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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중등 역사교과서의 임나일본부설

        김기섭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2018 백제문화 Vol.0 No.58

        Japan's middle school history textbook reflects the universal view of history in Japanese society. However, current Japanese middle school history textbooks describe Imna-ilbonbu theory(claims that ancient Japan ruled the southern part of the Korean peninsula) as a positive view. The Imna-ilbonbu theory is a theory of political bias in the 19th and 20th centuries that the Japanese army conquered and ruled the southern part of the Korean peninsula in the 4th and 6th centuries, it had been abolished at the end of the 20th century. At present, the middle school history textbook of the Tokyo Shoseki Co., the largest textbook publishing company in Japan, page 36 and page 37, includes the Yamato government built strong forces in the 4th century(Nihonshoki), the culture of old burial mounds in the center of Keyhole-shaped Kofun(Zenpoukouenfun), the 5 king of Wa who interacted with China(Sungshu), the war with Goguryeo (King Gwanggaeto's tombstone) and the importation of the technical culture through a migrant, the Elements that match the logic of the theory are organized in the core contents. It is sufficient not to reflect the scientific results of the academic world, including the reliability of the materials, but to reconcile the Imna-ilbonbu theory. The mainstream history academia of Korea and Japan generally agrees with the non-scientific, political, and historical distortions that the traditional Imna-ilbonbu theory of Japan can not hold. It is impossible that the political forces of the Japanese archipelago, which had been able to produce its own ironware since the 6th century, ruled the political forces of the Korean peninsula armed with iron armor and horse corp in the 4th century for over 200 years. The results of archaeological excavations in the southern part of the Korean peninsula are also quite different from those of the Imna-ilbonbu theory. The fact that the description and content of Japanese historical textbooks have not changed much in the first half of the 20th century means that the textbooks are not based on scholarly research results and scientific logic. The Imna-ilbonbu theory of the Japanese history textbook tells us that the study of history and the recognition of history and history education do not necessarily coincide. 일본의 중학교 역사교과서는 일본사회의 보편적인 역사관을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현행 일본 중학교 사회과 교과서에는 임나일본부설이 긍정적인 관점으로 기재되어 있다. 임나일본부설은 4 6세기에 倭의 군대가 한반도 남부를 정벌하고 지배했다는 19 20세기의 정치편향 학설로서 20세기말에이미 일본학계에서도 폐기되다시피 한 것인데, 학교 역사교육은 아직도 옛 제국주의시대의 분위기를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현재 일본에서 규모가 가장 큰 교과서 출판사인 東京書籍주식회사의 새로운 사회: 역사 , 36쪽과37쪽은 4세기에 강력한 세력을 구축한 야마토정권( 日本書紀 ), 그것을 증명하는 前方後圓墳 중심의고분문화, 중국과 교류한 倭5王( 宋書 ), 고구려와의 전쟁(廣開土王碑), 渡來人을 통한 기술문화 수입 등임나일본부설 논리에 맞춘 요소들이 핵심내용으로 편집 구성되어 있다. 자료의 신뢰도를 비롯한 학계의 비판적 연구성과는 반영하지 않았기에 구성만으로도 임나일본부설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扶桑社의 역사교육관을 이어받은 自由社의 중학사회: 새로운 역사교과서 와 育鵬社의 [新編]새로운일본의 역사 는 아예 임나일본부설을 노골적으로 본문에 서술하고 있다. 특히, 育鵬社의 역사교과서는 고대의 倭國을 ‘우리나라’라고 지칭함으로써 현재적 시각을 고대사에까지 연장하였으며, 4 6세기에 倭가 바다 건너 한반도 남부지역을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역사적 사실로 확정하였다. 한국과 일본의 주류 역사학계는 종래의 임나일본부설이 더 이상 성립할 수 없는 비과학적이며 정치적인 역사왜곡이라는 데에 대체로 동의한다. 6세기 이후에야 철기를 자체 생산할 수 있었던 일본열도의 정치세력이 4세기에 이미 철제갑옷과 騎馬로 무장한 한반도의 정치세력을 2백여년간 지배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한반도 남부지역의 고고학적 발굴조사결과도 임나일본부설과는 전혀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역사교과서의 서술 기조와 내용이 20세기 전반기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은 그것이 학문적인 연구성과와 과학적 논리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다른 비과학적 요소의 영향아래 있기 때문이다. 일본 역사교과서의 임나일본부설 문제는 역사사실 연구와 역사인식 역사교육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이 아님을 실증적으로 알려준다.

      • 문헌학과 금석학의 융합으로 보는 광개토태왕릉비의 왜(倭)와 임나(任那) -임나일본부설과 관련하여-

        이찬구 바른역사학술원 2019 역사와융합 Vol.- No.5

        이 이 글은 광개토태왕릉비의 비문 내용을 분석하여 왜(倭)와 임나(任那)의 실체를 밝혀 일본측이 주장해온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일본이 한반도 남부를지배 경영했다는 주장)이 거짓임을 규명하는데 목적이 있다. 광개토태왕릉비는 장수왕 3년(AD 414)에 건립된 동북아시아에서 최고(最古) 최대(最大)의 비이다. 그러나 이 비는 청(淸)의 출입금지조치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었다. 그러던 중 1884년(광도 10년) 일본 정보장교(酒勾景信)가 이비를 발견하여 본국에 탁본을 보냈고, 일본 군부 세력은 비밀리에 이를 연구하였다. 일본이 주목한 곳은 비문중의 이른바 신묘년조 기사(而倭以辛卯~新羅以 爲臣民)이다. 즉 이 구절을 “일본이 신묘년(AD 391)에 바다를 건너가 백제와 신라를 파(破)하고 그들을 신민(臣民)으로 삼았다”고 해석하여 공개(1889년)했다. 이런 해석의 의도는 일본이 조선을 다시 지배하려는 논리를 제공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한국의 정인보는 일본의 해석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고, 생략된주어가 고구려이기 때문에 고구려가 일본을 파(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필자는 기본적으로 신묘년조 기사 중에 이왜이(而倭以)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국내 소장본인 구로다(黑田正雄) 탁본(1876)과 프랑스 ‘샤반느 탁본’(Chavannes·1907)을 통해 판본상 변조된 글자와 빠진 글자의 새로운 보결(補缺)을 시도하였다. 그 결과 당시의 왜는 북규수(北九州) 일대의 해적떼이며, 비문상의 주어는 왜(倭;而倭以)자가 아니고, 제(帝;而帝以)자이며, 제(帝)는 곧광개토태왕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임나는 한반도가 아닌 일본열도에 있었다는것을 입증하여 임나일본부설이 허구임을 밝혔다.

      • KCI등재후보

        가야사와 가야불교사 인식의 새 지평을 위해서

        이덕일 바른역사학술원 2021 역사와융합 Vol.- No.8

        현재 한국의 가야사 인식은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못하다. 가야사를 집중적으로 연구했던 것은 대일항전기 때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었는데, 이들은 가야에대한 사료가 부족한 것을 기회 삼아 『일본서기』에 나온 임나일본부설에 입각해서고대 야마토왜의 식민지가 가야였다는 관점에서 연구한 것이었다. 광복 후 일본인 학자들의 이런 연구에 대해서 한국(남한) 학계는 총론으로는 “임나일본부설을 극복했다”고 비판하는 척했지만 내용적으로는 ‘임나=가야’라는 임나일본부설의 핵심논리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면 북한 학계는 1963년 김석형이 분국설을 제창하면서 형식적, 내용적인인 면에서 임나일본부설을 완전히 폐기시켰다. 그 결과 남북한의 가야사 인식은 극과 극을 달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한 학계는 『삼국유사』 「가락국기」 및 『삼국사기』 등의 문헌사료와 옛 가야지역의 각종 고고학 유적, 유물을 가지고 가야 건국시기를 서기 1세기로 인식하지만 남한 학계는 가야가 서기 3세기 경에 건국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가야사 연구에 있어서 또 하나의 중요한 분야는 가야불교사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서 452년 왕후사를 세웠다는 기록을 가야불교의 전래시기라고 해석하지만 이는 가야에서 왕실사찰을 세웠다는 기록이지 가야에 불교가 처음 전래되었다는 기록이 아니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허왕후가 서기 48년 아유타국에서 가야로 오면서 가져온 파사석탑은 가야불교의 전래시기를 5세기 중엽으로 보는 시각이 문제가 있음을 말해준다. 『삼국사기』의 고구려·백제 불교전래에 관한 기록은 대승불교의 전래기록인데, 최치원이 쓴 「지증대사탑비」에는 대승불교보다 소승불교가 먼저 들어왔다고 해석할 수 있는 내용이 있다. 이런 사실들은 우리가 과거의 가야사 해석, 특히 대일항전기 때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 만든 고정된 가야사의 틀을 근본적으로 다시 검토해야 할 시기에 이르렀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 KCI등재

        남한 강단사학계 가야사 연구 비판 - 김태식·이영식을 중심으로

        이주한 바른역사학술원 2023 역사와융합 Vol.- No.14

        19세기 일본에서 정한론이 발흥하면서 이른바 근대역사학이라는 이름으로 최초로 만들어진 침략이론이 임나일본부설이다. 서기 4세기~6세기에 야마토왜가 한반도 남부의 가야를 근거로 해 한반도 남부를 지배 또는 경영했다는 주장인데, ‘남선경영론’이라고도 한다. 8세기에 편찬된『일본서기』의 과장·윤색·조작·왜곡 기사에 의거해 제국주의 역사학자들이 주창한 반인류적인 침략이론이다. 천황을 정점으로 해 지배체제를 구현하고자했던 야마토왜의 이념이 임나일본부설에 담겨있고, 현재까지도 일본고대사학계 대다수는 이를 고수하고 있다. 1945년 일제가 폐망하면서 청산됐어야 할 주장이 조선총독부와 경성제국대학에서 활약한 스에마쓰 야스카즈에 의해 1949년에『임나흥망사』로 집대성되었다. 임나일본부설을 입증할 1차 문헌사료나 고고학 자료는 아무것도 없다. 그럼에도 이 설은 일본과 남한 강단사학계에서 정설 또는 통설로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다. 이로 인해 고구려·백제·신라·가야 등의 역사와 그 열국들을 낳은 고조선과 고조선 이전의 실재한 역사가 훼손되고 한국사는 정체성과 타율성의 역사로 정립되었다. 따라서 가야사의 실체와 임나일본부설의 핵심 논리를 1차 문헌사료와 고고학 자료 등을 통해 살피는 것은 한국사의 원형을 복원하는 중차대한 과제일 수밖에 없다. 본 연구는『삼국유사』, 『삼국사기』에 의거해 가야사의 실상에 접근하고 가야사 연구의 권위자로회자되는 김태식과 이영식의 핵심논리들을 분석함으로써 임나일본부설의근간을 해체해 가야사 연구의 새로운 전환점을 만드는 데 그 목적이 있다.

      • KCI등재

        任那日本府 연구의 허상과 실상

        정효운 동아시아문물연구소 2024 文物硏究 Vol.- No.45

        한국과 일본의 고대관계사의 주요 논쟁은 ‘임나일본부’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 주제는 오랫동안 양국 고대사의 역사인식 문제와도 연관하여 연구되어왔다. 『일본서기』 흠명기의 임나일본부 사료를 토대로 만들어진 ‘임나일본부설’은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정치적으로 지배해 왔다는 왜곡된 주장을 제기하는 근거로 해석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錯綜의 원인은 관련 사료를 이해하고 해석함에 있어 사료 비판은 소홀히 한 채 사실 고증에만 천착하였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 결과 선행연구에서는 임나일본부 문제를 시공간을 확대 적용하여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오류와 착오를 바로잡기 위해, 6세기 중반의 한일해역세계의 정세 분석과 흠명기 사료의 철저한 비판 분석을 통해 임나일본부의 실상과 임나일본부설의 허상을 파악하고자 한다. 아울러 흠명기 기년 조정의 필요성과 임나와 가야의 동일 국가설 문제에 대한 고찰도 행했다. 본 고찰에서 규명된 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종래 일본학계의 고대한일관계 연구의 중심이 된 임나일본부설은 허상으로, 이는 『일본서기』의 임나와 임나일본부 관련 기사의 기년 착오와 왜곡 및 후대의 조작 그리고 20세기 식민사관 연구자들의 관련 사료에 대한 무비판적 해석과 오독으로 인한 것이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동시에 『일본서기』 흠명기 기록의 재해석을 통한 임나일본부의 실상은 6세기대의 ‘任那倭宰’였다는 사실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임나에 소속된 외교, 통역기관으로 532년 임나국주의 신라 투항에도 불구하고, 임나지역이 신라에 의해 점령당한 후에는 투항을 거부하며 11년간 임나가라의 여러 旱岐들과 함께 임나부흥을 위해 노력한 임나인들이었기에, 흠명기에 기록된 그들의 활동 기록은 왜에 부용된 왜인의 활동 기록이 아니라 임나인의 독립운동의 기록으로 재해석하고 이해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임나는 일본열도의 국가라는 일부 학자나 재야에서의 주장과는 달리 김해지역을 중심으로 한 오늘날의 금관가야 지역을 지칭하는 국명이라는 점과 아울러 임나는 고대 한일의 해상로를 장악하고 ‘임나왜재’라는 중간자적 존재를 활용하여 백제, 신라 그리고 왜국과의 교역과 통역을 담당한 해상국가였다는 사실을 밝힐 수 있었다. The main controversy in the history of ancient relations between Korea and Japan can be said to be the issue of Mimana-Nihonhu. This topic has long been studied in connection with the issue of historical perception of the ancient history of the two countries. The Theory of Mimana-Nihonhu, composed of Nihon Shoki historical sources, was also the basis for the false claim that ancient Japan politically controlled the southern part of the Korean Peninsula. The reason for this error is that in the interpretation of relevant historical sources, the criticism of historical sources has been neglected and only interested in the verification of facts. As a result, it can be seen that previous studies made the mistake of interpreting the Mimana-Nihonhu issue by expanding the scope of time and space. In order to correct these errors,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understand the reality of Mimana-Nihonhu and the illusion of Theory of Mimana-Nihonhu through the analysis and criticism of the situation in the Korean-Japanese maritime world in the mid-6th century and Kinmeiki. In addition, consideration was also conducted on the necessity of the Kinmeiki year adjustment and the issue of the same state theory between Imna and Gaya. The results of this study are summarized as follows. The Theory of Mimana-Nihonhu, which has been the center of research on ancient Korea-Japan relations in Japanese academia, is an illusion. This was due to errors, distortions, and manipulation of Nihon Shoki’s articles related to Imna and Mimana-Nihonhu, and uncritical interpretation and misreading of related materials by researchers of 20th century colonial history. At the same time, through reinterpretation of Nihon Shoki’s Kinmeiki record, I was able to know that the reality of Mimana-Nihonhu was ’Mimano-Yamato-Nomiko-Mochi(任那倭宰)’ in the 6th century. Mimana-Nihonhu was a diplomatic and interpreting agency belonging to Imna, not Yamato (倭). They were Imna people who, despite the king’s surrender to Silla in 532, refused to surrender and worked for the revival of Imna along with several Hanki (旱岐) of Imna. Therefore, Kinmeiki’s Mimana-Nihonhu record should be reinterpreted as a record of Imna’s people independence movement, not a record of Japanese activities used in Yamato(倭). And contrary to the arguments of some scholars, I think Imna is not a country of the Japanese archipelago, but a country name that refers to today’s Geumgwan Gaya centered on the Gimhae region. Eventually, they dominated the ancient sea routes of Korea and Japan and were in charge of trade and diplomacy with Baekje, Silla, and Japanese countries as ’Mimano-Yamato- Nomiko-Mochi(任那倭宰).

      • KCI등재

        언론사 기자들의 식민사관 추종과 전파 양상 -한국일보 조태성 기자를 중심으로-

        오종홍 바른역사학술원 2023 역사와융합 Vol.- No.14

        본 연구는 언론사 기자들이 기사라는 이름을 빌려 어떻게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을 추종, 전파하는지 밝히는 것이 목적이다. 일제는 우리나라를 침략하여 일본제국의 지방으로 만든 뒤에 식민통치를 원활하게 하려고 식민사관을 만들었다. 한국일보 조태성 기자는 주로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을 추종하는 학자들의 발언을 보도하는 형식으로 식민사관을 추종, 전파하였다. 조태성 기자의 보도 양상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식민사학자들의 도종환 장관 후보자에 대한 불만을 보도함으로써 도종환 후보자의 임나일본부설 청산 의지를 꺾었다. 둘째, 임나일본부설을 인정한 김현구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보도함으로써 이를 비판한 이덕일을 깎아내렸다. 셋째, 민족사학을 유사역사학으로 낙인 찍은 이문영의 책을 기사형식으로 홍보해 줌으로써 식민사관을 전파하였다. 조태성의 이 같은 보도 속에는 다음과 같은 식민사관이 녹아 있다. 첫째,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 평양설이다. 여기에는 우리나라 역사는 식민지로 시작되었다는 의도가 깔려있고, 외래의 선진문물이 들어와 역사가 발전하였다는 식민사관이 들어 있다. 둘째, 임나일본부설이다. 이는 고대에 일본의 야마토 왜가 우리나라 남주지방을 식민통치하였다는 식민사관이다. 평양의 낙랑군이 사라졌어도 남부지방에서 계속하여 식민통치를 받았다는 것으로 우리 민족은 외세의 식민통치를 받아야 역사가 발전할 수 있다는 논리가 숨어 있다. 결국, 조태성 기자는 일제 식민 사관의 핵심인 정체성론과 타율성론을 기사라는 이름으로 전파하였다.

      • KCI등재

        식민사관에 의한 가야사연구와 그 극복

        남재우(Nam Jae-Woo) 한국고대사학회 2011 韓國古代史硏究 Vol.0 No.61

        가야사연구는 征韓論, 청ㆍ일전쟁, 강제병합의 과정 속에서 이루어졌다. 타율성이라는 식민사관을 바탕으로 ‘임나일본부설’이 만들어졌고, 임나일본부설을 증명하기 위하여 가야사가 연구되었다. 이러한 가야사연구는 한ㆍ일 양국 모두에게 바람직하지 못했다. 1980년대 이전까지의 가야사연구는 임나일본부에 대한 긍정과 부정을 위한 근거제시에 불과했다. 따라서 한국과 일본, 그리고 한일관계에 대한 객관적인 역사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것이 가야사의 불행이었다. 가야사연구는 더 이상 과거 일본의 제국주의사학자들이 내세웠던 ‘일선동조론’이나 북한사학자가 주장하는 ‘분국론’같이 민족적 자존심을 만족시키는 내셔널리즘이 되어서는 곤란하며 현대적 국가의식의 과잉으로 투영된 고대 한일관계사의 복원도 경계되어야 한다. 호혜평등의 미래 지향적인 한일관계를 이룩하기 위해서 구시대의 식민사관은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며, 일본은 한국에 대한 객관적 연구를 토대로 한 새로운 韓國史像을 수립해야 할 것이며, 이것은 한국 연구자도 마찬가지이다. Gaya history has been studied under Theory of Conquer Korea, The Sino-Japanese War and forced merge. Theory of Imnailbonbu is formulated on the basis of colonial view of history, that is heteronomy. Gaya History was studied to improve Theory of Imnailbonbu. Such a study is not desirable for Korea and Japan. Gaya history Studies before 1980s was only the rationale for the affirmation and denial of Imnailbonbu. Therefore, historical study on the relation of Korea and Japan was not objectively conducted. This is misfortune of Gaya history. It is not appropriate that Gaya history becomes nationalism that is satisfactory of ethnic pride such as 'Theory of BunGuk' which North Korea historian insists on and as 'Theory of integration of Chosun and Japan’ which Japanese Imperialism historian. Restoration of ancient Korea-Japan relation reflected as national overconsciousness is also rejected. Colonial view of history should be overcome too make future oriented relations of reciprocalness between Korea and Japan. Japanese researchers have to set up new and positive concept of Korea and Korea ones as well.

      • KCI등재

        19세기 말~20세기 초 독일인들의 압축적 통사서술에 나타난 한국사 인식 - 곳체, 크노헨하우어, 옴, 로트를 중심으로 -

        박보영 ( Park Bo-young ) 대구사학회 2019 대구사학 Vol.134 No.-

        「하멜 표류기」(1668) 이후 서구사회에 한국이 소략하나마 역사서술의 대상으로 이런저런 문헌들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엽 개항을 전후한 시기부터였다. 1883년 조독수호통상조약 이후 한국은 약탈적 무역시장의 잠재적 대상으로서 단독 호명되기 시작했고, 한국에 대한 정보는 탐사보고문 형식으로 간헐적으로 생산되었다. 그런가 하면 상대적으로 한국 체류기간이 길고 집단지성의 상호작용을 거친 선교사들의 보고문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40여년 동안 꾸준히 축적되었다. 한국에 대한 정보를 담아내는 이러한 문헌들에는 간략하고 압축된 한국사 서술이 곁들여지고는 했는데 이러한 압축적 한국 통사 서술은 주로 한일관계사의 쟁점에 관련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조독수호통상 직후에 쓰여진 곳체(1886)는 종래 영미권 주도 한국사 담론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보이며, 임나일본부설은 생략하고 임진왜란 후 일방적인 조공관계가 아닌 상호 대등한 관계로 설정하여 종래 정보의 오류를 지적했다. 크노헨하우어(1901)는 한국이 과거 고대문명의 우세에 비해 현재적 격차를 보이는 역사적 배경에 의문을 표하며, 임진왜란 후 잔혹한 조공관계가 현재의 상업적 식민지로 연결되는 것으로 인식했다. 일제강점기 3.1운동 후 2차 교육령 시기인 옴(1930)은 한국의 기원을 전설상의 단군조선으로 소급하고, 임나일본부설은 시기적 불일치를 들어 오류로 지적하였고 임진왜란에서 쇄국정치의 연원을 찾았다. 로트(1936)는 한국 기원을 단군조선으로 표명하고, 위만조선을 배제했으며, 신라와 불교 중심의 문화사적 서술을 보이는 한편 한일관계사는 행간에 함축하였다. 이들이 두꺼운 연구서가 아닌 간편한 읽을거리로 제공되고, 특화된 주제의 한 부분으로 간략하게 삽입된 한국사 서술이었던 만큼 당대 서양인들에게 가장 빈번히 노출되고, 손쉽게 소비되었던 한국사의 면모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After Hamel’s Journal and a Description of the Kingdom of Korea (1668), it was only from the opening of ports in mid-nineteenth century onwards that Korea began to appear in various documents as a subject of Western historical accounts. Following the signing of the German-Korea Treaty of 1883, Korea was constantly mentioned as a potential target of a fierce trade market. Information on Korea was sporadically provided in exploration reports. On the other hand, missionaries consistently produced reports throughout the forty years or so of the Japanese colonization as they stayed in Korea for relatively long and interacted with local intellectuals. These reports on Korea were accompanied by brief and condensed overviews of the history of Korea, which, however, mainly focused on issues related to Korea-Japan relations. In the wake of the German-Korea Treaty, Gottsche (1886) expressed criticisms towards a Korean history discourse driven by Anglo-Americanism. He cast light on historiographical errors by dismissing the Japanese colony of Mimana and arguing for reciprocal and equal relations between Japan and Korean after the Imjin Wars, rather than a unilateral, tributary relationship as claimed hitherto. Knochenhauer (1901) questioned the historical context wherein Korea fell behind the supremacy of ancient civilizations and recognized that the so-called tributary relationship following the Japanese Invasions was to be understood within the framework of mercantile colonialism. After March 1st Movement and the Second Education Decree, Ohm(1930) traced back the origins of Korea to the legendary Dangun Joseon Dynasty, pointed out Mimana as a historiographical error, and found the source of Korea’s seclusion policy in the Imjin Wars. Roth(1936) argued for Dangun Joseon as the origin of Korea, excluded Wiman Joseon, and provided culturo-historical descriptions centered on Silla and Buddhism, leaving the history of Korea-Japan relationship to be read between the lines. These Korean historical narratives were inserted as a specialized subject section and were consequently rather well exposed to the Westerners of the time. As brief, reader-friendly accounts rather than exhaustive history books, they contained all the aspects of the Korean history that could be easily consumed, so to speak.

      • 好太王碑文에 새겨진 地名에 대한 연구

        성헌식 간도학회 2020 간도학보 Vol.3 No.1

        ‘The epitaph of great king Ho’(호태왕비) is ahead historical records as much as 730 years over than ‘The Histories of Three Country’(삼국사기) compiled Ki-Busik in Koryo dynasty. While the original of it was gone due to be written on paper, but most of the original texts inscripted his epitaph on stone are preserved up to now. In additional, The epitaph which was personally written by ‘The Ancient Corean(高句麗)’people’s has a independent history perspective at that time should be very important historical reference. While there is not any records for the interpretation of ‘The epitaph of great king Ho’in ‘The Histories of Three Country’,‘The History of Ancient Corea’(高句麗史抄略) which was sleeping in the royal library of Japan come out of the world by Park-Changwha’s transcript. So that’s why there has almost contents of the epitaph are described, contributing greatly to the restoration of the original text of it. The epitaph contains the process of ‘Grand Unification for YoungRak’(永樂大統一) which should be the greatest achievement in our People’s history. He should be The Greatest Conquest of King of who had expanded the territory of ‘The Ancient Corea’(高句麗) by the conquests as like 5th year of Peili(碑麗), 6th year of Baikjan(百殘=百濟), 8th year of Baikshin(帛愼=肅愼), of 9~10th year of Wai(倭) and 14th of Waigu(倭寇), 17th year of Later-Yan(後燕), 20th year of East-Buyeo(東扶餘). We can find out where was the main activity stage of ‘The Ancient Corea’(高句麗) by identifying the location’s name on the inscription. Currently, the viewing of Korean history scholars are said that ‘The Ancient Corea’ are located in the northern part of the Korean Peninsula and Manchuria. Baekje and Silla were located in the southern part of the Korean Peninsula. But most of place names on ‘the epitaph of great king Ho’ are located in the southern of Sanseo Province in China and northern of Hanam Provinces, where were the main activity stages of “Ancient Corea. Which means the theory of ‘Four Commanderies of Han dynasty’(漢四郡) which was located in northern Korean peninsula has distorted by China, and also means the theory of ‘ImNa Japanese Authorities’(任那日本府) which was in Southern Korean Peninsula was fabricated history by Japan. We hope that should be a good chance to be restored the history of the great ‘Ancient Corea’by finding in position of place names of‘The epitaph of great king Ho’. In addition, I feel a boundless pleasure for revealing the secret of the place name on ‘The epitaph of great king Ho’by the historical reference of China that has been reducing and distorting Korean history. 호태왕 비문은 고려 때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보다 730여 년이나 앞서는 역사기록이다. 종이로 된『삼국사기』는 그 원본이 없어진 반면에 돌에 새겨진 비석의 원문은 지금까지 남아있다. 또한 비문은 주체적인 역사관을 가졌던 당시 고구리 사람들이 직접 돌에 새긴 소중한 역사자료이다. 『삼국사기』에는 비문 해석에 필요한 기록이 없는 반면에, 일본왕실서고에서 잠자다 남당 박창화 선생에 의해 세상 밖으로 나온 『고구리사초략』에는 비문의 내용이 거의 대부분 기록되어 있어 비문의 원문 회복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비문에는 호태왕이 위대한 업적인 영락대통일(永樂大統一)을 이루어가는 과정이 새겨져있다. 호태왕은 5년의 비여, 6년의 백잔, 8년의 백신(숙신), 9~10년의 왜와 14년의 왜구, 17년 후연, 20년 동부여 정벌 등을 통해 사해(四海)를 모두 복속시켰고 고구리의 영토를 크게 넓힌 위대한 정복군주였다. 따라서 비문에 새겨진 지명들의 위치를 밝혀내면 위대한 고구리의 주 활동무대가 어디였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현재 한국의 강단사학계는 반도사관을 고수하며 고구려가 한반도북부와 만주, 백제와 신라는 한반도남부에 위치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비문에 새겨진 지명들의 위치는 산서성 남부와 북부 하남성으로 바로 고구리의 주 활동무대였던 것이다. 이는 한반도북부 한사군설은 중국에 의해 왜곡되었고, 한반도남부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에 의해 날조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호태왕비문의 지명들의 제 위치를 찾음으로써 위대한 고구리의 역사가 회복되기를 희망하며, 또한 그간 우리역사를 축소•왜곡해왔던 중국의 역사자료를 이용해 비문에 새겨진 지명의 비밀이 풀린 것에 대해 무한한 기쁨을 느끼는 바이다. 호태왕 비문은 고려 때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보다 730여 년이나 앞서는 역사기록이다. 종이로 된『삼국사기』는 그 원본이 없어진 반면에 돌에 새겨진 비석의 원문은 지금까지 남아있다. 또한 비문은 주체적인 역사관을 가졌던 당시 고구리 사람들이 직접 돌에 새긴 소중한 역사자료이다. 『삼국사기』에는 비문 해석에 필요한 기록이 없는 반면에, 일본왕실서고에서 잠자다 남당 박창화 선생에 의해 세상 밖으로 나온 『고구리사초략』에는 비문의 내용이 거의 대부분 기록되어 있어 비문의 원문 회복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비문에는 호태왕이 위대한 업적인 영락대통일(永樂大統一)을 이루어가는 과정이 새겨져있다. 호태왕은 5년의 비여, 6년의 백잔, 8년의 백신(숙신), 9~10년의 왜와 14년의 왜구, 17년 후연, 20년 동부여 정벌 등을 통해 사해(四海)를 모두 복속시켰고 고구리의 영토를 크게 넓힌 위대한 정복군주였다. 따라서 비문에 새겨진 지명들의 위치를 밝혀내면 위대한 고구리의 주 활동무대가 어디였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현재 한국의 강단사학계는 반도사관을 고수하며 고구려가 한반도북부와 만주, 백제와 신라는 한반도남부에 위치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비문에 새겨진 지명들의 위치는 산서성 남부와 북부 하남성으로 바로 고구리의 주 활동무대였던 것이다. 이는 한반도북부 한사군설은 중국에 의해 왜곡되었고, 한반도남부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에 의해 날조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호태왕비문의 지명들의 제 위치를 찾음으로써 위대한 고구리의 역사가 회복되기를 희망하며, 또한 그간 우리역사를 축소•왜곡해왔던 중국의 역사자료를 이용해 비문에 새겨진 지명의 비밀이 풀린 것에 대해 무한한 기쁨을 느끼는 바이다.

      • 4世紀의 韓日關係史 : 廣開土王陵碑文의 倭軍問題를 中心으로

        金泰植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2005 한일역사 공동연구보고서 Vol.1 No.-

        4세기의 한일관계사에 대해서는 任那日本府說에 입각하여 4세기부터 한반도 남부는 일본열도의 왜국으로부터 직접 또는 간접 지배를 받고 있었다는 가설이 있었고, 이는 ≪日本書紀≫와 廣開土王陵碑文에 대한 피상적 이해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러나 왜의 임나 정벌을 기록하고 있는 ≪일본서기≫ 神功皇后 관련 기사에 대하여, 근래의 학자들은 그 기사 및 사실을 모두 부정하거나, 또는 그 주어를 백제로 바꾸어 이해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이 자료를 이용해서 369년에 왜 또는 백제가 군사 정벌을 단행하여 가야지역을 정복했다고 볼 수는 없다. 廣開土王陵碑文에는 한반도 남부 및 중부 지방에서 왜군이 활동한 흔적이 기록되어 있으나, 다른 나라들에 비하여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온 것에 비하여 그 활동이 과장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성격의 존재들이었을까? 4세기 후반의 동아시아 정세에서 東晉과 前秦의 갈등도 있었으나, 한반도 관련 국제 정세의 기본은 고구려와 백제 양대 강국의 대결 구도였다. 그들은 4세기 후반에 帶方古地를 사이에 놓고 30여 년간 격렬한 전쟁을 치렀다. 그에 비하면 한반도 남부의 신라와 가야는 그에 부수적으로 연동되어 움직이는 측면이 강하였다. 한편 가야와 왜는 2~3세기 이래 4세기까지 상호간에 긴밀한 교역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 관계는 4세기 후반에 양 지역의 정세 변동, 즉 金海의 加耶國을 중심으로 한 가야연맹의 재통합과 일본열도 畿內의 河內地域을 중심으로 한 신흥세력의 출현으로 인하여 더욱 강화되었다. 양자의 교류관계는 전통적인 鐵素材와 威勢品 교역에 더하여, 가야의 군수물자 수출 및 왜의 군사력 동원 문제가 중요시되었다. 4세기 후반에 백제는 고구려와의 대결을 치르는 과정에서 신라를 견제하기 위하여 가야를 지원하고, 가야를 매개로 하여 왜와 연결되었다. 그런 중에 백제가 열세에 밀리자, 그들은 가야와 왜 사이의 전통적인 인적·물적 자원교역의 관행을 이용하여 왜군을 끌어들였다. 그 결과 왜는 兩者間의 필요에 의하여 교류하던 가야를 위해 고구려와 백제 사이의 전쟁에 동원되어 인명 손실의 큰 대가를 치르고 문화적 이득을 취한 것이다. 또한 그런 와중에 전쟁의 발생지였던 가야에서는 많은 유망민이 발생하여 그 중 일부는 일본열도에 건너가 馬具類와 金屬加功術, 陶質土器 및 그 제작기법을 전하기도 하였다. 이를 韓日間의 단순한 교역, 또는 日本에서의 주체적 문물 수용, 심지어 任那經營의 결과라고 보기도 하나, 이는 사태의 본질에 다가 선 견해라고 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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