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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난’담론의 형성과 자기 확대재생산 구조에 대한 연구 : 인터넷 사이버공간의 청소년 ‘가난’담론을 중심으로

        조성진 성공회대학교 일반대학원 2007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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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is research analyze `poor' discourse of the young people who become accomplished from the Internet space with currently from the social inside which we are living `poor' discussions in what kind of method to come to be reproduced, the defendant person who will live meaning which is immanent in that inside and the role it does. Therefore it used a critical discourse analysis from this research. The reason this discussion as the social composition water the composition act which subject is spontaneous and passive setup reflection becomes accomplished from the whole in order to start with structure it is suitable in goal of this research which means all base is because being thought that from under dialectic interaction. Meantime from research space `poor' discussions individual discussion of two kind, comfort receiving the pain of the poverty which is not ear book reason of namely oneself, it wants and `where poor' confession and comfort and poverty overcome in goal `poverty' with the discussion calming down are composed. And four appears with one text which is completed. Therefore the process of analysis comes to divide at three phases. The result of analysis with afterwords is same. `Poor' confessions of the young people ostensibly the material like the pain which destitutely it receives it is visible but essentially it meat the crack of the relationship which besieges oneself who lives is ordinary with mediation. Therefore their `poor' confessions from dissolution etc. of destruction and relationship of relationship from the within estranging and the group from the group where oneself is related maintain the self-conceit core in the value which oneself selects and exalts. the problem occurred is a possibility even as signal of seeing, it makes `Poverty' calming down meantime, the negation of `poverty which already exist' and tragic symbol govern a whole process. Like this namely the symbol of poverty the self-illumination theory which presents it overcome method and it restricts the autonomy of discussion from the nepotism which supports it, and psychological control method. Oneself who comes to be used specially generally from `poor' discussions compared to the comparative technique of the people who is inferior and with the confessor the reply person all it restricts the meaning reconstitution of `poverty', with the confessor the reply person all it will be able to fall in the comparative object which is inferior possibility with confirmation Sikkim this in order to do to make a fear have it is. The process where `the poverty' is like this finally it leads and it reproduces it makes the circulation of discussion govern finally and the negative symbol of oneself. Meantime with `poor' confessions calming down, to be connected, it supplements each other from position of the observer and it comes it is completed with one text. It influences each other and it evolves and are completed in `poor' discussions which it exists. Therefore, `poor' discussions which are completed with one text do not participate with confession to calming down the young people, not to be, oneself, objective schedule `about poorly' in order to have the act form which is fixed * an accident form * a sentimental form. ' The social ceremony leads like this process about `poorly and it creates. Conclusively to social gathering conscious inside `the malicious symbol which' is poor is immanent, the fear governs the inside characteristic of the social members in about it. Therefore the social members stand and in order to be free from like this symbol to endeavor they become. They in order to evade the fear of oneself stand with exclusion make discriminate in about the subject which possesses a malicious symbolic characteristic. The subjects which possess meantime like this symbolic characteristic are inferior, as the existence which is heterogeneous the hitter it makes oneself and social unequal structure naturally oneself, it makes accept. Researcher led this research finally and to self-expansive reproduction process of `poor' discussions it stood `the thing to have the materiality where the poverty' is strong, it watches the whole it discovered with malicious symbol. About but like this `poorly' the epistemology prejudice more appears the result which is serious from actuality. Namely `issue' it comes `poorly' with `lines' `evils' gives the moral value which is both extremes and is with `profits' with problem of `damages' to reduce all problems of life it destroys the relationship individual selfishness. And it eats well, it is a moral line whose it is only to live well, like this society the above the human being must arrive becomes conclusion with the assertion which is a society. 이 연구는 인터넷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청소년들의 ‘가난’담론을 분석함으로써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속에서 ‘가난’담론이 어떠한 방식으로 재생산되어지며,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 의미와 그 역할을 살피고자 한다. 그러므로 이 연구에서는 비판적 담론분석을 사용하였다. 그 이유는 이것이 사회적 구성물로서의 담론은 주체의 능동적인 구성행위와 수동적 체제반영이 변증법적 상호작용 하에서 이루어진다는 전체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구조와 의미를 모두 다루어야 하는 이 연구의 목적에 적합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한편 연구 공간에서 ‘가난’담론은 두 가지의 개별담론, 즉 자신의 귀책사유 없는 가난의 고통을 위로받기를 원하는 ‘가난’고백과 위로와 가난 극복을 목적으로 ‘가난’달래기 담론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이 둘은 완성된 하나의 텍스트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분석의 과정은 세 단계로 나누어진다. 분석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청소년들의 ‘가난’고백은 표면적으로는 물질적 궁핍으로 받는 고통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그것은 일상적인 생활을 매개로 하는 자신을 둘러싼 관계의 균열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가난’고백은 자신이 관계하는 집단에서의 소외, 집단 내에서의 관계의 파괴, 관계의 해체 등으로부터 자신이 선택한 가치에 자긍심을 유지하고 고양시키는 데에 문제가 발생하였다는 신호라고도 볼 수 있다. 한편 ‘가난’달래기는 이미 존재하는 ‘가난’의 부정적, 비극적 상징이 전체 과정을 지배한다. 즉 이와 같은 가난의 상징은 그것의 극복 방법을 제시하는 자조론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가족주의, 그리고 심리적 통제 방식에서 담론의 자율성을 제한한다. 특히 ‘가난’담론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어지는 자신보다 더 열등한 사람들과의 비교 기술은 고백자와 답변자 모두에게 ‘가난’의 의미 재구성을 제한하는데, 이는 고백자와 답변자 모두에게 열등한 비교대상으로 추락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시킴으로써 공포를 가지게 하기 때문이다. 결국 ‘가난’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자신의 부정적 상징을 재생산하고 결국 담론의 순환을 지배하게 된다. 한편 관찰자의 입장에서는 ‘가난’고백과 달래기는 서로를 보충하고 연결되어져 하나의 텍스트로 완성된다. 그것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진화되어 완성된 ‘가난’담론으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하나의 텍스트로 완성된 ‘가난’담론은 청소년들을 고백과 달래기에 참여하지 않고도 스스로를 대상화시켜 ‘가난’에 대해 일정한 행위양식·사고양식·감정양식을 가지도록 한다. ‘가난’에 대한 사회적 의식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생성된다. 결론적으로 사회적 집합의식 속에는 ‘가난’이라는 악의 상징이 내재하고, 그것에 대한 공포는 사회구성원들의 내면성을 지배한다. 그러므로 사회구성원들은 이러한 상징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 노력하게 된다. 그들은 자신의 공포를 회피하기 위해서 악의 상징성을 보유한 주체에 대한 배제와 차별을 하게 된다. 한편 이러한 상징성을 보유한 주체들은 열등한, 이질적인 존재로서 자신을 타자화시켜 사회적 불평등 구조를 스스로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결국 연구자는 이 연구를 통해 ‘가난’담론의 자기 확대 재생산과정에는 악의 상징으로서의 ‘가난’이 강한 물질성을 가지고 전체를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러한 ‘가난’에 대한 인식론적 편견은 더욱 심각한 결과를 나타난다. 즉 ‘부’와 ‘가난’에 ‘선’과 ‘악’이라는 양극단적인 도덕적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삶의 모든 문제를 ‘이익’과 ‘손해’의 문제로 환원시키고 개인을 이기화시켜 관계를 파괴한다. 그리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유일한 도덕적 선이며, 이러한 사회가 인간이 도달해야 할 이상사회라는 주장으로 귀결된다.

      • 누가복음4장 17-19절을 중심으로 본 가난한 자에 대한 연구

        윤에리 장로회신학대학교 2018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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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 위에 세워진 기독교는 모든 시대와 국경을 초월하는 영원불변하는 진리로서, 기독교의 절대적이고도 궁극적인 가치와 기준이 된다. 복음의 이러한 절대성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시대가 급변하면서 기존 전통 사회를 형성하던 절대성 보다는 상대성이라는 시류 속에서 다양한 이데올로기들이 공존하는 오늘의 세대에서 절대적인 기준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복음은, 다양한 가치와 그에 따른 삶을 제한하거나 수용하지 못하는 불편한 것으로 비춰질 수 있다. 그러나 오히려 복음은 모든 시대와 국경을 초월하는 영원불변하는 진리로서 모든 인류의 삶을 더욱더 풍성하게 하고 자유롭게 한다. 본 논문은 이러한 복음에 대한 성경적인 정의를 살펴보기 위해 먼저 복음에 대해 정의하는 구약과 신약의 본문 중 복음을 정의하는 구약의 이사야 61장 1-2절과 이를 인용하여 다시 복음을 선포하는 누가복음 4장 17-19절이 있는 두 성경을 간략히 분석함으로 복음의 정의에 대한 근거를 찾는다. 이어서 이사야 61장 1-2절과 누가복음 4장 18-19절을 한 절 한절씩 분석하며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정의와 복음의 대상인 가난한 자를 분석한다. 복음과 복음의 대상인 가난한 자에 대한 정의는 해석학적인 순환 속에서 그 정당성과 균형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복음과 가난한 자에 대한 성경적인 정의를 분석한 후에는 이어서 복음의 대상으로서의 가난한 자에 대한 성경적인 함의와 종교 윤리적 함의를 고찰한 후, 이를 바탕으로 오늘날 복음의 대상인 가난한 자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해방신학에서의 함의 연구를 통해 오늘날 복음의 대상인 가난한 자들에 대한 정의를 평가한다. 이 모든 연구를 통해 다양한 가치와 기준의 혼란 가운데 있는 오늘날의 세대와 기독교에 성경이 말씀하시는 복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며, 이를 사모하고 누리는 가난한 자들이 될 것을 제안하며 논문을 마무리한다.

      • 「푸에블라문헌」에 나타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과 교회의 실천적 행위 :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

        박재희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2011 국내석사

        RANK : 247807

        The Church has the mission to lead a life of proclaiming and testifying Jesus Christ to the world. Especially the Church can't accomplish her mission excluding poverty just as Christ completed his saving activity in poverty. That's why the Church has the obligation to choose the poor first to follow the essential meaning of the evangelical spirit. Yet, in reality, the Korean Church today lies in a state of becoming middle-class in terms of a social environment. This phenomenon hinders the mission of the Church. It is because the Church is being changed for those who have and can afford to spare in wealth. Under this circumstance, we need to keep in mind again that we should find out those who have been alienated due to poverty and pay a considerate attention, as a leading example, to their situations, remembering the evangelical spirit again. This thesis, therefore, aims at putting into consideration the role of the Church in the terms of poverty based on 'the priority choice for the poor' presented in 「Puebla」document, which is authorized as an essential document on poverty. First of all, chapter one deals with 'poverty and the poor' in the Scripture. Poverty was accepted just in a material sense under the socal circumstance in the Old Testament era. In the New Testament era, on the contrary, poverty was emphasized in a spiritual sense formed in the relation with God. The meaning of poverty which had been overestimated in either sense was completed in Jesus. Jesus himself chose and led a poor life in material refusing the tendency of diminishing the material meaning of poverty and also led a poor life in spirit which meant committing everything in himself to God. Through this life, Jesus paid a prior attention to the poor. He chose the poor as objects of proclaiming the gospel, delivered the good news of the gospel to them, and revealed God's love through them. Jesus' examples like these have shown that the mission of the Church lies first in the concerns and considerations for the poor. This fact, therefore, shows that the Church has the obligation to reveal God's love as well by proclaiming the gospel to the poor through 'the priority choice for the poor'. Chapter two deals with the theological meaning of the term 'the priority choice for the poor' and its background as well. The theology of liberation which studied on the mission of the Church for the liberation of people in the light of evangelism has appeared under the circumstance of the political oppressions by the desperate poverty, the inequality of wealth, and the military dictatorship in Latin America. It emphasizes the prior concerns for poverty-stricken people, demanding the liberation of those who have lost their human dignities due to the material poverty. On the basis of these circumstances,「Puebla」document puts directly the practice of love through 'the priority choice for the poor'. It also puts that the priority choice is for everyone in the Church and is a loving deed for the purpose of the realization of social justice and common good in terms of both human dignity and solidarity through the dogmatic reflections on 'the priority choice for the poor'. Chapter three deals with how the Church which makes 'the priority choice for the poor' indicates her stance on poverty and the poor mainly in the social encyclical of the Church. 'The priority choice for the poor' doesn't maintain just that the poor should be free from the oppression of social poverty but also that they should lead a life of evangelization and take part in building up the heavenly kingdom in this world through the liberation from the genuine poverty. The Church should stand for the poor in solidarity with the poor and approach them first through the practice of charity for them. This chapter shows clearly that 'the priority choice for the poor' is the essence and obligation of the Church in the social encyclical. The last chapter four deals with the practical aspects of how the Church should act for the poor in the perspective of 'the priority choice for the poor'. The Korean Church which becomes middle-class today should be for the poor through the practice of the evangelical poverty and with the poor in solidarity with them. And the Church should be willing to try for the evangelization of the world through the practice of love toward the poor in solidarity with them. This chapter concludes that it is through this practice of love that Jesus Christ reveals himself in the world and his love increases on earth. The Church delivers the good news of the gospel to those who suffers and hurts in poverty through 'the priority choice for the poor'. Yet the evangelic spirit the Church proclaims today is not just defined to the salvation out of the hurts and oppressions from the material poverty. It is apparent that the Church has the prior obligation of concerns for the human pain from the material poverty, yet she also has the obligation of concerns for the pain from the spiritual poverty simultaneously. It is through 'the priority choice for the poor' that the Church should reveal God's love by putting into practice the material and spiritual sharing with those who suffers from poverty. To do so, the Church should live a life of the evangelical poverty just as Jesus Christ came to this world as a human being and practice a life of the evangelical poverty himself. When doing so, the Church will be able to share both the earthly blessing and the eternal happiness in the heavenly kingdom with those who suffer from poverty by being the church for the poor. This thesis concludes that the Church should live a life as alter Christ which reveals and shows Jesus Christ's love in this world by putting into practice the evangelical poverty through 'the priority choice for the poor'.

      • 가난에 대한 한국교회의 설교 연구

        이상욱 계명대학교 대학원 2010 국내석사

        RANK : 247807

        본 연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강단은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 모두에게 동등하게 열려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강단이 복음을 어느 한쪽만을 향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가로막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설교강단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 중에서 가난한 자에 그 비중을 맞추어 교회 강단의 관심이 어떠했는지를 조명해 보고자 한다. 특히 한국 사회는 6.25와 일제식민시대등을 거쳐 오면서 파괴와 가난 속에서 살아왔다. 그러나 70, 80년대에 이르는 동안 경제 성장을 주로한 산업화 과정으로 커다란 발전과 함께 그 과정에서 파생되는 많은 사회문제, 부도덕한 소비성 향락문화가 빈부 격차를 심화시켜왔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강단 역시 빈부 격차를 해소시켜야 할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다. 한국교회의 강단은 경제의 괄목할만한 성장과 함께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 앞에서는 교회의 대형화 성장을 위하여, 그리고 산업화라는 기치 앞에서는 오직 가진 자들을 위한 설교로 왜곡된 길을 걸어왔다. 이것은 많은 사회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교회가 물량주의에 편승하여 대형교회를 추종하는 현상이 나타났으며 부도덕한 사회현실과 정의의 문제를 외면하고 은사운동이나 기복신앙 일변도로 성장의 박차를 가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본 연구는 먼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가난에 대한 이해 그리고 가난한 자들에 대한 선포를 찾아볼 것이다. 그 다음, 웨슬리의 가난한 자에 대한 사상 및 해방신학과 민중신학, 사회복음주의 운동에 바탕을 둔 설교 연구를 통해 미래 설교의 큰 뿌리를 발견하도록 할 것이다. 더불어 한국에 들어 온 선교사들의 가난에 대한 설교가 어떠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그들의 설교가 당시 한국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지, 그리고 현대 한국교회의 주요 설교자들의 설교를 평가할 것이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valuate the Korean preaching on the poverty and the poor in biblical and theological perspectives. To the end, the study suggests the right understanding and ground of preaching on the poor which is able to solve social problems on the big differences between the rich and the poor. For it's presupposition is understood that the lack of peraching on the poor has brought about the risk of the Korean preaching. The pulpit for the balanced gospel should be opened to both the poor and the rich equally. If the pulpit is opened only to one side, it interrupts God's grace for the both sides. For the reason, the study has researched into how much the Korean pulpits have been interested in preaching the gospel focused on the poor. Korean society has gone through destruction and poverty especially during the colonial period under Japan and the Korean War. The fast economic growth in the 1970s and 1980s, however, caused a lot of social problems such as the immoral propensity to consume, pleasure-loving culture, especially gap between rich and poor, etc. But the Korean pulpits did not take the right role to reorder and reform those abuses. They have been cooked toward the rich only with church growth as the slogan under the capitalism and industrialization. Those phenomena of seeking after bigger church made churches to be just riding on the waves of mega church and derived problems such as abnormal pulpits that lead people to have bent faith which is seeking through mainly or only Shamanic Fortune Belief and Charismatic Movement. The study researches at the first step the Biblical understandings of Jesus' and his disciples' preaching on the poor. And at the second step, it observes John Wesley's sermons focused on the poor. Thirdly, this study understands the sermons based on Liberation Theology and Popular Theology, and the Social Gospel to discover big roots for future sermons. Finally, it evaluates the Korean pulpits on the poor, including missionaries and contemporary preachers, focused on their influences to the Korean people and their society.

      • 복자 앙트완느 슈브리에 신부와 교구사제의 가난

        장진석 광주가톨릭대학교 대학원 2015 국내석사

        RANK : 247807

        Much church documents present poverty as a realization of the second Vatican Council’s spirit. This is the most important factor asked after the Council. While, emphasizing the ownership and power’s logic in secular society, church has been criticized for becoming classified as middle class. The aspect of priest who lives in the world is different from the example of Jesus Christ who showed himself to be a pauper. In these circumstances, the Catholic Church faces new conditions. For the first time, in 2000 years of catholic history, the current Pope, Francis is known as the person who identifies with the poor. He has done this to the point of having a lower standard of living in comparison to his predecessors. He leads a simple life by taking a bus, practising social justice, and wholly shows the spirit of poverty. Therefore he encourages people to follow in his footsteps. In this context, based on the spirituality and life of nineteenth century diocesan priest of Lyon(France), Antoine Chevrier, I present the model of diocesan priest that is asked in modern times. He realized the priestly image that he cherished through repentance and established the concept of “Association of Prado Priest” that was revealed to other priests. I was especially, thuched by his living a humble life as a diocesan priest. He had passed down his spirit through “Association of Prado Priest.” Through Le tableau de St. Fons, Chevrier emphasized the essence of three steps shown by Jesus Christ, that is wholeness that christians should follow. Manger is the spirit of giving and poverty. The mystery of Incarnation as a poor child who descended and condescended upon us. Calvaria is a disconnection of this world, the mystery of confinement, including sacrifice as well as understanding the internal and external pain. Tebernacle is a perfect love. Through the Sacrament of Eucharist, Jesus Christ shows his love th christians who take part in the Resurrection. Through sharing bread, Jesus Christ’s love is represented. As far as he is concerned, knowing Jesus is everything, the other is nothing. As much as you put emphasis on the Gospel’s study, through this study, he managed to remove the material things. If the priest didn’t practice the thought to empty out, he would follow convenience and ease. Therefore it estranged the simple life as well as walking away from the natural priestly life. To prevent this result, Chevrier highlighted the importance of prayer and a spiritual awakening. As the current Pope, Francis’s teaching and life is shown to us, I found out that through Chevrier’s life and spirit, to the priest who leads a material civilized life, practice of “poverty” is a possible plan. Therefore, in modern crisis conditions, Chevrier’s life and spirit will become a prophetic model to restore the essential priesthood to the diocesan priests.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많은 교회문헌들은 공의회의 정신을 실현하는 데 있어 요청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를 가난이라고 제시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물질문명의 시대인 현대사회 안에서는 소유와 힘의 논리가 강조되고, 교회는 점점 중산층화 되어간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사제의 모습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보여주신 가난한 자의 모습과 다소 거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와 같은 현실 안에서 가톨릭 교회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000년 가톨릭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프란치스코’라는 교황명을 쓰는 현 교황은 ‘버스를 타고 다니는 검소한 교황’, ‘낮은 자세로 가난한 이들을 찾아다니는 목자’, ‘사회 정의를 실천해온 지도자’라고 불리면서 복음적인 가난의 정신을 직접 구체적으로 보여주며, 또한 이를 살도록 재촉하고 있다. 이런 차원에서 필자는 19세기 불란서 리옹 교구의 사제인 앙트완느 슈브리에 신부(Antoine Chevrier)의 삶과 가난 영성을 바탕으로 오늘날 요청되는 교구사제의 모습을 제시하고자 한다. 슈브리에 신부는 회심을 통하여 마음에 품었던 사제직의 모습을 구현하기 시작하였고, ‘프라도 사제회’를 창립함으로써 자신과 다른 사제들에게도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특별히 슈브리에 신부를 다루는 것은 그가 교구사제로 살면서 철저하게 가난한 삶을 살았고, 그의 정신이 오늘날까지 ‘프라도 사제회’를 통하여 이어져 전해지고 있으며, 무엇보다 그의 정신을 통하여 오늘을 사는 교구사제의 삶에 구체적인 방향성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슈브리에 신부는 ‘생퐁의 도표(Le tableau de St. Fons)’를 통해 모든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하는 완전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삶의 세 단계에 함축되어 있다고 강조하였다. 구유는 내어줌과 가난의 정신으로써, 가난한 아기의 모습으로 스스로를 낮추시어 세상에 오신 강생의 신비이다. 갈바리아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끊어버림과 희생을 포함한 구속의 신비이며 이를 통해 내적인면 뿐만 아니라 외적으로도 고통을 이해하게 된다. 감실은 완전한 사랑이다. 성체성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그리스도인에게 보여주시고 부활에 동참하게 하신다. 이로써 빵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표현해 준다. 이 세 요소는 슈브리에 신부가 추구했던 영성의 중심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세 요소의 의미 안에서 슈브리에 신부는 사제는 헐벗은 사람이고,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며, 먹히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 하였다. 또한 슈브리에 신부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전부이며 그 나머지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만큼 복음연구에 큰 중점을 두었으며, 복음연구를 통해 물질적인 일에 대해 비워나가는 작업도 함께할 수 있었다. 교구사제가 물질적인 일에 대해 비워내는 연습을 하지 않으면 편리함과 안락함을 따르게 되고 이로써 청빈의 삶과도 멀어질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사제 본연의 삶에서 멀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결과가 빚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슈브리에 신부는 기도의 중요성과 영적인 깨어있음을 강조하였다. 현 프란치스코 교황의 가르침과 삶이 보여주듯이, 물질문명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교구사제에게 ‘가난’의 실천은 충분히 실현 가능한 것임을 교구사제였던 슈브리에 신부의 삶과 정신을 통해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현대의 위기 상황 속에서 슈브리에 신부가 보여주었던 삶과 정신은 현대 교구사제에게 사제직 본연의 의미를 회복하는 예언적 삶의 귀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가난에 따른 수치심 경험과 극복 노력에 관한 자문화기술지

        김준근 인제대학교 교육대학원 2019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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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에 따른 수치심 경험과 극복 노력에 대한 자문화기술지 인제대학교 교육대학원 상담심리전공 김준근 지도교수 김명찬 본 연구는 한 개인이 외상적으로 경험한 가난으로 겪게 되는 수치심, 학업좌절 내면화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개인이 경험하게 되는 내·외적인 갈등양상을 살펴보고 그에 따른 자기애적 상처와 회복을 위한 재구성과정에 중점을 두고 자문화 기술지를 통하여 고찰해 보는데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하여 가난의 내외적 갈등 양상을 Kohut의 자기심리학이론을 개관하여 수치심과 자기애적 상처가 병리적 현상으로 내면화 되고 어떻게 학업좌절의 양상으로 표면화 되어 나타나고 성인이후의 삶에서도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고 자문화기술지(autoethnographer)라는 연구방법을 통해 인지, 정서를 다시 경험하고 재구성하여 이것이 가난을 극복하는 노력과정으로 연결되는지에 초점을 두고 연구해 보고자 한다. 본 연구는 자문화기술지로 개인의 경험적 기술을 연구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가난으로 인한 내면화된 수치심과 여기서 파생되어 나오는 학업좌절, 무기력, 좌절의 양상에 대해 살펴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과정을 기술하였다. 가난으로 인한 수치심 경험 인식과 관련하여 사용된 자료는 기억자료와 ‘나’의 초기기억에서부터 성인중기까지의 인지적, 정서적 경험에 관한 기억자료를 기반으로 하였으며, 청소년기 작성한 일기와 성인 이후 작성한 성찰일기를 참고 하였고, 관련 인물들의 인터뷰를 녹음하여 전사하였으며, 지도교수와의 개인, 집단 면담 시 대화내용들을 전사하여 참고하였다. 본 연구의 구성은 가난의 정의, 특성, 문제행동, 이에 영향을 끼치는 요 인으로서의 수치심, 학업좌절, 자기심리학, 정신화와 관련된 내용을 이론 적 배경으로 정리하고, 연구결과에서는 자료를 코딩하고 분석하여 ‘가난을 부끄러워 했던 나’, ‘애쓰고 노력하나 여전히 가난한 나’, ‘존재에 대한 탐 색’으로 범주화하였다. 또한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정서를 명확히 인지하 고, 인지된 정서를 표현하는 것을 가난을 극복하기 위한 회복과정으로 보 았다. 본 연구는 가난에 따른 수치심, 좌절경험에 대한 인지적, 정서적 경험 들을 인식하고 수용하여 재구성하는데 치료적 함의를 두고 연구자 자신의 자기이해와 비슷한 문제들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의 역동을 이해하고 치료의 단서를 제공하는데 기여하기를 기대한다.

      • 성 프란치스코의 가난과 그리스도를 따름의 관계에 대한 고찰 : Research of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poverty of St. Francis and the following of Christ.

        권우영 부산가톨릭대학교 대학원 2005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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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하고 나서 나를 따라 오너라.”(마르 10, 21 ; 마태 19, 21.27 ; 루가 18, 22.28). 가난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생애에서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탄생부터 가난하셨고, 그 생애 동안은 더욱 가난하셨으며, 마지막 십자가 위에서는 가난의 절정을 이루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몸소 가난의 삶을 사셨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들에게도 당신처럼 가난의 삶을 살기를 요구하신다. 그래서 가난은 지금까지 그리스도인들의 덕목으로써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 왔으며 신앙과 영성에 있어서도 핵심적인 것이다. 이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며, 앞으로도 꾸준히 지향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하지만 오늘날의 사회는 가난과는 거리가 먼, 돈 없이는 살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 ‘돈 없이는 사랑마저도 하기 힘들다’라는 생각이 들 만큼 부를 추구하는 현실이 된 것이다. 그래서 가난은 현실에서 더 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는, 마치 있어서는 안 될 악한 것으로 까지 인식되고 있다. 이에 대하여 교회는 몸소 가난한 이들에게 끊임없는 관심과 배려를 쏟음으로써 그리스도 신비체로서 사명을 완수해야 할 의무가 있다. 비록 세상이 가난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교회는 가난을 추구하며 항상 가난한 이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사회의 불의한 모습은 현 교회 내에서도 부분적으로 발견이 된다. 소위 돈 많은 사람이 교회 내에서도 대우를 받으며 그 능력과 위치를 좌우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현시대의 교회는 자칫 사회의 흐름 안에서 가난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변질시킬 수 있는 위험에 놓여 있게 되었다.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닮고자 열망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가난이 요구된다. 하지만 현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가난이 필요함을 알면서도 그것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래서 본인은 이러한 문제점을 염두에 두고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가난이 무엇인지를 찾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에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고 일체의 소유를 버린 성 프란치스코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가난한 삶을 통해서 본인이 찾고자 한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었다. 따라서 본 논문은 성 프란치스코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어떻게 따를 수 있는지에 대하여 고찰해 본다. 특히 프란치스코의 가난을 중심으로 그리스도를 따름에 대하여 다룬다. 바로 프란치스코의 생애와 영성을 살펴봄으로써 우리가 지향해야 할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논문은 프란치스코의 가난을 통하여 현재의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가난하게 사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라는 것을 밝혀내고 있다. 본 논문은 총 4장으로 구성된다. 먼저 제1장에서는 가난, 특히 그리스도 안에서의 가난을 살펴보고 있다. 제1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면에서 가난한 분이시라는 것을 말하면서 그리스도의 삶은 오로지 인간의 구원을 위한 가난한 삶임을 밝히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난한 모습으로 태어나셨고, 그 삶은 더욱 가난하셨으며, 죽음의 순간까지도 가난하고 초라하셨다. 이는 예수님께서 몸소 하느님의 영광을 비우시고 비참한 인간이 되시어(필립 2, 6-7 참조), 인간을 위해 희생되신 십자가 사건에서 잘 드러난다.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서계시며 그들에게 끊임없는 관심과 사랑을 주셨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불리는 이들을 ‘짓밟히는 사람들’, ‘핍박받는 사람들’, ‘묶인 사람들’(루가 4, 18 ; 마태 5, 10) 까지도 포함하여 생각하심으로써 가난의 범위를 물질적인 것에 국한하지 않으셨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가난하고 억눌린 이들 안에서 발견되시며, 언제나 가난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계심을 알 수 있다. 제2절에서는 가난에 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첫 설교를 “가난한 자들은 행복하다.”는 말씀으로 시작하신다. 그러면서 세상에 사도들을 보내실 때(루가 9, 3)나, 참다운 제자의 가장 중요한 요건중의 하나가 가난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초탈하라고 가르치신다(루가 6, 27 ; 마태 5, 40). 가난에 대한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영신적 가난과 물질적 가난으로 대별해 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영신적 가난(정신적 가난)이 진정한 보화를 구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가장 필요한 조건임을 역설하신다. 그러면서 하느님의 뜻에 기꺼이 자신을 내어놓으려는 마음가짐과 삶의 태도를 요구하신다. 이럴 때 인간은 비로소 하느님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마태 10, 37 이하). 물론 예수님께서는 물질적 가난에 대해서도 결코 소홀하시지 않으시는데, 먼저 당신을 따르고자 하는 모든 제자들에게 지상 재물에 대해 경계심을 갖도록 가

      • 가난하신 그리스도를 따름 :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영성과 한국교회

        박미현 감리교신학대학교 대학원 2022 국내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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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란치스코는 인간을 사랑하셔서 높고 높으신 자리를 버리고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신 가난하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았다.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은 철저한 겸손과 사랑으로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기를 낮추셨다. 복음서의 그리스도를 프란치스코는 온 몸과 마음, 전 존재로 만나고 따랐다. 프란치스코의 영성은 가난, 그리스도를 따르는 가난이다. 오늘날 사회에서 비호감에 이른 한국교회가 프란치스코처럼 가난하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 가난의 영성을 바라보고 실천할 때 한국교회에 새로운 희망과 신비의 샘물이 흐를 수 있을 것이다. 12세기 유럽의 고정된 정치, 사회, 문화 환경에서 인구증가와 농업의 발전은 잉여 농산물을 거래하며 상업의 발전을 야기했다. 경제 형태는 급격하게 변화되었고, 상업을 기반 하여 화폐가 거래되는 도시가 발달하게 되었다. 새로운 계급으로 대두된 도시의 구성원들은 새로운 시대에 개인의 정체성을 찾기를 원했다. 교회는 봉건사회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시대의 변화와 사람들의 열망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변화와 혼란의 틈에서 상인의 아들 프란치스코는 복음서의 그리스도를 가난으로 이해했다. 특히 나환우와의 만남과 그들과의 동거를 통해 그리스도를 따르는 가난을 자기화(自己化)한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오신 성육신(成肉身) 사건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절망의 구석까지 오신 것이다. 그것은 예수가 오신 곳에 더 이상 절망과 차별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은 모든 것이 선하시기에 존재 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은 사랑하시고, 그렇기에 모두 연합할 수 있다. 사랑의 파노라마는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심으로 더 역동적이 된다. 가난하신 그리스도를 따를 때, 그가 누구든 사회적 계급과 차별의 장막을 넘어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형제가 된다. 프란치스코를 통해 그가 누구든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따를 때, 높은 교회와 수도원의 벽을 넘지 않아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누구든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인간됨의 존재감을 누리는 것이요, 인격적 정체성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시대 종교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찾던 도시의 구성원들은 프란치스코의 실천적 영성에 강력하게 응답했다. 뿐만 아니라 나환우와 같은 사회 약자들 역시 차별의 대상이 아닌 인간이며 형제가 될 수 있었다. 프란치스코의 영성은 11세기에 어느덧 계급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부유해져 신비를 잃어가던 교회에 자극을 주었다. 대한민국은 산업화를 거치며 국가 주도하에 물질만능주의, 경제제일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휩싸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는 경제발전을 위한 사회 정신적 구조로 과거 유교에서 ‘가족주의’를 선택적으로 부활시킨다. 가족주의는 가부장적 가족형태로서 개인의 정체성보다는 가족집단의 유대의식을 강조한다. 이러한 가족주의 형태는 단순히 가족의 개념을 넘어 학교, 회사, 공동체, 나아가 국가에 이르기까지 유사가족주의 형태를 띤다. 이러한 가족주의는 하나의 이념과 목표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강요한다. 산업화시기를 거치며 한국교회 역시 성공과 부를 그대로 받아드리며 이데올로기의 조력자가 되었다. 교회에서도 가족주의는 그대로 스며들었다. 교회 역시 과도한 이기주의, 배타성, 경쟁의식을 통해 성장을 꾀했다. 이때, 개인과 약자의 정체성과 목소리는 묵인되기도 한다. 오늘날 사회 구성원들로 ‘비호감’이라는 부정적 인식의 한국교회 정체성의 뿌리가 바로 산업화시기의 물질만능주의, 가족주의에 있다. 프란치스코의 영성을 통해 다시 복음서의 가난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한국교회의 새로운 길이 모색될 것이다. 성공에 반하는 물질과 명예의 무소유(無所有)의 불편함이 죄나 벌이 아닌 그리스도가 가신 길임을 기억하고 실천해야겠다. 무너지고, 불편한 한 개인을 통해 그리스도를 본 프란치스코처럼 과거 산업사회의 이데올로기를 벗어버리고, 신음하는 미세한 가난한 이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겠다. 신음하는 그 한명이 하나님이요, 형제, 자매임을 프란치스코가 말하고 있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가난하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실천을 통해 한국교회의 소망이 깃들고, 신비가 다시 빛날 것이다.

      • 가난과 분배에 대한 정의와 제자도에 관한 누가의 관심 연구

        장동현 한일장신대학교 한일신학대학원 2004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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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박한 재림 사상을 가지고 살아가던 초대교회에 예수 재림의 지연은 많은 문제를 안겨주었다.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재림의 지연에 따른 신학적인 해답을 찾아야 했다. 또한 재림의 지연으로 인한 땅에서의 삶에 나타나는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이것은 공동체에 위해를 가하는 외부적인 핍박의 문제도 있었지만 공동체 내부의 불평등과 빈부의 격차문제도 있었다. 누가는 이러한 문제에 본격적으로 대처하였다. 빈부의 격차에 대한 문제는 사회에서 천대받고 무시당하는 소외계층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누가는 예수의 출생에서부터 예수의 오심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기쁜 소식이라고 선포한다. 누가는 더 나아가 평지설교를 통하여 가난한 자에 대한 복만을 선포한 것이 아니라, 부자에 대한 화를 선포함으로 자신의 뜻을 더욱 확실하게 한다. 누가의 가난에 대한 이해는 물질적으로 이웃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절대 빈곤을 이야기한다. 이렇게 이웃의 도움이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을 돌보지 않는 사람은 누가에게 있어서 저주의 대상이 된다. 더군다나 가난한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서기관들이나, 넉넉한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지 못하는 부자 청년은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렇다고 누가가 사유재산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사유재산을 가졌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죄인은 아니다. 누가는 재산의 분배를 이야기하면서 재물을 가진 것 자체를 문제 삼지는 않는다. 다만 재물의 사용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부유한 삭개오를 모범적인 비유로 이야기하면서 재산의 절반을 나누고자 하는 삭개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고 선포한다. 죄인이며 부자인 삭개오의 회개는 재산의 나눔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또한 고넬료의 예에서 보았듯이 가지고 있는 소유로 구제하는 일에 대하여 "경건한 사람" 이라는 칭호를 붙여준다. 반면 누가는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에 대하여는 엄격한 잣대를 제시한다. 부자 관원의 예에서 누가는 "모든 것"의 포기를 요구한다. 예수의 제자가 되어 공동체의 추구점을 이루기 위하여서는 재물에 대한 완전한 포기가 전제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누가는 재물에 대하여 완전한 포기를 한 사람만이 당시 공동체의 지도자인 제자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누가가 이렇게 분배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은 공동체 안에 있는 가난한 자들을 방치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누가가 지향하는 공동체는 나눔을 실천하는 나눔 공동체이다. 그리하여 먼저 줄 것을 강조하며 이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연결시킨다. 누가가 추구하는 나눔 공동체는 다시 받을 것으로 생각하고 나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을 완전히 포기하고 주는 나눔의 공동체이다. 누가에게 있어서 제자도는 예수의 가르침만을 듣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의 인격을 닮고 생활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부르심을 받고 그의 인격과 헌신에 동참하는 사람은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이다. 베드로가 소명을 받을 때나(눅 5:1~11), 레위가 소명을 받을 때(눅 5:27~28), "모든 것"의 포기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베드로가 소명을 받을 때는, 인간이 하나님을 만났을 때의 반응을 나타내면서 죄인인 인간이 회개할 때에 모든 소유의 포기가 따라옴을 강조하고 있다. 세리 레위는 죄인이며 부자였다. 그러나 죄인이며 부자인 레위도 "모든 것"을 포기할 때에는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누가는 예수의 제자가 되는 조건으로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제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그가 죄인이든, 부자든, 경건한 사람이든 외부적인 조건은 중요하지가 않다. 다만 그가 "모든 것"을 버리는 조건만 충족하면 누구든 제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일은 당시의 상황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한 예로 당시의 "집단" 지향적인 사회에서 가족을 버리는 것은, 가족의 보호로부터 분리 되는 것을 의미하며, 가족에게 수치를 안겨주는 것을 의미하였다. 누가에게 있어서 "모든 것"의 포기란 "가족의 포기"와 "자기 목숨의 포기"와 "모든 소유의 포기"를 의미한다. 이것을 포기하지 못하면 제자가 될 수 없다. 동시에 누가는 제자가 되기 전에 충분히 숙고할 것을 요구한다. 망대를 쌓기 전에 가진 돈을 계산하듯이, 전쟁을 하기 전에 충분히 숙고하듯이, 제자가 되기 전에 경솔히 결정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제자직을 충실히 수행하지 못하면 맛을 잃어 버려진 소금과 같이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말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눅 14:35) 라는 표현으로 강조한다. 누가의 공동체에서 추구했던 것 중의 하나는 "재물의 정당한 사용"이었다. 누가는 그의 공동체에게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떠돌아 다니며, 구걸하며 살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다만 예수의 정신과 재물의 올바른 사용을 강조한 것이다. 예수의 첫 설교는 이사야 56:19의 "주의 은혜의 해"인 "희년"을 선포한다. 이는 사회경제적으로 볼 때 빛의 탕감을 의미한다. 즉 재물의 올바른 사용을 처음부터 제시하고 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보면 사랑은 말이나 이론이 아닌 자기 소유의 적절한 희생이나, 사용을 통한 구제에 있다. 다시 말하면 재물의 정당한 사용이 없으면 사랑도 없는 것이고 친구도 아닌 것이다. 어리석은 부자는 오직 자기의 배를 채우는데만 관심이 있다. 누가에게 있어서 이런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이는 자기만 생각하는 부자를 향한 경고이다. 반면 불의한 청지기는 임박한 심판의 도래에 지혜롭게 대처하는 민첩함을 보임으로 칭찬을 받는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는, 두 사람 모두의 도덕성이나 종교성에 관하여는 언급이 없다. 그럼에도 부자는 하데스의 고통을 다한다. 이것은 누가에게 있어서 재물을 나누는 생활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세리장 삭개오는 그가 비록 죄인이며, 부자이지만 재산의 절반을 나눈다는 약속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다. 재물의 올바른 사용이 누가에게 있어서 복음이라는 도식을 가지게 하는 좋은 예이다.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는 남의 재산에 욕심내지 말 것을 경고하는 비유다. 즉 부유한 자들의 나눔도 중요하지만 소작농들도 타인의 재산을 인정하고 욕심을 버려야 한다. 이렇게 누가는 그의 복음서를 통하여 재산의 포기, 또는 올바른 사용을 강조하고 있다. 누가의 공동체가 추구했던 또 한가지는 "나눔의 공동체"였다. 누가는 그의 두 번째 문서를 통하여 나눔 공동체의 구체적인 모습을 그리고 있다. 초대교회 공동체(행 2:42~47)의 삶의 모습은 누가가 꿈꾸던 공동체의 모습이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으로 나눔 공동체를 실현시키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 마음에 소유욕을 극복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나눔 공동체는 소유욕(탐욕)을 극복한 사람들만이 이룰 수 있는 공동체이다. 또한 마가의 다락방 교회(눅 4:32~37)에서도 성령이 충만한 무리들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물건을 서로 통용하게 되었다. 누가에게 있어서 성령 충만은 물건을 나누는 결과로 나타난다. 누가의 나눔 공동체에 대한 추구는 초대 교회에 새로운 조직(집사)을 만들면서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것은 무절제하게 나누는 것이 아니라 공평한 나눔을 추구 하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예루살렘 교회가 어려울 때 안디옥 교회의 너그러운 반응은, 누가가 교회간의 나눔과 국가간의 나눔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증거해 준다. 에베소 장로들에게 하는 바울의 고별 설교도 나눔의 추구를 강조한다. 여기에서 누가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주님의 말씀을 상기시킨다. 누가가 추구했던 나눔 공동체는 자발적인 공동체이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공동체이다. 이러한 누가의 추구는 오늘날 한국교회에 많은 교훈과 충격이 된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크게 몇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기복주의 신앙이다. 기복신앙은 자신의 현실적인 조건의 충족을 그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사상에는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이나, 이웃에 대한 배려의식이 자리잡지 못한다. 두 번째 물질주의 사상이다. 모든 성공의 척도나 복의 추구가 물질에 매여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물질주의는 기독교의 근본 정신과는 거리가 멀다. 사치와 낭비가 죄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세 번째는 반지성주의다. 이러한 사상은 기복주의 사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기독교에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면을 제거하면, 맹목적이고 광신적인 사상이 나타날 우려가 있다. 네 번째는 배타주의이다. 신앙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문제와 타 집단에 대한 적대감을 구분하지 못하는 배타성은 교회분열과 사회분열이라는 커다란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다섯 번째는 집단이기주의 이다. 이 집단이기주의는 배타성과 같이 공동체의 화합을 파괴한다. 이러한 사상의 확대는 교회간의 교류와 협력도 방해하는 요소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누가의 사상과 비교해 볼 때 오는날에는 누가적인 제자도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 진다. 누가의 부와 가난, 분배, 제자도는 오늘의 교회에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사상이며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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