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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傾蓋如故, 同氣相求 —洪良浩與紀昀交遊攷述

        徐毅 열상고전연구회 2010 열상고전연구 Vol.31 No.-

        홍양호와 기윤은 18세기 중후기에 각각 조선과 청조 문단에서 최고의 문인이며 사림의 숭앙을 받는 학자이다. 그들의 교류는 갑인년(1794, 정조18년, 건륭59년)에 홍양호가 동지겸사은정사의 신분으로 연경에 갔을 때부터 시작된다. 홍양호는 당시 청조 예부상서인 기윤과 만나 교유하였다. 그들의 교류관계를 고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첫째, 이것은 중국과 한국의 학술 대가들의 교유이다. 청조와 조선의 건국 이후 고층간, 높은 수준의 학술교류는 이것이 처음이다. 그러므로 이전시기의 중한 문인교류와 다른 특징을 나타낸다. 둘째, 그들의 교류는 한번의 만남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書信, 贈文, 贈詩 및 贈物 등의 빈번한 왕래를 하였다. 그들의 교류는 전면적이고 깊이 있게 진행되었다. 그들이 교류 중에 논술한 학술사상은 중한 관각문단의 학술경향을 대표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학술사상의 동이점을 비교하면 곧 당시 중한 학술경향을 파악할 수 있다. 이상의 두 가지 연구 의의에 근거하여 본고는 연대순에 따라 다양한 문헌자료를 종합하여 홍양호와 기윤의 교류를 상세하게 고찰하였다. 두 사람은 갑인년부터 무오년까지(1794-1798) 매년 편지와 시문, 선물 등을 통해 서로에 대한 우정을 전달하며 지속적인 교류를 하였다. 두 사람의 “傾蓋如故”한 감정은 知音을 얻기 어려운 것에 대한 감탄과 얻은 후의 기쁜 심정, 상대방에 대한 존경과 격려의 마음, 지음에 대한 그리움 등 세가지 측면에서 표현된다. 문학에 있어서는 창작의 목적, 창작의 동기와 취지, 문학 비평 등 면에서 서로 합치된 관점을 갖고 있다. 본고는 홍양호와 기윤의 교류를 고찰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어냈다. 개인적인 관계로 놓고 보면 두 사람의 교류는 성공적이다. 두 사람이 만년에 건립한 학술적 우의는 중한 관각 문인들의 교류의 모범이 되었다. 국가간의 관계로 본다면 18세기말 중한 양국의 관각 학술경향은 일치하였다. 즉 양국은 모두 전통적 유교를 회복하기를 희망하였다. 홍양호와 기윤은 모두 당시 최고의 문인 학자으로서 그들의 빈번한 학술교류는 개인적인 교유의 범위와 의미를 넘어 18세기 중한 관각학술의 최초의 진정한 교류라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 KCI등재후보

        楚亭朴齊家與淸文人文學交遊考述

        서의 영남대학교 중국연구센터 2012 중국과 중국학 Vol.17 No.-

        초정 박제가는 18세기 후기 조선의 저명한 문학가이며 실학자이다. 뛰어난 재능으로 정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4차례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는적극적으로 수많은 청조문사들과 접촉하고 교류하였다. 그들의 문학, 학술적 교류는 선명한 특징을 갖고 있으며 당대 청조 학계는 물론 조선문단에도 큰 영향을 끼쳤으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박제가와 청조 문인들의 교류는 다음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박제가는 18세기 조선 문인들 가운데 청조 문인들과 교류한 시간이 가장 길고 교류 범위도 가장 넓은 지식인이다. 4차례의 연행을 통해 그가 교류한 청조학자(척독 또는 시문으로 교류한 청조문인 3명포함)는 모두 168명이다. 둘째, 박제가와 교류한 청조 문인 중에는 당시 청조 문단의 걸출한 학자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紀昀, 李鼎元, 李驥元, 祝德麟, 孫星衍, 錢東垣, 洪亮吉, 陸費墀, 邵晉涵 등등이다. 셋째, 박제가는 특별히 청조 학자들과 시가이론, 시가 창작 방면의 교류를 중시하였다. 박제가가 청조 문인들과 가장 많이 교류한 내용이 바로 시가이다. 박제가와 청조 문인의 唱和는 총 24회에 달하고 그들이 주고받은 贈詩는 237수(1800년 이후에 창작한 시를 포함)에 달한다. 박제가와 청조 문인의 교류는 당시는 물론 후세의 조선과 청조에 큰 영향을 주었다. 첫째, 박제가는 중국문학, 특히 청조 당대 시인 및 작품을 조선에 소개하였고 동시에 조선의 당대 시인 및 작품들을 중국에 전파하였다. 우선, 박제가는 “회인시” 형식으로 청조의 저명한 문사들을 조선문단에 소개하여 청에 대한 인식을 넓히도록 하였다. 다음, 박제가는 중국에 사행가기 전과 4차례의 사행을 통해 자신과 조선의 친구들의 작품 및 조선의 일부 문헌들을 청조에 소개하였다. 이는 조선 문인들의 명성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청조 문인들이 조선 문인 및 문화에 대한 이해를 추진하였다. 둘째, 박제가와 청조 문인들이 구축한 학술인맥은 19세기 김정희와 청조문사들의 깊은 교류를 위해 길을 열어놓았다. 박제가나 김정희 모두 청조 학술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으며 조선의 학술적 시야를 넓히고 학술을 발전시키기 위해 크게 공헌하였다.

      • KCI등재
      • KCI등재

        金祖淳的燕行和與淸文士的交游

        徐毅,李姝雯,Xu Yi,LI. Shu-wen 대동한문학회 2015 大東漢文學 Vol.43 No.-

        在十八世紀後期的燕行文士中, 金祖淳的燕行目的、心態以及其他所 結交淸文士的行爲, 與當時的北學人士多有不同, 代表了別一種燕行和結 交異域友人的心态傾嚮。其出使除了承擔朝鮮朝廷所賦予的使命外, 其自身的願望還有:一是 承繼先祖使燕的傳統, 仍舊期待美名流播中土;二是結交淸名士, 尋覓奇書;三是觀淸社會之興衰, 歸而置辦應對措施。在能夠承繼先祖使燕傳統 的欣喜之後, 他更多地是表現出一種不喜不憂的冷靜。其目的是爲了能夠 細緻地觀察淸朝社會, 從而能夠爲自己的國家提出治國安邦之策。與朝鮮十八世紀的“北學派”結交淸文士的基本情況不同, 金祖淳與淸 文士交往可謂慎重, 與其有交往關係的僅有張道渥一人。究其原因:一是 兩人志趣相合, 有著共同的書法愛好和對於書藝的追求;二是金祖淳本身 對淸朝還有比較強的排斥態度;三是兩人性情相投, 爲人行事均光明磊 落。因而, 張道渥是當時極少能符合金祖淳所要結交的“名士”標準的淸文 士之一。 金祖淳身上所展現出的與淸人來往的交友觀, 無疑也是十八世紀後期 一些朝鮮文士對淸人態度的縮影。作爲一種歷史上的真實現象, 同樣, 在 考察中朝文士交流關係時, 是不容忽視的。 Among the literati who visit China in the late 18th century, Kim Zosun shows his unique goal, attitude and the communication with other Qing literati. He is such outstanding among the “NorthStudy” literati that it represents an extraordinary trend towards learning from China and keeping friendship with foreign literati. Kim Zosun’s visit to Qing Dynasty is not only to complete his diplomatic mission as an ambassador, but also to realize his own wishes : 1. inheriting the tradition of his ancestors that visiting to China and expecting to gain good name which spreads far and wide in a foreign land; 2. making friends with Qing Literati and gathering remarkable books; 3. Observing the ebb and flow of Qing society so as to thinking over the corresponding measures. Though being able to succeed his family intention of visiting China, Kim always keep a cool mind to doing detailed survey about Qing society as well as advancing precious and useful countermeasures for his own country. Different from other “North Study” literati that making wide relationship with Qing literati in the 18 th century, Kim Zosun keeps an cautious attitude to making contact with them and he only has one best friend called Zhang Daowo. The reasons for that maybe as follows : 1. Kim and Zhang share the same interest ― calligraphy and the pursuit for hand writing art; 2. Kim still has a strong feeling of rejecting about Qing Dynasty; 3. Kim and Zhang have similarities in personality and temperament that they all regard integrity and tidy social manner as the primary as well as the most important principle of being a real man. Therefore, Zhang Daowo is among the rare Qing literati that meet Kim’s demands for making friends with famous persons. Kim Zosun’s sense of making friends is also a reflection of the Choson literati’s attitude towards Qing literati in the late 18th century. As a true example exists in the history, it should not be neglected when researching on the relationship between Chinese and Choson liter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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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논문 : 김창업과 청조 문사의 교유에 대한 고찰

        서의 연민학회 2010 연민학지 Vol.13 No.-

        조선시기의 중조문인들의 교류에 대해 학자들의 주목하는 기점은 왕왕 18세기 중엽의 洪大容과 金在行 등이 "燕杭三士" 嚴誠, 潘展筠, 陸飛와의 교류이다. 물론 그들의 교류는 중조문인교류사에서 획기적인 의의를 지닌다. 그러나 필자는 18세기 초기의 金昌業과 淸文人의 교유도 경시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김창업은 18세기 초기 청조 문인과 교류가 가장 많은 조선 문인이다. 그가 청문인과 교유하는 원인, 심리, 대상, 형식 및 교유 내용 등은 모두 자세하게 그의 『燕行日記』와 문집 『老稼齋集』에 가록되어 있다. 이런 기록은 청조의 정치현황, 풍속민정, 학술문화 등을 아주 잘 보여주었다. 김창업이 조선시기의 문단에서 비교적 높은 명성을 지녔으며 그의 『燕行日記』가 광범하게 유행되었기에 점점 많은 조선 문인들이 청조의 역사와 현황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그후 중국에 연행을 가려고 준비하는 조선 문인들에게 지속적으로 淸王朝를 알아가고 청문인과 교유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본 논문은 주로 김창업과 청조 문인들의 교유 과정에 대한 문헌적인 정리와 분석을 통해 김창업과 청조 문인들의 교류 특징을 고찰하였다. 그리하여 얻어낸 결론은 첫째, 김창업은 청조에 대한 멸시로 인해 주동적으로 청조 문인과 교제할 생각이 없었다. 둘째, 당시 청조 문인이 주동적으로 김창업과 교제하려고 한 것은 종종 이익을 추구하려는 성격을 띠고 있다. 셋째, 김창업은 청조 문인들과 필담할 때에 특별히 청조의 時政에 영향을 주는 일들에 관심을 가졌다. 넷째, 김창업이 교제한 문인들 중에 李元英과의 교류가 가장 빈번하고 친밀했다. 이로보아 그는 그래도 才學이 있는 선비와 교류하기를 즐겼다. 다섯째, 김창업이 교류한 문인은 대부분 秀才이거나 혹은 신분이 없는 일반 문인이었다. 이런 문인들은 훌륭한 문학적 재능과 깊은 문화적 축적이 없기 때문에 김창업과 그들은 학술적인 교류가 이루어질 수 없었다. 對於朝鮮李朝時期中朝文人的交流, 學者關注的起點往往是十八世紀中葉洪大容, 金在行等與"燕杭三士"嚴誠, 潘庭筠, 陸飛的交流。誠然, 他們間的來住在中朝文人交流史上具有劃時代的意義。但是筆者認爲, 十八世紀初期的金昌業與淸文人的交遊具有不容忽視的價値。金昌業是十八世紀早期與淸文人交流最多的朝鮮文人, 他的交往原因, 交往心態, 交往對象, 交往形式, 交往內容等都被詳細地保存在他的《燕行日記》和其文集《老稼齋集》中, 這些記錄흔好地反映了淸朝的政治現狀, 風俗民情, 學術文化等。由於金昌業在朝鮮李朝時期的文壇具有較高的聲名, 再隨着他的《燕行日記》的廣爲流播, 越來越多的朝鮮文人開始關注淸朝的歷史和現狀, 這無疑就爲後來準備出使到中國的朝鮮文人繼續深入료解淸王朝, 繼續與淸文人展開交往奠定了良好的基礎。本論文主要通過對金昌業與淸文人交往過程的文獻整理和分析, 考述金昌業與淸文人的交流特點, 得出結論: 一是緣於對淸朝的鄙夷, 金昌業沒有主動與淸文人結識的願望; 二是當時淸文人主動結識金昌業的行爲往往帶有功利色彩, 三是金昌業在與淸文人筆談時, 對那些影響淸朝時政情況的事情特別關心; 四是在交往的淸文人中, 金昌業與李元英的交流最爲頻繁和密切的, 可見其還是樂意與才學之士進行深入交流的; 五是金昌業結識的文人多是秀才或者無身紛的普通文人。由於這些文人倂沒有傑出的文學才能, 深厚的文化底蘊, 因此, 學術對話的平臺흔難在金昌業與他們之間形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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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十八世紀朝清文士筆談內容考述

        서의,진리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연구소 2014 中國硏究 Vol.60 No.-

        The 18th century is a period when Qing and Chosŏn literati communicate frequently with a variety of communicating forms such as conversations by writing, the exchange of poetry, reciprocating letters, asking for providing preface and postscript, literary criticism as well as giving books as presents, among which the conversations by writing is the most popular way of interaction. According to statistical study by the author, at least 193 detailed conversations by writing happened in the 18th century were recorded in the extant Yeonhaeng Rok, one of Chinese and Korean ancient scriptures. Its contents mainly covered ten aspects, in which some in-depth exchange was recorded. Therefore, these materials are of great literature value. Regarding to the communication of etiquette system and custom, Qing people’s comments on Chosŏn ambassadors’ clothing and inturn Chosŏn views of binding feet of Qing women are always the key points. Besides, it also includes the communication of imperial examination system in Qing Dynasty and Ancient Korea;the discussion about academy and literary between Qing and Chosŏn scholars;Chosŏn literati’ concerns with religion;Chosŏn literati’ focus on the Ming historical events, Qing political and agricultural situation as well associal development;Chosŏn literati’ acquaintance with compilation of books in Qing Dynasty, for example “The Imperial Collection of Four Treasures”;the exchange of banned books in Qing Dynasty between Qing and Chosŏn literati;Chosŏn scholars’ care for the landscape, geography of China and places of interest in China. Qing people also pay attention to Chosŏn in many regards, for instance,landscape and geographical situation, scene style and feature views, ancient authors and their works, history, etiquette, custom, education, languageetc. It is obvious to find the diversity of their conversation topics. And these topics are closely associated with the culture, custom, history and the focus on Confucianism of Qing Dynasty and Chosŏn. It should also be emphasized that no matter how abundant the conversations are, the key point is always related to concerns of Chosŏn literati when visiting Qing Dynasty and their own scholar trai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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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洪良浩與紀昀文學思想比較

        徐毅 한국어문학국제학술포럼 2010 Journal of Korean Culture Vol.15 No.-

        홍양호(洪良浩)와 기윤(紀昀)은 각각 18세기 중후기 조선과 중국 양국의 문단에서 명성을 얻고 학술적 주도권을 잡아 학계의 존경을 받았던 학자들이다. 그들의 교유는 갑인년(즉 1794년, 정조 18년, 건륭 59년)에 홍양호가 동지 겸 사은정사의 신분으로 연경에 가게 되면서 비롯되었다. 당시에 그는 예부상서였던 기윤과 서로 알게 되어 교류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들 사이의 교유관계를 고찰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먼저 이것은 중국과 조선의 학술 대종사(大宗師) 간의 교유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청조와 조선왕조가 세워진 이후로 이와 같이 높은 관직에 있는 자들 간에 높은 수준의 학술적 교류가 이루어진 것은 이것이 처음이므로 분명 이전의 중조 문인 교류와는 다른 특징을 보일 것이다. 두 번째로 그들 간의 교류가 단지 한 번의 만남으로 그쳤던 것이 아니라 서신(書信), 증문(贈文), 증시(贈詩), 증물(贈物) 등의 왕래가 매우 빈번하였으므로, 그들의 교류는 전면적이고 깊이 있는 것이었으며 중국과 조선의 학술적 불꽃이 그들 사이에서 충돌하고 마찰하였다는 점이다. 그들이 교류하면서 논술한 학술사상은 중국과 조선의 관방 학단의 학술 방향을 대표한다. 따라서 그들의 학술사상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비교하면 당시 중국과 조선의 학술적 경향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 두 가지 방면의 연구 의의를 기초로 삼아 본고에서는 먼저 시간적 순서로 여러 방면의 문헌 자료를 종합하여 홍양호와 기윤의 교유 과정을 상세하게 고찰하여 서술하였다. 두 사람의 교유 경력을 통해 갑인년에서 무오년(1794-1798)까지 해마다 이들이 서신과 기시(寄詩) 또는 증물 등의 형식으로 서로 상대방의 재능을 아끼는 마음을 전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두 사람의 ‘傾蓋如故(우연히 잠시 알게 되었어도 오래된 사이 같음)’의 감정은 주로 첫째로 지음(知音)을 얻기 어려운 것에 대한 개탄과 얻은 후의 기쁨, 둘째로 상대방에 대한 존경과 면려의 마음, 셋째로 지음에 대한 그리움 등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홍양호는 “文章契遇自古難, 同氣相求非我衒.”라는 시구를 써서 자신과 기윤이 ‘文章契遇’이자 ‘同氣相求’라고 일컬었는데, 이것이 바로 두 사람의 교유의 가장 큰 특징이자 다른 중조 문인 관계와 다른 점이다. 그들의 ‘同氣相求’는 시문(詩文)의 도(道)에 대한 공통된 방향과 고도의 결합이자 고상한 인격에 대한 형상화로써 두 사람의 정의(情誼)를 묶어주는 초석이다. 두 사람의 문학 정신의 결합은 주로 다음의 세 가지 방면으로 표현된다. 첫째, 창작의 목적에 있어서 두 사람은 모두 ‘문이재도(文以載道) 전통의 쇠락에 대해 안타까워하며 문장은 반드시 ‘재도’를 요체로 삼아 세상에 이익이 되어야 함을 분명히 지적했다. 둘째, 창작의 동기와 의의에 대해 두 사람은 모두 ‘정(情)’과 ‘지(志)’가 시가의 근원이며 ‘온유돈후(溫柔敦厚)’야말로 시가의 의의라고 지적했다. 셋째, 두 사람 모두 문장을 평론하고 인재를 장려하고 등용할 때 반드시 공정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파벌간의 싸움과 지역감정에 반대하여 “문장의 근심은 파벌만한 것이 없다(文章之患, 莫大乎門戸)”고 생각했다. 본고는 홍양호와 기윤의 관계에 대한 상세한 고찰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개인적 관계로써 말하자면, 홍양호와 기윤의 교유는 성공적인 것이었으며 그 두 사람이 만년에 수립한 학술적 우의는 중국과 조선의 관방 문인 교류의 전범이다. 그들 두 사람은 나이가 같고 지위가 비슷하였으며, 백발이 되어 만났으나 서로의 만남이 너무 늦었음을 한탄하고 정의가 매우 깊었으므로 ‘傾蓋如故’라고 할 수 있다. 비록 그들이 주고받은 필담 기록이 전해지지는 않지만 서신과 증문, 증물 등의 형식으로 전개된 교류는 매우 깊이 있는 것이었으며, 특히 문학의 도와 유가적 이상에 대한 이해와 추구는 그들 사이에서 고도의 정신적 결합을 형성하였으므로 ‘同氣相求’라고 할 수 있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로써 말하자면, 18세기 말의 중국과 조선 양국의 관방 학술 경향은 일치하였는데, 즉 양국 모두 전통적 유가의 도를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그것을 담는 중요한 ‘그릇’은 바로 시문이었다. 홍양호와 기윤이 교유할 당시 두 사람은 모두 관방 문단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 사이의 깊고도 빈번한 학술 왕래는 이미 개인 교류의 범주와 의의를 넘어선 것이었으며, 18세기 중조 관방 학술계에 있어서 진정한 의미상의 최초의 중요한 교류였다. 洪良浩和紀昀是十八世紀與十九世紀之交, 朝淸兩國文增亨盛名, 執學術牛耳, 爲士林所宗仰的學者。對他們文學思想的比較硏究有着重要的意義一方面, 通過比較可以找出二人在晩年成爲知己之交的本質原因;另一方面, 他們的創作思想代表着當時朝淸官方主導的文學思想, 他們間的文學思想的比較也是兩國主導學術思想的比較。通過比較, 可以暸解18世紀後期朝淸文學思想的異同, 把握當時朝淸學術的傾向。 綜觀文集和批評專著, 兩人的文學思想呈現出高度的契合, 主要表現在四個方面:一, 在創作的目的和意義上, 兩人都對“文以載道”傳統的衰微感到痛心, 都强調文章當以載道爲要, 於世有益;二, 在創作的動因和旨歸上, 兩人都指出“情”, “志”爲詩歌之原, “溫柔敦厚”乃詩歌之旨歸;三, 在創作的美學迫求上, 兩人都主張流露出“天機”的詩文, 才是好詩文;四, 在文學評論標準上, 兩人都主張評論文章, 獎掖人材當秉以公心, 反對門戸之争, 地域之見, 認爲“文章之患, 莫大乎門戶”。 因此, 正是基於對儒家理想的共同追求, 對文學之道的相同理解, 二人白首相交, 成爲以文會友的眞正知己。同時, 由二人創作思想, 批評標準的高度一致, 可以看出:朝淸兩國官方主導的文學思想和發展傾向在十八世紀末, 十九世紀初是一致的, 卽兩國都企望以詩文爲傳道的載體, 回復傳統的儒家之道, “發乎唐, 止乎禮義”, “溫柔敦厚”的傳統儒家文藝思想依然有着不可代替的地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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