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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홍장(李鴻章)-라디젠스키 천진(天津) 회담(1886)의 재고찰 -이홍장(李鴻章)의 의도와 역할을 중심으로-

        이동욱 ( Lee Dong-uk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2020 사총 Vol.101 No.-

        이 논문은 1886년 8월부터 10월 사이에 조선문제를 두고 진행된, 청나라의 전권대표 이홍장과 러시아 대표 라디젠스키 사이의 천진 회담을 검토하였다. 기왕의 연구에서 이 회담을 거문도 사건 연구의 일부로서, 또는 19세기말 중러 관계 연구의 차원에서 검토한 것과 달리, 이 논문에서는 회담을 기획하고 주도한 이홍장에게 초점을 맞추어, 그의 국내 정치와 대외 관계에서의 의도와 역할을 중점적으로 고찰하였다. 특히, 회담과 관련된 중국 측 사료와 러시아 자료의 비교 검토, 그리고 중국 측 사료의 검토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중러 비밀협정을 통한 조선의 영토 보전과 현상 유지의 의도, 그리고 중러 협정을 통해서 청 정부 내부의 조선에 대한 강경론을 억제하려는 시도 등을 중점적으로 검토하였다. 기존 연구에서는 이홍장을 청 정부의 대변자로서 파악하면서 양자의 입장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본고에서는 청조의 조선 정책에 대한 이홍장의 입장 변화 및 다양한 정책 건의, 그 의도의 좌절 등을 추적함으로써 당시 청조의 조선 정책 형성과정과 이홍장 개인에 대한 연구의 깊이를 심화하고, 조선에 대한 청 정부의 종주권 강화라는 선입견을 벗어나 청 주도의 조선 중립론 등 이홍장이 제시한 조선 정책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고자 하였다. This study examined the Tianjin Conference between Li Hongzhang as a plenipotentiary representative of Qing and Ladygensky as a Russian representative, which was held on the matter of Joseon from August to October, 1886. In particular, the Chinese and the Russian historical materials were compared and analyzed especially focusing on Li Hongzhang who planned and led the conference, and his intentions and roles in the domestic politics and the foreign relations were investigated in priority through the examination of the Chinese historical records. He intended to preserve Joseon territory and maintain the status quo through the Sino-Russian secret agreement, and for this, to suppress the resolute stance toward Joseon in the Qing government. On the other hand, while previous studies tended to consider Li Hongzhang as a representative of the Qing government and to understand the positions of the both parties as the same, in this study, the changes of Li Hongzhang's stance of Qing's policy of Joseon, his suggestions of different policies, and the frustration of his intentions, and the formation process of the Qing government's policy of Joseon and Li Hongzhang as a person were investigated in more depth. And the diverse aspects of Li Hongzhang's policy of Joseon, such as his position on the Joseon neutrality theory led by Qing, were examined free from the prejudice of the consolidation of the Qing government's suzerainty of Joseon.

      • 李鴻章, 伊藤博文과 19세기말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화

        강문호 한국동학학회 2009 동학연구 Vol.0 No.26

        이홍장과 이등박문은 19세기말 동아시아 국제질서 재편 과정에서 淸・日 양국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이들 두 사람은 평생 세 차례 만나 청・일 양국은 물론 동아시아의 명운을 결정짓는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그 첫 번째 만남은 1885년 4월, 갑신정변 사후처리를 위한 天津회담이었으며, 두 번째는 청일전쟁 사후처리를 위해 일본 마관에서 열렸던 회담이다. 그리고 마지막 회견은 청일전쟁 후 이홍장이 중국을 여행 중이던 이등박문을 초청하면서 이뤄졌다. 이홍장과 이등박문 두 사람의 첫 번째 만남, 즉 천진회담은 중・일 양국의 조선에서의 지위가 대등함을 인정하는 자리였다. 전통적으로 종주국과 藩屬國으로 인식되었던 中・韓관계에 변화가 나타났던 것이다. 청일전쟁 사후처리를 위해 마주앉았던 이홍장과 이등박문의 두 번째 만남에서는 淸・朝 양국의 전통적 宗・藩관계를 폐절한다는 것을 문서로 확정함으로써 전통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와해되는 자리였다. 그리고 그들의 세 번째 만남은 청일전쟁 패배 후 부국강병을 위한 變法 필요성이 고조되면서 유신파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일본을 스승삼아 개혁을 진행하자는 분위기가 조성됨으로써 전통시대의 중국 중심 동아시아 천하질서가 일본 중심으로 바뀌었음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이홍장과 이등박문의 세 차례에 걸친 만남은 한・중・일 삼국의 관계를 중국 중심에서 일본 중심으로 바꾸는 과정을 결과하였던 것이다.

      • 李鴻章, 伊藤博文과 19세기말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화

        강문호 한국동학학회 2009 동학연구 Vol.26 No.-

        이홍장과 이등박문은 19세기말 동아시아 국제질서 재편과정에서 淸 · 日 양국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이들 두 사람은 평생 세 차례 만나 청 · 일 양국은 물론 동아시아의 명운을 결정짓는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그 첫 번째 만남은 1885년 4월, 갑신정변 사후처리를 위한 天津회담이었으며, 두 번째는 청일전쟁 사후처리를 위해 일본 마관에서 열렸던 회담이다. 그리고 마지막 회견은 청일전쟁 후 이홍장이 중국을 여행 중이던 이등박문을 초청하면서 이뤄졌다. 이홍장과 이등박문 두 사람의 첫 번째 만남, 즉 천진회담은 중 · 일 양국의 조선에서의 지위가 대등함을 인정하는 자리였다. 전통적으로 종주국과 藩屬國으로 인식되었던 中 · 韓관계에 변화가 나타났던 것이다. 청일전쟁 사후처리를 위해 마주앉았던 이홍장과 이등박문의 두 번째 만남에서는 淸 · 朝 양국의 전통적 宗 · 藩관계를 폐절한다는 것을 문서로 확정함으로써 전통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와해되는 자리였다. 그리고 그들의 세 번째 만남은 청일전쟁 패배 후 부국강병을 위한 變法 필요성이 고조되면서 유신파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일본을 스승삼아 개혁을 진행하자는 분위기가 조성됨으로써 전통시대의 중국 중심 동아시아 천하질서가 일본 중심으로 바뀌었음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이홍장과 이등박문의 세 차례에 걸친 만남은 한 · 중 · 일 삼국의 관계를 중국 중심에서 일본 중심으로 바꾸는 과정을 결과하였던 것이다.

      • KCI등재후보

        析论清末李鸿章的对朝鲜政策

        이규태 한국중국문화학회 2009 中國學論叢 Vol.28 No.-

        This thesis aims to analyze the backgrounds and contents of the Qing(清) Dynasty’s policy in relation to Lee Dynasty(朝鲜 Joseon) when Li Hong Zhang(李鸿章) led the foreign affairs of Qing Dynasty from 1870s on, and, with the analysis, to examine the problem in the relations between Korea and China during the transitional period from tradition to modern and the recognition of the politic leaders of the then China about Chosun. Main contents include the backgrounds and purpose of the Qing Dynasty’s strategy about Joseon during Li Hong Zhang’ initiatives, that is, the tributary states system maintaining the traditional Zongfanguanxi(宗藩关系) and the strategy of controlling an inferior nation with another inferior nation(以夷制夷), and the positive intervention policy to Joseon in its politics, foreign affairs, economy and military area by Yuan Shi Kai(袁世凯) who was then Trade Minister resident in Korea, after Qing’s dispatching forces to Joseon in order to oppress the army’s rebellion in Chosun in 1882, so-called YimoKunlan(壬午军乱). In Li Hong Zhang’ policy to Joseon, they did not explicitly take any area belonging to Chosun unlike the colonialism of other great Powers, but the various intervention policies to Chosun through Yuan Shi Kai cannot avoid the criticism that the policies was similar with the great Powers’ imperialism depending on “long historical relation”, and we can call it as “half colonialism.” 본 논문은 19세기 70년대 이후 淸나라에서 李鴻章이 대외정책을 주관하던 시기 조선에 대한 속방정책의 배경과 그 정책내용을 중심으로, 중국과 조선의 관계가 전통적 관계에서 근현대적 시기의 관계로 넘어가는 시기의 특징을 연구한 것이다. 중요한 내용으로는 당시 청나라 정부의 대조선전략의 배경과 목표, 즉 종번관계로서 속방체계와 이이제이전략을 논하고, 1882년 군대를 파병하여 조선에서 발생한 '임오군란'을 평정한 후, 駐札朝鮮總理交涉商務事務大臣으로서 袁世凱가 집행한 조선에 대한 정치적 외교적 , 경제적 그리고 군사적 분야의 '적극간섭'을 기조로 한 속방정책의 내용을 분석하고 있다. 이홍장의 대조선정책은 비록 제국주의국가들의 식민지정책을 모방하고 있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형식적으로는 조선의 주권독립과 영토의 완전성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원세개를 통해서 진행한 이홍장의 조선에 대한 각종 간섭정책은 조선과 중국의 '유구한 역사관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빌미로 진행한 패권강권의 제국주의적인 '반식민지정책'과 유사하였다는 점을 비평적 관점에서 논해 보고자 한다.

      • KCI등재

        이홍장(李鴻章)의 상하이(上海) 치리의 공적과 한계

        쉬펑화 중국사학회 2016 中國史硏究 Vol.102 No.-

        이홍장(李鴻章)은 회군(淮軍)을 통솔하라는 명을 받들어 상하이(上海)로 내려가서 방위를 지휘하였다. 그는 군대를 관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의 치안도 도모하였고, 강소순무서리(署理江蘇巡撫)로부터 봉강대리(封疆大吏)까지 벼슬이 올랐다. 상하이 주재 지방관으로서 그는 관료 행정과 민생에 많은 노력을 경주하였고, 나아가 경제적 문화적인 부문에서 큰 업적을 세웠는데, 당시 전쟁 상황을 겪은 뒤의 도시 발전을 가져왔다는 점은 아주 어려운 가운데서 이룬 대단한 공적이라 할 수 있다. 이임 후에는 개인적인 유대관계를 이용하여 상하이의 관리에 참여하였으므로, 그가 상하이에 미친 영향력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상하이는 이홍장을 성장시켰고, 이홍장도 시종 상하이를 잊지 않았으며 그는 열성적인 상하이 건설자였다. 그가 상하이와 강소성 남부의 행정을 담당한 경력은 뛰어난 업적도 남겼지만 다소 한계점도 보였는데, 그의 진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상하이에서의 경험이 없었다면 청말 주요 대신 이홍장도 없었을 것이며, 이홍장이 없었다면 청말 "동치중흥(同治中興)도 없었을 것이다. 이 한 사람과 이 한 도시와의 관계가 중국근대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과 심오한 영향력은 결코 소홀히 간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 KCI등재

        연구논문 : 이홍장(李鴻章)의 대외정책(對外政策) 연구(硏究)

        김재선 동국사학회 2012 동국사학 Vol.53 No.-

        본 논문은 이홍장의 대 조선 정책의 핵심인 조선 속국명분론이 각 시기ㅏ다 확연히 상이한 정책으로 전개되고 있는 점에 주목하여 3시기로 나누어 그 전개양상과 의미를 살펴보았다. 1시기는 강화도조약 전 시기로 전통적인 속국명분론을 주장하였고, 2시기는 강화도조약 후부터 임오군란까지로 연미정책을 산두로 해서 속국을 명문화하려고 힘쓴 시기이며, 3시기는 임오군란부터 청일전쟁까지로 강압적으로 종주권을 행사하는 시기이다. 1시기에는 이홍장이 전통적인 속국명분론 정책을 전해하므로 조선은 비록 중국의 속국이나 내점은 자주라고 주장하였다. ``속국``과 ``자주``란 두용어가 하나로 묶어짐으로 많은 문제를 야기 했다. 중조중심사상을 바탕으로 해서 일본을 상대하고, 상대가 일본이니 싸울만하고 승산이 있다고 자부했을 것이고, 중일 수호조약을 맺은 이래 일본을 상당히 우호적으로 생각하여 진일보 일본과 같이 외교 연합전선을 구축해서 구미와 대항하는 구도를 꿈꾸고 있었다. 2시기에는 이홍장이 『강화도조약』 후에 조선에서 실추된 청의 위상을 복귀하고 싶었는데 별 성과 없이 또 일본에게 琉球종주권을 뺏기고 말았다. 그러므로 그 해결책으로 이홍장은 외세를 끌어들여 남으로 일본 세력을 견제하고, 북으로 러시아의 남하를 막을 수 있는 나라, 조선이 중국의 속방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줄 나라와 조약 체결이 절실했으며 그렇게 해서라도 속국명분론이 입각한 종주권을 계속 주장하고 유지하기를 희망했다. 이에 열강 중에 미국이 가장 공평하고 순하며 선량하다고 여겼고 특히 ``다른 나라를 침략할 의사가 없다`` 또 ``분규를 잘 해결 한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聯美``하면 조선이 유리할 것이라고 여겨 연미정책을 선두로 해서 미국, 영국, 독일 등 열강과 통상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3시기에는 임오군란을 계기로 조선에 종주권 행사를 강화하기에 이르렀다. 청의 종주권주장은 임오군란을 계기로 그 형태가 종전의 방식과 완전히 달라 있었다. 임오군란 이전이 전통적인 속국 명분론에 입각한 외교 문서상에서만 주장하는 것이라면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은 종주구으로 무력을 앞세워 정치, 경제, 군사, 외교 등 모든 분야에서 실질적인 권력 행사를 실행하는 단계로 전환을 보게 되었다. 本論文以李泓章對朝鮮所展開的屬國名分論政策因各時期有明確地區別, 故分爲三時期. 第一時期爲江華島條約以前時期, 屬于傳統的屬國名分論時期. 第二時期爲江華島條約以后至壬午軍亂時期, 屬于屬國明文化時期. 第三時期爲壬午軍亂至甲午戰爭時期, 屬于用武力强加于屬國, 行使宗主權之權利的時期. 第一時期, 李泓章進行的屬國名分論, 主長朝鮮爲中國屬國, 但不干預其內政. 由于屬國與自主兩個詞彙互相矛盾所以引起不少爭執和懊悔. 以中朝中心思想爲基黜, 來對待日本, 李泓章認爲有价値근日本打, 而且還有勝算. 這段時期因與日本締結江華島條約以來, 對日本相當有有好感, 夢想與日本結伴組織外交聯合戰線來對抗歐美. 第二時期李泓章欲回復江華島條約后, 失落的淸的地位. 可是幷沒有什요成果又將琉球宗主權주失了. 所以李泓章欲引致外勢來牽制朝爲南邊的日本與北邊的俄國, 他需要承認屬國的國家來與朝鮮簽定通好條約. 他認爲美國最公平最善良, 尤其他沒有侵占他國的意思, 又善于解抉糾紛等理由, 實行聯美政策, 終于以美國爲首, 與英德漸次地簽定了友好條約, 雖然沒有他所預料的屬國明文化, 可也有一定的成果. 第三時期, 以壬午軍亂爲契机, 開始强化了淸在朝鮮的宗主權.淸的宗主權以壬午軍亂起其形態與以前的方式大大地改變了. 壬午軍亂以前是以傳統的屬國名分淪爲基黜, 只在文書上講究的話, 壬午軍亂以后可以說淸以宗主做主, 轉換爲用武力干預朝鮮內政, 不止是政治上, 在經濟, 外交, 軍事等所有領域上實行實際的權利.

      • KCI등재

        李鴻章의 對外政策 硏究

        김재선 동국사학회 2012 동국사학 Vol.53 No.-

        본 논문은 이홍장의 대 조선 정책의 핵심인 조선 속국명분론이 각 시기마다 확연히 상이한 정책으로 전개되고 있는 점에 주목하여 3시기로 나누어 그 전개양상과 의미를 살펴보았다. 1시기는 강화도조약 전 시기로 전통적인 속국명분론을 주장하였고, 2시기는 강화도조약 후부터 임오군란까지로 연미정책을 산두로 해서 속국을 명문화하려고 힘쓴 시기이며, 3시기는 임오군란부터 청일전쟁까지로 강압적으로 종주권을 행사하는 시기이다. 1시기에는 이홍장이 전통적인 속국명분론 정책을 전개하므로 조선은 비록 중국의 속국이나 내정은 자주라고 주장하였다. ‘속국’과 ‘자주’란 두용어가 하나로 묶어짐으로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 중조중심사상을 바탕으로 해서 일본을 상대하고, 상대가 일본이니 싸울만하고 승산이 있다고 자부했을 것이고, 중일 수호조약을 맺은 이래 일본을 상당히 우호적으로 생각하여 진일보 일본과 같이 외교연합전선을 구축해서 구미와 대항하는 구도를 꿈꾸고 있었다. 2시기에는 이홍장이 ?강화도조약? 후에 조선에서 실추된 청의 위상을 복귀하고 싶었는데 별 성과 없이 또 일본에게 琉球종주권을 뺏기고 말았다. 그러므로 그 해결책으로 이홍장은 외세를 끌어들여 남으로 일본 세력을 견제하고, 북으로 러시아의 남하를 막을 수 있는 나라, 조선이 중국의 속방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줄 나라와 조약 체결이 절실했으며 그렇게 해서라도 속국명분론이 입각한 종주권을 계속 주장하고 유지하기를 희망했다. 이에 열강 중에 미국이 가장 공평하고 순하며 선량하다고 여겼고 특히 ‘다른 나라를 침략할 의사가 없다’, 또 ‘분규를 잘 해결 한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聯美’하면 조선이 유리할 것이라고 여겨 연미정책을 선두로 해서 미국, 영국, 독일 등 열강과 통상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3시기에는 임오군란을 계기로 조선에 종주권 행사를 강화하기에 이르렀다. 청의 종주권주장은 임오군란을 계기로 그 형태가 종전의 방식과 완전히 달라 있었다. 임오군란 이전이 전통적인 속국 명분론에 입각한 외교 문서상에서만 주장하는 것이라면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은 종주국으로 무력을 앞세워 정치, 경제, 군사, 외교 등 모든 분야에서 실질적인 권력 행사를 실행하는 단계로 전환을 보게 되었다.

      • KCI등재

        李鴻章의 對外政策 硏究-朝鮮 屬國名分論을 중심으로-

        김재선 동국대학교 동국역사문화연구소 2012 동국사학 Vol.53 No.-

        본 논문은 이홍장의 대 조선 정책의 핵심인 조선 속국명분론이 각 시기마다 확연히 상이한 정책으로 전개되고 있는 점에 주목하여 3시기로 나누어 그 전개양상과 의미를 살펴보았다. 1시기는 강화도조약 전 시기로 전통적인 속국명분론을 주장하였고, 2시기는 강화도조약 후부터 임오군란까지로 연미정책을 산두로 해서 속국을 명문화하려고 힘쓴 시기이며, 3시기는 임오군란부터 청일전쟁까지로 강압적으로 종주권을 행사하는 시기이다. 1시기에는 이홍장이 전통적인 속국명분론 정책을 전개하므로 조선은 비록 중국의 속국이나 내정은 자주라고 주장하였다. ‘속국’과 ‘자주’란 두 용어가 하나로 묶어짐으로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 중조중심사상을 바탕으로 해서 일본을 상대하고, 상대가 일본이니 싸울만하고 승산이 있다고 자부했을 것이고, 중일 수호조약을 맺은 이래 일본을 상당히 우호적으로 생각하여 진일보 일본과 같이 외교연합전선을 구축해서 구미와 대항하는 구도를 꿈꾸고 있었다. 2시기에는 이홍장이 『강화도조약』 후에 조선에서 실추된 청의 위상을 복귀하고 싶었는데 별 성과 없이 또 일본에게 琉球종주권을 뺏기고 말았다. 그러므로 그 해결책으로 이홍장은 외세를 끌어들여 남으로 일본 세력을 견제하고, 북으로 러시아의 남하를 막을 수 있는 나라, 조선이 중국의 속방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줄 나라와 조약 체결이 절실했으며 그렇게 해서라도 속국명분론이 입각한 종주권을 계속 주장하고 유지하기를 희망했다. 이에 열강 중에 미국이 가장 공평하고 순하며 선량하다고 여겼고 특히 ‘다른 나라를 침략할 의사가 없다’, 또 ‘분규를 잘 해결 한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聯美’하면 조선이 유리할 것이라고 여겨 연미정책을 선두로 해서 미국, 영국, 독일 등 열강과 통상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3시기에는 임오군란을 계기로 조선에 종주권 행사를 강화하기에 이르렀다. 청의 종주권주장은 임오군란을 계기로 그 형태가 종전의 방식과 완전히 달라 있었다. 임오군란 이전이 전통적인 속국 명분론에 입각한 외교 문서상에서만 주장하는 것이라면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은 종주국으로 무력을 앞세워 정치, 경제, 군사, 외교 등 모든 분야에서 실질적인 권력 행사를 실행하는 단계로 전환을 보게 되었다.

      • KCI등재

        19세기 동아시아 전환기 중국의 지정학적 상상력과 국방전략에 대한 고찰: 이홍장(李鴻章)의 구상을 중심으로

        이승환,채첩 인문사회 21 2022 인문사회 21 Vol.13 No.4

        연구 목적: 본 연구는 19세기 중국의 국방전략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이홍장의 지정학적 상상력과 그에 따른 국방전략의 변천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연구 방법: 역사적 접근방법을 기초로 이홍장이 자신의 견해를 담아 작성한 문헌들을 주요 분석 대상으로 설정한다. 연구 내용: 이홍장의 지정학적 상상력과 19세기 중국의 국방전략 변천과의 연계성 특히, 전통적 세력권인 한반도를 중심으로 당시 중국의 국방전략은 어떠한 변천을 보였는지 고찰하였다. 결론 및 제언: 19세기 이홍장이 만들어 간 지정학적 상상력은 서세동점이라는 미증유의 구조 속에서 전통적인 세력권에 대한 타국의 침투에서 비롯된 위협인식을 바탕으로, 전통적 체제의 명분론적 원칙을 유지한 채 당시 직면하고 있는 지정학적 위기를 해결해 보려는 괴리를 극복하려 하며 끊임없이 변모했으며, 당시 중국의 국방전략 변천의 동력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지정학적 상상력은 과연 20세기, 21세기에는 어떠한 모습으로 변화해왔으며 한반도라는 공간에 대해 어떠한 역할을 부여하려 했는지 추적해보는 작업은 향후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이다.

      • KCI등재

        김윤식과 원세개 · 이홍장 · 주복의 교류(1881~1887)

        박은숙(Park, Eun-Sook) 고려사학회 2015 한국사학보 Vol.- No.61

        김윤식은 한국 근대사에 있어서 개화와 자주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중 하나이다. 그는 유교적 가치를 지키면서 서구의 기술을 수용하려는 동도서기론자로 평가되고 있지만, 더욱 주목되는 것은 그가 중국통 외교가로서 근대 이행기 한중관계 재편에 깊숙이 관여했다는 점이다. 김윤식은 영선사로 청에 파견되었던 1881년 말부터 청의 이홍장-주복-원세개 라인과 교류하였다. 김윤식과 청인들의 인적 관계망은 장정체제를 구축하고, 조선의 정치 · 경제 · 외교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조선의 자주적 근대화를 가로막고 청의 요구를 관철시키는 통로로 작동했다. 김윤식은 1882년 7월초 조선으로 출병하는 배 안에서 진압군 원세개와 처음 만났다. 24세의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밤낮으로 어울려 조선 문제와 양국 관계를 모의했다. 두 사람은 청국식 근대화를 추동하고, 청선구류사건 · 이범진사건 등에 개입하여 장정체제의 구축과 청의 요구를 관철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갑신정변 후 조선의 외교 수장과 청의 파견총리로서 재회한 두 사람은 조러밀약과 조불조약, 거문도사건 · 백두산정계비 등 조선의 정치 · 외교와 통상 및 국경 문제 등을 협의 · 조율했다. 그러나 대부분 사안이 청의 의도대로 진행되었고, 김윤식은 매사를 원세개의 명령에 따르는 ‘袁黨’으로 지목되었다. 두 사람의 결탁은 조선의 주권과 이권 상실, 청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이권 실현의 도구로 작동했다. 조선의 외교관 김윤식과 청의 대조선정책 라인 원세개 · 주복 · 이홍장과의 교류는 외교라는 공적 업무를 매개로 형성된 관계였다. 따라서 그들은 기본적으로 자국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자신의 출세와 영달을 꾀하였다. 그러나 상하 관계를 천명한 상국과 속방의 외교관의 교제는 불평등했으며, 친청노선을 고수했던 김윤식은 더욱더 종속적이었다. 그들의 교류는 조선의 자주권과 이권 상실로 이어졌고, 장정체제 구축과 종속의 기제로 작동했다. 결국 반청자주를 꿈꾸던 고종과 중국의 권력자 사이에서 줄타기 했던 김윤식은 토사구팽 당하여 8년여를 유폐되어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Kim Yun-Shik is regarded as a very important person in modern Korean history. He was a Sinologist and pro-Chinese collaborators in diplomacy. He played an important role in reorganizing the relationship between Joseon and China. Kim Yun-Shik was on intimate terms with Yuan shì-Kai who was sent from the Chinese government to supervise the Joseon. Kim Yun-Shik and Yuan shì-Kai met frequently, and discussed politics, diplomacy and trade sectors of Joseon. But their consultations had established the agreement system(章程體制) that pursueed China"s diplomatic and economic interests. Their close relationship was used as a tool of China"s imperialistic aggression and economic interests. Kim Yun-Shik also contacted with Li Hong-Zhang and Zhou Fu who were Chinese officials. Their relationship became passage to deliver Chinese pressure and Joseon"s request. The relationship of Kim Yun-Shik and chinese officials was unequal and subordinate. Kim Yun-Shik was hated by king who hoped for Joseon"s independence. He was dismissed from the Minister of Foreign Affairs and was exiled in 18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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