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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일조선인, 일본의 지역사회를 살다 – 해방 후 다카라즈카(宝塚) 재일조선인의 정주와 생활을 중심으로

        정계향 한국구술사학회 2017 구술사연구 Vol.8 No.2

        오늘날 재일조선인의 역사는 100년을 넘어서고 있다. 1970년대부터는 고국으로의 귀환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재일조선인 2세를 중심으로, 정주국인 일본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본격적인 고민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고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 연구의 목적은 ‘다카라즈카(宝塚)’ 재일조선인의 정 주과정과 생활세계 분석을 통해, 재일조선인이 지역의 일본인 혹은 지역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어 왔는지 그 변화의 과정을 밝히는 것이다. 기존의 연구가 ‘재일조선인’이 가지고 있는 디아스포라적 특징, 특수성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여기에서는 지역주민으 로서의 재일조선인의 존재 양상에 주목했다. 해방 후 다카라즈카는 지역재건과정에서 시정촌 합병을 통해 ‘시’를 탄생시켰고, 도시계획의 수립과 실행 속에서 도시화가 진전 되면서 주택도시, 관광도시로 발전했다. 외부로부터 유입된 새로운 인구는 전통적 지역 질서에 변화를 가져왔고, 자치회 역시 그 역할이 점차 축소되었다. 다카라즈카 재일조 선인은 식민지기에 진행된 각종 지역공사에 종사하며 이주를 시작했다. 해방 후에도 상당수가 일본에 계속 정주하면서, 조련지부와 민단지부 등 재일조선인 조직을 만들고 민족학교를 설립했다. 다카라즈카에서 일하고, 학교를 다니고, 자치회에 가입하는 등 다카라즈카의 주민으로서의 일상을 보냈다. 한편으로 생활 속에서 민족차별을 경험하 고, 재일조선인 조직 및 민족학교를 통해 민족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등 민족 집단으로서의 일상도 존재하고 있었다. 최근 다카라즈카 지역사회의 배타성이 점차 약 화되고, 재일조선인 조직 역시 기능이 축소되면서 다카라즈카에서는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만들어지고 있다. 또 일부 재일조선인은 다카라즈카 지역발전에 기여해온 재일조선인의 역사를 새롭게 발굴하며 ‘자기서사’를 만들어가고 있다. The history of Korean residents in Japan has been over one hundred year. Once these residents had to accept the reality that repatriation to their homeland was extremely difficult since 1970, they began to seriously consider how to sustain themselves in Japan. And such a suffering has continued on to this day. The purpose of this research is to analyze settlement of Korean residents in Japan and their lifestyle. It intends to find out how these South Koreans have coped with their reality and maintained relationship with their local community in Japan through their former life in Korea. Whereas prior researches were interested in the uniqueness of the Korean resident in Japan, this research focuses on the presence aspect of ‘Zainichi(在日)’ as local natives in Japan society. After World War II, ‘Takaratuka(宝塚)’ has developed into a ‘city’ through the Housing Master Plans as part of the local reconstruction process. Through planning and execution, the city has developed as a dormitory suburb and a tourist attraction. The newly introduced inhabitants from the neighbor land who were disjointed from ‘cou(講)’ organization of local rural village had their roles altered in the local community. A self-governing body neighborhood of workers in the local construction site w and has been consistently passed on the next generation. They made their own ‘the Korean Residents Association in Japan(民團)’ and ‘General Association of Korean Residents in Japan(總聯),’ and founded their own national school which they have managed decently since Korea liberation. As local citizens, the ‘Zainichi second generation’ reveals their way of thinking. As they remember the home country of their parents, they don't have as much affection and sense of belonging to ‘Takaratuka.’ But in recent days, there are newly developing connections and communications between Koreans and Japanese in ‘Takaratuka,’ because of weakened exclusiveness, and reduced role of ‘Zainichi’ as an organization, and less interest in their home cou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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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 직후 중국 동북 조선인사회의 동향-최국철의 장편소설 『광복의 후예들』 분석을 중심으로-

        박춘란 ( 朴春蘭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9 한국학연구 Vol.0 No.54

        일제 패망 후 중국 동북지역은 새롭게 재편되는 국제질서의 중심이자 공산당과 국민당의 각축장이 된다. 게다가 소련군의 만행과 중국인들의 노골적인 보복으로 인해 중국에 이주해 있던 조선인들은 생존의 위협을 느끼게 되면서 귀환과 정주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신분을 막론하고 80여 만 명이 선택한 조선반도로의 귀환의 배경에는 조국과 민족, 고향 의식 외에도 국민당의 韓僑귀환정책, 동북의 복잡한 정세와 공산당의 이념에 위배되는 신분과 성향으로 인해 우려될 수밖에 없는 생존 및 이데올로기 문제와 직결되어 있었다. 반면 당시 동북에 거주 중이던 과반수이상의 조선인들이 중국정주를 선택한 이유는 삶을 영위하기 위한 현실적인 선택에서 기인되었다. 『광복의 후예들』에서 정주를 선택한 조선인들은 고향이라는 정신적인 존재감보다는 생존기반이 확보된 땅과 집이 있는 곳에 제2의 고향을 건설하고자 했다. 그리고 중국 땅에서 태어나 ‘민족’과 ‘국민’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심하게 겪으면서 성장한 조선인 2세대들은 모국에 거리감을 느끼는 대신 나서 자란 중국 땅에 더 애착을 가지게 되었고 선조들이 개척해 놓은 땅을 지키려는 의지도 강했다. 소설에는 반영되지 않았지만 당시 북한의 영향력, 한반도내에서 좌우의 충돌과 분단, 동북 현지에 있던 민족지도자들의 영향도 당시 조선인들의 선택에 영향을 미쳤다. 정주를 선택한 중국 동북지역의 조선인들은 공산당의 토지개혁공작대에 포섭되면서 계급 의식이 싹트고 공작대의 동원 하에 마을의 지주들을 모두 청산하여 땅을 분배받고 땅의 새로운 주인이 된다. 그 과정에 조선인들은 계급문제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겪으면서 전통적인 관념의 벽에 부딪혀 갈등하기도 하지만 사회적 신분의 재편을 거치면서 봉건적인 계급인식에서 완전히 벗어나 공산당의 계급관념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땅이라는 생존기반을 보장 받고 신분과 지위가 상승하면서 주인공 의식이 생기게 된 조선인들은 선조들이 개척한 땅을 지키고 중국 땅에 더 깊숙이 뿌리를 내리기 위해 중국의 국내 해방전쟁에 참전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에 기여함으로써 이 땅의 당당한 주인 될 권리를 획득하게 되었다. 日帝敗亡後, 中國東北地區成為重建的國際秩序的中心以及共產黨和國民黨的角逐場。再加上蘇軍的暴行和中國人露骨的報復, 移居在中國的朝鮮人感到生存受到威脅的同時, 也開始面臨著歸國還是定居的問題。不論身份, 有80多萬人選擇歸還朝鮮半島, 除了祖國、民族和故鄉意識之外, 這一事實也與由國民黨的韓僑歸國政策、東北的複雜形勢、以及與共產黨理念背離的身份和傾向等因素造成的令人憂慮的生存和意識形態問題息息相關。另一方面, 當時居住在東北的過半數朝鮮人選擇定居中國的理由也是基於為了生活的現實選擇。比起故鄉這種精神上的存在, 『光復的後裔』中選擇定居中國的朝鮮人更願意在提供生存基礎的土地和家園所在之處建設第二故鄉。出生並成長於中國, 經受着民族和國民之間主體性嚴重混亂的第二代朝鮮人, 在感到和母國之間距離的同時, 卻深深地愛上了燦爛的中國大地, 想要守住祖先開拓的土地。小說中未曾反映, 但當時北韓的影響力、韓半島內部左右兩派的衝突和分裂, 以及東北當地指導者的影響等都對朝鮮人的選擇施加了影響。 選擇定居下來的中國東北地區的朝鮮人被共產黨土改工作隊所招攬, 開始產生了階級意識, 他們在工作隊的動員下, 全部清算了鄉村的地主階層並分配了他們的土地, 成為了土地新的主人。在此過程中, 朝鮮人雖然經歷了階級問題意識的轉換以及和傳統觀念之間的碰撞矛盾, 但是通過再建社會身份, 他們完全擺脫了封建階級意識並接受了共產黨的階級觀念。 保有土地這一生存根基, 伴隨身份和地位上升產生了主人公意識的朝鮮人, 為了堅守祖先開拓的土地並在中國大地上落地生根, 通過參加中國國內解放戰爭和在中華人民共和國的建國中貢獻力量, 獲得了成為這片土地堂堂正正主人的權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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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일조선인 자기서사의 정체성 정치와 윤리-서경식의 ‘재일(在日)’ 인식 비판-

        허병식 ( Huh Byung-shik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5 한국학연구 Vol.0 No.39

        서경식이 재일조선인의 과제로 삼고 있는 것은 식민주의의 극복이다. 그는 ‘재일코리언’이나 ‘재일한국인·조선인’ 같은 명칭에 반대하면서 ‘재일조선인’이라는 호칭이 올바르다고 주장한고 있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의 결과로 일본에 살게 된 조선인과 그 자손들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재일조선인’이라는 명칭을 자신들에게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도 서경식의 주장에 동의하여 재일조선인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의 재일조선인 인식과 식민주의,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민족 의식의 문제에 대해서는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서경식은 1970년대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내셔널리즘’이라는 틀에 가두는 것은 성급하고 단순한 시각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무엇보다 해방과 자립을 위한 투쟁이었고, 그것은 내셔널리즘에서 기독교, 자유주의에서 마르크스주의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정치적 입장의 차이를 유지한 채, 군사독재 타도라는 공동의 목표로 뭉친 일군의 사람들이 짊어진 역할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과 같은 재일조선인이 이러한 민주화 투쟁과 변화를 향한 역동적 과정에서 ‘바깥’에 놓여 있다는 점을 안타깝다고 말하고 있다. 일본의 재일조선인 사회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시민적 운동과 공생에 대한 추구에 대해 비판하면서, 재일조선인 해방의 문제는 공생의 문제이기 이전에 무엇보다도 먼저 ‘제국주의·식민주의의 극복’이라는 문제라고 주장하는 점에 대해서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재일조선인은 차별받고 있다고는 해도 일본 사회의 주민임에 틀립없지만, 동시에 그들은 원칙적으로 조선 민족의 일원이라는 인식이 일본 시민사회에 대한 합류나 이 안에서의 공생을 위한 시도를 반대하는 이유가 된다. 그가 비록 90년대 이후의 내셔널리즘 비판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어느 정도 동의를 표하는 입장을 자주 보여주지만, 그럼에도 그의 내셔널리즘을 문제 삼아야 하는 이유는 이러한 맥락이다. 식민주의의 기억 속에서 집단화되어간 재일조선인들에게 일어난 문화적, 상상적 자아구축의 과정을 복합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재일조선인의 자아의 구축에 대해 말하는 것은 정체성 형성, 문화적 차이의 구성, 시민권과 소속감 등 사회적 과정에 관한 복잡하고 중요한 문제들을 살피는 것이 되어야 한다. 徐京植が在日朝鮮人の課題としていることは植民主義の克服である。彼は「在日コリアン」や「在日韓国人·朝鮮人」のような名称に反対しながら、「在日朝鮮人」という呼称が正しいと主張している。日本の植民地支配の結果として日本に生きることとなった朝鮮人と、その子孫たちを意味するという点で「在日朝鮮人」という名称を自分たちに付与するべきだということである。本稿でも徐京植の主張に同意して在日朝鮮人という名称を使っているが、彼の在日朝鮮人認識と植民主義、それからそれを巡った民族意識の問題に対しては検討する必要があると考える。 徐京植は1970年代韓国の民主化運動と金芝河の問題について述べながら、韓国の民主化運動を「ナショナリズム」という枠に閉じ込めたり、それを金芝河をもって代表させることは気早で単純な視角に過ぎないと主張する。彼によると、韓国の民主化運動は何より解放と自立のための闘争であったし、それはナショナリズムから基督教、自由主義からマルクス主義に至るまで広範な政治的立場の違いを維持したまま、軍事独裁の打倒という共同の目標で団結した一群の人々が担った役割であった。従って、このような運動に加えられた批判と、これを「金芝河」という個人の変貌と関連させて説明する方式は問題があるということだ。しかし、彼は自分のような在日朝鮮人がこのような民主化闘争と変化に向かった力動的過程で、「外」に置かれているという点がもどかしいと語っている。 日本の在日朝鮮人社会の内部で起っている市民的運動と共生に対する追求に対して批判しながら、在日朝鮮人解放の問題は共生の問題である以前に、何よりも先に「帝国主義·植民主義の克服」の問題だと主張する点に対しても検討する必要がある。在日朝鮮人は差別されているとは言え、日本社会の住民であることに間違いないが、同時に彼らは原則的に朝鮮民族の一員という認識が日本の市民社会に対する合流やその中における共生のための試みを反対する理由となる。彼がたとえ90年代以後のナショナリズム批判に対して深く理解し、ある程度同意を呈する立場をよく示すが、それにも関わらず彼のナショナリズムを問題とするべき理由はこのような脈絡からである。 徐京植がよく引用するユダヤ人ドイツ文学研究者のジャン·アメリーが「ユダヤ人として生きることの不可避性と不可能性」について語り、「私をユダヤ人と結び付けることは、脅威と対面した状態における連帯である。」と語ったことは記憶する必要がある。徐京植自身にも在日朝鮮人というものの不可避性と共に在日朝鮮人となることの不可能性に対する考察も必要であろうからだ。 彼は常に「被抑圧者」として在日朝鮮人の主体性を本質主義的に固定化している。日本の帝国主義支配と韓国の分断、以後の日本社会の変化のような歴史的過程だけでなく、多様な日常的な実践の中で在日朝鮮人の差異とアイデンティティが構成され、その過程の中に多様な政治が作動し、重なっているという点について指摘する必要がある。言い換えると、帝国主義日本と分断された韓国というシステムの外部に置かれた在日朝鮮人の位置を特権化するよりは、むしろそのようなシステムが持っている重層的アイデンティティの中で矛盾的に存在する在日朝鮮人の現在を明確に理解することが必要だと考え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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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양지 소설에 나타난 경계인 양상 연구

        오선영(Oh, Seun-Young) 한국문학회 2011 韓國文學論叢 Vol.59 No.-

        일제 식민지 시기 동안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 러시아, 만주, 중국 등으로 이주하였다. 이들의 이주는 징용ㆍ징병, 경제적 어려움, 이데올로기의 문제 등 식민지 시기라는 시대적 상황에 기인하여 이루어졌다. 이러한 원치 않은 이주는 수많은 디아스포라를 만들어 내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본고에서 다루고 있는 이양지의 소설 역시 이러한 디아스포라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실제로 작가 이양지는 재일조선인 2세에 해당한다. 조선인(한국인)에 대한 의식이 내면화 되어 있으면서도, 일본 국적을 가지고 일본에서 살아야 했던 이양지의 경험은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재일조선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먼저 〈나비타령〉은 화풍여관을 그만 둔 아이꼬가 한국으로 오기까지의 과정을 다루고 있다. 재일조선인 2세인 아이꼬는 일본으로 귀화하여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국적의 여부와 관계없이 조선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힘들어한다. 재일조선인을 보는 일본인들의 시선, 그 속에 내재된 폭력과 배제로 인해 공포감을 느끼고, 스스로를 검열하려 한다. 재일조선인 1세대처럼 실질적인 식민지나 강제 이주를 경험하지 않은 2세대들에게 이러한 무언의 폭력과 배제, 소외는 극심한 두려움으로 나타난다. 그렇다고 하여 그들이 모국이라고 여기는 한국에서 그들을 환대한 것도 아니었다. 〈유희〉는 졸업을 한 학기 남겨둔 상황에서 일본으로 돌아간 유희를 회상하는 언니의 시선으로 쓰여있다. 유희를 도와주고 싶었다던 언니의 고백은 자신은 이미 한국인이라는 주체에 서 있다는 가정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때 주체를 가르는 기준은 능숙한 한국어 사용이다. 국민국가에서 언어는 주체와 타자를 구분하는 기준이 되며, 이에 부합하지 못하는 이들은 타자, 이방인이 된다. 또한 모든 문제는 유희에게 달렸다는 언니와 숙모의 말은 재일조선인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해석하여, 재일조선인의 위치를 더 협소하고 고립되게 만든다. 〈나비타령〉과 〈유희〉의 주인공이 작가 이양지의 모습을 반영한다고 했을 때, 이는 이양지 개인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재일조선인 전체의 문제로 확장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작품 속 인물이 겪는 갈등과 고민은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이나 사변적인 문제가 아니라 재일조선인, 디아스포라이기 때문에 겪을 수밖에 없는 사회적, 역사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비타령〉과 〈유희〉는 재일조선인을 경계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게 만드는 한국과 일본의 사회적 상황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디아스포라는 화려한 근대국민국가가 만들어낸 근대의 그림자이다. 이는 일제 식민지 시기, 해방을 거쳐 지금도 계속 되고 있는 진행형의 문제이다. 그럼 점에서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 없이 재일조선인들을 차별화 하는 일본인의 모습과 동포, 민족이라 하면서도 재일조선인들을 또 다시 타자화하고 배제하는 한국인의 모습은 이들을 영원한 이방인, 경계인으로 만들고 있는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이라 할 수 있다.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many Koreans emigrated to Japan, Russia, Manchuria, China. Their emigration resulted from periodical condition of colonial rule such as drafting, economic burden, ideology. This kind of unwanted emigration produced huge Diaspora and it has been continued today. Lee Yang-ji, who is second generation of Korean residents in Japan, also treat the matter of Diaspora in her novel. Lee Yang-ji’s experience to live in Japan with Japanese Nationality but have internalized Korean conscious represents the Korean residents in Japan as a marginal man. Firstly, Butterfly Taryung treat a process of Iko’s return to Korea after she quit her job of Hwapung-inn. Iko, who is the second generation of Korean residents in Japan, get the Japanese nationality by being naturalized but having trouble because she is Korean regardless of nationality. Frightened by not the physical violence but the invisible violence of eyes, she try censoring herself. Iko’s this kind of behavior represents Japanese aspect about Korean residents in Japan. It is severe fear for second generation of Korean residents in Japan who didn’t experience a direct colonial rule or deportation to suffer a silent violence, exclusion and alienation. But that doesn’t mean Korea, their mother country, welcome them. Yuhee is written by her old sister’s perspective recalling Yuhee who went back to Japan when one semester left to graduate. Her confession that she’d like to help Yuhee starts from an assumption she has already identity as a Korean and the fluent Korean speaking is a standard dividing the subject and other. In the national state, language is being a criteria to distinguish the subject and the other, which is mean a man who can’t speak Korean fluently can be a stranger. Also what Yuhee’s old sister and aunt says all of the matters is up to Yuhee makes the status of Korean residents in Japan getting narrow and isolated by interpreting the matter of Korean residents in Japan as the matter of individual. The Korean residents in Japan represented in Butterfly Taryung and Yuhee were the figure of a marginal man who was included neither Korea and Japan. The Korean residents with Japan nationality should stand silent violence because they aren’t Japanese while they have to be excluded because of being unskilled Korean even in the Koreans. It was the matter of Iko and Yuhee in her novel and also the matter of reality writer was facing. Life as a marginal man represented in her novel reflects writer’s self-consciousness as a marginal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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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압록강 하류지역 安東朝鮮人會의 活動과 性格

        吳秉漢(OH Byung-han) 한국근현대사학회 2021 한국 근현대사 연구 Vol.98 No.-

        본 연구는 191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압록강 연안의 대표적인 조선인 친일단체였던 안동조선인회의 압록강 하류지역에서의 활동과 그 성격을 규명하고자 한 것이다. 안동조선인회는 1913년 안동조선인조합를 전신으로 설립되어 상류지역까지 지회를 설립하였다. 하지만 안동현 북쪽 지역은 교통이 불편하여 일본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였다. 1920년대 이후부터는 독립운동단체의 활동으로 이 지역에서 안동조선인회의 활동은 위축되었다. 반면 하류지역에서는 1920년대까지 회원 증가와 지부가 신설 등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안동조선인회의 지회 대부분은 조선인 거주 지역이자 일본의 경찰관주재소가 설치된 지역에 설립되었다. 안동조선인회의 활동은 1910년대부터 조선인들의 생계와 직결된 상조문제를 비롯하여 조선인 아동들을 위한 보조서당 설립, 소득 증대를 위한 부업 알선 등에 집중되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하여 안동조선인회는 1930년대까지 안정적인 활동을 계속하면서 조선인들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30년대까지 안동을 비롯한 하류지역 조선인들 대부분은 여전히 소작인이나 일용직으로 생활고에 시달렸다. 학교 등 조선인 아동들을 위한 교육시설은 여전히 부족하였다. 단순 수공업 위주의 부업은 조선인들의 실질적인 소득 증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는 10년 이상 지속된 안동조선인회 활동이 조선인들의 생계 혹은 생활수준 향상에는 효과가 없었다는 의미였다. 이러한 점에서 안동조선인회는 설립 당시 일본이 주장하였던 조선인들의 생활 향상 혹은 보호와는 관계가 멀었다. 하지만 일본은 안동조선인회를 통하여 조선인들 사이에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조선인 친일단체로써 안동조선인회의 성격은 일본의 영향력에 따라 그 활동이 좌우되었다는 사실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This essay tried to explore the activity and character of Andong Chosun People’s Association(hereafter the Chosun Association) in the lower Aprok River area from 1910s to 1930s. The Chosun Association had been a representative Korean pro-Japanese organization since 1913. The most of immigrant Koreans in Aprok River area was influenced by Chosun Association. In particular, its influence was stronger in Andong and its surroundings than in other regions. However, Japanese influence did not reached to the northern area of Andong mainly because of traffic inconvenience. Following it, the activities in this region were reduced by independence movement groups in the 1920s. To the contrary, the members and the opening of branched in lower areas increased in the same period. And, most of branched was built where Japanese police boxes were. It mainly owe large part of its activities focused on immigrant Korean’s everyday life issue, such as land or house rental from Chinese, making of an auxiliary school for their children, and the arrangement of side jobs or works to increase income etc. It is why Chosun Association in lower area could continue to exist until the 1930s unlike the other area. Despite activities for 10 years, the lives of Koreans did not improve until 1930s. Most of the Koreans were suffering from hardship as a tenant or dialy worker. Educational facilities for Korean children, such as schools, were still lacking. Most of works centered on simple handscraft did not lead to income increasing. In this regard, the Chosun Association was far from improving or protecting the lives of Koreans that Japan claimed at the time of its opening. However, Chosun Association could be a way Japan was able to continuously expand its influence. It was the feature of Chosun Association as a Korean pro-Japanese organization should be found in the fact that its activities were influenced by Japanese 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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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한국 신문에 나타난 ‘朝鮮人’ 표현 양상 ― 헤드라인(headline)을 중심으로 ―

        尹榮珉 ( Yun Young-min ) 한국일어교육학회 2023 일본어교육연구 Vol.- No.62

        본 연구는 일제강점기 언론을 통해 ‘언어’가 식민지 국가 담론 형성에 미친 역할과 영향을 살펴보려는 것이다. 이에 이번에는 1910년부터 1945년까지 간행된 국내 신문을 대상으로 ‘朝鮮人’과 그 관련 표현에 착목하여 정량적인 파악을 하는 데 목적을 두고자 한다. 구체적으로는 신문의 헤드라인을 중심으로 이들 어휘의 출현과 사용 의도를 식민 정책 시기별로 나누어 관찰해 볼 것이다. 조사에 활용한 신문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와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신문아카이브’에서 공개하고 있는 신문 데이터베이스이며, 살펴본 결과 조선인을 지칭하는 표현은 ‘朝鮮人’ 뿐만 아니라 ‘鮮人’, ‘皇國臣民’, ‘요보(ヨボ)’, ‘半島人’ 등으로 나타났다. 한편, 한국에 대한 일본의 식민 정책 기간별로 나누어 조사해 본 바로는 먼저 제1기 무단통치기(無断統治期, 1910-1919)에는 ‘朝鮮人’과 ‘鮮人’의 출현이 많았으며, 제2기 문화통치기(文化統治期, 1919-1931)에는 ‘朝鮮人’, ‘鮮人’ 및 皇民’이 현저하였다. 마지막으로 제3기 민족말살통치기(民族抹殺統治期, 1931-1945)에는 ‘朝鮮人’, ‘鮮人’ 외에도 ‘皇國臣民’, ‘半島人’, ‘요보(ヨボ)’ 등과 같은 표현이 출현하고 있었으며, 특히 ‘鮮人’과 ‘요보(ヨボ)’는 조선인에 대한 멸칭(蔑稱)이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This study aims to examine the role and influence of ‘language’ in the formation of the colonized nation's discourse through the media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his study aims at a quantitative examination by paying attention to ‘朝鮮人 (Joseonin)’ and related expressions appeared in newspapers published in Korea from 1910 to 1945. Specifically, we will observe the emergence and usage intention of these vocabularies, focusing on newspaper headlines, by dividing them by colonial policy period. The sources of the newspapers consulted for the research are the “Korean History Database of the National History Compilation Committee” and the “Korean Newspaper Archive of the National Library of Korea”. Examination shows that the expressions referring to Koreans at that time were not only ‘朝鮮人 (Joseonin)’ but also ‘ 鮮人 (Seonin)’, ‘皇國臣民 (Hwanggugsinmin)’, ‘요보 (Yobo)’, ‘半島人 (Bandoin)’. On the other hand, the investigation by period of Japan's colonial policy on Korea shows, first of all, there were many appearances of ‘朝鮮人’ and ‘鮮人’ in the first period of unauthorized rule (無断統治期, 1910-1919). In the 2nd cultural reign period (文化統治期, 1919-1931), there were many ‘朝鮮人’, ‘鮮人’ and ‘皇民’. Lastly, in the 3rd period of the era of national eradication (民族抹殺統治期, 1931-1945), more colorful expressions such as ‘朝鮮人’ and ‘鮮人’, as well as '皇國臣民', '半島人', and '요보' were used. In particular, it was confirmed that ‘鮮人’ and ‘요보’ were expressions of contempt for ‘朝鮮人 (Joseon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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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 이후 일본의 배외주의와 재일조선인

        이승희 동국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6 일본학 Vol.43 No.-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analyze the flow of the chauvinism occurring in Japan after the modern times to contemplate the continuity and discontinuity before and after the war. In general, the academic circle of Japan has the well established assertion that “Japan has the right wing but it does not have the extreme right wing”, and there is wide spread perception that the social movement in chauvinism as the leading front has emerged in the recent days. In December 2006, Zaitokukai (在特會: meeting of citizens who do not recognize special privileges to Koreans in Japan) was organized to undertake the chauvinism movement to stir the social scandal with aggressive hatred against Korea, demonstration of denouncement of those Koreans in Japan as well as assembly for such causes. Obviously, when considering in history, the right wings and chauvinism of Japan do not necessarily exist in consistency but certain part of overlapping areas in their assertions, characters and theoretical basis that the relativity cannot be completely denied. In addition, the exclusive policies of Japanese government and the hatred and discrimination recognition of private society against Koreans in Japan have been steadily existed from the time of Japanese colonial ruling period that calls for attention. Under this article, the focus is on Koreans in Japan as the target of the chauvinism in Japan in particular that the contemplation on the influence on the discrimination against Koreans in Japan during the colonial period with the view of despise of Japanese against Koreans during the modern period, and therefore, such traditional view of despise against Koreans has been handed down to the recently emerged chauvinism. 본고의 목적은 근대시기 일본인들이 갖고 있던 재일조선인 멸시관과 적대감이어떻게 전후시기로 계승되어 최근 대두한 배외주의로까지 연결되었는지 그 연속성에 대해 검토하는 것이다. 근대 이전 일본인의 조선 및 조선인에 대한 인식을 형성시킨 것은 ‘진구황후의삼한정벌’ 전설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이었다. 근세에 이루어진 조선침략의 경험은 기존의 ‘삼한 정벌’ 전설을 보완하며 그 ‘복속’의 대상이었던 조선및 조선인에 대한 멸시관과 일본인의 우월감을 형성하였다. 근대 이후 일본인과조선인이 본격적으로 접촉하기 시작한 때에도 기존의 조선인멸시관은 계승되었고, 문명과 야만의 틀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 일본인의 조선 및 조선인에 대한 멸시관은 한국병합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일본으로 건너가기 시작한 재일조선인들에 대한 차별인식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재일조선인의 수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면서 본국의 일본인들이 각지에서 재일조선인을 직접 접할 기회가 많아졌지만 여전히 기존의 멸시관에 더해 3.1운동 이후‘위험’하다는 적대적 인식도 갖게 되었다. 특히 노동현장 등에서 감시와 단속을통해 재일조선인과 자주 접하던 경찰 및 사법 관계자들은 더욱 부정적인 인식을갖고 재일조선인을 경계하고 차별하였으며, 가급적 일본으로의 유입을 막고 치안유지에 ‘위험’한 재일조선인들을 조선으로 돌려보내고 싶어 했다. 제국주의 일본이 패전하고 민주주의 국가로 전환된 후에도 재일조선인에 대한인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침략과 식민지배의 역사에 대한 일본사회의 반성이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재일조선인에 대한 멸시관은 여전히 존재하였고, 패전 직후의 혼란기를 이용하여 암시장을 비롯한 부정한 수단으로 일본의 부를갈취하고 생활보호를 수급하는 부담스러운 존재로까지 인식하기 시작했다. 또한1940년대 말 냉전의 진행으로 인해 특히 좌파 계열의 재일조선인을 위험시・적시하고 일본 내에서 배제하기를 원하는 배외주의 의식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움직임은 일본정부로 하여금 재일조선인의 권리를 제한하는 각종 제도적 차별 실시와 일본 국내에서 좌파 계열의 재일조선인을 사실상 추방하는 재일조선인 북송근대 이후 일본의 배외주의와 재일조선인∙이승희 93 사업으로 연결되었다. 민간사회에서도 재일조선인은 신체적인 폭력을 행사 당했으며, 일상적으로 취업, 진학, 결혼, 주거 상의 차별을 받으며 정신적인 고통을 강요받아야만 했다. 1970년대에 이르러도 일본인들은 여전히 기존의 멸시관과 적대감에 근거하여 재일조선인을 바라보고 차별을 가하고 있었으며, 결국 재일조선인들은 출신을 숨기기 위해 일본식 통명을 사용해야만 했다. 일본 정부와 민간사회는 재일조선인에게차별이 싫으면 귀화를 하라는 입장을 취하며 전전 시기와 다름없는 동화 압력을가해왔다. 멸시관과 적대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못하고배격하려고 하는 일본사회의 배타적인 자세는 재특회와 같이 재일조선인을 타깃으로 한 극단적인 배외주의를 대두시키는 토양이 되었다. 인터넷상의 익명게시판 공간 등은 그동안 일본인들이 면면히 갖고 있었던 재일조선인에 대한 멸시관과 적대감을 배외주의로서 밖으로 토해내고 증폭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고, 재특회는 이를 기반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재특회는 재일조선인은 나태, 불결, 교활, 위험하다는 등의 전전 시기의 재일조선인 멸시관과적대감, 그리고 패전 직후부터 형성된 재일조선인에 대한 피해망상을 이어 받아이를 현재도 공공연하게 확대・재생산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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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在滿朝鮮人小說中農家女人命運的形象化硏究

        임몽 단국대학교 한국문화기술연구소 2013 한국문화기술 Vol.15 No.-

        그동안 만주 및 재만 조선인에 관한 연구는 활발하게 진행되었으나, 재만 조선인 농촌 가장 여성에 관한 연구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재만 조선인 작가의 작품을 살펴보면, 만주(간도)를 배경으로 하는 이런 소설에서 흔히 가난한 이주민(농민) 가정의 여성(아내 또는 딸)이 빚을 강요하는 지주한테 끌려가서 팔아버리는 현상을 찾을 수 있다. 이런 현상은 곧 재만 조선 이주민(농민)의 비참한 삶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작품의 실질을 파악하고 작자의 심층적인 창작의식을 파악하는 데 있어, 재만 조선인 작가가 작품에서 그려준 농촌 여성의 형상을 파악하지 아니 할 수 없다. 본고는 재만 조선인 작가 최서해의 『紅焰』, 안수길의 『黎明』, 김창걸의 『無貧곡傳說』과 『暗夜』등 작품을 중심으로, 재만 조선인 소설에서 이주민(농민) 가정 여성 운명을 형상화한 방법을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문학사회학 방법론을 차용하여 작가가 작품에서 보여준 여성의 생활상과 운명을 분석함으로써 당대의 사회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비록 재만 조선인 소설에서 고달픈 삶에 허덕이는 농촌 여성의 형상을 그려주는 경우가 흔하지만, 상기 세 작가의 소설은 농촌 여성의 운명과 현실대응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었다. 『紅焰』과 『無貧곡傳說』중의 용녀와 박씨녀는 모두 빚을 갚을 수 없어 청춘과 목숨을 잃게 된다. 『黎明』중의 복동녀는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결코 지주의 핍박에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을 베어서 저세상으로 가게 된다. 『暗夜』중의 고분도 하마터면 지주한테 팔릴 번 했으나, 서로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도망가게 되었다. 이런 차이를 보여준 이유는 작가 개인의 창작 경향과 작가 의식의 차이에서 비롯한 것이고, 내부 사상세계의 변화와 외부 사회 환경 변화가 작가의 창작 경향에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재만 조선인 소설에 그려준 논총 여성 운명의 형상화에 관한 연구는 당대의 암흑한 사회 현실과 재만 조선인의 생활상을 게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새로운 시선으로 재만 조선인 작가의 창작경향과 작가의식 및 사상세계의 흐름을 들여 볼 수 있다. 圍繞滿洲和在滿朝鮮人的先行硏究已흔活躍,但是在豊富的硏究成果中각鮮有以在滿朝鮮農民家庭的女人爲主題進行的硏究。而番閱在滿朝鮮人作家們的作品각可以發現這些以滿洲(間島)爲背景的小說作品中普遍存在병且反復出現了壹個共同現象:貧苦的移住農民家庭的女人(妻子或者女兒)被地主當做抵債品强行掠走或者賣掉的現象。可以說,這壹現象正是當時在滿朝鮮移住農民悲慘生活的典型體現。如果想更淸楚地了解作品本身的異議以及作者通過這壹現象想要表達的深層含義,關註在滿朝鮮人作家作品中出現的農家女人形象是非常有必要的。因此,本文將以在滿朝鮮人作家崔署海的「紅焰」、安壽吉的「黎明」,金昌桀的「無貧谷傳說」和「暗夜」這4部作品爲中心,進行在滿朝鮮人小說中移住農民家庭女人命運的形象化硏究,병且結合文學社會學的方法論,通過各作家作品中的農家女人的生活狀態和命運來了解當時社會眞實的現實狀況。此外,雖然在滿朝鮮人小說中都共同出現了苦難的農家女人形象,但是上述三位作家小說中的在滿朝鮮農家女人的命運和現實對應是有所不同的:「紅焰」和「無貧谷傳說」中的龍女和樸姓女都因爲還不起債而犧牲了靑春、生命;「黎明」中的福同女雖有相愛的人但是最終被地主逼得割頸自殺;「暗夜」中的高粉也是差點就被賣給地主,但所幸最終和相愛的人壹起逃走。出現這些不同的原因在於各作家的創作傾向和作家意識是不同的,而且隨著內部思想世界和外部社會環境的變化,作家的創作傾向也會發生變化。因此,通過對在滿朝鮮人小說中農家女人命運的形象化硏究,기기能揭示當時社會的黑暗現實和在滿朝鮮人的眞實生活狀態,又能從新的角度探究在滿朝鮮人作家的創作傾向和作家意識以及他們思想世界的變化軌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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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에서의 재만 조선인 항일투쟁사 서술 - 국공내전·한국전쟁기에 진행된 선전 및 서술을 중심으로 -

        염인호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6 한국학논총 Vol.45 No.-

        중국에서는 國共內戰․韓國戰爭(1945~1953) 때부터 在滿 朝鮮人 抗日鬪爭에 대한 歷史가 敍述되고 普及되었다. 中國共産黨은 국공내전기에는 더 많은 朝鮮人들을 動員하기 위해 그리고 後方基地 役割을 하는 北韓과의 友好 增進을 爲해 在滿 朝鮮人의 항일투쟁사를 浮刻시켰다. 그리고 한국전쟁기에는 중국의 人民과 支援軍 兵士들에게 왜 韓半島에서 피를 흘려야 하는가를 說得하기 위해 조선인들의 항일투쟁사를 浮刻시키고 普及하였다. 국공내전․한국전쟁기에 서술되거나 보급된 재만 조선인 항일투쟁사는 다음과 같은 特徵을 지녔다. 첫째, 국공내전기에는 중국인과 재만 조선인 兩側에서 모두 재만 조선인 항일투쟁사를 서술하였는데 이들 서술에서는 항일투쟁을 했던 재만 조선인은 중국인으로서의 朝鮮族이 아니라 外國人인 朝鮮人이었고 그들의 주된 關心은 朝鮮獨立이었으며 그들의 중국인과의 連帶鬪爭은 國際主義 實踐으로 描寫되었다. 둘째, 국공내전기에는 北朝鮮勞動黨 幹部가 執筆한 항일투쟁사가 만주 조선인 사회에서 널리 보급되었다. 北韓은 이를 통해 金日成의 影響力을 만주 조선인 사회에서 擴大시키려 했다. 중국공산당은 이를 沮止하기 보다는 오히려 獎勵하였다. 중국공산당은 김일성이 조선인 사회에서 갖고 있는 影響力을 活用해 더 많은 조선인을 內戰에 動員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셋째, 한국전쟁기의 서술에서는 재만 조선인들이 중국의 항일투쟁에 크게 貢獻했으며 투쟁 過程에서 조선인들이 피를 많이 흘렸다는 점, 그리고 이제 중국인들이 한반도의 전쟁에서 조선인을 위해 피를 흘려야 한다는 점 등이 强調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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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아스포라의 위도 가 가로막은 것과 열어놓은 것 : 남북일 냉전 구조와 재일조선인의 언어, 연대, 장소

        조은애(Eunae Cho)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21 동방학지 Vol.195 No.-

        이 글은 필자의 박사학위논문 「남북일 냉전 구조와 재일조선인의 문화적 월경: 자기민족지적 글쓰기의 계보」(동국대학교, 2020)의 논점을 소개하고, 그 중에서 특히 재일조선인의 언어, 연대, 장소라는 키워드를 통하여 다른 두 명의 한국(문)학 연구자들과 대화해 보고자 한 시도이다. 먼저 1절에서는 필자의 박사학위논문이 ‘재일조선인은 재현의 주체인가 대상인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밝혔다. 조선어와 일본어를 넘나들고, 생활세계와 사상적인 귀속 국가 사이에서 유동하며 전후 일본 사회와 재일조선인 사회, 그리고 분단된 조국 사이의 다양한 ‘연대’의 네트워크에 접속하며 ‘재일성’을 구성해 간 재일조선인 문학자들의 모순적 조건들을 가시화하는 것이 그 질문에 대한 유의미한 응답일 수 있다. 2절에서는 식민지 조선인의 ‘이언어’ 및 ‘다언어’ 글쓰기를 다룬 정한나, 다카하시 아즈사 선생님의 박사논문에서의 문제제기를 경유하여, 해방후 재일조선인 문학에서의 이언어 글쓰기라는 문제를 재검토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재일조선인의 문학과 매체에서 ‘조선어’와 ‘일본어’란 결코 단일한 각각의 실체가 아니며, 그 안에 식민주의와 ‘조국’의 분단, 그리고 동아시아 냉전의 역사가 겹쳐지며 생겨난 차이들이 무수히 교차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둘 사이의 관계 또한 균질적이지 않다는 점을 해명하였다. 3절에서는 두 선생님이 다룬 다민족・다언어 매체와 독자 간의 관계를, 필자의 논문에서 다루었던 재일조선인 발행 매체들의 언어와 독자에 겹쳐 보았다. 여기에서는 한편으로는 다언어로 쪼개진 재일 사회를 향해,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언어적 경계와 일치하지 않는 다민족 독자를 향해 발화하는 과정으로부터, 재일의 범주에서 배제되었던 망명자가 ‘재일성’의 경계를 새롭게 구성하였음을 이야기했다. 4절에서는 ‘북위 38도’가 재일조선인 문학자들에게 ‘조국’의 분단이자 재일조선인 사회 내부의 분단, 그리고 숙명적인 동시에 불길한 ‘귀국’, ‘두 개의 전쟁’과 ‘냉전/열전/의 연속성 등으로 표상되는 방식을 살폈다. 특히 두 선생님들과의 질의응답을 통해, 김달수의 작품에서 한국전쟁기 재일조선인의 존재 방식이 시각성에 의존하여 그려진다는 점, 그리고 쓰이는 대상으로서의 재일조선인 여성과 매체 운영의 주체에 따른 작품의 성격 변화 등으로 연구의 시야를 넓힐 수 있었다. This article introduces the arguments of my doctoral dissertation and outlines a dialog with two other Korean (literary) researchers through the keywords of language, solidarity, and the place of Zainichi Koreans in their literature. Section 1 of this article mentions that my dissertation began with the question, “Are Zainichi Koreans the subject or object of representation?” Visualizing the contradictions of Zainichi Korean writers who introduced “Zainichi-ness” while shuffling between Korean and Japanese languages, daily life and ideological attributions, and connecting various networks of solidarity between postwar Japan, Zainichi society, and the divided “homeland,” can be a response to the question. In Section 2, the matter of bi-linguistic writings of Zainichi Korean writers in postwar Japan was reviewed through the works of two researchers on the “bilingual” and “multilingual” writings of colonial Korean intellectuals. In Section 3, I compared the relationship between multinational and multilingual media covered by the researchers, whith the languages and readers of the Zainichi Korean publishing media covered in my dissertation. In Section 4, I introduced the representation of the “38th parallel north” by writers as the division of the “country” and a division within the Zainichi Korean society, the fate and ominous “return,” and the continuity of the “two wars: the Pacific War and the Korean War” and the “cold war/fiery war.”Keywords: Zainichi Koreans(Korean Reidents in Japan), Zainichi-ness, bilingual writing, Return to North Korea, the exile, the Korean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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