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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의 분쟁 처리와 지방지배-중성리비와 냉수리비 비교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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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7981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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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중성리비」와 「냉수리비」를 비교 분석해 본 결과 서술방식의 차이는 있지만, 분쟁을 처리하는 절차와 구성원의 역할은 유사함을 알 수 있었다. 하급의 실무진이 사건을 조사하고, ‘간...

      「중성리비」와 「냉수리비」를 비교 분석해 본 결과 서술방식의 차이는 있지만, 분쟁을 처리하는 절차와 구성원의 역할은 유사함을 알 수 있었다. 하급의 실무진이 사건을 조사하고, ‘간지’급 이상의 고위 지배층이 판결한 뒤 교를 내렸으며, 도사 등의 실무진이 판결내용을 집행하였다. 다만 下敎를 내린 의결집단과 집행을 담당한 실무 집단의 소속부와 관등의 양상은 차이가 있었다. 「중성리비」는 왕을 비롯하여 탁부, 사탁부인으로 의결이 이루어졌지만, 「냉수리비」는 탁부, 사탁부 이외 본피부와 사피부의 "간지" 계층도 참여하였다. 「냉수리비」의 "간지"들은 신라 왕의 소집 명령을 받아 국정에 참여하고 있었으며, 비록 과거 사로국 단계의 위호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지만, 신라 왕에게 용인 받은 세력으로 관료집단으로 편제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냉수리비」에서 본피부와 사피부인이 의결집단에 참여한 것은, 部의 수장적 지위보다 국왕의 관료로 편제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본피부와 사피부인이 보유한 간지 관등은 기존 部主의 전통적 지위를 명목상 인정해 준 것으로, 일원적 관등체계가 마련되기 전 명예적 성격이 강한 간지를 예우하는 과도기적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집행을 담당한 중앙의 실무진은 두 비 모두 탁부와 사탁부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나마 이하 하급관등자와 도사가 중심이었다. 「냉수리비」는 판결을 집행한 실무진을 ‘典事人’으로 하여 하나의 직군으로 기록하였지만, 「중성리비」는 역할에 따라 분산된 채 기록되어 있었다. 판결을 알리는 방식도 「중성리비」는 典書 여모두가 판결 사실을 기록하고 심도리를 통해 널리 알린, 반면 「냉수리비」는 중앙의 ‘典事人’이 “煞牛拔誥” 한 뒤 ‘故記’하였고, 이것을 다시 촌주가 “世中了事”하고 故記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냉수리비」에서의 사건 처리는 중앙 왕경인 집단의 판결 집행, 지방 촌주의 확인이라는 이중적 절차를 행한 것이며, 중앙에서 지방으로의 ‘敎令’ 전달 체계를 알 수 있다.
      두 비의 분쟁은 모두 경제적 이권을 둘러싼 다툼이다. 「중성리비」의 분쟁은 두지사간지와 일부지가 빼앗은 4개 촌을 모단벌탁으로 다시 돌리는 수취와 관련된 문제이고, 「냉수리비」는 절거리 개인의 재산과 관련된 다툼이었다. 이 두 비는 농업생산력 증대와 이에 따른 재화의 유통, 市肆와 東市의 설치 등 당시의 경제적 상황을 잘 보여준다. 또 「냉수리비」는 "별교"의 형태로 상속자를 명시하였고, 패소측에게 이의를 제기하면 중죄를 받을 것임을 서약하도록 하여 법을 강제하였다. 이것은 지역, 촌에서 일어난 분쟁에 신라중앙이 개입하여 판결을 내리고, 이를 준수하도록 강제하여 지방에 미치는 중앙의 통치력을 확인할 수 있다. 6세기 초 신라 중앙은 이러한 방식을 통해 지방에 행정력을 발동하고, 지방지배를 실현해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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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Jungseong-ri Silla Stone Monument, Naengsu-ri Silla Stone Monument, Through comparative analysis, the aspects of disputes and their handling process were examined. The two inscriptions were different in the way they were written. The procedure for han...

      Jungseong-ri Silla Stone Monument, Naengsu-ri Silla Stone Monument, Through comparative analysis, the aspects of disputes and their handling process were examined. The two inscriptions were different in the way they were written. The procedure for handling disputes was the same. All the voting groups were high-ranking officials above the kan-ji(干支). The working group consisted of people who held official positions such as nama-gwan-deung(奈麻-官等) or lower-ranking officials. Judgment and execution of disputes were centered on the king, the people of Tak-bu(喙部) and Satak-bu(沙喙部). The operation of the state was decided only by the king, Tak-bu(喙部) and Satak-bu(沙喙部) without going through a six-bu(6部) agreement.
      In the public opinion group of Naengsu-ri Silla Stone Monument, people such as Gan-ji-gwan-deung(干支-官等) and others from Bonpi-bu(本彼部) and Sapi-bu(斯彼部) participated. This indicates that he belongs to the royal priesthood, not the head of the bu(部). Bonpi-bu, Sapi-bu, and Jamtak-bu of Naengsu-ri Silla Stone Monument, Bongpyeong-ri Silla Stone Monument took part in state affairs by referring the kan-ji. This is an undifferentiated bureaucracy used in the governance structure of small countries in the past. They were discriminated against by the king"s religious group. Modanbeol-tak (牟旦伐喙) and bonpa-tak(本波喙) are the structures of kan-ji-ilbeol(干支-壹伐) for public opinion-group. The Ch"on(村) shows a similar form in the structure of kan-ji-ilgeumji(干支-壹金知). Tak-bu(喙部) and Satak-bu(沙喙部) revealed their superior status through the use of differentiated kanji series including ilganji(壹干支). bu of Modanbeol-tak(牟旦伐喙), bonpa-tak(本波喙) and Ch"on(村) use different government structures, and a social structure that is divided into stages app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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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국문초록
      • Ⅰ. 머리말
      • Ⅱ. 두 비문의 서술 구조와 내용
      • Ⅲ. 두 비문의 분쟁과 중앙의 판결
      • Ⅳ. 관료 집단 형성과 지방지배
      • 국문초록
      • Ⅰ. 머리말
      • Ⅱ. 두 비문의 서술 구조와 내용
      • Ⅲ. 두 비문의 분쟁과 중앙의 판결
      • Ⅳ. 관료 집단 형성과 지방지배
      • Ⅴ. 맺음말
      • 참고문헌
      •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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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문화재청, 2009

      2 이용현, "「중성리비」의 기초적 검토 : 냉수리비・봉평비와의 비교적 시점" 17 : 2011

      3 이영호, "흥해지역과 포항중성리신라비" 한국고대사학회 (56) : 217-252, 2009

      4 주보돈, "한국고대사의 기본사료" 주류성 2018

      5 이문기, "한국고대사 연구의 새동향" 서경문화사 2007

      6 전덕재, "포항중성리신라비의 내용과 신라 6부에 대한 새로운 이해" 한국고대사학회 (56) : 85-129, 2009

      7 강종훈, "포항중성리신라비의 내용과 성격" 한국고대사학회 (56) : 131-169, 2009

      8 하일식, "포항중성리신라비와 신라 관등제" 한국고대사학회 (56) : 171-216, 2009

      9 노태돈, "포항중성리신라비와 外位" 한국고대사학회 (59) : 37-55, 2010

      10 "포항중성리신라비"

      1 문화재청, 2009

      2 이용현, "「중성리비」의 기초적 검토 : 냉수리비・봉평비와의 비교적 시점" 17 : 2011

      3 이영호, "흥해지역과 포항중성리신라비" 한국고대사학회 (56) : 217-252, 2009

      4 주보돈, "한국고대사의 기본사료" 주류성 2018

      5 이문기, "한국고대사 연구의 새동향" 서경문화사 2007

      6 전덕재, "포항중성리신라비의 내용과 신라 6부에 대한 새로운 이해" 한국고대사학회 (56) : 85-129, 2009

      7 강종훈, "포항중성리신라비의 내용과 성격" 한국고대사학회 (56) : 131-169, 2009

      8 하일식, "포항중성리신라비와 신라 관등제" 한국고대사학회 (56) : 171-216, 2009

      9 노태돈, "포항중성리신라비와 外位" 한국고대사학회 (59) : 37-55, 2010

      10 "포항중성리신라비"

      11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포항중성리신라비"

      12 노중국, "포항중성리비를 통해 본 麻立干시기 신라의 분쟁처리 절차와 六部체제의 운영" 한국고대사학회 (59) : 57-94, 2010

      13 "포항냉수리신라비"

      14 고광의, "포항 중성리신라비의 서체와 고신라 문자생활" 2009

      15 선석열, "포항 중성리신라비의 금석학적 위치" 2009

      16 이우태, "포항 중성리신라비의 건립연대와 성격" 2009

      17 김희만, "포항 중성리신라비와 신라의 관등제" 동국역사문화연구소 (47) : 1-26, 2009

      18 金壽泰, "포항 중성리신라비에 보이는 신라의 지방통치" 8 : 2011

      19 이부오, "포항 중성리신라비에 대한 연구의 현황과 시사점" 한국고대사탐구학회 (16) : 7-58, 2014

      20 박성현, "포항 중성리신라비 비문의 형식과 분쟁의 성격" 규장각한국학연구원 (55) : 3-22, 2011

      21 권인한, "포항 중성리 신라비의 어문학적 검토" 2009

      22 김병준, "포항 중성리 신라비 다시 읽기 -중국 고대 행정문서와의 비교를 통해-" 한국고대사학회 (96) : 85-132, 2019

      23 김창석, "포항 中城里新羅碑에 관한 몇 가지 고찰" 한국사연구회 (147) : 379-400, 2009

      24 "울진봉평리신라비"

      25 주보돈, "영일냉수리신라비에 대한 기초적 검토" 6 : 1989

      26 김덕원, "영일냉수리비의 ‘財(物)’에 대한 재검토" 한국국학진흥원 (15) : 331-368, 2009

      27 박향미, "영일냉수리비를 통해 본 5~6세기 신라의 재산상속" 17・18 : 1995

      28 박남수, "신라화백제도와 화랑도" 주류성 2013

      29 이부오, "신라의 非干 外位 편성 과정과 壹金知"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1) : 7-44, 2015

      30 윤진석, "신라 최고의 금석문 포항중성리비와 냉수리비" 주류성 2012

      31 홍승우, "신라 최고의 금석문 포항 중성리비와 냉수리비" 주류성 2012

      32 김수태, "신라 최고의 금석문 포항 중성리비와 냉수리비" 주류성 2012

      33 윤선태, "신라 최고의 금석문 포항 중성리비와 냉수리비" 주류성 2012

      34 한국고대사학회, "신라 최고의 금석문 포항 중성리비와 냉수리비" 주류성 2012

      35 임평섭, "신라 지증왕의 정국 운영과 「포항냉수리신라비」 : 5세기 말~6세기 초 신라의 대내외 정세 변화를 중심으로" 신라문화연구소 58 : 229-254, 2021

      36 朱甫暾, "신라 지방통치체제의 정비과정과 촌락" 신서원 1998

      37 여호규, "신라 중성리비의 서사구조와 6부인의 지배이념" 한국고대사학회 (93) : 107-146, 2019

      38 김창석, "신라 법제의 형성 과정과 율령의 성격-포항 중성리신라비의 검토를 중심으로-" 한국고대사학회 (58) : 171-215, 2010

      39 여호규, "신라 냉수리비와 봉평리비의 단락구성과 서사구조" 역사문화연구소 (69) : 3-44, 2019

      40 윤진석, "신라 至都盧葛文王의 ‘攝政’" 한국고대사학회 (55) : 71-107, 2009

      41 "삼국유사"

      42 "삼국사기"

      43 "단양적성비"

      44 국립경주박물관, "냉수리고분"

      45 曺凡煥, "금석문을 통한 신라사연구" 2005

      46 주보돈, "금석문과 신라사" 지식산업사 2002

      47 여호규, "高句麗 國內 都城의 구성요소와 수공업 생산체계- 기와 생산체계를 중심으로 -" 역사문화연구소 (52) : 39-80, 2014

      48 金永萬, "迎日冷水里新羅碑의 語文學的 考察" 3 : 1990

      49 金昌鎬, "迎日冷水里新羅碑의 建立 年代" 3 :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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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 慶州文化財硏究所, "迎日郡 冷水里・興谷里一帶 地表調査" 1991

      52 李炯佑, "迎日地方의 歷史・地理的 考察" 3 : 1990

      53 李宇泰, "迎日冷水里碑의 再檢討-財의 性格을 中心으로" 9 : 1992

      54 선석열, "迎日冷水里新羅碑에 보이는 官等・官職問題" 3 : 1990

      55 崔光植, "迎日 冷水里 新羅碑의 釋文과 内容分析" 11 :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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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 주보돈, "浦項 中城里新羅碑에 대한 硏究 展望" 한국고대사학회 (59) : 5-36, 2010

      58 김보상, "浦項 中城里新羅碑" 문화재청・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2009

      59 李鍾旭, "李基白先生古稀紀念韓國史學論叢 〔上〕-古代篇・高麗時代篇" 一潮閣 1994

      60 전덕재, "新羅六部體制硏究" 일조각 1996

      61 李文基, "新羅 中古의 六部에 관한 一考察" 1 : 1980

      62 金在弘, "新羅 中古期의 村制와 지방사회 구조" 72 : 1991

      63 이문기, "中城里新羅碑의 발견과 그 의의-「冷水里碑」의 재음미를 겸하여-" 한국고대사학회 (56) : 5-57, 2009

      64 윤진석, "「포항냉수리신라비」의 ‘七王等’ 재론 -部體制 이행의 근거라는 주장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한국고대사탐구학회 (31) : 381-396, 2019

      65 홍승우, "「浦項中城里新羅碑」를 통해 본 新羅의 部와 지방지배" 규장각한국학연구원 (66) : 207-241, 2014

      66 박남수, "「浦項 中城里新羅碑」의 新釋과 지증왕대 정치 개혁" 한국고대사학회 (60) : 117-158, 2010

      67 박남수, "「浦項 中城里新羅碑」에 나타난 新羅 六部와 官等制" 한국사학회 (100) : 447-492, 2010

      68 이수훈, "<浦項中城里新羅碑>의 宮과 本波" 한국민족문화연구소 (62) : 305-332, 2017

      69 주보돈, "6세기초 신라왕권의 위상과 관등제의 성립" 13・14 :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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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5 0.5 0.46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51 0.58 0.981 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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