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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翰苑』의 편찬과 蕃夷部

        윤용구(Yun Yonggu) 백산학회 2021 白山學報 Vol.- No.120

        『翰苑』은 기원 660년 張楚金(?~689)이 찬술하고, 雍公叡가 注를 붙인 類書의 抄寫本이다. 문헌으로만 전하던 『한원』의 殘卷인 「蕃夷部」가 발견된 지도 한 세기가 넘었다. 『한원』 번이부는 중국 주변 15개 이민족을 서술 대상으로 삼았다. 이 가운데 『한원』이 편찬된 660년경 존재한 이민족은 高句麗ㆍ新羅ㆍ百濟ㆍ倭國뿐이었다. 이 때문에 『翰苑』 번이부는 6~7세기 삼국시대 후기의 ‘東夷傳’이라 부를 만하다. 현재의 『한원』은 필사본으로 전해져 오는 동안 많은 오ㆍ탈자와 衍文, 改文이 유난히 많아 이용에 주의를 요하는 자료로 알려져 왔다. 1922년 처음 영인본이 간행된 이래 일본과 중국에서 적지 않은 교감ㆍ역주, 그리고 관련 연구가 지속되고 있다. 『한원』 번이부 연구의 최대 관건은 신뢰할만한 교감문이 없었기 때문이다. 2018년 기왕의 교감ㆍ역주를 종합한 『譯註 翰苑』 이 간행되면서 향후 연구의 토대가 만들어 졌다. 그 동안 한국학계의 『한원』 번이부 연구는 대체로 지금 전하지 않는 기록만을 고구려ㆍ백제ㆍ신라 등 해당 시대사 연구에 이용하는 형태였다. 『한원』 번이부 전체의 구성과 서술방식, 大 字 正文과 注文과의 관계, 주문의 구성과 기재방식 등 종합적인 분석은 취약하였다. 본고는 『譯註 翰苑』의 출간을 계기로 본격적인 연구에 필요한 문헌적 연구의 여러 문제를 살펴본 것이다. 특히 隋唐이래 적대적 관계를 유지해 온 고구려와 백제에 대해서는 침공 시 주요 거점과 요새, 도로 등 지형지물에 대한 서술이 중심이 되어 있다. 인용한 史書도 대부분 지리와 사신의 첩보 활동에서 수집한 자료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를 통해 『한원』에 고구려ㆍ백제ㆍ신라 중심의 蕃夷部 를 설정한 것은 660년 당시 동이사회에 대한 실제적인 지식과 정보를 관리 지망생인 童蒙의 학습서로 만들어 졌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Hanwon(翰苑) was written in 660. It is a book compiled by Jang cho-geum(張楚金, ?~689). The Hanwon, which has been handed down as a record, was discovered 100 years ago. Hanwon describes 15 different ethnic groups around China. Among them, Goryeo, Silla, Baekje, and Waguk existed around 660 when Hanwon was compiled. The reason why Hanwon is important as a historical material is that there are many historical books that have not yet been published in the order. There are about 16 kinds of unwritten history books, but they are concentrated on Koguryo, Silla, and Baekjejeon. Its contents span political systems, geography and social customs. Therefore, Hanwon can be called Dongyijeon from the 6th to 7th centuries to the late Three Kingdoms Period. Until now, most of the research on Hanwon in Korean academia has used only records that have not yet been handed down for historical research such as Goguryeo, Baekje, and Silla. This paper is an opportunity to investigate the problems of literature research necessary for full-scale research. He emphasized that the establishment of the Banyibu(蕃夷部) in the center of Goguryeo, Baekje, and Silla in Hanwon was based on the actual knowledge and information of Dongi(東夷) society in 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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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와 허구가 병존한 嘔血臺 고사의 탄생 배경

        朴現圭 한국중국문화학회 2014 中國學論叢 Vol.44 No.-

        본 논문은 조선 지식층 사이에 널리 전해오는 嘔血臺 고사가 발생한 실체와 과정을 고찰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구혈대 고사는 명과 후금(훗날 청)이 寧遠(현 요동 興城)에서 격돌한 전쟁, 소 위 寧遠大捷을 배경으로 삼았다. 고사 속에서 후금 누르하치(奴爾哈赤)가 대군을 이끌고 영원성(현 흥성)을 공략했다가, 명 袁崇煥의 지략과 용맹에 막혀 대패를 당하자 울분에 쌓여 피를 토해내었고, 나중에 사망했다고 한다. 이때 조선 사절 의 일원으로 온 역관 韓瑗이 전쟁 상황을 직접 목격하는 증인으로 등장했다. 구혈대 고사는 李星齡의 ≪春坡堂日月錄≫에 처음 기술된 이래 조선 지식층 사이에 널리 알려졌고, 특히 사행에 나선 조선 사절은 노정에 소재한 영원을 지 나가며 구혈대 고사가 발생한 장소를 확인하곤 했다. 영원성의 동북쪽에 자리한 首山에 명 정통 연간에 세워진 봉화대가 있고,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영원성이 한 눈에 들어온다. 후대에 들어가서 구혈대 고사는 주인공이 누르하치에서 홍타 이지로 바뀌는 등 여러 형태로 변형되며 계속 발전해 나갔다. 조선 지식층이 구혈대 고사를 들먹이는 것은 굴욕적 역사를 안긴 청나라에 대해 거부감을 표시하고 명 원숭환의 승리를 통해 자신의 승리인양 일종의 대리 만족에서 나왔다. 구혈대 고사에는 실제와 허구가 병존한다. 고사에 나타난 전쟁 모습은 역사적 실체와 가깝지만, 이때 조선 사절과 역관이 출현했다는 것은 허 구이다. 원형 고사 또는 변형 고사에서 언급된 실제 역사, 즉 1626년(천계 6; 천명 11)의 영원대첩 또는 1627년(천계 7; 천총 1)의 영금대첩 때는 연행 노정 상 조선 사절이 영원과 금주로 들어올 수가 없었다. 1629년(인조 7)에 진하변무 사 李? 일행이 다시 영원을 들렀고, 이때 사절의 일원인 역관 한원이 원숭환과 몇 차례 만났는데, 한 번은 금주로 가서 원숭환과 함께 군사 훈련과 시설물을 둘러보았다. 이때 한원이 목격한 상황이 조선 지식층으로 사이에 전해졌고, 나중 에 후대 사람에 의해 확대 생산하여 구혈대 고사가 탄생하게 된 배경으로 보인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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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학계의 『翰苑』 연구

        趙宇然,李毅夫 백산학회 2021 白山學報 Vol.- No.120

        이 글에서는 『翰苑』 殘本이라는 일본에서 발견된 중요한 동아시아 고대사 문헌에 대한 중국학계의 인지와 중국 전래 및 출간 그리고 관련 연구에 대해 살폈다. 『한원』 잔본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이미 일본 체류 중이던 羅振玉에 의해 주목되었다. 한편 그는 『한원』 영인본의 간행과도 연관되어 있기도 하다. 그 후, 金毓黻은 교정 작업을 거쳐 활자본으로 출간했다. 현재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1934년에 김육불이 『遼海叢書』 제8집에 활자본으로 수록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사실 그의 학술일기인 『靜晤室日記』에 따르면 『요해총서』 8집이 간행된 구체적인 시점은 1935년 하반기 무렵이다. 김육불은 『한원』을 중요한 문헌으로 인지하고 있었던 것 같지만, 『정오실일기』에서는 그에 관한 단편적인 언급만 확인할 수 있다. 그 입수 경위나 교정 과정에 관한 내용은 보이지 않아 아쉽다. 따라서 구체적인 전후 맥락 파악은 어려운 형편이나, 다만 1930년대 무렵 김육불이 稻葉巖吉, 內藤湖南 등 일본 학자들과의 왕래가 빈번했던 만큼 이러한 교류를 통해 입수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기존 중국학계의 『한원』 연구는 크게 세 분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편찬 과정, 校釋과 역주, 『高麗記』 및 전거 자료로서의 연구 등이다. 그러나 전문적인 연구 논저는 많지 않다. 중국 학자童嶺은 지난 10년 동안 단지 자신의 몇몇 연구가 중요하다고 自評했는데,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보다 앞선 연구 성과는 미비한 형편이다. 그럼에도 張中澍의 校譯 작업이 있었고, 姜維公, 高福 順 등의 고구려사 자료로서 『고려기』에 초점을 맞춘 연구가 주목된다. 그리고 근년에 남방지역의학자 童嶺이 일본 유학 경험을 토대로 여러 편의 의미 있는 연구 성과를 발표했다. 2016년에 『한원』을 연구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王碩 또한 주목되나, 다만 관련 전적의 수집‧독해 수준은童嶺에 미치지 못한다. 중국 남‧북 학계의 학문 수준 차이를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향후 중국학계의 『한원』 연구와 관련해서는 이 두 젊은 학자의 활약이 주목된다. 本文梳理了中国学界对《翰苑》残本这一重要东亚古代史文本的认知、传入中国、刊行以及相关研究史。《翰苑》残本较早时期已被居住在日本的罗振玉所关注。而且他还与《翰苑》影印本的刊行有密切关联。此后,金毓黼经校订,以活字本形式出版发行。现在学界普遍认为,金毓黼在1934年以活字本形式将《翰苑》收录于《辽海丛书》第8辑中。但据他的学术日记《静晤室日记》,《辽海丛书》第8辑具体刊行时间为1935年下半年左右。虽然金毓黼似乎将《翰苑》残本视为重要的文献,但在《静晤室日记》中,只有简短提及,并没有详细提到取得过程和校订等相关內容。虽然很难得知具体情况,但20世纪30年代,金毓黼与稻叶岩吉、內藤湖南等日本学者来往频繁,因此或许是通过他们取得了《翰苑》。现今中国学界的《翰苑》研究大致可分为三个方向。即,编撰过程、校释与译注、《高丽记》及作为高句丽史料的研究等。但有深度的专门研究论著并不多。正如童岭教授自评,在过去十年的相关研究中,只有童岭的部分研究值得关注而已。总之中国学界的相关研究成果并不丰富。尽管如此,仍有张中澍的校译,姜维公、高福顺等的《高丽记》研究等成果备受关注。另外,近年来南方学者童岭以日本留学经验为学术背景,发表了多篇值得关注的研究成果。2016年以《翰苑》为研究课题,获得博士学位的王硕的研究亦值得关注,但相关原始资料的收集、阅读等学术水平却不及童岭。这反映了中国南北学界学术水平的差距。尽管如此,今后中国学界的《翰苑》研究,需关注以上两位年轻学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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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翰苑』 注 所引 『括地志』의 百濟 佚文 硏究 : 7세기 동아시아의 문헌지식

        童嶺(Tong Ling),번역: 임동민(Lim, Dong-Min) 한국고대학회 2021 先史와 古代 Vol.- No.67

        수당사와 동아시아사의 연구는 새로운 방법론(이론)과 새로운 사료라는 두 갈래의 길에 주로 기반을 두고 있다. 본래 일본 福岡縣 築紫郡 男爵 西高辻信雄에게 소장되었고, 현재는 같은 현 太宰府市 太宰府天滿宮에 소장된 舊鈔本 殘卷 『翰苑』은 正文과 注釋 모두 풍부한 정보를 담고 있다. 唐代 四六文의 발전 맥락에 따라 보면, 『翰苑』의 正文은 騈體文學의 여러 많은 특징을 구비하고 있으며, 『翰苑』의 注釋文字(특히 고구려, 백제 등의 조목)는 당 왕조와 동아시아사 관계에 충분히 유용한 사료이다. 본문은 일본에 소장된 『翰苑』에 인용된 『括地志』 佚文 연구로서, 이 연구는 필자가 앞서 쓴 『高麗記』 佚文의 연구(일본 교토대학 인문연구소 『東方學報』2017년 12월 발표) 와 자매편이다. 산일된 텍스트의 관점에서 당 왕조와 고구려, 백제의 관계를 다시 새롭게 볼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본문은 ‘佚籍文獻’과 ‘唐代 동아시아사’라는 두 시각으로부터 착수하여, 먼저 宮內廳 書陵部와 『翰苑』에 인용된 두 종류의 『括地志』佚文에 주목하였다. 영국의 Joseph Needham은 『중국의 과학과 문명』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地理總志는 814년 李吉甫의 『元和郡縣圖志』이고, 이때는 이미 唐代 말기에 접근하였다.”라고 지적하였지만, 이것은 서적의 산일된 정황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다. 본문은 모두 6개 절로 나뉘는데, 주로 아래의 3개 방면으로 고찰하였다. 첫째, 『翰苑』 注 인용 『括地志』에 수록된 백제 등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11개 佚文의 문자 고증을 진행하여, 백제 역법과 도성 위치, 5방 5부 등 중요 사료를 정정하였는데, 이것은 특히 백제의 관제, 제사, 왕족, 지리, 병력, 산천 등과 상당히 중요한 관계가 있다. 둘째, 신라‧당과 백제의 전쟁에 관련된 지리, 풍속 정보가 담긴 『翰苑』 注 인용 『括地志』佚文을 분석하였다. 『括地志』佚文은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7세기 ‘삼국시대’ 최후의 백제 전쟁과 상당히 긴밀하게 얽혀 있다고 생각한다. 셋째, 唐代는 地志學이 충분히 발달한 시대였고, 계승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漢‧魏‧六朝 地志의 장점과 사료를 계승하였다. 唐代 地志 문헌의 ‘다면성’을 분석하고, 아울러 唐代 羈縻州 계통 등 다각도로 淸儒 輯本 『括地志』가 어째서 백제의 조목을 失載하였는지에 대한 하나의 학문적 추측을 시도하였다. The study of East Asian history is based on new methodologies and historical sources. The remaining ancient manuscript of Hanyuan(翰苑 舊鈔本 殘卷), which is currently in the collection of the Dazaifu Tenmangu(太宰府天滿宮) in Japan, is a valuable material that contains the original texts(正文) that show the characteristics of “pianwen(騈文)” in the Tang dynasty, and useful annotation(注釋) for the study of the relationship between Tang dynasty and East Asian history. This article is a study on the Kuodizhi (括地志) quoted in Hanyuan (翰苑), and a companion edition of “A study on the scattered texts of Gaoliji (高麗記)”, written by the present writer. Focusing on the scattered texts,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Tang dynasty, Koguryŏ, and Paekche is re-examined. To be more specific, this article started from two perspectives: “the scattered texts(佚籍文獻)” and “East Asian History during the Tang dynasty”. This article is divided into six sections, and the following three aspects were mainly analyzed. First, by conducting a literal examination of the historical facts of Paekche recorded in the Kuodizhi quoted in the annotation of Hanyuan, important records such as the Paekche calendar, the location of the capital city, and “Opang(五方, five provinces) and ‘Opu’(五部, five districts) were corrected. These records are particularly important in relation to the administration, ancestral rites, royalty, geography, troops, mountains and streams of Paekche. Second, this article analyzed the scattered texts of Kuodizhi quoted in the annotation of Hanyuan that contains information on the war between Shilla, Tang, and Paekche. It is considered that the scattered texts are directly or indirectly related to the last Paekche War in the seventh century, Three Kingdoms period. Third, the Tang dynasty was an era in which topography(地志學) was significantly developed, and from the point of view of succession, the merits and historical records of the geography of Han(漢), Wei(魏), and Six Dynasties(六朝) were inherited. This article aims at analyzing the “multifaceted aspects” of literature on topography of Tang dynasty and attempting academic inference about the reason why Kuodizhi lost the Paekche reco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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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翰苑』 卷子本의 書誌와 筆寫의 諸問題

        박준형(Park Junhyoung) 백산학회 2021 白山學報 Vol.- No.120

        이 논문에서는 헤이안시대 일본에서 필사된 『한원』의 서지와 필사과정에 대해 검토하였다. 1974년에 太宰府天滿宮에서 복제한 『한원』(권자본)은 세로 27.3㎝, 본문 길이 1,566.5㎝이며 裝潢을 포함한 全長은 1,626.2㎝이다. 현존 『한원』은 필사된 28장의 종이를 이어 붙여서 제작된 두루마리 형태이다. 接紙를 위해 네 변을 자른 후에 가로 57.5㎝, 세로 27.3㎝가 되는 종이가 필사지의 기본 크기였다. 이 용지의 크기는 율령반포 이후 8세기 초반에 사용된 唐大尺[小尺] 기준으로 가로 2척, 세로 1척이었다. 倭國篇부터는 이전 편과 달리 필체가 바뀌었는데 이것은 필사자의 교체가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한원』은 접지를 위해 改行하면서 일부 형태가 변형된 사례가 있지만 저본의 형태를 최대한 유지하면서 필사가 이루어졌다. 그런 점에서 『한원』에 보이는 誤脫과 缺落은 필사과정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저본의 오류였을 가능성이 높다. This article examines the bibliographic characteristics and the process of transcription of the Literati Garden(Hanyuan/Kan’en 翰苑) copied in Heian period Japan. The scroll-edition Literati Garden reproduced in Dazaifu Tenman-gu 太宰府天滿宮 in 1974 is 27.3㎝ in height, 1,566.6㎝ in the length of the text, and 1,626.2㎝ in total length including decorative margins. The transmitted manuscript of the Literati Garden has the form of a scroll made by attaching 28 transcribed sheets of paper. The basic size of the paper for transcription is 57.5㎝ by 27.3㎝ excluding the blanks on the four sides for pasting. The size of the paper is 2 chi by 1 chi in terms of xiaochi 小尺 of Tang long measure which was adopted after the promulgation of the Statutes and Ordinances(ritsuryō 律令) in Japan. The change in the handwriting, compared to the preceding chapters, seen in the Waiguo 倭國 chapter suggests a replacement of the scribe. Except for some cases, such as changing the line breaks to attach the paper, the transcribing process of the Literati Garden was successful in keeping the form of the original copy to the fullest. In this regard, the errors and omissions found in the scroll-edition Literati Garden are highly likely to have been from the original copy, not from the copying proc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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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翰苑』 夫餘傳과 7~12세기 類書의 夫餘關係記事 검토

        이승호(Lee, Seung-Ho) 한국고대학회 2021 先史와 古代 Vol.- No.67

        본고에서는 『翰苑』부여전을 비롯하여 『晉書』 부여전, 『通典』 부여국조, 『太平寰宇記』 부여국조, 『太平御覽』 부여조, 『册府元龜』 부여국조, 『通志』 부여조 등 唐代 이후 찬술된 문헌의 부여 관계 기사에 대해 검토하였다. 살펴본 결과 먼저 唐ㆍ宋代 여러 문헌에 실려 있는 부여 관계 기사는 대부분 『三國志』와 『後漢書』 및 『진서』 부여전의 정보에 바탕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지금은 유실된 『魏略』의 기술을 직접 인용한 경우는 검토한 문헌 중에서 『한원』 부여전이 유일하였다. 『한원』부여전을 제외하면 唐ㆍ宋代 문헌 중에 부여 관계 기사는 대체로 『삼국지』 및 『후한서』 부여전을 바탕으로 기술된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後代 類書의 부여 관계 기사에는 현전하는『후한서』 및 『삼국지』 부여전에서 전하는 정보와 차이를 보이는 대목이 있다. 바로 2~3세기 부여 왕계와 관련한 정보인데, 『후한서』부여전에 보이는 부여왕 ‘夫台’에 대한 정보를 후대 類書에서는 좀처럼 찾기 어렵다는 점이나, 2~3세기 부여 왕계에 대해 尉仇台-位居-麻餘로 기술하면서『삼국지』부여전의 인식과 차이를 보이는 점은 현전하는 『후한서』 및 『삼국지』 부여전의 관련 기사들을 다시 곱씹게 만든다. 특히 『삼국지』 부여전 기사에서 그동안 하나의 인명으로 간주해 온 “簡位居”에대한 해석 문제와 부여 麻餘王 시대에 ‘大使 位居’로 등장하는 인물에 대해 후대 類書에서는그를 尉仇台의 孫으로서 麻餘 이전에 왕위에 있었던 인물로 보는 시각 등은 이 시기 부여 왕계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가능케 할 수도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This study examined records of Buyeo(夫餘) not only in Hanwon(翰苑) but also in historical books compiled after Tang(唐) Dynasty such as Jinshu(晉書), Tongdian(通典), Taipinghuanyuji(太 平寰宇記), Taipingera(太平御覽), Cefu-Yuangui(册府元龜), and Tongzhi(通志). According to the findings, first, most of the Buyeo-related articles contained in several literatures from Tang(唐) and Sung(宋) Dynasty are grounded on information found in the Records of Buyeo(夫餘傳) in Sanguozhi(三國志), Hou-Hanshu(後漢書), and Jinshu. Nonetheless, records of Buyeo in Leishu(類書) compiled by later generations have some part that is differentiated from the information transmitted by the Records of Buyeo in Hou-Hanshu and Sanguozhi. It is the very information about the genealogy of Buyeo’s kings from the 2nd to 3rd century. Concretely, we cannot find the information about one of the Buyeo’s kings, ‘Butae(夫台)’, found in the Records of Buyeo in Hou-Hanshu from Leishu of the next generations. Moreover, Leishu of the later generations are differentiated from the Records of Buyeo in Sanguozhi as they describes the genealogy of Buyeo’s kings in the 2nd to 3rd century as Wigutae(尉仇台)-Wigeo(位 居)-Mayeo(麻餘). These points remind us of articles related to the Records of Buyeo in Hou-Hanshu and Sanguozhi that have been transmitted up to now. Particularly, about the matter of interpreting “Ganwigeo(簡位居)” that has been regarded as a person name so far in the articles of the Records of Buyeo in Sanguozhi and the person appearing as ‘Daesa(大使) Wigeo(位居)’ in the reign of Buyeo’s King, Mayeo(麻餘王), Leishu of the next generations tend to see him as Wigutae(尉仇台)’s grandson and the one that was on the throne before King Mayeo(麻餘王). This kind of viewpoint seems to allow us to analyze the genealogy of Buyeo’s kings from a new perspec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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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翰苑』 번이부의 전거자료와 편찬태도

        나유정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21 규장각 Vol.59 No.-

        『翰苑』 번이부 편찬에서 正文과 注文작성의 중심에 있었던 찬자는 장초금이었으며 모든 注文에서 공통적으로 『후한서』를 인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후한서』를 중심 전거자료로 활용하였다고 파악된다. 다만 660년 당시 존재하지 않는 흉노ㆍ오환ㆍ선비ㆍ남만ㆍ서남이 등을 서술하는 데에는 『후한서』의 인용 비율이 높았던 반면 고구려ㆍ신라ㆍ백제ㆍ숙신ㆍ왜 등에 대해서는 『후한서』를 비롯하여 다양한 전거자료를 활용했다. 이는 『翰苑』 찬자의 관심에 따라 최신 자료를 인용한 결과로 보인다. 조목 별 내용을 살펴보면 <정치ㆍ사회ㆍ문화-중국과의 관계> 구조 속에서 서술하였다. 그 중 찬자의 의도에 따라 신라에 대해서는 정보를 소략하게 서술하고, 고구려와 백제의 서술에서는 지리정보를 추가하여 서술하였다. 또한 삼국에 대해서는 중국과의 조공의 예는 서술하지 않았던 반면 고구려의 경우 과거 한사군 지역이었다는 점이 강조되어 서술되었다. 이는 『翰苑』에서 동이지역, 특히 고구려에 대한 정벌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서술이다. 『翰苑』 편찬이 착수되었던 시기는 660년 3월 12일로, 655년 장손무기 정권이 물러나고 서역을 안정시킨 당이 동방으로 백제를 공격하기 시작하던 시기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張楚金은 사찬 사서인 『翰苑』을 통해 동이지역 특히 고구려에 대한 정복의 당위성을 강조하여 고구려 정벌을 지지하고, 이에 동조하는 분위기를 형성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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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翰苑』 「高麗記」에 보이는 고구려 官名의 구조와 특징

        이규호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21 규장각 Vol.59 No.-

        『한원』 「고려기」는 7세기 당대 고구려의 사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로서 취급되어 왔다. 이 가운데 官制와 관련된 기록은 이전시기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내용 면에 있어서도 가장 자세하여 일찍부터 주목받았다. 『周書』부터 『한원』에 이르는 6~7세기 중국측 기록을 검토하면 『한원』의 관제구조는 『주서』의 시간적 배경인 6세기 중엽에 이미 형성되었다. 곧, 이들 기록을 함께 검토해야 당시 고구려 관제의 구체적인 모습을 복원할 수 있다. 『주서』와 『隋書』를 『한원』과 비교하면 일치하지 않는 관명이 있다. 사료의 서술 배경 등을 검토한 결과, 『주서』와 『수서』에 다른 계통의 관명이 들어가 있는 것은 서로 다른 전거자료를 참고하여 작성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 때 명칭 상 서열을 알 수 없는 이칭(異稱) 계통 자료들이 혼재되었다고 보았다. 그 결과 『한원』과 두 사서는 대부분 대응하고 있으며 『한원』에 전하는 관제 기록이 보다 현실에 가까웠음을 확인하였다. 『한원』에는 상위 5官이 국정운영의 주요사안을 결정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들은 唐人의 시각에서 주요 부서의 결정권을 가진 자들로 이해되었다. 최근 발견된 묘지명 자료에 의하면, 이들은 평대(評臺)라는 조직을 통해 이러한 국가정무를 처리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평대는 6세기 중엽에 설치되었으며, 이 시기에 관제 역시 그에 맞게 정비되었다. 6세기 중엽에 등장한 위두대형(位頭大兄)은 그러한 과정의 핵심으로서 상위 5관의 하한일 뿐만 아니라, 각 부서의 장관이 될 수 있는 자격요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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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張楚金의 『翰苑』 편찬과 복고적 유가사상

        정동준(Jeong Dongjun) 백산학회 2021 白山學報 Vol.- No.120

        이 글에서는 장초금과 관련된 여러 사료들을 분석하여, 『한원』 편찬까지의 생애와 중앙정계 진출 후 관인으로서 활동하는 모습을 파악한 후, 양자의 관계를 검토해 보았다. 장초금은 병주 기현에서 유가적 윤리에 충실한 품행을 보이는 가문의 분위기 속에서 탄생하여, 17세 때 병주도독 이적에 의해 향공진사로 추천되어 과거에 합격하였고, 660년에 태원현령으로 재직하면서 복고적인 성격의 유가적 윤리에 충실하려는 목적에서 『한원』을 편찬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670년대에 형부시랑으로 재직하면서 676년 8월에는 토번의 침입에 대한 득실을 간언하고 율과 격식의 편찬에도 관여하였다. 680년대에는 이부시랑‧사형경‧추관상서와 같은 요직에 재직하였는데, 사형경 재직시기로 추정되는 686년 경에는 무고사건을 해결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측천무후 정권에서 승승장구하던 그는 혹리 주흥이 서경업의 반란에 연루되었다고 무고한 것으로 인해 689년 8월에 유배되었다가 690년 8월에 사망하였다. 이 사망과정과 관련해서는 표면적으로는 이적과의 인연이 빌미가 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무고사건의 해결을 통해 측천무후의 정치적 행보에 제동을 걸었던 것이 실질적 원인이었다고 추정되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690년 무주 정권의 성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689년 경에 이용가치가 떨어진 복고적 유가 관련 관인들의 숙청과정에 그도 희생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In this article, we analyzed various historical materials related to Zhang Chujin(張楚 金) and examined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two after learning about his life until the compilation of Hanyuan(翰苑) and his activities as government officials after entering central politics. Zhang Chujin was born in Qixian(祁縣) of Bingzhou(幷州) in the atmosphere of a family faithful to Confucian ethics. He was recommended as a Xianggongjinshi(鄕貢進 士: prefectural nominee as presented scholar) by Bingzhou Dudu(都督: supervisorin- chief) Li Ji(李勣) and passed Keju(科擧: regular recruitment) at the age of 17, and is believed to have been compiled Hanyuan as Taiyuan(太原) Xianling(縣令: head of prefecture) in 660 with the aim of being faithful to the retroC onfucian ethics. He served as Xingbushilang(刑部侍郎: vice president of bureau of justice) in the 670s, and in August 676, he admonished the benefits and losses about Tufan(吐蕃: Tibet)’s invasion and was also involved in the compilation of Lu(律: criminal code) and Geshi(格 式: rules for operation). In the 680s, he served in important posts such as Libushilang(吏 部侍郎: vice president of bureau of personnel), Sixingjing(司刑卿: chief minister of court of judicial review), and Qiuguanshangshu(秋官尙書: president of bureau of justice), and in 686, he was able to resolve the incident of false accusation, which was presumed to be during his tenure as Sixingjing. But he was exiled in August 689 and died in August 690 due to Zhou Xing(周興)’s false accusation that he was involved in the rebellion of Xu Jingye(徐敬業). In relation to the death process, the relationship with Li Ji was ostensibly an excuse, but in fact, it was assumed that it was the actual cause of putting the brakes on the political moves of Zetianwuhou(則天武后) through the resolution of the false accusation. More fundamentally, in preparing for the establishment of Wuzhou (武周) dynasty in 690, he was also thought to have fallen victim to the purging process of retro Confucian officials, whose value fell around 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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