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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후보

        아베 고보의 ‘만주표상’-귀환자의 노스탤지어-

        박이진 만주학회 2012 만주연구 Vol.- No.14

        본 논문은 일본작가 아베 고보의 ‘만주표상’이 형성된 과정을 추적한 것으로, 이전까지 선행론에서 지적되어 오던 ‘패전을 통한 고향상실감’이라는 논리구도를 좀 더 확장시켜 아베 고보의 전후일본에서의 인식 변화에 착안하여 고향상실자의 시점이 형성된 구도를 고찰하였다. 아베 고보는 전후일본을 대표하는 문학자로 일본의 카프카라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기도 하다. 1948년부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하는 그는, 자신이 유소년기에 보냈던 만주를 무대로 한 소설을 데뷔작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패전으로 만주에서 일본으로 강제 귀송 조치에 따라야 했던 아베 고보는 실제 자신의 출신 때문에 아이덴티티의 균열을 겪게 된다. 전후일본 사회에서 만주일본인이라는 출신이 갖는 이질감을 자각했던 아베는 만주에서는 지배민족 일본인이었던 자신의 과거 사이에서 극심한 저항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과거 자신의 고향에서 침략자이자 식민자였던 만주일본인이 갖는 위화감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인식하게 되는 아베는, 같은 일본인 사이에 벌어지는 복수극을 그린 『굶주린 피부』라는 작품을 통해 그러한 내적 갈등(혼란)을 표출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계획한 복수가 성공한 듯해도 스스로를 향한 자괴감은 일본인이라는 출신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는 현실을 다시금 상기시키게 된다. 결국 아베 고보는 식민지주의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감을 폭력성을 통해 묘사, 풍자하게 되고, 식민지의 풍경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 존재인 피식민자의 입장을 사자(死者)로 그려내게 된다. 『변형의 기록』이 그것으로, 이 작품은 과거 만주와 전후일본의 피식민자의 입장을 이중적으로 투영한 것이기도 하다. 아베 고보는 전후일본의 미군점령의 현실을 식민지주의라는 지배 이데올로기로 직시한 것으로 이와 동시에 만주에서의 일본인이 갖고 있던 존재감을 보다 선명하게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만주를 고향이라고 여길 수 없는, 고향상실자로서의 위치감각을 인지하게 된다. 『탐정과 나』에서 묘사되듯이 건조한 날씨와 회오리치는 모래 바람처럼 황량하고 메마른 만주의 표상은 실제 만주의 풍토를 이루는 요소이기도 하지만, 침략자 일본인이라는 사실관계 때문에 오는 죄책감에 그리움이 넘치는 정겨운 기억으로 고향 만주를 표현할 수 없었기에 형성된 결과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아베 고보의 인식 변화에 따른 노스탤지어의 형성과정으로, 황량하고 살풍경한 만주의 이미지는 아베 자신의 표상할 수 없는 고향에 대한 내면 풍경을 함유하고 있다.

      • KCI등재후보

        만주 시절의 백석과 현대성 비판

        김재용 만주학회 2012 만주연구 Vol.- No.14

        Baik-Suk, one of the most important poet under the Japanese Empire moved to Manchukuo at 1939 to escape from the censorship and oppression of Japanese Empire which emphasizes the ‘One Body of Korea and Japan’. He criticized the policy of assimilation from Japanese colonial authority. At that time Manchukuo propaganda of ethnic harmony confirmed that Korean people is not Japanese but citizen of Manchukuo state. So many writers including poet Baik-Suk believed that the atmosphere of Manchukuo is better than Korean peninsula which is ruled directly by Japanese colonial authority. But after visiting Manchukuo, he comes to know that she is same with Korean peninsula even though the propaganda of Manchukuo. He recognized that Manchukuo is another variant of Japnese Empire. After knowing the oppression of Manchukuo, he resigned the official position of economic department of Manchukuo State and moved to countryside near the capital of Manchukuo. He also thought that the place of Manchuria is the space of authenticity against the global capitalism and imperialism. The Solon ethnic group who lived in the Manchuria is the most pure mankind. He wanted to know and see them who have keep the original state of living. He also translated the Russian novelist who lived Manchuria and wrote about the primitive and pure life of humankind. But after knowing the predicament of that ethnic group between global industrialization and primitive life, he tried to get another vision. 제국주의적 현대가 전지구를 지배하는 현실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백석은 ‘북방’으로서의 만주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북방으로서의 만주는 현대제국주의는 물론이고 농경정착이 정주하기 이전의 소박한 인간의 삶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일본 제국의 ‘내선일체’의 억압이 강화되자 이를 피하는 것과 아울러 북방으로서의 만주에서 생활하기 위하여 만주행을 선택한다. 하지만 ‘만주국’이 지배하던 만주를 만나면서 가장 먼저 깨닫는 것은 ‘오족협화’의 만주국이 일본 제국의 연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실망한 백석은 ‘만주국’의 국무원의 자리를 그만두고 만주의 벌판을 향해 갔다. 하지만 만주 벌판과 밀림 역시 과거의 소박한 삶이 영위되기 어려운 위기에 처한 것을 알고는 곤혹스러움에 빠지게 된다. 밀림 역시 제국주의 현대성이 서서히 장악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현대성에 대한 그의 지속적인 비판적 성찰은 만주의 밀림에서도 끝나지 않는다. 일본의 제국주의와 제국주의적 현대성에 대한 백석의 날카로운 비판은 만주 시절 백석의 삶과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만 보는 것이라든가, 제국주의 현대성에 대한 비판만 읽어내는 것은 만주 시절 백석의 문학에 대한 전면적인 고찰이라고 하기 어렵다. 이 둘에 대한 동시적 비판을 함께 읽어낼 때 비로소 해방전 백석의 문학과 해방후 백석의 문학을 연속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 KCI등재

        ‘방법론적 지역주의’와 만주연구의 과제 —‘만주국’ 이민 연구의 동향을 중심으로—

        이동진 만주학회 2019 만주연구 Vol.- No.28

        In recent years, there has been a surge in research on Koreans immigrating into Manchukuo. This article explores the phenomenon and investigates the current state and limitations of research on Koreans immigrating into Manchuria. It finds that the Korean government’s research support system contributes to the sudden rise in interest. Another is the growing impact of Korean immigrant literature in Manchuria and its growing interest among Korean literary circles within Korea. Currently, Korean young literature scholars play leading roles in this research. Such research has led to a treasure trove of discovery, providing new insight and understanding of colonial history and creating a new chapter for "last-minute" literature on the colonial period. This article takes the imbalance of literary study of “representation” as opposed to an engaged inquiry in the history of actuality. It explores the potential points of conflict and the problems that this dichotomy’s imbalance could cause. Lastly, this article examines the risks associated with the government support system for research on Korean immigration into Manchuria as a possible form of “methodological nationalism” that should be replaced with the “methodological regionalism” that the Manchurian Studies Association has explored. 한국에서 ‘만주국’ 이민 연구는 가히 붐을 이루고 있다. 이 글은 만주국 이민 연구가 붐을 이루게 되는 배경에 대해서 살펴보고, 만주국 연구 붐의 현황과 그 한계에 대해서 살펴본다. 만주국 연구가 붐을 이루게 되는 하나의 배경에는 정부의 연구 지원 체제가 있다. 또 하나의 배경에는 한국 문학에서 만주 이민 문학의 발견이 있다. 현재 한국의 만주국 이민 연구를 주도하는 것은 한국 문학 전공자들이다. 이것은 한국 문학에서 만주국 이민 문학을 발견함으로써 식민지 시기 ‘최후기’ 문학 연구의 새로운 장이 열린 것과 관련이 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문학 연구라는 ‘표상’의 연구와 역사 연구라는 ‘실재’의 연구가 불균형을 이루고 있는 현상과 그것의 문제점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정부의 만주 이민 연구에 대한 지원 체제가 ‘방법론적 국가주의’의 입장에 서 있을 수 있는 위험과 그것에 대해서 ‘만주학회’에 의해서 탐구되어 온 ‘방법론적 지역주의’의 의의에 대해서 연구사 정리를 통해서 살펴보고자 했다.

      • KCI등재

        전시체제 하 만주국의 국병법 선전

        전경선 만주학회 2017 만주연구 Vol.- No.23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understand the context of the National Army Law(國兵法) in wartime Manchukuo(滿洲國) through propaganda policy. With imminent outbreak of the Pacific War, an active mass mobilization movement began and established the wartime system in Manchukuo. From April 1939, the projects were discussed in name of People’s Compensation Act (人民總服役制度). As a result, the system of military service in Manchukuo was fundamentally changed from the volunteer system to the conscription system. However, the reality of Manchukuo, which was as “a state without a member of the nation” differed fundamentally from government intentions of pursuing a conscription system, leading to a massive propaganda campaign. It was “Outline of National Instruction(國民指導要綱)” that the State published. This “outline” aimed at awakening nationality, which the general public needed as a means of promoting a Manchukuo identity. This was a basic precondition for the implementation of this system, whose establishment was difficult to solve. In contrary of the National Army Law, the Administration strengthened the post-national movement, which was aimed at not only the young, but the families of them. In the process, mass media such as movies and newspapers played important roles in popular propaganda. However, despite of the all-round propaganda campaign, overcoming the reality of Manchukuo, “a state without nation” was futile. In conclusion, the campaign failed, but not without historical significance. I argue that the National Army Law had a two-prong objective. The National Army Law of Manchukuo first aimed to mobilize, and second, to make nationalism or citizenship appealing to both youth and the general public. The significance of the implementation of the National Army Law is revealed in its propaganda work. 본 논문은 ‘국민 없는 국가’ 만주국의 징병제를 규정한 국병법의 내용과 특징을 파악하고 그것이 가지는 의미를 국병법 선전공작에 주목하여 도출하고자 한 시도이다. 태평양전쟁이 임박해질 무렵, 만주국에서도 대중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동원하여 전시체제를 확립하려는 움직임이 빠르게 전개되었다. 1939년 4월부터 인민총복역법에 관한 논의가 시작되고 그 결과 만주국 병역제도는 기존 지원제 방식의 모병제에서 의무병제인 징병제로 근본적인 개혁이 단행되었다. 국민 의무부담의 불균등, 질적으로 저하된 사병 등의 폐해를 안고 강제적 구속력이 없이 운영되던 기존 모병제로는 긴박감을 더해가는 시국의 요구에 부응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국민 없는 국가’였던 만주국의 현실은 징병제 시행을 관철시키려는 정부의 의도와는 상당히 괴리되어 있었고 이에 따라 본 제도에 대한 선전공작은 막중한 임무를 띨 수밖에 없었다. 선전공작은 인민총복역법에 관한 논의와 동시에 시작되었다. 이 시기 선전공작의 주요 방침은 인민 일반이 만주국의 국민이라는 자각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야말로 본 제도 시행의 기본적인 선결조건이었으나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이기도 하였다. 1940년 4월 11일 상유와 더불어 제국 인민 남자의 병역의무를 규정한 국병법 및 시행령 전문이 공포되었다. 전문 6장 48조로 구성된 만주국 국병법에서는 ‘精兵主義’를 채택하였고 ‘精兵의 양성’과 ‘良民의 연성’을 목표로 하였다. 이와 아울러 「국민지도요강」에 따른 국병법 선전이 전개되었다. 우선 징병의 당사자인 청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군 입대 전 예비교육 혹은 훈련을 적극 실시하였다. 기존 청년훈련을 담당했던 청년훈련소가 증설되고 학교 교련 역시 강화되었다. 한편 국병법은 징병 당사자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청년들의 가족은 물론 전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후방국민운동을 강화해 나갔으며 그 중심에는 협화회를 비롯한 국방부인회, 만주적십자사 등의 관변단체가 있었다. 국병법이 공포, 시행되는 1940년 4월에 이르면 만주국 정부의 국병법 선전은 한층 더 가열되었고 이후 첫 번째 장정 입영이 있기까지 1년여의 준비기간 동안에도 국병법을 위한 대민선전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 기간 영화, 신문 모두 국병법 선전에서 간과할 수 없는 활약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전방위적인 대민선전공작에도 불구하고 ‘국민 없는 국가’라는 만주국의 현실의 벽을 쉽게 넘어설 수는 없었다. 애초에 만주국의 국병법은 단순한 병력 동원만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청년은 물론 전체 대중들에게 국방의식, 국가의식을 내면화시키기 위한 대중총동원운동으로서의 의미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국병법 시행의 의의는 그 선전공작에서 그대로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 KCI등재

        ‘만주국’ 조선계 문단에서의 향토 담론과 안수길의 『북향보』

        이해영 만주학회 2017 만주연구 Vol.- No.23

        This paper is a study on hometown discourse and the Korean literary world’s writing style influence on ‘Manchukuo’ and An Soo-gil's novel Buk Hyang Bo. As part of the hometown discourse of Imperial Japan, the hometown discourse of the Korean literary world started with “The Manchurian Korean Literature Construction” published in Man Sun Daily in the early 1940 and the “Japan․Korea․Manchukuo’s Cultural Forum” held by Man Sun Daily one month later. Basically, the discourse emphasized the uniqueness of Korean literature, but its essence was the preservation of Korean literature in Manchukuo which was realized with the preserving of Korean literature written in Korean. Yeom Sang-seop was the representative writer who actively pursued a theoretical search for the practice of the Korean literature in Manchukuo, and in essence preserved Korean literature. By his unique political sensitivity, he pointed out that “this guideline should penetrate to the pioneer group and should be used to foster the new-born literary activities of the pioneer group” mentioned in “Art and Literature Guidelines” was the basis of preservation and development of Korean literature in Manchukuo. He also pointed out that ‘Manchukuo’ national literature based on the pioneer literature could also be guaranteed in this way. An Soo-gil actively practiced Yeom Sang-seop’s literary theory and thought that Buk Hyang Bo was the first novel-cum-anthology of his works in Manchukuo period. An Soo-gil confirmed Korean peasants’ qualification as citizens of Manchukuo according to their contributions to the development of Manchukuo in Buk Hyang Bo, and especially emphasized the contribution of rice cultivation or the “reclamation of the paddy field”. Following Yeom Sang-seop’s thought, An Soo-gil also thought that this was a way for Korean peasants to become citizens of Manchukuo, meanwhile, the pioneer literature of Korean people and the peasant literature were the form of pioneers’ mind and the source of their mental power. For this reason, the literary thought shown in the preface of the Yeom Sang-seop in the first collection of Korean literature in Manchukuo, Burgeoning Earth and the literary thought was presented in the preface of the anthology of An Soo-gil’s works. Bukwon was a kind of spiritual pillar and food for An Soo-gil, with which he wrote Buk Hyang Bo. 이 글은 ‘만주국’ 조선계 문단의 향토담론과 그 맥락 속에서 안수길의 장편소설 <북향보>를 살펴보았다. 제국 일본의 향토담론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만주국’ 조선계 문단의 향토 담론은 1940년 초의 “만주조선문학건설신제의”를 제목으로 한 <만선일보> 지상토론과 이어 약 한달 뒤 <만선일보>사 주최로 이루어진 “내․선․만 문화좌담회”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기본적으로 ‘만주국’ 조선계 문학의 독자성을 강조하였으나 그 본질은 만주에서 조선문학의 보존, 즉 조선어로 창작되는 조선문학의 보존에 있었다. 조선문학의 보존을 핵심으로 하는 ‘만주국’ 조선계 문학의 실천을 위한 이론적 모색에 적극 나선 대표적 작가는 염상섭이다. 염상섭은 그 특유의 날카로운 정치적 감각으로 일제가 1941년 ‘만주국’에서 반포한 “예문지도요강” 중의 “예문을 개척단까지 침투시키고 싹트기 시작한 개척단의 신생문예활동을 육성해야 한다”는 조항에서 만주에서 조선문학이 보존되고 발전될 수 있는 구체적인 근거를 확보하였으며 그 방안으로 개척문학에 근거한 ‘만주국’ 국민문학으로서의 자격확보를 제시하였다. 안수길은 만주시기 작품의 총 결산이자 그의 최초의 장편소설이기도 한 <북향보>에서 염상섭의 이러한 문학이론과 사상을 적극 실천하였다. 안수길은 <북향보>에서 만주 개척의 공로를 통한 조선농민의 ‘만주국’ 국민으로서의 자격을 확인함과 동시에 벼농사, 즉 수전개간의 공로를 특별히 강조하였다. 이는 조선농민이 ‘만주국’의 국민이 되기 위한 길은 수전개간으로써 만주의 농업건설에 기여하는 것이며 조선인 개척문학 내지 농민문학은 그러한 개척민의 마음의 양식인 동시에 정신적 원동력의 공급원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 염상섭의 문학사상과 동궤에 놓이는 것이다. 결국 염상섭이 재만 조선인 첫 작품집 <싹트는 대지>의 서문과 특히 안수길의 개인 창작집 <북원>의 서문에서 보여준 문학사상은 안수길에게 일종의 정신적 기둥이자 식량이 되었을 것이고 안수길은 그것을 『북향보』의 창작지침으로 삼았을 것이다.

      • 두 개의 「합숙소의 밤」과 ‘만주’

        유수정 만주학회 2009 만주연구 Vol.- No.9

        「합숙소의 밤」은 조선의 대표적 프롤레타리아 문학자이자 이론가인 한설야의 초기작품으로 만주일일신문 (1927.1.26~27)에 일본어로 발표된 텍스트와 조선지광 (1928.1)에 한국어로 발표된 텍스트가 있다. 문학습작기에 자연주의문학을 모방하여 창작된 일본어판 「합숙소의 밤」은 엿보기를하는 남자 주인과의 거친 성욕을 그린 자연주의계열 소실이다. 그에 반해그 1년 후에 같은 제목으로 투쟁의식을 전면에 내세우고 발표한 한국어판「합숙소의 밤」은 ‘만주’ B시 탄광의 조선인 광부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을고발적으로 그리고 있는 프롤레타리아문학이다. 본고에서는 이 두 텍스트가발표된 시기의 정세적, 문단적 상황을 배경으로 같은 「합숙소의 밤」이라는 제목을 붙여, 푸순탄광이라는 같은 장소를 이야기의 공간적 배경으로 하는 두 텍스트가, 그 내용도 표현언어도 완전 다르다는 것을 문제시하였다. 나아가 텍스트에 산재돼 있는 실제의 사건들을 추적하여 작가의 정치적 의도를 보다 명확하게 파악하고, ‘만주국’ 이전, 조선의 프롤레타리아문학자에게있어서 ‘만주’라는 공간이 갖았던 의미를 밝혔다. 공간적인 배경은 같은 ‘만주’ 의 탄광촌으로 하면서도 일본어판에서는 그곳이 ‘만주’라 단정할 수 없을 정도로 ‘만주’라는 토포스가 갖는 의미는 희박했다. 그에 반해 한국어판에서 ‘만주’ 의 ‘탄광왕국 B시’는 조선인 탄광노동자가 파두제라는 이중착취의 고용제도하의 일본인 감독 밑에서 일하는 억압/피억압의 공간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또한 ‘만주’는 5.30사건에서 시작되어 중국 전토에 퍼진 반자본주의・반제국주의운동이 일어난 현장이었고, 그 속에서 조선인(‘나’)가 지도적 위치를 점해서 활동하는 장이었다. 그리고 펑위샹과 장쭤린이 각각 일본과 소련의 힘을등에 업고 대결하는 전장이었고, ‘불령선인’의 무장독립항쟁과 일본제국군의‘토벌’이 펼쳐지는 장이었다. 한설야는 이러한 ‘만주’에서의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민족과 국가의 경계선을 넘어서는 반자본주의・반제국주의의 연대를한국어판 「합숙소의 밤」 속에 반복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1927년에 발표된 일본어판에서 ‘만주’는 소박한 문학적 모티프에 지나지않았지만, 1928년에 발표된 한국어판에서 ‘만주’는, 민족・계급투쟁의 장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만주’는 다양한 힘이 모여 길항・영합하면서교차하고, 다양한 전쟁과 전투가 전개되는 ‘초국가적 공간’이기 때문에야말로 조선에서는 표현・실현할 수 없는 탈국가・탈민족적인 연대, 인터내셔널한 프롤레타리아트(또는 피억압민족의 민중)의 단결과 혁명을 외칠 수 있는 공간으로 존재한다. 이렇게 다양한 힘이 중층적으로 교차하는 ‘만주’라는 토포스는 한설야에게 ‘만주’를 적극적으로 그리게하는 요인이 되었음과동시에, 조선을 배경으로는 그릴 수 없는, 정치적으로 제약된 한계를 돌파하는 수단으로 기능했던 것이다.

      • 기억과 해석의 의미: '만주국'과 조선족

        최봉룡 만주학회 2005 만주연구 Vol.- No.2

        본 논문에서 필자는 근대 한민족의 디아스포라(離散) 형태로 나타난 재만 조선인(조선족)의 이주와 만주 관계에서 역사적 맥락을 더듬어 그들의 고토관념을 살펴보았다. 비록 재만 조선인들의 초기 이주는 경제적 원인에서 기인되었지만 그들의 민족적인 심성 속에서 만주에 대한 애착은 타민족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달리 깊었음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일제식민지 시대에 정립되기 시작한 민족사학의 선구자들의 '만주 담론'은 일반적으로 '민족고토론'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재만 조선인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일제는 '以韓制夷'의 목적에서 또한 회유정책의 일환으로 재만 조선인들에게 '고토의식'을 주입시켰던 점을 지적했다. 만주에 대한 역사와 기억에서 '만주국'은 동아시아 여러 민족들에게 특수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만주국의 건립과 그 '신국가'의 체제 속에서 활동한 재만 조선인들의 사회적 법적인 위치-'제2의 국민'-를 밝힘으로써 일제가 새로운 형태의 식민지국가-'만주국'에 대한 지배에서 재만 조선인을 통제·이용하는 이중적인 정책을 고찰했다. 특히 만주국에 대한 재만 조선인들의 기억은 분노와 반항-'抗日像'뿐만 아니라, 유혹과 향수-'親日像'으로 그려지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만주국은 재만 조선인들에게 두개 같지 않은 거울에 비추어지는 대상으로 인식되었는데, 즉 '抗日像'은 만주국을 '타도'와 '반동'의 대상으로 간주하였다면, '親日像'은 만주국을 '충성'과 '효성'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만주국은 14년 단명으로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무너졌지만 그 역사는 동아시아 여러 민족들에게 서로 다른 의미로서 기억되고 있다. 물론 오늘날 중국 내에 거주하는 공민권을 취득하고 한개 소수민족으로 정착하고 있는 조선족의 역사를 서술함에 있어서, 특히 만주국시기 항일투쟁사-'抗日像'의 조각에만 부심하고 있을 뿐, '親日像'은 소외시키고 있다. 그 원인은 그런 기억들은 민족 단결에 불리하다는 정치적 판단이 앞서고 있는 이유 이외도 그들-'친일파'가 이미 '역사적 청산'을 받았다는 이유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만주국은 조선인들에게 있어서 반항과 분노의 대상-'抗日像'으로 씌어진 역사로 기억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유혹과 향수의 젖은 추억-'親日像'으로 얼룩진 오욕의 역사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두개의 서로 다른 모습은 결코 오늘날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들의 역사로만 볼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만주국과 조선인의 정체성을 조명하는데 일조가 되리라고 믿는다.

      • KCI등재

        조선인의 만주국군 입대 배경과 동기 —1938년 간도특설대 창설 시기를 중심으로

        고한빈 만주학회 2022 만주연구 Vol.- No.33

        This study analyzed the social backgrounds and motives of Koreans who had volunteered to join the Manchukuo Imperial Army during colonization. Initially used as an auxiliary security force of the Japanese Kwantung Army, the Manchukuo Imperial Army was later involved in several border conflicts against the Soviet Union after 1937. In preparation for a possible war with the Soviet Union, the Manchukuo Imperial Army enlisted the help of foreign troops, including Koreans. Living primarily in the Jiandao region, the Koreans had already endured two decades of colonial rule and were thus seen as a valued and amenable source for troops. Koreans began volunteering for the Manchukuo Imperial Army in 1938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Kanto T'ŭksŏltae (Jiandao Special Forces). Their motivations were multivarious. Some likely responded to pro-Japanese presses that encouraged Koreans living in Manchukuo to join the Army, such as Mansŏn Ilbo (Manchuria-Joseon Daily). These papers often cited the Josŏn Yukkun Tŭkpyŏl Jiwŏnbyŏngryŏng (Korean Army Special Volunteers Act) of 1938 or enticed their audiences with chances of earning civil rights as “Koukoku Shinmin (imperial subjects of Japan).” For other volunteers, national pride in Manchukuo also weighed heavily on their decision. Their memoirs are saturated with expressions that evince a national spirit. Their volunteerism exceeds mere opportunism or notions of collaborative dispositions. It reflects a deep sense of national pride. 이 논문에서는 만주국군에 복무한 조선인들의 사회적 배경과 입대 동기를 분석한다. 만주국군 출신 조선인들의 역사적 의미, 특히 광복 직후 한국군의 창설과정과 1960년대 이후 개발독재에 미친 영향은 이미 선행연구를 통해 충분히 규명되었지만, ‘이들이 왜 만주국군에 입대하였는가?’라는근본적인 질문에는 답하지 못하였다. 이에 이 논문에서는 조선인 자원입대의 결정적인 계기인 1938년 간도특설대의 창설 시기를 중심으로, 당시관변언론의 보도와 만주국군에 참가한 조선인들의 회고를 검토한다. 만주국군은 1932년 만주국의 수립과 함께 창설되었다. 창설 당시의 만주국군은 일본 관동군의 보조부대로서 국내 치안유지 임무를 주로 담당하였으나, 1937년 이후 소련과 일본 간 국경분쟁이 잦아지자 점차 관동군의대외작전까지 보조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만주국군 내에서는대소전 발발 시 소련 영내로 침투할 외국인 부대들을 다수 조직하였고, 그과정에서 만주국군 복무의 의무가 없던 만주국 내 외국인들의 입대가 허용 혹은 장려되었다. 특히 간도 일대에 집중적으로 거주하던 조선인들은국적법 상 일본인으로 취급되면서도 식민통치의 강력한 규율 아래에 놓인자들로서 군사 동원의 가치가 높은 집단이었다. 1938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본격적인 모병과 입대 현상을 중심으로, 만주국군에 입대를 결정한 조선인들의 동기는 크게 ①관(官)의 모병선전, ②민족적 명분, ③생계와 출세 등 개인적 동기의 셋으로 구분할 수 있다. 식민당국의 의도를 직접 반영하던 만선일보 등은 비슷한 시기 조선 내에서 시행된 조선육군특별지원병령 의 시행 논리를 답습하며, 차별을 받는 조선인들이 ‘황국신민’으로의 신분 상승을 위해 군국주의의 산실인 군대에 자발적으로 투신하도록 조장하였다. 한편 간도특설대에 자원입대한조선인들은 같은 민족의 거주지역인 간도의 치안을 지키는 한편 민족의우월성을 대표한다는 자긍심을 가졌다. 만주국군에 자원한 조선인들은 자신들의 복무 동기를 재만 조선인 사회가 낳은 민족정신의 발로(發露)로 치환하는 경향을 보이며, 이러한 서사는 친일부역행위의 대한 상투적인 변명이자 실제로 당시 지원자들이 경험하였을 ‘협력적 민족주의’의 심상이반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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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 전반 일본인 연구자들의 ‘만주사’ 만들기

        정상우 만주학회 2020 만주연구 Vol.- No.30

        This paper examines the common ground Japanese historians shared about the Manchurian history and how it has changed over time, using diachronic histories of the Manchurian past they employed during the first half of the 20th century. Japanese historians thought Manchuria had historically been an area where several forces, including Manchurian, Mongolian and Chinese forces, struggled for power. This systematization of Manchurian history explained the ongoing competition for rights among imperialist powers, including Japan, in Manchuria in the early 20th century as a historical phenomenon consistent with Manchurian history’s development process. However, in the 1930s, Japanese historians’ systemic treatment of Manchukuo failed to recognize the country as a state in the international community. They emphasized Manchukuo’s birth as a natural, historical consequence of development. Manchurian history gradually organized in the form of nation-history, even at a crude level. As such, the Japanese historicity of Manchukuo in the first half of the 20th century changed from local history to a national one. Just as Manchukuo was an experimental site for constructing a modern state, studies and descriptions of Manchurian history were also experiments in ‘history making’, whose effect produced an interest in Manchuria and led to the founding of Manchukuo. 침략성과 근대 역사학으로서의 속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식민주의 역사학의 양면성을 생각해 볼 때 만주는 흥미로운 지역이다. 러일전쟁의 이후 일본은 만주를 발판삼아 중국에 대한 이권을 확장해 나가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만주의 역사와 지리에 대해 본격적인 연구를 개시했다. 뿐만 아니라 중국에 속해 있으면서도 제국주의 국가들의 각축장이 되어버린 만주는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부정하고 새로운 역사 공간으로서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동양’을 구성하는 데에 중요한 실마리가 될 수 있는 지역이기도 했다. 이 논문은 이러한 의미가 있는 20세기 전반기 일본인 연구자들이 서술한 만주사에 대한 통사들을 통해 당시 그들이 만주사에 대해 공유하였던 공통적인 지반은 무엇이었으며, 시간의 경과에 따라 어떠한 변화를 보였는지를 고찰한 것이다. 20세기 초반 만주사 연구를 이끌었던 시라토리의 조망에서 보여지듯이, 만주의 역사를 정리하는 방식은 만주라는 지역을 중심으로 지역사 차원에서 체계화할 수도, ‘만주민족’과 같은 범주를 설정하여 민족사와 비슷한 형태로 할 수도 있었다. 만주사의 체계화와 관련하여 만주사를 다룬 최초의 통사라 할 수 있는 이나바의 『滿洲發達史』(1915)는 만주사를 지역사로서 정리했다. 즉 만주를 몽고, 중국, 만주 방면의 세력들의 각축장으로 보고, 이들이 만주라는 공간에서 벌인 경쟁 과정을 서술한 것이다. 제 1차 세계 대전 이후 만주에 대해 중국의 우선권을 인정하였던 당시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 일본인 역사가들의 만주사 연구와 조망도 중국의 존재를 더욱 의식하는 가운데 이루어졌지만, 이러한 시각은 여전히 만주를 몽고, 만주, 중국 방면의 세력들의 경합 지역으로 바라보면서 그 역사를 조망한 것이었다. 이렇게 만주의 과거를 몇 세력의 경쟁지역으로서 정리하는 것은 19세기 후반 이래 만주에서 벌어진 제국주의 국가들의 경쟁을 만주사 전개의 당연한 귀결로서 역사화하며, 20세기 이래 만주를 둘러싼 일본의 행보를 만주사의 전개에 부합하는 역사적인 현상으로 설명하여, 만주사의 무대 위로 일본을 소환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만주국의 건국은 일본인 연구자들에게 만주국 탄생의 역사적 필연성을 드러낼 수 있는 새로운 만주사의 정립을 요구하였다. 만주사를 여러 세력들이 경쟁하는 지역의 역사로서 정리하는 것은 만주를 분쟁지역으로 역사화할 수 있는 것으로, 만주국 건국 이후에는 적절치 않은 것이었다. 만주국 건국 이후 만주사에 대한 통사들이 대거 등장하는 것은 만주사 정리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상당했고, 당시의 많은 연구자들이 이에 화답했음을 보여준다. 물론 당시 급하게 쏟아져 나온 통사들은 당대에도 그 수준을 의심받았지만, 만주의 과거를 만주 또는 만몽의 민족을 중심으로 정리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들 통사들은 만주와 몽고의 민족들의 상무정신, 고유한 활력을 이야기하며 만주에 처음 등장한 민족으로서 肅愼을 부각하며 만주사의 기원을 더 먼 과거로 소급하는 한편 만주와 몽고의 민족들의 고유한 문화를 서술하였다. 이는 비록 중국문명에 비했을 때 저열한 것으로, 또 중국 문명과의 접촉 이후 밀려나는 것으로 서술되었지만 만주・몽고 민족 고유의 생활 풍습・풍속, 제천의식・종교, 고유의 조직 체제는 물론 漢文과 대비되는 고유 문자의 존재는 만주와 몽고 민족의 민족적 독자성에 대한 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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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정책학의 신지평과 만주문제 인식 - 야나이하라 다다오(矢內原忠雄)를 중심으로 -

        박양신 만주학회 2016 만주연구 Vol.- No.21

        This article reviews the recognition of a series of situations that unfolded around Manchuria after the Manchurian Incident of 1931, and is based on the arguments of Tadao Yanaihara, a colonial policy scholar. Yanaihara started to study Manchurian problems primarily motivated by the Manchurian Incident. He viewed the Manchurian Incident as the result of the collision between Japanese imperialism and Chinese nationalism, leading to the production of Manchukuo. He argued that Manchukuo was a state having colonial interests for Japan, and at most only a “quasi-protectorate” rather than the independent state that the Japanese government claimed. As for immigration policy to Manchuria, Yanaihara took the position that Manchuria is not suitable for the settlement of the Japanese. His position contrasted other colonial policy scholars of the time including Miono Yamamoto, who had emphasized the need for immigration and colonization as a solution to overpopulation. Yanaihara was critical to Japan/Manchuria block economic theory and to the planned economy in Manchuria. He argued that the economic block cannot maintain a self-sufficient economy both in Japan and Manchuria, and that it is important to boost the economic development of Manchuria independently. He also criticized the Manchurian controlled economy, arguing that joint national companies are not appropriate in light of Manchuria’s economic level, and industrial control from a military point of view is not common economic practice. 이 글은 만주사변 이후 전개되는 만주를 둘러싼 일련의 사태에 대한 인식을 식민정책학자인 야나이하라 다다오의 논의를 중심으로 고찰한 것이다. 야나이하라는 만주사변을 계기로 만주문제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되었다. 그에 따르면 만주사변은 일본 제국주의와 중국 국민주의의 충돌이었으며,그 산물이 만주국이다. 그는 만주국에 대해 일본이 ‘식민지적 이해관계’를 갖는 국가이며, 정부의 주장처럼 독립국가가 아니라 ‘준보호국’ 정도의 위상이라고 규정했다. 만주사변 이후 실행된 정부의 만주 이민정책에 대해서는 만주는 일본인의 이주지로서 적합하지 않다는 입장을 일관되게 견지하였다. 이는 종전부터 과잉 인구의 해결책으로서 이민과 식민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던 야마모토 미노오를 비롯한 당시의 식민정책학자들이 만주 이민에 적극적이었던 것과 대조되는 주장이었다. 야나이하라는 일만경제블록론이나 만주 경제통제책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일본과 만주의 블록경제만으로는 일본, 만주 모두 자급자족적 경제를 유지할 수 없으며, 블록경제에서 중요한 것은 만주 자체의 개발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만주 경제통제책에 대해서는 전국적 기업합동안은 만주의 경제발달 수준에 비추어 적합하지 않다고 지적하고, 군사적 견지에서의 산업통제는 경제의 ‘상도(常道)’가 아니라고 비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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