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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

        신라 중대 초 당제의 수용과 정비

        김덕원(Kim, Deok-won) 신라사학회 2020 新羅史學報 Vol.0 No.49

        신라는 520년 율령을 반포하였는데 17관등과 백관의 공복, 골품제도 등 상고기부터 시행되어 오던 관습과 제도, 법제 등 고유하고 전통적인 부분을 많이 포함하고 있었다. 이후에도 새로운 법령과 법률이 계속해서 만들어졌는데, 특히 진흥왕대와 진평왕대에 중앙의 행정관부와 새롭게 복속한 지방민들에 대한 규정이 대폭적으로 확대되었는데, 이것은 520년에 반포된 율령의 관련 조목에 편입되면서 새로운 조문들이 증가하였다. 642년 대야성이 함락된 이후 김춘추는 왕권 강화와 지배체제의 개편을 구상하고, 적극적인 대당외교를 추진하여 당제를 수용하였다. 그리고 신라가 당제를 수용한 시기는 648년 김춘추가 당에 파견된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는 651년부터 정국운영의 구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는데, 이것은 당 의관과 연호를 사용하는 한화정책의 추진과 집사부의 설치를 중심으로 하는 관제정비의 실시로 나타났다. 당제의 수용은 이후 골품제도의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로 작용하는 등 신라 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다. 당제의 정비는 신문왕대부터 새롭게 변화하여 성덕왕대의 활발한 대당외교와 경덕왕대의 지명과 관부 명칭의 변경으로 이어졌는데, 특히 중대의 전제왕권과 한화정책은 상호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주목되는 것은 신라가 당제를 수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중앙관부는 당 중앙 관부의 핵심인 3성6부제를 실시하지 않고 이전부터 존재하였던 집사부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신라가 당제를 수용하여 관료제를 추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진골귀족의 영향력이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신라 중대에 당제의 정비과정은 일정한 한계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829년 집사부가 집사성으로 바뀌고 여러 관부들이 새롭게 설치되었던 하대에는 변화된 모습을 보이면서 이후 태봉과 고려의 관제정비에도 일정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Silla proclaimed Yulryeong(율령) in 520, which included its inherent and traditional contents such as 17 official ranks and official uniforms of all the government officials and Bone rank system etc. it had enforced before. Even thereafter, new laws and regulations were enacted continuously, among which regulations on central administrative departments and newly subjugated local people were drastically increased. After Daeya Castle(대야성) was fell in 642, Kim Chun-chu(김춘추) planned the strengthening of royal authority and the reorganization of ruling system and actively promoted diplomacy policy toward Tang(대당외교) and accepted Tang"s system(당제). It can be said that Silla accepted Tang system since Kim Chun-chu was dispatched to Tang in 648. He pushed the Chinese assimilation policy(한화정책) using Tang"s dress and era name starting from 651 and carried out the modification of government systems(관제정비) such as establishment of Jipsabu(집사부) etc. The acceptance of Tang system took a chance to bring about the change of Bone rank system(골품제도) and had a great influence on Silla society. The maintenance of Tang system was newly changed from the time of King Sinmun and connected to active diplomacy to Tang at the time of King Seongdeok and the change of names of place and official departments at the time of King Gyeongdeok, especially, the authoritarian royal power and the Chinese assimilation policy in the Middle period(중대) have a close relation each other. It is noted that though Silla accepted Tang"s system, it did not establish the key of Tang"s central official departments, the Three Ministries-Six Departments System(3성6부제), but it was operated centering on Jipsabu which had existed before. However, in the Late period(하대) when Jipsabu was changed to Jipsasung(집사성) and many official departments were newly established, it changed and had a certain effect on the modification of Taebong(태봉) and Goryeo dynasty(고려)"s government systems.

      • KCI등재

        특허쟁송과 당업자의 기술수준

        조영선(Cho Youngsun) 한국법학원 2005 저스티스 Vol.- No.86

        (1) 당업자의 기술수준은 발명의 진보성 판단, 명세서의 기재요건 구비 여부, 기능식 청구항의 적법 여부, 출원보정에 있어 신규사항 추가 여부의 판단기준이 될 뿐 아니라, 특허침해를 둘러싼 청구범위의 해석과 권리범위의 확정, 균등침해 판단 등 특허법 전반의 쟁점들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개념이자 대표적인 불확정개념이기 때문에 가급적 특허법의 명문 규정에 부합하고 법적 안정성을 도모할 수 있는 해석론이 필요하다. 그 가운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발명의 진보성과 명세서의 기재요건 구비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기준이 되는 당업자의 기술수준 문제, 특히 이를 동질적인 것으로 보아야 할 지 여부와 그 필요성이라 할 것인데, 발명의 진보성 판단의 기준이 되는 당업자의 기술수준을 명세서 기재요건으로서의 그것과 이질적인 것으로 이해하여 전자를 일률적으로 높게 설정하는 것은 특허법 명문의 규정에 반할 뿐 아니라 발명의 진보성 판단의 자료로 삼을 수 있는 선행기술의 ‘범위’와 이를 기초로 용이하게 발명에 이를 수 있는 지 여부에 관한 당업자의 ‘수준’을 동일시 한 문제점이 있다. 당업자의 수준이 높은 것을 전제로 하여 어렵게 진보성의 관문을 통과한 발명의 경우, 명세서를 이해할 수 있는 당업자의 수준 또한 높게 보아 상대적으로 폭넓은 기재를 인정함으로써 넓은 권리범위를 보장하여야 하고, 반대의 경우 진보성 관문의 통과가 쉬운 대신 발명의 명세서 역시 기술 수준이 낮은 당업자들을 이해시킬 수 있을 정도로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하도록 함으로써 좁은 권리범위를 인정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타당하고 형평에 부합하며, 나아가 정책적으로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가 필요한 분야나 기초과학적 성격, 공익적 성격이 강한 분야에서의 기술적 도전을 장려하는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청구항의 보정 등에 있어 신규사항 추가와 당업자의 기술수준, 기능식 청구항과 당업자의 기술수준, 특허청구범위 해석, 치환자명성에 있어서의 각 당업자의 기술수준은 이를 모두 동일하게 이해하는 것이 법적 예측가능성이라는 면에서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2) 당업자의 기술수준은 소송법상의 요건사실로서, 사실의 문제이지 신규성, 진보성 판단 등과 같은 법률 판단의 문제가 아닌 이상, 이를 막연히 심사관, 심판관이 가진 기술수준과 동일시하거나 변론의 전취지에 의하여 형성된 심증만으로 확정하여서는 곤란하고, 당해 기술분야에서 활동하는 기술자가 가지는 학력이나 자격의 정도, 당해 기술분야에서 마주치게 되는 문제점들에 관한 선행기술의 해결 례, 당해 기술분야의 속성으로서의 유추가능성(Predictability) 등 당업자의 수준을 객관적으로 추단할 수 있는 간접사실들의 목록을 충실히 해 나가는 한편, 심판, 소송에 있어서도 당사자에게 그 주장, 입증을 촉구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 高麗時代 六尙書 硏究 : 唐 六尙書와 高麗 六尙書의 比較硏究

        류정수 경원전문대학 1997 論文集 Vol.19 No.2

        『高麗史』 百官志 I 序文에 太祖 2年에 唐制度를 模倣하여 三省 ·六尙書 ·六衛制度를 설정하였다는 기사에 따라 우선 唐의 中央官制인 六尙書를 고찰해보고 이어서 高麗의 六尙書에 대하서도 成立過程과 唐의 六尙書와 組織의 차이점 및 그 연관성을 검토하여 高麗 六尙書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한다. 唐의 六尙書는 『舊唐書』 職官志와 『新唐書』 百官志에 상세히 나타나 있다 『舊唐書』 職官志를 중심으로 唐의 六尙書制度를 열거하여 보면 六尙書를 총괄하는尙書都省 및 吏部 ·戶部 ·禮部 ·兵部 ·刑部 ·工部 둥이 있다. 唐의 六尙書는 制度的으로 완전하게 조직되어 있었으며 內容도 상세하게 잘 나타나있다. 이를 모두고찰해보기로 한다. 高麗의 六尙書도 『高麗史』 百官志에 尙書都省과 六尙書制度가 기록되어있다.『高麗史』 百官志를 중심으로 高麗의 六尙書를 검토하여 보고자한다. 高麗의 六尙書를 열거하여 보면, 高麗에서도 六尙書를 총괄하는 尙書都省이 있었고 六部로는吏部 ·兵部 ·戶部 ·刑部 ·禮部 ·工部 둥이 있었다. 高麗의 六尙書는 成立 過程에서 太祖 2年에 설정되었다하나 그것이 太祖 2年이아닌 後代에 설정되었음을 살펴볼 것이다. 또한 唐의 六尙書와 高麗의 六尙書를比較·分析하여 그 차이점과 唐制度의 영향을 밝혀 보고자한다. 高麗의 六尙書制度는 唐의 六尙書 制度와 달리 설치 이후부터 六尙書의 명칭변화와 구성인원의 변경, 官職 명칭변경, 직급의 격상 격하, 폐합 등의 변천이 많았다. 그 변천 내역을 표로 작성하여 일목요연하게 제시하여 보겠다.

      • KCI등재

        7세기 초 신라 당항성(党項城)의 위치 재론(再論) - ‘당성(唐城)’설 비판과 ‘한강(漢江)’설 제기 -

        윤경진(Yoon, Kyeong Jin) 역사실학회 2021 역사와실학 Vol.76 No.-

        이 연구는 7세기 초 신라의 사행로였던 당항성(党項城)을 당성(唐城:현 화성시)으로 비정하던 그동안의 통설이 명확한 실증적 근거를 갖추지 못했음을 지적하고, 대중국 사행로의 역사성과 지명에 나타난 지형적 특성 등을 통해 현 한강 삼전도 지역에 새롭게 비정한 것이다. 당항성의 ‘당(党)’은 지형의 속성을 반영한 것이고 당성의 ‘당(唐)’은 당나라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맥락이 다르다. 신라후기에 사용된 당은포가 삼국시기에도 사용되었다고 볼 근거가 없다. 의상(義湘)이 유학을 위해 당주(唐州)에서 배를 타려다가 실패한 사적은 신라후기 이후의 내용이 투영된 것으로서 실제로는 육로로 고구려를 경유하여 갔다. 당항진(党項津)은 당항성과 같은 지역으로, 포구와 나루를 겸한 특성에서 그 위치는 한강으로 파악된다. 역대 왕조는 강에 인접하며 이곳에는 조운과 사행을 위한 포구가 마련되었다. 고려의 전포(錢浦) 내지 벽란도(碧瀾渡), 고구려의 남포(南浦)가 대표적이다. 한성 백제도 왕성 인근에 포구를 가지고 있었을 것인데, 한성을 점령한 신라가 이를 그대로 활용한 것이 바로 당항진이다. 이곳은 조선시기 삼전도 일원으로 파악되는데, 인근의 학여울[鶴灘]은 형태적 특징에서 ‘닭의 목’에서 유래한 당항과 상통하여 이러한 이해를 뒷받침한다. This study points out that the conventional wisdom considering Danghang castle which was the road used by envoys of Silla in the early 7th century as Dangseong(currently Hwaseong city) doesn"t have clear and empirical basis. And it also newly defines Danghang castle as area of current Han river Samjeondo by utilizing the historical characteristics of the road toward China which was used by envoys, and the topographical characteristics in the name of palaces. . "Dang(党)" of Danghang Castle reflected the properties of the terrain. On the other hand, "Dang(唐)" of Dangseong means Tang dynasty. Therefore, the two are in different contexts. There is no basis to say that Dangunpo which was used in the late period of united Silla, was also used during the Three kingdoms period. There was a historical record that Uisang(義湘) tried to take a boat in Dangju(唐州) for studying abroad but he failed. However, in fact, he used land route that passed through Goguryeo. The historical record projected contents after the late Silla period. Danghangjin(党項津) seems to be the same area as Danghang castle, and was a place that combined a port and a ferry. The location is figured out as the Han river. All-time Korean dynasties were adjacent to the river, where ports for envoys and tax transportation were set up here. Jeonpo(錢浦) and Byeokrando of Goryeo and Nampo(南浦) of Goguryeo are typical examples. Hanseong Baekjae also had ports near the capital. It was Danghangjin that Silla used as it stood after Silla occupied Hanseong. This place was figured out as Samjeondo(三田渡) area of Joseon period. The fact that Hangnyeoul[鶴灘] nearby this place is in line with Danghang in terms of its morphological characteristics supports this understanding.

      • KCI등재후보

        당의 해양력과 고구려 - 당의 2차 침공(647년) 이후를 중심으로

        서영교 한국유라시아연구원 2023 유라시아문화 Vol.8 No.-

        645년 고구려 정복에 실패한 당태종은 2년 후 신하들과 고구려 재침을 위한 논의를 했다. 수군으로 지속적인 상륙전을 감행하여 고구려를 약화시킨 후에 전면 공격을 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647년 5월 이적의 육군이 고구려 남소성 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 지원군이 그쪽으로 진군해갔고, 이는 당 수군의 작전에 양호한 여건을 제공했다. 그해 7월에 우진달의 함대가 요동반도의 석성(장하의 성산산성 부근에 상륙하여 그 지역을 일대 혼란의 도가니로 만들어 놓았다. 648년 설만철의 함대가 압록강에 들어섰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 박작성에 도착하였다. 고구려군이 패배하여 박작성주 소부손이 전사했다. 그 와중에 오골성과 안시성에서 출발한 고구려 구원군이 도착하면서 6만의 병력이 뒤엉켜 싸우는 난투극이 벌어졌다. 같은 해 4월 오호도(발해만 황성도)의 진장 고신감이 고구려 역산 지역에 상륙하여 싸움이 벌어졌다. 당의 무작위 공격은 고구려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육지에서 적의 공격을 기다리는 것은 수동적이었다. 어디를 공격해 올지 몰라 방어의 밀도와 효율성이 저하되었다. 예상 방어지역은 확장되어 갔고, 그러면서 거의 모든 해안지역이 소모를 강요받았다. 동시에 당은 대규모의 수군 증강을 단행했다. 648년 7월-8월 검남도(사천성)와 월주, 무주, 홍주에 황제의 선박 건조 명령이 하달되었다. 해선과 쌍방선 1100척을 건조하게 했으며, 9월에 강남 12주에서해선 3백 50척을 더 만들게 했다. 당의 수군 증강이 인위적인 후천적 요인이라면 그것을 가능하게 한 선천적 요소도 당 내부에 있었다. 중국은 항구에 적합하고 해양개척에 용이한 배후지가 매우 거대하다. 강회지역에는 수상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많고, 그들은 수로를 통해 부를 추구하고자 하는 습성이 있었다. 649년 5월 29일 당태종이 사망하면서 수군 증강은 일시 정지되었지만, 아버지로부터 잘 훈련된 수군, 적재적소에 건설된 해상병참기지들, 숙련된 선박공장들로 들어찬 거대한 조선소들과 이를 운영ㆍ관리하는 시스템을 물려받은 당고종은 그것을 더욱 발전시켰다. 660년 당고종은 병력 13만을 태운 1800척의 함대를 보내 10일만에 백제를 멸망시켰고, 661년 7월에 소정방이 이끄는 수군을 대동강에 상륙시켜 평양성을 포위했다. 그리고 663년 8월 28일 당수군은 백촌강에서 왜국함대 400척을 전소시켰다. 당수군에 대항한 고구려 수군 활동이 어느 기록에도 보이지 않는 것은 무엇을 반영하는 것인가. 647-648년 당수군이 고구려 연안지역을 유린하고 다녔고, 661년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양성을 포위했는데도 그러했다. 수군 증강은 막대한 재정이 소요된다. 수명이 7년 정도인 선박은 요새보다 소모성이 강하며, 일정 수를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인 조선을 해야 한다. 고구려가 당과 함대 건조경쟁을 할 수 없다. 연개소문은 수군 증강을 국정과제로 선택하지 않고 비대칭적 대항책으로 일관했다. 그는 새로 성을 쌓고 성책을 증설ㆍ수리하는데 열중했다. 그 결과 해상에서 불확실성이 증가했다. 이는 수로로 연결된 대성(건안ㆍ비사ㆍ욕이ㆍ평양)들 사이의 물류에 타격을 주어 사회적 비용을 증가시켰을 것이다. 당의 제해권 장악이 고구려가 기울어지는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 KCI등재

        五四時期唐小圃的兒童文學觀與翻譯策略探析

        袁明嶸 ( Yuan Mingjung ) 한국중국학회 2019 중국학보 Vol.90 No.-

        중국 晩淸의 西學飜譯 물결 속에 정치소설, 과학소설, 탐정소설, 모험소설 등 서양 문예 장르와 마찬가지로 童話도 중국에 도입됐다. 조기에 번역된 서양 동화는 중국 지식인들이 啓蒙、新民、文化維新 아래 중국을 망국으로 만들지 않기 위한 문화적 선택이었다. 그래서 초기의 동화 번역은 대부분 文言文, 번역법도 의역 위주로 함으로써 번역자의 주관적인 견해를 직접 삽입해 새로운 사상과 도덕을 알리는 도구가 되었다. 이는 5·4 시기 어린이 중심을 강조하여 출발한 아동문학관과는 거리가 상당히 멀다. 당소포(唐小圃)(1879-?)는 5·4 시기에 활약한 아동문학 작가로서 ≪京語童話≫、≪家庭童話≫、≪女子童話集≫... 등과 같은 白話文으로 쓰인 일련의 아동문학 작품을 商務印書館에서 출간하였고, 중국 동화의 시조인 손육수(孫毓修)의 후계자가 되었다. 당소포(唐小圃)는 또 直譯의 필법으로 러시아 五大家의 우화 및 일본 메이지 시기의 소설 작품을 번역해서 民國 시기 아동문학 및 번역문학의 진전을 간접적으로 추진했다. 본고는 당소포(唐小圃)의 아동문학 작품과 번역 작품의 후기를 통해 그의 아동문학의 취재 관점、아동문학관, 그리고 당소포(唐小圃)의 법률적 배경이 그의 작품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할 뿐 아니라, 당소포(唐小圃)의 문학번역에 대한 태도, 방법 및 번역 책략을 또한 검토할 것이다. 이로써 당소포(唐小圃)의 아동문학적 특성과 성취를 아동문학계에 알리고 역사적 언어환경 아래 당소포(唐小圃)의 아동문학관과 번역 책략의 진면목을 환원시킬 것이다. During the late Qing Dynasty, Western literature and arts on “Fairy Tales” was introduced to China; together with politics, science, detective and adventure novels. Translating these fairy tales was one way for Chinese intellectuals to prevent China from destruction, to uphold the hope for enlightenment, to improve national consciousness and cultural renewal. Therefore, most of the early fairy tale translations were written in classical Chinese and the translation approaches were mainly based on free translation. By directly inserting the translator's subjective arguments, it became a tool for propagating new ideas and ethics. It was far from the children's literature view that emphasizes children-centeredness during the May 4th Movement. Tang Xiaobu (1879-?) was an active children's literature writer during the May 4th Movement. He published a series of vernacular children's literature works in the Commercial Press, such as “The Fairy Tales of the Jing Language”, “Family Fairy Tales”, “The Collection of Women's Fairy Tales” etc., and became the successor after Sun Yuxiu. The literal translation works of famous Russian fables and Japanese Meiji novels aided the development of children’s literature in China. This paper analyzes the influence of various literary views on children’s literature. Coupled with Tang Xiaobu's legal background works, it discusses his views, methods and translation strategies. Hopefully, this would enable the academic community to understand Tang Xiaobu's characteristics and achievements in children's literature, and to restore his literary views and translation strategies in the actual historical context.

      • KCI등재

        唐 太宗·高宗代 한반도 정책과 百濟의 위상 -당 태종·고종본기를 중심으로-

        방향숙 백제학회 2019 백제학보 Vol.0 No.27

        본고에서는 백제와의 전쟁을 결정하고 결행하는 과정에서 백제에 대한 당의 입장과 동향을 알아보았다. 당의 입장을 파악하기 위하여 『삼국사기』나 중국 정사 동이전의 기사 보다는 『舊唐書』나 『新唐書』의 본기의 기록에 관심을 두었다. 당은 고구려와의 전쟁을 위해서는 장기간 정보를 수집하고 준비를 하였지만 백제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고종의 즉위 초에는 당의 국내정세가 좋지 않았다. 빈번한 재해와 모반사건 등은 고종이 대외문제에 주력할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였다. 국내의 문제가 어느 정도 안정되고 돌궐이나 서북변경의 문제 또한 진정된 이후에야 당은 한반도 문제에 주력하였다. 한반도 문제는 고구려, 백제, 신라를 제압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의 ‘四方’ 중 동방정책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당의 동방진출에 가장 큰 걸림돌은 단연 고구려였다. 고종은 대신들을 불러 연회를 베풀며 ‘一戎大定樂’을 연주하게 하였다. ‘一戎大定樂’은 군대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위용을 과시하는 음악이었다. 고구려에 대한 정벌의 의지를 재삼 다짐하였던 것이다. 대 고구려전을 준비하는 중에 당이 선택한 동맹국이 신라였다. 신라의 협조를 얻어내기 위해서라도 신라의 요구를 수용하여 백제에 대한 선공이 필요한 입장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대 백제전에서 당은 백제의 항복을 받아 내는 것으로 전쟁을 마감하고 고구려로 진격하는 것이 목표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은 백제에게 항복을 받아낸 직후인 661년 서둘러 고구려 원정길에 나섰던 것이다. 그것은 당시 당의 전반적인 대외정책의 방향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투항한 국가에 대해서는 기미지배방식을 적용함으로써 당의 지배를 관철하는 것이 당의 대외정책이었다. 백제의 항복은 이미 그 조건을 충족시켰으므로 당이 더 이상 백제를 압박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백제에서의 부흥운동은 백제지역에 대한 기미지배조차 불가능한 상황을 만들었다. 신라 또한 백제의 부활을 원치 않았으므로 백제에 대한 전투가 재개되었던 것이다. 결국 당은 신라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백제에 남겨 두었던 기미지배 기구는 철폐하였고, 백제지역에 대한 기미지배는 포기하였다. 당의 기미정책은 기미주 사이의 세력균형을 인위적으로 조정하여 부족 간의 결합을 저지하는데 중점이 두어졌다는 점을 상기해 보면, 당이 백제지역과 고구려지역에서 기미지배에 실패했기 때문에 한반도에는 신라와 백제와 고구려의 통합국가가 건설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When analyzing the relationship between Goguryeo, Silla, Tang, and Baekje, the records of the Samguksagi(三國史記) or the JiuTangshu(舊唐書). XinTangshu (新唐書) provides us with the most information. In this paper, I tried to understand the position and trend of the Tang Dynasty on the war with Baekje. Although we expected a lot of information on the issue, it was difficult to find meaningful information about Baekje. This is a very different case from Goguryeo. So, I thought about why there were so few records of Baekje. Although Baekje has collected long-term information and prepared for the war against Goguryeo, Baekje has never had such a situation. It was not because Baekje was easy to deal with, but because Baekje was at odds with Silla, and the Tang Dynasty was not planning a war because there were no special problems. There is no reason to support the Silla kingdom, as Baekje and Silla were countries that paid the same tribute. However, Baekje was in a bad relationship with Silla when the king was preparing to fight Goguryeo. Thus, the attack on Baekje was necessary for the Tang Dynasty to cooperate with Silla. In the war that began this way, the Tang Dynasty sought to end the war by accepting the surrender of Baekje. The foreign policy of the Tang Dynasty was focused on artificially adjusting the balance of power between the tribes, thus preventing unity among the tribes. It can be said that the Korean Peninsula provided conditions for the construction of a unified kingdom between Silla, Baekje and Goguryeo, as the kingdom failed to control its territory in Baekje and Goguryeo. If indirect control had been successfully maintained in Baekje, as the Tang Dynasty had intended, and if it had been done in Goguryeo, integration by Silla would have been impossible or even delayed. The revival movement of Baekje and Goguryeo people did not bring about the revival of Baekje and Goguryeo, but it is thought that it was the most important move that allowed the unification of the three kingdoms.

      • 당 무후ㆍ중종대 사신 파견과 그 외교적 역할

        염경이(Yeom kyung-i)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7 江原人文論叢 Vol.18 No.-

        본 논문은 당 무후와 중종년간에 외교의 실질적 수행자로서 외국에 파견된‘사신’에 대해 조사ㆍ분석한 것이다. 무후는 통치 20년 동안 8차례의 사신을 국외로 파견하였고 중종은 6년 동안 6차례 사신을 파견하였다. 무후기 사신파견 중 5건은 책봉사의 파견이었고 이중 3건은 돌궐에 파견된 것이다. 돌궐로 파견된 당의 사신은 모두 정3품의 중요 고위 관직자였다. 돌궐에 비교적 집중적으로 사신이 파견된 것은 당이 돌궐 가한 책봉을 통해 북방의 질서를 다시 장악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궐은 거란 거병이라는 국제적 상황을 이용하여 당과의 관계를 역전시켰다. 나아가 당실에 혼인을 요구하여 당과의 책봉관계를 군신이 아닌 혈연관계로 변화시키고자 하였다. 신라와의 관계 역시 소원하여 2차례의 책봉사 파견도 당 중심의 책봉질서에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하였다. 무후가 서돌궐에 안무사를 파견한 것은 기미질서의 유지를 위한 것이었다. 이 지역에 파견된 사신은 시어사, 어사중승, 어사대부 등의 어사대 관원이었다. 태종과 고종대에 어사대 관원이 사신으로 파견된 예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서 어사대가 감찰기구로서 국가 관료기구를 그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상기해보면, 이는 당이 실제 정치력과는 상관없이 의도적으로 이 지역에 대해 관할권을 주장하고자 한 것으로 여겨진다. 토번에는 한차례의 사신이 파견되었는데 이는 토번의 요구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때 정8품하의 사신을 파견한 당의 태도는 토번에 대해 자국의 의사를 관철시키려는 적극적 의지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당의 역사과정에서 무후와 중종대는 같은 시기로 논의되고 있다. 또 중종 치세가 짧은 탓에 한 논문에서 다루게 되었지만, 사신파견을 통해 살펴본 무후와 중종의 대외 정책과 태도는 확연히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즉 책봉으로 당의 국제적 지위를 유지하려는 무후와 달리 중종은 새롭게 탄생한 발해와 우호관계를 형성하고 서돌궐 지역의 새로운 실력자와 군사를 협의하고 책봉하며 돌궐에 대항한 연합전선을 구축하였다. 나아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돌궐에 대해서는 혼인을 파기하였고 토번에 대해서는 화번공주를 보내 난국을 타개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중종은 6년 동안 6차례 사신을 파견하며 복잡한 국제관계를 다방면으로 해결하고 돌파하고자 하는 적극적 의지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중종은 고종과 비슷한 평가를 받는 인물로 그의 정치적 역량이 확실치 않다. 또 이미 널리 알려졌듯이 이시기 당은 내부적으로 도호제를 지탱할 부병제가 붕괴되고 있었다. 때문에 실력 행사가 불가능한 외교만으로 국제관계를 역전시키기는 불가능하였다. 그렇기에 제도적 변환이 요구되었고 예종 즉위년에 절도사가 설치되고 있는 것이다. This paper is to explain the dispatch and the diplomatic role of envoys during emperor Muhu and Jungjong's reign in the Tang dynasty. Muhu dispatched envoys to the surrounding countries eight times during his reign of 20 years, while Jungjong did six times during his reign of 6 years. Generally speaking, the times of Muhu and Jungjong had something in common with each other in the Tang dynasty. But the analysis of the dispatched envoys revealed the difference of two emperors' foreign policy or attitude. Muhu dispatched high officials of the third rank as the envoys (chaekbongsa) to give investiture to kings of T'u-chueh 3 times, and tried to maintain the international standing. His endeavor, however, failed in the face of T'u-chueh's resistance, who rather asked the marriage to the royal house of the Tang, so attempted to the reversal from the investiture. On the other hand, Jungjong established friendly relation with newly born Parhae, and formed a joint front against T'u-chueh through the military discussion with a strong man of western T'u-chueh. He further cancelled the marriage with T'u-chueh, and sent one of its princesses to ancient Tibet. He showed the indomitable will to get over the international crisis. But his political ability was uncertain. The diplomacy is not enough. The day called for a change of the establishment.

      • KCI등재

        『唐會要』의 한국고대사 기사 비교와 분석

        송영대 동아시아고대학회 2020 동아시아고대학 Vol.0 No.60

        『唐會要』는 唐代 중반부터 수집한 각종 官文書를 종합하여 편찬한 會要體 史書이다. 본래는 당대의 蘇冕이 『會要』 40권을 편찬하였고, 이를 이후 崔鉉이 감수하여 『續會要』 40권을 지었으며, 宋 初에 王溥가 이를 합치고 보충하여 『唐會要』 100권을 편찬하였다. 『唐會要』의 마지막에는 당대의 주변국 정황이 기재되었는데, 이 중에서는 한국 고대 국가들도 포함되었다. 『唐會要』에는 고구려ㆍ백제ㆍ신라ㆍ발해ㆍ탐라에 대한 정보가 수록되었다. 분량은 간략한 편이며 국가별로 국가 소개와 연혁의 비중이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이번 논문에서는 『唐會要』와 『通典』을 비롯하여 각종 중국 정사도 함께 비교하여 고찰하였다. 그 결과 『唐會要』는 『隋書』까지의 中國 正史보다, 『舊唐書』의 기록과 더 유사한 점이 많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이는 당대 중후반까지의 자료를 섭렵하면서 내용이 보강된 결과이며, 당대의 史館에서 확보한 각종 자료가 典據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通典』과 비교해서는 자료 모음의 성격이 강하며, 기존에 알려진 내용을 요약하면서 한국 고대 국가와 당과의 관계를 최대한 반영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Tang Huiyao(唐會要)≫ is a Huiyao-style(會要體) history compiled from various official documents collected from the middle Tang(唐) period. 40 volumes of ≪Huiyao(會要)≫ were originally compiled by Sumian(蘇冕), and later 40 volumes of ≪Xu Huiyao(續會要)≫ were created under the supervision of Cuixuan(崔鉉). The compilation was finished by Wangpu(王溥) who supplemented and then compiled 100 volumes of ≪Tang Huiyao≫ in the early Song(宋) Dynasty. In the last section of ≪Tang Huiyao≫, the circumstances of neighboring countries of Tang were described including the ancient Korean countries. The book contains information on Goguryeo(高句麗), Baekje(百濟), Silla(新羅), Balhae(渤海), and Tamra(耽羅). The volume is brief and it places different importance on each country introduction and history. In this study, a comparative study on various Chinese official histories(中國 正史) including ≪Tang Huiyao≫ and ≪Tongdian(通典)≫ was made. As a result, it is found that ≪Tang Huiyao≫ has more similarities with the contents of ≪Jiu Tangshu(舊唐書)≫ than in Chinese official histories up to ≪Suishu(隋書)≫. This is the result of reinforcing the contents of the data up to the mid-to-late Tang dynasty. Besides, it seems that various data obtained by Tang's History Center(史館) would have become references. Compared to ≪Tongdian≫, it mainly focuses on data collection and attempts to reflect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ancient Korean countries and Tang as much as possible while summarizing the previously known contents.

      • 『당사주(唐四柱)』의 문헌학적 접근 - 중ㆍ일 문헌과의 비교를 통하여 -

        김시덕 한국서지학회 2011 서지학보 Vol.0 No.37

        『당사주』는 친숙함과 높은 활용도에 비하여 성립연대, 전래, 유형 등의 서지사항이 불분명하다. 이는 현존 『당사주』사본들에 필사기가 남아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사실에도 기인한다.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당사주』에 실려 있는 문장/도상의 내용 및 배치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졸고에서는 송-명대에 성립한 『연금두수삼세상』및, 중국에서 성립하여 일본에서 16세기말-17세기초에 필사된 『대역단례복서원귀』와의 비교를 통하여 『당사주』의 성립연대를 추정하고 유형을 분류하였다. <당사주 A형> 계통에 실려 있는 삽화의 구도 및 채색의 고졸함으로 미루어 보아, <당사주 A형> 계통은 <당사주 B형> 즉 유포본보다 이른 시기에 성립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당사주 A형>과 <당사주 B형>은 모두, 송-명대에 성립되어 중국과 일본에서 유행한 『연금두수삼세상』에서 기원하는 것으로 보인다. <당사주 A형>과 <당사주 B형>이 단일한 계통의 선후관계에 놓여있는지 아니면 서로 독립적으로 『연금두수삼세상』의 흐름에서 갈라져 나왔는지에 대해서는 향후 고찰이 필요하다. 또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당사주』(<당사주 A형>)의 삽화에서 16세기말-17세기초에 일본에서 필사된 중국본 『대역단례복서원귀』의 삽화와 공통되는 특성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16세기말-17세기초 이전에 두 문헌의 공통 조본이 존재하였음이 추정된다. Dangsaju has been familiar to ordinary korean people and, even today, is often used as fortune book in Korean. But it is not certain when Dangsaju was written, how the copies were spreaded and how many types of it exist. These problems come from that most of the extant copies don't have any information about when and how these were written. To solve these problems, I compared illustrations in Dangsaju with those in Yeongeum Dusu Samsesang, made in Song~Ming China, and Daieki Danrei Bokusei Genki, also made in China and copied in late 16~early 17 century Japan. From the comparison, I propose two hypotheses. First, the extant copies of Dangsaju can be divided into two types; Type-A and Type-B. The fact that the forms and colors of illustrations in Type-A are older than those of Type-B show that Type-A was formed earlier than Type-B. But it seems that Type-B, not only Type-A, comes from Yeongeum Dusu Samsesang made in Song~Ming China and popular in China and Japan. It is uncertain whether Type-A and Type-B come from Yeongeum Dusu Samsesang together or indi- vidually. Second, illustrations in Dangsaju(Type-A) from Korean National Library, are similar to those in Daieki Danrei Bokusei Genki from Shido library of Keio University. This similarity suggests that two copies came from the same book formed earlier than late 16~early 17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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