있다. 일본으로 끌려간 피로사기장의 수가 얼마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자료가 수집된 각 지역의 피로사기장 명단은 다음과 같다. 후쿠오카현(福岡縣)에서는 경상남도 사천에서 가토우 키요마사(加藤淸正)에게 잡혀온 尊楷[아가노 기조(上野喜蔣)]가 아가노 도자기(上野燒)의 陶祖가 되었고, 경상북도 고령에서 쿠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에게 잡혀온 八山[다카도리 하치조(高取八山)]은 다카도리 도자기(高取燒)의 陶祖가 되었다. 사가현(佐賀懸)에서는 忠淸南道 鷄龍山 錦江 부근에서 나베시마 나오시게(鎬島直茂)의 家奴에게 잡혀온 李參平[가나가에 산베에(金ケ江參兵衛)]이 아리따 도자기(有田燒)의 陶祖가 되었다. 그리고 경상남도 김해에서 고토우 이에노부(後藤家信)에게 잡혀온 宗田[후카미 신타로(深海新太郞)]이 內田山諸窯의 陶祖가 되었다. 百婆仙[하쿠바센(百婆仙)]은 宗田과 같이 잡혀온 그의 처이다. 가고시마현(鹿兒島縣)에서는 경상북도 고령군 星山에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에게 잡혀온 金海[호시야마 나카지(星山仲次)]가 타테노요(竪野窯)의 陶祖가 되었다. 경상북도 고령군 星山에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에게 잡혀온 卞芳中[호시야마 나카지로우(星山仲次郞)]은 쵸사요(帖佐窯)의 창업에 종사하였고, 民窯의 시작인 류몬지요(龍門司窯)의 陶祖가 되었다. 그리고 전라북도 남원에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에게 잡혀온 朴平意(朴氏淸右衛門)는 나에시로가와(苗代川)窯의 陶祖가 되었다. 申武信[타와라 만스케(田原万助)]과 申主碩[타와라 토모스케(田原友助)]은 金海[호시야마 나카지(星山仲次)]를 도와 타테노요(竪野窯)에서 陶業에 종사하였다. 사쓰마(薩摩)에 定住했던 張一六[나카치 레이나카(仲地麗仲)]은 陶法전수를 위해 1616년(萬曆 14) 류큐(琉球)에 건너갔다가 레기타요(湧田窯)의 陶祖가 되었다. 나가사키현(長崎縣)에서는 慶尙南道 昌原郡 熊川面에서 일본 장수 마츠우라 마사노부(松浦鎭信)에게 잡혀온 巨關[이마무라 야지베에(今村?次兵衛)]은 히라도 도자기(平戶燒)의 陶祖가 되었다. 朴正意[오야마다 사헤에(小山田佐兵衛)]는 햐쿠비요(百實窯)의 陶祖가 되었다. 또 오오무라 요시마에(大村喜前)에게 잡혀온 李祐慶(中野七郞右衛門)은 하사미 도자기(波佐見燒)의 陶祖가 되었다. 야마구찌현(山口縣)에서는 피로사기장 李勺光이 마츠모토(宋本)에서 開窯하였으며, 李敬[사카 스케하치(坂助八)?코우레이자에몽(高麗左衛門)]은 하기 도자기(萩燒)의 陶祖가 되었다. 이들 피로사기장들은 큐슈(九州)지역 각 諸藩主의 영토 내에 가마를 지어 도자기를 구울 수 있도록 특별한 대우와 보호를 받았고 에도시대(江戶時代, 1603~1867)에는 士族에 준하는 신분으로 대접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보호인 동시에 감시?통제의 수단이 되기도 했다. 이들은 피로사기장들의 조선풍습과 언어를 유지시킴으로써 유사시에 통역의 역할도 맡기려고 했다. 被虜沙器匠들이 일본으로 끌려간 이유가 도자기 제작에 있었던 만큼 그들이 일본의 도자기 제작기술에 기여한 바는 매우 크다. 한 나라의 도자기 제작기술의 수준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소성기술인데 이것은 가마의 구조와 관련이 있다. 壬辰倭亂 직후에 일본으로 납치된 피로사기장들은 가마 운영에 직접 참여하여 일본의 도자기 가마 구조를 조선식 가마인 有段式 連室登窯로 바꿈으로써 도자기의 대량생산과 고화도 磁器를 구워낼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도자기를 제작함에 있어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원료가 되는 점토인데 일본 자기의 원료가 되는 백색 점토의 발견이 바로 조선의 피로사기장들에 의해서 이루어 졌다. 점토는 소지에 가소성을 제공하고 성형된 기물의 성형강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한다. 소성된 후에는 유리상을 형성시켜 도자기가 사용될 때 강도를 유지하며 기물이 백색의 투광성을 띠게 하는데 기여한다. 磁器의 원료인 백색점토의 발견으로 일본 陶磁器는 陶器에서 磁器시대로 넘어갈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조선의 피로사기장이 일본의 도자기 생산에 개입되면서 조선의 도자양식과 가마구조가 九州의 여러 지역에 영향을 미쳤다. 조선의 象嵌靑磁를 비롯하여 粉靑沙器의 剝地紋?철회문?상감문?인화문?분장문 등과 같은 다양한 장식기법과 성형도구 그리고 조선식 가마재임법 등이 일본의 도자기에 영향을 주었다. 이렇듯 일본 도자기의 발전에 있어 조선에서 끌려간 피로사기장의 영향은 오늘날까지도 陶祖로 칭송받을 만큼 대단한 업적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본고에서는 특히 일본 아리따(有田)지역의 도자기가 발달하게 되는 데는 앞에서 제시한 조선 피로사기장의 역할 외에도 당시 일본의 시대적?지리적 상황도 요인이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첫째 큰 배가 출입할 수 있었던 이마리진(伊万里津)이 가까이에 있었던 점. 둘째 에도(江戶) 중기의 서민문화가 발달함에 따라 도자기 수요층이 확대된 점. 셋째 明末?淸初의 불안한 中國의 정세와 그에 따른 景德鎭窯의 쇠퇴로 인하여 네델란드 동인도회사의 교역대상지가 중국에서 일본으로 변경된 점. 넷째 1645년에서 1855년까지 210년간 계속된 일본의 무역활동의 성행 등을 들 수 있다. 이상에서 임진왜란을 전후로 일본에 끼친 조선도자기의 영향을 조선에서 끌려간 피로사기장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큐슈(九州)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朝鮮 被虜沙器匠들을 찾아내어 정리하는 정도 이상의 진전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전쟁 중에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본으로 끌려간 피로사기장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史蹟을 찾는 일은 더욱 중요한 일이다. 이들 피로사기장과 그들 후손에 대한 연구는 한국학계의 몫이 아닐까 생각하며 향후 피로사기장에 대한 연구가 더욱 심층화되기를 바란다.

      •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게슈탈트 집단상담 프로그램 효과에 대한 메타분석

        이미숙 경북대학교 대학원 2018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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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evaluate the effectiveness of the gestalt group counseling program for adolescents in Korea by utilizing meta-analysis methods. A total of 73 studies from 1985 to 2016 were selected and analyzed. The mean effect sizes and test for homogeneity of effect size were analyzed by using The R Project for Statistical Computing 3.4.0 version. The Random-effects model was adopted and 168 effect sizes were calculated. The following analysis results were observed. First, the overall mean effect size of the program was found to be 0.942. The effect size is considered as a large mean effect size according to the criteria which Cohen (1988) established. Second, among dependent variables, Self-concept was found to be the most effective variable (1.066) in regard to the effect size. Emotion (1.015), school life adaptation (0.874) and interpersonal relation (0.679) all showed mean effect size, implying that the gestalt group counseling program for adolescents was effective in all mentioned fields. Third, a slight decrease was observed in the relations between the publication year of the subject for analysis and the effect size (-0.0228). The mean effect size differed between the sample groups according to the other moderating variables examined (school level of subject, spontaneity, subject specialty, gender and group size respectively). High school students showed the highest mean size for the school level of subjects (1.648) while the spontaneous group displayed the highest mean size for spontaneity (1.141). The highest mean sizes in subject specialty, gender and group size were observed in the general group (1.185), mixed general group (1.094) and groups with between 7 and 10 members (1.173) respectively. When the sessions were conducted more than 11 times, the mean effect was seen to be at its highest (1.361). Other groups representing highest mean effect sizes were more than 3 sessions per week (1.152), between 51 to 90 minutes per session (1.059) and over 9 weeks of conducting period (1.319). Moreover, the mean effect size was observed to be highest in cases where the experience report was filled in. Among the different gestalt group counseling program combinations, the mean effect sizes were seen to be different depending on the combinations of programs used. Utilizing the gestalt program combined with other counseling theories gave a mean effect size of 1.331, while combination with the empty chair or self-awareness centered program, integrated art therapy orientated program and GRIP program gave mean effect sizes of 1.202, 0.89 and 0.601 respectively. These combinations represented more than the average effectiveness of the mean effect size. In addition, there were no statistically significant differences observed based on the group size, number of sessions per week, duration of each session and experience reported. Based on these outcomes, the findings of this study can be used to support the planning of interventions providing gestalt group counseling to adolescents. Moreover they can provide implications in the continued development and implementation of gestalt group counseling programs focusing on adolesc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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