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동(東)아시아의 법규범(法規範) 전파의 실태와 출토문자자료(出土文字資料)
三上喜孝 ( Mikami Yoshitaka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7 大東文化硏究 Vol.99 No.-
본 논문의 목적은 동아시아문화권에서 법규범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파해 나갔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동아시아에 율령법이 확산되었던 사실은 알려져 있는데, 율령의 법체계에는 나타나지 않은 다양한 법규범도 동아시아에는 존재하고 있었고, 그것들은 목간 등의 출토문자자료의 검토를 통해 분명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구체적인 사례로서 율령법 도입 이전의 한반도와 일본열도에 널리 사용된 `某の前に申す`라는 형식의 `前白木簡`, 또한 곡물을 빌려주는 출거제도 등을 들 수 있다. 이것들은 율령의 규정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으나 실태로서는 고대 한반도와 일본열도에서 널리 행해진 법규범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금후 새롭게 발견되는 한국출토목간 중에 동아시아의 법규범의 전파 문제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실마리가 될 자료가 나오게 되기를 기대한다. The purpose of this thesis is to make it clear how a legal model was spreading in the East Asia. We know a way of the legal codes of ancient China to have spread in East Asia. But the various legal models which don`t show also existed in legal system of the legal codes of ancient Japan in East Asia. A study of wooden documents made it clear that the legal model has existed which is not existed in the legal codes of ancient China in ancient Korea and Japan. In the future, a study of Korean wooden documents would offer the key which elucidates how a legal model spread in East Asia.
三上喜孝 한국목간학회 2009 목간과 문자 Vol.3 No.-
일본의 목간연구는, 목간의 형태적 특징에 주목해 형식분류를 한 것에서 출발하고 있다. 내용에 의한 분류는 아니고, 「형식번호」에 의한 분류를 제1로 한 것은 목간을 고고자료로서 취급하려는, 말하자면 일본의 목간연구의 자세를 표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고대목간의 특징적인 형태로서, ① 단책형, ② 단책형의 상, 하 양단 혹은 一端을 잘라 홈을 넣은 것, ③ 材의 一端을 칼끝 모양으로 날카롭게 한 것 등이 있고, 그 외 목제품으로 묵서가 있는 것과 목간의 표면을 깍아 만들어진 박편(삭설)도, 목간으로서 분류되고 있다. 그런데 목간의 형태적 특징은 목간의 사용법이나 기재내용과 깊이 관련된다고 생각된다. 예를 들어, 물건에 매달아 붙인 부찰(하찰) 목간에 주목하면, 하단부를 칼끝 모양으로 성형했던 하찰목간이 쌀과 소금과 같은 모래 알갱이 모양의 공진물 하찰의 특징적인 형태라는 점이 지적되고 있으며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물품의 외측에 장착시킨 것이 아니라 물품의 중앙에 넣어 품질을 보증하기 위해 사용되었다고 하는 견해가 나타나고 있다. 또, 볍씨를 넣었던 쌀가마니에 붙인, 소위「種子札」은 품종명에 따라 그 형태를 달리하고 있기 때문에, 기재내용뿐만이 아니라 부찰의 형상에 의해서도 품종명이 식별가능하도록 궁리했던 것은 아닐까라고 지적되고 있다. 이러한 부찰(하찰)목간의 형태적 특징은 그 사용법과 기재내용 등과의 유기적 관련을 부여함으로써 이해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부찰(하찰) 목간 중에는 공진물의 명시라고 하는 기능 외에도 문서와 장부의 원자료로서의 기능이 부가된 경우도 있어 각각 그 기능을 상정할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는 장부목간(기록간)에 주목하면 일반적으로 장방형의 형상을 가진 장부목간은 동일한 목적으로 작성되었던 장부는 동일한 규격을 가진 경우가 많다. 더욱이 종이 장부를 의식했던 기재법을 취하는 것도 있는데, 장부목간은 종이에 의한 기록기술의 발전으로 서로 그 기재양식을 궁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상 일본고대목간 가운데 부찰(하찰)목간과 장부목간에 주목해 검토해보면 형태면에서 부찰(하찰)과 장부라고 하는 분류가 가능하게 되었다고 해도 그 내실은 다양한 기능이 부가되었던 경우가 있으며, 매우 복잡하다. 형식분류를 근거로 한 다음 각각의 목간에 대한 기능을 다시 상정할 필요가 있다. 다만, 부찰목간이든 장부목간이든 각각의 場에 부수해 작성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목간은 매우 유력한 형태이며, 그렇다고 하는 점은 공통되고 있다. 정보전달수단으로서의 목간의 유력성은 이러한 점에 있다고 생각된다. 이상의 성과를 근거로 해서 한국출토목간과 비교하여 보면 목간으로서 사용한 材에 제약되는 면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그 형태와 기능에는 일본의 고대목간과 공통된 것이 있다고 생각되고 이러한 검토의 전제로서 한국출토목간에 있어서 형식분류의 연구 진행이 무엇보다도 우선 되길 바라는 것이다.
三上喜孝 한국목간학회 2022 목간과 문자 Vol.- No.29
이 글은 일본 고대 목간의 형식 분류나 기능적 분류의 현상에 대해 소개하고 그것을 동아시아 목간 문화 속에서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찰해 본다. 일본 고대 목간의 특징적인 형태로는 ①短冊型, ②短冊型 材 상하 양단 또는 일단에 홈을 판 것, ③재의 일단을 칼끝 모양으로 뾰족하게 만든 것 등이 있다. 이 이외에 목제품에 묵서한 것이나 목간 표면에서 깎아낸 박편(삭설)에 남은 묵서도 목간이다. 이들은 “형식번호”라는 분류로 포괄된다. 이는 목간의 형태적 특징에 주목하여 분류한 것이다. 내용을 통한 분류가 아니라 형태적 특징에 의한 분류를 우선한 것은 목간을 고고 자료로 취급한다는 일본 목간 연구의 자세를 표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에 내용에 따른 분류를 검토해 보면 크게 나눠서 a.문서목간, b.부찰목간, c.기타로 나뉜다. “문서목간”은 다시 발신인과 수신인이 명백한 협의의 “문서”와 물품 출납을 기록한 “기록(장부)”으로 나눌 수 있고 “부찰”은 세 등을 공진할 때 매달리는 “공진물하찰”과 물품 관리용으로 매달리는 “물품부찰”로 나눌 수 있다. “기타”에는 나무 조각에 전적 일부를 서사하거나 같은 글자를 반복해서 써서 글자를 연습했다고 생각되는 “습서”나 주술의 글자나 기호를 쓴 “주부” 같은 목간이 포함된다. 목간의 형태는 내용과 관련되는 경우가 많다. “문서목간”은 ①의 형태가 대부분이고 “부찰”은 ②③ 형태에 대응된다. 먼저 목간 형식을 파악하고 그다음에 목간 기능에 대해 고찰한다는 절차를 밟는 것이 중요하다. 형식번호에 바탕을 둔 분류는 매우 유효한 수단이지만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04로 시작되는 형식번호는 구체적으로 봉함목간을 상정하고 있어 목간의 기능(내용)에서 형식번호가 생긴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또 한국에 출토사례가 많은 각주상목간은 일본에서는 출토사례가 적어서 형식번호가 없고 011형식(短冊型), 065형식(용도 미상 목제품에 묵서가 있는 것), 081형식(파손, 부식 때문에 원형을 알 수 없는 것) 등 형식번호가 일정하지 않다. 목간의 형식번호를 정하는 작업에는 어려운 문제도 많다. 먼저 그것을 전제로 한 후에 목간 분류나 형식에 대해 동아시아 여러 지역 목간에 대해서도 의논해 나가야 할 것이다.
三上喜孝(MIKAMI Yoshitaka) 한국고대사학회 2010 韓國古代史硏究 Vol.0 No.57
본 원고에서 부여 된 과제는 역사학의 사료로서 활용되는 경우가 많은 목간을 본래의 속성인 고고자료로서 새롭게 파악하고, 이를 위한 연구방법을 모색하는 데에 있다. 한국에서는 최근, 각지에서 목간의 출토가 확인되고 있으며, 문헌사료가 부족한 고대사 연구에 있어, 금석문과 나란히 1차 사료로서 주목받고 있다. 일본에서도, 목간이 고대사연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자료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으며, 목간이 지하에서 출토 된 고고자료라는 점에서 나타나는 성격이나, 당시 사회의 문맥 안에서 사용되어 온 성격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역사자료로서 충분히 활용하는 것은 곤란하리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당연히, 종래의 문헌사료와는 다른 연구 방법을 체득하였을 때 처음으로, 목간을 마주 대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본 원고에서는, 그 하나의 예로서, 목간의 제작 기법과 폐기의 문제에 주목한다. 우선, 목간의 제작 기법의 해명은, 목간을 제작한 주체를 추정할 때에,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이, 일본의 목간연구로 밝혀져 있다. 한편, 목간이 폐기되는 때는, 목간이 본래의 역할을 끝낸 뒤, 2차적으로 이용당해서 폐기될 경우가 많아서 목간의 내용과 출토 유구의 성격이, 반드시 대응하지 않는 것을 안다. 이렇게 해서 목간은 그 문자내용뿐만 아니라 고고학적인 검토를 하지 않으면 정확한 의미를 파악할 수는 없다. 그 때문에의 방법론의 공유가, 연구자에게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三上喜孝 한국목간학회 2008 목간과 문자 Vol.1 No.-
본고는 일본 고대목간의 계보를 더듬어 찾고자 하는 관점에서 한국의 출토목간에 주목하고, 양자를 비교 검토함으로서 그 특질을 부각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우선 기록간에 주목하면, 첫머리에 날짜를 기입하고 그 아래 인명에 할주를 나란히 쓰는 기재양식이, 한국출토의 6세기 목간과 일본의 7세기 목간에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목간에 보이는 독특한 용자법도 한국 출토목간과 일본의 7세기 목간에 공통적으로 확인된다. 더욱이 『논어』를 기재한 목간이 한국과 일본에서 출토하고 있는 사실은, 『논어』가 백제에서 자져온 것이라고 하는 『고사기』의 전승과 아울러 문자문화의 수용이 한반도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당시 사람들의 인식을 나타내고 있다. 한국 출토목간과 일본 고대목간을 비교하면, 7세기의 지방목간과 많은 공통점을 보이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가장 현저한 것이 近江지역(현재 滋賀현)에서 출토된 7세기 목간이다. 한자를 일본어의 어순으로 나열해서 기록한 西河原森ノ/內遺跡 출토목간은 한국의 壬申誓記石에서 볼 수 있는 문체를 상기시킨다. 湯ノ部遺跡 출토의 『牒』 문서양식을 가진 목간은 6세기대로 추정되는 신라 月城垓子 출토 목간인 『牒』목간의 계보를 이어받는 것으로 봐도 좋다. 7세기 近江지역 출토의 목간과 한국 출토목간 사이에 이러한 공통성이 보이는 배경에는, 이 지역이 한반도의 도래인이 집주하고 있었던 것과 관련이 있지만 단지 이것이 近江지역만의 특수성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일본 고대사회에서 목간이 왕성히 사용된 것은 같은 시기에 한반도에서 목간이 사용되고 있었던 사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열도에 문자문화를 가져온 도래인이 그와 동시에 목간에 의한 정보 전달기술도 가져온 결과, 정보 전달매체로 목간의 유효성이 확인되고 일본의 율령국가 통치기술의 하나로서 커다란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三上喜孝(Mikami yoshitaka),오택현(역) 한국목간학회 2018 목간과 문자 Vol.0 No.20
매년 최근 일본에서 출토된 목간 중에서 주목되는 것을 선택해 소개했지만, 이번에는 목간이 아닌 필자가 조사에 관여한 漆紙文書의 출토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漆紙文書란 古代에 漆의 상태를 양호하게 보존하기 위해 漆을 종이로 덮었는데 이로 인해 그 종이에는 漆이 스며들어 부식되지 않은 상태로 땅 속에 남겨졌던 것이다. 그때에 사용된 종이는 대다수가 문서의 이면서(反故文書)여서 고대문서가 땅 속에서 발견될 수 있었던 것이다. 漆은 상당히 예민한 물질인 반면, 일단 건조되면 어떤 조건에서도 부식되지 않는 강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 때문에 漆이 부착되어 있는 물질은 땅 속에서도 부식되지 않고 잔존할 수 있는 것이다. 付着物이 종이 문서일 경우, 漆이 부착된 종이 문서는 부식되지 않고 땅속에 남게 된다. 이렇게 고대의 문서가 발굴조사에 의해 출토되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그 조사 사례의 하나인 2017년 秋田県 大仙市의 払田柵跡에서 출토된 漆紙文書를 살펴보고자 한다. 秋田県 大仙市에 소재하고 있는 払田柵跡은 9세기 초에 만들어진 고대 城柵으로, 고대의 행정구역으로 말하면 出羽国에 소재하고 있는 城柵이다. 出羽国에는 秋田城과 雄勝城, 2개의 고대 城柵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문헌 사료에 남겨져 있어, 払田柵跡이 어느 단계에서는 雄勝城이 되었다고 하는 설이 유력하다. 본 漆紙文書는 원래 漆이 부착된 면을 안쪽으로 하고, 4번 접어서 폐기했다. 해독을 위해 4번 접어졌던 漆紙文書를 펴고, 적외선 관찰에 의해 해독을 실시했다. 그 결과 종이의 양면에 문자가 확인되었다. 한쪽 면(A면)은 秋田城에서 지출한 兵粮의 수량과 狄俘에서 지급한 식량의 수량을 지출할 때마다 기록한 후, 出羽国의 大目(第4等官)이 매번 확인·서명한 장부이다. 出羽国에서 大目의 관직이 두어졌던 天長 7年(830) 이후에 작성되었다고 생각된다. B면은 漆 부착면이기 때문에 문자가 2행 정도만 확인되지만, 官職·位階·人名이 쓰여졌었다고 생각된다. A面과 B面은 쓰여진 문자의 분위기가 다르고, 표면과 裏面이 내용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면이 폐기된 뒤 반대 면이 재사용되었다고 생각된다. 이 漆紙文書의 발견에 의해 払田柵에서 秋田城으로 兵粮의 지출이 행해지고 있었던 것과 狄俘(복속시킨 蝦狄)에게 식량을 지급했던 것, 그리고 그것들은 国司의 大目이 관계되어 있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다. 払田柵에는 出羽国司가 깊이 관련되어 秋田城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밝혀졌다. 고대 城柵의 기능을 생각해도 흥미로운 자료라고 생각된다. Every year, the author has introduced some of the bamboo strips which were excavated in Japan recently and deemed noteworthy but this year, it is lacquered documents discovered in the investigation the author participated that will be introduced. Lacquered documents (漆紙文書) were preserved undecayed because the paper was coated with lacquer in ancient times. At first, the lacquer was covered by the paper for protection but the paper has been smeared by the lacquer made undecayed. The paper used then was mostly recycled paper from old documents(反故文書) which is now being unearthed in the excavation process. Lacquer is extremely sensitive but at the same time became stronger when dried and incorrodible under any conditions. That is how lacquered materials remain uncorroded even when buried underground. If the material was pieces of paper, documents made of the paper remained intact in the ground. This explains the way ancient document are discovered in the excavation survey. This paper will examine the lacquered document found in the ancient wall of Hotta in Daisen, Akita Prefecture in Japan in 2017. The wall in Hotta was built in the early 9th century and located in the ancient Dewa province. According to historic literature, there had been two ancient castles with a palisade, Akita Castle(秋田城) and Ogachi Castle (雄勝城), in Dewa province; it seems plausible to believe that the wall of Hotta turned into Ogachi Castle at some time in history. This lacquered document had been folded four times with lacquered side facing each other before throwing away. To read the document, it was unfolded and read by infrared observations. As a result, characters were identified on both sides of the paper. A side(Side A) proved to be a document reviewed and signed by Oome(大目, the 4th rank official)of Dewa Province after recording the expense of provisions for the army in Akita Castle and the amount of provisions distributed by barbarians subjugated(狄俘) every time the transaction was made. It is believed that the document was created after Dewa had the office of Oome in the 7th year of Tenchou(830). Side B is lacquered and only two lines of characters are identified; they seem to include public offices, positions, and names. Side A and B have different set of characters and the contents are not connected with each other. It is believed that the back of the paper was recycled after a side had been used and scraped. The discovery of the lacquered document revealed the following: provision was paid from the wall of Hotta to Akita Castle; barbarians subjugated(狄俘) was provisioned; and they were related with Oome(大目) of Kokushi(国司). It showed Kokushi of Dewa was closely connected to the Wall of Hotta and Akita Castle. The findings are particularly interesting given the function of the ancient fortress and palisade.
三上喜孝(Mikami yoshitaka),오택현(번역자) 한국목간학회 2016 목간과 문자 Vol.0 No.16
본고에서는 최근 일본에서 발견된 고대 목간 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을 선택해, 그 내용과 의의를 소개하고자 한다. 여기에서는 2014년에 발견되어 『木簡硏究』37호(2015년) 등에 공표되었던 京都府 · 平安京左京九条 三坊十町(施薬院御倉跡) 출토 목간에 대해서 소개한다. 목간의 출토지점은 平安京의 左京九条 三坊十町에 해당하고, 鎌倉時代의 古文書에 의하면 「施薬院御倉」이 있었던 장소다. 施薬院이란 仏教思想에 기반해서 병자에게 약을 시행하고, 치료를 행했던 시설이다. 발굴조사에 의하면 平安前期와 後期의 연못이 검출된 것 외에 平安時代 末期부터 鎌倉時代까지의 건물지 등도 검출되었다. 이 중 9세기 초에 속하는 연못에서 16점의 목간이 출토되었다. 비교적 명확하게 문자가 확인되는 목간 중에는 武蔵国(지금의 東京都와 埼玉県 지역)이 施薬院으로 薬物인 蜀椒 一斗를 진상했을 때 사용된 荷札木簡(꼬리표 목간)과 「六物干薑丸」라고 하는 薬物 이름이 쓰여진 목간, 그리고 施薬院의 田에서 耕作에 종사했던 「客作児」(고용노동자)의 사망을 기록한 목간 등이 있다. 이것들은 9세기에 있어서 施薬院의 실태를 알려주는 것으로 모두 귀중한 내용을 담고 있는 자료이다. 한국 출토 목간과의 관련으로 본다면 백제의 수도가 있던 부여 泗泚城의 東羅城 大門 부근에 위치한 陵山里寺址에서 출토된 「支薬児食米記」라 불리는 목간이 떠오른다. 고용노동자를 「○○児」로 부르는 용례는 한반도와 일본열도에 공통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고, 더욱이 모두 의료관련 시설에 관련된 사례가 확인되는 것은 우연이라고는 하지만 흥미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 출토 고대 목간 - 고대 지역 사회에서의 농업경영과 불교활동 -
三上喜孝(Mikami Yoshitaka),오택현(번역자) 한국목간학회 2020 목간과 문자 Vol.0 No.24
본고에서는 鳥取県 青谷横木 유적에서 출토된 농업경영과 불교활동이 기록된 木簡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青谷横木 유적은 鳥取県 青谷 평야에 있으며, 고대 官道인 山陰道 유적과 条里制 구조, 많은 목제 제사 용구가 출토되어 주목되는 유적이다. 水陸 교통의 연결 지점이기 때문에 대규모 율령제적 제사가 행해지는 한편 농업경영 및 조세 수취와 관련된 말단 관아가 존재했다고 추정된다. 유적에서는 농업경영과 관련된 木簡이 다수 출토되었다. 먼저 주목할 것은 다양한 종류의 쌀 품종명이 기록된 꼬리표 木簡으로 소위 種子札 木簡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10세기 후반~11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생각되는 다수의 種子札이 확인되고 있다. 이들 木簡에서는 「須流女」 「長比子」 「赤稲」 「赤尾木」 「黒稲」 「嶋丸子」 「伊□子」라는 품종명이 확인되며, 이 중에는 다른 지역 유적에서 출토되었던 種子札에서 확인되는 동일한 품종명도 확인되어, 동일한 쌀 품종이 각지에 전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주목되는 것은 농업 노동 편성에 관한 木簡이다. 다양한 품종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농업 노동력을 관리해야 했는데, 그 기록이 木簡에 남아 있다. 그중에서 모내기 노동력이 중요시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각지에서 모내기 노동력을 기록한 木簡이 출토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 木簡에서 남녀를 나눠 기록하고 있다. 특히 9세기 말 이후가 되면 모내기 노동에 있어서 여성의 비율이 남성에 비해 높게 나타난다는 점이 주목된다. 마지막으로 불교 활동에 관련된 木簡이다. 経典을 서사한 木簡이 출토되고 있는데, 経典을 서사했던 주체가 「宅」이라는 경영 거점을 가진 남녀였던 것도 木簡을 통해 알 수 있다. 농업경영의 거점을 가진 사람들이 그 번영을 기원하는 의미로 불교 활동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었던 양상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In this article, I would like to talk about mokkan on agriculture and Buddhist activities. Many mokkans have been found in the Ruins of aoyayokogi(青谷横木) that describe agricultural management. First, a label mokkan with various kinds of rice variety names was found, and second, a label mokkan related to agricultural labor formation was found. Third, mokkan involved in Buddhist activities was also discovered. Thus, it has been confirmed through mokkan that the Ruins of Aoyayokogi(青谷横木) is a site of diverse character.
일본 출토 고대 문자자료 - 秋田県 秋田城跡 111次 調査 出土 具注暦 기재 漆紙文書-
三上喜孝(Mikami Yoshitaka),오택현(번역자) 한국목간학회 2019 목간과 문자 Vol.0 No.22
본고는 매년 최근 일본에서 출토된 목간 중 주목되는 것을 선택해 소개했지만, 이번에는 작년에 이어서 필자가 조사에 관여한 漆紙文書의 출토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秋田城이란 秋田県 秋田市에 있는 고대 城柵으로 山形県 庄内地方에 있던 出羽柵을 733년(天平5)에 이동시킨 것이다. 8세기 후반에는 出羽国府를 두었다고 하는 견해가 있다. 秋田市 教育委員会에 의해 발굴조사가 진행되었고, 최근 조사에서 漆紙文書, 木簡, 墨書土器와 같은 유물에서 문자자료가 대량으로 확인되었다. 2018년 111차 조사에서는 秋田城의 西門 유적지 부근에서 발굴된 토기에 부착되었던 漆紙文書가 출토되었다. 적외선 카메라를 사용해 조사해 보니 고대 具注曆의 일부가 확인되었다. 具注暦이란 지금의 달력인데, 暦日을 표시한 것 이외에도 日의 干支, 納音, 十二直, 節気, 七十二候, 吉凶과 禍福 등의 暦注를 적어 놓은 暦이었던 것이다. 고대 일본에서는 具注暦이 매년 중앙정부의 陰陽寮에서 작성되어 中務省을 거쳐 諸司·諸国에게 배포되었다. 그러나 頒暦의 실태는 諸国에서 雑掌들이 都에 가서 서사해 가지고 왔다고 생각된다. 国府에 준비된 具注暦은 다시 동일하게 서사되어 国府 내의 기관과 国分寺 그리고 郡家 등에도 구비되었을 것이다. 具注暦의 서식은 일반적으로 상 · 중 · 하 3단으로 되어 있다. 상단에는 日付 · 干支 · 納音 · 十二直, 중단에는 24절기와 七十二候, 하단에는 暦注와 吉事注 등을 기재했다. 고대의 具注暦은 각지에서 漆紙文書의 형태로 출토되고 있다. 正倉院 文書에서 전래된 3개의 사례를 포함해 具注曆은 이제까지 15건 정도 확인되고 있다. 이번에 출토된 秋田城 111차 조사 출토 漆紙文書는 남겨진 문자 정보에서 宝亀 9년(778) 具注暦으로 4월 30일~5월 3일 부분일 가능성이 높다. 이것은 漆紙文書가 부착되어 있던 토기의 연대와도 일치하는 연대관이다. 秋田城跡에서는 天平宝字 3년(759)의 具注暦 漆紙文書가 발견되었고, 기록된 具注暦은 儀鳳暦이다. 하지만 이번에 발견된 778년 暦은 大衍暦이여서 하나의 유적에서 儀鳳暦에서 大衍暦까지의 具注暦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라고 생각된다. 또 잘못 서사되었다고 생각되는 부분도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秋田城이라는 官司에서 具注暦이 2차로 서사되었을 가능성도 엿볼 수 있다. Akita Castle(秋田城) is an ancient a fortress and a palisade(城柵) in Akita, Akita Prefecture(秋田県), and an excavation was conducted by the Akita City Education Committee(秋田市教育委員会). In the 111th survey in 2018, Lacquered documents(漆紙文書) were unearthed near the west gate of Akita Castle(秋田城). An infrared(赤外線) camera showed that some of the ancient Juzhuli(具注曆, annotated calendar) were identified. The form of the sphere force is generally in three stages: top, middle, and bottom. The 111st Akita Castle(秋田城) 111th investigation of the Lacquer Paper document is highly likely to be the part of the calendar from April 30 to May 3. The 778-year-old calendar, which was discovered this time, is a valuable reference to the transition from the Giho calendar(儀鳳暦) to the Taisho calendar(大衍暦) in one site.
三上喜孝 경북대학교 인문학술원 2024 동서인문 Vol.- No.25
이 글은 “龍王”명 목간에 대해 고찰한다. 한국에서 출토된 고대 “용왕”명 목간으로는 창녕 화왕산성 출토 목간과 경주 인용사지 출토 목간의 2점이 알려져 있다. 전자는 人形으로 가공되어 있고, 후자는 목간 내용 속에 인물 2명의 이름과 나이가 기재되어 있다. 이들 목간은 祈雨祭에 바탕을 둔 목간으로 생각된다. 경주 월지에서 출토된 “辛審龍王”명 각서토기는 왕궁에 인접한 연못에서 용왕 제사를 올렸다는 것을 뜻한다. 한편 일본의 平安宮에서도 왕궁에 인접한 神泉苑이라는 연못에서 용왕 제사를 하였다는 것이 확인되어 있어 양자의 공통성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에서 출토된 “용왕”명 고대 목간에 대해 검토한 결과 祈雨祭만이 아니라 토지 改變에 따른 제사와 관련된 것도 있어 용왕 제사에도 여러 목적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용왕 제사는 불교나 陰陽道를 사상적 기반으로 하고 그 제사 내용에도 기우·止雨 제사만이 아니라 地鎭이나 토지 개변에 따른 제사 등 여러 종류가 있었다. 앞으로 이 점에 유의하면서 각 “용왕”명 목간의 의미를 분석해야 할 것이다. 한국 출토 “용왕”명 목간에 대해서도 그 사상적 기반이 무엇이었는지 널리 동아시아에서 행해진 용왕 제사를 통해 생각해야 한다. This paper examines wooden tablets bearing the inscription “Dragon King(龍王)”. There are two known ancient wooden tablets bearing the inscription “龍王” excavated in Korea: one from Hwawangsanseong Fortress(火旺山城) in Changnyeong(昌寧), and the other from the site of Inyongsa Temple(仁容寺) in Gyeongju(慶州). The former was carved into a doll, and the latter has two people, their names and ages written on it. These wooden tablets are thought to be wooden tablets based on rain-making rituals(祈雨祭祀). The inscribed earthenware with the inscription “Shinshin(辛審) Dragon King(龍王)” excavated from Wolji Pond(月池) in Gyeongju(慶州) indicates that Dragon King rituals were held in a pond adjacent to the royal palace. On the other hand, it has been confirmed that Dragon King rituals were also held in a pond called “Shinsenen(神泉苑)” adjacent to the royal palace at the Heian(平安) Palace in Japan, and a commonality between the two can be confirmed. When examining the ancient wooden tablets bearing the inscription “Dragon King” excavated in Japan, it is clear that some were not only for rain-making rituals, but also related to rituals associated with land modification, and that Dragon King rituals had a variety of purpos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