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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말청초 휘주(徽州)상인의 서화수장(書畵收藏)과 문화적 후원

        배현진 한국동양예술학회 2014 동양예술 Vol.26 No.-

        徽州는 오늘날 안휘 남부와 장강 남쪽 해안 지역으로 명대 말기부터 휘주 상인들은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였다. 특히 서화 교역과 수장에도 참여하여 수장가들과 지속적으로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중개 상인으로 작품을 판매해 이익을 남겼다. 휘주 상인의 서화 수장은 이들이 문화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하나의 방식이 되었다. 이를 통해 이들은 재력과 학식을 드러내는 한편 서화가들의 작품을 구입하고 후원하는 통로가 되어 예술을 활성화하는데 공헌하였다. 이로 인해 명말 청초 휘주를 중심으로 새로운 화파가 등장하게 된다. 특히 명말 휘주 상인이었던 吳其貞의 『書畵記』에서는 청대 초기까지 浙江과 江蘇의 도시를 돌아다니며 본 서화 작품과 매매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그 역시 서화 수장가로 미술사에서 가치 있는 많은 명작을 수장하였으며 휘주 지역의 수장 풍조가 활성화되는 것에 기여하였다. 즉, 휘주 상인들은 휘주 지역의 수장 문화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휘주에서 활동하는 여러 화가들의 작품을 많이 수장하였는데 이는 서화가들을 후원하는 하나의 방식이 되었다. 따라서 명ㆍ청대 휘주 상인들의 활발한 경제 활동으로 획득한 재화는 휘주 지역 서화 예술 성장에도 영향을 미쳐 서화가들의 예술 창작에 좋은 조건으로 작용하여 독창적인 문화형태가 되었다. 徽州指是現在的安徽南部與長江南方海區, 從明代末期徽州商人從事商業, 尤其是參加書畵交易和收藏, 過與收藏家持續交流而保持良好的關系, 以中間商人的身分把作品出수而追求了利益。在文化上以徽州商人的書畵收藏作爲能介入的壹個方式. 通過此種方式, 壹方面表現出徽州商人自己的財力和學問, 靈壹方面把書畵家的作品購買而奉獻고活藝術. 由此, 明末淸初出現了以徽州爲中心的新畵派, 文化藝術活動的中心之壹。特別, 吳其貞是徽州籍著名藏家兼古董商人, 他記錄在自己寫的『書畵記』上,到淸初浙江,江蘇等地把自己的行商古玩的所見所想, 以及當時市場中的細節。他收藏了在美術史上有著價値的許多作品, 在徽州地區흔起了壹股收藏風潮的고活。徽州商人收藏了活動在徽州的許多畵家的作品, 用這種方式支持書畵家。因此, 明淸時代徽州商人以積極的經濟活動獲得了財貨, 這是影響到書畵藝術的發展, 而且對書畵家的藝術創作起作用好的條件, 成爲獨特的文化情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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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원판(項元?)의 서화 수장과 미술사적 의미

        배현진 한국동양예술학회 2016 동양예술 Vol.33 No.-

        명대 중기 이후부터 江南地區의 경제성장과 사회 문화적인 환경변화는 수장문화성장의 전제조건이 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강남 지역은 많은 서화 작품이 수집, 거래되는 중심지로 문인과 상인들이 대거 밀집하였다. 項元?(1525-1590)은 明末 유명한 수장가로 선대부터 전해 내려온 서화 수장활동을 계승하였으며, 풍부한 자금을 바탕으로 대량의 서화 작품을 구입하거나 명대화가 仇英(1494-1552) 등에게 직접 제작을 의뢰하며 수장품을 확대하였고 작품 제작을 후원하였다. 따라서 그는 고대의 많은 진품을 소장하였는데 그의 서화 수장품이 제일이었음은 현존하고 있는 서화 작품에 남겨진 그의 수장 인장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강남 지역의 여러 문인들과 교유하며 작품을 완상하였고 이는 명말 서화 수장의 확대와 서화 학습 및 연구를 현실화하였다. 본고에서는 명말 항원변의 수장 방식과 수장품을 파악함으로써 그의 활발한 수장 행위가 당시 화단에 가져온 결과를 구체적으로 확인하고자 한다. 또한 나아가 그의 수장 활동이 명대 말기 뿐 아니라 청대 초기의 화단에 미친 영향과 그 의미에 관해 고찰할 수 있다. 從明代中期以后, 基于江南地區的經濟成長和社會文化的環境變化, 成爲收藏文化的前提條件。當時江南地區收集了大量書畵作品, 以交易的中心聚集了文人和商人。項元?(1525-1590)是明末著名的收藏家,參與在先代繼承來的書畵收藏活動。他以豊富的資金能購買大量書畵作品, 或對明代畵家仇英(1494-1552)直接委託作品, 擴展收藏品的範圍和贊助作品創作。因此, 他能收藏?多古代眞品, 從質量上看當時他的書畵收藏品都?優秀。在現存的書畵作品上, 通過留下的收藏印也可以理解這樣的事實。他?江南地區的文人們交游和玩賞作品, 由此可看出明末書畵收藏的擴大, 而且將書畵學習及硏究成爲現實。在本論文上, 通過掌握明末項元?的收藏方式和收藏品情況, 而能進行淸楚了解他的活躍的收藏活動對當時畵壇帶來的結果。同時他的收藏品不但明末的畵壇而且淸初造成了影響, 和對其意義能進行考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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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지엄의 개방형수장고 해외사례 연구 -국립미술품수장보존센터에 대한 제언-

        도경민,정윤희 한국박물관학회 2017 博物館學報 Vol.- No.34

        This study researches the successful management cases of museum’s open storage in order to meet the new paradigm of the 21st century museums for Korean National Art Conservation Center which is opened in 2008. The open storage’s objective is to share the humanistic value based on the concept of ‘the owner of the collection is all of us.’ A new attempt of museums is to rediscover the reason and value of the museum which is faced various challenges in 21st. century. Open storage of museums is primarily aimed at the active learning of the visitors, and in order to do so, the digitalization and integrated management system of the collection information is provided as an essential condition. Kroean National Art Conservation Center is now planning the two functions of ‘preservation and restoration of art works’ and ‘open storage’, and this is very similar of current open storage cases of other developed museums in overseas. This study analyzes the cases and features of successful museum open storage and suggests appropriate suggestions and applications for Korean National Art Conservation by looking at the operation plan of Korean National Art Conservation. 본 연구는 2018년 개관을 앞둔 국립미술품수장보존센터의 오픈에 앞서 21세기 뮤지엄의 새로운 패러다임에 맞는 개방형 수장고를 해외 사례분석을 통해 고찰해보았다. 개방형 수장고는 ‘컬렉션의 진정한 주인은 대중’이라는 개념 하에 인류가 일궈온 인문학적 가치를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러한 뮤지엄의 새로운 시도는 21세기 뮤지엄이 직면한 다양한 도전 속에 뮤지엄의 존재 이유와 가치를 재발견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개방형 수장고는 무엇보다 관람객의 주도적인 학습을 적극적으로 유도하는 것을 주된 목표로, 이를 위해 컬렉션 정보의 디지털화 및 통합관리 시스템을 필수 조건으로 두고 있다. 국립미술품수장보존센터의 경우 소장품을 수장하면서도 특수한 목적을 동시에 지닌 해외 오프 스토리지(off-storage)의 사례와 유사한 형태를 띄는데, 이에 ‘보존․복원’이라는 특수 기능과 소장품의 개방형 수장고를 동시에 겸하는 형태로 건립 계획 중이다. 본 연구는 해외 성공적으로 운영 중인 개방형 수장고의 사례 및 특성을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국립미술품수장보존센터의 운영계획을 살펴봄으로써 본 센터에 적합한 제언들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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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14세기 元 皇室 書畵收藏의 전개와 大汗의 역할

        황정연 덕성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22 인문과학연구 Vol.- No.34

        This paper examines that the origin, formation process, and activities of major figures in the Mongolian imperial family functioned as a governing means to converge a multinational society. Although the Yuan Imperial Family's art collection originated from the Mongol Empire established by Genghis Khan 元 太祖, ch. 忽必然, in the distance, it was formed and developed with a direct origin from Kublai Khan 元 世祖, who founded the Yuan Empire. It can be said that the head system of the Yuan imperial family was systematically implemented from the beginning of its foundation, and a calligraphy research organization, 秘書監 biseo-gam, Official Branch of the Yuan Court Documents, was established to investigate the collections of the former dynasties, and clearly recognized as the head of the imperial family. In addition, this series of activities by Kublai Khan, who invited calligraphers and scholars from Han Chinese 漢族 with artistic perspectives to read and write books, became the cornerstone of leading beauty in the 13th~14th centuries when his close descendant - Princess Sangge Ragi 魯國大長公主 祥哥剌吉 and Emperor Wenjong 文宗皇帝 - served as leading sponsors for the artists both of Chinese and Mongolian. This is not a passive fairy tale about Chinese clan 韓族 but a legacy left by Kublai Khan, who tried to achieve national unification while maintaining his identity as a Mongolian. Despite the chaos of the dynastic replacement period, the system of the Yuan Dynasty court collection systematically organized works scattered by successive wars and invaders, which has the art historical significance of in that it developed art criticism and authenticity at the time. Furthermore, considering the diplomatic relationship between the Yuan and Goryeo, the court collection system of the Imperial Yuan occupies an important place because it caused the royal collecting of Koryeo Dynasty developed systematically. This topic will be dealt with as the future study. 본 논문은 元 13-14세기를 중심으로, 大汗 쿠빌라이 칸(元 世祖)을 비롯한 황실 주요 인사들이다민족 사회를 융합하려는 방편으로써 書畵收藏이라는 행위에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살펴본 것이다. 원 황실 서화수장은 大元帝國을 건설한 元 世祖로부터 직접적인 기원을 두고 형성・발전하였다. 원 황실의 수장제도는 건국 초창기부터 나름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서화전문 연구기구인 秘書監을 두어 前 왕조의 수집품을 조사하였고, 收藏印을 찍어 황실 소장임을명확하게 표시하였다. 또한 예술적 안목이 있는 한족 출신 서화가, 학자들을 宮으로 불러 수장품을열람하고 서발문을 쓰게 한 세조 연간의 이러한 수장활동은 그의 직계 후손들인 魯國大長公主 祥 哥剌吉과 그녀의 친인척인 仁宗, 文宗 등이 수장가이자 후원자로 활동하면서 원대 宮廷美術을 이끈 초석이 되었다고 보는데, 특히 황실 수장품에 신하가 발문을 쓴 행위는 군-신간의 관계를 밀접하게 하고 심리적으로 복속시키는 상징적인 통치효과를 가져왔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원 황실이 몽골인사들이 중국문화에 수동적으로 동화된 것이 아닌, 몽골인으로서 정체성을 지키며 민족융합을 이루고자 했던 世祖가 남긴 유산을 실천한 의미이기도 하다. 중국 서화수장사의 전체적인 흐름에서 보았을 때 원대 서화수장은 민간에서 보다 황실이 주도적으로 분위기를 이끌었다는 점이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물론 이 시대가 陰・陽地에서 활동한私人 수장가들이 점점 부상한 전환기이기는 하나, 왕조 교체기에 황실이 주도적으로 前代 황실의 흩어진 수장품을 모으고 관료들로 하여금 감평을 하도록 한 행위는 국가경영의 정통성을 표방하고중국인들을 지배하에 두려는 간접적인 통치술로 평가되는 한편, 결과적으로 황실이 당대 서화비평을 진작시킨 예술 後援者로서 귀결되었다는 사실은 미술사에 있어 대원제국의 위상을 재평가해야하는 이유를 말해준다. 원 황실은 왕조 교체기라는 혼란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련의 전쟁과 왕조의 명말 등으로 흩어진 작품들을 다시 수집해 체계적으로 정리한 한편, 秘書監, 奎章閣 등 전문적인 관리처를 마련해국가적 차원에서 수장제도를 정립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곧 역대 서화에 대한 비평과감식을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미술사적 의의가 있다고 평가되며, 그 이면에는 맹목적인 漢化를 지향하지 않고 개방적・실리적인 입장을 견지한 元 世祖의 역할이 컸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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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말 도시문화 변화와 서화수장 취미 전개 양상

        배현진 한국동양예술학회 2015 동양예술 Vol.28 No.-

        명말 강남지역 서화 수장은 단순한 감상이나 취미의 영역을 넘어 수장품의 양과 질이 개인의 사회ㆍ경제적 지위와 품격 및 수양 정도를 상징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특히 수려한 환경과 경제적 발전을 배경으로 한 강남지역은 문화적 소양을 높이고 동시에 인재를 배양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였다. 또한 명말 문인사대부와 부유한 상인, 예술가 등이 대거 모이는 지역으로 산수를 유람하거나 서화를 감상하는 문화가 성행하였다. 명대 강남지역 경제의 지속적인 발전은 새로운 형태의 소비문화와 생활방식, 사치풍조 형성을 자극하였다. 부유한 문인이나 상인들의 ‘여가’를 즐기고자 하는 욕구를 만족시키고 개인의 문화적 수준이나 품위를 드러낼 수 있는 활동을 찾아 문인들은 장서 활동과 개인 원림 조성을 구체화하였다. 이는 강남지역을 중심으로 서화 수장가들이 광범위하게 존재할 수 있는 문화적 원동력을 형성하여 소주를 비롯한 그 주변 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쳤고, 강남지역은 명·청대에 이르기까지 전국에서 서화수장풍조를 주도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명대 중기 이후 강남지역의 유명한 수장가인 韓世能(1528-1598)ㆍ韓逢禧 부자와 張丑(1577-1643), 王世貞(1526-1590)ㆍ王世懋(1536-1588) 형제, 項元판(1525-1590), 李日華(1565-1635), 詹景鳳(1528-1602), 吳廷, 吳其貞, 董其昌(1555-1636) 등의 서화 수장 상황에 관해 그 수장품 내용 및 규모와 경향을 집중 분석하고자 한다. 당시 서화 감상과 창작 및 수장의 주체는 대부분 문인사대부들이었으며 이들은 서화에 풍부한 문학적 함의를 부여하며 寫意적 화풍을 구사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문인적 아취와 이상을 중시하였으며 다른 계층의 수장가들도 이들의 문화를 모방하고자 하면서 명말 강남지역의 화단에서 문인화 전통이 흥성하게 하였는데 이는 청대에 까지 이어졌다. 明末在江南地區的書畵收藏, 超過鑑賞或趣味的部分, 甚至收藏品的質量, 就是被人視爲象征著私人社會經濟地位和品格以及修養程度. 特別是江南地區以秀美的自然環境與經濟的發展爲背景, 而提供了對提高文化素質和培養人才的基礎.明代江南地區的經濟不斷的發展, 引導了新形態的消費文化和生活方式以及奢侈風潮的形成. 有錢的文人, 或者商人要享受他們的‘空閑’生活, 爲了滿足欲望, 他們都要顯示出自己的文化水平和趣味活動, 所以文人要具體化藏書活動和私人員林的造成. 而且在明末的江南地區中, 巨大的雲集了文人士大夫和商人及書畵家等, 是遊覽山水或玩賞書畵之風非常盛行.此是以在江南地區爲中心, 許多書畵收藏家能廣泛的存在, 也是成爲了文化的基本動力. 因此, 包括蘇州及影響到其周邊地區, 江南地區以至明ㆍ淸代在全國上成爲了主導書畵收藏風潮的中心.明代中期以後, 在江南地區上有著名的收藏家, 就是韓世能(1528-1598)ㆍ韓逢喜父子, 張醜(1577-1643), 王世貞(1526-1590)ㆍ王世懋(1536-1588)兄弟, 項元판(1525-1590), 李日華(1565-1635), 詹景鳳(1528-1602), 吳廷, 吳其貞, 董其昌(1555-1636)等, 把這些人的書畵收藏情況和其收藏品內容以及規模, 傾向都要深刻分析.當時書畵賞鑒與創作, 收藏的主體大槪是文人士大夫, 他們在書畵創作上, 賦予了豊富的文學含義, 還想要運用寫意的畵風. 這些人以文人的雅趣和理想爲重要, 也其他不同階層的收藏家對於文人的文化風格要模紡, 在明末江南地區的書畵界上, 成爲興盛文人畵的傳統, 關於這些收藏的趣味壹直延續到淸代.

      • KCI등재

        조선시대 수장(收藏)과 수장가(收藏家): 미술사적 의미와 전개양상을 중심으로

        황정연 한국미술이론학회 2022 미술이론과 현장 Vol.- No.33

        This paper is intended as a comprehensive summary of the modus operandi of the Joseon dynasty period collectors and the art historic implications of their collections. This is a subject that has not been much discussed by art history scholars. An ideal collector, as envisioned by the contemporaries of the period, was an expert appraiser and preservationist who could judge and protect the value of work rather than a person who would show off his wealth or personal connections through the collection. Collectors of that period used to establish repositories, referred to as Jangseoru, to preserve their collections, make catalogues to document the provenance and ownership of the collection, and maintain journals to keep track of movements of collection items. Extant collection catalogues and journals, which might appear artifacts of personal hobbies, carry a substantial significance in art history as they represent a distinct intellectual heritage from the Joseon dynasty. 이 논문은 조선시대 수장과 수장가에 대해 그동안 단편적으로 논의되었던 수장가의 개념과수집행위로부터 파생된 여러 양상을 종합적으로 정리하고 그 의미를 탐색하는데 중점을 둔 것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생각한 진정한 수장가란, 수집을 이용해 재력이나 인맥을 과시하는 사람이 아닌 작품의 가치를 분별할 줄 아는 진정한 감식가이자 작품의 훼손을 방지하는 보존가로 해석된다. 당시 수장가들은 작품의 보전을 위해 별도의 보관처인 장서루나 수장처를 마련하였고, 수장인을 찍거나 수장목록을 작성해 수장품의 소유를 증명하고 출납과 현황을 파악하였다. 이러한 현존 수장목록은 개인의 취미를 보여주는 사례를 넘어서 한 시대의 지성사와 예술사의 흐름을 보여주는 또 다른 자료라는 점에서 미술사적 의의가 있다.

      • KCI등재

        명말(明末) 소주(蘇州)지역의 개인 서화(書畵) 수장(收藏)이 화단(畵壇)에 미친 영향

        배현진 한국동양예술학회 2011 동양예술 Vol.16 No.-

        중국의 서화 수장활동은 황실과 고위관료, 문인사대부들의 문예취향에서 시작되었다. 명말의 개인 서화수장은 사회,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기에 황실내부의 수장품들이 대량 유실되는 과정에서 개인 서화 수장가들이 수장품을 확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되었다. 특히 蘇州 지역은 전국에서 서화 수장이 가장 흥성한 지역으로 文徵明,韓世能, 王世貞, 王世懋 형제, 張丑 등과 같은 유명한 수장가들이 배출되었다. 이들의 작품 수장은 집안 대대로 계승되었으며 서화 수장계층은 문인들의 전유물이 아닌 일반 서민층에까지 확대되었다. 또한 명말 활동한 수장가들과 서화가들은 서로 밀접하게 교류하며 서화 창작과 수장의 원동력이 되었고 이들의 시각적 경험을 풍부하게 해주었다. 결국 수장가들의 서화 수집과 완상 욕구가 명대 상품경제의 발전과 함께 실천됨으로써 동시대 화가들에게 다양한 작품을 제작할 수 있는 기회와 동기를 제공하였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진다. 中國的書畵收藏活動從皇室與高官貴戚及文人大士的文藝去向開始. 明末私人書畵收藏進行在混亂的社會政治環境, 皇家收藏不興導致皇室內府的收藏品大量流失. 在這些過程中對私人書畵收藏家會提供機會能구增加自己的收藏品. 特別在蘇州地區興盛了書畵收藏風氣, 包含了文徵明,韓世能, 王世貞, 王世懋兄弟, 張醜的收藏家, 承繼了他們的收藏品家傳. 在明末時期動的收藏家與書畵家不僅多有來往, 關系密切, 可以接觸到古代名跡古代書畵, 而且收藏風氣的盛行促進了書畵創作與發展, 能구成爲書畵創作和收藏滋養. 明末蘇州地區自宋元以來已成爲中國經濟與文化之最發達的地區, 以蘇州藏家們的創作有著不可分割的關系, 旣是提高書畵創作能力的手段同時, 在繪畵史和收藏史上的意義更深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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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朝鮮後期 書畵收藏論 硏究 : 서화수장에 대한 인식과 실제

        황정연(Hwang Jung-yon) 한국학중앙연구원 2010 장서각 Vol.0 No.24

        이 글은 17세기 이후 서화수장이 점차 확산된 현상에 주목하여 서화완상과 鑑評, 수집의 기저를 이룬 여러 談論에 대해 분석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본 논문에서는 書畵收藏論이라고 할 수 있는 논의 자체에 관한 분석과 서화수장 담론이 전개되면서 나타난 실제 모습에 대한 관계성을 파악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그 결과, 조선후기 서화수장론은 조선전기의 玩物喪志 규제에서 벗어나 후기로 갈수록 嗜好를 개인의 고유한 습성으로 인식하고 이상적인 수장가의 像을 탐구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울러 중국 총서류와 소품서, 다양한 明末淸初의 著述이 국내로 유입됨에 따라 작품의 감상법과 진위, 보관 문제로까지 담론이 확산되면서 서화수장의 가치를 인정한 사회적 토대 및 이론적 근거가 마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화저록의 탐독과 서화작품의 유통, 골동서화를 향유하고 수집한 수장처의 확산, 전문 수장가의 존재는 이러한 의식의 구체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서화수장론은 서화예술에 대한 사회적 · 미학적인 인식을 반영한 것이며, 書畵史의 전개, 그리고 새로운 서화양식의 출현과 수용, 조선후기 예술 담론이 생성될 수 있었던 배경이 된 광범위한 인식의 틀이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The late Joseon period witnessed an extraordinary surge in collecting of art works. This paper briefly surveys Joseon art collectors' discourses on the collecting of calligraphic works, paintings, and old objects. As presented in this paper in details, the main idea of the discourses on art collecting on the late Joseon period, has evolved as the collecting is the individual's unique traits increasingly recognized as a symbol and a quest for the ideal state of the collectors. As Chinese comprehensive books and miscellaneous series of the Ming and Ch'ing Dynasties have been flowed to Joseon, the discourses of the appreciating, authenticating, and well-keeping art works became to be emerged as the issue among the art collectors. A quarter of the 17th century, the discussion related to the art collecting put forward a positive and was gradually spread. ‘Wanmul(玩物), appreciating things’ was accepted as the inner potential human quality which was strictly abandoned by the Confucian principles dominated in the Joseon society, newly understanding the humane nature. It is notable that this social milieu means that a love for art collection was developed as a single aesthetic theory in the history of Joseon art. As we have seen in the previous chapters, the building individual archives of art works, distributing works among the collectors, and reading miscellaneous books related to antiques are the specific phenomena that made professional collector like Yu Man-ju(兪晩柱, 1755~1788, sobriquet Heumyeong) were more active. As a descendent of Gigye Yu clan (gigye yu-ssi 杞溪兪氏), one of the illustrious families of the late Joseon period, Yu was a prolific writer who left behind the voluminous records under the intellectual and artistic ambience of the family. His diary written for 13 years, is the miscellanies that contain the vast information on various Confucian books, novels, paintings, calligraphic works, manuals of painting, and antiques exposed to his daily experiences. The presence of the professional collectors was the concrete aspects in the late Joseon period. Various discourses on art collecting could be generated on the foundation of such a positive social perception.

      • KCI등재

        영남지방 수장묘의 등장과 변화상

        이수홍(Lee Soohong) 영남고고학회 2020 嶺南考古學 Vol.- No.86

        영남지역 무덤자료를 검토하여 首長墓의 등장 및 변화상을 검토하였다. 불평등사회의 지배자라는 뜻을 함축한 ‘首 長’은 초기철기시대에 등장하였다. 삼국지위지동이전의 기사, 철기의 제작 및 보급, 공동체가 아닌 1인을 위한 무덤축조, 지역단위를 넘어선 정치적 교역활동의 시작을 수장 등장의 근거로 제시하였다. 청동기시대 후기가 되면 무덤이 군집하여 공동묘지화 되고 또, 거대한 묘역식지석묘가 축조된다. 계층화가 전기에비해 심화되지만 혈연과 지연으로 뭉쳐진 공동체 사회의 성격을 유지하였을 것이다. 거대 무덤 축조 역시 피장자 1인을 위한 것이 아닌 공동체의 무덤이라는 성격이 강하다. 지배자로서의 수장의 무덤이 아닌 ‘유력개인’의 무덤인 것이다. 유력개인의 무덤은 지역별로 차이가 있는데 경남지역은 거대한 묘역식지석묘이고, 대구지역은 장신의 마제석검이부장된 무덤이다. 초기철기시대 수장의 무덤은 재지민의 무문토기문화를 바탕에 둔 지석묘집단과 세형동검문화를 보유하고 남하한목관묘집단으로 대별된다. 지석묘집단의 수장묘는 김해 구산동유적, 창원 덕천리유적과 같이 거대한 묘역식지석묘 1 기만이 소형묘와 같이 분포하는데, 공동체의 무덤이라는 의미 보다는 1인을 위한 무덤이라는 성격이 강하다. 지석묘집단의 수장과 목관묘집단의 수장은 공존하였으나 목관묘를 축조하는 수장이 급격하게 확산된다. 영남지방에서는 기원전 3세기에 목관묘가 출현하고 2세기에 철기가 부장되기 시작한다. 기원전 1세기가 되면 목관묘가 군집화하고 漢式유물이 부장되기 시작하는데 이 때가 수장층이 형성되고 청동기시대가 완전히 종언하는 시점이다. 경남지역은 김해지역에 수장묘가 집중하고 대구·경북지역은 울산-경주-영천-경산-대구를 잇는 교통로에 수장묘가 등간격으로 분포한다. 수장의 정치적 대외교섭권이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Social stratification in the Bronze Age and the appearance and transition of chief tombs in the early Iron Age are reviewed based on the ancient tomb data in Yeongnam Province. Chief, which means a ruler of unequal societies, first appeared in the early Iron Age. Evidence to support the appearance is given as follows: the articles from <Dong-i Jeon in Three Kingdoms>, production and distribution of ironware, construction of tombs for not a community but an individual, and the beginning of trade between local regions. In the late Bronze Age, tomb clusters turned into a common cemetery, and huge dolmens with graveyards were built. With social stratification being intensified, communities would have been maintained by blood ties and regionalism. The construction of huge tombs was for a community, not for a single person. That is, it was the tomb of the leaders, not of a chief. The types of the leader tombs vary depending on the regions: huge dolmens with graveyards in South Gyeongsang Province, and tombs with long-sharpened daggers in Daegu. In the early Iron Age, chief tombs are categorized into a group of dolmens from the patternless earthenware culture and a group of wooden coffin tombs from the Koreanstyle bronze dagger culture. The former group of chief tombs can be seen in huge dolmen areas such as Gimhae Gusan-dong and Changwon Deokcheon-ri archeological sites, and it is more of an individual’s tomb rather than a community’s. The chiefdom of dolmens and the one of wooden coffin tombs coexisted only until the chiefdom of wooden coffin tombs took over the other. In Yeongnam Province, the wooden coffin tombs first appeared in the third century B.C., and the ironware began to be buried in the second century B.C. By the first century B.C., the wooden coffin tombs clustered and the Chinese Han relics began to be buried. This is when the chiefdom was formed and the Bronze Age came to an end. In South Gyeongsang Province, chief tombs are centered in Gimhae. In Daegu-North Gyeongsang Province, chief tombs are distributed by equal intervals on the road connecting Ulsan, Gyeongju, Yeongcheon, Gyeongsan, and Daegu; it is due to the consolidation of foreign negotiation command of a chief.

      • KCI등재후보

        국 · 공립 미술관의 수장고 환경조사 및 공동수장고에 관한연구

        조혜진 한국공간디자인학회 2011 한국공간디자인학회논문집 Vol.6 No.2

        미술관이 담당하는 기능 중 전시영역이 미술관 중심 업무로 진행되면서, 수집된 작품의 복원과 보존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일시적 수장에만 그치는 문제를 발생하고 있다. 따라서, 수집 작품이 문화유산으로써 유물적 가치를 지각하는 인식의 전환과, 복원과 보존을 위한 학과간 연구와 보다 과학적이고 안전한 환경개선을 추구해야 할 때이다.본 연구는 수집 작품을 후대에 안전하게 전해야하는 중간 향유자의 입장에서 수장 환경개선을 위한, 선행연구 및 보고서에서 미술관 최적의 수장환경의 기준을 파악하고, 설문조사 및 자료조사를 방법으로, 국내 국공립미술관의 수장고 현황 및 환경을 비교 분석하였다. 그 결과 연면적 대비 8.72%의 수장 공간은 개관 후 5년이 지나면서 80%이상의 수장율 포화도를 보인다. 증축과 리노베이션으로 수장품을 보존하는 것은 한계에 다다른 것이며, 빠른 기간내 독립된수장고로써의 건립을 추구하여야 한다. 결론적으로, 수집 보존량의 증가를 대비하고, 건축적, 설비환경적 최적의 복원 · 보존센터로써의 공동 수장고의 건립을 제안하고자 한다. The art museum focuses on exhibiting artworks, other functions like restoration and conservation can be overlooked. It is time to review thinking about artworks as cultural heritage, disciplinary research, and a more scientific, safer environment for restoration and preservation. This study includes preceding research into the improvement of storage environments and standards of optimal storage environments from the standpoint of an intermediate organization, bequeathing collections safely to future generations. The study involves a comparative analysis of the current situation and environment of national and public art museum storage. Five years after inauguration, storage space, usually occupying 8.72% of total museum building floor-area has reached an 80% saturation degree. Increasing storage space by extension and renovation is limited, and independent storage should be established as soon as possible. In conclusion, the establishment of joint storage as an optimal restoration and conservation center is proposed to prepare for an increase of collec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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