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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하대의 三寶

        백미선(Baek, Mi-sun) 신라사학회 2011 新羅史學報 Vol.0 No.23

        신라는 많은 보물을 가진 나라였다. 이 보물들은 모두 신라의 흥망성쇠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 것으로, 신라사에서 차지하는 의미가 매우 컸다. 이 가운데서도 황룡사의 장육존상과 9층 목탑 그리고 천사옥대는 신라 하대에 三寶과 불리며, 신라의 멸망과 고려의 건국을 함께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던 보물이었다. 신라 삼보는 신라 하대 경명왕 4년에 처음 등장한다. 그간에는 신라 삼보가 중고기에 성립했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들이 ‘삼보’로서 함께 언급된 적이 없다는 점에서 재고를 요한다. 삼보는 처음 고려 태조 왕건의 친신라정책에 대한 이슈로서 재기되었다. 그러나 이후 삼보에 대해 주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신라이다. 신라는 경명왕 5년 삼보를 찾고 그것을 통해 대외관계에서 자국의 위상을 높이려고 시도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당시 후삼국관계 속에서 효용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신라 삼보 각각이 신라 중고기에 성립한 것인 만큼 신라 하대에 어떤 필요로 요구 되었는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에 삼보 각각과 신라 하대의 상관성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황룡사 장육존상은 현재 전하는 기록이 없어, 추후 황룡사와의 관계 속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볼 필요가 있겠다. 황룡사 9층 목탑은 그 상징하는 의미가 유연해 중고기 이후 다양하게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천사옥대의 경우는 앞의 두 보물과는 좀 다르다. 호국보로서의 모습 보다는 진평왕대의 왕권 강화적 성격이 강하게 드러나, 신라 하대에 이러한 성격이 요구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고려 태조 왕건이 신라 경순왕으로부터 천사옥대를 이어받은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여기서는 경순왕이 귀부와 동시에 천사옥대를 바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다가 후삼국이 통일된 뒤에야 바친 것에 대해서 주목해 보았다. 후삼국 통일 이후 고려는 신라를 있는 통일 왕조로서 의미를 가지게 되었고, 이와 함께 고려 태조는 천사옥대를 비롯한 삼보를 필요로 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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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당서』의 王言과 신라의 문예

        張日圭(Chang, Il-gyu) 신라사학회 2020 新羅史學報 Vol.0 No.49

        이 글은 『구당서』 본기의 조서나 제서 등 당 황제의 왕언을 신라 국왕의 외교문서와 비교해 당 문예를 수용한 신라 문예의 특징을 살핀 것이다. 당의 왕언은 821년 이전 조서와 제서가 혼용되었던 반면, 821년 전후 조서와 제서는 칙서와 구분 없이 사용되었다. 특히 805년~846년, 888년~908년에는 활발하게 작성되어 반포되었다. 왕언은 황실 권위 신장과 국가 안정 염원을 담았다. 신라는 당과 외교 관계를 맺은 뒤 당의 제도 정비와 정책 시행을 꾸준히 주목했다. 신문왕 때 당시 전하는 시문을 모은 1천권 문관사림 중 규범에 해당하는 글을 모은 50권을 받았고, 성덕왕 때는 상문사를 통문박사로 개칭하고 서표의 임무를 전담시켰다. 또한 851년 편찬된 개벽~수나라 때까지 제왕의 美政과 詔令, 制置, 銅鹽錢穀 損益, 用兵, 僧道 등을 연대별로 수록한 300권 『통사』도 참고했다. 신라 왕실은 당과의 교류에서 당의 문물과 제도를 수용하고 당의 문예에 민감했다. 신라 문한관은 신라에 있거나 당의 국자감에 머물면서 여러 양식의 글이 담긴 『백씨장경집』 등 당 문인의 문집을 열람했고, 당 문인의 글이나 신라에 파견된 당 사절단, 또는 당 연회에 참석한 문무관과 교유하면서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는 물론 문장의 형식과 내용을 익혔다. 현재 전하는 당의 왕언과 신라의 표문을 비교하면, 형식의 통일성은 비슷하지만, 신라가 중화의 의관과 제도를 수용해 유풍을 품고 예악의 성행을 이룬 번국으로 조공의 임무를 다했음이 特記되었다. 당이나 신라는 당시 동아시아 문서의 보편적 구성, 보편적 문체를 염두에 두어 3단락 구성과 변려문체로 외교문서를 작성했다. 신라 말에 이르러서 신라의 문한관은 중국의 제후국 중에 신라가 가장 유사한 나라라고 자부하는 소중화적 자존의식을 가지고 신라 고유정서를 문예에 담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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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가야와 신라의 ‘國婚’과 ‘變服’의 함의

        신가영(Shin, Ka-young) 신라사학회 2023 新羅史學報 Vol.- No.57

        이 글에서는 대가야와 신라의 ‘國婚’을 통해 양국 관계의 추이를 살펴보았다. 국혼 과정에서 나타나는 신라 衣冠과 ‘變服’ 문제를 복식의 정치적 의미에서 분석하였다. 6세기에 들어서면서 대가야는 백제와 신라의 위협에 직면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대가야는 신라에 국혼을 요청하였다. 대가야는 신라와의 국혼을 통해서 백제와 신라의 군사적 위협에서 벗어나 독자성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신라와의 관계는 점차 신라에 복속되어 가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전근대 복식은 禮的 질서의 확립을 위해 활용된 수단이다. 신라 의관은 국혼의 성립 과정에서부터 논의된 주요 안건이었다. 대가야에 파견되었던 신라인들은 신라 의관을 착용하고 있었고, 대가야의 여러 지역에 배치되었다. 대가야왕에 의해 신라인들이 배치되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대가야가 신라의 대가야 잠식 의도를 알고 있었더라도 이들에게 일정한 임무를 부여하고 그 역할에 대해 기대했던 바가 있었을 것이다. 이후 신라에서는 공식적으로 대가야에서 신라 복식으로 활동했던 신라인들을 통해 대가야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꾀하였고, 국혼 관계를 유지하면서 점진적으로 대가야를 흡수・병합하려고 했다. 이 과정에서 대가야인의 ‘變服’ 문제가 대두하게 되었다. 대가야인의 ‘變服’으로 인해 대가야 내부에 갈등이 생겼고, 대가야인들이 신라를 선택하게 되는 상황이 점차 늘어나게 되었다. 즉, 대가야인의 ‘變服’은 결국 신라가 가야 제국을 복속・통합하는 데에 있어서 효과적으로 활용되었다. 대가야는 점진적으로 신라에 복속되었고, 562년에 최종적으로 소멸하게 되었다. 국혼 관계에서 나타나는 신라 의관과 ‘變服’은 신라가 가야 제국을 복속・통합하기 위한 조치 중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This paper explores the development of the relationship between Daegaya and Silla through the royal marriages conducted between them. Specifically, the symbolism of Sila’s clothing and undergoing a “Changing Clothes” in the process of royal marriages is analyzed in terms of the political meaning of clothing. With the onset of the 6th century, the Daegaya faced threats from Baekje and Sila. In response to this struggle, Daegaya requested conducting royal marriages with Silla. These royal marriages helped Daegaya evade the military threats of Baekje and Silla, while also allowing Daegaya to maintain its independence. However, as a result, Daegaya’s status gradually developed into one of subjugation under Silla. During pre-modern times, clothing was used as a means to establish ceremonial rank. Silla clothing was an important issue that was discussed from the establishment of the royal marriage system. Many people from Silla were dispatched across various regions of the Daegaya, wearing the traditional clothing of the Silla. An important point to consider is that these individuals were di spatched under the command of Daegaya’s king. As such, even if the people of Daegaya had been aware of Silla’s intention to encroach on their territory, the dispatched individuals would have been given certain tasks and would have been expected to fulfill them accordingly. Afterwards, the Silla sought to expand its influence on Daegaya through the Silla people who were officially active in Daegaya wearing Silla’s traditional clothing. Furthermore, Silla and Daegaya upheld the custom of royal marriages, as a means of the former’s attempt to gradually absorb and merge the land and people of Daegaya. It was through this process that the “Changing Clothes” of the Daegaya people became an important issue. Conflicts arose within Daegaya due to the noticeable changes in their fellow people, and there were increasing instances in which the Daegaya people chose Silla over their own identity. In other words, the transformation of Daegaya was effectively utili zed in Silla’s subjugati on and integration of Daegaya and its people. Daegaya was gradually subjugated under the Silla, and finally disappeared completely in 562. Silla’s clothing and “Changing Clothes” that appear in the national relationship were one of Silla’smeasures to subjugate and unify the Ga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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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백제의 문화적 특성과 융합

        서현주(Seo, Hyun-ju) 신라사학회 2018 新羅史學報 Vol.0 No.42

        본고에서는 고고학 자료 중 주거와 건물, 고분, 이와 관련이 많은 기와, 토기 등의 연구성과를 종합하여 신라와 백제의 문화적 특성을 정리해보고, 단계적으로 이루어지는 신라와 백제 문화의 융합(교류) 문제에 접근해보았다. 신라와 백제는 6세기 중엽 이후 대체적인 변화 양상이 유사하지만, 그 이전에는 상당한 차이가 존재하는데 이는 주거뿐 아니라 고분, 기와의 제작기법, 토기의 기종 구성과 형식 등에서 잘 드러난다. 그 배경에는 원삼국시대 이래 두 국가의 왕실이나 건국세력의 계통이나 구성, 북방과의 친연성, 지리적인 위치에 따른 중국과의 친연성 차이와 관련되는 것으로 판단된다. 두 국가의 문화적 특성은 신라의 경우 전통성, 배타성(획일성), 후진성, 백제의 경우 다양성(포용성), 개방성, 그리고 선진성으로 정리될 수 있겠다. 두 국가는 일정 시기에 문화적인 융합이 이루어지기도 하는데 그 양상은 단계적으로 차이가 난다. 4~6세기 전엽에는 두 국가의 변경지역인 충청지역에 신라가 진출하여 백제계(마한계 포함) 문물이 늦게까지 공존하기도 하는데 이는 그 지역 일대의 백제계 지방민에 의한 것이다. 이 시기에 신라 왕경에 나타나는 토기나 기와 등의 백제 문물도 이들을 매개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 6세기 중엽 이후 신라 문화가 전반적으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신라와 백제 문화의 융합이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서 여러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기와의 제작기술, 사찰을 비롯한 건물의 건축기술, 토기를 중심으로 한 식기문화 등에서 백제 문화의 영향이 확인된다. 이 때의 문화적 융합은 나제동맹, 혼인동맹 등으로 맺어진 백제와 신라 관계가 바탕이 된 것이며, 주로 신라지역에서 백제 멸망 직후까지 이어진다. 이후 신라는 기존의 전통문화나 중국 문물을 받아들여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기도 하는데 이로 인해 백제와 신라의 문화적 차이는 다소 커지는 양상도 나타난다. This study set out to arrange the cultural characteristics of Silla and Baekje in archeological materials about dwelling, buildings, old tombs, and many roof tiles and pottery related to them and take an approach to the issues of cultural convergence(including exchanges) between Silla and Baekje. The two states showed similar changing patterns overall since the middle sixth century, but there were big cultural differences between them in the former period. These differences are clear in houses, old tombs, making techniques of roof tiles, and types and forms of pottery. As for the cultural characteristics of the two states reflected in them, Silla was characterized by tradition, exclusiveness(uniformity), and backwardness, while Baekje was characterized by diversity(acceptability), openness, and advancement. There was cultural convergence between Silla and Baekje, as well, with some differences in its pattern according to the stages. During the period of the fourth century ~ the former half of the sixth century, the Baekje-style things remained in some areas of Chungcheong that were incorporated into the territory of Silla or were partially found in Wanggyeong of Silla. Since the middle sixth century, cultural convergence between Silla and Baekje became full-blown in the overall changing process of Silla culture. Silla accepted many things from Goguryeo and Baekje, and the influence of Baekje culture was found in Silla"s roof tile-making technology, building construction technology, and tableware culture around pottery. This cultural convergence was based on the relations of Baekje and Silla including Silla-Baekje Alliance and marriage alliance. As Silla created a new culture based on the introduction of Chinese civilization as well as its old traditional culture since then, cultural differences between Baekje and Silla became large ag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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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의 천하관과 삼국통일론

        김수태(Kim, Soo-tae) 신라사학회 2014 新羅史學報 Vol.0 No.32

        신라 중대와 관련된 논쟁 가운데에서도 현재까지 계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주제는 신라의 삼국통일과 관련된 문제이다. 삼국통일을 위한 전쟁이었는가, 백제통합만을 위한 전쟁이었는가 하는 것이다. 신라가 처음부터 삼국통일을 의도하고 전쟁을 벌였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신라로서는 백제와 고구려에 대해서 통일전쟁을 벌일 의지를 키워나가기는 어려운 사정이었다. 백제멸망이 신라의 목표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 고구려 내부의 혼란이 진행되자 신라는 고구려멸망까지를 계획하고 주도해나갔다. 신라의 삼국통일론이 형성된 시기는 671년 무렵이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는 언급이 처음 나오기 때문이다. 중국의 당나라가 천하를 통일했다면, 신라는 삼국을 통일했다는 것이다. 이는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를 분리시켜 지배하려는 당의 움직임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신라와 고구려와 백제는 이미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신라는 삼국통일론이란 천하관에 이어, 삼한통일론을 새롭게 주장하였다. 이제 삼국이라는 국가의 통일만이 아니라, 그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종족의 통일을 언급하게 된 것이다. 삼국이 서로 동질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삼한통일론은 673년 김유신의 죽음을 앞둔 시기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는 당나라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던 신라의 입장에서 삼국인들의 단결을 바라는 현실적인 필요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또한 내부의 통일 없이는 삼국의 진정한 통일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도 작용하였다. 신라의 삼국통일론이 실질적으로 추구된 시기에 대해서 문무왕대 나당전쟁에서 승리한 676년, 혹은 신문왕대 9주가 설치된 685년을 들기도 한다. 그러나 옛 고구려의 영역을 당나라가 거의 대부분 장악하고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그보다 늦은 시기인 성덕왕대 나당관계가 개선되고, 당나라와 신라가 발해의 움직임에 공동으로 대처하는 735년에야 그것은 달성되었다. 당나라가 대동강이남 지역에 대한 신라의 지배를 비로소 인정한 것이다. 선덕여왕대 당나라의 태종과 신라의 김춘추 사이에 맺은 약속이 이제야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동안 신라가 추구해온 독자적인 천하관이 당나라에 의해서 마침내 받아들여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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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세기 후반 신라의 백제·고구려 유이민 정책

        최희준(Choi, Hee-joon) 신라사학회 2020 新羅史學報 Vol.0 No.50

        통일전쟁의 결과로 7세기 후반 신라에는 많은 유이민이 백제와 고구려로부터 유입되었다. 이들은 유입 경로나 성격에 따라서, 첫째 전쟁 과정에서 신라에 투항하거나 망명한자, 둘째 전쟁의 결과 신라군에 생포된 포로, 그리고 셋째 자신들의 터전과 함께 신라에 병합되어 귀속된 遺民 집단 등 크게 세 그룹으로 분류할 수 있다. 통일전쟁 중 신라는 유이민들을 전략적으로 받아들여 활용함으로써 전황을 유리하게 끌어가려 하였고, 전쟁이 종식된 후에는 이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방책을 모색하였다. 이에 따라서 신라는 7세기 후반, 국내외 정세의 변화에 따라서 정책목표를 달리한 백제・고구려 유이민 정책을 단계적으로 펼쳐나갔다. 7세기 후반 신라의 유이민 정책은 크게 세 시기로 구분이 가능하다. Ⅰ기는 통일전쟁이 개시된 660년부터 나당전쟁 발발 직전인 669년까지로, 신라는 전쟁에서 투항하거나 포로로 사로잡힌 유이민 중 고위층 인사를 중심으로 적극 포섭・등용하는 정책을 펼쳤다. Ⅱ기는 나당전쟁기인 670년부터 676년까지로, 백제 故地를 당으로부터 공취한 결과, 새롭게 유입된 백제계 유이민에게 신라의 관등을 일괄적으로 사여해 주는 정책을 단행하였다. Ⅲ기는 통일전쟁 종결 이후로, 유이민 정책이 전시의 포섭책에서 전후의 통합책으로 새롭게 전환된 시기였다. 한편, 이 시기 신라가 고구려계 유이민에 비해서 백제계 유이민에게 차별적인 정책을 폈다는 주장이 일찍부터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그 근거들을 검토해 본 결과, 이는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실제로는 골품제에 기반한 신라 사회에서 백제나 고구려 계통의 유이민 모두에 대해서 차별이 구조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때문에 통일전쟁 이후의 유이민에 대한 통합정책이 다방면에서 이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라인과 유이민의 통합은 유기적인 단계로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As a result of the Unification War(三國統一戰爭), many immigrants(流移民) came from Baekje(百濟) and Goguryeo(高句麗) during the late 7th century Silla(新羅). They can be grouped into three main groups. The first group is that surrendered or defected to Silla during the war, and the second group is priso ners who were captured by Silla forces as a result of the war. And the last one is a group of refugees whose territory were annexed to Silla. Silla tried to take advantage of the war situation by strategically accepting and utilizing the immigrants during the war. After the war, they sought ways to efficiently manage the immigrants along with the kingdom’s greatly expanded territory. Accordingly, Silla implemented policies on immigrants from Baekje and Goguryeo in the late 7th century, depending on the changes in domestic and foreign situations. Meanwhile, it has been argued from early on that Silla had differentiated Baekje immigrants compared to Goguryeo immigrants. However, after reviewing the arguments, it was not historical. In fact, in the Silla society based on the bone-rank status system(骨品制, kolp’umche), discrimination was structured for both the Baekje and Goguryeo immigrants. As a result, Silla’s integration policy for immigrants after the Unification War was implemented in many ways, but Silla’s unification of the Three Kingdoms did not achieve organic integration between Silla and its immigra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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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百濟와 新羅의 國家的 美術交流

        陳政煥(Jin, Joung-hwan) 신라사학회 2018 新羅史學報 Vol.0 No.42

        본고에서는 백제와 신라의 고분 출토품, 제와술과 목조건축술 등 기술, 불교미술품 등 다양한 분야의 대표적인 유물을 통해 양국 간의 미술 및 문화교류의 일면을 살펴보았다. 교류의 정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리 볼 수 있는 여지가 있지만, 본고에서는 백제와 신라의 미술교류에 대해 양국 간의 정치적・군사적 遠近에 따라, 첫째 ‘적극 동맹기’, 둘째 ‘동맹 소강기’, 셋째 ‘대치 시기’로 나누어 검토하였다. 첫 번째, ‘적극 동맹기’는 450년~500년으로 고구려의 남하에 백제와 신라 양국이 적극적으로 공동 대응한 시기이다. 이 시기 양국 간 미술교류 양상을 보여주는 사례는 신라의 수도인 경주 식리총에서 출토된 금동신발과 당시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 송산리 4호분에서 나온 은제과판이다. 식리총 금동신발은 한성시기에서 웅진시기로 넘어가는 과도기 백제 금동신발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송산리 고분의 과판 역시 신라의 전형적인 과판이다. 이 시기의 교류는 비록 적극 동맹기였으나, 이처럼 완제품이 상대 국가에 사여되는 것 이외에 문화교류는 그렇게 활발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동맹 소강기’는 500년 이후부터 백제 성왕이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554년 이전까지이다. 이 시기 양국은 명목 상 동맹이었으나, 신라는 백제와의 동맹에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양-백제-신라 3국의 국제 관계 속에서 백제의 제와술과 같은 기술이 신라에 전해지는 한편 중국 남조 불상양식의 영향을 공유하는 등 동맹이 굳건했던 그 전시기에 비해 오히려 미술교류의 폭이 더 넓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세 번째, ‘대치 시기’에는 ‘동맹 소강기’ 그 이전 시기 있었던 국가 차원의 직접적 교류는 점차 쇠퇴됨에 따라, 목조건축술 등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일방의 문화 내지 미술이 그대로 전달되기보다, 다른 국가의 문화와 미술의 모티프를 바탕으로 자기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한편, 후삼국기 후백제는 전반적으로 신라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를 가졌으나, 황룡사지 출토 금동불입상, 남산 늠비봉 석탑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는 후백제에서도 후백제 미술을 신라지역에 이식하고자 했다. 일반적으로 삼국시대에 세련된 백제 미술이 신라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많이 끼쳤을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그런데, 본고를 통해 국가 차원의 미술교류는 직접적인 영향이 많은 것도 아니고, 더더군다나 백제의 미술이 신라에 일방적으로 영향을 끼쳤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백제와 신라의 미술교류는 당시 양국의 정치적 상황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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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세기 일본 서부 연안에 나타난 신라인들

        김창겸(金昌謙) 신라사학회 2012 新羅史學報 Vol.0 No.26

        이 글은 9세기 日本 서부 연안에 출현한 신라인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당시 일본 서부 연안에는 많은 신라인들이 자주 출현하였다. 이들 신라인은 단순한 표류민으로 난민인 경우도 있었으나, 상인·범죄자·도적(해적)·승려·관리 등 그 성분이 다양하였다. 일본측 사료에는 신라인이 출현하는 현상에 대하여 일본의 풍속과 교화를 흠모하여 자발적으로 귀화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지만, 이들이 일본에 진출한 직접적 이유와 배경은 일본측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라측에 보다 있었다. 이 무렵 신라 내부의 사회변동은 많은 유이민을 낳았고, 이들 일부가 해외로 진출한 것이다. 일본에 신라인들이 출현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단순한 표류는 사고와 자연재해가 그 원인이다. 그러나 상인은 부의 획들을 목적으로 일본을 대상지로 선택한 것이고, 난을 피하거나 범죄인으로 몰려 살길을 찾아 나선 유이민들은 생존을 위해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일본에 진출한 것이다. 일본 서부 해안에 도착한 신라인들은 일본 관민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다치거나 죽은 자도 더러 있었으며, 일본에 상륙할 때의 모습은 오랜 항해와 굶주림에 지쳐 매우 처참한 모습이었다. 때로는 자신들의 생계와 보호를 위해 무장을 하고 많은 수가 무리를 지어서 일본 연안 지역에 불법 상륙하여 노략질하거나 심지어는 공물을 약탈하는 불법 도적집단의 모습이었다. 이 경우에는 해적단으로서 막강한 군사조직과 같았다. 그러므로 9세기에 신라인들이 일본지역으로 진출한 것은 생활의 어려움과 고통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세계를 찾아 나선 생존전쟁이었다. 신라인의 일본 진출은, 일반적인 인구이동이 그러하듯이, 그 파급효과로 인하여 정치·사회·경제는 물론 문화 전반에 걸쳐 변화를 낳았다. 결국 신라에서 발생한 유이민은 9세기 동아시아에 큰 파장이 되어 한반도의 신라는 물론 중국 唐과 일본에서 중요한 문제가 되었으며, 이것은 당시 인적 물적 교류로서 상호 작용하여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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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三國史記≫ 신라본기 역주 後記

        권덕영(權悳永) 신라사학회 2013 新羅史學報 Vol.0 No.27

        한국학중앙연구원은 두 차례에 걸쳐 ≪삼국사기≫를 번역, 주석하였다. 이때 필자는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담당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역주 작업은 필자에게 힘들고 고된 훈련과정이었다. 그런 만큼 얻은 것도 많았다. 漢籍 사료에 대한 해독능력을 증진시킬 수 있었고, 한국고대사 연구 성과를 두루 섭렵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한국은 물론 중국과 일본의 다양한 사료를 탐색하고 활용할 수 있는 안목을 기를 수 있었다. 또한 이 작업을 통하여 역사 탐구에 필요한 인내심을 배우게 되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번역, 주석하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첫째는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명실상부한 `본기`라 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고, 둘째는 신라 무열왕과 문무왕 본기의 서술이 매우 상세하면서도 주체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셋째는 신라본기의 金春秋 입당기사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고, 넷째는 신라본기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라시대 금석문뿐만 아니라 중국 당나라 금석문까지 널리 섭렵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절감하였다.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에 수록된 다양한 천변지이 기사를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으나, 이번 신라본기 역주에서는 그러지 못한 점이 있어 아쉽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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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新羅 종이문서의 現狀과 裝幀·廢棄·再活用 과정

        윤선태(Yoon, Seon-tae) 신라사학회 2020 新羅史學報 Vol.0 No.50

        「신라촌락문서」와 사하리가반에 부속되어 발견되었던 「사하리가반부속문서」는 실물로 전하는 신라 當代의 종이문서라는 점에서 남다른 가치가 있다. 촌락문서와 가반문서는 문서의 내용 판독과 해석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문서의 裝幀 방식이나 재활용 과정 전체에 대한 관련 정보들도 수집 정리되어야 한다. 관문서의 작성 과정에는 최초 종이의 생산에서, 종이의 연접, 괘선 긋기 등 문서의 裝幀 등 물질적 준비가 먼저 이루어진다. 또 문서가 작성된 후 일정한 보존기간이 지나 그 용도가 폐기되면, 문서 裏面의 백지(空紙)를 재활용하여 새로운 문서 작성이나 기타 여러 방식으로 재활용하는 과정이 있었다. 촌락문서와 가반문서로 볼 때, 신라의 관문서 작성에 사용된 종이는 두꺼운 楮紙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촌락문서 제작에 사용된 기본 종이는 그 크기가 29.5×52㎝로 추정되어, 대체로 당시 종이는 唐尺을 기준으로 1척×2척의 크기로 생산되어 용도에 맞게 다시 재단하여 사용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종이 생산은 통일기에는 이미 일반화되어 지방 군현에서도 종이제작기술자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신라의 관문서는 이러한 기본 크기의 종이를 여러 장 연접하여 두루마리 형식의 卷子本으로 裝幀하였다. 연접방식은 오른편 종이가 왼편 종이의 위로 오도록 붙이는 ‘純繼’와 그 반대의 ‘逆繼’ 방식이 모두 나타나는데, 일정 기간 보존했던 보관용 문서인 촌락문서는 순계로 연접되었고 먹줄이나 자를 사용해 괘선을 정연하게 그어 내용을 정리하였다. 반면에 메모용 문서로 추정되는 가반문서 파편 부분은 역계의 방식으로 연접되었고 괘선도 손으로 대충 그어 사용하였다. 신라에서는 메모가 다 되었거나, 보존기간이 끝난 관문서들은 문서를 작성했던 관청내부나 다른 관청 또는 사찰 등에 불하되었다. 이 불하된 관문서들은 불특정의 크기로 다시 잘라 해체한 뒤에, 최초 문서의 이면 백지를 다른 용도로 재활용하였다. 촌락문서는 사찰에 불하되어 『華嚴經論』의 經帙 제작에 재활용되었고, 가반문서는 관청에 불하되어 다시 또 다른 메모용의 문서로 재사용되었다. 한편 앞뒷면의 종이가 모두 서사된 뒤에도, 관문서는 버려지지 않고 다른 용도로 재활용되었다. 가반문서나 쇼소인 소장의 유기 숟가락 포장 상태 등으로 볼 때, 신라에서는 관문서를 손으로 찢어서 對일본 교역물품에 흠집이 나지 않도록 하는 충전용 종이나 포장지로 재활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신라의 종이문서는 현재 촌락문서와 가반문서, 이 두 가지 사례밖에 없지만, 一當百처럼 일본의 正倉院文書에 못지않게 신라의 종이 제작, 문서의 생산과 폐기, 문서의 재활용 과정 전반에 관한 유익한 정보들을 소상히 알려준다. 이러한 정보들을 미리 체계적으로 정리해두면, 앞으로 쇼소인 소장의 신라 숟가락 셋트를 포장했던 신라 종이문서들이 공개될 때, 그 문서적 특징을 간취할 수 있는 매우 유용한 참고자료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The “Silla Village Register Document(新羅村落文書 SVR)” and the “Document attached to the Sahari-Kaban(佐波理加盤附屬文書 DAS)” which were found at the Shosoin in Japan, are of extraordinary value in that they are actually paper documents of the Silla Dynasty. While reading and interpreting the content of documents is important for studying Silla history, relevant information on the making and Recycling Process of Paper Documents should be collected and organized as much as for the method of binding and the entire recycling process of the documents. In the process of preparing the documents of the government office, material preparation, such as the production of the first paper, the bond of the paper, and the binding of the documents, such as drawing the line, are carried out first. In a ddition, after the document was prepared and its use was discarded after a certain period of preservation, there was a process of recycling the white paper on the back of the document to prepare new documents or recycle them in various ways. The SVR and the DAS indicate that the paper used to make documents for the government offices of Silla was made of Dak-paper(楮紙). The basic paper used in the production of the SVR, which remains in full form, is estimated to be 29.5×52㎝ in size, and it is generally thought that the paper was produced in the s ize of 1×2check(尺) based on the scale of the Tang Dynasty of China and was re-cut and used according to its purpose. Paper production has already been generalized during the Unified period, so the existence of paper-making engineers can be confirmed in local county. The oficial do cuments of Silla were made in a scroll format by bonding several pieces of paper of this basic size. The bonding method shows both ‘Soongye(純繼)’, which is a general method of attaching the right paper to the top of the left paper, and ‘Yeokgye(逆繼)’, which is a rare method of attaching it to the opposite of Soongye. While the SVR was bonded to Soongye and arranged the lines neatly, the DAS assumed to be for short-term memos were bonded by Yeokgye, and the lines were roughly drawn and used by hand. In Silla, the documents of government offices, which had been completed or whose preservation period had expired, were referred to inside the government offices, other government offices, or temples. These loaded official documents were cut back into unspecific sizes and then recycled for other purpo ses the white paper on the back of the original document. The SVR was reused as paper cloth for wrapping various scrolls of Buddhist scriptures, while the DAS was returned to the government office and reused as another document for memos. On the other hand, even after all the paper on the front and back sides was written, was not discarded and recycled for other purposes. Based on the packing conditions of the brass spoon at the Shosoin, it can be seen that Silla used the documents of government offices to tear them by hand and recycle them as packaging for trade goods sent to Japan. Although Silla currently has only examples of the SVR and the DAS documents, it provides useful information on the overall process of paper making, binding and discarding of documents, and recycling documents as well as numerous ancient Japanese government documents as the Shoso in Documents. If such information is organized in advance, it will be a very useful reference to capture the characteristics of the documents when the documents of Silla government offices, which had packaged the Silla spoon set of Shosoin, are relea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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