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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高句麗) 유민(遺民) 남단덕(南單德) 묘지명(墓誌銘)에 대한 연구

        김영관 ( Kim Youngkwan )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2017 백제문화 Vol.0 No.57

        남단덕 묘지명은 2010년 중국 陝西省 西安市동쪽 白鹿原에서 출토되었고, 현재는 西安碑林博物館에 보관되어 있다. 묘지명은 蓋石은 缺失되었고 誌石만 남아있다. 크기는 가로 44.4cm, 세로 43.5cm로 정방형에 가까우며, 두께는 6.8~7.5cm 정도이다. 가로와 세로로 선을 그어 가로 24행, 세로 25행으로 바둑판 모양으로 구획을 한 후, 그 안에 총 533자의 지문을 새겨 넣었다. 唐 代宗때인 776년에 만들 어졌다. 남단덕의 선조는 고구려 멸망 이후 당의 安東都護府에 편적되었고, 祖父인 南狄은 磨米州 都督을 지냈고, 부친인 南于는 歸州刺史를 지내는 등 당에서 지방관으로 활동하였다. 남단덕은 南于의 맏아들로 고구려 멸망 이후인 699년 고구려 수도였던 平壤에서 태어났고, 遼東에서 성장했으며, 玄宗開元초년 (713)에 발탁되어 주로 변방의 무관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다 현종 天寶14년(755)에 安祿山이 일으킨 반란에 참여하였다가 투항하였다. 그 후 수도인 長安에서 살다가 776년 향년 78세로 생을 마쳤고 백록원에 묻혔다. 남단덕 묘지명에 대한 연구는 고구려와 고구려 유민사 연구에 새로운 자료를 제공하였다는데 의미가 있다. 고구려인의 입당 이후 활동뿐만 아니라 입당 이전 고구려의 지명과 관제 등에 대한 새로운 자료이기도하다. 또한 당의 고구려 고토 지배정책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능케 하였고, 고구려 수도인 평양성과 안동도호부에 대하여도 기존의 연구와는 다른 차원에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제시하였다. 남단덕 묘지명의 발견으로 고구려인으로는 최초로 남씨의 존재를 확인하였고, 당의 안동도호부를 비롯한 고구려 고토지배정책과 고구려 유민에 대한 처우나 활용 등에 대해 새로운 연구 자료를 축적할 수 있었다. 또한 고구려 유민이 당에 들어가 지방관으로 활동하다가 반란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렸다가 다시 황제에 귀부하는 등 복잡다단한 삶을 살았던 기록을 마주하게 되었다. 고구려를 멸망시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薛仁貴의 증손자인 薛夔가 묘주인 남단덕의 묘지명을 작성하는 등 고구려 유민들이 당에 들어가 장안의 귀족 가문들과 직접 교류한 흔적도 찾을 수 있었다. 남단덕 묘지명은 한국사뿐만 아니라 중국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이다. The epitaph of Namdandeok(699-776), made in the year 776 during the reign of Tang(唐) Daijong(代宗), was found at Bailuyuan(白鹿原) in the eastern suburbs of Xi’an(西安), Shanxi province, China and now is owned by Xi’an Beilin Musuem(西安碑林博物館). The epitaph’s cover stone was lost. The memorial stone measures 44.4cm by 43.5cm with 6.8~7.5cm thick. Its surface is divided into a section the 24 by 25, which refers to a compartment such as a checkerboard pattern. Total 533 characters are inscribed on the section. According to the epitaph, after the fall of Goguryo(高句麗, 37 BCE-668CE) Namdandeok’s direct ancestors were under the command of Andong Dohobu(安東都護府), a type of regional government of Tang, in Pyeongyang(平壤), the capital of Goguryo. His father and grandfather were served as local governors of Tang. Namdandeok was born in Pyeongyang, grew up in Liaodong(遼東) and played an active part as a military officer in border area early Kaiyuan(開元) era(713-741). He was involved in AnLushan(安祿山, 703-757 CE)’s riot and surrendered to Tang government forces. Afterwards he lived in Chang’an(長安), the capital of Tang and died in the year 776 there. Studies on the history of Goguryo can be deepened by analyzing the inscriptions and discovering new materials such as Tang’s ruling policy at the occupied territory and usage of former Goguryo people. The surname, Nam was first found in the history of Goguryo. The inscriptions show that the former Goguryo people entered Tang and interacted with Tang aristocracy. For example, XueKui(薛夔), great-grandson of XueRengui(薛仁貴) who played a leading role in the fall of Goguryo as a Tang general, wrote the inscriptions. The epitaph is an important material to studies of Chinese history as well by letting us know that Chang’an city of Tang was wrong place name. The Namdandeok’s epitaph is 24th epitaph of former Goguryo people introduced to academia. The study on it has important meaning in giving new materials to the history of Goguryo and its immigrants to Tang China, and place name and government organization of Goguryo as well.

      • KCI등재

        고구려 文字, 言語 자료의 현황과 과제

        임기환(Lim Ki-hwan) 대동한문학회 2007 大東漢文學 Vol.26 No.-

        고구려의 문자 자료는 크게는 후대의 史書 편찬을 통하여 전해지는 문헌자료와 고구려 당대의 문자 자료인 金石文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고구려 금석문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 비문(광개토왕비, 중원고구려비), 고분 묵서명(안악3호분, 덕흥리고분, 모두루총 묘지), 불상 명문, 와당 전 명문, 축성과 관련된 석각명, 토기명문 등 다양한 계통의 명문 자료가 발견되었다. 이들 금석문은 시기적으로 4세기 중엽에서 6세기말까지의 자료이다. 고구려 금석문이 제법 다양한 유형으로 남아있다는 점은 고구려 문자 자료의 범주를 파악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만, 한편으로는 각 금석문이 서로 연관되거나 내용을 상호 보완해주는 성격의 자료가 드물기 때문에, 개별적인 성격의 금석문 자료를 통해 일정한 역사적 사실을 추정해내는 데에는 자료의 제약이 적지 않다. 따라서 금석문을 이용한 연구의 방향이나 범주도 매우 제한적이다. 다수의 금석문 자료가 전해지지만 고구려의 문자 생활이나 한문학의 수준을 이해하는 주된 자료는 광개토왕비에 한정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리고 그동안 주로 역사 연구 자료로서만 활용되었을 뿐 한문학 자료로 주목되지 못한 점은 이해의 폭을 축소시킨 결과가 되었다. 광개토왕비문과 고구려본기 등에서 찾아지는 고구려 한문학 자료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려는 학문적 접근이 필요하다. 현재 고구려의 문자 자료를 반영하고 있는 史書로는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와 열전(온달전 등), 그리고 이규보의 〈동명왕편〉에 인용된 〈구삼국사〉, 『삼국유사』의 일부 기사가 있다. 따라서 이들 史書 기사에서 가능한한 고구려 당대의 문자 기록 혹은 문장을 최대한 복원하려는 시도가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거꾸로 현재의 史書 기사가 형성되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일어났을 문장의 변개 가능성에 대해 탐색해보는 작업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古記’ 기사를 인용하여 편찬하고 있다. 그러나 산재된 여러 古記 자료를 재구성하였다기 보다는 편찬의 주된 전거 자료가 된 ‘原典’이 있으며 이를 중심으로 나머지 古記와 『자치통감』 등 중국측 史書의 기사를 보완하여 편찬한 것이다. 이때 삼국사기 편찬자들이 주요 전거자료로 삼은 ‘원전’은 〈구삼국사〉는 아니고, 이와는 다른 아마도 고려초에 편찬된 또다른 삼국사 史書로 추정된다. 이 ‘원전’에는 이미 『후한서』 등 중국 사서의 기사가 인용되어 있는데, 이를 보면 원문장의 변개가 거의 없이 원문을 인용하고 있다. 이 ‘원전’에는 국내 고구려 전승 자료도 역시 원문에 가깝게 반영되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다만 〈지리지〉 미상지분조를 통해서 추적해보면 ‘원전’ 기사의 일부를 재구성하였음이 확인된다. 하지만 현 고구려본기나 열전의 기사는 고구려 당대의 문자 자료를 어느정도 충실히 반영한 결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제법 풍부한 기술 내용을 갖고 있는 기사들을 고구려 한문학이나 문자자료의 성격을 파악하는 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지 여부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고구려 언어를 추적하는 중요 자료는 『삼국사기』 지리지 권35 신라조와 권37 고구려조에 보이는 고구려 지명 관련 자료이다. 이들 자료를 통하여 고구려어를 추적하기 위해서는 각 지명의 고구려계 異名이나 신라가 개명한 지명들이 어떻 Data available for the research of Koguryo’s letters include an Epigraph(金石文) as well as Koguryo-Bongi(高句麗本紀) and series of Biographies(列傳) in 『Samguk-Saki(三國史記)』. A Epigraph(金石文), while not in abundant, are highly valuable in that they are original records. A review of the editorial process for the articles of Koguryo-Bongi and Biographies(列傳) reveals that they properly reflect original data. Efforts for discovering data on Koguryo’s letters are necessary. The data of Research data on Koguryo’s language are names of a place in 『Samguk-Saki』 Gographical-Gi(志). Research on Koguryo’s language should in the future be performed in parallel tracks of spoken language and written language.

      • KCI등재

        발해의 멸망과 고려의 건국-고려의 고구려·발해 지리(地理) 인식 검토를 중심으로-

        임상선 ( Lim Sang Sun ) 한국사상사학회 2024 韓國思想史學 Vol.- No.76

        본고는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에 대하여 고려(高麗)가 어떠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는지 시기별로 검토하였다. 고려 태조(太祖)의 고구려·발해 지리 인식의 검토 결과, 태조는 거란(契丹)의 화친(和親) 요구에 대하여 발해(渤海)를 이유로 거절하였다. 거란이 고구려와 발해의 영역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고려의 북방 진출은 거란과의 영토 전쟁에 다름 아니었다. 거란은 고려가 고구려 뿐 아니라 발해와도 일정 맥이 통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었다. 성종 12년(993)에 소손녕(蕭遜寧)이 이끄는 거란군이 고려를 침략하였다. 서희(徐熙)가 소손녕과 고구려 계승을 둘러싸고 쟁론을 벌였다. 소손녕은 고구려 땅이 거란의 소유라며 반환을 요구하고, 서희는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하였다며 소손녕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서경이나 압록강(鴨綠江) 주변, 거란의 동경(東京) 위치나 경계에 대한 거란과 서희의 논의에서는 고구려보다는 발해일 경우에 보다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12세기 전반 고려의 인식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엿볼 수 있다. 고구려 멸망 후 그 땅을 발해와 신라(新羅)가 차지하였는데, 신라는 그 남쪽을 차지하였다고 하였다. 신라가 차지한 지역은 서경, 즉 대동강(大同江) 남쪽이므로, 그 북쪽은 발해가 차지한 것이 된다. 고려와 거란은 발해 유민을 다수 이주시키거나 받아들였기 때문에 대략적이라도 발해의 지리(地理) 위치를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15세기 중반에 편찬된 『고려사(高麗史)』의 고구려 영역에 대한 지식은 서북쪽이 압록강 북쪽이고, 동북은 선춘령(先春嶺)이 경계라는 막연한 상태에 머물고 있었다. 동계(東界)의 함주도독부(咸州都督府) 지역은 고려 건국 이전에는 고구려와 발해의 영역이었다. 그런데 『고려사』에는 지역의 연혁을 ‘고구려’라고 하고, 주민도 ‘여진(女眞)’이라 하며, ‘발해’라는 설명이 보이지 않는다. 북계의 안북부(安北府) 지역은 ‘본고려(本高麗)’로 표기하였는데, 이 ‘고려’는 시기적으로 혹은 영역적으로 ‘발해’일 가능성도 있다. 『고려사』가 동계와 북계(北界)에서 발해를 밝히지 않은 이유는 발해 관련 내용을 누락하였을 가능성, 참조한 자료 자체가 발해를 드러내지 않았을 가능성, 그리고 발해가 또 다른 고구려 계승국인 데에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This paper examines the perceptions of Goguryeo and Balhae over the territories of Goguryeo and Balhae by period. King Taejo of Goryeo refused the Khitan's request for reconciliation on the grounds of Balhae. Since the Khitan occupied the territory of Goguryeo and Balhae, Goryeo's advance into the north was nothing but a territorial war with the Khitan. The Khitan acknowledged that Goryeo had certain ties not only with Goguryeo but also with Balhae. In the 12th year of King Seongjong's reign(993), the Khitan army led by So Son-nyeong(蕭遜寧) invaded Goryeo. Seo Hui (徐熙) argued with So Sonnyeong over the succession to Goguryeo. So Son-nyeong demanded the return of Goguryeo land, saying it belonged to the Khitan, and Seo Hui refuted So Son-nyeong's claim, saying that Goryeo succeeded Goguryeo. In the controversy between Khitan and Goryeo, Balhae is more naturally understood than Goguryeo. The perception of Goryeo in the first half of the 12th century can be seen in the Samguk Sagi(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After the fall of Goguryeo, the land was occupied by Balhae and Silla, and it is said that Silla occupied the south. Since Goryeo and Khitan immigrated or accepted many Balhae refugees, it is highly likely that they knew Balhae's geographical location at least roughly. Knowledge of Goguryeo's territory in the Goryeo Sa(History of Goryeo), compiled in the mid-15th century, remained vague, with the northwest being north of the Yalu River(鴨綠江) and the northeast being Seonchunryeong(先春嶺). The Donggye(東界) and Bukgye(北界) regions were the territory of Goguryeo and Balhae before the Goryeo Dynasty, but there is no description of them as ‘Balhae’. The reasons are thought to be that information about Balhae was omitted, that the referenced material itself did not reveal Balhae, and that Balhae is another Goguryeo successor state.

      • KCI등재

        高句麗 東川王代 對중국 외교의 변천과 목적

        김효진(金孝珍) 고구려발해학회 2015 고구려발해연구 Vol.52 No.-

        동천왕 시기 고구려는 압록강 하구의 西安平을 영유하고 있었다. 고구려는 수도 국내성 방어체계 확립과 해양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이곳을 활용할 필요가 있었으며 그것을 위해서는 수군 발전이 절실하였다. 한편 공손연과의 북방외교에 실패한 손오는 요동에서 도망친 자국 사신의 고구려 逃亡을 계기로 고구려와 외교를 개시한다. 이 부분에서 동천왕의 對중국 외교 발단은 필연적 요소와 우연적 요소가 결합된 양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고구려는 손오의 우수한 수군력 습득을 위해서 접촉하였으며 손오는 말을 수입하기 위해 고구려로 사신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교류는 234년 손오가 조위에게 패배하면서 균열이 발생하였다. 조위의 수군이 활약하여 孫吳軍을 막았다는 사실은 고구려로 하여금 새로운 고민을 던져주게 하였다. 즉 손오와의 외교를 재개할 근본적 명분이 사라진 셈이었다. 결국 236년 고구려-손오의 외교는 파국을 맞이하였으며 고구려-조위의 외교가 전개되었다. 남방의 안정을 찾은 조위는 238년 동북방의 공손연 정벌을 계획하였으며 고구려도 군대를 파병하였다. 두 국가는 원활한 정벌을 수행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막은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결국 공손연 멸망 이후 고구려-조위의 대결 구도로 이어졌다. 조위는 238년 낙랑·대방을 점거하였고 이때와 가까운 시점에 고구려의 서안평도 함락시킨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전격적으로 이루어지던 조위의 압박이 요동남부 주민의 연이은 이주로 잠시 주춤해지자 동천왕은 242년 서안평을 공격하였다. 이 공격은 서안평을 기점으로 한 수군 양성이라는 초기 기조를 재확립하기 위함인 동시에 손오와의 외교 재개를 시도하기 위한 복안이었다. 이처럼 고구려와 조위의 갈등은 점점 심화되었으며 조위 유주자사 관구검의 침공이라는 결과로 번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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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고구려 세계유산의 현황과 활용

        조법종(Cho, Bup Jong) 고구려발해학회 2014 고구려발해연구 Vol.50 No.-

        중국은 2004년 고구려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 이래 집안과 환인을 중심으로 관련 역사공간을 마련하여 세계문화유산도시로서의 성격과 의미를 극대화하고 있다. 특히, 유적정비와 함께 관련 박물관, 공원 및 문화관광시설을 확대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파급된 문화관광수요를 확대하고 있다. 고구려 세계유산 관련 공간은 고구려역사를 중국 역사범주로 포함시키기 위한 동북공정 논리와 연결되어 이를 대중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활용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즉, 박물관 전시내용과 관련 시설물, 조형물에 동북공정 논리가 추가되거나 강조되고 있다. 또한 박물관을 애국교육기지로 선정하여 동북공정 논리가 포함된 교육 내용이 박물관의 전시내용과 패널내용에 반영되어 중국의 자라나는 세대에게 교육된다는 점에서 우려된다. 즉, 2009년부터 중국의 중요 박물관을 애국교육기지로 지정 학생들에게는 무료로 개관하고 있어 이 같은 중국적 역시인식과 공간인식을 홍보하는 전략을 진행하고 있다. 환인지역의 경우 고구려의 흘승골성을 당나라시기 전설인 오녀전설과 연결시킨 오녀산성 명칭 및 관련 조형물을 세워 고구려의 역사상이 부각되지 않고 있다. 또한 고이족과 연결된 겸양상등 고구려역사상과는 연결되지 않는 조형물을 만들어 역사적 사실이 왜곡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집안지역의 고구려 관련 형상물중 주목되는 것은 집안시청광장에 새로 조영한 조형물로 삼족오를 태양조라 하여 중국신화에 나오는 삼족오가 고구려에서 신성물로 인식된 것이 같은 문화적 범주에 속하는 증거라는 표현과 고구려역사상을 10개의 기둥조형물로 표현하였는데 중국과의 관계, 신속 등이 부각된 표현문제가 나타나고 있다. 2013년 개관한 집안 고구려박물관은 최근 발견된 집안 고구려비를 중앙 홀에 전시하여 중국적 비형식을 갖은 고구려비를 전시함으로써 중국과의 관련성을 부각하고 있는 점도 유의된다. The Northeast Project(東北工程), which is short for the Northeast Borderland History and the Chain of Events Research Project launched by the Chinese government in 2002 and finished in 2006. This project conducted by the Chinese Academy of Social Science. This project applies the ideology of Zhonghua Minzu(中華民族) to ancient ethnic groups, states and history of the region of Manchuria and northern Korea. Under the Zhonghua Minzu ideology, it is assumed that there was a greater Chinese state in the ancient past. Accordingly, any pre-modern people or states that occupied any part of what is now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are defined as having been part of that greater Chinese state. Due to its claims on Gojoseon, Koguryeo and Balhae, the project sparked disputes with Korea. The Chinese government attempted revision of Koguryeo history, in an attempt to overrule the foregoing thousands of years’ orthodox theory. Recently China cities, especially Hwanrun(桓仁), Jian(集安), the capital of Koguryeo , try to making chinese historical image in accordingly to the changing theory. The Onyesan Museum(五女山博物館) in Hwanrun and the Public square bronze statue of Sun-bird, image pillars in Jian City are the representation of China’s Northeast Project. And the Museum of Hwanrun(桓仁) and Jian(集安), made the Koguryo history of China’s. So we should stop the distortion of Koguryo history mdae by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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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高句麗 滅亡期 政治運營의 變化와 滅亡의 內因

        李文基(Lee Moon-Key) 한국고대사학회 2008 韓國古代史硏究 Vol.0 No.50

        이 글의 목적은 고구려의 滅亡期를 설정하고, 멸망기의 정치적 변화 단계를 파악하여 고구려 멸망의 여러 원인 가운데서 내적인 원인, 그 중에서도 정치적 원인을 밝히는 데 있다. 얻어진 결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고구려의 ‘멸망기’는 보장왕의 시대이자, 연개소문 一家의 집권기(642~668)로 볼 수 있다. 멸망기의 정치적 변화 단계는 다시 5단계로 세분되는데, 연개소문의 ‘막리지 재임 단계(642~644)’-‘대막리지 재임 단계(644~661)’-‘태대대로 재임 단계(661~665)’-‘연남생 집권단계(665~666)’-‘연남건 집권단계(666~668)’가 그것이다. 이와 같은 소단계는 정치운영에서 서로 다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첫째 막리지 재임단계는 연개소문이 정변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지만, 중앙정계와 지방 성주 중에도 반대파가 상당수 남아 있었다. 이에 연개소문은 반대파의 반발과 견제를 피하기 위하여 자신은 최고의 국왕 근시직인 막리지에 취임하고, 일족인 도수류금류를 대대로로 추대하였다. 이는 대대로와 귀족회 의체의 기능과 위상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으로, 이 단계는 종래의 귀족연립적인 정치운영이 유지되었음을 의미한다. 둘째 대막리지 재임단계는 연개소문 일가의 권력독점과 독재권력의 행사로 요약될 수 있다. 연개소문은 644년에, 직면한 대당전쟁에 대비하여 대막리지 직을 신설하고 자신이 그 직을 차지하였다. 645년 당군을 격퇴한 연개소문은, 승리의 주역으로 권위가 고양되고 권력도 일층 강화됨으로써 이후 최고 권력자로서 일인 독재정치를 운영하였다. 대대로와 ‘五官會議’ 등 귀족연립체제에서의 핵심 권력기구를 무력화시키는 대신 자신의 아들을 비롯한 근친을 국왕 근시직인 중리직에 기용하여 사적인 권력기반으로 활용하였다. 이러한 연개소문의 독재적 권력행사와 연씨 일가로의 권력집중은 곧 정치ㆍ사회적 측면의 여러 가지 폐단을 낳았으며,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반발세력도 등장하게 되어 고구려 주민의 이탈현상을 초래하였다. 그러한 불만은 흉조의 빈발로 상징되고 있다. 셋째 태대대로 재임단계는 이전 단계 후반의 연개소문 일가로의 권력집중과 독재적 권력행사로부터 야기된 반발을 무마하여 정권의 위기를 극복할 목적으로, 661년 연개소문이 태태대로로 전임하여 귀족연립체제적 정치운영으로 회귀해 갔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완된 정치질서를 회복하기는 어려웠고, 오히려 후계구도를 둘러싼 새로운 정쟁의 불씨를 남겨 결국 남생 형제의 분열로 고구려를 파국으로 몰고 가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였다. 네 번째와 다섯번째 단계인 ‘남생형제 집권기’의 고구려의 정치운영은 연개소문의 독재적 운영방식을 계승한 것이었지만, 이미 ‘대막리지 재임단계’부터 진행된 사회적 통합력의 이완이 더욱 심화되어 핵심 지배세력 내에서도 분열과 갈등이 표출되기에 이르렀다. 남생 형제간의 갈등의 배후에는 정치세력 간의 대립이 숨어 있었고, 그것은 결국 최고 집권자 남생의 당 투항으로 이어졌다. 이후 지배세력의 고구려 이탈이 가속화되었고, 고구려 군민의 항전 의지도 크게 약화되었다. 이로써 고구려의 멸망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고구려 멸망기의 정치적 변화 단계를 고려할 때, 고구려 멸망의 내적 원인으로는 연개소문의 ‘대막리지 재임 단계’에서의 연개소문과 그 일가의 권력 독점과 독재적 권력행사를 지목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로부터 많은 정치ㆍ사회적 문제가 파생되었으며, 그것이 고구려 사회의 내부적 통합력을 현저하게 약화시켰기 때문이다. 이는 곧 남생형제의 분열로 이어져 고구려 軍民의 항전의지를 크게 약화시켰고, 지배세력의 이탈을 급증시켰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고구려 멸망의 내적 원인 가운데서 정치적인 원인은 ‘대막리지 단계’ 이후의 연개소문 일가의 독재와 그로부터 파생된 정치ㆍ사회적 파장에서 찾아야 마땅하다. 凶兆가 ‘대막리지 단계’에 집중되고 있어, 이때부터 고구려인들이 국가의 멸망을 체감했음을 알 수 있는 데서도 방증을 얻을 수 있다. The aim of this research is to find out the political causes of the kingdom of Koguryo by examining the political changes in the phases of the declining period. The declining period of Koguryo, that is, the period of king Bojang under dictatorship of Yon Kaesomun(642-668) can be divided into 5 phases; rule of Yon Kaesomun, as a Makliji(莫離支 ;642-644 ), dictatorship of Yon Kaesomun, as a great-Makliji(大莫離支 ; 644-661), dictatorship of Yon Kaesomun, as a Taededero(太大對盧 ; 661-665), rule of Yon Namsaeng(665-666), and rule of Yon Namgon(666-668). The first phase was begun by Yon Kaesomun's military coup. In order to subdue the opposition party, Yon appointed himself a Makliji, an high office in the king's council and his relative Dosuryukumryu(都須流金流) a dedero. In this period Yon had to accept a politics of the traditional mixed government with nobility, as he could not exercise an exclusive power. The second phase can be marked by the dictatorship of Yon and his family. Yon established a new office called great-Makliji for himself in 644. He made his power more secure by defeating the invasion force of Tang in 645. Under his dictatorship the office of Dedero, and the Council of Five Offices (五官會議), once core in the mixed government of nobility, became titular, and his son and relatives were placed in the office of Junglee whicn were used as basis of Yon's power. However, his dictatorship and power concentration brought many political and social corruptions, and generated an opposition group, and in result the renouncement of people of the kingdom. The third phase was a period that Yon returned to the politics by the council of nobility as a strategy to overcome the political crisis caused by his dictatorship. He took the office of Taededero in 661. However his strategy did not serve, instead it made the political situation lose which provided a power struggle between sons of Yon, a fatal cause of the fall of the kingdom. The fourth and fifth phases, the rule of Yon Namsaeng and his brother, widened the social division and the political crack among the ruling elite. The power struggle between the two brothers was that of two political groups. The surrender of Yon Namsaeng to Tang and the fall of Koguryo were inevitable results of this collapse of politics in these phases. Given these political changes in the five phases, the fall of Koguryo was caused inwardly dictatorship of Yon and his family. Many of Social and political problems were generated by this dictatorship, and in turn they greatly weakened the social unity of the kingdom. The power struggle between Yon Namsaeng and his brother badly damaged the will of the force and people of the kingdom to fight back against the invasion force of Tang. The inward causes of the fall of Koguryo can be found in the dictatorship of the Yon family and its effects on politics and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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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건국신화의 성립 배경

        김구진 백산학회 2006 白山學報 Vol.- No.76

        從神話學觀點看, 高句麗的建國神話雖然包含神話學所具有的特徵, 而北方的薩滿敎才 是建國神話的主要背景. 像西伯利亞的薩滿敎世界表現於高句麗的壁畵墳一樣, 北方薩滿敎世界照樣呈現於高句麗的建國神話. 蒙古族稱他門的至高神爲“Tengri-Tangri”, 東胡族 稱之爲“Bulgan-Buga”, 赫哲族稱之爲“Bulgan”, 高句麗與百濟以及新羅稱之爲“Balgen”.蒙古族所信奉的“Tangri”是天神, 古朝鮮建國神話的主人翁檀君就是“Tangri”, 淸朝皇室所祭祀的堂子之鄧神也是“Tangri”. 而韓國人所信奉的“Bulgan-Buga”爲光明神, 高句麗東明聖王的語意就是“Balgen”的光明神. 薩滿敎分宇宙爲上界與中界以及下界的三界,又分天爲七層或九層. 高句麗人信奉西伯利亞薩滿敎所重視的宇宙觀與靈魂不滅,修建古墳時,設備好幫助死者之靈魂能夠到天界的一些方案. 這就是七層ㆍ九層ㆍ五層以及三層的抹角藻井式天頂. 高句麗人認爲死者之靈魂透過墓道與羨道隨時來往龕室與玄室,而且靈魂離開肉體後透過天頂的蓋石能夠到了天界. 在高句麗石室封土墓中,我們値得注意的是抹角藻井式天頂,其構造最爲獨特,而且呈現出高句麗人的來世觀. 據西伯利亞薩滿敎的宇宙觀看, 上界與中界以及下界的三界以地軸所連繫, 地軸裏有個洞, 透過洞自由來往三界的權能之者就是薩滿, 卽洞穴連繫於地上與地下世界的通道. 信奉薩滿敎的高句麗人認爲東明神透過國東大穴降臨, 因此, 祭祠東明神之前, 高句麗的五個部族之人從早上在洞穴擧行迎接東明神的儀式. 高句麗的朱蒙神話爲建國神話, 琉璃神話爲守成神話. 其神話的主人翁各自遇到兩次的考險與困境, 不過他門闖過這些關成爲“Shman-King”. 這些考險過程都是明顯的呈現 祭政一致時代典型的“Shman-King”之成巫過程. 朱蒙與琉璃他門每次碰到危難, 向天大聲叫喊󰡒我是天帝之子, 而是日月之子󰡓表白自己的身分, 幫助守護神的維護脫離困境. 由此, 高句麗人爲朱蒙與琉璃的後裔而驕傲, 絶對信奉救世主東明神之保佑. “Shman-King”之主要權能是飛天與變身之法術. 他們用飛天法術領導狗與鷄等補助神靈引導死者之靈魂到達皇天, 飛到七層ㆍ九層之宇宙到達極樂. 每經過各層關門, 又以變身法術與守護關門之力士打杖, 因爲與他門打嬴才能過關. “Shman-King”之使命爲保護 部族成員之安寧與繁榮. 譬如說, 爲他門擊退病魔, 使婦女安然無恙的生孩子, 祭祀東明 神等. 無論如何, 爲了闡明高句麗之建國神話與東明祭以及高句麗之壁畵墳, 一定先了解 西伯利亞薩滿敎的原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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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시 속에 나타난 고구려 여성 -조선후기 「해동악부」에 나타난 고구려 여성 형상과 그 의미를 중심으로

        남은경 ( Eun Kyung Nam ) 한국고전여성문학회 2009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 Vol.0 No.18

        본 연구논문은 최근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고구려의 역사와 인물`에 대한 연구 범위 속에 들어간다. 그러나 본 연구는 `여성학적 관점`으로 그 간 연구 대상에서 소외되었던 `고구려 여성`에 주목하여, 고구려 여성이 문학작품에서 어떻게 형상화되고 평가되었는가를 구체적으로 살피고, 이들 형상화의 현대적인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 고구려의 역사와 인물에 대해 고려시대의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기술하였으나, 그 이후 많은 문인학자들이 고구려의 역사적 인물을 소재로 하여 다양한 시작품을 창작하였다. 이들 작품 속에서 고구려의 인물들은 생생하게 형상화되고 시인에 의해 찬양되거나 비판되는데, 이러한 인물 형상화와 평가는 당대 및 후대의 독자들의 뇌리에 강한 인상을 남기고, 이상적 인간관을 구성하는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러므로 남성 문인들이 작품을 창작하면서 고구려의 여성인물을 어떻게 형상화하고, 또 어떻게 평가했는가를 살펴보면 과거 남성 문인들이 가졌던 고구려 역사에 대한 평가와 이상적인 여성관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 중 특히 조선조 남성문인들이 외면하거나 부정적으로 평가했던 고구려의 여성인물의 모습은 현대적인 관점에서는 역으로 긍정적으로 새롭게 평가될 만한 여지가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에 본 연구는 고구려 역사를 찬란한 우리 민족의 역사로 평가함을 전제로 하여, 그 역사 속에서 보이는 고구려 여성의 다양한 모습을 도출하여, 과거의 전통적 여성상을 재고하는데 기여하는 바 있을 것을 기대해본다. 즉 고구려 여성의 형상은 한국의 전통적인 여성상과는 다른 면모들을 보이기에, 한국 여성의 자아정체성 수립과 기존의 보수적 여성관을 변화시키는데 일조할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작품 속에 형상화된 고구려의 여성 인물들은 다음과 같은 면모를 갖고 있다. 첫째, 고구려 여성은 혼인에 있어서 자신의 선택과 자신의 애정을 중시하였다. 둘째, 고구려 여성은 남성과 다름없는 권력 장악의 욕구를 보이며, 정치권력 획득 및 유지를 위한 적극적 공세를 했다. 셋째, 타인의 결정에 따르기보다는 자신의 주관에 따라 당당하게 의견을 개진하고 그 뜻을 관철하였다. 넷째, 아내의 경우 남편을 둘러싸고 쟁총하며 질투하는 모습을 나타내며, 이러한 감정을 드러냄을 꺼리지 있지 않다. 결론적으로 볼 때, 고구려 시대의 많은 여성들은 외적 상황에 그대로 순종하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자기 생각을 표현하고 상황을 주도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여성 형상의 배경에는 고구려 및 고려 시대 여성들의 지위와 능력이 남성과 동등하게 인정되었기에 여성 행동에 대한 규제 및 강한 터부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이르게 되면 남성문인들은 비순종적이고, 주동적인 삶을 살았던 고구려 여성인물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하고, 심지어 `악녀`의 부류로 비판하고 있다. 이는 남성중심주의 시각, 특히 조선조의 남존여비적 유교 관점에 따라 고구려 여성이 평가 절하되어짐을 알 수 있다. 이렇듯 고구려 여성에 대한 평가는 시대적 가치관에 따라 다르다. 그러므로 현대적 관점에서 이들 고구려여성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There are several things about Goguryeo women revealed in poems. First, Goguryeo women valued much of their choice and love when getting married. Second, they showed desire for power equal to men and actively worked to hold and keep power. Third, they boldly expressed their subjective opinions and carried them out. Fourth, they acknowledged that they fought each other to secure their husband. In conclusion, many women in Goguryeo era were not obedience under given circumstance. They did not adjust themselves to given fate, but tried to change their own destiny. Such voluntary and active appearance of Goguryeo women were not seen as misdeed until Goryeo era. Women in Goguryeo and Goryeo had equal status their abilities were also equally recognized as men more than in Joseon era. Therefore, there seemed to have no taboo to judge women`s behavior in those eras. However, male scholars in Joseon era criticized Goguryeo women who were not obedient but lived autonomous life. They even contempt the women by categorizing them as `wicked women.` Male-oriented perspective, especially the view point of Joseon Dynasty era devaluated women in the past. Therefore, we should have a new standpoint on those women in modern perspec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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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의 청주지역 진출 시기

        金榮官(Kim Young-Kwan) 한국고대학회 2006 先史와 古代 Vol.25 No.-

          청주지역은 삼국시대에 백제와 신라가 영향력을 행사한 지역이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먼저 삼국시대 전기에는 백제가 청주지역을 차지하여 지방통치의 중심지로 활용했고, 신라는 5세기 말 이후에 청주 인근의 문의지역까지 진출했다. 백제와 신라가 청주지역에 진출한 사실은 각종 문헌 기록과 청주와 인근지역에서 조사된 고분과 성곽 등의 유적을 통해 확인된다.<BR>  최근 청주지역에서 고구려와 관련된 유적과 유물이 조사되어 고구려세력도 어느 시기엔가 진출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청주인근에서 조사된 고구려 유적과 유물로는 청원 남성골 산성, 진천 대모산성, 대전 월평동 산성과 같은 관방유적과 그 곳에서 출토된 고구려식 토기와 귀걸이, 진천 회죽리와 청원 상봉리 출토 고구려식 귀걸이가 있다. 그러나 고구려유물의 출토지가 지금의 청주시계와 일정한 거리가 있고, 청원 남성골 산성유적을 제외하면 모두 단편적인 유물만 출토되고 있다는 점에서는 문제가 있다. 이는 고구려가 청주지역에 대한 점령과 같은 직접적이고 장기적인 영향력을 끼칠 기회가 없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BR>  청주 인근에서 조사된 고구려유적과 유물에 대한 편년은 고구려세력이 청주지역에 진출한 시기를 가늠하는 중요한 지표이다. 최근까지 청주지역 고구려유적과 유물은 475년부터 551년 사이에 고구려가 청주지역을 점령하던 시기의 것으로 보아왔다. 이는 475년에 장수왕이 백제 수도 한성을 함락하고 그 여세를 몰아 금강 상류지역까지 진출했을 것이라 간주하고, 551년 백제와 신라 연합군의 공격으로 한강유역을 내줄 때까지 이 지역을 지배하였을 것이라는 선입견에 토대를 둔 것이다. 그러나 475년 고구려의 한강유역 진출과 백제가 수도를 공주로 옮긴 이후에 일어난 고구려와 백제의 전쟁기사를 살펴보면 백제는 475년 이후에도 한강유역에 대한 지배권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제와 고구려와의 전쟁이 한강유역에서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475년 이후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점령하고 경기남부지역을 거쳐 금강 상류지역으로 진출하였다고 보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다.<BR>  다만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다시 점령한 것은 529년 안장왕대에 백제 성왕이 국운을 기울인 총공세를 펼쳐 고구려를 공격하다가 오곡전투에서 패한 이후이다. 오곡전투의 패배로 백제는 한강유역을 상실하였고 고구려군은 경기 남부를 거쳐 금강 상류까지 진출하였던 것이다. 즉 고구려군이 청주지역으로 진출한 시기는 529년 이후의 일이다. 따라서 청주와 인근 지역의 고구려유적과 유물의 편년도 529년 이후가 될 것이다. 필자의 이러한 주장은 기존의 고고학적 편년을 수정할 필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앞으로 더 많은 유적과 유물의 조사 결과에 따라 증명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There is no doubt that the Cheongju Region was an area in which the Baekje Kingdom and the Silla Kingdom exerted great influence during the Three Kingdoms Period. During the first half of the Three Kingdoms Period, the Baekje Kingdom occupied the Cheongju Region, utilizing it as the center of its regional hegemony. On the other hand, the Silla Kingdom advanced into the Munui region in the vicinity of Cheongju after the late 5th century. Various document records and relics such as tombs and fortresses surveyed in Cheongju and nearby areas verify the fact that the Baekje Kingdom and the Silla Kingdom advanced into the Cheongju Region.<BR>  Recently, remains and artifacts related to the Goguryeo Kingdom were surveyed in the Cheongju region, indicating that the Goguryeo military had advanced into this region for some time. Goguryeo remains and artifacts surveyed in the vicinity of Cheongju include remains of fortresses such as Namseonggol Fortress in Cheongwon, Daemosanseong Fortress in Jincheon, and Wolpyeondong Fortress in Daejeon, as well as earthenware and earrings of Goguryeo patterns unearthed in the fortresses and earrings of Goguryeo patterns unearthed in Hoejuk-ri, Jincheon and Sangbong-ri, Cheongwon. However, there are problems in that sites where relics of Goguryeo were uncovered are some distance away from the current Cheongju City districts and that, except for Namseonggol Fortress in Cheongwon, only a limited range of relics was unearthed. This indicates that Goguryeo did not have opportunities to have had a direct and long-term influence in the Cheongju Region, like occupation of the region.<BR>  The chronology on Goguryeo remains and artifacts surveyed in the vicinity of Cheongju is an important indicator to judge the time when the Goguryeo military advanced into the Cheongju region. Until recently, based on remains and artifacts of Goguryeo found in the Cheongju region, it has been considered that the Goguryeo Kingdom had occupied the Cheongju Region between 475 and 551. It is based on the presumption that in 475 King Jangsu took hostage of Hanseong, then capital of the Baekje Kingdom, and boosted by his victory he had advanced into the upper stream of the Geumgang River and that he had ruled the region until 551 when attack by the united forces of Baekje and Silla had been made. However, when articles on Goguryeo"s advancement into the Han River area in 475 and wars between Goguryeo and Baekje after Baekje had relocated its capital to Gongju are examined, it is found that Baekje did not lose control over the Han River even after 475, which indicates that wars between Baekje and Goguryeo had continued in the Han River area. Therefore, it is a misguided assumption that after 475 Goguryeo had occupied the Han River area and advanced into the upper reaches of the Geumgang River via the southern part of Gyeonggi Province.<BR>  Yet, it was after the year 529, when King Seong of Baekje launched an all-out attack against Goguryeo and was defeated in the Ogok Battle, when Goguryeo had reoccupied the Han River area. With its defeat in the Ogok Battle, Baekje had lost the Han River area and Goguryeo had made inroads into the upper reaches of the Geumgang River via southern Gyeonggi Province. In other words, the period when the Goguryeo military had advanced into the Cheongju region was after the year 529. Therefore, chronological years of remains and artifacts found in Cheongju and its vicinity would be those of the era after 529. This paper argues emphasizing the need for modifying existing archeological chronological years, which will be proved by the survey results of a greater number of remains and artifacts in the f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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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ㆍ발해에 대한 인식의 변천

        한규철(Han Giu-cheol) 대동한문학회 2007 大東漢文學 Vol.26 No.-

          『三國史記』 등을 통해 유추해 볼 때 삼국시대인들은 일정하게 공동체의식이 있었다. 그러나 남북국시대 신라인들은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하였다고 하면서도 말갈로 인식하여 공동체의식이 희박하였다. 그러나 남북국시대에 있었던 두 왕조간의 이러한 인식은 서로의 정치적 대결관계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결과로 판단하였다. 양국의 대결적 상황이 고착되면서 신라인들이 고구려를 ‘吾邦’으로 인식하였던 것으로부터 이민족이나 다름없는 ‘靺鞨’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BR>  고구려 계승을 표방한 고려왕조는 왕조 귀족들의 구성이 金富軾과 같이 신라인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에 대해서는 三國史記에서 高句麗本紀를 입전할 정도로 동질의식이 강했다. 이후에도 고구려는 왕조적 필요와 명분에 의거해서 고구려사를 더욱 깊이 인식하느냐 그렇지 않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었지 왕조의 고구려계승을 당연시하였다.<BR>  그런데 고구려사의 한국사적 정통성에 대한 인식은 변함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사를 재인식하게 되었던 계기는 중국의 ‘統一的 多民族國家’論과 ‘東北工程’으로부터였다. 이 때부터 한국인들은 고구려와 발해의 후손의식을 더욱 강하게 갖게 되었다.<BR>  반면에 한국사에 있어서 발해사는 고구려계승국으로 인식하기도 하면서도 이민족과 같은 말갈로도 인식하는 양면적 관계를 갖고 발전하였다. 고려왕조는 발해를 ‘親戚之國’으로 인식하면서도 ‘삼국시대’에 이은 ‘남북국시대’라는 인식으로는 가지 못하였다. 이것은 고려 자신이 고구려를 계승한 왕조로 규정하고 있었기에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로 인정하기 어려웠고, 신라와 발해의 대결적 결과가 공동체적 인식의 관계로 발전하지 못하였다고 판단하였다.<BR>  조선 초기는 華夷史觀에 입각하여 발해를 말갈로 보면서 남북국으로 인식하지 못하였다. 이것이 조선 후기에 있어 국학 중심의 생각이 발전하면서 발해사에 대한 인식이 증대되고 ‘남북국시대’로 인식하는 단계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남북국시대의 일환으로 인식한 발해사에 대한 부분은 한말과 독립운동기로까지 이어졌다. 물론 이 시기에도 발해사는 말갈사로 인식되었던 교과서 등도 많았다. 특히 독립운동기는 연구미약과 말갈로 보는 滿鮮史觀의 영향아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BR>  해방 후 한국사에서의 발해사는 ‘지배층은 고구려유민 피지배층은 말갈’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발해사의 계승관계에 대한 핵심적인 문제는 ‘靺鞨’이었다. 그러나 80년대에 말갈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되면서 말갈의 他稱 즉 汎稱說에 입각하여 卑稱說이 힘을 받으며, 말갈이란 결국 고구려변방주민을 멸시적으로 부른 종족명이었다는 데에 이르게 되면서 발해의 고구려계승관계가 더욱 힘을 받게 되었다고 진단하였다. 말갈로 불리는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이들은 대부분 고구려인이었다는 것이다. 북한에서도 초기의 피지배 말갈설은 90년대부터 고구려땅[발해본토]에서 발해가 이어가고 있다는 상식을 바탕으로 다수의 고구려유민설이 정착하게 되었다.<BR>  한국사학사에서 발해사를 고구려사로 인식하였는가의 여부가 곧 발해사의 진실을 입증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고 본다. 각 시대의 고구려 발해사에 대한 인식이 시대적 요구에 응해 생성된 인식의 차원에서 나온 것이었다는 점을 파악하고, 왕조적 입장과 당나라 중심의 기록들을 민주적이고 자주적 입장에서 재인식하는 과정에서 역사의 본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전근대의 역사인식이 곧 역사적 진실일 수 없다는 것이다.<BR>  고구려는 엄연히 사실에 바탕을 둔 고려와 조선의 선대 왕조였으며 한국고대사의 일부였다. 발해사도 고구려와 다른 말갈의 왕조가 아니라, 지배층이나 피지배층을 막론하고 대부분이 고구려유민의 왕조였다. 현대 한국인들이 고구려와 발해의 후손을 자처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둔 것이다.   Depend on the 〈Samguksagi(三國史記)〉, there was the consciousness of same race in the peoples of Koguryo dynasty, Shilla of the period of Samguk(three dynasties: 三國時代). But It was diifferent in the the period of Nambukguk(southern and northern dynasties) It seemes there was a few consciousness of same race with Shilla and Palhae. Especially in the confrontation policy, those men think so. Some people think that the people of Nambukguk are the same race. In<BR>  There were many nobilityes of Shilla in Koryo cabinets that they declared succession of Koguryo. To be like that and despite, they had the consciousness of same race with Koguryo as writed in Samguksagi Koguryobongi(三國史記 高句麗本紀). After the Koryo, many people had the consciousness of that. Only it was different with the depth of the consciousness of that.<BR>  The recognizing of Koguryo dynasty came from the ideology of ethnic minority policy of ‘Unified Multiracial Nation’(東北工程). After that, the consciousness of descendants of Koguryo and Palhae increased in Korean people.<BR>  On the other hand, the understanding of Palhae of Korean history progressed through the consciousness of descendants Koguryo or Malgal ethnics. Koryo didn’t understand Shilla and Palhae as Nambukguk. But Koryo was understanding as the nation of relatives. On the beginning of Chosun, they didn’t understanding Shilla and Palhae as Nambukguk, because of the historical views of China and Babarian. In the later term they had begin to understand Shilla and Palhae as Nambukguk.<BR>  After the independence of Korea, the understanding of Palhae of Korean history was mainly the ruling class consisted of Goguryeo people, and the ruled were the Malgal (靺鞨) tribes. But I thought the Malgal that it was also a derogatory name for the inhabitants living in the periphery of Goguryeo. In other words, the term “Goguryeo people” were used to refer to the residents in and around the capital Pyongyang and the people residing in outlying areas were called the uncivilized “Malgals.”<BR>  In the history of Korean history, the fact is not true only, if the consciousness that Palhae was the successor to Koguryo or the Malgal. The fact is that all Korean oneselves think the descendants of Koguryo and Palh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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