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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구 사제를 위한 '하느님 현존' 의식에 대한 영성신학적 고찰 :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를 중심으로

        장원제 가톨릭대학교 대학원 2024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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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구사제는 하느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직무 사제직의 사명을 삶 안에서 수행한다. 그들은 중재자로서 하느님과 사람 사이를 잇는 역할을 한다. 교구사제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전하는 사명을 지닌다. 그들이 하느님을 올바로 전하기 위해서 그분에 대해 먼저 알아야 한다. 그러나 사제가 하느님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중재자로서 그 사명을 이행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외적으로만 사제이기에 하느님을 올바로 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아는 것은 사제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꿈꾸는 최종 목적이다. 하느님을 아는 방법은 그분을 체험하는 것이다. 사제는 기도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대화하며 그분을 알 수 있다. 비록 사제가 하느님을 가시적으로 알지 못하더라도, 기도하며 그분께서 눈앞에 현존하여 계신다는 것을 믿고 바라봄으로써 체험할 수 있다. 이에 본 논문은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St. John Mary Vianney) 사제의 ‘하느님 현존’ 영성을 고찰하여 교구사제가 하느님의 현존을 삶 안에서 어떻게 실천하며 살 수 있을지 모색하였다. 교구사제가 사람에게 하느님을 전하기 위해서 하느님의 현현을 체험해야 한다. 하느님을 체험해야 그분에 대해 제대로 사람들에게 알려줄 수 있을 것이다. 비안네 성인은 하느님을 믿고 사랑했으며, 가난하게 살았고 성체 안에 현존하여 계시는 예수님을 느낌으로써 하느님 현존을 체험하였다. 이러한 비안네 성인께서 체험하신 하느님 현존은 교구사제가 중재자로서 사명을 충실히 이어 나가게 하기 위한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비안네 성인은 하느님 현존을 가난한 생활, 믿음, 사랑 그리고 기도 안에서 체험했다. 그는 중재자로서 많은 시간을 기도하는 데 할애했으며 하느님을 알아가려는 노력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교구사제가 비안네 성인을 본받아 그의 “하느님 현존” 영성을 실천함으로써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올바로 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사제로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을 것이다. Diocesan priests are called by God to practice their mission as a ministerial priesthood throughout their lives. As mediators, they act by connecting God and people. Diocesan priests have the mission of letting people know about God. In order to inform God correctly, they must first know him. However, if a priest does not know God properly, he will not be able to fulfill his mission as a mediator. This is due to the fact that he will only be a priest outwardly therefore he will not be able to notify God properly. Knowing God is the final goal for not only priests but also for every Christians. The way to know God is to experience Him. In praying, a priest can perceive God by encountering and exchanging dialogues with Him. Even though a priest cannot recognize God visibly, he can still experience God by praying and believing that he is present before his eyes. This dissertation will examine the spirituality of the 'presence of God' of St. John Mary Vianney to explore how Diocesan priests can live the presence of God in their daily lives. In order to explain God to people, a Diocesan priest must experience the presence of God. By experiencing God, Diocesan priest can confess about God properly to people. St. Vianney experienced the presence of God by believing and loving God, lived in poverty, and felt the presence of Jesus in the Eucharist. The experience which St. Vianney had encountered, will be a good model for Diocesan priests to fulfill their mission as mediators. In conclusion, St. Vianney experienced the presence of God in poverty, faith, love and prayer. As a mediator, he devoted so much time in prayer and did not neglect his efforts to know God. By following St. Vianney and practicing his spirituality of the "presence of God", Diocesan priest can reveal God to people in a proper manner. Thus, he will be able to glorify God as a priest.

      • 나주 윤 율리아와 연관된 일들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식별

        황양주 광주가톨릭대학교 대학원 2010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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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가? 성령의 현존과 활동은 어떻게 알아볼 수 있는가? 마음속 생각은 어디서 비롯되며 내적 움직임은 어디서 오는가? 신비현상(혹은 기적)과 신비체험이 하느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본 논문은 이런 물음들에서 출발했다. 특히 전남 나주의 윤 율리아가 기적을 체험하고 사적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함으로써 한국 교회 안팎으로 혼란과 분열을 일으켰다. 이는 식별의 문제로서 본 논문은 식별에 대한 성경과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통해 식별기준을 정하고, 이를 토대로 나주현상을 식별해 보았다. 1. 식별의 본질은 성령의 인도에 따라 시대의 징표를 읽음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영의 식별’이란 말은 직접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선택이라는 개념 속에 포함되어 영의 식별이 실천되었다. 선택은 식별을 전제하고 있기에 선택이 곧 식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선택의 행위에 영향을 주는 것이 있다. 이것을 ‘영들’이라고 한다. 영들은 다양한데 크게 선한 영과 악한 영으로 구별하며, 이 둘은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온다. 이 둘을 구별하는 것이 식별이다. 예언자의 역할은 역사 안에 담겨 있는 하느님의 뜻과 구원계획을 깨닫고 식별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나 스스로 하느님에게서 말씀을 받았다고 하기 때문에 예언자 시대의 식별은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구별하는 것이었다. 2. 복음서에서 드러난 식별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 아버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곧 예수님의 신원(하느님의 아들 됨)과 사명(하느님 나라 선포)을 알아보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 자신이 식별대상이요 식별기준이었다. 그런데 성령을 받은 사람만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알아보았다. 그래서 성령의 현존과 활동을 알아보는 것도 식별이다. 성령은 본질적으로 전혀 다른 새로운 가르침, 더 좋은 복음을 전해주기보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더욱 깊이 깨닫도록 이끌어주고, 교회가 직면하게 될 상황에 그 말씀들을 새롭게 적용함으로써 예수님의 가르침을 더욱 풍성하게 한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사도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의 현존과 활동을 올바로 깨닫고 인식하는 식별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성령의 활동에 대한 식별은 필연적으로 성령을 따라 사는 삶 안에서만 가능한 일이며, 이 식별은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은사)(1코린 12,10)이다. 그런데 어떤 생각이나 활동은 성령만이 아니라 성령이 아닌 것으로부터 올 수 있기 때문에 성령의 현존과 활동 그리고 은사는 식별되어야 한다. 3. 그리스도교 초기 400년은 우리가 어떤 영을 따르고 어떤 영을 배척해야 하는지에 대한 ‘영들의 식별’이 발달했다. 신앙의 체계를 이룬 400년 이후부터는 선과 악, 어둠과 빛 사이의 식별이 아니라, 겉보기에는 모두 다 선한 것들 사이에서 더 올바른 일이 무엇이고, 하느님의 뜻에 더 합당한 일이 무엇인가를 묻고 찾는 분별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 시기의 식별의 문제는 외적 행동에 대한 분별로 바뀌었다. 4. 중세기에는 ‘영의 식별’이라는 ‘성령의 은사’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겸손과 순종이 선한 영의 기준이며 이러한 미덕들이 없으면 악의 영이라고 했다. 특히 요한 제르송은 처음으로 신비 평가목록과 영적지도자의 역할 그리고 식별기준을 제시했다. 그가 제시한 식별기준은 진짜 동전과 가짜동전을 식별하는 것에 비유하여 겸손(무게), 분별(유연성), 인내(견고성), 진리(도안) 그리고 사랑(황금빛 색깔)이다. 5. 근대에 들어 이냐시오가 교회의 식별전통과 자신의 체험을 종합하여 영들의 움직임을 식별하는 규칙을 집대성하였다. 그는 심리학적 개념인 ‘영적 위안과 실망’을 중심으로 식별을 위한 ‘내적’ 기준을 제시하였다. 그는 인간의 성향이 영적 결정의 동기가 된다고 함으로써 식별의 문제에 있어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즉 식별은 단지 이성적(理性的) 동기뿐만 아니라 정서적인 움직임들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적 평화와 기쁨이 성령의 활동의 통상적인 표징이며 하느님의 뜻을 알게 하는 표지라고 한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은 신비체험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는 겸손이라고 했다. 신비현상과 체험은 겸손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이기에 외면적이고 감각적인 현상을 함부로 요청하지 말고 아예 처음부터 거부하라고 했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이 하느님의 능동성과 체험자의 수동성이다. 하느님께서는 말씀하시고 보여주시고, 인간 편에서는 들리고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체험자는 현상과 체험에 대한 진위판단과 인준여부와 상관없이 책임자인 교회에 알리는 것으로 그의 임무는 완수된다. 이렇게 식별의 문제는 구약과 신약성경 시대는 물론 교회 역사상 항상 있어 왔다. 그만큼 미묘한 영적 현상들이 많이 일어났다는 반증이다. 6. 가톨릭 신앙은 공적인 신앙이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자신의 체험과 신념을 주장할 수 있으나 그것을 How do we know God's will? What is His will? How do we recognize the presence and actions of the Holy spirit? Where do our inner thoughts and movements come from? And how do we know supernatural phenomena (or miracles) and experiences have come from God? The thesis is based on these questions. Julia from Naju has created much confusion and division within and outside the Catholic Church by claiming that she had experienced miracles and received a private revelation. Since the whole episode has to do with the matter of discernment, The thesis examines the criteria of discernment through the traditional teachings of the Bible and the Church and based on these findings, it examines the Naju phenomenon. 1. The essence of discernment is discovery of God's will through recognizing the signs of the times, guided by the Holy Spirit. In the Old testament, the word 'discernment of spirits' has not been directly mentioned although the idea was included in the concept of choice. Since a choice presupposes discernment, the two could be regarded as the same. However, the action of choosing is influenced by 'spirits'. Spirits are varied but can be largely grouped into good and bad and both come from God. Discrimination of the two requires discernment. The role of prophets is to realize and discern God's will and plans contained in history. However, false prophets appeared and claimed that they had received God's words. For this reason, discernment was needed to differentiate true prophets from those who were not, during the era of prophets. 2. The new Testament portrays discernment as the ability to recognize 'God' through 'the son of God', Jesus Christ ; to recognize the identity of Jesus (as the son of god) and his mission (to declare the kingdom of God). Therefore, Jesus himself was an object and, at the same time, a criterion of discernment. Since only those who had received the Holy Spirit recognized Jesus as the son of God. Discernment meant recognizing the existence of the Holy spirit and the actions of it. The Holy spirit essentially leads one to more deeply realize the teachings of Jesus rather than providing new or better teachings. The Holy spirit also enriches the teachings of Jesus by applying them to future situations which the Church will be faced with. After the Ascension, it was important for the disciples and the Christians to properly discern the existence and actions of the Holy spirit. Inevitably, such discernment was possible only in the lives of those who followed the Holy spirit and this discernment was the gift of the Holy spirit(1Cor 12,10). However, some thoughts and actions can also come from somewhere other than the Holy spirit, so discernment is needed when recognizing the existence, actions and gifts of the Holy spirit. 3. In the first 400 years of the Christian Church, we saw the development of 'discernment of spirits' that provided guidance about which spirits to follow and which to reject. After this period, as the system of worship was well-established, discernment was needed not for discriminating goodness and evil or light and darkness but for the process of inquiring and seeking out what was more in accordance with God's will among options that appeared to be all good. During this period, discernment was thus more concerned with external actions. 4. In the Medieval period, the gift of 'discretio spirituum' gathered interests. Humility and obedience were regarded as criteria of good spirits and the absence of these qualities indicated the opposite. In particular, John Gerson suggested for the first time the list of criteria for the supernatural, the role of spiritual leaders and the criteria of discernment. The criteria were similar to those for discerning genuine coins from fake ones; humility(weight), discretion(flexibility), patience(solidness), truth(design) and love(golden colour). 5. In the modern period, St. Ignatius complied rules of spiritual discernment based on the traditional discernment of the Church as well as his personal experiences. He suggested the internal rules for discernment based on psychological concepts of spiritual consolation and depression. He opened a new horizon with a new concept in the study of discernment, suggesting that personal tendencies provided basis for spiritual judgement. According to him, discernment must not only consider rational motivations but also consider emotional movements. Internal peace and bliss are thus typical signs of activities of the Holy spirits as well as the signs of God's will. St. Theresa of Avila and St. John of Cross stated that one needed humility in dealing with supernatural experiences. Because such experiences are gifts of God given to humble people, one must not ask for external and sensational phenomena in haste but to refuse them from the beginning. What is important here is the activeness of God and passiveness of the receiver. God speaks and shows; He is heard and seen by humans. Therefore, the responsibility of the receiver is completed by notifying the Church regardless of genuineness or approval advertises of the experience and phenomena. The matters concerning discernment have always been present throughout the history of the Church. This in turn indicates the presence of many unexplainable supernatural phenomena during the times. 6. Catholic faith is communal. People may proclaim their beliefs and experiences individually but in order to make them public they need to have their beliefs and experiences judged by the Church. Such judgement does not belong to the individuals but to the Teaching Authority, especially so in the case of self-claimed miracles or private revelations. Traditionally, the Church has provided discernment based on the principle that 'one can judge a tree by its fruits' (Matthew 7, 16-18; 12,33). The principle can be divided into three criteria; 1. whether such experiences are in accordance with the traditional teachings of the Church. 2. genuineness of the expe

      • 가톨릭 청년들의 하느님 이미지가 영적 성숙도에 미치는 영향 : 종교적 대처의 매개효과

        우직한 가톨릭대학교 상담심리대학원 2021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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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연구의 목적은 가톨릭 청년들의 하느님 이미지와 영적 성숙도의 관계에 서 종교 대처의 매개효과를 검증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가톨릭 신자 중 만19 세 이상 ~ 만39세 이하의 남녀들을 대상으로 하느님 이미지 척도, 종교 대처 척도, 영적 성숙도 척도로 구성된 설문조사를 실시하였고, 401명의 자료를 SPSS 25.0과 Macro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분석하였다. 본 연구의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하느님 이미지와 긍정적 종 교 대처, 영적 성숙도는 유의한 정적상관이 있었다. 하느님 이미지와 부정적 종교 대처는 유의한 부적 상관이 있는 반면에 부정적 종교 대처는 영적 성숙 도와 유의한 상관이 없었다. 둘째, 하느님 이미지와 영적 성숙도의 관계에서 긍정적 종교 대처가 부분 매개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부정적 종교 대처는 매개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연구결과는 하느님 이미지가 긍정적 종교 대처에 영향을 미치고, 긍 정적 종교 대처는 영적 성숙도에 영향을 준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는 하느님 이미지와 긍정적 종교 대처가 가톨릭 청년들의 영적 성숙도에 영향을 미치는 심리적 과정임을 확인한 것이다. 이를 통해 종교생활 및 사목상담 현장에서 가톨릭 청년들의 영적 성숙을 위한 방안을 마련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마지막으로 본 연구의 한계점을 밝히고 후속연구를 위한 제언을 하였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verify the mediating effect of religious coping in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Image of God and spiritual maturity in Catholic youth. For this, the survey was conducted on male and female aged 19 to 39 who were religious in Catholic church, consisting of a measure of the Image of God, a religious coping scale, and the Spiritual Maturity Inventory. And 401 data were analyzed using the SPSS 25.0 and Macro programs. The results of this study were as follows. First, the Image of God, religious coping, and spiritual maturity were a significant positive correlation. On the other hand, the Image of God and negative religious coping had a significant negative correlation, negative religious coping had no significant correlation with spiritual maturity. Second, in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Image of God and spiritual maturity, positive religious coping had a partial mediating effect, and negative religious coping had no mediating effect. These results suggest that the Image of God influences positive religious coping, and positive religious coping again influences spiritual maturity. It was confirmed that the Image of God and positive religious coping are psychological processes that affect the spiritual maturity of Catholic youth. Through this, it is meaningful in that it can prepare a plan for the spiritual maturity of Catholic youth in religious life and pastoral counseling. Finally, the limitations of this study were revealed and suggestions for follow-up research were made. Key words : The Image of God, Religious coping, Spiritual maturity, Catholic youth

      • 하느님 경외 (timor Dei) : 베네딕투스의 「수도 규칙」을 중심으로

        이영근 부산가톨릭대학교 대학원 2005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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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학에서는 이 주제가 차지하고 있는 가치와 중대성을 잘 말해주고 있다. 곧 일상적인 삶 속에서 느껴지는 두려움과 종교적인 상황 속에서 전개되는 두려움을 구별한다. 그리고 인간은 항상 이러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려고 노력을 해왔음을 말한다. 그래서 ‘경외(두려움)’란 감정은 계속해서 인간의 삶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성경에서 ‘하느님 경외’란 신성(거룩함)의 자각, 또는 깨달음과 연결되며, 동시에 회개, 거부, 끌림, 매혹, 경외, 숭앙, 사랑, 신뢰, 믿음, 경배, 그리고 찬양 등의 반응을 일으키는 대단히 복잡한 성격의 정서적 체험을 가리키고 있다. 곧 ‘하느님 경외’는 하느님의 자기현현(自己顯現)과 관련하여 나타난다. 그리고 인간의 자기 죄에 대한 회개와 하느님께 대한 깨달음과 믿음, 그리고 감사와 경배를 불러온다. 특별히 신약에서는 하느님께 대한 체험과 믿음, 그리고 경배가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나타난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성화의 도구, 곧 ‘지혜’로 표현되기도 하며, 그리스도인의 ‘사랑’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하느님의 절대적 권능에 대한 반응이이라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그분의 무한한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드러나고 있다. 교부 문헌들에서 ‘하느님 경외’는 ‘하느님과 이웃 사랑’이라는 계명 준수와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인간의 행위로서의 ‘하느님 경외’에 앞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곧 ‘하느님 경외’는 인간이 하느님을 체험하고 그분이 하느님이심을 깨닫고서 그분께 드리는 감사(보답)와 경배의 표현이며, 또한 그분께 대한 사랑의 표현임을 말해준다. 따라서 ‘하느님께 대한 경외’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결코 분리되지도 무관하지도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예를 들어 보면, 바실리우스는 ‘하느님 경외’를 하느님 사랑에 대한 보답(응답)에서 나오는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말하며, 요한 카시아누스는 하느님의 사랑에 경외심을 느낀 인간이 가지는 하느님께 대한 응답이며 사랑이라고 말하며, 아우구스티누스는 ‘두려움과 사랑의 관계’를 서로 모순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익명의「스승의 규칙」에서는 사랑의 계명과 관련지어 제시되고 겸손의 조건으로서 완전한 사랑으로 이끌어줌을 말하고 있다. 베네딕투스의「수도 규칙」에서 ‘하느님 경외’는 ‘하느님 경외’가 얼마나 수도승생활에서 유력하고 근본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지 확인시켜 주고 있다. 곧 ‘하느님 경외’를 수도승이 갖추어야 할 자질로, 혹은 수도승이 배워야 할 지혜로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하느님 경외’는 수도승생활에 있어서 그 무엇보다도 앞서서 요구되는 전제가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수도승생활의 전반에 바탕을 이루는 내적태도이며 정신이 되고 있다. 곧 수도승생활의 이상과 목적인 ‘하느님 찾기와 그리스도를 따름’에 있어서도, 수도승생활의 기본 구조인 ‘하느님의 일과 거룩한 독서와 노동’에 있어서도, 수도승생활의 영성적 원리인 ‘순명과 침묵과 겸손’에 있어서도, 수도승성소의 분별기준인 ‘하느님의 일과 순명과 모욕을 참아 받기’에 있어서도, 수도승 서원 내용인 ‘정주와 수도승다운 삶, 순명’에 있어서도, ‘하느님 경외’는 이들의 전제가 되고 원천이 되며 내적 자세가 됨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고찰에 따라 ‘하느님 경외’는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하느님 경외’는 하느님의 자기현현 혹은 하느님과의 체험(만남)에서 기인하며, ‘두려워하는 마음’과 ‘흠숭하는 마음’의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곧 하느님의 무한함과 전지전능함에 대한 일종의 ‘두려워하는 마음’이며, 동시에 그러한 하느님으로부터 존재함을 받고 그분께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에서 비롯되는 ‘흠숭하는 마음’이다. 그래서 ‘하느님 경외’는 ‘노예의 경외심’과 ‘자녀의 경외심’으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그리고 ‘자녀의 하느님 경외’는 결코 ‘하느님 사랑’과 모순 되지 않으며, 성령으로부터 오는 선물이요 열매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 경외’는 다음과 같은 가치 및 중대함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곧 ‘하느님 경외’는 악습을 근절시키고 덕을 함양시켜 준다. 그래서 죄 없음과 덕스러운 생활의 뿌리가 되며, 깨달음과 회개, 겸손과 순명, 감사와 기쁨, 찬양과 전례(경신례)의 바탕이 되어 준다. 또한 ‘하느님 경외’는 구원의 시작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것을 보존하는 비결, 곧 완전한 사랑으로 나가는 길이 되어 준다. 따라서, ‘하느님 경외’는 오늘날 우리에게 수도승생활의 쇄신을 촉구한다. 무엇보다도 ‘하느님 경외’는 현존 안에서의 삶과 하느님 중심의 수도승생활을 촉구한다. 곧 수도승생활은 하느님 중심이지, 인간 중심이 아니라 하겠다. 그러기에 ‘하느님 경외’는 그리스도와 말씀 중심의 수도승생활을 촉구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성경 안에서, 또한 일상과 만나는 모든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

      • 고대 한국인의 하느님관념 연구 : 한국인의 전통신관과 그리스도교의 수용 경위

        이광옥 가톨릭대학 대학원 1988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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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교회의 현재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외적성장과 함께 내적 복음화가 시급히 요청되고 있다. 이에 부응하여 이 논문에서는 내적 복음화의 여러 장애요인 가운데 한국인의 심성과 관련하여 하느님관념을 선택 고찰하였다. 그것은 한국인의 하느님 관념과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관념과의 유사성 때문에 본래적인 그리스도교 신앙이 변질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를 받아 들일 때까지 기나긴 역사를 거치면서 하느님 관념이 형성되어 온 과정을 알면 「지금 ·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신앙변질의 문제점의 기원을 알 수 있고, 또한 해결책도 제시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바이다. 이런 취지하에 본론에서는 우선, 어원-민속적 고찰을 하였다. 어원에서 '하늘'이란 말이 변하지 않고 고대로부터 '하늘'이라는 단일어로 전해왔다는 주장과, 大와多의 뜻을 가진 '한'과 '무엇'과의 복합어라는 주장이 있다. 전자의 주장은 '하늘'이 원시시대부터 인간과 원초적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뜻이고, 후자의 주장 역시 음운법칙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하늘'이 인간의 삶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음이 산명, 지명, 인명, 족명 등에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민속적 고찰에서 먼저 속담에 나타난 하느님 관념을 보면 공간성, 무한성, 비인격성(물질성)을 표시하는 속담과, 도덕적 법칙성(정신성)을 표시하는 속담이 7 : 1의 비율로 나타남으로써 한국인의 하느님 관념이 거의 (82%) 물질적이었음이 지적되었다. 그리고 고소설에 나타난 하느님 관념은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의 전능과 비슷한 부분도 있고, 유교의 天의 속성도 있으며, 천체를 하느님으로 보는 원시적 관념도 보인다. 또한 숙명론적이면서도 인간에 의해서 조종되기도 하며, 기원자의 수요에 따라서 호칭되는 점 등 다양한 신관과 함께 신의 기능화가 주류를 이룬다는 점을 살펴 보았다. 다음에 하느님관념의 문화사적 고찰을 하였다. 여기서는 먼저 선사시대의 측면에서 하느님관념을 고찰하였고, 그리고 신화 속에서, 마지막으로 한국인 심성의 주류를 이루는 무교에서 고찰하였다. 먼저 선사시대에서는 한반도가 시베리아문화권인 동북 아시아문화권을 근간으로하여 중국문화와 인도문화(남방문화)를 받아들인 점에 기준하여 북방계의 특징인 천신숭배의 샤마니즘과 조상숭배, 천손신화의 흔적을 보았고, '□□'사상의 성립 경위를 살펴보았다. '□□'사상이 바로 최치원이 말한 '풍류' 사상이며 풍류사상의 기반은 전-유교, 전-불교, 전-도교의 요소가 혼융되어 있다는 뜻이다. 다음으로 신화에 나타나는 主사상 역시 천손하강과, 천신과 지모신의 융합이 나타나고, 천신이 산신 등의 기능신으로 되어 인간과 가까운 존재로 표현되는 점을 알아낼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국인의 심성의 주류를 이루는 무교 역시 최고신으로 하느님을 숭배하고 인간의 구체적 관심사에 따라서 수많은 신들을 섬기고 있음을 알 수.있다. 이 무교의 영향이 현대까지 남아있는 것은 천신제가 있고, 기우제, 동제는 천신제의 변형이지만 하느님 개념보다 인간과 직접 관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무교에서는 신들의 기능화가 이루어 지고 기능신에 일관하는 사상으로서 '힘'이 제시된다. 그것은 신비로운 '힘'을 현세생활에서 이용하여 잘 살기 위함이다. 본론 세번째 장에서는 천주교의 영입 당시와 신유교난 이후의 신앙의 정착 양상을 살펴 보았다. 초기 영입은 마태오 리치에 의하여 중국화 되었다고 볼 수 있는 한역서를 통하여 영입된다. 이 초기 영입에 있어서는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인 모든 상황들이 천주교의 유포를 가능케했다. 즉 사상적으로는 선진유교가 교두보역할을 하여 보유론적 입장이 가능했으나, 진산사건에서, 그리고 신유교난에서 결정적으로 常人충을 포용했고, 보유론은 한계점을 드러내었으며, 상인들의 종교 심성(유교, 불교, 도교, 무교가 중첩된 하늘 사상)에서 뿌리를 내리게 된다. 이때 교회의 내적 상황에서 오늘날 우려하고 있는 무교화의 전조가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한국인의 하느님 관념이 천주교의 하느님을 참 하느님으로 체험하였기 때문에 실제적 신심생활이 가능할 수 있었고, 이 실제적 신심생활이 바로 박해를 이기게 한 원동력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끝으로 200주년 준비 사목의안에서 제시된 내적 복음화를 보면서 한국인의 물질적, 기능적인 신과 힘에 대한 선호사상을 지적하였다. 오늘날 한국의 宗敎현상과 무교화, 그리고 신흥종교의 발생동기가 이 사상에 연원되어 있음을 제시하면서 그리스도교의 역설적인 하느님으로 이 문제의 해결을 시도하고자 하였다. 요컨대, 한국인의 하느님관념에 흐르고 있는 사상은 유교, 불교, 도교, 무교가 중첩된 상태에서 오늘날의 문제들이 일어나고 있으며, 문제점들의 기충에 흐르고 있는 관념은 神=힘=현세적 주재적 영향력있는 존재라는 도식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힘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총=힘)은 인간이 본성적으로 바라는 이러한 현세적 주재적 영향력에 대한 것을 간과하지 않으면서 본성을 초극하여 마침내 이를 완성한다는 것을 제시한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서 드러나는 역설적인 힘이다. 이 힘이 증거될 수 있을 때 한국인들은 전동적인 하느님 관념의 바탕 위에서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을 자연스럽게 수용할 수 있을 것이고, 한국 교회가 정체현상을 벗어나 내적인 면에서도 민족 복음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 아버지 하느님과 남성이라는 Scandal로서의 Incarnatio : 남성 주도적인 이미지에 갇힌 하느님에 대한 여성신학적 반성을 통해 재조명된 Scandal로서의 Incarnatio와 그것에 대한 긍정적인 답변 시도

        박세종 부산가톨릭대학교 대학원 2010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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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에 대한 신앙 공동체의 언어는 신앙 공동체의 집단적 정체성을 형성하고 그 공동체의 실천적 방향을 제시하며 신앙 공동체에 몸담고 있는 구성원 각자에게도 영향을 준다. 그러므로 어떤 신앙 공동체든지 그 신앙 공동체의 성향을 알려면, 그 신앙 공동체가 표명(表明)하고 있는 하느님에 대한 언어를 살펴보면 된다. 다양한 종교들 중에서 본 논문은 그리스도교가 표명하고 있는 하느님에 대한 언어를 고찰하고자 한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하느님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언어는 ‘아버지 하느님’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신앙을 고백할 때 “저는 믿나이다. 전능하신 아버지...”라고 하며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매 기도 때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자녀된 도리를 행하고자 한다. 또한 아버지 하느님의 이미지는 화가들의 그림을 감관(監觀)하면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아버지 하느님의 이미지가 드러나는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Michelangelo의 >아담의 창조<와 Cranach의 >천사들의 영광 속에 땅 위에 있는 거룩한 삼위< 그리고 Velazquez의 >천상 화관을 받고 있는 동정녀 마리아<를 들 수 있다. 우리는 전례 언어와 세 가지 그림들을 통해서 본 논문의 주제와 만나게 된다. 분명히 아버지라는 용어는 관계를 나타내는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고유 언어로 사용된다. 그리고 하느님은 성을 초월하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남성으로만 묘사된다. 창조주 하느님뿐만이 아니라 말씀이신 하느님도 남성이라는 이미지에 갇혀 있다. 이와 더불어 여성은 남성 밑에 위치하는 부차적인 존재로 묘사된다. 하느님이 육을 취하여 인간이 되신 것은 은총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은총을 곡해하여 묘사한다. 그 곡해로 인하여 폭력이 행사되는 것이다. 이에 본 논문은 남성 주도적인 이미지에 갇힌 하느님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하느님의 모성에 대해 살펴보며, 그 모성을 토대로 남성의 육을 취해 Scandal이 되는 Incarnatio에 대한 마리아론적인 답변을 시도하고자 한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예수가 하느님을 πατ□ρ라 부르고 제자들에게도 하느님을 πατ□ρ라고 부르도록 가르쳤기 때문이다(마태 6,9; 루카 11,2 참조). 더 나아가 그리스도교 해석 전통은 예수가 하느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나타내기 위해 이때까지 그 누구도 고백하지 못하였던 어린아이의 용어로 하느님을 ‘□ββ□’라고 불렀다고 가르친다. 바로 이 때문에 하느님의 주도적 이미지는 아버지가 되며, 하느님에 대한 다른 이름은 부차적인 것으로 머물고 만다. 하지만 □ββ□는 전체 신약 성경에서 단 세 번 사용되었으며, 복음서에는 단 한 번밖에 사용되지 않았다. 게다가 한 번 사용된 것도 겟세마니에서 예수가 기도하는 장면에서 나타난다(마르 14,36). 이 장면은 예수의 행위가 독자에게만 계시되는 것으로, 그의 제자들이 예수의 고뇌에 찬 기도를 들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더군다나 □ββ□는 예수의 직접적인 발설이었기 보다 초기 그리스도 공동체 안에서 성령에 의해 발설되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왜냐하면 서로 다른 서간에서 같은 내용이 두 번이나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로마 8,15; 갈라 4,6). 그리고 πατ□ρ도 예수와 하느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나타내는 표현이 아니다. 유다 기도 문헌 중의 하나인 4Q372 1에서 요셉은 하느님을 ‘나의 아버지, 나의 하느님(yhlaw yba)’이라고 부른다. 또한 기원전 2세기-기원후 1세기에 그리스어로 집필된 유다 문헌(마카베오 3서, Joseph and Aseneth)과 히브리어로 집필된 유다 문헌(4Q372, 쿰란에서 발견된 찬가)에서도 하느님을 ‘아버지’, ‘나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이것은 그리스어로 집필된 유다 문헌과 히브리어로 집필된 유다 문헌의 정신이 단절된 것이 아니라 긴밀한 유대를 맺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예수 당시의 유다인들이 하느님을 ‘아버지’, ‘나의 아버지’라고 불렀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러한 유다 전통 속에서 자라온 예수도 하느님을 자연스럽게 ‘아버지’, ‘나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었다. 만약 예수가 하느님을 항상 아버지라고 불렀다면, 복음서 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자주 언급하여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복음서를 면밀히 살펴보면, 예수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횟수가 다음과 같이 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표] 이 변화에서 보듯이, 후대에 집필된 복음서 일수록 그 사용 횟수가 늘어나고 있다. 이것은 예수와 하느님의 관계를 부자 관계로 표현한 것이 1세기의 마지막 10년 사이에 매우 대중화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전통의 발전을 가져오게 된 원인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이스라엘 계약 사상 이면에 존재하는 가부장제의 영향이다. 이스라엘은 하느님과 계약을 맺는다. 이 계약을 통해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되며, 다른 민족들과 자신들을 구분짓는다. 이제 계약의 상징으로 할례가 베풀어진다. 계약의 상징이 남성의 몸(성기)에만 새겨지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은 선택된 민족 중에서도

      •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에 입각한 한국 사회선교의 미래 : 민중교회·나눔의집·교회 사회복지선교를 중심으로

        홍정수 성공회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2005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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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한국에서 행하고 있는 사회선교의 모습을 '하느님의 선교'의 입장에서 시작된 민중교회와 나눔의집 그리고 개신교의 기독교사회복지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민중교회는 그 출발이 교회로서의 출발보다도 민중운동으로서의 경향이 강하였다. 이는 제도교회의 부정과 함께 사건으로 출발한 민중 속에 함께함으로 그 교회의 생명을 지키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민중교회는 그 자신의 교회됨에 많은 한계를 가져왔고, 현재는 소수의 민중교회가 시민사회운동을 통한 그 정체성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느님의 선교'는 교회의 교회됨을 전제로 한다. 이는 세상에 봉사하기 위한 교회로의 역할은 교회 자신의 부정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자신의 거듭남에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민중교회는 제도교회를 부정한 사회선교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교회는 한국 사회선교의 큰 방향을 제시하였고 많은 도전을 준 것은 사실이다. 민중교회를 통하여 많은 교회들이 각성하게 되었고, 가난한 이웃 속에 있는 예수님을 살피게 된 중요한 동기를 제공하였다고 볼 수 있다. 나눔의집의 출발은 제도권과의 갈등 속에서 시작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제도권이라는 틀의 보장 아래서 사회선교기관의 일환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에 나눔의집에 사제를 파송함과 성공회에서 목회현장으로서의 인정은 나눔의집이 가지고 있는 여러 어려움 속에서 지탱할 수 있게 하는 큰 버팀목이 되었다. 아울러 나눔의집의 '자활후견기관'은 한국 사회복지의 중요한 정책적인 방향을 제시하였고, 현재 모범적인 사회선교기관으로 사회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나눔의집은 초기의 가난에 대한 정신과 현재의 복지적서비스의 결합으로 인한 확장 및 성장으로 나눔의집 정체성에 대한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복지와 운동사이의 마찰과 갈등은 나눔의집의 분화를 통하여 새로운 사회선교의 모델을 제시함으로 해결을 볼 수 있다고 보아진다. 이는 갈등의 해소로서의 역할이 아니라, 세상의 여러 곳에서 봉사하기 위한 방향으로 이어져야 한다. '하느님의 선교'는 교회 자신의 주인 됨을 부인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스스로의 존재의 이유를 위한 모색보다도 세상의 물음에 대한 응답으로 다가가야 한다. 사회 선교의 발전은 크기와 의미의 발전이라기보다는 자기 비움의 실행으로 확인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민중교회와 나눔의집은 가난을 함께 하고, 스스로 구조적인 변화를 모색한다는 동일한 의의로 출발했다. 그러나 지금의 두 모습은 판이하게 변화되어있다. 민중교회는 신앙공동체의 모습보다도 운동적인 측면을 더 강하게 가짐과 동시에 사건과 현장을 중시하고 제도교회를 부정하며 출발하였다. 이러한 민중교회는 민주화와 함께 시민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민중교회의 역할을 사회 여러 부분에서 일어남에 따라서 스스로의 정체성과 잃어버리게 되었다. 이는 사건을 중시하고 개교회주의적인 목회구조가 지니는 지속성의 한계를 보여준다. 아울러 민중교회는 스스로를 지키려는 민중이라는 정체성을 강하게 고수하려는 의지는 있었지만 이에 대한 의식은 가난한 민중이 가지고 있기 보다는 사회적 의식이 강한 지식인이 추구하는 모습으로 다가왔다. 이는 민중의 주체와 객체를 구분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으며 민중교회 안에 민중이 사라지게 된 동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나눔의집은 성공회 신대원생들의 의지가 모여져 탄생함과 동시에 성공회라는 신앙공동체의 결속력을 지니고 시작되었다. 이후 나눔의집에 사제를 파송하게 됨은 어려움 속에서도 나눔의집을 유지하게 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아울러 나눔의집이 처음부터 계획한 주민조직은 나눔의집을 지역사회의 커다란 버팀목으로 만드는데 공헌하게 되었다. 이는 서비스의 주체와 객체를 허무는 역할을 하였고, 가난속에 투신한 나눔의집 사제의 삶은 나눔의집 실무자와 지역주민을 공감케 하는 큰 원동력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나눔의집은 여러 사업은 정부의 사회복지에 모범이 되어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으며 확장과 발전 속에서도 스스로에 대한 돌아봄의 시간을 가지고 있다. 사회복지선교를 통한 교회는 많은 부분이 활성화되고 있고, 사회복지의 영역에 기독교가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 사회복지의 특성상 정부의 지원과 함께 간섭을 받아야 한다는 장단점을 가지고 있고, 사회복지를 실천하는 주체가 사회복지사라는 전문가에 의해서 실행되어진다는 것이 교회의 사회선교의 실천에 있어서의 한계를 가져오고 있다. 그러나 사회복지선교는 기존의 단순한 이웃사랑의 개념을 훨씬 뛰어넘는 다각적인 방법으로 이웃을 섬기를 체계를 만들어 주었다. 이는 기독교정신만을 고수하여 이웃사랑의 근거를 성서에서만 발견하려는 보수적인 신학을 뛰어넘고, '인간화'를 지향하는 모습으로 발전시키는데 커다란 공헌을 한 것이다. 빈민선교운동을 통한 예수의 실현이라는 신학으로 출발한 민중교회와 나눔의집은 가난한 민중을 돕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민중의 가난에 동참하는 모범적인 사회선교 형태를 보여주었다. 아울러 현재의 복지선교의 교회는 이웃의 문제를 진단하고 이를 성서적으로 풀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 이는 저마다의 시대의 흐름 속에 선교의 과제를 어떻게 실행할 것인가에 대한 신학적인 고민을 보이고 있으며 교회 스스로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몰트만은 이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신학이 없는' 사치선교(Diakonie)는 참여한 단체와 개인 전문가들의 사회사업으로 전락한다. 그렇게 되면 사회선교는 성서적인 기원과 목표가 불확실해지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대적인 인간상들에 의존하게 된다. '사회선교가 없는' 신학은 하느님께 받은 사랑을 교회를 통해 세상에 계속 부과하려는 살아 있는 증거를 상실한다. 교회란 자신의 내적인 행위 자체로 존재하지 않고, 이웃에게 다양한 은혜를 베푸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재 아래 사회선교는 그 스스로의 신학적인 물음을 통하여 지속적인 거듭남을 해야 할 것이다. 세상은 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세상에 봉사하기 위해서는 교회도 변화되어야 한다. 이는 세상의 변화에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변화를 주도해야 한다. 그래서 세상에 봉사하는 교회로, 평화를 실현하고 인간화를 실현하는 교회로, 아울러 하느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는 교회로 세상의 변화를 주도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이 둘에 대한 부족함이 있거나 한쪽으로 기울어질 때 교회는 제 역할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는 교회의 사명이자 선교이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민중의 눈에 비친 그리스도는 교회와 상류사회에 고착되었기 때문에 민중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이유가 없다고 전제하면서·‥고난에 참여하는 교회는 '거룩하신 하느님'을 증거하기에 앞서서 '이웃과 함께 고난 당하는 예수'를 몸소 실현하는 일에 헌신하여야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세상의 고난은 우리에게 해결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참여를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끊임없이 묻고 있다. 이러한 역사의 현실에 교회는 '자기비움'과 '자기버림'을 통한 하느님의 사역에 동참해야 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선교' 신학은 사회선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선교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교회가 하느님의 도구로서 존재할 때 교회는 '하느님의 선교'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고, 교회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회선교는 교회의 치장물이 아니다. 사회선교는 교회의 본질적인 내용이자 표현이다. 그러므로 모든 기독교인들은 사회선교의 현장에 동참해야 한다. 섬김의 장(場)을 지니지 못한 기독교인들의 사랑 운운은 말장난일 수 있다. 기독교인들은 사회구조적인 면만 강조하느라, 개인의 구체적인 섬김의 사회행위를 유보해서도 안 될 것이고, 개인의 사적인 사랑의 실천만 강조하느라, 사회구조와 얽혀 있는 현실문제의 복잡성을 안이하게 처리해서도 안 될 것이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교육하는 것을 자랑하지 않는다. 병원에서 환자를 고치는 것을 자랑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존재의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교회에서 스스로의 사회선교를 음지와 양지에서 드러내고 있다. 이는 본래의 교회 사명을 망각하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 수 없다. 결론적으로 교회는 그들의 구성원들 가운데 존재하는 일반 분야의 전문가들을 사회선교의 방향을 설정하고 실행하는 데 동참시켜야 한다. 이로써 교회는 모든 이들에게 사회선교의 기회를 부여함과 동시에 보다 열려 있고 이성적인 사회선교를 추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들의 사회선교에 대한 관심이 일시적인 현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신앙적·신학적 기반 위에 철저히 근거하여 주도 면밀하게 수행됨으로써 한국교회들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하느님의 선교'를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느님의 집’에 대한 주석적 고찰 : 에제 43,1-9을 중심으로

        김성범 광주가톨릭대학교 대학원 2013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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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집이라는 구체적인 장소에서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 더 발전된 삶을 살기 위한 재충전을 한다. 이 장소는 가족이 모여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누며 놀기도 하고 잠을 자는 중요한 휴식처이다. 이처럼 인간에게 정신적‧육체적 재충전의 공간인 집이 있다면 현재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영과 육이 함께 발전해 나가는 재창조의 공간인 ‘하느님의 집’이 있다. 이곳은 구약의 이스라엘 안에서 발견되고 이후 그리스도교 문화가 발전한 유럽 안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세상 안에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느님의 집’은 영적인 성숙을 이루는데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 ‘하느님의 집’은 과연 무슨 의미가 있기에 과거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예배의 중심이 되고 있는가? 그리고 현재를 사는 인간은 과연 이 ‘하느님의 집’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본 연구는 이러한 물음들에 답하기 위해서 몇 가지의 작업들을 해보았다. 에제키엘 43장 1-9절의 내용을 중심으로 연구를 전개하였는데, 연구 내용은 크게 2부분으로 진행되었다. 1장은 구약성경에서 나타나는 집을 바이트(תיב), 헤칼(לכיה), 미케다쉬(שׁדקמ), 코데쉬(שׁדק), 마콤(םוקמ)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를 중심으로 먼저 분석한다. 이어서 ‘하느님의 집’의 기원에 대한 전승을 연구하면서 본격적으로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의 집’의 의미를 고찰한다. 여기서 특징적으로 하느님의 집을 세 관점에서 접근한다. 먼저 오경은 스켐, 베텔, 마므레, 브에르 세바 성소를 차례로 열거한다. 이러한 성소는 아브라함과 이사악 그리고 야곱으로 이어지는 창세기의 내용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성소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가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창세기는 아브라함이 이 성소들의 건립자로 보았고 그를 계승해서 이사악과 야곱이 그 성소에서 제사를 지내고 하느님을 뵙게 되는 신적 체험을 하게 되었음을 보도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베텔에 대한 전승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전승 그룹의 차이를 통해 베텔에 관한 두 전승층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 열왕기의 본문에 나타난 ‘하느님의 집’은 솔로몬의 성전 건축, 성전을 통한 다윗 왕국 전통의 계승, 예루살렘 성전으로의 중앙 집권화, 임금국의 분열로 인한 성전 의미의 상실 등의 내용으로 정리할 수 있다. 여기서 드러난 성전은 이제 더 이상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본래적 기능을 상실한 장소로 묘사된다. 이러한 부정적인 상황에서 그곳에 계신 하느님의 현존마저 떠나가시는 모습을 목격한 에제키엘은 ‘하느님의 집’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극적인 필치로 묘사한다. 에제키엘서에서 나타난 ‘하느님의 집’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로운 신학적 출발점이 된다. 에제키엘을 통해서 성전에 하느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현존의식이 강화되고 임금국의 분열로 퇴색되고 변질된 성전이 다시 예배의 중심으로 자리매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에제 43,1-9의 내용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에제 43,1-9에 대한 1장과 2장의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신학적인 메시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에제키엘서 안에서 과거 하느님의 영광이 떠났던 그 방향으로 다시 돌아오시는 하느님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복귀는 하느님의 집에 ‘당신의 현존’과 ‘영광’이 온전히 스며들어 구체화된 상태를 의미한다. 하느님의 돌아오심은 당신의 기억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으신 계약을 이행하기 위한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분은 늘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그들 가운데에 계셨고 ‘하느님의 집’에 영원히 머무르시겠다는 것으로 그 기억을 이행하신다. 또한 이 ‘하느님의 집’은, 주님을 고대하는 많은 예언자들과 유다인들의 뿌리를 이어받아 자신의 주체성을 지켜온 이들의 정신이 늘 생생하게 남아 있던 자리이다. 이렇게 조화된 정신의 총화가 이제 이 시대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전달되어야할 ‘새로운 시작’을 열어준다. 마지막으로 이사 30,18은 구원의 때를 기다리는 이들의 행복에 대해서 언급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기다림은 내적인 정화이고 ‘하느님의 집’에 머무는 이의 자세가 담겨있다. 한참을 방황하다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생각하게 되는 그 시점에서 기다림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간에 이루어지는 약속이 된다. 에제 43,1-9은 구원의 때를 이스라엘인들에게 마련해 주려고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전함으로써 그분이 머무르실 곳은 예루살렘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드릴 ‘하느님의 집’이 그곳에 있음을 알린다. 그리고 구원은 바로 그곳에서 시작됨을 말해준다. Human beings lead their own lives and recharge their batteries to live better lives in the concrete place, the house. This place is an important resting place where one has a meal with one’s family, talks with them, plays and sleeps. If one has the house where they can recharge their batteries spiritually and physically, we have ‘the House of God’ where the spirit and the flesh can be improved together and be remade at the present day. This is found in Europe having developed Christian culture after having been found in Israel in the Old Testament era. ‘the House of God’ is an important place for Christians preaching the word of Christ and living out the word of Christ in the world to mature spiritually. If so, what does ‘the House of God’ really mean? And why is it constantly becoming the center of worship from the past and the present? And how do human beings living in the present accept ‘the House of God’? The author did some of the jobs to answer these questions. The author developed this study into two chapters focused on the Book of Ezekiel 43,1-9. In Chapter Ⅰ, the author analysed the house in the Old Testament first based on the Hebrew words, ‘Bayith’, ‘Hekhal’, ‘Miqdas’, ‘Qodes’, ‘Maqom’. Next, the author studied the transmission about the origin of ‘the House of God’ and considered the meaning of ‘the House of God’ in the Old Testament in earnest. Now the characteristic of ‘the House of God’ was approached from three viewpoints. First of all, in the Pentateuch, sanctuaries such as Shechem, Bethel, Mamre and Beersheba are enumerated in order. These sanctuaries can be found in Genesis leading to Abraham, Isaac and Jacob. And the author can guess how these sanctuaries were connected. It is specified in Genesis that Abraham built these sanctuaries. It is reported in Genesis that Isaac and Jacob having succeeded Abraham sacrificed to God and experienced the divine experience seeing God. It is distinctive that the transmission about Bethel is different. The author could guess there are two transmission groups about Bethel through the differences of transmission groups. Summing the meaning of ‘the House of God’ up in the Book of Kings, the author organized the contents such as Solomon’s temple construction, the tradition succession of David Kingdom through the temple, the centralization of Temple of Jerusalem and the loss of the meaning for the temple owing to the division of the kingdom and so on. The temple is not the place where one worships any more in the Book of Kings. Ezekiel seeing that God was leaving there in the negative situation described how to think about ‘the House of God’ dramatically. ‘The House of God’ in the Book of Ezekiel was a new theological starting point to the Israelites. That’s because the awareness that God is with them in the temple has strengthened through Ezekiel. And that’s why the faded and degenerated temple owing to the division of the kingdom has became a center of worship again. The contents of the Book of Ezekiel 43,1-9 based on these information are applied to us living in the present. So the author will propose the theological messages as follows based on the results of the study about the Book of Ezekiel 43,1-9. It is described that God returned to the direction of the glory of God having left in the Book of Ezekiel. And this return means that the existence and the glory of God were fully permeated in ‘the House of God’. God’s return doesn’t just mean that God would fulfil the covenant with the Israelites through God’s memory. Wherever they may be all the time, God was with them and God promised God would stay in ‘the House of God’ forever to fulfil the memory. In addition, ‘the House of God’ is the place where the spirit of many prophets looking forward to God and people taking over Jews’ roots to keep their own identities remained vividly all the time. Now this spiritual harmony inaugurates ‘A new beginning’ to convey to Christians in this period. Lastly, happiness of those who look forward to the time of redemption is mentioned in the Book of Isaiah 30,18. The wait in the Book of Isaiah 30,18 is the internal purification and attitudes of those who stay in ‘the House of God’. When one wanders for a long time and think where one has to be, the wait is not an unilateral promise but a mutual promise. By preaching the mercy of God that waits to prepare the time of redemption for the Israelites in the Book of Ezekiel 43,1-9, it is told that Jerusalem is where God stays and there is ‘the House of God’ where the Israelites worship in the Book of Ezekiel 43,1-9. And it is told that the redemption begins at that very place, Jerusalem.

      • 죄와 그 영향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

        이찬홍 光州가톨릭大學校 大學院 2003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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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는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죄는 인간이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과 평화를 파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우리의 삶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인간에게 슬픔과 아픔을 주는 부정적인 것이다. 이러한 죄는 인간의 나약함에서 비롯된다기 보다는 인간의 욕망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끊임없이 자신의 이익과 쾌락을 탐하는 마음과 이에 동의를 이룬 행동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이러한 절제되지 않는 욕망에 외부적인 유혹이 오면 더욱 쉽게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을 편리하게 하는 문명이 발달할수록, 그리고 물질만능과 쾌락주의, 자본을 인간보다 우선시하는 매스컴의 발달이 가속화 될수록 우리는 더욱 쉽게 죄를 체험한다. 하지만 죄를 체험할수록 인간의 마음은 점점 무디어져가게 되어 죄를 지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채 살아가게 된다. 죄에 대한 올바른 의식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죄에 대한 감각이 상실되어 간다. 그리고 세속주의가 인간 삶에 깊이 내재함에 따라 과거에는 분명하게 죄로 인식되던 것들이 오늘날에는 죄가 아닌 것으로 여기게 된다. 아니 오히려, '인간의 감정의 솔직한 표현이다.' '이런 것이 현 시대의 흐름이다.'는 말로 정당화 되고 있다. 따라서 죄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절실하고 시급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왜냐하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인간이 지닌 자유를 극대화시키거나 행복한 삶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지닌 고유한 가치와 존엄성을 져버리는 행위이고 무시해 버리는 처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감각기능으로만 살아가는 동물과는 다르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의 단일체인 존재이기에 자신의 양심과 의지를 거스르는 행위를 했을 때는, 그 화살이 자신에게 되돌아옴을 분명하게 체험한다. 죄는 먼저 자신 안에 불안, 분열을 일으켜 자신 스스로의 평화로운 삶을 파괴한다. 그리고 이러한 파괴는 한 개인 안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웃과의 친교를 파괴한다. 즉 자신의 죄와 잘못을 합리화시키려는 마음에서 이웃의 단점, 실수, 잘못 만을 보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자신의 이웃과의 일치, 친교적 삶을 이루지 못한 인간은 하느님과의 관계 역시 올바르지 못하게 된다. 왜냐하면 자신 안에 갇혀 버려 사랑과 화해로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거부해 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죄는 죄 자체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범하는 사람의 내면 안에, 그리고 삶 안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영향을 거부하면 할수록, 그리고 죄의 영향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같은 죄의 또 다른 경험만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죄는 솔직하게 인정하고 고백하며, 하느님과 이웃과의 단절된 사랑의 관계를 다시 회복시키는 화해가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 가르치는 인간의 최고의 선, 행복은 바로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이다. 즉 자신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고, 하느님과 함께 호흡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에 그리스도교에서 죄와 죄의식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을 억압하기 위해서가 아니요, 또한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어서는 더더욱 아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용서받아야할 인간임을,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여 용서와 치유를 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죄와 죄의식에서 벗어나야 하고, 실제로 극복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스스로 자신을 들어올릴 수 없고 하느님의 은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는 인간이 나약함을 의미 한다기 보다는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 되었기에 본성상 하느님을 그리고, 하느님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도출되는 결론이다. 따라서 죄와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자유롭고 참된 행복을 누리며 살기 위해서는, 삶의 전환인 회개와 죄를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 노력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매순간 삶의 방향을 전환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회개와 양심성찰이라 한다. 즉 먼저 참된 회개를 통해 삶의 중심을 올바로 세우고, 죄를 극복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와 매일의 양심성찰을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삶의 의미와 목표를 하느님 안에 두고, 그 안에서 완성을 이루는 노력이 절실히 요구된다. 왜냐하면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거룩함에 대한 뜨거운 열망이 없으면 쉽게 죄인이 되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느님께 삶의 의미를 두는 것을 귀의라 한다. 귀의는 자신이 한계와 무능함을 깨닫고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유스러운 의지의 결단으로, 성모님처럼 "네"하고 응답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께 귀의한 사람은 자신의 삶의 의미와 가치가 새롭게 변화되었음을 체험하게 된다. 그리고 "산들이 밀려나고, 언덕들이 무너져도, 나의 사랑은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이사 54,10)라고 말씀하시며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느끼게 한다. 이 체험은 어느 한 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온 생애를 걸쳐 조금씩, 그리고 새롭게 다가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체험을 맞보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귀의를 해야만 하고, 또한 참된 귀의에 이르기 위해서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죄를 극복해야만 하는 것이다. What is sin? First of all, sin is Human locust that destroys delight and peace in God. That is, it is contradictory thing which gives sadness and sickness to humans at the same time as being involved closely with our life. These sins are the result of human desire more than in human slackness. It is action that accomplish agreement here upon with mind that covet own profit and luxury constantly and is detected concretely. External temptation is more easily criminal if come from such desire which is not resisted. Civilization that makes human comfortable in its develops. The development of mass communications that puts material omnipotence and Epicureanism, capital than human acceleration is changed we experience sin more easily. However, The human mind lives being not experience punishment even if commits sin because is rusting gradually. As well as we can't not do right consciousness about sin, our sense about sin is lost. I think that it is not punishment nowadays that is realized through sin clearly as in the past according as secularism dwells deeply in our human life. No, preferably, sin is justified as 'It is frank expression of human's emotion.' 'Like this thing is flowing of present age.' Therefore, right comprehension about sin is risen to serious and urgent problem. Because maximizing the freedom human beings have to do what he own wants to do or not to do guides us to happy life. Preferably, it is action that give the peculiar value and dignity that human actions have. A human is different from an animal which live by sense. Human experiences when action opposes own conscience and will as is existence that is flesh and spirit's unity clearly that the arrow comes back to own. Sin destroys peace inside oneself first, cause polarization and destroys own peaceful life. And these breakdowns don't end in the individual, but destroy intimate friendship in one's own circle. That is, one sees neighbors' shortcoming, a mistakes, and mistake in mind to rationalize one's own sins and mistakes. Human who do not attains life's harmony with one's own neighbors and intimate friendships and furthermore right relations with God. Because they have kept and have refused God who approachs by love and reconciliation in oneself. Therefore, in a person's heart where sin is through sin itself, exert important effects inside our life. Refusing this effect, another experience of same sin as is going to escape in effect of sin. Reconciliation demands that sin be forgiving restores again relationship of love which is recognized honestly and confessed, and with God and neighbor. This is required desperately. Human's lives best meditation, happiness which teach in Christianity is life that do with God justly. That is, feel God's actual existence in one's life, and breathe with God and live. Because human must forgive because our existence must receive pardon and healing by repenting our own mistakes. Everybody must escape sin and sense of guilt, and should be overcome actually. God's favor is needed absolutely without which we can't doing overcome sin. But, miss original nature God because human was created to God's young rice plant, and because is existence that form relation with God and live. Therefore, to escape sin and guilt complex, and to enjoy free and true happiness in modern society and live, we need effort that wish to overcome sin by repentance and conversion of life. This effort changes the direction of life the at every moment in our relation with God, live. These things are known as repentance and examination of conscience. That is, first, keep a balance in life through faithful repentance uprightly, and we need effort to make a relationship with God through a strong will and an examination of conscience every day to overcome sin rightly. And effort that turns the meaning and object of life to God, and accomplishes completion in this is urgently required. If there is not an ardent wish about holiness and holy with love of God, because have become criminal easily. That puts the meaning of life to God and is known as devotion. Not that devotion realizes this it is incompetent by oneself and is obliged to consist, by a decision of own free support, respond "Yes" like Holy Mother. A person who embraces God experiences the meaning and value of one's own life has changed newly. And gives God who approachs us saying that is "for the mountains may depart, the hills be shaken, but my love for you will never leave you"(Isaiah 54, 10). Not that this experience is completed at the moment that we do what we can do but extends and advances gradually into new life. We must embrace God to experience this experience, and we must overcome sin that ruptures relationships with God and thus arrive at true devo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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