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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

        신숙주, 충 · 불충을 다시보다

        나천수(羅千洙)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2020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Vol.84 No.-

        신숙주는 세간 사람들에게 변절자의 대명사처럼 인식되고, 그동안 우리나라 소설이나 TV 드라마에서도 단종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변절자로 묘사되었다. 그 이유는 남효온이 지은「육신전」에서 단종의 편에 서지 않았다는 말 한마디 때문이다. 또 남효온의「육신전」을 단초로 일제 강점기 이후부터 조선인의 혼을 폄하하는 차원에서 신숙주를 변절의 대명사로 소설, 영화, TV드라마에서 등장케 하였다. 과연 신숙주는 변절자인지 궁금하다. 논자는 최초 신숙주를 폄하하는 글을 쓴 남효온의『추강집』 속에 수록된「육신전」을 살펴보던 중에, 1576년 선조 때 발견되어 경연에서 육신전에 대한 잘못된 점을 선조가 열거하면서 질타하였는데, 현재 세간에서 볼 수 있는『추강집』에는 1577년에 간행된 것으로 이 재간본에는 선조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한 부분이 모두 삭제 된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선조가 발견한 추강집의 오류는 초간본에서의 오류를 지적한 것이다. 그리하여 선조가 지적한 부분을 모두 개작하여 재간된 간행본이 현재 세간에 발견된『추강집』이므로 이를 위작이 아닐까 반문해 보는 것이다. 한편 신숙주의 충의 단면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은 그가 저술한『해동제국기』라고 논자는 주장한다. 세종의 명을 받아 일본을 다녀온 사행보고서는『세종실록』102권[1443년(세종25년) 10월13일]자 기사에 분명히 ‘일본국(日本國)에 갔던 통신사 변효문(卞孝文)이 돌아와 경상도 옥포(玉浦)에 이르러 치계(馳啓)하기를’ 란 기록으로 보아 사행보고서는 이미 세종 때에 보고한 것이다. 그로부터 28년 후인 성종 때 사행 보고서로 『해동제국기』를 썼다는 말은 맞지 않은 것이다. 또한『 해동제국기』 서문에는 사행 보고서와는 전혀 무관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그것은 왕이 지녀야할 덕목을 열거해 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부분에 착안하여 왜『 해동제국기』를 썼느냐에 질문을 하고, 그에 대한 답변을 함으로 신숙주의 충(忠)의 단면을 밝혀 낸 것이다. This paper examines the loyalty of Shin Suk-ju who has been recognized by many as a traitor and has long been described as such in Korean novels or dramas for not supporting King Danjong. This was largely due to『Yuk-Sin-Jeon』 by Nam Hyo-on where he commented that Shin Suk-ju did not stand by King Danjong’s side. Shin Suk-ju became a byword for betrayer as motivated by『Yuk-Sin-Jeon』 and frequently appeared in a novel, movie or TV drama in order to disparage the spirit of the Joseon people. When King Seonjo discovered『Yuk-Sin-Jeon』 in 1576, he criticized its errors at Gyeongyeon. However, it was identified that all the errors King Seonjo pointed out were deleted from『Yuk-Sin-Jeon』 published in 1577, the only publication discovered to the current generation as part of Chu-Gang-Jip. If what was criticized in the first publication were all adapted and re-published, the book can be considered as a forgery. Meanwhile, Shin Suk-ju’s loyalty to the King can be found in his book Haedong Chegukki where he enumerated virtues for a king to keep. According to volume 102 of Sejong Chronicles, it was evident that a private report by Byun Hyo-mun to King Sejong after he came back from Japan was reported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ng. Therefore, it does not make sense to say Haedong Chegukki was written as a private report 28 years later, during the reign of King Sungjong. Based on these findings, this paper discloses loyal aspect of Shin Suk-ju by reviewing Haedong Chegukki.

      • KCI등재후보

        세조대 신숙주(申叔舟)의 대여진활동(對女眞活動)과 비변대책(備邊對策)

        안선미 ( Ahn Sun Mee ) 청람사학회 2020 靑藍史學 Vol.31 No.-

        본 연구의 목적은 세조대 신숙주가 ‘여진 전문가’로 인식되고 중용된 까닭을 분석하고, 양계 지방 체찰사로서 추진한 대여진활동과 다양한 여진 종족들을 상대하기 위해 건의한 비변대책을 구명하는 데 있다. 신숙주는 세조 4년 평안도 도체찰사로 활동하면서 진관체제를 개편하고, 자성군 폐지를 건의하여 4군의 폐지를 완성시켰다. 세조 5년과 6년에는 함길도 도체찰사로 세 번 연속 파견되었다. 세조 5년 여진족들의 화해를 핑계로 우디거를 적극 초무하여 향후 ‘이이제이’의 계책을 발휘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고, 이듬해에는 모련위를 정벌하였다. 이후에는 체찰사로서 활동하며 쌓은 경험과 변경 지식을 토대로 다양한 비변대책을 건의하였다. 그는 니마차 우디거를 적극 초무할 것을 건의하였고, 건주위를 회유하면서도 그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하였다. 신숙주는 끊임없이 여진 세력의 동향을 살피면서 조선에 유리한 방향으로 여진 관계를 이끌어 가려하였고, 때로는 중국의 명을 따르지 않고 국익을 위해 현실적인 길을 걸었다. 또한 새로운 진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는 등 북방 개척에도 강한 의지를 보였다. 세조대 적극적으로 북방을 경영하여 그 결과 국경선을 지킬 수 있었던 배경에는 신숙주의 여진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변경 지식, 그리고 사안이 있을 때마다 제시되는 적실한 비변대책이 있었다. Shin Suk-ju tried to lead the Jurchen relationship in a direction favorable to Joseon, constantly looking at the trend of Jurchen, sometimes taking a realistic path for the national interest without following China’s orders. He also showed a strong will to explore the northern part of the country by offering to set up a new camp while continuing his inspection of the Heo-Soo-Ra. Behind the active management of the northern part during King Sejo’s Reign, which resulted in the protection of the border, were accurate information on Jurchen of Sin Suk-ju, and the knowledge of border areas, as well as proper defence measures, which were presented whenever there was an issue.

      • KCI등재

        ≪洪武正韻譯訓≫의 俗音 표기와 관련된 몇 가지 문제

        신용권 영남중국어문학회 2016 중국어문학 Vol.0 No.71

        After the invention of Hunminjeongeum(訓民正音), King Sejong ordered a group of scholars, including Sin Suk-ju(申叔舟), to translate the Hongmujeongun (洪武正韻) into Korean. Translation and Annotation of the Hongmujeongun was completed in 1455, this book is Hongmujeongunyeokhun (洪武正韻譯訓). In this book, the pronunciation devices in the Hongmujeongun were replaced by the Korean alphabet. And, in addition to the readings defined in the Hongmujeongun, i.e, the Jeongeum(正音, standard sound), the contemporary Mandarin readings were included under the name of Sokeum(俗音, popular sound). This paper aims to study the following problems about the Sokeum of Hongmujeongunyeokhun. First, I will analyze a difference between Jeongeum and Sokeum in this book and be concerned with several problems about transcription. Secondly, I will scrutinize Chinese phonetic changes reflected in the fifteenth century published book. Finally, I am looking into the characteristics of the Chinese readings reflected in this books in connection with the motivation of publication.

      • KCI등재후보

        석주 이상룡의 선비정신과 구국운동

        변창구 한국민족사상학회 2014 민족사상 Vol.8 No.1

        Suk Ju, Lee Sang-yong as an innovative confucians is the greatest independence activist based on the Sun-bi spirits. In order to achieve the national liberation, he went through various sufferings. In the early years of the national salvation movement, he raised an army in the cause of justice, but defeated. And then he had developed a mass-education campaign through establishing a cooperative school(協同學校) and the Andong Branch of Korean Association(大韓協會 安東支會). After the annexation treaty between Korea and Japan in 1910, he took asylum in Manchuria. In there he established various base camps for an anti-Japanese struggle such as Kyung Hak Sa(耕學社), Bu Min Dan(扶民團), Korean People Association(韓族會) and Sin Heung Military School(新興武官學校). And at the same time he made an effort to integrate the division and conflicts within the Shanghai Provisional Government of Korea. Like this, Suk Ju devoted his whole life to the national liberation movement. Therefore today's leaders have to learn his Sun-bi spirits such as giving up life for justice(捨生取義). 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은 혁신유림(革新儒林)으로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다. 전통적인 추로지향((鄒魯之鄕)인 안동의 명문가 고성(固城) 이씨(李氏)의 종손으로 태어난 그는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쓰러져가는 조국을 구하기 위하여 스스로 형극의 길을 자초하였다. 그의 구국운동은 환경의 변화에 대응하면서 다양한 방법과 형태로 전개되었다. 초기에는 의병항쟁을 전개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협동학교와 대한협회 안동지회의 설립을 통하여 민족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10년 한일합병으로 대한협회가 해산되자 국내에서의 구국운동이 불가능함을 인식하고 해외망명을 통하여 항일무장투쟁의 기지 건설에 몰두하였다. 서간도에서 경학사(耕學社)를 시작으로 부민단(扶民團)․한족회(韓族會)․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등의 조직을 구축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상해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으로 추대되어 당시 임정 내부의 분열과 갈등을 조정․통합하는데 혼신의 노력을 다하였다. 이처럼 석주는 척박하고 살벌한 이국 땅 서간도에서 민족과 고난을 함께하면서 운명을 달리한 최후의 순간까지 조국의 광복에 헌신하였다. 이러한 그의 실천행동의 배경에는 견위수명(見危授命)과 사생취의(捨生取義)라는 참된 선비정신이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여야 한다.

      • KCI등재

        언문청과 창제시기와 정음청의 위치

        이근우(Rhee Kun woo) 부경대학교 인문사회과학연구소 2016 인문사회과학연구 Vol.17 No.1

        종래 언문과 훈민정음이 동일하다는 전제에서 언문청과 정음청도 동일한 기관으로 이해해 왔다. 이 글에서는 언문과 훈민정음이 다를 수 있다는 전제에서 검토하여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었다. 첫째, 조선왕조실록의 이른바 언문청 설치 기사는 태조 실록을 두는 장소에 대한 내용이며 언문청이 처음으로 설치된 사실을 보여주는 기사가 아니다. 언문청은 언문이 창제된 직후인 1444년 경에 설치되어 1506년에 폐지되었다. 둘째, 이현로는 언문청에서 운회의 번역, 훈민정음의 완성, 동국정운의 편찬에 신숙주와 함께 참여하였으므로, 훈민정음 및 동국정운은 언문청에서 편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정음청은 책방, 사표국과 함께 禁中에 있었으나 언문청은 얕고 사람들에게 노출되어 있다고 한 점에서 闕內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넷째, 정음 청은 출판을 위한 대규모 조직을 갖추었으며 소학집성 및 불경 등을 간행하였다. 따라서 언문청과 정음청은 서로 다른 기관으로 볼 수 있으며, 언문과 훈민정음이 다르다는 전제도 유용하다. Up to now, based on preconceived premise regarding Korean alphabet(Unmun) and Correct sound to teach people(Hunminjungum) as same thing, Bureau of Korean alphabet and Bureau of correct sound have been recognized as the same institution. In this paper, using another premise that Unmun and Hunminjungum can be different, the results as follows are obtained. Firstly, so-called the article showing the establishment of Bureau of Korean alphabet does not mention the constitution of that. It relates to the stock of the Annals of Taejo, founder of Joseon dynasty. Bureau of Korean alphabet would be built in 1444 A.D. immediately after the invention of Korean alphabet(1443) and abolished in 1506. Secondly, Lee Hyun Ro participated in the translating Unhoi(phonetic dictionary), the completing Correct sound to teach people (Hunminjungum) and Corret sound of east country(Donggukjungun) with Sin Suk Ju in the Bureau of Korean alphabet. Thirdly, Bureau of Correct sound was located in the palace with Book room and Bureau of gun powder, but the location of Bureau of Korean alphabet was shallow and exposed to the outsiders. Fourthly, Bureau of correct sound contained several lower branches to publish, and printed Buddhist scriptures and Elementary Teaching(Sohak). Accordingly, Bureau of Korean alphabet and Bureau of correct sound can be different organization, and the premise of this paper can be available.

      • KCI등재

        『海東諸國紀』의 역사지리적 고찰

        엄찬호(Eom Chan-Ho) 한일관계사학회 2007 한일관계사연구 Vol.27 No.-

        통신사에 관한 연구는 지금까지 한일 양국에서 많은 축적을 보아 왔는데, 그 중심이 되는 것은 역사학과 문학 분야였다. 역사학 분야에서는 주로 문화교류사에 중점을 두어, 통신사를 매개로 유학, 본초학(한의학), 서예 등을 중심으로 한 문화의 접촉, 정치적인 내막, 통신사를 매개로 한 경제유통사 등이 다루어졌다. 특히 최근에는 상류계급뿐 아니라 일반대중과의 교류, 통신사 통과지역에 남은 축제 등 민속관련 사항에도 연구 지평이 넓어지고 있다. 또 문학에서는 통신사의 사행록 그 자체나 거기에 삽입된 시문학, 일본 측 기록에 남아있는 시문의 응수 등이 연구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현재에 이르기까지 통신사에 관해서 지리학적인 고찰을 진행한 연구는 매우 드물다. 해동제국기는 일찍부터 일본의 역사, 지리, 풍속, 외교 등에 관한 방대한 자료를 담고 있어 외교관계사에서 중시되어 왔으며, 언어학적으로도 귀중한 사료이다. 신숙주는 그의 견식과 경험으로서 그 당시 일본에서 전래한 문헌과 왕년의 견문과 예조에 管掌된 기록 등을 참작하여 교린관계에 대한 후세의 軌範을 만들기 위해 해동제국기를 찬술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해동제국기에 대한 역사지리적 의미를 몇 가지로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해동제국기의 서두부분에 실려있는 지도로 ‘해동제국총도’를 비롯하여 총 9점이 실려있다. 이 지도들은 삼포지도를 제외하고는 일본의 행기도를 따르고 있으면서도 최신의 정보를 수록하고 있는 점, 해로의 里程이 상세한 점, 섬들이 자세히 그려 있는 점, 대마도와 일기도가 상세히 묘사되어 있는 점 등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특히 중세 일본과 관련된 지도로 가장 오래된 지도라는 점에서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둘째, 해동제국기는 어떠한 자료보다도 방대한 지명을 수록하고 있어 일본의 지명연구나 중세 언어연구의 큰 초석이 될 것이다. 본문에서는 조선에서 日本 및 琉球에 이르는 도로리수를 기록하며, 중요한 기착지점들을 명시하고 있고, 또 외교관계속에서의 관련 있는 각지의 지명을 기록하고 있다. 아울러 지도에도 다수의 지명이 기록되어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셋째, 해동제국기에는 본문과 지도에 각 지역간의 거리가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풍부하게 표시된 해로 교통을 중심으로 한 거리 표시는 중세의 동아시아 항로연구나 해상교역 연구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넷째, 신숙주는 日本國俗과 琉球國俗을 통하여 일본과 유구의 풍속을 다양하게 기록하였다. 특히 그는 이들 자료를 기록하며 다른 통신사행 관료들이 보인 태도와는 다르게 일본과 유구를 통교 대상으로서 객관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곧 우리나라의 풍속과 다른 점이나 특이한 점을 소개하고 그들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여 수호통교에 있어 마음을 다하여 예의로 접대해야 함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해동제국기는 조선전기의 日本 및 琉球와의 관계, 그들 나라에 대한 지리적 인식, 풍속 등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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