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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인 소외로 인한 억압으로부터의 상호해방 : 헤겔 '화해' 개념의 현대적 재구성을 통하여

        정진우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2019 국내박사

        RANK : 249775

        This study aims to critically reflect on today’s anti-religious culture from the perspective of theory of Divine-Human Relation explained in Hegel’s philosophy and to lay a new foundation for a theoretical and practical possibility in philosophy of religion to realize the authentic religious idea, The two greatest contradictions appearing in the religion of our Times are the tendency of idolatry in which religious representations or religious symbols take the place of God and the tendency of religious blindness through which religion, originally intended for human liberation, becomes a tool to enslave human being. After the declaration of Kant’s philosophy which announces the intellectual severance of God and human being, the religious culture of the Enlightenment is split or differentiated into two opposite poles. The first is the secular (atheistic) trend which no longer seeks intellectual reconciliation between God and human being and vows to relate only to the physical realm which it can intellectually engage with. The second is the religious (theistic) trend which seeks alternative forms of faith to continue the divine-human relation. This religious trend is also divided into ‘subjective Religion’ which seeks the union with God in subjective emotion, not objective intellect and ‘positive Religion’ which mistakenly serves religious symbols or representations as God. However, subjective religion which anthropomorphizes God falls into idolatry in which human emotion arbitrarily distorts God (the distortion of God by human) and positive religion where human submission to religious representation creates blind faith that enslaves human freedom (the enslavement of man by God). These two ways of unification do not create a tension relation where freedom and truth are intersubjective. They rather produce a relation of unilateral domination or submission in which man dominates God arbitrarily (the negation of God by human) and God oppresses man forcefully (the negation of human by God). The anti-religious phenomena which modern philosophy of religion is problematizing and fighting fiercely to eliminate all kinds of distortion and oppression and to recover the authentic idea of Christianity are the idolatry derived from subjective religion and the blind faith derived from positive religion. If it is true to affirm that going beyond blind faith toward reflective faith though doubt and inquiry is what the life of human Jesus tried to demonstrate as the authentic idea of Christianity and if it is the mission of philosophy of religion to recover this life of Jesus here and now through our living, then the most genuine task of philosophy of religion is to critically reflect on ‘idolatry’ and ‘blind faith’, the two sources of every religious absurdity. In this sense, the Title of this study is ‘mutual liberation from the oppression caused by Divine-Human Alienation.’ Here, ‘Divine-Human Alienation’ means the relation through which religious idolatry produced by human’s self-absolutization distorts the authenticity of God and blind submission to religious representation enslaves human freedom. ‘Oppression’ means the very religious reality triggered by the contradiction found in the religious relation described above. The subject matter corresponds to the concluding declaration of this study which maintains that freedom which makes God true and truth which makes human free are the two genuine ideas of Christianity. This can be also considered as a new principle of reconciliation for mutual liberation of God and human being. To explain and justify the ground of this declaration is the ultimate purpose of this paper. It is also the philosophical process this study has to faithfully demonstrate. Among all the thought projects in philosophy of religion beneficial to this aim, our study has chosen the philosophy of Hegel, especially his approach taken in ‘the theory of Divine-Human Reconciliation’ as our key. If theology is human’s questioning about God and the questioning comes from the urgent demands of human life, the essence of theology must be the perception of God and the essence of perceiving God must be the perception of Divine-Human Relation. Another reason why Divine-Human relation is the core matter in philosophy of religion is that it is absolutely crucial in determining how an idea of religion and a form of faith mutually shape each other. For example, if the ideal Divine-Human Relation should be that of separation, God will be regarded as the wholly Other completely unapproachable to human being. Since human being cannot be unified with such a transcendent being, human being will consider the blind enslavement to God as the greatest achievement of faith. On the contrary, if the ideal Divine-Human Relation should be that of absolute reconciliation, God will be regarded as the agent of love who tries to communicate with humans unceasingly and humans will consider being born again to be the free divine agents in the reconciliation as the greatest achievement of faith. Therefore, Divine-Human Relation is not only crucial in determining a form of faith but it is also the ultimate standard by which a form of religion is judged. The reason why this study revisits Hegel’s thought to criticize today’s religion and engage in faith reflection is that the religious and philosophical problems which Hegel struggled with share the homeogenous source with our problems. Hegel thought the philosophical demand of his age had its root first in the vulgar secularity, produced by the severance in Divine-Human Relation and secondly in the painful differentiation within life, caused by oppositions and contradictions from empty religiosity. Hegel considered the ultimate task of his philosophy to be the construction of a system of science through which every human being can be intellectually reconciled with God. This study will utilize Hegel’s philosophy which has its own unique historical background as our philosophical mirror to critically reflect on our times’ anti-religious culture. It will definitely guide our pursuit to find a new alternative way of thought to overcome both the religious culture based on agnosticism toward the possibility of perceiving God and various forms of dogmatism found in religious fundamentalism which are also reactions to the agnosticism. This study additionally aims to rediscover the radical nature of Hegel’s thought and its insightful contributions to the formation of modern philosophy of religion by reinterpreting and restructuring his philosophy through using ‘Divine-Human Relation’ as our major hermeneutic tool. 이 논문의 목적은 헤겔 철학에 나타난 ‘신-인 관계론’을 중심으로 오늘날 우리 현실의 반종교적 종교문화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이로부터 진정한 종교적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종교철학의 이론적-실천적 가능성의 토대를 마련해 보는 것이다. 오늘날 현실종교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모순이라면 인간의 자유를 위한 종교가 도리어 인간억압의 도구로 전락해 버린 ‘맹목종교’의 경향과 인간의 욕망이 빚은 갖가지 종교적 망상들이 신의 자리를 대신해 버린 ‘우상숭배’의 경향을 들 수 있다. 이 두 가지 종교문화는 계몽주의의 정상에서 일어난 신-인 소외의 문화가 빚어낸 반종교적 종교현상들이다. 신과 인간의 지성적 단절을 선언한 칸트의 비판철학 이후, 계몽주의의 종교문화는 인간이 신을 지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면, 더는 신과의 지성적 화해를 염원하지 않고 다만 지성이 관여할 수 있는 물질세계와만 관계하겠다는 세속적인 문화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과의 관계를 이어갈 대안적인 믿음의 형태를 모색하는 반지성적인 종교문화로 분열된다. 나아가 이러한 종교적인 문화는 또 다시 우리에게 객관적으로 주어진 종교적 표상들을 신 자체로 숭배하는 ‘실정종교(Positive Religion)’와 주관적인 심정 안에서 신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주관종교(Subjektive Religion)’로 분열된다. 하지만 인간이 신의 표상들에 복종하는 ‘실정종교’는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맹목신앙’을 낳게 마련이며(신에 의한 인간의 억압), 신을 인간의 내면으로 동화하는 ‘주관종교’는 신을 인간의 자의에 따라 왜곡하는 ‘우상숭배’를 낳게 마련이다(인간에 의한 신의 왜곡). 이 두 가지 화해의 방식은 신과 인간 혹은 진리와 자유의 역설적인 공존 혹은 상호주관적인 긴장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신을 왜곡하거나(인간에 의한 신의 부정), 인간을 억압하는(신에 의한 인간의 부정) 일방적인 지배와 예속의 방식에 그칠 따름이다. 오늘날 종교철학이 현실 그리스도교계에 안겨진 온갖 왜곡과 억압이라는 타락상에 맞서 진정한 그리스도교의 이념을 성찰하고 또 그 이념을 복원하고자 문제 삼는 현실의 수많은 반종교적 종교현상들은 바로 이러한 주관종교의 ‘우상숭배’와 실정종교의 ‘맹목신앙’이라는 두 줄기에서 자라난 썩은 가지들이다. 맹목적인 신앙을 넘어, 의심과 물음을 거쳐, 성찰적인 신앙으로 거듭나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참 신앙이라는 것을 가르치고자 세상의 박해를 무릅썼던 것이 인간 예수의 삶이자 그가 보여준 그리스도교의 참된 이념이라면, 그리고 그러한 예수의 삶을 ‘지금’ 그리고 ‘여기’라는 현재의 실존적 터전에서 늘 새롭게 복원하고자 하는 것이 그리스도교 종교철학의 학문적 사명이라면, 그 모든 종교적 부조리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맹목신앙’과 ‘우상숭배’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야말로 종교철학의 가장 본원적인 사유작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논문의 주제는 ‘신-인 소외로 인한 억압으로부터의 상호해방(Mutual Liberation from the Oppression caused by Divine-Human Alienation)’이다. 여기서 ‘신-인 소외’란 신-인의 지성적 단절 이후의 종교문화, 즉 인간의 자기 절대화가 낳은 종교적 우상이 신의 본래성을 왜곡하고, 종교적 표상에 대한 맹목적 복종이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종교적 관계의 모순을 의미하며, ‘억압’이란 바로 그러한 종교적 관계의 모순이 유발하는 종교적 이념과 종교적 현실의 모순을 의미한다. 이는 신을 진리하게 하는 자유와 인간을 자유하게 하는 진리야말로 그리스도교의 진정한 이념이라는 이 논문의 결론적 선언에 따른 것으로, 그것이 곧 신과 인간의 ‘상호해방’을 위한 새로운 화해의 원리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선언의 근거를 해명해 나가는 것이 이 논문의 철학적 과정이자 그 궁극적 목적이다. 이 논문은 이러한 종교철학적 사유기획을 이끌 다양한 사상적 틀 가운데 헤겔의 철학, 그 중에서도 그의 사상 전체를 태동시키고 또 끊임없이 역동케 했던 화두로서의 ‘신-인 관계론’을 그 접근과 해결의 열쇠로 삼고자 한다. 신학이 곧 신에 관한 인간의 물음이라면, 그리고 그 물음의 원천이 인간 삶의 절박한 요청에서 비롯한 것이라면, 신학의 본질은 곧 신에 대한 인식이요, 신에 대한 인식의 본질은 곧 ‘신-인 관계’에 대한 인식임을 부인할 수 없다. 또한 신-인 관계에 관한 탐구가 종교철학에서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곧 종교의 이념과 신앙의 형태를 구분하는 결정적인 준거가 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신-인의 이상적 관계를 절대적인 분리로 본다면, 신은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미지의 초월자가 될 것이고, 인간은 그러한 초월자와 하나 될 수 없음에 그의 맹목적인 노예가 되는 것을 최고의 신앙으로 여길 것이며, 반대로 신-인의 이상적 관계를 절대적인 화해로 본다면, 신은 인간과 끊임없이 소통하는 사랑의 주체가 될 것이며, 인간은 신과의 영원한 화해 속에서 자유로운 신적 주체로 거듭나는 것을 최고의 신앙이자 신앙의 궁극목적으로 여길 것이다. 따라서 신-인 관계는 신앙의 형태를 결정하는 핵심적인 사안일 뿐만 아니라 종교의 형태를 결정하는 최종적인 준거라고도 할 수 있다. 이 논문이 우리 시대의 종교비판과 신앙성찰을 위해 ‘헤겔(G. W. F. Hegel)’이라는 근대의 사상가를 이 시대의 절망 속에 새롭게 소환한 이유는 현재 우리가 가진 문제의식과 당시 그가 가졌던 문제의식이 이백 년이 넘는 긴 시간의 간격에도 불구하고 동질적인 근원을 갖는다는 데 있다. 그는 그 시대의 철학적 요청과 철학적 욕구의 근원을 신과 인간의 지성적 분리로 인한 저속한 세속성과 공허한 종교성의 대립과 모순 그리고 거기에서 싹튼 삶의 분열과 고통에서 찾는다. 그리고 그는 충만한 내용을 갖춘 학문적 형식을 통해 누구나 신과 지성적으로 화해할 수 있는 공교적인 체계구축을 자기 철학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는다. 이 논문은 그러한 종교문화의 배경에서 등장하고 자라난 그의 철학적 진리내용을 오늘날 우리시대의 반종교적 종교문화를 반성하고 성찰하는 사유의 척도로 삼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오늘날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신 인식불가론의 종교문화나 거기서 비롯하는 모든 독단적인 종교형태를 극복하는 대안적 사유의 가능성을 모색해 볼 것이다. 동시에 이 논문은 그의 전체 철학체계를 ‘신-인 관계’라는 틀로 재구성하고 재해석함으로써 그의 사상에 깃든 갖가지 오해들로부터 그를 변론하고, 그 안에서 이제껏 숨겨져 왔던 그의 급진적인 사상의 진면목을 들춤으로써, 그의 사상이 오늘날 우리의 종교철학적 사유에 주는 신선한 통찰들을 다각적으로 발굴해 보고자 한다.

      • "élan vital"에서 "élan d'amour"로 : 베르크손 철학에 있어서 신비적 경험의 철학적 의의

        김주용 가톨릭대학교 대학원 1999 국내석사

        RANK : 249774

        본 논문은 베르크손의 철학에 있어서 생명의 고유한 특성으로서 'élan vital'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élan vital'이라는 명시적 표현은 베르크손 철학에 있어서 「창조적 진화」이후에서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지만, 본 논문을 통해서 그의 철학이 유기적 전체성을 가지고 있고, 'élan vital'이 전체적 연관성 속에서 베르크손 철학의 성과이면서 동시에 그의 철학적 사유의 진행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이러한 사유의 진행은 상이한 관심사를 꿰뚫고 진행되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그의 마지막 관심사로서 '종교'에 있어서까지 유지되고 발전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베르크손의 철학은 구체적으로 논하는 직관적 내용, 말하자면 그것 자체가 논하는 핵심과 철학적 사유라는 운동을 야기시키는 충동적 내용을 포괄하고 있다. 예컨대 그의 철학은 좁은 의미에서 '철학'이라는 이성적 사유의 과정 전면(前面)에 '감동'이라는 측면을 발견하고 있으면서, '철학'을 직관과 이성. 감동과 이성적 사유라는 보다 넓은 의미의 철학적 과정을 보여 준다. 마찬가지로 본 논문의 진행에 있어서, 그 출발은 베르크손의 철학이 가진 직관적 충동에 힙입어 전개해 나간 '철학'이 된다 서구 유럽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더 나아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자유와 필연. 창조와 진화이라는 개념의 갈등은 철학을 괴롭히는 문제였다. 그러한 철학적 갈등으로인해 상반되어 보이는 듯한 개념들을 다룸에 있어서 기계론이나 목적론이라는 양극단의 설명으로 치우쳐 왔다. 그러나 베르크손은 '자유'와 '창조'라는 개념이 만일 그것이 '나'자신의 고유한 의지의 행동이라면 개념적 합리성과 구분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본 논문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를 위해서 베르크손은 철학에 있어서 인식론적인 전환을 요구하였다. 사실 '지속'의 발견이 그의 철학에서 먼저 나타나지만, 실재적 시간으로서 지속은 직관에 의해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이기에 '직관'에 대한 규정이 '지속'에 대한 규정에 논리적으로 앞선다고 볼 수 있다 방법으로서의 '직관'은 무엇보다도 지속 안에서 사유하는 것이다. 그는 '분석'에 대한 직관의 우선성을 밝히고자 하였다. 많은 철학자들이 실재를 설명하는데 에만 만족하고 다시금 실재에 대해서 그렇게 분석된 개념들로 적용함으로써 철학적 '정확성'에 이르는데 실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철학자는 실재에 대해서 먼저 직관적으로 접근하는 자세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직관을 통해서 공감할 때, 실재의 지속의 흐름과 함께 하게 된다. 이때 실재적 시간으로서 지속은 '연속성'과 '다질성'이라는 측면에 접촉하게 된다. 말하자면 지속은 멜로디와 같이 하나의 전체성을 이루면서 전진해 나가는 다질적인 변화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존재의 그러한 역동성은 존재의 동일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공간적이고 수학적인 개념으로 환원될 수 없는 실재적 시간으로서의 지속은 연속성이면서 동시에 다질성이 화합할 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공간적 개념은 인간의 지능의 선천적 경향에 부합하는 것이다. 반면 실재의 연속성에 직관을 동해서 참여할 때, 거기에는 계기들의 연속이 아니라, 연속하는 지속의 불연속성, 말하자면 다질성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실재에 있어서 '차이'와 '발전'을 설명할 수 있는 단초가 된다. 또한 그것은 변화, 특히 내면적 변화와 생명 세계의 진화의 특성을 묘사할 수 있는 개념으로서 'élan vital'의 면모인 것이다. 베르크손 철학에서 'élan vital'은 비록 생명 세계의 진화에서 발전된 개념이지만 「물질과 기억」에서 '기억'이라는 측면에서 암시적으로 내포되었다고 생각된다. 자아의 변화에 있어서나 생명 세계의 진화에 있어서, 인격과 생명의 고유한 특징은 '예측 불가능성'이라는 것이다. 각각은 고유한 사건을 이루면서 '이전에 있지 않았던 것'을 이루어 낸다. 물질과 생명의 이분법을 극단으로 추구하다보면, 생명의 고유한 특성이 바로 'élan vital'이라는 것이다. 그 극단에서 생명은 물질의 법칙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하다. 이러한 생명 세계의 진화는 인간에게 있어서 일종의 투쟁의 역사를 거쳐 '지능'의 방향으로 성취되었다. 이제 베르크손의 철학은 생명 세계의 'élan Vital'의 장구한 역사가 인간에게 실현되었다고 보고, 더 나아가 계속해서 인간의 사회와 종교의 현실을 숙고한다. 여기까지의 내용은 본고를 예비하는 내용들이면서 베르크손 철학에 있어서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에 이르는 과정을 요약하고 있다 2장과 3장은 물질과 생명의 이분법을 취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적 종교와 동적 종교라는 이분법이 계속해서 견지된다. 2장에서 정적 종교에서 인류는 자연에 대한 반작용의 형태로서 종교적 표상을 만들어 냈고 사회라는 울타리에서 발생하는 법과 의무 등과 결부된다. 이러한 종교의 특성은 '정적'이라는 것, 그리고 인류의 출현이래 오늘날에까지 발견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마치 수 백 만년 전의 어떤 생명 형태가 오늘날에도 거의 변화 없이 존재하듯이, 과학이 급속하게 발전하는 오늘날에도 발견되는 종교의 특성은 원시적 인간의 종교 형태와 그 핵심에 있어서는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그 반대쪽의 극단에서, 동적 종교는 생명 세계에서의 'élan vital'이라는 의의를 보여 주고 있다. 베르크손 철학에서 처음에는 생명 세계에서 새로운 생명 형태의 출현, 그리고 위대한 예술가와 그의 작품과, 알려졌건 알려지지 않았던 간에 인류에게 도덕적 우월성을 보여준 인물들, 마지막으로 'élan vital'의 실재를 보여주는 그리스도교의 신비가에 이르는 시각의 점차적인 진전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점진적 관점의 변화는 '창조력'이라는 관점, 말하자면 '이전에 볼 수 없는' 새로운 'élan vital'의 현실을 보여주는 증거들의 단계들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동적 종교는 사실 기성의 종교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동적 종교는 생명의 창조적 흐름과 접촉하는 구체적 생명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창조적 능력의 우월함은 한편으로는 베르크손은 'sur-homme'라고 칭하는 창조적 능력을 지닌 사람들의 'élan vital'이 인간 사회와 종교 안에서 'élan d'amour'임을, 말하자면 생명의 능력이 바로 사랑임을 보여주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신(神)의 본성으로 접근하는 일종의 지도와 같은 길을 보여 준다고 본다. 알려진 혹은 무명(無名)의 위대한 행동을 한 사람들과 그리스도교의 신비가들은 'élan d'amour'로서 인류에게 거역할 수 없는 반향을 심어 주고 있다. 그들의 창조적 작품으로서 사랑의 행동은 예술가가 이룩한 창조적 작품의 감동보다도 더욱 위대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élan d'amour'는 거역할 수 없는 창조적 능력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기계적인 행동의 반복을 하듯이 순환하는 닫힌 사회의 틀은 끼어지고 그 사회의 구성원은 단 한 사람의 'élan d'amour'를 통해서 전진의 의욕을 얻게 된다. 하지만 신비가들이 자기 자신을 원천으로 하고 있지 않고. 신의 협력자라고 자처하는 이상, 'élan d'amour'라는 창조적· 원천과 그 시초, 그들이 모방하는 시작에 집중하게 된다. 여기에서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철학적 성찰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렇게 정적 종교와 동적 종교의 이분법을 극단으로 추구하게 되면 그것의 차이를 보다 심도있게 논의할 수 있게 된다. 마지막 4장에서는 베르크손의 철학이 '철학'과 '종교'에 어떠한 철학적 의의를 제공하는지에 대해서 논하였다. 거기에서 철학은 인간적 조건을 넘어서서, '지능'이라는 진화의 성공을 보다 넘어서서, '직관'에 의한 철학이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고, 이를 위해서 물질보다 생명에 보다 접근하는 철학이라면 신비가의 경험이 밝혀주는 이론적 의의를 받아들여야 한다. 또한 종교에 있어서 동적 종교에서 나타나는 'élan d'amour'가 기성화된 종교, 특별히 그리스도교가 정적인 경향을 드러낼 때 전진의 갈망을 일으켜 왔음을 주목하였다. 사실 인간이 순수하게 영적일 수 없듯이, 또한 생명체가 순수하게 생명일 수만은 없듯이, 순수하게 '동적'인 종교는 있을 수 없다. '동적' 종교는 그 핵심을 전하기 위해서는 '정적'인 표상을 이용하게 된다. 그렇지만 기존의 종교에 있어서 그것이 전진하는 종교, '동적' 종교라는 명칭을 붙이기 위해서는 그 기준이 바로 생명의 특성으로서 'élan d'amour'인 것이다. 앞으로 남겨진 과제는 베르크손이 마지막 저술에서 드러나는 철학적 성찰을 통해서 간략하게 언급한 신비가들의 경험이 비추어 주는 사실을 철학에 의한 이론적 확실성의 형태로 되돌려줌으로써, 그들의 실재적 경험이 인간의 보편적 경험에 합치할 수 있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Cette thèse a développée sur 1'«élan vital» qui est le propre caractère de la vie chez Bergson. Aprés L'évolution créatrice, le mot «élan vital» dans le bergsonisme commence à présenter. Mais par eile. J'essai de faire voir que la philosophie bergsonienne a la totalité organique, et l'effet philosophique est l'élan vital même. Du même temps, l'élan vital signifie le procès de la pensée bergsonienne. Ce procès continue et développe jusqu'à la 'religion' qui lui intéresse. Tout d'abord le bergsonisme contient l'«intuition». L'«intuition», c'en est le centre et l'impérative provocant le mouvement de la pensée philosophique. Par exemple, il découvert la dimension de l"émotion' avant le procés du raisonnement signifiant trés étroitement la philosophie. Au contraire le bergsonisme se propose que la philosophie ayant l'intuition et le raison, l'émotion et la pensée raisonable tous deux a le sens plus large. Cette thése qui suivi le procès bergsonienne est donc la 'philosophie' étant aidée l'intuition. Du fin du siécle 19 au commencement 20, le conflit entre les conceptions de la 'liberté et de la 'nécessité', et de la 'création' et et l"évolution' de plus jusqu'à maintenant continue. Cette conflit fait la philosophie pousser tout à l'exteme. Mais Bergson maintiens que l'acte libre est incommensurable avec l'idée et sa rationalité si une conduite vraiment nôtre est celle dune volonté. C'est la commencement de la thèse. Pour cela, on a besoin de la conversion épistémologique. En fait après la déouverte de la «durée». Bergson a tenté la priorité de l'intuion. Et après l'intuion, il y a 1'analyse. De l'intuition on peut passer à l'analyse, mais non pas de l'analyse à l'intuition. Pour atteindre la 'précision' philosophique. Comme on dit, il est nécessaire de s'approcher intuitivement de la réalité. Pénétrant par 'sympathie' à la réalité, on peut participer la durée qui est le temps réel, c'est-à-dire que ici la durée prend contact avec la continuité et l'hétérogénéité. Autrement dit la durée, comme une mélodie, change hétérogène en faisant une totalité unie. Alors le dynamique de l'être n'en exclure pas l'identité. La durée, le temps réel, qui ne peut pas être réduite à le temps scientifique or mathématique, peut se réconcilier à la fois la continuité et l'hétérogénéité. La conception spatiale diffère d'elle. Plutôt on participe à la continuité réelle par l'intuition. Là, il y a l'expérience de ne pas la continuité d'éléments, mais de la discontinuité de la durée. C'est-à-dire l'hétérogénéité. Par là il y a la fondation d'expliquer la difference et le développement dans la réalité. Et aussi les changements, surtout les caractéres de notre évolution intérieure et vital peuvent être expliqués. C'est la dimension de l'«élan vital». Dans le bergsonisme, bien que l'élan vital soit développe sur l'évolution du monde vital, on pense que Bergson commence implicitement à matière et mémoire. Au changement du moi et à la fois celui du monde vital, les caractère personels et vitals sont 'imprévisibles'. Tout moment étant unique, quelque chose qui n'existait pas dans les antécédent. La dichotomie à l'extême de la matière et de la vie, on voit que le propre vital est l'élan vital. Là il semble que la vie remonte la pente de matière. Par cette évolution vital, qui est une sorte de l'histoire de lutte, l'homme est devenu l'espèce suprême. Le bergsonisme continue à faire réflextion sur l'actualité humaine. Jusqu'ici c'est la préparation de cette thèse. De même la résumé que il en arrive au livre Les deus sources de la morale et de la religion. Dans les chapitres 2 et 3, de même que la dichotomie de la matiére et de la vie, eile se dilate à la religion, c'est-à-dire la religion «statique» et la religion «dynamique». Dans le deuxième chapitre, la réligion, elle est une réation défensive de la nature contre ce qu'il pourrait y avoir de déprimant pour l'individu, et de dissolvant pour la société dans l'exercise de l'intelligence. Elle est aussi «statique». parce que depuis l'apparition de l'humanité jusqu'à maintenant elle subsiste encore. Rien n'est diffent sur la religion statique en matière du centre, comme il y a millions d'années certaines forme vital. À l'opposition extrême. la religion «dynamique» nous présent la signification de l'élan vital dans le monde. Le bergsonisme commence à rechercher l'apparition de la forme nouvelle, et mettre progressivement sa vue en grands artistes et son oeuvre, les moralistes ouvres n'importe célébre ou non, et les mystiques chrétions qui manifestent la réalité de l'élan vital. Cette vue progressive est de puissance créative, comme on dit de progrès des témoins qu'en font voir la réalité qu'on n'a jamais vu. En fait, la religion dynamique n'est pas dejà formée, parce que elle est la forme vital qui contacte avec le courant de vie. La supériorité de la force créatrice est révelée, d'un côtés comme on dit le «sur-homme», le figure créatrices font voir. Bergson l'appelle l'élan d'amour dans la société et la religion. D'autre côté, le mystique a fait un voyage que d'autres peuvent refaire en droit, sinon en fait. Comme l'äme mystique est contagieuse, son influence tient à la nature de l"émotion' qui suscite ses créations. Feu qui transforme tout en feu, comme foyers de générosité. C'est pourquoi ses actions d'amour sont plus magnifiques, surtout plus créatives que l'artiste et son oeuvre. Là it brise la résistance de la nature close et hausse l'humanitè à des déstinées nouvelles. De plus les mystiques s'appelle 'adjutores Dei', et l'élan d'amour qui les portait à elever l'humanité jusqu'à Dieu et à parfaire la création divine ne pouvait aboutir, à leurs yeux, qu'avec l'aide Dieu dont il étaient les instruments. Quand la cosmologie évoque un univers où l'élan vital créateur multiplierait les mondes, cette pluralité postule l'unité originelle d'un 'centre de jaillessement'. Ici, on peut chercher la possibilité de la christologie philosophique. Par la dichotomie, nous pouvont voir leurs différences plus claires. Dans le chapitre 4, on a traité quelle signification philosophique Bergson nous a données. C'est que la philosophie doit élancer la condition humaine, comme on dit l'intelligence que l'humanité a achevée. Plutôt la philosophie doit s'appuyer sur l'intuition. Pour cela, eile a besoin de recevoir la signification théorique de l'expérience mystique. Pareillement la religion déjà formée s'applique aussi. Comme l'homme ne peut pas avoir une âme pure et la religion ne peut pas être tout dynamique. Pour transmettre sa centre à la postérité, eile doit avoir les représentations. C'est-à-dire être limitée par les concrèes circonstances. Alors le repère de s'appeler «dynamique», c'est l'«élan d'amour». Pour le travail philosophique resté comme suit : C'est quelque chose plus profond que d'avoir obtenu de l'expérience mystique. Et faire voir une possibilité capable de se transforme en certitude. À l'aide de l'expérience mystique et de l'effort intellectuel, l'expérience universelle de l'homme s'eclaicira plus profondément.

      • 비트겐슈타인의 종교언어 이해

        현문일 광주가톨릭대학교 2008 국내석사

        RANK : 249759

        비트겐슈타인은 분명 종교 철학자는 아니다. 그러나 그의 종교에 대한 이해와 접근은 독특하며 종교철학의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 그것은 언어와 세계의 한계를 통해 종교에 접근하려는 시도에서 나타난다. 그가 종교에 대하여 지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본 논문의 목표는 비트겐슈타인 사상을 종교언어적 관점에서 고찰함으로써 그의 종교언어에 대한 태도를 살펴보는데 있다. 이는 그가「논리철학논고」에서 언급한 ‘말할 수 없는 것’과「철학적 탐구」를 통해 진술한 ‘언어놀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봄으로써 해명될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논리철학논고」의 그림이론과 진리함수이론을 통해서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선언한다. 이는 형이상학·윤리·종교 등 가치언어에 대한 종언을 선언하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결코 종교나 형이상학을 부정하거나 제거되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지 않다.「논리철학논고」의 핵심은 윤리적인 것이며 여기에 제시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는데 그 중에서 두번째 부분인 제시되지 않은 부분이 중요하다고 언급하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에게는 삶의 의미, 세계의 의미가 신이다. 언어의 한계와 세계의 한계를 체험하고 이로부터 세계의 의미와 삶의 의미가 드러난다. 이것이 곧 신을 믿는 일인 것이다. 한계지워진 세계에 직면하여 깨닫게 되는 삶의 의미가 인간에게 경외감을 갖게 하고, 이것이 바로 신을 믿는 것이다. 이 지점에 종교와 윤리가 자리한다. 이때 종교와 종교언어는 표층의미와 심층의미의 긴장관계 안에 드러난다. 표층의미는 심층의미를 토대로 표현되고, 심층의미는 표층의미의 한계를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목적은 올바른 언어분석을 통해 언어의 오용으로 나타난 잘못된 철학적 문제를 해소함에 있다. 이런 목적을 가지고 언어를 분석한 결과 언어의 한계와 세계의 한계를 보게 되고 언어의 문제를 삶의 문제 즉 종교와 윤리의 문제로 돌린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 왔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종교의 문제는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의미와 태도와 행위의 문제라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결론이다. 따라서 침묵하며 행동으로 보여 주는 것이 종교와 윤리라는 것이다. 언어는 인간 삶에 근거해 있고 종교는 인간 삶의 문제이다. 따라서 종교의 문제는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의미와 태도, 그리고 실천의 문제인 것이다. 철학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이 세상을 바로 보기위한 것이어야 한다. Wittgenstein is not a philosopher of religion. Nevertheless, he present a new way to philosophy of religion since he has a unique way of approaching and understanding religion. Through the limit of language and world, he tries to approach of religion. It is certain that he is very interested in religion The goal of this thesis is to find Wittgenstein's stand about religious language by the consideration of his philosophy about religious language. To explain his stand, I am going to search for the meaning of 'language game' through the study of 'whereof one cannot speak' in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and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Wittgenstein proclaims that "Whereof one cannot speak, thereof one must be silent." in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It might be seem to declare the end of metaphysics, ethics and religion. But a closer look at his word shows that he never meant to deny religion, metaphysics and ethics itself. Thus, he says that his philosophical work consists of two parts: the first presented in the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here all that I have not written, and it is precisely this second part that is the important one. According to Wittgenstein, the meaning of life, the meaning of the world, is no different from God. The meaning of life and world is revealed by the limit of language and world. Wittgenstein goes on saying that we come to have the mystical feeling through the limitation of whole world and that is not so different form believing in God. After all, religion and ethic start with such a feeling awe in this point. Thus, religion and religious language are thought to lie between surface meaning and depth meaning. The foundation of surface meaning is depth meaning, and depth meaning is disclosed by the limit of surface meaning. Wittgenstein's philosophical purpose is to dissolve wrong problems of philosophy that are provoked for the misuse of language. Analyzing language with this purpose, he finds the limitation of language and world and attributes the matter of language to the matter of life, that is, religion and ethic. We have been talking what we could not talk. That is why there are so many problem of religion is not the of language, but the one of meaning, attitude and practice in life. Religion and ethics is to show with action silently. Language is based on human life. Religion deals with human life. The matter of religion is not the one of language, but the one of meaning, attitude and practice. Philosophy is not goal itself. It should see correctly about this world.

      •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관

        김성근 인천가톨릭대학교 대학원 2007 국내석사

        RANK : 249758

        본 논문의 목적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관을 알아보는 것이다. 따라서 언어의 유의미와 무의미의 문제를 밝힌 비트겐슈타인의 그림 의미론과 사용의미론에 대해 그리고 종교의 의미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또한 그의 사상을 대승불교 혹은 선불교와도 비교해보고자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그림이론이나 사용이론에서 공통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긋고 있다. 따라서 그림이론에서는 우리가 참 또는 거짓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세계 안에서 제시된 자연과학의 영역에 대한 것에만 한정되며, 그것을 넘어선 것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는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용이론에서는 우리는 쓰여지는 언어만을 말할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 어떤 표현이 쓰여진다는 것은 그 표현이 규칙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 이것은 사용의 특정한 방식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지 않을 때 그 표현은 오용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표현은 정당하게 사용되는 경우와 오용되는 경우의 한계를 분명히 가진다. 따라서 철학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이 세상을 바로 말하는 것이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또한 종교언어가 특유한 언어놀이에 속하므로 그 맥락에서만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종교언어는 과학언어나 그 밖의 다른 언어들과 구분되는 것이지만 그것이 반드시 과학 언어 체계 속에 흡수되어야 할 필요는 없으며, 단순히 주관적 감정이나 정서를 표현하는 무의미한 언어는 더구나 아니다. 종교언어는 종교인들의 언어놀이 안에서 충분히 의미를 지니며 종교언어의 범주 속에서 논리성을 유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 언어행위를 통하여 수행적 발언의 기능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을 대승불교적 혹은 선불교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인간은 사유를 함에 있어 대개‘언어’를 매개로 한다. 그러나 인간의 사유가 전적으로 언어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비트겐슈타인이나 선은 언어를 매개로 이루어진 사유를 배격한다. 즉, 언어와 사유를 불가분의 관계를 보는 것이 아니라, 사유 없음이 언어의 바른 사용이라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과 선의 철학방법에 있어서 공통적으로 기본적인 것은 어떤 한계의 형식에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경우에 있어서, 그 한계는 언어에 있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 문제는 선에서처럼 지성의 본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마력적인’ 본성에 있는 것이다. 선의 방법과 마찬가지로 비트겐슈타인의 방법도 사람들을 ‘직접적 파악’으로 이끌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 파악되는 것은‘실재’가 아니라 언어와‘참다운 본성’이다. 비트겐슈타인의 방법이 지닌 하나의 뚜렷한 목표는 일종의 해방, 즉 적어도 철학함에 있어서 전통적인 방식이 지니는 고민과 혼란으로부터의 해방을 가져오는 데에 있다. 이러한 점에서 선과 비트겐슈타인 사이에 강력한 유사성이 있는 것 같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을 다양한 학설들의 체계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체계들의 원천이 되는 철학적 물음들의 해소작업으로 보았다. 그는 이 물음들이 언어를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된다고 보고, 언어의 정상적인 사용과 규칙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할 것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언어의 본질에 관한 새로운 이론체계를 정립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서, 철학은 어떤 결론을 끌어내지 말아야 하며 누구나 당연히 받아들이는 사실들을 진술할 뿐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렇게 함으로써 비트겐슈타인은 그 자신이 표현한 것처럼‘철학을 뒤덮고 있는 구름의 전체를 한 방울의 언어 이론에로 응축’시켜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철학의 과제는 언어가 사유에 설치해 놓은 함정을 사유가 피해가도록 하는 것이다. 철학의 문제들은 이론을 수립함으로써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이 어떻게 해소되는가를 보여줌으로써 해결되는 것이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investigate the language problems in Wittgenstein’s philosophy. So I try to explore on Wittgenstein’s‘picture theory of meaning’,‘use theory of meaning’and meaning of religious that have spoken problems of meaningfulness and meaninglessness. And I try to compare his thought with Mahayana Buddhism or Zen Buddhism. Wittgenstein set limit of‘what can be said’in picture theory and use theory commonly. According to picture theory, what can be said true or false is limited in the world only to be presented natural science realm, we can not speak about beyond that realm. And Wittgenstein says that we should keep silent on ‘what can not be said’. According to use theory, we only can say language to be used. Here the expression which expressed means the expression has its rule, and this means that the expression has a special way of use. Otherwise the expression is to be misused. Therefore a expression clearly have limits of cases which rightly used and misused. So philosophy just must say not purpose itself but the world. Wittgenstein also asserts that religious language is understanded in just its context for religious language belongs to special language game. According to Wittgenstein, religious language is distinguished from science language and other languages. But it need not to be absorbed in science language system by all means, in addition it simply is not meaninglessness language with subjective feeling or emotion. Religious language have sufficient meanings in language game of religious persons, it maintains logicality in category of religious language and does function through religious act of language function of performative remark. We can not deny a fact Wittgenstein’s thought is interpreted as Mahayana Buddhism or Zen Buddhism. Human think through the medium of‘language’in general. But thought of human is not carried out entirely through the medium of language. Rather Wittgenstein’s thought or Zen Buddhism reject thought which is formed by language. Namely, language and thought are not inseparably related to each other but nothing of thought is a correct use of language. In philosophical method of Wittgenstein and Zen, common basic is form of some limits. In Zen, the limits are inherently in intelligence itself. In Wittgenstein, the limits are in language. In Wittgenstein’s problem is not essence of intelligence like Zen but the‘magical’nature of language. Also Wittgenstein’s method like Zen is devised to lead for‘immediate understanding’. In Wittgenstein, however, understanding is not‘real’but language and ‘real nature’. A clear goal of Wittgenstein’s method give freedom from trouble and confusion that traditional philosophical method had in doing philosophy at least. In this point it seems to be powerful similarity between Wittgenstein’s philosophy and Zen. Wittgenstein saw philosophy is rather a dissolution work of philosophical questions which fountained in diverse doctrines than a system of these doctrines. He saw these questions set to be misunderstood language and he advised to understand rightly on normal use and rule of language. But this is not to conduct a new theoretical system on essence of language. He concludes philosophy must not to be formed a certain conclusion and it just states facts which anyone accept necessarily. In doing this, according to his expression, Wittgenstein tried to do‘a whole cloud of philosophy condensed into a drop grammar’. In his philosophy, the philosophical problem is to escape a snare which language sets for thought. Philosophical problems are solved not establishing theories but as showing how dissolved it.

      • 실존론적 사유와 대승불교의 불이적(advaya) 사유를 통한 변선환 신학 연구

        신익상 감리교신학대학교 2012 국내박사

        RANK : 249743

        변선환(邊鮮煥, 1927-1995)의 한국적 종교해방신학을 향한 기획은 두 개의 대표적인 영향사 속에서 두 개의 한국적 신학들을 통합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두 개의 대표적인 영향사란 실존주의와 대승불교의 不二的 사유를 말한다. 키르케고르와 야스퍼스, 그리고 프리츠 부리로 이어지는 실존론적 사유의 영향 속에서 변선환은 다음 일곱 가지의 주제를 자신의 신학 속에 반영하고 있다. ① 무제약적인 책임과 실존의 역사성, ② 사랑의 투쟁, 사랑의 휴머니즘, 그리고 인간화, ③ 비케리그마화의 철저성, ④ 변증법적 이원론, ⑤ 한계상황, ⑥ 포괄자, 그리고 ⑦ 교제. 이들 주제는 변선환의 신학여정 속에서 대승불교의 不二的 사유에 의해 재구성된다. 대승불교의 不二的 사유는 힌두교 전통의 비이원성(advaita)과는 달리 “비이원적”(advaya)이라는 형용사 형태로만 설명된다. 세계의 일체 대상들이 고정불변한 본성을 갖는다는 생각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승불교의 不二的 사유에 의해 실존주의의 주제들이 변선환의 신학여정 속에서 재구성된다고 할 때 초점이 되고 있는 것은 ‘본성’과 ‘이원성’에 대한 집착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는가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다. 이러한 신학적 성찰은 같은 주제에 관한 철학적 성찰과 연계된다. “왜 무가 아니고 유인가”라는 서구의 철학적 과제는 참과 거짓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이원론적인 논리적 사유와 오랫동안 맥을 같이 하면서 결정적인 계기에 이르러 이율배반에 직면하곤 했다. 변선환이 대승불교의 不二的 사유를 수용하면서 발견한 것은, 이 不二的 사유가 보편적으로 세계 도처에서 나타난다는 것과 있음을 해명하고자 할 때면 늘 등장하는 ‘본성’과 이러한 해명의 전제가 되고 있는 ‘이원론적인 사유’라는 철학적인 큰 틀 바깥에서 실재를 바라봄으로써, 즉 서구 철학이 전제하는 실재의 관념 바깥에서 실재를 바라봄으로써 서구철학의 이율배반적인 성격을 극복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철학적 주장은 변선환에게 두 가지 계기로 구체화되면서 신학적 성찰과 연결된다. 첫째는 “不二的 실존”의 계기다. 여기서 “不二的”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인격과 비인격의 양극단을 동시에 지양하면서도 긍정하는 이중부정의 변증법적 논리다. “실존”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실존주의가 실존이라는 개념으로서 이해하던 바를 “不二的 실존” 또한 이어간다는 것이다. 실존주의에게 실존은 “본래적 자기”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不二的 실존”은 양립할 수 없는 둘을 이어놓은 형국이 된다. 不二的인 것은 자성을 부정하기 때문에 자기(self)를 설정할 수 없다. 반면 실존은 자기를 정립한다. 무론(無論)과 유론(有論)의 이 조합은 원효(元曉, 617-686)의 무리지지리 불연지대연(無理之至理 不然之大然)을 변선환이 신학적 방법론으로 푼 것이다. 참다움(眞如)은 있음에도 머물지 않고 없음에도 머물지 않는다. 본래적 자기는 자기의 부정을 통해 도달하는 운동이다. 그리고 이 운동이 도달하는 것은 그러한 운동성이다. 따라서 운동성은 다시 운동으로 반환된다. “不二的 실존”은 머물지 않음의 방법론으로서, 변선환은 바로 이것을 통해 신학적 사유들과 만났다. 예컨대 “不二的 실존”이 즉각적으로 배타적인 그리스도론을 극복할 수 있게 한다는 점을 그는 설명하고 있다. 둘째는 “不二的 종교해방신학”의 계기다. 이 계기는 “不二的 실존”이 전개되는 신학적 마당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마당은 변선환의 사랑의 휴머니즘, 즉 사랑-원운동이 만들어내는 공간으로서 “민중의 종교성”이라는 不二的 개념을 매개로 해서 한국의 두 전위신학인 종교 토착화신학과 민중 토착화신학을 종합한다. “不二的 종교해방신학”에 이른 변선환의 신학여정이 갖는 의의를 다음과 같이 평가할 수 있다. 첫째, 不二的 사유를 신학함의 중요한 사유방식으로 가져왔다. 둘째, 진리 주장은 언제나 자기부정의 태도를 통해서 제시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셋째, 不二的 종교해방신학은 운동성과 실천이 신학의 핵심적인 마당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넷째, 세계의 잠재성을 신학적으로 전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다섯째, 실존의 지평을 비인격적인 영역에까지 확장함으로써 신학함의 우주적 지평을 새롭게 하였다. 그의 신학여정이 갖는 한계는 다음의 세 가지로 제시해 볼 수 있다. 첫째, 신학함의 우주적 지평이 구체화되지 못한 채 멈추어서고 있다. 둘째, 종교해방‘신학’이라는 개념 속에서 스스로가 제한된다는 점이다. 즉, 신학이라고 하는 유신론적 용어로서는 애초의 종교해방이 갖고 있는 해방을 충분히 실현하지 못하는 바, 종교해방‘론’으로 재개념화되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된다. 셋째, 그의 不二的 종교해방신학은 시간성을 충분히 중요하게 다루고 있지 않다. 세계 창조에 있어서 시간성은 본질적이다. 다시 말해 운동성이 근원적이다. 하지만 변선환의 不二的 종교해방신학은 이 점을 더욱 철저하게 밀고나가지 못했으며, 따라서 천상세계와 지상세계, 영원과 시간이라는 이원적인 구분 속에서 자신의 종교해방신학을 전개하는데 머물렀다. 서구의 잠재성의 철학들은 운동성은 잘 알아도 不二的 사유에 서툴렀거나 잘 몰랐다면, 변선환의 不二的 종교해방신학은 不二的 사유를 전개하고자 하면서도 그것의 토대가 되는 운동성을 충분하게 고려해 넣지 못함으로써 不二的 사유의 진면목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나 不二的 사유는 언제나 시간성에서 가능하다. 따라서 앞으로의 不二的 종교해방론은 不二的 사유와 시간성에 터한 운동성의 양자를 종합하면서 자신의 기획을 전개해야 한다.

      • 지속의 관점에서의 신 이해 : 앙리 베르그송 지속론을 중심으로

        김인 감리교신학대학교 대학원 2023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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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르그송의 지속 철학 은 등장과 동시에 기독교계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가 말하는 지속의 철학이 신의 원대한 목적지에 대한 도달 가능성을 부정하고, 또 신의 전지전능에 대해서 실재와 현실 사이의 모순율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르그송이 과학이 고정된 관점으로 세계를 보는 것을 비판하듯, 신학 또한 베르그송에게 있어서는 지금의 그 자리를 지키는 것에 만족한다면, 과학과 같은 선상에서 비판을 받게 될 것이며 또, 신학이 과학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채로 고정된 학문체계에 머문다면 시간의 흐름 그 자체인 지속의 세계에서 자연스럽게 도태될 것이다. 이점에서 과학은 자신의 오류를 거침없이 수정한다는 점에서는 신학보다 우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흐름과 상관없이 형이상학적인 다른 종교들과는 달리 기독교는 베르그송 철학에 있어서 아무런 의미가 없는 하나의 종교로 치부되지 않는다. 베르그송은 기독교 신비주의를 다른 모든 종교들의 신비주의들 중 가장 진정한 의미의 신비주의로 여긴다. 그가 기독교계에게서 반기독교적이라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기독교 신비주의를 진정한 의미의 신비주의라 말한 까닭은, 기독교 신비주의가 지속의 흐름을 직관하면서 개인적인 신비주의로 연결되는 단편적인 신비체험의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닌, 지속의 원동력을 인류 전체를 향하게 하여 사랑을 실천하는 사랑의 신을 직관함과 동시에, 그 신이 신비가들과 이스라엘 신비가들을 통해 인류 전체에게 전해졌다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실존 여부와는 달리 그 누구도 산상 수훈에서 드러난 그의 사랑의 선포를 비난할 수 없을 것이라는 그의 말에서 그리스도가 지속 속에 있는 신의 사랑을 대표한다고 생각하는 베르그송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이런 베르그송의 철학은 지각적이고 경험적이며 동시에 실천적이다. 역동적이며 실천적인 종교로써의 기독교는 규정된 율법들을 허물고 유동적인 지속의 흐름에 참여해 진정한 신비주의의 원천으로서 활동할 것을 베르그송 철학에게 요구받는다. 이를 위한 지속의 참여에 대한 이해의 기반을 베르그송의 사상을 중점으로 마련하기 위해서 필자는 그의 사상을 정리하면서 현 시대에 종교가 가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려 한다. 현대시대의 과학과 형이상학의 대립 속에서 과학 그 자체가 지닌 한계와 형이상학의 잘못된 방향성을 다루며 그들이 각각의 위치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다룰 것이다. 형이상학, 그리고 신학과 같이 단순히 사변적인 시선으로 처리되었던 논의들이 다시금 제대로 논의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형이상학과 신학이 사장되어야 하는 학문이 아닌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객관적인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을 다룰 것이다. 과학적인 지성의 시선들이 고정된 시간관을 사용해 어떻게 인간의 자유를 억누르는지, 그리고 공간 자체를 결정화 시켜 세계를 불가분한 계기들의 집합으로 여기면서, 각 계기의 연속되는 지속을 배제시킴으로 생기는 정신과 물질의 모순율을 다루면서, 인간의 자아가 인식하는 표층자아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 차이와 강도 속에서 이해되는 지속 영역의 심층자아가 있다는 것을 다루며, 인간의 자아가 고정된 형태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심층자아의 자리에서 외부세계에 대한 지속에 참여하므로 생성적인 차원에서 진정한 의미로서의 자아가 있다는 것을 말할 것이다. 이어 진화적 계기들과 진화론의 영역을 다루면서 진화의 과정이 각각의 분절이 아니라 근원부터 시작된 생의 약동이 시간을 흐름을 포함해 지금까지도 지속하고 있다는 것을 다루며, 세계는 개별 계기들의 단순한 집합이 아닌 약동에 의해서 움직여가는 하나의 유기체와 같다는 것을 말하면서, 개체 생명체들이 창조와 생성의 이완 작용 사이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점유할 수 있다는 것을 다루고, 생명성의 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생의 약동으로서의 지속을 다룰 것이다. 이 지속의 내용을 확인함으로, 우리는 진화의 과정이 단순한 우연성이나 어떤 목적론적인 것을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발성과 생의 약동으로 인한 생명성의 전진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유기적인 도구를 사용하는 본능적인 진화와 물질적인 도구의 제작과 유기적 형태의 종교와 사회를 제작 가능한 인간 특유의 제작인을 다룸으로 앞에서 닫힌 종교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이 지성의 도구적인 종교를 말한다는 것을 다룰 것이다.마지막으로, 정신의 타협 즉 지성과 본능의 타협 속에서 생겨나는 사회와 종교 또한 개미들이 군집을 이루는 사회를 갖고, 동물들이 무리를 짓는 사회 체계를 가진 것처럼, 인간의 사회 또한, 하나의 유기체와 같이 기능하며 그것이 도구적인 닫힌 종교와 지속적인 열린 종교로서의 기능적인 목적을 지녔다는 것을 다룰 것이다. 정신과 물질의 상승, 하강 운동 속에서 인간만이 유일하게 그 중심을 직관으로서 관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의 사회는 정적임과 동시에 열린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으며 그 선택권이 자유로써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는 것을 말함으로, 인간 개별체들이 사회 속으로 참여하는 것이 곧 지속에 참여함이며, 각자의 계기들이 생성된다는 것이 직접적으로 지속의 흐름에 영향을 끼치고 지속에 동참하는 것을 요구받는 다는 것을 확인할 것이다. 이로써 복음서에서 말하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구절이 의미하는 것이, 곧 개인의 자아와 인류 전체를 향하는 신의 사랑을 전파하는 것이 인간의 목적이며, 우리가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들 사이에서의 조율자의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것과 인류의 미래가 인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 그리고 생명성의 유지라는 지속의 목적을, 사랑의 신과의 합일로써 직관하고, 달성할 수 있는 운명이 우리의 손에 있다는 것을 말할 수있을 것이다. 우리는 형이상학과 과학의 사이에서 지속을 대입함으로 우리 자아의 자유의지와 과학 시대에서의 종교적인 활동의 유의미함의 기반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 공감(共感)의 윤리로 본 종교의 생태주의적 재구성 : 샐리 멕페이그의 '고통 받는 하나님'에 대한 공감과, 아잔 붓다다사의 아나빠나삿띠 수행전통이 유도하는 공감에 대한 생태주의적 해석을 중심으로

        최중민 감리교신학대학교 2011 국내석사

        RANK : 249711

        본 논문은 인간 뿐만이 아닌 생태계 내의 생명 전체에 대한 도덕이론을 제시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종교를 생태주의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에 관심하고 있다. 이것을 위해 필자는 ‘공감(共感, empathy)의 윤리’에 근거하여 기독교와 불교를 생태주의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즉 이 글은 기독교와 불교가 생태주의적으로 재구성되는 과정에서 필자의 공감의 윤리가 도덕적 틀로서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주장하는 공감의 윤리는 괴로움을 느낄 수 있는 타자를 목적으로 대우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공감'에 대해 말하고 있다. 괴로움을 느낄 수 있는 타자를 목적으로 대우하려면 그에 대한 가치 판단과 이해가 필요한데 공감이 그것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이성은 이 공감을 바탕으로 타자에 대한 공정한 대우로서의 도덕행위를 결정한다. 필자는 이 공감의 윤리를 샐리 멕페이그의 생태신학과 아잔 붓다다사의 아나빠나삿띠 수행전통과의 대화에 적용하면서 생태주의 종교의 재구성을 꾀하고 있다. 본 논문의 본론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 부분에서는 종교를 생태주의적으로 재구성하는 윤리학적 전거로서 필자의 공감의 윤리를 제시한 후, 이것에 근거하여 다른 두 부류의 윤리를 비평한다. 둘째 부분은 이렇게 구성된 필자의 공감의 윤리를 바탕으로 샐리 멕페이그의 ‘고통 받는 하나님에 대한 공감’이라는 개념과 아잔 붓다다사의 아나빠나삿띠 수행전통 속에서 발굴 해 낼 수 있는 공감적 요소를 중심으로 생태주의적 재구성을 시도한다. 세 번째 부분에서는 생태계와 관련된 윤리적 당위 앞에서 두 종교가 대화하고 연대할 수 있는 종교철학적 근거를 의존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탐색한다. 이어 결론부분에서는 효율성이 아닌 공정성을 추구하는 공감의 윤리의 생태주의적인 쓰임과 적용에 대해 결론을 내리고 있다.

      • 악의 전통적 개념에 대한 비판을 통한 종교의 현실적 해방 : 폴 리쾨르의 신화 해석학을 중심으로

        이민규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2021 국내석사

        RANK : 249711

        본 연구는 현대의 인간 실존의 고통에 대해 전통 그리스도교가 현실의 고통의 원인을 악으로 치환하고 인간의 잘못으로 위치시키는 논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이처럼 악의 개념을 상징화하고 단순 치환한 악 개념의 오류를 해결하기 위해 현대 프랑스 학자인 폴 리쾨르의 철학과 해석학을 해결 도구로 사용한다. 더 나아가, 전통 그리스도교의 악 개념의 문제점과 그 부작용에 대해 상세히 살펴봄으로 현실을 조망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고찰 하고자 한다. 전통 그리스도교는 고통의 원인을 악으로 상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고통을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고통을 가중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인간의 고통을 악으로 규정하여 고통의 현실적인 원인을 외면할 뿐만 아니라 고통의 원인에 대해 이성적인 의문을 제기하지 못하게 폭력적인 방식으로 억압하였다. 더 나아가, 이는 오직 종교를 통해서만 고통이 해결될 수 있다는 논리로 발전하였다. 이는 중세 그리스도교의 전통 교부인 아우구스티누스의 악의 이해와, 종교개혁자 칼뱅의 신정론과 예정론의 악과 관련한 주장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인간 고통의 원인은 악으로 중세 그리스도교 교리에 의해 치환되었으나 더 심각한 문제는 그 악의 개념 또한 인간 사유에 의해 상징화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서론에서 무신론자들을 포함한 현대인들이 현실에서 겪는 고통의 현실과 이에 따른 악 개념을 살핌으로 현대의 악 개념의 일반적이고 대중적인 사유들을 간략히 살핀다. 이는 현대인들의 고통의 현상과 악 인식 자체를 연구의 목적으로 삼지 않고 단순히 인간이 상징화한 악을 살피는데 있어 마중물로 사용될 것이다. Ⅱ장에서는 그리스도교인들의 악의 이해에 있어 근간이 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선의 결핍에 따른 악의 개념을 살펴보고, 악의 인식에 따른 논리적 문제점을 살핀다. 더불어 전통을 답습한 종교개혁자 칼뱅의 대표적인 사상을 살핀다. 칼뱅의 악의 인식은 고통에 물음에 대해 고백적인 논리를 이용하는 방식으로 인간 실존 소외의 문제에 대해 해결책을 제시하는 방향이 아닌 인간을 정죄하는 폭력적 방법으로의 논리를 확대 계승하였음을 살핀다. 이러한 악 인식으로부터 기인한 논리는 현대인들에게 고통의 문제에 직접 대답하지 않는 문제와 이유를 찾아 볼 수 없는 고통의 문제에 대해 충실히 답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닌 것을 살핀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Ⅲ장에서는 현대인의 입장에서 인간이 신화화하고 상징화한 악의 개념을 살피며 폴 리쾨르의 해석학을 통해 인간이 창조한 악에 관한 종교적 언어의 상징성을 살핀다. 이는 현대인들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이해 가능한 언어를 추구하는 현실에서 악의 개념을 인식함으로 의미를 지닌다. Ⅳ 장에서는 문제의식과 리쾨르를 통해 현실을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중세시대의 악의 개념과 그에 따른 논리는 신 존재를 외면케 하며 심지어 아무런 잘못이 없는 신을 원망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악의 상징화를 통한 종교적 언어의 신화화는 우상화를 야기하고, 종교 강박에 다다르는 주된 원인임을 관찰한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종교를 통해 상징화한 선악개념을 비이성적으로 추종하고 맹신함으로 인하여 인간 이성의 기능을 상실하는 부작용을 살펴본다. 이는 인간 현실에서 고통에 고통을 더하는 원인이 되었고, 인간이 상징화한 종교언어를 통해 신의 계획과 신의 뜻까지도 인간이 창조하여 인간을 억압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결론적으로, Ⅴ장에서는 위의 논리들을 기반으로 이론적으로 현대에 이해 가능한 해석학적 종교인식이 대안으로 모색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더불어, 이에 따른 많은 종교철학적 연구가 필요함을 주장한다. This research on the logic of traditional forms of Christianity in Korea which have replaced the main causes of human pain and suffering with evil and positioning it as resulting from human sinfulness. It uses Paul Ricoeur as a tool to interrogate the notion Korean traditional Christian notion of Evil, symbolizing the concept of evil and simply replacing it. Traditional reformism and Calvinism Christianity postulated the cause of suffering as Evil. However, these methods did not solve the pain issues, but rather added and deepen to it. Human suffering was defined as a concept of evil and not only ignored the real and main causes of suffering and painful, but also suppressed in violent ways so as not to raise rational questions about the causes of human sufferings and pain. Furthermore, this developed into the logic that suffering can only be solved through religion belief and faith via only church. This logic flows can be seen through the medieval Christian traditional like a reformism and Calvinism which are based on the Augustine's understanding of evil, and the discussions and arguments related to the theological theory of traditional theological concept and the theory of Calvin. The main causes of human suffering was substituted by medieval Christian doctrines for evil, but the more serious problem and conflict was that the concept of evil was also symbolized by human causes. To this end, People briefly examine the general and popular reasons for modern evil concepts by examining the realities of suffering in reality, including atheists, and the resulting evil concepts. This will not be used for the purpose of researching the phenomenon of modern people's suffering and pain issues and perception of evil itself, but simply as a for examining evil symbolized by humans. Chapter II examines the concept of evil resulting from Augustine's lack of goodness, which is the basis of Christians' understanding of evil, and examines the logical issues of perception of evil. It also examines the representative ideas of Calvin, a religious reformer who followed traditional thinking. Calvin's perception of evil has expanded and inherited the logic of human beings as a violent way of convicting them, not as a way to present solutions to the problem of human alienation by using confessional logic about humans pain and sufferings. The logic resulting from this perception of evil looks at the limitations of not answering the problem of pain directly to modern people and not being able to answer the problem of pain faithfully without finding a reason.

      •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 후기 사상을 중심으로

        김정완 부산가톨릭대학교 대학원 2002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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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말로써 생각하고 말로써 우리들의 뜻을 전달한다. 말이 글이 되고, 음성이 되어서 다른 사람의 생각을 알게 된다. 말이 없다면 의사 전달할 방법이 막막하다. 철학에서 존재에 대한 탐구가 근본이 되겠지만, 이런 존재에 대한 탐구도 말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행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말에 대한 검증 없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 들이고 사용한다. 글을 쓰거나 보고서를 쓸 때에도 단어 하나 하나를 사전에서 찾지 않고 자연스럽게 쓴다. 이런 말이 공통성을 어떻게 확보 되는가? 말의 구조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말은 어떻게 세계와 연관을 맺고 있는가 하는 물음은 당연한 질문이다. 하지만 이런 질문 없이 우리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말을 쓴다. 실제로 많은 논쟁들은 말의 의미를 서로 다르게 이해하고 주장하고 생겨난 문제들이다. 말의 논리를 진척시켜 나갈 때 겉으로 보이는 기호 부분은 같아 보이지만 기호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논리가 발전해 나감에 따라 자꾸만 다른 뜻으로 변화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언어에 대한 의문들이 비트겐슈타인을 중심으로 한번 풀어본 결실이 이 논문이다. ○ 논문의 구성과 요약 이 논문은 비트겐슈타인의 생애를 따라서 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전기의 '언어의 그림 이론'(제3장 제1절)과 후기로의 '전환'(제3장 제2절) 그리고 후기의 '언어 놀이'(제4장)로 대표 되는 일상 생활 언어관으로 크게 나누어져 있다. 제 3장은 '언어 놀이'를 더욱 부각 시키기 위해 전기의 '언어의 그림 이론'을 소개하고 '전환'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사상이 어떻게 거부되는지를 설명했다. 제4장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의 저서 『철학적 탐구』를 텍스트로 삼아 거기서 말하고 있는 언어의 특징들을 논한다. 제2장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생애를 다루고 있다. 제2장에서 의도했던 것은 자기의 대표 적인 저서 『논리ㆍ철학 논고』와『철학적 탐구』가 나오게 된 배경을 생애를 통해서 아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전기의 비트겐슈타인이 왜 논리 실증주의자를 벗어나지 못했는가 하는 의문과 후기의 비트겐슈타인이 삶의 일치를 언어의 공통성의 근거로 삼고 있는가 하는 물음은 생애를 통해 볼 때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러셀의 제자, 전쟁에 스스로 참여하는 정도의 삶의 적극성). 제3장에서는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전기 사상인 언어의 그림 이론을 다루는 부분과 전기 사상을 포기하고 후기 사상으로 전환하는 부분이다. 제1절에서 전기의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기능'과 '언어의 구조'를 전기의 저서 『논리ㆍ철학 논고』에서 논한다. '언어의 기능'은 언어의 그림 이론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언어의 구조'는 진리 함수 이론으로 말할 수 있다. 언어의 그림 이론은 언어(명제)가 세계(사실)의 그림이라는 것이다. 전혀 들어 보지 못한 낯선 명제라도 그것을 읽고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그림이 현실을 묘사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언어도 세계와 관계를 맺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명제)와 세계(사실)가 그림이 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을 만족해야 하였다. ①언어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 요소들과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 요소는 1대 1로 대응한다. ②언어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 요소가 결합되는 논리적 형식과 세계의 구성 요소들이 결합하고 있는 논리적 형식은 같은 것이다. ③언어와 세계의 구성 요소들을 연결시키는 투사 규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일단 언어가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는다고 하면, 언어가 어떤 식으로 모이고 구성되는지 하는 자연스러운 질문이 생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질문에 대해서도 밝히고 있다. 곧 한 명제가 다른 명제에 의해서 진위가 가려진다는 것이다. 어느 한 명제는 그 명제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 명제들로 이루어져 있고, 이 요소 명제들이 사실과 관계 맺는 것에 의해 그 진위가 밝혀 진다. 요소 명제가 사실의 그림이라면 이 요소 명제의 진리치는 참이며 그렇지 않으면 거짓이다. 이런 요소 명제들이 '논리적 형식'에 따라 구성되어 복합 명제로 되면, 이 복합 명제의 진위는 요소 명제들의 참ㆍ거짓의 조건과 논리적 형식이라는 함수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이것이 언어의 그림 이론과 명제 진리 함수론의 요약이라고 하겠다. 명제 진리 함수론은 언어의 그림 이론의 다른 한 측면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언어 이론을 가지고 여러 명제에 적용한다. 자신의 언어 이론과 맞는 진정한 명제(genuine proposition)와 진리 함수론이 적용되지 않는 가명제(pseudo-proposition), 특별하게 진리 함수론의 적용을 받고 있지만 어떠한 사실도 전해주지 않는 극단적인 동어반복이나 모순과 같은 무의미한(senseless) 명제로 나눈다. 자연 과학에서 사용하는 명제는 모두 진정한 명제의 형식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형이상학과 같은 사실, 현실, 세상에 바탕을 두지 않고 세상을 초월한 것에 대해 정의 내리고 논리를 전개해 나가는 것은 헛소리(nonsense)라고 한다. 비트겐슈타인이 형이상학을 헛소리라고 일축하며 부정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꼭 그런 것 만은 아니다. 『논리ㆍ철학 논고』에서 언어를 초월하는 신비로운 것들에 대해 침묵해야 한다는 선문답과 같은 말을 내 던져 놓는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논리적 형식'과 같은 것을 들고 있으며, 생각되지 않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봐서 반 형이상학자는 아니 것 같다. 제2절에서 후기 사상에로의 전환 부분을 다루고 있다. 후기 사상을 직접 언급하기 보다는 비트겐슈타인 전기 사상에 대한 비판을 논하여 자연스럽게 후기 사상으로 갈 수밖에 없는 구성을 의도했다. 전환 부분에서 언어의 일상적인 쓰임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반성이 일어난다. 접속사나 조사들이 세상의 경험적 사실과 전혀 관계 없어 보이지만, 실제 언어 생활에서는 매우 중요합니다. 언어가 가리키는 대상 뿐만 아니라 언어에 얽힌 용도와 규칙을 아는 것이 일상 생활의 언어 사용에 있어 중요하다. 또한 여러 단어가 가리키는 대상이 동일하다 하더라도 우리들에게 주는 의미는 다르다. 이런 복잡한 언어의 특성을 단지 언어의 그림 이론과 진리 함수론만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언어의 그림 이론을 벗어나는 예들이 실제 생활에서는 아무런 저항 없이 잘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손을 가리키며 '저기 서 있어'라는 말이 '저기'라는 지시적 용법은 그 대상이 확정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모든 언어가 '세계'와 '요소 명제'의 1대 1의 대응 관계가 있고 '요소 명제'의 최종적 분석이 가능하여야 의미가 있다는 논리 실증주의의 입장을 포기하게 된다. 물론 이런 분석 가능한 명제들도 언어 속에 있기는 하겠지만, 이제 비트겐슈타인에게 언어를 분석할 수 있는가 아닌가에 따라 언어가 의미 있고 없음을 판별하는 것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은 적극적으로 언어의 그림 이론을 비판한다. 저는 이런 비판을 본 논문에서 '본 질주의(에 대한) 비판'이라고 제목을 달았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다양성을 무시한 채 본질에만 매달려 실제 생활과는 동떨어지게 내려진 결론을 다시 일상적인 사용에로 돌려 보내야 한다고 『철학적 탐구』에서 말한다. 제4장에서 일상적인 사용으로 돌려진 언어에 대해 논한다. 비트겐슈타인 사후에 출판된 『철학적 탐구』는 일상 생활 언어 학파의 입장과 같은 맥락에 있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관은 '언어 놀이'와 '가족 유사성'이라는 말로 대표할 수 있다. 저(논자)는 '언어의 사용'이라는 입장에서 『철학적 탐구』에 나타난 언어관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본격적인 '언어의 사용'이라는 입장에서는 수많은 예들을 첨가했으며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적게나마 이 논문에 제시된 예는 비트겐슈타인 자신의 '예'들이기 때문에 기본적인 이해는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언어 놀이'는 언어의 일상적인 쓰임을 잘 나타내는 말이다. 언어의 사용이 '놀이'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통찰력 있는 생각이며, 저도 전적으로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에 동감한다. '놀이'는 규칙을 가지고 있으며 이 규칙이 지켜지는 한 '놀이'를 놀 수 있다. '놀이'는 여기에 참여 하는 사람과 함께 놀아진다. 규칙이 있고, '놀이'에 참여하는 사람이 있으며, '놀이'는 하나의 활동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언어 놀이'도 '놀이'와 매우 비슷한 유비를 가지고 있다. 제1절에서는 '언어 놀이'를 비트겐슈타인의 분류에 따라 세 가지로 나누어 논하고 있다. 1에서는 포괄적인 의미로 '언어의 놀이'를 다루고 있습니다. 언어(단어를 예로 들었다.)는 따로 떨어져 독립된 뜻을 가지고 있지 아니하고 다양한 맥락을 통해서 단어의 의미가 생성된다('석판'이라는 사전에 있는 의미와 벽돌공이 자신의 조수에게 '석판!'이라고 하는 말은 같은 말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다른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단어가 쓰이는 맥락에서 뿐만 아니라, 단어가 지시하는 것 자체에도 다양성을 발견할 수 있다(연장통이 있는 연장은 다 '연장'이라고 하지만 이것으로 공통적인 것을 발견할 수는 없다). 이런 다양성들은 공통된 것을 뽑아 내어 '기호화' 한 것이 단어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이다. ('손잡이'의 예와 'is'의 예) 2에서는 '언어의 과정'이라고 제목을 부쳤는데, 이것은 언어를 배우는 것은 논리적인 계산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각 경우마다 뜻하는 바를 훈련을 통해서, 배우는 자와 가르치는 자가 훈련에 같이 참여해서 배우는 것임을 강조한다. 만약 훈련이 방법이 다르다면 단어의 지시적 가르침을 같다고 하더라도(논리학에서는 단어의 외연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전혀 다른 이해를 가져올 것이다. (사냥꾼의 자식에게 가르쳐지는 총//군인의 자식에게 가르쳐지는 총) 3에서는 '언어 놀이'가 지니고 있는 '활동'의 측면에 대해서 논한다. '언어 놀이'는 멀찍이 지켜보며 즐기는 것이 아니라 직업 언어에 참여하는 활동이며 삶의 형태를 부각하기 위하여 의도된 말이다. ①언어가 가지는 다양성과 ②언어를 습득할 때 여러 다른 과정으로부터 배움에도 불구하고 언어가 일정한 의미를 전달해 주는 것은 언ㄱ어가 노는 ('활동'하는) 마당이 삶이며, 언어를 가지고 놀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형태가 같기 때문이다. 제2절에서는 언어가 다양하고 애매함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대로 의미를 전달해 주는 근거를 '가족 유사성'이라 하고 이를 논하고 있다. '가족 유사성'이란 말은 보편적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 않고, 단지 부분의 공통점만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본 논문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 66과 §67을 직접 인용하여 '가족 유사성'의 설명과 예를 소개했다. '언어 놀이'와 '가족 유사성'의 개념은 언어의 공통된 본질을 찾을 수 있고 이런 본질이 있어야만 의미가 있다는 본질주의에 대한 공격을 아울러 포함한 말이다. 언어에 보편적인 공통점이 없다면 매우 혼란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예로 우리가 '애매하다'는 말을 할 때에는 부정적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가지는 다양함, 애매함은 언어의결점이 아님을 더욱 진척 시킨다. 제3절은 언어가 통일성을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 이유를 논하고 있다. 언어의 '의미'는 언어의 '사용'이라고 비트겐슈타인은 말한다. 이 부분에서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의 언어의 그림 이론을 피하기 위한 노력이 볼 수 있다. ①(단어의) '의미'는 (단어가 가리키는) '대상'이 아닙니다. '단어의 의미가 무엇인가' 혹은 '시간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필연적으로 단어가 지시하는 대상을 찾으려는 요구를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언어의 그림 이론이 가정하는 언어의 기능이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그림 이론을 '사용'이라는 말로 피해간다. '낱말'과 그것이 가리키는 '의미'는 '돈'과 '돈으로 살 수 있는 소'라는 도식 보다는 '돈'과 '돈의 사용'이라는 예를 들어 '의미'는 '사용'이라는 논리를 진척 시킨다. ②본질주의자들은 단어가 가리키는 대상이 없다면 그 단어는 의미를 잃어 버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생활에서 단어의 의미 있음은 단어가 지시하는 대상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런 일정한 용법(사용)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엑스칼리버를 입에 물고 있는 용) '의미'의 이해는 '사용법'의 숙달이다. ③단어에 의미를 주고 있는 것은 사용이 있기 때문이다. 단어의 의미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다가 언어에 의해 대표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놀이'와 같이 일정한 방식으로 사용함으로써 결정된다는 것이다. 제4절에서는 '언어의 사용'을 본격적으로 다룬다. 3절에서와 같이 '의미'가 '사용'이라고 하면 언어(단어)가 가지는 의미는 사용 규칙의 문제가 된다. 언어의 사용 규칙은 언어 '놀이'에서 암시되고 있었다. 1에서 규칙을 세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살피고 있다. ①규칙은 미리 만들어져 결정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관습과 제도에 의해 규칙이 결정된다. 훈련 받는 사람에 따라 이해 단계가 결정되어 있듯이 우리의 관습ㆍ제도의 이해 단계에 따라 규칙의 단계도 결정된다. ②규칙은 해석에 좌우 되지 않고 곧바로 행위에 적용된다. 흔히 규칙을 해석하고 이에 맞게 행동한다는 식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아예 해석의 단계를 없애 버렸다. 규칙을 바로 행동(언어의 사용)에 적용시킨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규칙을 해석하는 단계가 빠져버렸기 때문에 언어의 의미가 객관적으로 일정하게 유지할 만한 근거가 없지 않는가 하고 생각하기 쉽다. 비트겐슈타인은 '해석' 단계에서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을 문제시 삼았던 것이다. ③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규칙의 의미를 일정하게 유지하고 있는 근거로 해석이 아니라 항구적으로 내려오는 관례, 관습을 들고 있다. 2에서는 관례, 관습이란 말을 사용함으로써, 의미를 일정하게 하는 원리를 형이상학적인 실재나 본질에서부터, 언어를 사용하는 주체에게로 관심을 둔다. 이런 전환의 결과가 '삶의 형식'의 일치라는 말로 나타난다. 언어가 작동하는 발판은 사람들 사이의 동의이다. 그 사람들의 의견의 일치가 아니라 삶의 형식적 일치이다. '삶의 형식'이 관례, 관습을 포함한 문화적인 맥락에서 읽혀질 때, 사람들이 언어로 놀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되는 것이다. ○ 앞으로의 탐구 방향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인물을 택함으로써 논리 실증주의자들의 입장과 일상 생활 언어 학파의 입장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논리 실증주의자에서 일상 생활 언어관으로 돌아간 비트겐슈타인이 증명하듯이 언어가 고정된 뜻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보다 일상 생활에서의 쓰임이 더 중요함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언어의 쓰임을 다 파악하고 있다면 말 때문에 생기는 논쟁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여전히 우리는 말의 쓰임을 익히고 배워야 한다. 그러므로 언어에 대한 연구는 언제나 열린 채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 논문의 다음 단계로 두 가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기 비트겐슈타인에 해당하는 것으로 『논리ㆍ철학 논고』에 쓰여 있지 않는 부분, 곧 신비스러운 것들에 대한 연구를 더 진척하였으면 한다. 전기에서 후기로 돌아 섰다고 하여 전기 사상 전체가 폐기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이다. 전기 사상이 언어 모두를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음으로 생기는 전환이지 전기 사상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논리ㆍ철학 논고』에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라" 하는 비트겐슈타인의 단호한 말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강한 호기심이 충동한다. 본 논문에서도 말할 수 없는 것들 몇몇만을 열거 했는데 좀더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도덕 원칙, 형이상학, 신 등에 해당하는 말이 말할 수 없는 것들의 영역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영역을 하찮은 것으로 부정하고 있지 않고 상당한 존경심으로 바라본다. '말할 수 없는 것'이란 말마디로만 본다면 공(空)과 그리스도교의 부정 신학과 일맥 상통하고 있는 것 같으며, 이미 불교 쪽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연구 성과를 내고 있다. 비트겐슈타인도 『논리ㆍ철학 논고』에 적혀 있지 않는 것에 주목하라는 말을 대화와 편지를 통해서 말하였다. 또 한 가지는 후기 사상에 관한 부분인데, 다양하고 애매한 언어로 어떻게 의사 소통이 가능한가 하는 부분에 대한 연구가 더 있어야겠고 생각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애매한 언어가 큰 오류 없이 뜻을 전하는 것은 삶의 형식적 일치 때문이라고 한다. 본 논문에서는 삶의 형식적 일치에 관해서는 의문 없이 그대로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을 따르고 있지만, '삶의 형식'에 대한 부분만 따로 때어 놓아도 좋은 주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삶의 형식적 일치를 지나치게 확대하여 본다면, 철강 노동자들이 쓰는 말은 사무직 노동자들이 쓰는 말과 다르며 더욱이 학생들이 쓰는 말과는 매우 다름을 체험한다. 이런 다름은 삶의 형식적 일치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언뜻 후설의 '삶의 지평'이라는 말을 생각나게도 하는 '삶의 형식'이란 주제를 더욱 진척 시키면 실제 생활에 도움이 되는 연구가 되겠다고 생각한다.*

      • 한국 개신교 복음주의의 사회적 혁신을 위한 비종교화의 의미 : 욕망 충족의 도구로서의 종교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통하여

        김세현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2020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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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개신교에 대한 신학적, 철학적, 사회문화적 비판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연구들의 가치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다뤄지지 못하고 배척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섬세한 타자 배제 담론을 통해 그들의 활동이 악한 사람들의 교회에 대한 공격으로 치부되어 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신교는 점점 게토화 되며 사회⦁문화적 자리를 잃어버리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개신교 진영에서는 반성 담론을 필요로 하고 있다. 왜냐하면 교인 수의 급감이라는 현실적인 위협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논문의 목표는 종교에 대한 공격이 아닌,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기 성찰 방법을 제공하는 것이다. 제시될 자기 성찰 방법이란 반성의 방식으로써 자기 비하가 아닌 종교적 인간에 대한 분석과 성찰이다. 이것은 종교적 인간에 대한 관점을 제시하는 것으로써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개신교 비판이 자기 성찰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복음주의 지성 담론의 장을 떠나야만 예수 따르는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근거로서 본회퍼의 비종교화 통찰을 제시한다. 이를 통해 신앙은 예수 따르는 삶으로서의 ‘자기부인’이 되고 한국적 복음주의 고질적 문제인 ‘자기절대화’, ‘종교의 도구화’, ‘타자 억압 및 배제’ 문제에 대한 근원적 해결 가능성을 얻게 된다. Theological, philosophical and socio-cultural criticism of Korean Protestantism can be easily found. However, despite the value of the research, it is a reality that it is not properly handled and rejected. The reason for this is that their activities have been dismissed as attacks on the churches of evil people through the delicate discourse of exclusion of others, the Christian worldview. So Protestantism is becoming increasingly ghettoized and losing its social and cultural position. On the one hand, the Protestant camp, on the other hand, requires discourse on reflection. This is because they are experiencing a realistic threat of a sharp drop in the number of members. Therefore, the goal of this paper is not to attack on religion, but to provide a self-reflection method in a true sense. The self-reflection method to be presented is an analysis and reflection of ‘homo religious’, not self-deprecation, as a way of reflection. This is to provide a perspective on religious human beings so that criticism of Protestantism in society can lead to self-reflection. In addition, we present Bonhoeffer's de-religious insights as a basis for starting a life following Jesus only after leaving the field of evangelical intellectual discourse. Through this, faith becomes “self-denial” as a life of following Jesus, and the fundamental solutions to the problems of “self-absolute”, “religious instrumentation”, and “repression and exclusion of others” that are chronic problems in Korean evangelicalism are obtain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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