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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高麗時代 打出工藝品 硏究

        김은애 弘益大學校 大學院 2003 국내석사

        RANK : 248703

        打出(repousse´)은 금속판의 안팎에서 釘과 망치로 두드려 도드라진 문양을 표현하는 것으로써 入絲와 함께 고려시대 금속공예의 대표적인 장식기법이다. 이는 본래 사산朝(Sasanian, 224∼651)에서 발달한 것이나 중앙 아시아를 거쳐 중국 唐代에 발전하였으며 이후에는 宋·遼, 특히 燕雲16州(河北, 山西 北部)를 차지하고 漢族의 官制와 文化를 흡수한 遼가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따라서 삼국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타출이 고려시대에 갑자기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은 당시 遼와의 긴밀했던 관계가 주목된다. 본 논문의 목적은 타출공예품의 전반적인 고찰을 통하여 고려시대 금속공예의 발전 양상을 알아보고 遼와의 대외교섭 정황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打出' 의 용어는 근래에 붙여진 것으로 이는 사산조 이란에서 발달하여 중국, 우리나라에 전해졌기 때문에 각국에서 부르는 용어가 아직 통일되지 않았다. 또 한 타출기법에 관한 문헌자료도 전하지 않아 당시에는 어떤 단어로 불리웠는지 알 수 없지만 「高麗史」중 國信物에 대한 묘사 기록을 통하여 '鏤', '鈒' 이 '起突', '滿' 字와 함께 표현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우리나라의 전통 장인들은 '高刻' 과 '肉刻', 흑은 더 입체적인 것은 '高肉刻' 으로 도드라진 문양의 표현기법을 일컫기도 하며 현재는 일본과 같이 打出로 통용된다. 우리나라 타출공예품의 이른 예는 백제 무령왕릉 출토의 <金製뒤꽂이>와 신라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된 <銀製盞>, <金製팔찌>, 그리고 식리총의 <金銅飾履>를 들 수 있다. 이 유물들은 타출의 낮은 단면에서 벗어난 수준을 보이며 신라의 경우에는 사산조 이란과의 관계에 대한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통일신라시대에는 舍利器를 중심으로 魚子文기법과 함께 간략적으로 타출을 표현하였다. 그러나 고려 文宗 年間(1047∼1082) 중심의 11, 12세기에는 「高麗史」의 國信物 품목에 대한 언급을 통해 宋·遼와 많은 은기를 주고 받았던 것이 확인되었다. 더욱이 「宣和奉使高麗圖經」(1123)의 기록에 의하면 遼의 기술자가 관영수공업에 투입되었다고 전하므로 遼의 타출기술이 고려에게 영향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高麗史』 卷16(仁宗2年, 1129)에서 고려인들이 신분의 관계없이 사치하고 거란의 풍속을 본받아 고치지 않는 한탄의 내용에서도 알 수 있었다. 즉 12세기를 중심으로 遼의 영향 아래 高肉刻의 타출기법이 발전하였으며 이는 남아 있는 유물의 종류와 문양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현재 확인되는 고려 타출공예품은 약 40여건이며 대부분 銀製鍍金에 高肉刻으로 표현한 것이 주류를 이룬다. 이것은 좋은 탄성력을 지닌 銀이 金에 비해 값이 저렴하고 銀所를 통한 銀의 공급이 풍부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타출공예품은 일상용구(식기류·화장용구·장신구)와 불교용구(경갑 및 향합·불감)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이 중 장신구인 팔찌, 裝刀, 과대 및 교구와 불교용구인 경갑 및 향합 종류가 많이 전한다. 이는 곧 타출이 실용적인 것보다 장식적인 器物에 보다 폭넓게 응용된 것을 알 수 있으며 당시 수요층도 상류계층인 왕과 귀족들이 향유했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12세기에 발전한 타출기법의 특징은 高肉刻으로 타출된 단면이 높고 오메가형[Ω]이다. 銀製鍍金에 打出한 瓢形甁의 경우에는 금속판의 안쪽에서 두드린 뒤, 다시 바깥쪽에서 그 여백면을 눌러주는 방법으로 나타내었다. 더욱이 세부는 陰刻으로 세밀하게 표현하여 전체적인 문양이 마치 따로 떼서 붙인 것처럼 입체적이다. 이외에도 국립중앙박물관의 經匣를 보면 半鑄造로 만든 틀 위에 판을 덧댄 뒤 두드리는 압출기법으로 제작하였으며 몇몇 사례에서는 동일한 釘의 사용도 확인하였다. 일부 器皿을 중심으로 타출이 응용된 宋과는 달리 遼는 여러 종류에서 높은 단면의 타출기법을 나타내어 고려와의 연관성이 보였다. 표형병의 기형은 遼에서 원류를 찾을 수 있는 것으로 고려는 高肉刻의 타출표현과 함께 매와 같이 큰 코에 양날개끝이 둥글고 긴 꼬리가 없는 봉황을 독특하게 표현하였다. 팔찌와 裝刀에 표현된 海棠花紋(菱形紋)이나 타원형의 葵花紋은 元代 유행 이전에 遼의 영향으로 성행하였음을 추측하였다. 경갑 및 향합은 유목민족인 遼의 영향으로 신라 시대에 존재했던 요패장식이 새롭게 재등장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고려는 遼의 花形 盒과 달리 方形과 圓形을 이루며 연꽃을 잡고 있는 동자들을 원앙, 오리, 학과 함께 배치하는 주체적인 수용과정을 나타내었다. 또한 원앙과 오리의 많은 표현들은 당시 유행했던 蒲柳水禽紋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었다. 국립춘천박물관 소장의 香盒은 遼代 河北省 宣化區 張文藻(1029∼1074)墓의 벽화와 유사하면서 배경이 야외로 바뀐 모습이며 여기서 출토된 <木製鏡架> 역시 국립중앙박물관 <金銅製거울걸이>와의 관련성을 확인하였다. 이외에도 표형병과 팔찌, 裝刀는 유사한 타출표현으로 셋트제작되고 하나의 고분에서 동반출토된 유물이었음을 추정하였다. 고려시대 후기에는 元에 의한 수탈과 銀의 부족, 도자기의 본격적인 생산으로 타출단면이 낮아지고 점차 줄어들었지만 고려 말의 불감, 사리기와 조선 초기의 기록을 볼 때 金銀器는 계속 제작된 것으로 판단되었다. 조선시대 이후에는 많은 타출공예품이 보이지 않지만 법주사 팔상전의 舍利具와 金銅받침(1605)이 전하는 것으로 볼 때 타출기법의 명맥은 계속 이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고려시대의 高肉劑 타출은 이전시대부터 있었던 타출이 唐의 문화를 계승한 遼의 영향에 의해서 본격적인 장식기법으로 이루어졌으며 당시 뛰어난 수준의 금속 공예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앞으로 고려와 遼의 문화교류를 알 수 있는 타출공예품이 더 발굴되기를 기대하며 더 나아가서는 고려와 遼의 관계가 새롭게 재조명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This study aims to examine the development of metal artefacts of Koryo˘ period through general investigation of repousse´(打出) artefacts. Also to figure out international negotiation conditions between Koryo˘ and Liao(遼). Repouss6, a representative method of metal artefacts in a ornament method that expresses plastic design through hitting inside and outside of the metal plate by a chisel. This was generated in Sasanian(사산朝) in the first place, than after via mid-Asia got later developed in Tang(唐) period. After that Song(宋) and Liao, especially Liao which adopted Han's(漢族) system and culture and dominates Yeonun sixteen province(燕雲16州) agressively adopted repousse´. Therefore state that repousse´ which had existed before Three Kingdom was notable in Koryo˘ is related with the close relationship between Koryo˘ and Liao at the time. 'Repousse´' is a term recently used. As repousse´ appeared in Sasanian at first than went through mid-Asia, China and later was introduced to Koryo˘ the term wasn't unified at that time. In addition, there isn't any precedent record about the term so it's hard to reveal the word that was used for the term at the day but through description of guksinmul(國信物, offical barters between countries) from Koryo˘sa(「高麗史), Histories of Koryo˘) the fact that the word 'lu(鏤, engrave)' , 'sab(鈒, engrave)' was expressed with 'gidol (起突, projection)' , 'man(滿, full)' was presumed. Korean traditional craftsmans used .the term 'gogak(高刻)' , 'yukgak(肉刻)' or 'goyukgak(高肉刻)' for three emboss design method and now repousse´ is commonly used in Korea and Japan. First, gold-hairline(金製뒤꽂이) excavated from the Paekjae's Muryo˘ngwang-nung(백제 무령왕릉), silver-cup(銀製盞), gold-bracelet(金製팔찌) excavated from the Hwangnam-Dech'ong(皇南大塚) and gilt-bronze shoes(金銅飾履) of Shingni-ch'ong(飾履塚) are considered as artefacts that were attempted a precedented method of repousse´. These remains show the level beyond repousse´ of low section and provide important records about relation between Silla and Sasanian. During Unified Silla period, sari-ra case(舍利器, Buddha's bones vessel) was briefly presented with ring punched ground(魚子文) method. But after that in the time of Munchong(文宗, rgn. 1047∼1082) in 11th and 12th century, many records of guksinmul from Koryo˘sa prove that Koryo˘ interchanged lots of silver vessel with Song and Liao. Furthermore according to the record of Seonhwabongsakoryo˘dogyong(「宣和奉使高麗圖經」) Liao artisans were ordered in Government Industry(宣營手工業) so it's regarded that Liao's repousse´ craft had influenced Koryo˘. This could be confirmed from the content of Koryo˘sa volume16 that Koryo˘ people regardless of their social positions adopted Kitan(契丹) way of life and indulged in luxury. So We could find out that Koryo˘ repousse´ mathod of goyukgak and this could be confirmed by kinds and design of remains. Up to now about 40 items of Koryo˘ repousse´ artefacts are discovered and most of them are presented by gilt-silver with goyukgak. This is due to lower price of silver than gold and it's elasticity which was suitable for manufacture and silver mines made sufficient supply of silver. Repousse´ artefacts classified into things of daily necessity(tab1e waresㆍpersonal ornamentsㆍmake-up set) and things of Buddhism(sutra boxesㆍincense boxesㆍshrine), especially bracelet, knife case and belt ornaments which are personal ornaments and sutra boxes(經匣) and incense boxes(香盒) which are mostly found in Buddhism. Judging from these, we can figure out that repousse´ was not applied at practical things but demanded greatly by king or the nobility as an ornament. Characteristic of repouss6 method of goyukgak developed in 12th century is the method that hits inside of a metal plate and presses the outside of the design which can be found at gilt-silver repousse´ the bottle gourd. Intaglio presented minute parts. Unlike Song that applied repouss6 to same vessels, Liao used various sorts of repouss6 method of high section and presented the relevance to Koryo˘. The bottle gourd could find its orgin from Liao and Koryo˘ which presented a Chinese phoenix that has big nose like a falcon and wings with rounded tip without a long tail in a unigue way. Sutra boxes and incense boxes prove the reappearance of belt ornaments that existed in Silla under the influence of Liao. Koryo˘ indepently accepted it by arranging children who are grabing lotus flower in squre and round shape with mandarin ducks, ducks and cranes. Gilt-silver the incense box from National Museum of Chuncheon has the similarity with the wall painting from the tomb Jangmunjo in Hubei country (河北省 張文藻墓). The fact that made wood mirror-stand which was excavated from the same place has relevancy to gilt-bronze mirror-stand from National Museum of Korea could also be confirmed. Besides, a set of the bottle gourd, bracelet and knife case were manufactured with similar repousse´ presentation and assume that they were the remains excavated from the same tomb. In the late Koryo˘, although repousse´ section got lowered by the exploitation by Yu¨an, shortage of silver and full-scale manufacture of pottery, judging from shrine and sari-ra case in the late Koryo˘ gilt-silver case was produced continously. After Choso˘n(朝鮮) period, a number of repousse´ artefacts can't be seen from gilt-bronze sari-ra case of Beopjusa(法住寺, a temple of Beopjusa) tells that repouss6 method was used continually. Repousse´ which had existed before Koryo˘ periodd developed into full-dress ornament in Koryo˘ under the influence of Liao that succeeded to the culture of Tang and it showed high level of metal artefacts. More examine of repousse´ artefacts should be conducted to examine the cultural exchange between Korybo˘ and Liao and continous interest from various field of art history is required to shed a new light on the relation between Koryo˘ and Liao.

      • 고려시대 단청에 관한 연구

        이은희 명지대학교 대학원 일반대학원 2015 국내박사

        RANK : 248703

        본 연구에서는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한국 단청을 이루는 구성 요소들이 형성되고 변화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고려시대 건축은 고려전기 귀족 취향의 건축과, 무신집권기와 원 간섭기라는 사회변화를 지나며 변모한 고려후기 건축으로 대별된다. 이에 본 연구는 고려시대 사회적인 변화와 이에 따른 건축의 변화 속에서 단청의 변천과정에 주목하여 단청 양식의 변곡점을 역사적 맥락으로 규명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단청의 구성을 크게 네 가지 요인으로 구분하여 분석한 후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첫째, 고려시대에 단청의 ‘색조’가 변화하는 것이다. 단청 바탕에 칠해지는 색은 그 자체로 가칠단청이 되고, 모로단청이나 금단청의 바탕칠이 된다. 따라서 바탕칠의 색조는 건물의 인상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따라서 고려시대 상록하단이 사용되기 시작한 이후의 건축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니게 된다. 기존의 단청 바탕색에 관한 인식은 기둥 등의 수직부재는 붉은 색으로 칠하고 기둥 이상의 부재에는 녹색으로 칠하는 이른바 상록하단의 기법을 사용하는 것을 한국 단청의 특징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 고려시대 전후의 단청 색조를 시대와 지역별로 살펴본 결과 상록하단의 기법이 적용된 시기는 고려시대 후반 13?14세기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고려시대 건물 중에서 봉정사 극락전은 기둥 상부 부재에 붉은색 안료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상록하단 기법이 적용되기 이전의 양식으로 보인다. 둘째, 고려시대 기둥 단청에서 ‘주의초’의 사용이 정형화되는 것이다. 10?12세기 기둥의 장식에는 당초문, 속련문, 당초원문, 능화문 등으로 기둥 전체를 장식하거나 기둥을 천으로 감싸는 등 다양한 방법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기둥을 장식하던 다양한 기법은 점차 사라지고 기둥 상부만을 장식하는 주의초 사용이 확대된다. 즉 주의초는 기둥을 비단으로 감싸는 것에서 기원하여 문양으로 변화한 것이다. 고려시대 주의초 사용의 가장 이른 예는 봉정사 극락전으로 상부는 여의두형으로 하고 하부는 탁의주의형으로 하였다.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면 주의초는 드림장식이 문양으로 변화한 드림주의, 머리초 문양을 주문양으로 한 머리초주의 등이 사용된다. 고려시대 단순한 형태의 탁의주의는 조선시대에 이르면 녹화, 주화, 늘휘 등과 결합한 형태로 변화하게 된다. 셋째, 고려시대 단청에서 ‘머리초’의 사용이 일반화되는 것이다. 단청의 머리초는 각 부재의 끝머리에 넣는 문양으로, 머리초가 있는 단청을 모로단청이라 한다. 머리초는 고대건축의 금속 장식구에서 그 형태가 문양화한 것으로 가장 시원적인 형태의 머리초는 거치문과 각엽문의 형태이고 고려시대에 이르면 여의두문 머리초로 변한다. 봉정사 극락전과 수덕사 대웅전에 남아있는 창건 당시의 단청으로 추정되는 머리초는 고려시대 여의두문 머리초가 점차 현재 단청의 윤곽선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잘 보이고 있다. 고려시대 이후 머리초의 내부 구성에는 시대별로 크고 작은 변화가 있지만 윤곽선은 고려시대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머리초 윤곽선의 완성된 형태는 고려시대에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넷째, 고려시대에 휘장 장식이 ‘錦紋化’되는 경향을 보인다. 단청에서 금문은 머리초와 머리초 사이 界風을 주로 장식하는 문양으로, 錦丹靑에서 가장 중요한 문양이고, 또한 단청이 가지고 있는 장식적인 특징을 가장 잘 표현하는 문양이기도 하다. 고려시대 이전에도 금문은 단청의 문양으로 사용되었지만 계풍에 금문을 가득 채우는 금단청의 시원적인 형태는 휘장 장식이 문양화 되면서부터이다. 비단으로 목부재를 장식하는 기법은 그 기원이 오래되었고 고려시대까지 휘장이나 장막이 사용되다가 실내를 장식하는 기법이 변화하면서 점차 단청의 문양으로 남게 되었다. 본 연구는 크게 단청의 색조와 문양이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 변화되는 시점을 고찰하였다. 단청 색조의 사용에서 보면 고대 건축의 색조가 현재의 단청과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고 그 변화되는 시점이 고려시대였음을 규명하였다. 문양의 관점에서 보면 고대 건축의 장엄에 사용되었던 기법들 중 기둥을 비단으로 감싸는 기법 및 금속 장식구의 사용과 휘장으로 목부재를 꾸미던 기법들이 고려시대에 문양으로 변모하여 정형화되거나 일반화되는 경향을 나타내는 것을 밝혀내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즉 조선시대 단청에서 주요한 문양으로 사용되는 머리초와 금문의 원류는 고대 건축을 장엄하는 것에서 유래하였으며 고려시대라는 변곡점을 지나 현재에 이르게 된 것이다.

      • 高麗時代 勸農政策 硏究

        이정호 高麗大學校 大學院 2002 국내박사

        RANK : 248703

        고려시대 농민의 생산활동은 國家 혹은 田主에게 납부되는 田租의 형태로 구현됨으로써, 국가의 財政運營 및 전주의 地主制運營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생산된 穀物가운데 하나인 米穀은 관리에 대한 祿俸支給에 사용되고, 각종 褒賞穀으로 운영되며, 軍需穀으로 이용되는 등 국가운영에 필수적인 요소로 기능하고 있었다. 아울러 고려시대에 미곡은 貨幣로 기능하는 등 사회운영상의 중요성 또한 지니고 있었다. 고려시대의 주된 산업은 농업으로서, 사회의 주된 생산활동형태 및 사회·국가의 유지·운영을 위한 토대가 농민의 농업생산활동에 있었다. 한편 이러한 농민의 농업생산활동은 농작물의 재배·수확이 순환하여 이뤄지는 특성상 그 再生産을 위한 조건이 마련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려시대 농업생산활동은 대체로 영세한 규모의 토지를 소유하고, 농업도구 또한 부족한 상태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또 이 이외에도 예기치 않은 自然災害를 비롯해 과도한 租稅부담 및 力役동원 등 여러 가지 요인으로 말미암아 그 재생산구조가 파괴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국가는 농민의 생계유지 뿐만아니라 그들로부터 안정적으로 수취를 하기 위해서도 재생산을 보장해 줄 필요가 있었다. 고려시대 농업은 우선 일반민의 대다수가 농업에 종사하여 생계를 유지하고, 또 농업으로부터의 생산물이 사회·국가의 운영을 위한 토대가 된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있었다. 따라서 농업에 대한 인식 즉 農業觀은 이러한 점에 입각해 농업을 중요시 하는 重農理念으로 나타나고, 이렇게 정립된 중농이념은 勸農政策의 실시를 뒷받침하는 이념적 바탕이 될 수 있었다. 고려시대의 重農理念은 儒敎政治理念에서의 自然觀 및 災異觀과 관련을 맺는 가운데 정립되어 나갔고, 중농이념에 입각한 農業觀 역시 이러한 사상조류에 영향을 받아 나타나고 있었다. 태조에 의한 중농이념의 제시 이후 중농이념에 입각한 국정 운영은 고려시대 전반에 걸쳐 유지되어 나간 기본원칙 가운데 하나였다. 국왕의 입장에서도 重農理念의 실천이란 측면에서 勸農이 중요업무의 하나로 인식되었고, 국왕은 자신을 대신해 지방을 통치하는 地方官에게 勸農業務를 독려하는 한편 농사에 피해를 주는 자연재해가 발생할 경우 敎書의 반포, 祈雨祭·祈晴祭의 거행 등을 통해 중농이념을 재확인하고 있었다. 자연재해로 인한 농사의 피해가 발생할 경우, 이러한 피해에 대한 국왕의 의례적 행위로는 祈雨祭·祈晴祭·禳災變를 위한 노력을 비롯해 減常膳·避正殿·慮囚·放輕繫·赦·徙市·禁酒·禁扇笠 등 대체로 自省하여 修德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국왕의 행위는 유교정치이념에서의 天人合一思想에 입각한 天人感應論·天譴論 등 당시의 왕에 대한 관념, 自然觀및 災異觀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고려시대에 권농정책이 실시됨에 있어서는 각 시기의 상황에 따라 그 내용을 다소 달리하면서 전개되었는데, 건국 초기의 그것은 一面 호족 세력에 대한 통제과정이기도 하였다. 고려시대 권농정책은 太祖代에 租稅率 조정, 奴婢 還屬, 農桑 권장, 黑倉과 같은 진휼기관의 수립 등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고려왕조 자체로서도 勸農을 통한 재정 증대를 적극적으로 수행할 수 없었고, 豪族세력의 존재로 인하여 고려가 收取를 실행할 수 있는 지역이 제한되어 있는 등 국가의 권농정책이 충분한 효과를 거두기에 어려운 실정이었다. 따라서 권농정책이 실효를 거둘 수 있게 된것은 地方行政制度에 있어서 일진전이 이루어진 成宗代이후의 일이었다. 고려 중앙정부의 지방통제는 成宗 2年 12牧에 外官을 파견하기 시작한 것을 계기로 진전되어 나가고, 권농정책 역시 이러한 지방행정제도의 정비과정과 병행하여 수행되어 나갔다. 그것은 地方官에 의한 勸農業務의 수행이라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것은 고려시대에 권농정책이 실시됨에 있어서 가장 전형적인 방법이기도 했다. 成宗代에는 籍田親耕·雩祀를 고려왕조에 들어와 최초로 거행하고, 地方官에 대한 권농업무가 강조되며, 兵器를 거둬 農器로 제작하고 있었다. 성종대에 이르러 地方官에 의한 권농업무의 수행이라는 틀은 일단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文宗代에는 보다 정비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문종대에는 피해농가에 대한 糧種의 지급, 租稅감면, 농사시기인 '三時'의 배려, 諸道外官의 長에 대한 勸農使兼帶등 권농을 위한 국가의 여러 조처가 내려지고 있었다. 그리고 지방관의 권농업무에 대한 功績이 중앙정부에 보고되어 그에 대한 포상이 이뤄지기도 했다. 한편 중앙정부로부터 권농정책이 수립되고 그것이 농민 및 농업에 적용되어 실시되는 데는 중앙정부의 政策的 目的과 아울러 農業生産의 실상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었다. 농업생산의 실상에 조응하여 권농정책의 내용이 결정되는 한편 농업기술의 발달에 따른 변화는 권농정책의 시책방향을 결정하는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고려시대 主穀作物은 五穀혹은 九穀이라 칭해지고 있었는데, 이는 곡물전체를 통칭하는 경우와 다섯 혹은 아홉 가지 개별곡물을 지칭하는 경우가 있었다. 주곡작물로서 五穀혹은 九穀은 고려시대에 다수 재배되었다고 생각되는 稻·黍·稷·粟(梁)·大麥·小麥·大豆·小豆·麻 등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한도에서 정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의 경우 전체 경지면적 중 水田에 비해 旱田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고, 일반민의 식량으로 麥粟豆등 旱田穀物이 稻에 못지 않은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다. 한편 稻(米穀)는 祿俸穀·褒賞穀·軍需穀 및 交易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등 국가·사회운영에 필수적인 요소로 중요시되었다. 이처럼 稻가 고려시대의 중요곡물로 기능하게 된 것은 農業技術上의 발달에 힘입어 稻재배가 확대된 사실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고려 국가의 租稅收取가 稻 위주로 운영되는 등 國家制度的 장치 또한 稻 재배를 유도·촉진하는 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고려중기의 農業技術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이전 시기와는 다른 발전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堤堰의 보수와 신설이 활발히 진행되는 한편 河渠, 防川堤, 防潮堤 등 새로운 형태의 水利施設이 건설되고 있었다. 이러한 수리시설의 수축 과정에서는 지방관이 활발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나타나고 있었다. 아울러 수리시설의 확충은 내륙 低濕地 및 沿海地지 역으로의 農耕地 확대라는 현상과 맞물려 전개되고 있었다. 수리시설의 확충과 토지개간의 진전은, 農作法의 발달과도 어느 정도 연관된 것으로, 이시기에 이르러 常耕法이 보다 확대될 수 있는 바탕이 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고려중기는 農業技術의 발달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시기일 뿐만아니라 地方社會의 동요, 그리고 農民의 流亡, 權勢家에 의한 大土地兼倂, 광범위한 農民蜂起 등 여러 가지 사회현상이 발생하고 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 시기는 사회변화의 양상이 여러 면에 걸쳐 나타나고 있던 시기였고, 그 속에 武臣政權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가운데 특히 광범위하게 발생한 農民抗爭은 이 시기에 진행된 農業生産力의 발달, 地方制度의 문란, 地方社會의 동요 등 여러 사회변화의 결과였고, 이는 執權層내의 危機感을 조성하는 계기로 작용하고 있기도 했다. 이러한 사회변화에 조응하여 武臣政權期의 政局運營은 一面 피폐한 農民과 農村의 상황을 복구하여 農業을 진흥하도록 하는 한편 官吏制度, 軍事制度, 地方制度 등의 정상적인 복귀를 통해 國家運營을 원활히 이루어 나가기 위한 방향으로 나타나고 있었음을 살펴볼 수 있다. 고려후기에 이르러 국내외적 사정은 국가재정의 부족을 점증시켜 나갔고, 이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제대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는 가운데 일반농민층의 조세부담이 증가되어 나갔다. 蒙古과의 전쟁으로 인한 農耕地의 황폐화와 원간섭기 元으로부터의 각종 부담, 국가에 조세를 납부하지 않는 不法的 大土地兼倂의 증가 등이 국가재정의 부족을 초래하는 원인이었다. 아울러 元과의 무역을 통한 상업의 확대, 왕실·권세가·사원에 의한 상업이익의 장악, 권세가의 山林川澤 私占, 高利貸的인 방법에 의한 財富蓄積등은 농민층의 피해를 초래하고 있기도 하였다. 한편 고려후기에 있어서 洪子藩의 '便民十八事', 忠宣王代이후 나타나는 일련의 改革政治등은 사회변화로 인해 농민층의 피해가 발생하는 속에서 민생안정 및 영농의 정상화를 도모함과 동시에 정상적인 國政運營으로의 복귀를 기하는 것이기도 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고려말 역시 농민층의 피해 및 영농의 정지와도 관련된 사회문제를 해결하고자 私田□弊策및 商業□弊策이 政治勢力간에 논의되고 있었고, 이 시기 勸農政策의 실시 역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과도 관련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이상에서 본고에서는 고려시대 권농정책의 내용과 성격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얻은 필자의 결론으로는, 권농정책은 국가의 財政增大를 위한 經濟政策및 農民保護를 위한 社會政策으로서 실시되는 가운데 국가와 사회를 유지 운영하는 성격을 지니는 한편 社會變化에 따른 새로운 政局運營의 모색과정에서 그러한 變化를 조정하는 성격 또한 지니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고려시대 勸農政策은 한편으로는 당시 사회의 時代狀況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고도 생각된다. 권농정책이 국가와 사회의 유지 운영을 위해 추진되고 또 社會變化에 따른 재조정에 있어서도 기능하고 있다는 것은, 당시 사회의 狀況을 반영하여 이에 조응한 社會構造를 편성하는 데 있어서도 어느 정도 관련된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중앙정부로부터 권농정책이 추진됨으로써 국가와 사회의 유지·운영을 도모하고 있는 것은 고려시대 全時期에 걸쳐 유지되고 있는 권농정책의 기본방향이었을 것이다. 당시 사회의 주된 산업이 農業이고, 농업생산활동을 통한 농산물이 국가와 사회의 유지운영에 필수적인 요소였다는 점에서 농민 및 농업을 보호하고 농업생산의 증진을 기하는 勸農政策의 추진은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사항이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 社會變化가 점차 진행되는 과정에서는 사회와 국가를 유지 운영하기 위해서도 이에 조응한 사회 및 국가 체제의 再編成過程이 필요한 것이고, 이를 위해서 勸農政策의 추진이 요구되고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고려시대 권농정책의 내용과 추진방향에서도 엿볼 수 있지 않나 생각된다. 우선 고려전기 권농정책은 당시 사회의 상황을 반영하여 농민층의 안정이라는 기본적인 목적 이외에도 지방 豪族에 대한 통제와 地方行政制度의 정비과정과 어느 정도 연관된 가운데 추진되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 고려중기 이래 農業生産力의 발달에 따른 社會變化는 권농정책의 추진에 있어서도 이러한 사회변화에 조응하여 국가와 사회의 체제를 再整備하는 측면과 관련해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고려중기 大土地兼倂 현상, 地方社會의 동요현상, 광범위한 農民抗爭의 발생 등은 당시 사회에 있어 사회경제적 변화가 반영된 산물이었고, 이러한 사회변화의 움직임은 政治圈에서도 이에 상응하는 변화를 요구를 요구하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국가로부터 추진된 권농정책 또한 국가와 사회의 체제를 再整備하는 측면과 관련되어 모색되어 나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고려후기 또한 왕실·권세가·사원 등에 의한 大土地兼倂 및 商業活動등이 농민의 생계 및 농업생산활동을 저해하는 사회문제로 대두되는 가운데, 이에 따른 농민층의 동요 및 피폐화는 政局運營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시기에 이르러 농업생산의 증진을 위한 모색이 性理學을 수용한 儒者에 의해 國家中興의 차원에서 이뤄지는 한편 농민의 피해와 농업의 피폐화를 초래하는 '私田' 및 商業 문제가 政治勢力 간에 논의 되고 있었으며, 이 시기 勸農政策의 추진 역시 이러한 문제의 해결과도 어느 정도 관련된 것이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사회변화의 재조정에 政治勢力의 이해관계가 개재해 있고, 그 속에서 사회·국가의 유지·운영에 적합하도록 勸農政策이 수행되어 나가는 측면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 것이다. 사회변화에 조응하는 정치권의 면모는 지배층 내부 權力의 再配置로 상쇄되어 나가면서 또다른 社會構造를 형성해 나갔던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 고려전기를 비롯해 고려 중·후기에 나타난 여러 가지 社會現狀과 이에 대처해 나간 勸農政策 및 政治圈의 동향은, 사회·국가의 유지·운영을 위해 기능하는 한편 社會變化에 조응한 정치권력 및 정치세력의 再配置를 통해 새로운 社會構造를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들과 어느 정도 관련된 것이 아니었나 생각되는 것이다.

      • 高麗時代 別墅의 建築的 性格에 關한 硏究 : 古文獻 解析을 통하여

        이창업 蔚山大學校 大學院 2004 국내박사

        RANK : 248703

        본 硏究는 韓國建築史연구에 있어서 고려시대 부분이 미진하다는데 발단이 되어 연구를 진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연구 동향의 근원에는 현존하는 고려시대 건축이 몇 개의 佛舍建築과 '孟氏杏壇'이라는 주택이 유일하게 남아있는 등 實證遺構가 부족한 실정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文人이 작성한 文獻을 고찰해 보면 당시의 건축과 관련된 기록을 흔히 볼 수 있으며, 특히 別墅建築이 가장 많은 사례로 등장하는 것을 알수 있어 이것이 중요한 연구대상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본 연구는 고려시대 별서를 대상으로 하여 고려시대 건축 수법과 특성을 고찰하고자 하였으며, 이것이 본 연구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이를 위해서는 몇 가지 연구 과정이 요구되었는데, 첫째 별서의 명확한 개념과 그 유형은 무엇으로 나누어질 수 있는지를 밝히는 것이었다. 둘째 한반도 內에서의 별서가 어떻게 起源을 이루고 展開되어 고려시대의 상황을 만들어 내었는지도 중요한 연구의 기반이 될 것으로 사료되었다. 셋째 고려시대 별서의 조영수법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그를 조영하게 된 배경이 우선적으로 고찰되어야 할 일이었다. 따라서, 본 연구는 이러한 선행 작업을 토대로 고려시대 별서 건축의 수법과 특성을 밝히고자 하였다. 그리고 연구의 과정에서 밝혀지고 정리된 것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가) 別墅의 槪念 별서의 개념은 가족들이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살림집 外별도로 건립되는 起居處및 그 시설의 총칭이며, 遊興(幽興)이라는 기본적인 목적을 가지며 여가 및 퇴직 후의 휴양, 農莊경영, 은거 생활 등을 위해 건립된 건축물이고, 景勝地나 인위적인 造景과 밀접하게 관련된 건축이라고 규정하였다. 나) 別墅의 起源과 展開 우리나라에서의 별서는 古代國家時代로부터 起源이 되었음을 알 수 있었고, 특히 통일신라를 거치면서 高麗와 朝鮮時代별서의 기틀을 마련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고려시대에 들어 개체 數가 급격히 증가하고 質的인 측면에서도 이전시기와 확연한 차이를 보여 고려시대를 ‘別墅의 發達’ 시기로 규정하였다. 다) 高麗時代別墅의 造營背景 고려시대 별서의 조영배경은 그 전후 時期및 中國과 비교해 보더라도 특별한 차이점을 보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시대 별서의 조영배경 고찰이 의미를 갖는 것은 그러한 조영배경이 복합적으로 전개되어 건축적 특성을 이루는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사료되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밝혀진 고려시대 별서의 조영 배경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크게 5가지 정도로 정리 될 수 있다. 退朝後起居·隱居생활·餘暇생활·農莊經營·佛事관련 행위를 담기 위한 것 등이 대표적인데 이 중에서 특히 佛事관련 행위를 위해 조영한 별서는 고려시대 만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는 고려 사회에 있어서 儒·佛의 활발한 교류현상의 영향이 아닌가한다. 라) 高麗時代別墅의 造營手法 고려시대 별서건축의 조영수법을 고찰한 결과 입지와 대지조성, 규모와 건물구성, 개략적인 건축형식과 수법 등을 찾아 낼 수 있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別墅의 立地는 경승지로서 산지의 계곡이 선호되었으며, 입지여건은 험준한 지형조건을 가지고 있어 대지조성을 위한 특별한 手法들이 사용되었는데 대지를 削平하지 않고 축대를 조성하거나 樓亭에서는 樓下柱구조가 사용되었다. 둘째, 別墅의 規模는 사회 권력이나 경제력에 따라 다양하고, 起居處로서 堂·齋·軒, 遊興處로서 樓·臺·亭·□등의 건물로 구성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외곽에는 담장이 있었고, 方池中島型의 연못이 조선에 앞서 이미 고려시대에 조영된 점이 확인 되었다. 셋째, 별서 일곽에서 起居處와 遊興處의 배치관계는 경관대상을 향하여 樓亭을 앞에, 起居處를 뒤에 두는 일종의 前亭後堂型이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넷째, 별서 起居處의 공간구성에서 온돌방과 마루가 벽으로 구획된 사례들이 확인되었고, 별서의 평면형식 고찰을 통해 고려시대 기거공간의 지역성의 가능성을 탐진 할 수 있었다. 다섯째, 樓亭의 건축수법은 대단히 다양하여 경량 구조, 이동식, 조립식, 溪流貫通式의 실험적 시도들이 발견되고 있으며, 가공하지 않은 목재를 건축부재로 사용하여 自然美를 추구하는 사례도 나타났다. Even though great development in the researches on the history of korean architecture has been achieved since 1970's, only a few researchers have focused on the period of Go-ryeo(高麗) dynasty(11-14 century A.D.). The periodical characteristics of architecture are presumed as a developmental phase which might connect from the ancient kingdom to Jo-seon(朝鮮) dynasty. The lack of researches on the architecture of Go-ryeo dynasty is deeply related to the lack of architectural heritages construct during this period. Except a few of Buddhist temple architectures, most of architectural heritages are not remained. Most of researchers who want to study the architectural history before Jo-seon dynasty, therefore, have depend mainly on the interpretation of the old literatures. However the interpretations have not gone far beyond urban planning, royal palace, and dwellings. Actually the descriptions on the Byeol-seo(別墅) are frequently appeared in the old literatures, but very few has been either focused or interpreted. The description are believed as a key stone to rebuild the history of korean architecture. Byeol-seo of korea means a villa which have designed for leisure, retire, recreation, and entertaining guests. The buildings of Byeol-seo includes dwelling, pavilion, and gardening. So the planning of Byeol-seo may be a window to look in to the general characteristics of Go-ryeo architecture. Futhermore it will open a new horizon to rebuild the history of korean architecture. The objective of this study, therefore, is to find out the architectural characteristics Byeol-seo in Go-ryeo dynasty by interpreting old literatures. This study starts from the conception of Byeol-seo, and discuss on the origin and development of Byeol-seo architecture. The main theme of this paper is to interpret the backgrounds of constructing Byeol-seo and the architectural characteristics of Go-ryeo Byeol-seo. This paper analyzed and interpreted 50 textbooks written in Go-ryeo dynasty which contained the contents of Byeol-seo. The results of this paper is as followings: A. Conception of korean Byeol-seo Byeol-seo means a kind of villa. It means a secondary dwelling designed for leisure, retire, recreation, and entertaining guests. Numerous names like Byeol-je(別第), Byeol-jang(別莊), Byeol-up(別業), Byeol-won(別院), etc. have same meaning as Byeol-seo. B. The Origin and development of Byeol-seo The origin of Byeol-seo architecture is believed to start from the 3rd-6th century in China. The architectural type had been imported to ancient kingdoms of Korea. But the numbers who could build or own the Byeol-seo were limited to a few of noblemen. In Go-ryeo dynasty, however, number of the noble men class has been increased, and even the militants who got the political power wanted to own their Byeol-seo. This social situation leads the development of Byeol-seo architecture. C. Backgrounds of building Byeol-seo Many of old texts described why they build Byeol-seo. The reasons are not same case by case, but it may be categorized as followings: a. living place after retire b. entertainment place for leisure c. management of manors d. to live in seclusion e. relationship with Buddhism. D. Architectural characteristics of Go-ryeo Byeol-seo Many of old texts described on the planning and designing their Byeol-seo. These texts present the clue which shows the architectural characteristics. It includes site selections, the sizes of properties, buildings and its arrangements, gardening, living spaces, and building forms. The architectural characteristics of Go-ryeo Byeol-seo are as followings: a. Hill-side sites which command a good view were selected for building site of Byeol-seo. These sites needed new technology for building on the hill side. This requirements leaded the development of platforms and piloti structures. b. The sizes of Byeol-seo were quite different depending on the social and economical status. From a single building of living space to a large properties including multi buildings and gardens, various types of Byeol-seo were built. It means that it is very difficult to define the architectural type concerning to Byeol-seo. c. A Byeol-seo included generally the living spaces and the pavilions with garden. General arrangement of buildings is that the pavilions occupied the front side and living spaces the back side. In front of pavilion, a garden were designed. Pond with a island was the typical type of garden, it is considered as the origin of garden style in Jo-seon Byeol-seo. d. The living spaces included the On-dol spaces and Ma-ru spaces. And the evidences of wall partitions were appeared. This evidences show the development of space division using wall partitions were started from Go-ryeo dynasty. e. Various type of pavilion were developed. Mobile type, assembling type, water passing through type were designed. It shows the development of creative designs of pavilion started from Go-ryeo dynasty.

      • 고려시대 수월관음도에 관한 조형성 연구

        박영환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2012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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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연구는 동아시아는 물론 세계적으로 완성도와 독특한 기법으로 우수성을 인정받은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불화양식인 수월관음도에 관한 조형성 연구이다. 고려시대의 수월관음도는 조각과 공예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수의 작품이 남아 있지 않은 고려시대 회화 연구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불화를 제외한 고려시대의 일반회화가 현존하는 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기 때문에 약 160여 점이 남아 있는 불화에 대한 연구는 곧 고려회화 연구라 할 수 있다. 그 중 35점이 현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수월관음도라는 단일 양식의 존상화에 대한 연구는 전체 고려회화 연구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수월관음도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는 역사적이거나 양식적인 분야의 구분에 집중되어 있었다. 역사적인 사실 속에 수월관음도가 어떤 역할을 하였으며, 어떤 양식에 의해 전달된 형식이 작품을 만들어 내었는가에 집중하다 보니 완벽하고 위대한 이 예술작품을 미술적인 방향으로 감상하는 방법을 알리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수월관음도는 신앙의 대상으로서 위대한 존재이기도 하지만, 완성된 작품으로서도 그 가치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 오늘날의 사람들이 역사나 양식적인 분야에서 논의뿐만 아니라 예술작품으로 수월관음도를 감상하고 그 아름다움을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 준비가 아직은 부족한 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 연구는 미술가의 입장에서 수월관음도에 대한 조형성을 연구하고자 한다. 미술가의 입장에서의 작품에 대한 분석은 역사학자나 미술사학자가 아닌 미술제작자 입장에서 작품을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조형적인 관점의 연구는 고려시대의 미술가들이 완벽한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가지고 있었던 그들의 조형적인 관심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연구의 필요성과 연구 방법, 용어의 정의를 중심으로 본 연구의 Ⅰ장을 구성하였다. Ⅱ장에서는 수월관음도에 대한 조형성의 연구를 보다 깊이 있게 접근하기 위해 고려시대의 불교문화를 연구하여 이러한 작품을 만들 수 있었던 배경을 알아보았으며, 국교로서의 불교와 불교문화에 대해 간략하게 제시하였다. 그리고 작품을 만들 수 있도록 경제적 배경된 왕실의 지원도 알아보았다. Ⅲ장은 관음신앙의 역사에 대한 연구이다. 인도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관음신앙이 중국을 거쳐 다양하게 변화하면서 고려에 이르러 수월관음도라는 작품이 제작되기까지의 연원을 제시하였다. Ⅳ장은 수월관음도의 양식에 대한 연구이다. 현재 일본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 현존하는 수월관음도를 시기와 제작방식에 따라 특징을 설명함으로써 작품을 구분하여 감상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였다. Ⅴ장은 본 논문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앞서 제시한 각 작품을 미술가의 조형적인 관점에서 분석을 하였다.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미술가들이 깊이 고민하는 구도와 비례, 형태와 구성, 재료와 기법 등을 각 작품별로 또는 고려시대 수월관음도 전체 작품군에 대해서 연구한 것이다. 수월관음도에 나타난 서정적 빛과 어둠, 채색과 안료, 문양과 선묘의 방법을 연구에 포함하여 수월관음도의 제작에 필요한 모든 내용이 Ⅴ장에 나타나도록 하였다. 고려전기의 회화에 대한 증거가 부족하여 발전 과정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지만 본 연구를 통해 수월관음도가 고려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조형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는 결론으로 Ⅵ장을 구성하였다. 특히 도상의 근거는 인도와 중국을 거쳐 만들어진 종교적 내용이지만, 수월관음도는 고려시대 사람들의 신앙의 대상이었고 그 시대 사람들에게 절대적 존재였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수월관음도는 예배의 대상이면서 고려인들이 생각한 이상향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고려인들의 이상향이 반영된 수월관음도는 고려인들의 미의식이 투영된 집합체이다. 종교화로 제작되었지만 결코 예배대상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기호와 취향으로 시각화된 결정체로서 그 의의가 있다.

      • 고려시대 隨求陀羅尼 연구 : 불복장 및 분묘 출토품을 중심으로

        김보민 명지대학교 대학원 2018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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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논문은 고려시대 불교의 다양한 신앙 활동 중 하나인 隨求陀羅尼 신앙을 현존하는 유물을 통해 살펴본 것이다. 陀羅尼(dhāraṇi)란 일반적으로 불교에서 사용하는 주문을 뜻하지만, 종이나 비단 위에 書寫나 인쇄의 방법을 이용해 시각화, 물질화되기도 했다. 본 논문에서 살펴본 수구다라니 역시 암송되기도 했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서사되고 인쇄되었다. 뿐만 아니라 경전의 지침에 따라 ‘착용’되고 무덤에 안치되기도 했다. 본 논문에서는 이와 같은 수구다라니 신앙이 고려 사회에서 어떻게 시각화되고 물질화되었는지를 살폈다. 고려시대에 제작된 수구다라니를 유형별로 구분해 각 유형별 제작 및 유통 시대를 살피고, 그것들이 납입된 다양한 장소 -분묘, 불복장, 경갑과 같은 용기-에 따라 수구다라니가 갖는 의미와 기능을 고찰했다. 고려시대 수구다라니의 신앙적, 형식적 기원을 알아보기 위해 수구다라니를 설한 경전과 중국에서의 수구다라니 사례를 살펴보았다. 우선 수구다라니를 설한 한역 경전은 7세기 말 보사유 한역『佛說隨求卽得大自在陀羅尼神呪經』, 8세기 중엽 불공 한역 『普遍光明淸淨熾盛如意寶印心無能勝大明王大隨求陀羅尼經』,『金剛頂瑜伽最勝秘密成佛隨求卽得神變加持成就陀羅尼儀軌』가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 경전 모두 수구다라니의 ‘착용’을 피력하고 사후세계에서의 이익을 설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경전에서 강조한 착용방법과 설화에 부합하는 유물이 중국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본 논문에서는 현재까지 알려진 약 20여점의 중국 수구다라니들을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고 납입된 장소와 그에 따른 의미를 살펴보았다. 이들은 주로 8~11세기경에 제작된 것들인데 제3유형과 제4유형의 중국 수구다라니에서 고려시대 수구다라니와 부분적으로 동일한 도상을 찾아볼 수 있었다. 또한 중국의 수구다라니는 분묘, 석굴사원, 탑과 같은 다양한 장소에서 발견되었는데, 불복장에서 발견된 사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고려시대 수구다라니 중에서는 여섯 점을 선별해 집중적으로 살펴보았다. 광주 자운사 목조아미타불좌상 복장 <수구다라니>, 안동 보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 복장 <수구다라니>, 『조선고적도보』수록 분묘 출토 <수구다라니>, 삼성미술관 Leeum소장 <수구다라니>,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목조관음보살좌상 복장 <수구다라니>, 합천 해인사 원당암 목조아미타불좌상 복장 <절첩 수진본 다라니경>이 그것이다. 이들은 형식에 따라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제1유형은 불이나 보살, 인물이 있는 중심부와 다라니가 둘러진 주연부, 주로 밀교 법구가 위치한 외곽부의 삼중 동심원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반면 제2유형은 이와 같은 삼중 구성 대신 다라니만 세로로 적은 형태다. 그리고 연대를 알 수 있는 몇몇 기준작을 통해 제1유형은 고려 중기인 12세기, 제2유형은 고려 후기인 13~14세기에 제작되고 유통되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한편 고려 수구다라니는 중국의 사례처럼 분묘에서 발견된 것도 있지만, 주로 불복장에서 발견되었으며, 출토지는 알 수 없지만 경갑 안에 들어 있었던 수구다라니도 있다. 본 논문에서 납입 장소에 따른 수구다라니의 의미와 기능을 다음과 같이 고찰했다. 첫째, 분묘출토 수구다라니는 중국의 사례와 납입 방식 및 용기가 유사했다. 이는 사후세계에서 이익을 얻고자 하는 수구다라니 신앙이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로 유입되어 유행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사례다. 또한 최근 발굴을 통해 조선 17세기 분묘에서 수구다라니가 발견된 바 있어 수구다라니 전통이 조선까지 이어졌음을 확인했다. 둘째, 그 동안 불복장물에서 수습된 다라니는 일반적으로 복장 내부의 빈 공간을 메우기 위한 것으로 여겨져 다른 물목에 비해 집중적으로 연구되지 못했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 살펴본 수구다라니는 안립 위치가 불상의 바닥(자운사)과 무릎(보광사), 그리고 불상의 머리(국박소장 관음보살좌상)로 각각 다른 안립, 의미와 목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개인적으로 소지한 다라니를 시주했을 가능성, 복장 안립을 위해 다른 다라니와 함께 수구다라니를 선택해 인출했을 가능성, 그리고 물목을 싸기 위한 종이에 특별히 수구다라니를 인출했을 가능성 등을 제시했다. 셋째, 경갑 안에 수구다라니는 일상 생활에서 다라니를 직접 소지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사례다. 이와 관련해 경갑이나 팔찌, 小字本 경전 등 소지할 수 있는 작은 크기의 고려시대 유물들을 살펴봄으로써, 물질화된 다라니를 소지하는 것이 당시 일반적이었음을 밝혔다. 또한 다라니를 찍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종이 파편과 공예품이 함께 출토된 분묘가 있고, 다라니를 넣은 것으로 추정되는 경갑이 나온 불복장도 있어, 경갑 안의 수구다라니는 분묘나 불상의 복장에서 나왔을 가능성도 제시했다. 이와 같이 본 논문에서는 고려시대에 제작된 수구다라니를 유형 및 발견 장소에 따라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 결과 수구다라니는 장례나 불복장과 같은 의식적인 맥락에서 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소지 등의 형태로 다양하게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비록 고려시대 수구다라니 신앙을 알려주는 기록은 매우 적지만, 이와 같은 다양한 사례를 통해 수구다라니는 고려 사회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다양한 방식으로 시각화, 물질화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본 연구를 통해 중요하지만 그 동안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고려 불교미술 및 시각문화, 그리고 신앙의 한 측면을 조명할 수 있기를 바란다. This study examines the faith of Mahāpratisarā-dhāraṇī(隨求陀羅尼), one of the diverse Buddhist beliefs of Goryeo dynasty(918-1392), through existing relics. Dhāraṇī(陀羅尼) generally refers to Buddhist spells. Meanwhile, the Mahāpratisarā-dhāraṇī was visualized as documented sound on paper or woodprints. On the process of visualization, specific icons were shared and transformed in Goryeo. This study examines the iconography and analyzes the function and meaning of the Mahāpratisarā-dhāraṇī of Goryeo, through the place where the dhāraṇī was enshrined; and it aims to shed a light on one of the diverse visual cultures of the Goryeo Buddhism. In order to understand the grounds and origins of the iconography, I have examined Chinese versions of sūtras and Chinese Mahāpratisarā-dhāraṇī. The sūtras that contain Mahāpratisarā-dhāraṇī are as follow: Foshuo suiqiu jide dazizai tuoluoni shenzhou jing(佛說隨求卽得大自在陀羅尼神呪經), translated by Baosiwei(寶思惟) in the 7th century; Pubian guangming qingjing zhisheng ruyi baoyin xin wunengsheng damingwang dasuiqiu tuoluoni jing(普遍光明淸淨熾盛如意寶印心無能勝大明王大隨求陀羅尼經) and Jin’gangding yuga zuisheng mimi chengfo suiqiu zede shenbian jiachi chengjiu tuoluoni yigui(金剛頂瑜伽最勝秘密成佛隨求卽得神變加持成就陀羅尼儀軌), both translated by Bukong(不空) in the 8th century. What is interesting is that the sūtras mentioning Mahāpratisarā-dhāraṇī emphasize the 'wearing' of the dhāraṇī and explain the benefits of the afterlife. The way of wearing and the dhāraṇī-related tales are reflected on the Chinese relics from the Tang dynasty. In China, Mahāpratisarā-dhāraṇīs were mostly produced during the 8th to 11th century; about twenty examples remain. Those are classified into four types and each enshrined point was examined with its meaning. As a result, the process of chronological change of Chinese Mahāpratisarā-dhāraṇī was confirmed; the third and fourth type of Chinese Mahāpratisarā-dhāraṇī were partially similar to the Goryeo counterpart’s iconography. Chinese Mahāpratisarā-dhāraṇīs were found throughout China, from various places such as burial mounds, cave temples, and pagodas and seem to be the faithful representation of the scriptures. In order to examine the Mahāpratisarā-dhāraṇī of Goryeo, six pieces with the certain site of excavation and enshrinement manner were selected. Some were found in burial mounds like in China, but most of them were from the consecrated Buddhist statues(bulbokjang). In addition, there is a Mahāpratisarā-dhāraṇī found in a sūtra case of unknown origin. The six dhāraṇīs can be categorized into two groups ⎯ those produced in the mid-Goryeo dynasty, the 12th century, and those produced in the late Goryeo dynasty, the 13th and 14th centuries ⎯ by the Mahāpratisarā-dhāraṇī with the inscription of 1184, the 24th year of Jin’s Dading(大定), excavated from Jawun-sa(紫雲寺)’s Wooden Seated Statue of Amitabha Buddha. The Mahāpratisarā-dhāraṇīs of the mid-Goryeo consist of triple circles; the circles disappear, and the scriptures begin to include Chinese letters in the late Goryeo. In 2017, a Small folded dhāraṇī(折帖 袖珍本 陀羅尼經) of Haein-sa(海印寺) with the inscription of 1375 has been found, and the style of late Goryeo Mahāpratisarā-dhāraṇī was confirmed again. The six Mahāpratisarā-dhāraṇīs were enshrined in specific points, and are differed in the symbolism; they can be categorized into three types, according to the place of enshrinement. The first type is the Mahāpratisarā-dhāraṇīs excavated from burial mounds, similar to Chinese ones in the way of enshrinement and the style of the container. This is important since the same indicates the belief of Mahāpratisarā-dhāraṇī, which aims the benefits of the afterlife, was imported from China and spread across Goryeo. A recent excavation of a 17th century Joseon grave discovered a Mahāpratisarā-dhāraṇī and confirmed that the Goryeo Mahāpratisarā-dhāraṇī tradition continued to the Joseon Dynasty. The second type is Mahāpratisarā-dhāraṇī as a part of consecration(bulbokjang). In the previous studies, dhāraṇī was mainly considered as the filler of empty space in the consecrated statue, and was not studied enough in art history compared to other objects. However, since the retrieved points of Mahāpratisarā-dhāraṇī vary ⎯ the bottom panel, knees, and head of statues ⎯ it can signify a specific meaning or a purpose of enshrinement. The third is a Mahāpratisarā-dhāraṇī found in a mobile sūtra case. There is a possibility that the dhāraṇī in sūtra case actually has been enshrined in a consecrated statue or a burial mound; there are examples of paper fragments and craft works being excavated together from a grave, or of a case ⎯ which seems to be a sūtra container ⎯ found from a consecrated statue. Objects of small size such as sūtra cases, bracelets and miniature sūtras were made in Goryeo, which indicates that carrying materialized dhāraṇī was common. As a result of detailed examination according to the type and discovery place, it was confirmed that the Mahāpratisarā-dhāraṇī was used for funeral ritual from Goryeo to Joseon. This reflects what people thought about the afterlife. Also, Mahāpratisarā-dhāraṇīs found in the consecrated statues were enshrined in different ways with various meanings and symbolism. In addition, examples of the excavation from the burials and from the cases signify the widespread of the Mahāpratisarā-dhāraṇī faith in Goryeo society. Through these case studies of Mahāpratisarā-dhāraṇī, we can make a point of looking at aspects of Buddhist visual culture in Goryeo dynasty.

      • 2009년 개정 한국사 검정 교과서 고려시대사 서술과 분석 : 고려 다원사회론을 중심으로

        노지현 건국대학교 교육대학원 2019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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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는 현대사회는 다양한 경로와 수단을 통해 결속됨으로써 다원화가 진전되고 있다. 이에 따라 수용적이고 개방적 태도가 성숙한 시민으로서의 자질로 요구되기 시작했고, 교육계에서도 이러한 사회적 요구에 부응해 교육과정을 구성하게 되었다. 본 논고에서 중점적으로 살펴본 고려시대는 실질적인 한반도의 통일을 이룩하고 다원사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왕조를 비교적 성공적으로 존속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렇기에 고려시대사의 다원적 측면들을 연구하는 것은 현대사회에서도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이에 따라 정치 및 외교적, 사상적, 사회적 측면에서 고려가 다원성을 표출한 사례에 대한 연구 성과를 정리하고 2009 개정 교육과정과 교과서 집필기준의 고려시대사 영역에서도 다원적 소양의 육성이라는 교육적 목표를 지향하고 있음을 확인하고자 하였다. 또한 현행 8종 검정 한국사 교과서에서도 서술 곳곳에서 고려시대에 대한 서술을 살펴보고 다원적 측면에서의 설명 부족, 객관성이 결여된 서술 양상, 종합적 관점의 미비와 같은 문제점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으로 고려시대 시행된 제도와 집권체제의 변동에서 살펴볼 수 있는 다원적 측면을 추가적으로 서술하고, 다양했던 당시의 외교 양태와 고려인들의 다원적 의식에 대한 서술과 자료를 보완하는 방법으로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전 시기에 걸쳐 고려의 다원성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목차를 새로 구성하는 방안을 제시함으로써 고려 다원사회론적 관점에서 부족하다고 판단된 유기성을 보완하고자 하였다. 이처럼 현행 교과서의 서술적 문제를 개선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다원적 인간상 육성이라는 교육계의 목표를 성취하는 데 이바지 하고자 하였다.

      • 高麗時代 靑銅器의 入絲文樣에 關한 硏究

        임현화 전남대학교 교육대학원 2001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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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高麗時代에는 佛敎的 색채가 강한 귀족중심사회이었기에 佛敎工藝가 기술적으로 매우 발달하였다. 향완, 淨甁, 香盒 거울걸이, 수반, 등자 등 一般工藝品에 이르기까지 청동기의 다양한 入絲工藝가 그 증거이다. 入絲工藝는 金屬工藝 기법중의 하나로서 金屬器物의 표면에 線이나 面으로 홈을 파고 여기에 金·銀·銅과 같은 金屬을 박아 넣어 색채대비를 통해 紋樣을 내는 공정을 말한다. 入絲工藝는 어떤 공예기술 보다 시간과 기술을 요하는 섬세하고 정교한 분야이다. 이러한 화려하고 정교한 기술은 中國 漢代에서 우리나라에 전해진 이후 특히 高麗時代에 발달했고,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傳統的인 入絲技法의 발달과정을 살펴보면 三國時代에는 線으로만 入絲되다가 統一新羅時代 이후 線과 面이 병행되어 발전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후 高麗時代와 朝鮮時代에는 釘으로 기물의 표면에 홈을 파서 금속선을 끼어 넣는 끼움入絲方法과 표면을 쪼음질하여 금속선을 부착시키는 쪼음入絲方法 등으로 발달하였다. 그 紋樣을 種類別로 나누면 繪畵紋樣, 吉祥紋樣, 動物紋樣, 文字紋樣 등이다. 高麗時代 入絲工藝에 나타나는 紋樣은 統一新羅時代에 나타났던 中國的인 색채를 벗어나 완숙한 단계에 이른다. 그 紋樣은 高麗化되고 種類도 다양해져 靑銅뿐만이 아니라 陶磁器에도 유사한 紋樣이 나타난다. 繪畵紋樣에는 高麗時代의 서정적 취향을 지닌 浦柳水禽紋, 芭蕉紋이 있으며 吉祥紋樣인 唐草紋, 蓮瓣紋, 如意頭紋, 雲紋, 雷紋 등은 佛敎的 色彩를 많이 띠고 있어 향완· 淨甁의 보조장식으로 이용되었다. 권위적 상징성을 지닌 動物紋樣인 龍紋, 鳳凰紋은 太細線을 혼용하였다. 文字紋인 梵字紋은 당시의 佛敎的 性格을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외에 雙葉七寶紋, 同心圓紋 등은 구획무늬로서 자주 등장한다. 入絲工藝品의 세련된 조형성과 함께 이들 외면에 장식된 아름다운 線은 陶磁工藝와 金屬工藝를 망라하여 高麗美術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로 손꼽을 수 있다. 이러한 다양한 紋樣들은 高麗 初期의 繪畵的이고 纖細하던 것에 비해 後期로 갈수록 鈍化되고 形式的으로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紋樣의 배치 또한 初期에는 정교하고 자유스러우며 회화적인데 반하여, 後期에는 器形의 胴體전면에 복잡하게 나타나며 形式化되었다. 이는 귀족적 불교사회가 쇠퇴하는 당시의 社會的 배경과의 聯關性을 무시할 수 없다. 入絲工藝의 紋樣에는 그 당시 상류층을 이룬 문벌 귀족이나 승려들의 취향과 정서가 그대로 표출되었기 때문이다. 高麗 靑銅器 入絲工藝는 象嵌靑磁에 나타난 文樣, 技術과 유사한 특성을 갖는 高麗時代 대표적인 미술이다. 入絲工藝는 면면히 이어져 오늘날 韓國工藝의 주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韓國工藝의 發展을 위해서는 高麗時代 工藝品의 우수성과 時代的인 특성을 재인식하여 傳統工藝를 잇는 현대적인 作業이 절실하다고 생각된다. 특히 그 문양의 세련미와 조형성, 그리고 낱낱의 형태는 현대적인 패턴으로 활용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뛰어나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필자가 재구성해본 고려 입사공예의 문양을 이용한 패턴화 사례를 곁들어 보았다. The Koryo Dynasty was a Buddhist aristocracy with a highly developed Buddhist arts and crafts. As proof of it, there are such various inlaid craftworks for public use as Hyang-wan, Jyong-byong, Hyang-hap, Soo-ban, Dung-ja, etc(traditional crafts). Incrustation technique is one of manufacturing techniques of metal crafts, by which traditional artisans carve lines or facets on the surface of metal crafts and then enchase gold, silver, or copper in them. Therefore it requires more time and adroitness than any other art technique. This glittering and elaborate technique was introduced from the Han Dynasty of China and later was in its glory in the Koryo Dynasty. According to the developmental process of traditional incrustation technique in Korea, line alone was used in the period of Three Kingdoms and then line and facet were used in the United Shilla Dynasty. Afterwards, Artisans of the Koryo and Chosun Dynasties developed the inserting and the chiseling techniques. The former is a way of carving grooves and then inserting metal strings and the latter is a way of chiseling and sticking metal strings on the surface of crafts. In respect of the pattern, There are of pictures, Gil-sang(invoking a blessing), animals, and Chinese characters. The incrustation patterns of -88 the Koryo Dynasty reached its maturity out of the Chinese patterns of the United Shilla Dynasty. We can find the various Koryo patterns in porcelains as well as, bronze works. Of the pictorial pattern, Poryusugummun and Pachyomun show the lyrical taste of the Koryo Dynasty. As Dangchyomun, Yonpanmun, Yoidumun, Unmun, and Noimun of the Gilsangmun had the Buddhist color, they were used as supplementary decorations to the Hyang-wan and Jyong-byong. Yongmun and Bonhwangmun of the animal pattern were used as a symbol of prestige together with Taesae-line. Sanskrit design of the Chinese-character pattern playes a important role in the research of Buddhist features of those days. Besides, we can frequently find such ring-shaped patterns as SSangyeopchilbomun and Dongsimwonmun. Therefore it can be said that these beautiful patterns played a important feature of earthenware and metal crafts of the Koryo Dynasty in addition to the defined formativeness. These various patterns changed its pictorial and delicate feature in the early days of the Koryo Dynasty into sublimate and formal shape in the later. Moreover, they gradually covered the whole surface of crafts. These changes show the social surroundings in those days in which the aristocratic Buddhist society was on the decline. It is because the taste and the sentiment of high lineage and Buddhist priests at that time were directly expressed on those patterns of inlaid crafts. Using a distinctive technique similar to that of inlaid celadon porcelains, the Koryo bronze-work inlaid craft is a representative art of the Koryo Dynasty. Those crafts take a important position in the current traditional crafts of Korea. The development of Korea traditional crafts requires a renewed appreciation of the superiority and the periodic characteristics of the Koryo crafts and the modern endeavor to sustain the tradition. Especially in due consideration of the refinement and formativeness, those patterns can be sure to be used for modern designs. -89

      • 고려시대 머리모양 재현에 관한 비교분석

        박유경 건국대학교 디자인대학원 2014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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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is study was intended to investigate the stream of the Goryeo Dynasty and the stream of its beauty treatment culture and make a systematic summary of the terms and characteristics of its hairdo. And it attempted to investigate th problem of previous studies about the hairdo of the Goryeo Dynasty and the need for its investigation. For this purpose, it surveyed the reference pictures affecting the reproduction of the hairdo under the Goryeo Dynasty and laid the foundation for them to be used as basic material, and analyzed its hairdos reproduced in previous studies. An investigation about them showed that there was a great difference in the figure of the hairdo classified and reproduced as the same hairdo. It is because there were not a few pictures to be referred to about the hairdo of the Goryeo Dynasty and there was no right classification of the pictures to be referred to about it. Accordingly, this study classified and presented the summarized reference pictures of the hairdo of the Goryeo Dynasty. The study results were summarized as follows: First, the reproduction of the hairdo of the Goryeo Dynasty found in previous studies showed that it was influenced by neighboring countries and various and comparatively free hairdos prevailed. And the same hairdo was called as several terms in terms of its name. Second, it attempted to classify and investigate the pictures referred to about the hairdo of the Goryeo Dynasty by hairdo type. Previous studies classified the same picture of hairdo as a different hairdo in some cases. Some studies had no explanation about what hairdo the pictures of various forms of hairdos pointed out. And they made a different expression about the division of the period and names in relation to the reference pictures of hairdos under the Goryeo Dynasty. Third, this study attempted to divide and investigate the pictures of reproduced hairdos found in the study about the reproduction of the hairdo of the Goryeo Dynasty. The hairdo reproduced from the same reference picture was expressed in different forms, and it was found that there was a figure that the picture reproduced by the other researcher was used as the reference picture of the hairdo. And this study found that previous studies had been conducted about both hairdo and accessory in relation to reproduction. Seeing that the reproduction of the hairdo under the Goryeo Dynasty was the product of expressing the aesthetic consciousness proper to Korea and a reflection of the criterion for the aesthetic value of the ancient times, it can be said that its cultural value is enough. It is thought that it is very important to investigate both the characteristic of each type of hairdo under the Goryeo Dynasty from this perspective and previous studies about reference pictures and reproduction of the hairdo. Accordingly, it is expected that the results of this study will provide basic material for succeeding to and developing the beauty inherent in the hairdo of the Goryeo Dynasty currently still undecided through its right historical research and further applying and modernizing the Korean classical hairdo. 본 연구는 고려의 시대적 흐름과 미용문화사적 흐름을 살펴보고, 고려시대 머리모양의 용어 및 특성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자 하였다. 또한 고려시대 머리모양에 관한 선행연구들의 문제점을 고찰하고 연구의 필요성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하여 재현에 영향을 미친 참조그림들을 조사하여 기초 자료로 활용되기 위한 토대가 되도록 하였으며 또한 현재 선행연구들에서 재현되고 있는 고려시대 머리모양들을 분석하였다. 각 연구들을 살펴보면 같은 머리모양으로 분류하고 재현한 모습임에도 그 차이가 크게 나타나고 있다. 이는 고려시대의 머리모양을 참조할 만한 참조 그림들이 많지 않았고, 그나마 참조할 만한 그림들의 올바른 분류들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고려시대 머리모양에 대한 참조 그림을 정리하고 분류하여 제시하였으며, 연구의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선행연구에 나타난 고려시대 머리모양 재현의 경우 다양한 주변 국가들의 영향을 받아 다채롭고 비교적 자유로운 머리모양을 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명칭에 있어서도 같은 머리모양을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부르고 있엇다. 둘째, 고려시대 머리모양을 참조하는 그림을 머리 형태의 유형별로 분류하여 살펴보았다. 기존 선행연구에서는 동일한 참조 그림을 다른 머리 형태로 분류하여 사용한 경우도 있고, 여러 형태의 머리모양이 있는 그림에서 어떤 머리를 지칭하는지에 대한 설명 부분을 나타내고 있지 않은 연구들이 있었다. 또한 참조 그림의 시대구분과 명칭들이 제 각각으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셋째, 고려시대의 머리모양 재현 연구에서 나타나는 재현 그림들을 연구자 별로 나누어 정리하여 살펴보았다. 동일한 참조 그림을 보고 재현하였는데 서로 다른 형태로 표현되고 있고, 이미 다른 연구자가 재현한 그림을 머리형태의 참조 그림으로 활용하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재현에 있어 장신구의 연구와 함께 이루어진 연구는 찾아볼 수 없었다. 고려시대의 머리모양을 재현하는 것은 우리나라 고유의 미의식을 표현하는 산물이면서 옛 시대의 미적 가치기준을 반영하는 것이라 볼 때 그 문화적 가치가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고려시대 머리모양의 유형별 특성을 고찰하고 참조 그림, 재현연구들을 고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본 연구는 올바른 고증을 통하여 현재 표류하고 있는 고려시대의 머리모양이 가진 미를 계승 발전시키고 나아가 우리나라 고전머리를 응용하고 현대화시키는데 하나의 선행연구 자료가 되고자 한다.

      • 고려시대 비액의 서체미 연구

        이상현 경기대학교 미술디자인대학원 2015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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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高麗時代는 統一新羅時代의 문화를 계승하고 귀족적이며 화려한 미술 양식을 이루었다. 고려의 서예를 연구함에 있어 금석문은 중요한 자료로써 사료되며 高麗 고유의 서풍을 정립하는데 크게 기여하기 때문에 그 가치는 매우 크다. 이에 본고는 高麗時代 石碑에 새겨진 碑額의 종류와 자형분석에 대한 고찰을 하였다. 高麗時代는 太祖부터 불교문화가 융성하여 塔碑 건립이 활발하던 시기로 塔碑에 새겨진 碑額 또한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高麗 初期에는 장방형보다는 정방형의 小篆 필획과 결구가 사용되고, 장법은 갸름한 직사각형의 題額양식이 유행하였다. 세로기록양식의 제액양식이 統一新羅와 서로 같지만 서체나 각법의 사용에 있어서는 매우 자유분방한 시기였고 세부표현에서 국세의 강성과 번영을 반영하는 웅장하고 정교한 기법을 확인 할 수 있다. 高麗 中期로 넘어오면서 주로 장방형의 자형이 주를 이루게 되는데 제액식 두전과 두전이 함께 유행하고, 刻法과 서체는 소전음각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으며, 소전양각이나. 해서가 사용된 예도 있었다. 또 이 시기에는 기존의 전통양식이 해체되며 화려하고 파격적인 면모를 과시하고 있는데 편액의 변죽에 사용된 문양이 화려하게 나타나는 시기였음을 알 수 있다. 高麗時代 後期 명필로 많은 명작을 남겼지만 다시 고전적인 중국석비의 영향이 나타나고 전대의 독자성을 회복하지 못하여 양식 · 형식 · 서체 등이 다양하지 못한 쇠퇴기에 접어들게 된다. 13세기부터는 중기에 이어 장방형의 자형이 주를 이루며 제액과 두전, 그리고 제액식두전이 함께 사용 되었지만 말기에 이르면 제액과 제액식두전 보다는 두전 양식이 지배적이었고 이 두전 양식은 朝鮮時代까지로 이어지게 된다. 하지만 정치적,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못한 高麗時代 後期의 상황으로 문화와 예술이 발전하지 못하여 석비와 제액의 양과 질이 모두 절하되는 양상을 볼 수 있었다. 이상과 같이 高麗時代는 대외적으로 중국과의 교류로 통해 중국의 문화를 수용하면서도 무조건적 모방을 하지 않고 高麗의 정서에 맞게 재구성하여 고려시대 碑額의 서체에 반영하였음이 특징이라 할 것이다. 단순히 명찰개념의 碑額이 아닌 당시 서예가들의 문화 정체성을 간직해 온 보고라고 평가할 수 있으며 이러한 점에서 高麗時代 碑額의 가치는 크다고 할 수 있다. Having inherited the culture of Unified Silla period, Koryo dynasty achieved noble and glamorous artistic format. Epigraphs during the Koryo dynasty are important materials for studying caligraphy and have extensive values for they contributed to create unique styles. This thesis studies the types of epigraphs used on stone monuments and analyzes shapes of characters. Koryo dynasty enjoyed thriving buddhist culture from the first king, and many towers and monuments were built in the period which brought changes in epigraph use on towers and monuments. In the early Koryo, rather than rectangular form, square form Xiaozhuan stroke and structure were used. For composition, thin rectangle shaped inscribing format was in fashion. The vertical recording form, and inscribing format is the same with that of Unified Silla, but the calligraphic style or inscribing method had much more freedom that immense and exquisite techniques which reflects the state's strong and thriving state can be seen in detailed expressions. Turning to mid Koryo period, the rectangular character became the main stream along with Head-Zuanzi-Inscription and Head-Zuanzi. For inscribing method and calligraphic style, Xiaozhuan-Engravement was mostly used, but Xiaozhuan-Raised Carving or Kaishu can also be seen. In this period, the traditional forms were disintegrated and showed fancy and extreme side which can be observed from the fancy patterns used on edges of the frame. However, in the late Koryo, although there still were many master pieces, the reappearance of traditional Chinese stone monument influence and lack of uniqueness from the previous era created mundane repetitions of format, forms, and style, which led down to declining period. From the 13th century, with continued mid Koryo period, rectangular character became the main fashion along with inscription, Head-Zuanzi, and Head-Zuanzi-Inscription used together. Then in the later period, Head-Zuanzi format was in dominance than inscription or Head-Zuanzi-inscription, and this Head-Zuanzi format continued through Josun dynasty. However, because of the late Koryo's poor political, and economical stability, its art and culture could not grow further, and resulted in declining amount and quality of stone monuments and inscriptions. Through cultural exchanges with China, Koryo accepted and restructured Chinese culture to fit the sentiments of Koryo people and applied them on epigraphic calligraphy style. These epigraphs are not just a labeling-concept but a storing reports of calligraphers' cultural identity - and for that, the value of Koryo's epigraphy is prodigio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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