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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항 중성리 신라비>에 등장하는 喙部 소속 壹伐의 성격과 특징

        김재봉 동아시아고대학회 2023 동아시아고대학 Vol.- No.71

        본 논고는 <중성리비>에 등장하는 喙部 소속 壹伐의 성격과 특징을 밝히기 위해서 구성되었다. <중성리비>에서 나타나는 壹伐은 외위 一伐과 형태가 일치한다. 하지만 이 壹伐은 왕경 6부인에게 수여되었기 때문에 지방민에게 수여된 관등인 외위로 볼 수 없다. 연구자들은 기존의 논리로 설명하기 힘든 <중성리비> 壹伐의 성격을 밝히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壹伐이 一伐干支 이전에 있었던 초기 관등이며 그 역할은 수장층인 干支를 보위하는 최고위 관등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하지만 이와 같은 연구들은 왕경 6부 중에서도 비주류 4부(本波部, 牟梁部, 斯彼部, 漢祇部)의 壹伐만을 상정하고 이루어진 연구이기 때문에 아무런 비판 없이 수용하기는 곤란하다. 壹伐을 연구하는 대다수의 학자들은 <중성리비>에서 壹伐의 소속부가 牟旦伐喙과 本波部인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牟旦伐喙은 6부 중에 하나인 牟梁部로 보고 있다. 하지만 <중성리비>에 관한 다양한 학설, 6세기 초 신라 금석문의 서술 방식, <중성리비>의 다른 구절과의 연관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보았을 때, 牟旦伐喙을 牟梁部로 해석하기는 힘들다. 牟旦伐喙은 牟旦伐과 喙으로 분리해서 해석하여야 한다. 이 경우에 牟旦伐은 소송을 제기한 ‘원고’를 의미하고 喙은 6부 중에서도 주류 2부(喙部, 沙喙部)에 속하는 喙部에 해당한다. 이렇게 본다면 壹伐의 소속부는 喙部와 本波部가 된다. 이 사실은 <중성리비>의 壹伐이 주류부와 비주류부에서 모두 사용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주류부 壹伐은 기존 연구에서 파악한 것처럼 수장층인 干支를 보좌하는 최고위 관등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성격을 주류부 壹伐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주류부 壹伐이나 비주류부 壹伐은 모두 초기 관등인 壹伐에서 기원하였다. 따라서 주류부 壹伐 역시 비주류부 壹伐처럼 초기에는 干支를 보좌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주류부 壹伐의 이와 같은 특징은 <중성리비> 시기에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중성리비>에서는 주류부 壹伐의 상위에 위치하는 ‘某干支’ 형태의 관등이 등장한다. 이 ‘某干支’ 형태의 관등은 干支가 주류부의 관등 체계 내에 편입되면서 탄생한 관등이다. 원래 주류부 壹伐이 보좌하여야 할 干支들은 ‘某干支’ 관등을 수여받고 국왕의 아래에 편제되었다. 이 과정에서 주류부 壹伐은 干支를 보위한다는 기존의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 그 결과 주류부 壹伐은 주류부 내부의 관등 체계 안에 융화되지 못한 이물질 같은 존재가 되었다. <중성리비>에서 壹伐이 특정한 직책 없이 ‘원고’인 牟旦伐로만 등장하는 것은 이러한 상황이 반영된 결과이다.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주류부 壹伐은 520년 율령 반포를 통해서 외위 一伐로 재편되면서 그 의미를 다시 회복할 수 있었다. 율령이 반포 되면서 외위가 정비되고 이에 따라 주류부 壹伐은 외위로 전환되었다. 주류부는 자신의 역할이 명확하지 않았던 壹伐을 외위로 전환함으로써 주류부 내의 관등 구조를 개편하고 외위의 하위 관등을 정비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주류부 壹伐이 형태를 바꾼 외위 一伐은 외위 관등인 干을 도와서 지방 통치에 관한 업무를 수행하였다. 외위 一伐의 이러한 역할은 주류부 壹伐이 이전에 상실한 干支를 보좌하는 직무가 외위의 특징에 맞춰서 새롭게 부활한 것이다. 한편 비주류부 壹伐은 비주류부의 관등이 주류부에 편... The discussion was organized to reveal the characteristics of the Ilbeol belonging to Tak-bu in <Jungseongribi>. The Ilbeol in <Jungseongribi> is consistent with the Oewi Ilbeol. However, as this Ilbeol was awarded to the Six-Bu people of the capital, it cannot be regarded as an Oewi awarded to the local people. Researchers have put considerable effort into revealing the nature of <Jungseongribi> Ilbeol, which is difficult to explain using existing logic. As a result, it was found that the Ilbeol was an early official rank before the Ilbeol-Ganji, and its role was the highest official rank to assist the Ganji. However, it is difficult to accept these studies without any criticism because they are conducted on the assumption of only the Ilbeol of four non-mainstream Bu (Bonpa-Bu, Moryang-Bu, Sapi-Bu, and Hangi-Bu) among the capital’s Six-Bu. Most scholars studying Ilbeol believe that it belongs to the ModanbeolTak and Bonpa-Bu in <Jungseongribi>. In addition, ModanbeolTak is viewed as one of the six Bu, namely, Moryang-Bu. However, considering the various theories on <Jungseongribi>, the method of describing Silla’s monument in the early 6th century, and its relationship with other phrases of <Jungseongribi>, it is difficult to interpret ModanbeolTak as a Moryang-Bu. ModanbeolTak should be interpreted separately as ModanbeolTak and Tak. In this case, Modanbeol refers to the plaintiff who files the lawsuit, and Tak corresponds to Tak-bu, which belongs to the two mainstream Bu (Tak-bu and Satak-bu). In this way, the affiliation of Ilbeol becomes Tak-bu and Bonpa-Bu. This means that the Ilbeol of <Jungseongribi> is used in both the mainstream and non-mainstream Bu. As identified in previous studies, the non-mainstream Bu’s Ilbeol has the characteristics of an official rank that assists the Ganji, meaning head. However, this character cannot be applied to the mainstream Bu’s Ilbeol. Both the mainstream and non-mainstream Bu’s Ilbeol originated from the early official rank. Therefore, the mainstream Bu’s Ilbeol would have assisted the Ganji in the beginning, similar to the non-mainstream Bu’s Ilbeol. However, these characteristics of the mainstream Bu’s Ilbeol had already disappeared during the <Jungseongribi> period. In <Jungseongribi>, the official rank in the form of “Mo-Ganji,” which is located above the mainstream Bu’s Ilbeol, appears. This official rank in the form of “Mo-Ganji” was created when Ganji was incorporated into the official rank system of the mainstream Bu. Originally, the Ganji assisted by the mainstream Bu’s Ilbeol was given the “Mo-Ganji” official rank by the king and organized thereunder. In this process, the mainstream Bu’s Ilbeol lost its existing meaning of assisting the Ganji. As a result, the mainstream Bu’s Ilbeol became a foreign substance that could not be integrated into the internal system of the mainstream Bu’s official rank. The mainstream Bu’s Ilbeol, which had lost its original function, was reorganized into an Oewi Ilbeol through the declaration of Yulryeong in 520, and its meaning was restored. With the declaration of Yulryeong, the Oewi was organized, and accordingly, the mainstream Bu’s Ilbeol was converted to Oewi Ilbeol. The mainstream Bu tried to organize its own structure and organize the lower Oewi by converting the Ilbeol, whose role was unclear to the Oewi. In this process, the Oewi lbeol that changed shape in the mainstream Bu’s Ilbeol, helped the Oewi official rank, Kan, to execute local governance. This role of the Oewi Ilbeol is a new revival of the duty of assisting the Ganji, which has been previously lost in the mainstream Bu’s Ilbeol, according to the characteristics of the Oewi. However, the non-mainstream Bu’s Ilbeol had the characteristics of an early official rank that assisted the Ganji before the official rank of the non-mainstream Bu was incorporated into the mainstream Bu. However, after the 530s, as the mainstream...

      • KCI등재

        포항중성리비를 통해 본 麻立干시기 신라의 분쟁처리 절차와 六部체제의 운영

        노중국(Noh Choong-Kook) 한국고대사학회 2010 韓國古代史硏究 Vol.0 No.59

        본비의 건립연대의 기준은 辛巳年이라는 干支이다. 그리고 1행 6번째 글자는 ‘只’자가 아니라 ‘中’자라는 사실과 2행 11번째 글자는 ‘德’자로 확정하기 어렵다는 사실 및 六部에 壹伐이라는 새로운 관명이 보인다는 사실 등에 근거하면 본 비의 건립 연대는 441년이 된다. 본 비의 내용은 분쟁을 해결하는 절차를 보여준다. 먼저 중앙에서 교를 내리자 몇 사람이 분쟁의 당사자가 누구인지 밝힌 후 중앙에서는 使人을 파견하여 분쟁 지역 출신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빼앗은 자인 豆智沙干支宮 등에게 빼앗은 것을 빼앗긴 자인 牟旦伐喙 作民沙 干支에게 되돌려주라는 판결을 내리고 차후 이 판결에 이의를 달지 못하도록 하였다는 것이 중심 내용이다. 중성리비는 마립간 시기에 신라의 육부체제 운영 모습을 보여준다. 육부체제는 나물마립간대에 성립되었고 눌지마립간대에 오면 왕권의 강화와 더불어 탁부와 사탁부 중심의 운영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아간지, 사간지 등의 관등은 탁부와 사탁부 출신자만이 지닐 수 있었고 나머지 4부의 長은 干支를 칭하였다. 본 비에는 부 간지 휘하에 두어진 일벌이 보이는데 이를 외위 조직과 연계시켜 보면 일벌 이외에도 일척, 피일, 아척 등도 두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관명은 외위가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는 部官으로 부르기로 한다. 부의 내부 분화의 진전은 부의 유력자들의 수를 증가시켰고 이들 상호간의 서열을 정하기 위해 4부에 한해 간지를 분화시켰다. 이 과정에서 간지는 重간지, 三干支등으로 분화ㆍ격상되었으며 봉평비에서 보듯이 오간지까지 분화되었다. 마립간 시기 신라의 영역은 왕의 직할지와 부의 干支가 주관하는 지역으로 크게 구분된다. 왕의 직할지와 부의 간지가 주관하는 촌에는 村干支-壹金知라는 지배조직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를 村干으로 부를 수 있다. 왕은 자신의 직할지에는 도사를 파견하여 지배하였고 여타 지역은 부의 간지가 部官을 통해 그 지역의 일을 처리하였다. 이때 촌간은 도사나 부관이 각 지역을 지배하는데 보좌역할을 하였다. 봉평비단계는 신라의 관등이 경위와 외위로 정비된 것을 보여준다. 경위는 종래의 아간지, 나마, 사지 등을 분화ㆍ격상시키는 방법과 육부의 장 아래에 두어졌던 일벌, 일척, 피일 등에 간지를 붙여 격상시키는 방법으로 정비되었다. 외위 역시 두 방향에서 정비되었다. 하나는 육부 간지 아래에 있던 일벌-일척-피일 등을 지방민이 지니는 관등으로 바꾸어 격하시킨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수장을 지칭하는 간지를 분화ㆍ격상시킨 것이다. 이리하여 경위 17관등과 외위 11관등이 정비된 시기는 521년의 사실을 전하는 『양서』, 신라전에 子賁旱支(이벌찬)와 齊旱支(잡찬)가 보이고 있는 사실과 연계시켜 볼 때 냉수리비가 만들어진 503년에서 521년 사이로 볼 수 있겠다. Pohang Jungseongribi(浦項中城里碑) was erected in Sinsa Year(辛巳年). The age of the erection has been assumed as A.D.501 by many scholars. However, the age of the erection also can be assumed as A.D. 441. The reasons following provide the evidence; the sixth letter of the first line is not ‘只’ but ‘中’. There is no definite proof that the eleventh letter of the second line is ‘德’. A new official title, Ilbeol(壹伐), appeared in Capital’ Six Bu(王京六部). The contents of the Pohang Jungseongribi is about the process of settling disputes. The process is as follows; After clarifying who was directly involved in the affair, the person in charge dispatched from the central government delivered a judgement. The defendant was ordered to return the property which he took away from the plaintiff. The judgement delivered based on the testimony. After retrial, it is prohibited filing protest petitions. It shows that the trial system at the time was the second trial. Silla Capital’ Six Bu(新羅六部), which was established in the Maribgan(麻立干) period, was operated with Takbu(喙部) and Satakbu(沙喙部) as the center. The status of the rest of Bu(部) fell. Therefore, the people from Takbu and Satakbu were given preferential treatment; they were given official ranks such as Aganji(阿干支) and Saganji(沙干支). The people from the rest of Bu(部) only could be given Ganji(干支) or Jungganji(重干支)~Oganj(五干支) which are differentiated and elevated from Ganji. Ilbeol(壹伐) appears in Pohang Jungseongribi which is the official rank below Ganji, the head ofModanbeoltak(牟丹伐喙) and Bonpatak(本波喙). It show that men of influence had management systems directly belonging to them. It consists of Ilcheok(一尺)-Piil(彼日)-Acheok(阿尺) including Ilbeol. The area of Silla in the Maribgan period were classified into two groups - one which is under the direct control of the King, another which is under the control of Ganji from Bu. Each village(村) had management systems called Chonganji(村干支)-Ilgeumji(壹金支). The King dispatched an administrator called Dosa(道使) to the area under the direct control to govern. Chongan(村官) performed a role of assisting Dosa(道使). The rest of the area were in charge of Ganji from Bu.

      • KCI등재

        신라 초기 관등의 형태와 변화

        김재봉 부경역사연구소 2022 지역과 역사 Vol.- No.50

        본 논고는 신라 초기 관등(경위)의 형태와 성격 그리고 초기 관등(경위)이 수장층을 의미하는 干支와 결합하여서 17관등제로 발전하는 과정을 밝히기 위하여 구성되었다. 이 글에서는 「중성리비」에 관한 다양한 학설을 참조하여서 壹伐이 비주류부뿐만 아니라 주류부인 喙部에서도 사용되었던 초기 관등(경위)으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壹伐을 통해서 초기 관등(경위) 형태에 대해서 분석하였다. 최종적으로는 초기 관등(경위)의 형태에 干支가 부재하다는 것에 주목하여서 신라의 17관등제가 초기 관등(경위)과 干支가 결합하여서 탄생하였다고 설명하였다. 「중성리비」에 나타나는 壹伐, 그리고 壹伐과 함께 외위 非干群을 구성하는 一尺, 彼日, 阿尺을 초기 관등(경위)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초기 관등(경위)인 壹伐, 一尺, 彼日, 阿尺에 干支가 각각 결합하여서 一伐干支, 一尺干支, 波珍干支, 阿尺干支가 탄생하였고, 남은 壹伐, 一尺, 彼日, 阿尺 명칭은 외위 一伐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520년 율령 반포 무렵에는 17관등제와 외위 非干群 관등의 정비가 완료된 것으로 보인다.

      • KCI등재

        포항중성리신라비와 外位

        노태돈(盧泰敦) 한국고대사학회 2010 韓國古代史硏究 Vol.0 No.59

        포항 중성리 비는 가장 오래된 신라비이다. 비문의 보존상태는 비교적 좋으나, 비문에서 동사와 접속사가 적고 고유명사가 많으며 비교할 수 있는 더 오래된 다른 비가 없는 관계로, 일부의 비문 해석을 둘러싸고 의견이 분분하다. 이 글에서는 먼저 비문에 대한 해석을 해보았다. 그다음 중성리비에서 보이는 序列을 나타내는 몇 몇 官位와 干支 稱號를 검토하여, 신라 관등제의 성립 과정의 일면을 살펴보았다. 중성리신라비에서 보이는 干支와 壹伐은 경위와 외위 체계에 편입되기 전 단계의 位階라 하겠다. 간지는 어느 정도 자치력을 지닌 단위집단의 수장의 칭호였다. 이는 같은 시기 伽倻 諸國의 각종 ‘旱岐’와 유사한 성격을 지녔다. 간지는 휘하에 자신의 관인을 두었고, 壹伐 등이 그들이다. 이런 간지 휘하의 관인들이 신라 경위의 모체가 되었다. 끝으로 중성리비의 作成 年代를 추정해보았는데, 501년으로 비정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 A new species of the genus Plebs Joseph & Framenau, 2012 (Araneae : Araneidae) from Korea

        Joo-Pil Kim,Seong-Hun Ye,Jung-Joon Lee 한국거미연구소 2014 한국거미 Vol.30 No.1

        일벌왕거미속(Plebs)의 新種을 記載한다. 일벌왕거미속은 왕거미科(Araneidae)에 속하는 거미로써 우리나라에서는 지금까지 2種이 報告되어 왔으나 이 新種의 추가로 다음 3種이 된다. In the present paper, the authors describe one new species of the family Araneidae from Korea, named Plebs yebongsanensis sp. nov. This specimen is deposited at the JooPil Spider Museum, Namyangju-Si, Kyunggi-Do.

      • KCI등재

        신라의 분쟁 처리와 지방지배-중성리비와 냉수리비 비교분석-

        서지영(Seo, Ji-young) 신라사학회 2021 新羅史學報 Vol.- No.53

        「중성리비」와 「냉수리비」를 비교 분석해 본 결과 서술방식의 차이는 있지만, 분쟁을 처리하는 절차와 구성원의 역할은 유사함을 알 수 있었다. 하급의 실무진이 사건을 조사하고, ‘간지’급 이상의 고위 지배층이 판결한 뒤 교를 내렸으며, 도사 등의 실무진이 판결내용을 집행하였다. 다만 下敎를 내린 의결집단과 집행을 담당한 실무 집단의 소속부와 관등의 양상은 차이가 있었다. 「중성리비」는 왕을 비롯하여 탁부, 사탁부인으로 의결이 이루어졌지만, 「냉수리비」는 탁부, 사탁부 이외 본피부와 사피부의 "간지" 계층도 참여하였다. 「냉수리비」의 "간지"들은 신라 왕의 소집 명령을 받아 국정에 참여하고 있었으며, 비록 과거 사로국 단계의 위호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지만, 신라 왕에게 용인 받은 세력으로 관료집단으로 편제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냉수리비」에서 본피부와 사피부인이 의결집단에 참여한 것은, 部의 수장적 지위보다 국왕의 관료로 편제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본피부와 사피부인이 보유한 간지 관등은 기존 部主의 전통적 지위를 명목상 인정해 준 것으로, 일원적 관등체계가 마련되기 전 명예적 성격이 강한 간지를 예우하는 과도기적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집행을 담당한 중앙의 실무진은 두 비 모두 탁부와 사탁부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나마 이하 하급관등자와 도사가 중심이었다. 「냉수리비」는 판결을 집행한 실무진을 ‘典事人’으로 하여 하나의 직군으로 기록하였지만, 「중성리비」는 역할에 따라 분산된 채 기록되어 있었다. 판결을 알리는 방식도 「중성리비」는 典書 여모두가 판결 사실을 기록하고 심도리를 통해 널리 알린, 반면 「냉수리비」는 중앙의 ‘典事人’이 “煞牛拔誥” 한 뒤 ‘故記’하였고, 이것을 다시 촌주가 “世中了事”하고 故記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냉수리비」에서의 사건 처리는 중앙 왕경인 집단의 판결 집행, 지방 촌주의 확인이라는 이중적 절차를 행한 것이며, 중앙에서 지방으로의 ‘敎令’ 전달 체계를 알 수 있다. 두 비의 분쟁은 모두 경제적 이권을 둘러싼 다툼이다. 「중성리비」의 분쟁은 두지사간지와 일부지가 빼앗은 4개 촌을 모단벌탁으로 다시 돌리는 수취와 관련된 문제이고, 「냉수리비」는 절거리 개인의 재산과 관련된 다툼이었다. 이 두 비는 농업생산력 증대와 이에 따른 재화의 유통, 市肆와 東市의 설치 등 당시의 경제적 상황을 잘 보여준다. 또 「냉수리비」는 "별교"의 형태로 상속자를 명시하였고, 패소측에게 이의를 제기하면 중죄를 받을 것임을 서약하도록 하여 법을 강제하였다. 이것은 지역, 촌에서 일어난 분쟁에 신라중앙이 개입하여 판결을 내리고, 이를 준수하도록 강제하여 지방에 미치는 중앙의 통치력을 확인할 수 있다. 6세기 초 신라 중앙은 이러한 방식을 통해 지방에 행정력을 발동하고, 지방지배를 실현해나가고 있었다. Jungseong-ri Silla Stone Monument, Naengsu-ri Silla Stone Monument, Through comparative analysis, the aspects of disputes and their handling process were examined. The two inscriptions were different in the way they were written. The procedure for handling disputes was the same. All the voting groups were high-ranking officials above the kan-ji(干支). The working group consisted of people who held official positions such as nama-gwan-deung(奈麻-官等) or lower-ranking officials. Judgment and execution of disputes were centered on the king, the people of Tak-bu(喙部) and Satak-bu(沙喙部). The operation of the state was decided only by the king, Tak-bu(喙部) and Satak-bu(沙喙部) without going through a six-bu(6部) agreement. In the public opinion group of Naengsu-ri Silla Stone Monument, people such as Gan-ji-gwan-deung(干支-官等) and others from Bonpi-bu(本彼部) and Sapi-bu(斯彼部) participated. This indicates that he belongs to the royal priesthood, not the head of the bu(部). Bonpi-bu, Sapi-bu, and Jamtak-bu of Naengsu-ri Silla Stone Monument, Bongpyeong-ri Silla Stone Monument took part in state affairs by referring the kan-ji. This is an undifferentiated bureaucracy used in the governance structure of small countries in the past. They were discriminated against by the king"s religious group. Modanbeol-tak (牟旦伐喙) and bonpa-tak(本波喙) are the structures of kan-ji-ilbeol(干支-壹伐) for public opinion-group. The Ch"on(村) shows a similar form in the structure of kan-ji-ilgeumji(干支-壹金知). Tak-bu(喙部) and Satak-bu(沙喙部) revealed their superior status through the use of differentiated kanji series including ilganji(壹干支). bu of Modanbeol-tak(牟旦伐喙), bonpa-tak(本波喙) and Ch"on(村) use different government structures, and a social structure that is divided into stages appears.

      • KCI등재후보

        浦項 中城里新羅碑와 新羅의 官等制

        김희만 동국역사문화연구소 2009 동국사학 Vol.47 No.-

        이번에 새로이 발견된 浦項中城里新羅? (Pohang joonsung-ri sillabi)는 迎日 ?水里新羅?(Yeongil naengsu-ri sillabi) ? 蔚珍鳳坪新羅?(Uljin Bongpyeon sillabi)와 더불어 6세기 신라사회를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자료로서 인정된다. 특히 중성리신라비는 영일냉수리비(Yeongil naengsu-ri sillabi)와 더불어 지중왕(Jijeungwang)대의 사회상뿐만 아니라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다. 이에 학계에서는 두 차례의 학술회의를 통해 본 비가 지닌 의의를 해명 하고자 하였다. 본고는 기왕의 연구자들이 제기한 견해를 바탕으로, 먼저 비문(memorial inscription)의 문단구성과 석독(explanatory reading oral formulas)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제시하였다. 다음으로 본 비문에 보이는 관직(Official Position)과 관등(gwandeung : Official Ranks), 인명표기에 관한 문제를 살펴보았다. 특히 干支(Ganji)-壹金知(Ilgeumji)를 11등급의 외위체계(Oewije: Local Government Grade)가 정비되기 이전 단계의 것으로 추정하고, 경위체계(Gyeongwije : Official Rank Held by Residents of the Capital)로서 千支(Ganji)- 壹伐(Ilbeol)의 체계가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또한 본 비에서 그 소속부로서 탁부(Takbu)와 탁(Tak) 등이 함께 기술된 것은 그 소속 인물의 정치적 지위에 따론 때문이 아닐까 추측하고 당시에는 관등의 분화가 진행되고 있었으며 관직과 관등은 아직 세분화되지 않았던 것으로 파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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