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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와 황지우의 <유리끼운 세한도(歲寒圖)>의 비교 연구

        여지선 강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1 인문과학논집 Vol.22 No.-

        본 연구는 19세기에 그려진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세한도(歲寒圖)>가 당대와 현대를 가로지르면서 시대적, 문화적 차이를 통해 수용된 다층성을 밝히고자 한다. 김정희는 조선후기의 뛰어나 서화가(書畵家)이자 금석학자(金石學者)이자 실학자(實學者)이다. 그는 1844년, 그의 나이 58세 때에 제주도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때 김정희를 기억해준 유일한 제자, 역관 ‘李尙迪’을 기리는 마음으로 <세한도>를 그렸다. 이 <세한도>는 네 종류의 글로 오늘날까지 기억되고 있다. 그 첫 번째는 김정희가 이상적을 기리기 위한 발문이다. 두 번째는 이상적이 김정희의 의사와 무관하게 정치적인 이유로 청나라 명사 16인에게 보여주고 받은 찬문찬시이다. 세 번째는 광복 후 김석준, 오세창, 이시영이 더한 찬문찬시이다. 네 번째는 황지우를 비롯한 여러 시인이 남긴 현대시이다. 롤랑 바르트가 제기한 것처럼, 하나의 기호는 2차 의미체계에 의해 새로운 의미를 생성해낸다. 그런 측면에서 바라볼 때,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는 오늘날 황지우의 <유리끼운 세한도>에 영향을 미쳤다. 추사 김정희가 <세한도>를 통해 자신에게 의리를 지킨 이상적을 기억하며 19세기의 ‘의’를 밝혔다면, 황지우는 추사 <세한도>를 20세기에 불러내어 현 시대의 문제와 해결방안을 제시하였다. 즉 거대담론이 사라진 것처럼 인식된 현실세계에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다시금 불러 세워, 아직은 사회적 문제, 거대담론의 문제로 행동해야할 때임을 드러냈던 것이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는 당대 개별적 작품성뿐만 아니라 시대를 넘나드는 시대사적 의의를 지닌다. 이를 드러낸 현대 시인이 바로 황지우이다. A highway stretches out between Chu Sa Kim Jeong-hui and Hwang Ji-u. Thus the fact that only readers can spread the highway determines whether the highway is comprised of only one road or many forks according to the extent of the reader's interest. Chu Sa Kim Jeong-hui and Hwang Ji-u are scholars and artists of the century who first walked the same path then went on their separate ways. Most of all, I will focus on four aspects of the path they walked together.Firstly, Chu Sa Kim Jeong-hui and Hwang Ji-u are regarded as pioneers who led a change in a transitional period. Hwang Ji-u witnessed the miserable lives of his father and uncle who had suffered during the Japanese Ruling and Korean War. Therefore he has developed his revolutionary esprit from the Japanese Ruling, even though he was born in 1952. Secondly, both Kim Jeong-hui and Hwang Ji-u were exiled for political reasons. Thirdly, Chu Sa Kim Jeong-hui and Hwang Ji-u wished to communicate with the world. Lastly, Chu Sa Kim Jeong-hui and Hwang Ji-u led religious lives after they returned from exile. As Hegel said that all beautiful arts flow into religion or philosophy, Kim was converted to Buddhism in his later years, even though he was a privileged elite in the Confucian society. He became a monk after receiving Buddhist code of conduct in Bong-eun Temple. Hwang also revealed that he is interested in oriental spirit, buddhism, and Taoism.In short, Chu Sa Kim Jeong-hui and Hwang walked the same path. This junction not only resulted in similarities between Kim's Sehando and Hwang's Midwinter Picture Seen Through Glass, but also created contrast. In order to look into their differences.

      • KCI등재

        동강 김우옹의 민본사상

        이석규 ( Lee Seock-kyu ) 한양대학교 동아시아문화연구소(구 한양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6 동아시아 문화연구 Vol.67 No.-

        본 논문은 동강 김우옹의 민본사상을 살펴본 것이다. 그는 유교 정치사상에서 명분론과 민 본론이 절대적 가치임을 인식하였다. 그러나 양자는 현실 정치에서 항상 충돌의 가능성을 안고 있었다. 김우옹은 양자의 충돌 가능성을 군민일체론을 통해 해소하고자 하였다. 즉 군주와 민의 관계를 부모와 자식의 관계로 의제화하고, 부모와 자식이 일체인 것처럼 군주와 민도 일체라는 것이다. 이 논리에서는 민에 대한 일방적인 지배나 또는 군주에 대한 반역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양자는 일체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군민일체론은 16세기 조선의 정치사상사에서 중요한 진전이었다. 그러나 김우옹이 활동했던 시대는 지배의 명분만이 강조되면서 민본정치는 실종된 상황이었다. 이에 그는 민본정치를 회복하기 위해 사공과 변통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구체적인 정책을 통해 민에게 실질적인 이익을 주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민에게 피해를 주는 제도를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전까지만 해도 그는 변통해야 할 구체적인 제도에 대해 많이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왜란을 겪으면서 그는 적극적으로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것은 국정 전반에 걸친 것이었지만, 특히 인사 제도와 군정의 개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김우옹은 어떤 개혁이라도 그것이 성공하려면 민심을 하나로 묶는 민본정치가 전제되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This article deals with Dong-Kang Kim U-Ong`s `Min-Bon` ideology. He regarded `Myeong-Bun Ron` and `Min-Bon Ron` as the essence of the Confucian political ideas. The two values, however, tended to conflict with each other in real politics. Kim U-Ong tried to solve the problem thorough `Gun-Min-Il-Chae Ron,` a theory that the monarch and the people are integrated into a single body. It assumes that the monarch and the people, just as the relationship between parents and their siblings, are unified into a single entity, thus allowing neither autocratic ruling over the people nor rebellion against the monarch. The development of this theory was a great progressive step in the history of political ideas of the sixteenth-century Chosun dynasty. During the time when Kim U-Ong was actively working, however, `Min-Bon` politics had declined. That the people should be ruled by the monarch and the upper class was the prevailing political ideology. Recognizing serious problems in such political reality, Kim U-Ong called for `Sa-Gong` and `Byeon-Tong,` by which he believed the contemporary society could revive `Min-Bon` politics. He urged that institutions damaging the life of the people be abolished or reformed, and instead, various administrative maneuvers be introduced for the benefits of the people. His voice for reform began to be loud after the Japanese invasion in the Im-Jin year. Although the reforms Kim U-Ong demanded were across the whole of political spheres, he paid a special attention to personnel administration and military system. The message he delivered to the contemporary society was that politics should be grounded upon `Min-Bon` ideology, without which any reform would not be successful.

      • KCI등재

        간재(艮齋) 문하(門下) 용암(勇菴) 김사우(金思禹)의 학문(學問)과 사상(思想) ― 간재학의 계승과 극복의 `일리(一理)`적(的) 체용심성론(體用心性論)을 중심으로 ―

        장병한 ( Jang Beoung-han ) 영산대학교 동양문화연구원 2016 동양문화연구 Vol.25 No.-

        勇菴 金思禹(1857-1907)는 지금까지 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간재의 高足 弟子이다. 용암의 現實의 憂患意識 및 學者的 處世觀, 그리고 華夷論과 異端 批判 및 그 對應論은 대체로 스승 간재와 함께 보조를 취하여 계승하는 입장에 서고 있다. 특히 이단 배척에 있어, 용암은 당시 `心卽理`설을 주장하고 있는 한주학파와 心을 理로 주장하려는 즉 主心家들인 화서학파와 노사학파들의 설을 이단 학설로 규정하고 비판한다. 반면 正學은 스승 간재의 `心本性`학과 주자학과 율곡학을 대두시켜 계승 발전시킬 것을 맹서한다. 그런 반면 용암은 知覺, 知識, 三達德설을 비롯한 심성리설에 있어서는 스승 간재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고 자득의 이론을 제안한다. 간재 역시 이들 문제에 대한 용암의 견해에 대해 심각한 병통의식으로 고민한다. 용암은 당시의 도술분열의 관건이 되고 있는 즉, 리기심성의 主從·師弟·尊卑의 관계성 논리의 대안으로 經緯·體用論을 제안한다. 존비와 주종관계는 優劣의 논리에 기인하고 있지만 체용논리는 그러한 우열의식을 다소 완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一理字`上의 經緯·體用論을 제안한다. 이렇게 되면 華西의 `本心卽理`설의 理, 蘆沙의 `理尊無對`의 理, 寒洲의 `心卽理`의 理를 동시에 모두 어느 정도 섭용하는 가운데, 자파의 심본성설에도 크게 위배되지 않기 때문이다. 요컨대 주자 `性卽理`學의 근원지인 `一理`學으로 歸敬하여 대동적 사상 통일을 구현해 보자는 것이다. 그런 한편 용암은 자신의 자파인 간재학의 `性師心弟說`, `性尊心卑說`, `心本性說` 역시 당면한 시대와 현실에 부응하기에는 많은 한계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직시하고 간재선생에게 합일점을 찾기를 충언한다. 그래서 그는 간재 선생과의 논의를 통해, 心의 중요도를 약화시키기 위해 誠의 중요도를 강조하는 가운데, `性體道用`論과 `達德(道之體)·達道(性之用)論 및 `誠本道用`論을 제시한다. 그러면서 선생이 삼덕이 心의 用이라는 주장에 대해, 용암은 주자의 해석에 근거하여 `三德卽性(理)之同`이라고 하여 理(性)學으로 귀결시키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용암의 `理`一字上의 經緯·體用論的 理心性說의 展開는 30년간 스승 간재 師門에서 듣고 배운 과정을 통해 일생동안 參究하고 思索하며 考驗하는 것에서 自得한 것이다. 이러한 용암의 이기심성설의 자득론은 당시 일제 강점기 바로 직전의 심성설 논쟁으로 인한 학파 분열을 理學으로 통일 귀속시켜 제국주의의 침략과 일본의 침탈에 항거하는 지침 즉, 大一統의 大同的 民族主體 思想에 근간하고 있다는 것에서, 그 의의가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당시 國亡의 克復을 위한 용암의 이와 같은 憂國衷情의 정신체계를 미래의 통일을 위한 指南處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Yongam Kim Sa-u(1857∼1907) was the principal disciple of Ganjae who is not known to the academia to date. His Virtue Establishment and Deep Learning are evaluated as the pillar of the academia, and the cream of the Confucian scholars. Yongam`s concerning mind of the reality, his scholarly worldview, his criticism different from the Theory of the Civilized and Barbarians, and response theory generally keep abreast with his master Ganjae, and inherit them. Yet, in relation to his master Ganjae`s worldview, Yongam did not hesitate to present counsel and advice, and vowed to consolidate mutual ties among his scholarly colleagues to respond to the times and thoughts. Yongam was deeply concerned about the then problem of the Techniques of the Way being divided. The division of schools and political parties led to the division of the state`s public opinions and the weakening of the state power, eventually to the fall of the state due to external powers. Thus, Yongam asked his master Ganjae to unify thoughts. Yet, he developed his philosophy and reasoning and acquired this learning from 30 years of the studies with his master Ganjae, as well as from self-study, thinking and experience. Such self-acquisition theory of Yongam is based on the guideline under which, prior the Japanese colonial rule of Korea, the division of studies due to arguments about the Mind theory is unified into the reasoning studies so as to resist the imperial invasion and Japanese deprivation of Korea, making it significant. We should take Yongam`s patriotic mentality for overcoming the state`s difficulties as the guideline for our future unification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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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논문 : 율곡학(栗谷學)의 계승(繼承)과 창신(創新)

        황의동 ( Eui Dong Hwang )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2010 儒學硏究 Vol.23 No.-

        율곡학의 특성은 개방적 학풍과 務實학풍에 있다. 또 이기심성론에 있어서는 理氣之妙의 입장에서 氣發理乘一途說과 理通氣局說을 주장하였다. 율곡은 發하는 것은 氣요 理는 발하지 않는다 하여 이황의 互發說을 반대하였다. 또한 인간의 감정을 통틀어 七情으로 보고, 이 속에서 선한 감정을 四端으로 보았는데, 이는 기대승의 설을 계승한 것이다. 이와 같은 율곡의 설은 충실한 제자 사계 김장생을 통해 전승되었다. 그는 성실한 학문태도로 율곡의 설을 계승하여 송시열을 비롯한 율곡학파에게 전해 주었다. 김장생은 성리학적 측면에서 율곡의 설을 충실히 계승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禮學的創新이라는 유학사적 공헌을 하였다. 송시열은 김장생을 통해 율곡의 성리학을 충실히 계승하였다. 특히 영남 퇴계학파의 도전에 대응하면서 율곡학의 정체성을 찾고 퇴계설의 부당성을 비판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송시열은 의리적 측면에서 자기 정체성을 보여주었다. 그는 평생의리를 중시하였고, 의리의 실천과 부식을 위해 노력하였다. 송시열은 율곡, 김장생의 성리학을 충실히 계승하면서도, 의리적 創新이라는 유학사적 공헌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송시열의 경우 율곡학에 대한 영남 퇴계학파의 도전에 대응하면서 배타적이고 보수적인 학문의 경직성을 낳게 되었고, 대의명분론에 치중한 나머지 율곡 학풍으로서의 務實학풍을 결여하게 되었다. Yul-Gok study is characterized by its openness and Mu-sil scholastic atmosphere. Also, it includes I-Gi-Ji-Myo, theory of Ki-Bal-Il-Seung-Il-Do, theory of I-Tong-Gi-Guk, and theory of senses in Chil-Po-sa. Philosophy of Yul-Gok is inherited by Jangsang Kim, who greatly contribute to the development of Ye-Hak by faithfully carrying on Yul-Gok`s Neo-Confucianism. In addition, Siyeol Song has contributed to practcing principles of righteousness through inheriting Yul-Gok and Jangsang Kim`s Neo-Confucianism. In particular, he made his effort to defend Yul-Gok`s Neo-Confucianism by coping with the challenges from Youngnam Toe-Gye School. For these reasons, his academic tradition was characterized as conservative and closed 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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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대 『국조속오례의보』․『국조상례보편』의 편찬 배경과 편찬자들

        박수정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18 규장각 Vol.53 No.-

        『국조오례의』 편찬(1474, 성종 5) 이후, 270년이 지난 1744년(영조 20)에 후속편에 해당하는 『국조속오례의』의 편찬이 이루어졌다. 『속오례의』에서 표명한 편찬 의의는 ‘오랜 시간을 경과하는 동안 예가 퇴이하여 시대에 맞지 않아서’라고 하였지만, 본고에서는 단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의례 개정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지 않았다. 이미 『속오례의』 편찬 의의를 국가의례의 재정비가 아니라, 정치적 측면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므로 『속오례의』에서 왕세자와 왕세손의 길례․가례를 보완한 『국조속오례의보』(1751년, 영조 27)와 흉례를 보완한 『국조상례보편』(1752년, 영조 28/1758년, 영조 34) 역시, 『속오례의』의 보완서로만 보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 이에 따라, 본고에서는 영조시대에 의례서가 새롭게 편찬된 이유를 밝히기 위해 『속오례의』의 편찬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그 보완서에 해당하는 『속오례의보』․『상례보편』의 편찬 배경과 편찬자들, 그리고 의례 내용에 대해 살펴보았다. 『속오례의』가 완성되고 7년 만에 나온 『속오례의보』와 『상례보편』은 그 편찬 시기가 노론이 1740년(영조 16) 경신처분을 통해서 출사의 명분을 회복하고 영조의 왕위 정통성 시비가 끝난 지 10여년 정도가 지난 시점이었다. 그리고 이때는 영조가 왕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긴 지(1749년, 영조 25) 얼마 지나지 않은 무렵이었으며, 1755년(영조 31)은 소론 일파가 노론을 제거할 목적으로 일으킨 역모 사건, 즉 乙亥獄事를 계기로 영조가 『闡義昭鑑』을 지어 집권의리를 천명한 해였다. 이와 같은 정치적 상황이 의례서의 편찬 배경이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영조의 입장이 고려되었다. 『속오례의보』와 『상례보편』의 편찬이 이루어진 시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부왕 숙종이 국가 재건사업을 벌이고, 이를 이어받은 영조가 계술사업을 마무리한 이후였다. 이제 정통성 시비에서 벗어난 영조가 국왕으로서 정치적 의지와 포부를 가지고 자신이 주도하는 국가정책을 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시행된 영조의 탕평정책 가운데, 의례서 편찬이 포함되었다. 요컨대, 영조가 부왕의 사업을 완결 지은 다음, 자신의 집권 기반이었던 노론에 근원을 둔 탕평지지자들을 편찬 구성원으로 하여 펴낸 의례서가 『속오례의보』와 『상례보편』이었다. 그리고 의례서의 편찬에 참여한 구성원들은 노·소론 연합정권을 운영하고자 했던 영조의 탕평정치 아래 전개된 국가 정책의 책임자이며 실무자들이기도 했다. 이들의 당색이 편찬자들의 구성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의례서를 단순한 의례 정비 차원에서 이루어진 문화적 산물로만 평가할 수 없는 이유이다. 본고에서는 편찬 배경과 편찬자들에 대한 정보를, 『속오례의』와 『속오례의보』·『상례보편』이 수정·보완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의례서임을 밝히는 출발점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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