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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일강제병합 추진에 관한 일본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의 서술 -山川出版社와實敎出版발행 교과서를 중심으로

        박소영 한국역사교육학회 2011 역사교육연구 Vol.- No.13

        일본은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등장하게 된 조선 멸시관 및 침략관에 대한 사상적 배경과 그 연장선에서 주장되던 정한론·탈아론을 통해 한국에 대한 침략의지가 구체화되었다. 그리고 강화도조약 체결은 일본에게 한반도로 영향력을 확대해나가는 계기를 마련했으며,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일으키면서 한국과 아시아에 대한 침략행위를 노골화해나갔다. 그리고 일본은 불법적이고 부당한 조약체결 등을 통해 결국에는 한국을 강제병합시켰다.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역사적 경위에 대해 일본 고등학교 일본사 교과서들의 서술을 2가지 분석항목으로 살펴봄으로써 일본학생들이 교과서를 통해 형성될 수 있는 역사인식을 유추해볼 수 있었다. 1. 사상적 배경으로서의 조선침략에 관한 논리: 메이지 전후 시기 등장한 조선 침략의 논리를 살펴보았다. 한국침략에 대한 사상적 토대를 마련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주장은 정한론, 탈아론과 연계를 시키지 못하고 있다. 2. 한일강제병합까지의 과정: 한일강제병합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들 가운데 강화도 조약,청일전쟁, 러일전쟁 그리고 러일전쟁 발발과 함께 전개되는 일련의 한일 간 조약체결과 병합과정을 일본사 교과서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고등학교 일본사 교과서 가운데 높은 비중으로 채택되는 山川出版社교과서들은 제 사건들에 있어서 일본의 침략성을 희석시키고 오히려 신제국주의 시대의 흐름에 맞서 자국을 방위한다는 논리로 한반도 침략을 정당화시키려는 경향이 강하다. 반면, 實敎出版교과서는 조선에 대한 침략적 의도를 갖고 역사적 사건들을 전개해나갔음을 밝히고 있으며 한일강제병합에 이르기까지 체결된 각각의 협정에 대해 그 의도와 내용을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메이지 시기 일본의 지도자들이 안보론과 결부시키면서 한반도가 일본을 지키는 중요한 생명선이라는 논리로 침략을 정당화하고자 했던 인식이 현재까지 일본의 주요한 역사교과서에 계승되고 있다는 점은 우려되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당시 조선으로의 세력 확대를 위해 전개되었던 역사적 사건에 대해 침략성을 밝히고 학계의 연구 성과를 반영한 긍정적 서술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향후 한일 간의 역사인식을 둘러싼 갈등과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과 시사점을 제시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 KCI우수등재

        가노지고로의 유학생 체육 교육이 동아시아 체육사에 미친 영향

        유성연 ( Yoo¸ Sungyeon ) 한국체육학회 2021 한국체육학회지 Vol.60 No.2

        본 연구는 가노지고로의 유학생 체육교육이 동아시아에 어떻게 적용, 전파되었는지에 근원적 본질을 밝히고자 한다. 이상의 관점에서 진행된 이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가노지고로의 청나라 유학생 교육은 가쓰 가이슈의 흥아론을 기반으로 청나라의 발전을 위한 교육이었지만 조선인 유학생 교육은 국학자들의 탈아론에 영향을 받아 내선일체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둘째, 가노지고로가 청나라 유학생들에게 전파한 체육 사상은 신체를 잘 연마하면 체육은 사회생활의 방법이 되고 이 목표를 달성할 경우 비로소 자신과 타인이 함께 성장하는 기초가 된다는 자타공영의 사상이었다. 이 사상은 청나라 유학생 양창하에게 전파 되었고 양창하는 다시 중국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마우쩌둥의 체육 사상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셋째, 가노지고로는 조선인 유학생들에게 체육 교육의 문호를 개방하였고 여기에 유학을 다녀온 조선인 유학생들은 가노지고로의 사상적 종지인 정력선용, 자타공영의 사상을 문화변용(文化變容)하여 일제에 협력하는 수단 또는 민족 자강의 수단으로 조선에 적용하게 된다. This study set out to investigate the fundamental essence in the way that Kano Jigoro’s physical education for foreign students was applied and transmitted in East Asia. Conducted from this perspective, the study generated the following results: first, his education for students from Qing was for the development of Qing based on Katsu Kaishu Asian prosperity, whereas his education for students from Joseon was used as means of promoting the ‘Korea and Japan are One’ policy under the influence of classical scholars’ Theory of Beyond Asia; secondly, he spread his idea of physical education to students from Qing, and it was Jatagongyong, which argues that physical education can be a method of social life through the good training of the body and that the fulfillment of this objective will offer a basis for the joint growth of others as well as oneself. This idea reached Yang Chang-ha, a student from Qing studying in Japan, and he had huge impacts on the physical education ideas of Mao Zedong, who had tremendous influences on the formation of China; and finally, Kano Jigoro opened doors of physical education to students from Joseon studying in Japan. After finishing their study in Japan, these Joseon students applied his ideological cadences, Jeongryeokseonyong and Jatagongyong, as means of collaborating with Japanese Imperialism and making strenuous efforts for the nation through the acculturation of these ideas. asian prosperity.

      • KCI등재

        甲申政變前後の福澤論吉の中國認識 : 『時事新報』中國關連論說を中心として 『시사신보』 중국관련 논설을 중심으로

        高城幸一 한국일어일문학회 2002 日語日文學硏究 Vol.43 No.1

        임오군란 이후 청국은 압도적인 군사력을 배경으로 조선의 실질적인 보호국화를 의미하는 내정간섭정책에 나선다. 이에 비해 일본은 청국과의 직접적인 대결을 피하기 위해서 청국과의 협조적인 노선을 채택하고 조선정략에서 크게 후퇴한다. 이런 명치정부의 소극적인 조선정략에 후쿠자와는 불만을 표시하고 청국을 가상의 적으로 생각하고 군사력의 확장을 명치정부와 국민에 호소한다. 安南사건을 계기로 淸佛戰爭이 일어나자 청국이 조선에 신경 쓸 여유가 없다고 판단하여, 명치정부는 이때까지의 조선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를 바꾸고, 朝鮮駐在 日本公使館은 김옥균등이 일으킨 쿠테다인 갑신정변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그러나 압도적인 군사력을 배경으로 한 朝鮮駐在 淸國軍이 개입하자 일본군은 후퇴하고 갑신정변은 3일 천하로 끝났다. 명치정부는 朝鮮駐在 日本公使館이 갑신정변에 직접 介入했다는 국제 여론의 비판을 피하기 위해 朝鮮駐在 日本公使館의 개입을 숨기고 一方的으로 청국의 공격을 받은 것으로 국민에게 알리자, 일본 국민들의 청국에 대한 적대심이 높아졌다. 후쿠자와는 자신에 주재한 『時事新報』를 통해서 청국과 전쟁하여 조선의 독립을 도와야 한다는 내용의 사설을 연일 게재하고, 국민의 애국심에 호소하여 청국과의 전쟁을 대비하여 군사비용을 만들기 위해 헌금을 할 것을 전 국민에 호소한다. 그러나 井上??外務卿이 직접 全權大使로 나서 조선정부와 교섭에서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협박하여 정변의 책임을 조선에 전가시켜 漢城條約을 채결하자 일본국민들은 전쟁의 위기가 떠났다고 기뻐하였다. 이런 상황을 보고 후쿠자와는 이번 정변의 주역은 청국이기 때문에 청국과의 교섭이 해결하지 않는 이상 기뻐하는 것은 시기 상조라고 국민들의 눈을 다시 청국으로 돌리게 하고 청국과의 전쟁을 계속 주장한다. 당시의 명치정부의 최고 실력자인 伊藤博文이 직접 全權大使로 청국에 가서 청국과의 교섭을 통해서 청일 양국이 조선에서 군대를 철수한다는 天津條約을 체결하여 양국간의 전쟁위기가 사라지자, 후쿠자와는 조선에 거류하는 일본인의 안전을 위하여 天津條約을 파기할 것을 명치정부에 요구한다. 후쿠자와는 天津條約이 갖는 외교적 의미의 중요성을 이해 못했던 것 같다. 갑신정변의 실패가 후쿠자와의 침략적인 중국·조선론인 「탈아론」을 등장시켰다. 「탈아론」의 등장배경과 성격에 대해서 종래의 연구들이 언급한 것과 달리 후쿠자와의 「탈아론」은 갑신정변 때문에 조선에서 일본의 기반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좌절감과 후쿠자와가 조선문명개화의 동지로 생각했던 독립당 멤버에 대한 가혹한 처형에 대한 분노 때문에 등장했다고 할 수 있다. 그 후에도 중국과 조선을 재평가하는 논설이 나온 것을 감안하면 「탈아론」은 일종의 패배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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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德富蘇峰의 동아시아 인식 - 청일전쟁부터 한국병합 시기를 중심으로-

        방광석 동북아역사재단 2010 東北亞歷史論叢 Vol.- No.27

        The study examines the views on East Asia held by Tokutomi Soho (1863-1957), an influential journalist and historian in modern Japan. This study focuses on his views of East Asian countries like China and Korea especially from the Sino-Japanese War (1894-95) to the annexation of Korea (1910), when he shifted to nationalistic and imperialist logics. Tokutomi's views on East Asia were related to the Datsuaron (Advocacy of Escape from Asia) He argued that Japan equipped with Western civilization could be separated from its East Asian neighbors like China and Korea, which were still barbaric and lacked the ability to transform themselves into civilized countries. Then, China and Korea were seen not so much a part of alliance with Japan in resistance against the inroad of Western powers as an object of Japanese expansionism. As an influential journalist, Tokutomi played a leading role in promoting these imperialist views. Such Tokutomi's views remained unchanged even after his firsthand contacts with China and Korea. He travelled China for a long time in 1906 (right after the Russo-Japanese War) and again in 1917 (right after the World War I). Although, he subscribed to the policy of friendly relation with China, rescinding the idea of dividing China, he repeated his unchanging views on China that the Chinese lacked modern consciousness of nation, and that they were imbued with debilitating literary values and private personal interests, which hindered them from reforming their country and society. With regard to Korea, he maintained that Koreans were so corrupt and lazy that they were unable to achieve civilization on their own, thus justifying its annexation by Japan. In justifying Japan's aggression against Korea by its role of civilizing mission, lied his deep sense of disdain and discrimination against Korea, which remained uncivilized to his eyes. The views of Tokutomi were also shared by contemporary Japanese leaders and intellectuals. He tried to be an initiator in proposing a variety of imperialist foreign policy suited to changing circumstances. Therefore, he put forth the theory of harmony of Eastern and Western civilizations, when his Datsuaron lost practical significance due to the Russo-Japanese War and the theory of yellow peril. Later, when Japan pursued with expansionist policy after the World War I, he advanced pan-Asianism, departing from the idea of Peaceful expansionism. His views on East Asia were in line with the course of Japanese imperialism, maintaining consistency in rationalizing and theorizing the expansionism of Japanese empire. 본 연구에서는 언론인자 역사가로서 근대일본의 전반에 큰 영향력을 미친 도쿠토미 소호(徳富蘇峰)의 동아시아 인식을 살펴본 것이다. 특히 청일전쟁 이후 한국병합 시기에 걸쳐 도쿠토미가 국가주의, 제국주의의 입장으로 선회하면서 조선과 중국 등 동아시아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 구체화시켜 나갔는지를 추적하였다. 도쿠토미의 동아시아 인식은 ‘脫亞論’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일본은 서양과 같은 문명을 구비하고 있어 ‘아시아적’이지 않으며, 중국과 조선 등 주변 아시아 국가는 기본적으로 야만적이어서 스스로 문명화할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주변 나라가 일본과 마찬가지로 구미열강의 침략에 대항하는 동일한 입장을 갖고 있다는 측면은 무시되고 구미열강과 일본의 팽창의 대상으로만 파악했다. 도쿠토미는 언론활동을 통해 이러한 제국주의적 동아시아 인식을 주도했다. 도쿠토미의 동아시아 인식은 직접적인 견문을 통해서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는 러일전쟁 직후인 1906년과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17년 두 차례에 걸쳐 장기간 중국을 여행했다. 그 사이 ‘지나분할론’에서 ‘지나친선’론으로 대외정책론은 변모를 보였으나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기본적 인식은 변하지 않았다. 중국인에게는 근대적인 국가의식이 없다든가 중국은 ‘文弱’하고 개인의 ‘이해관계’만 앞세워 스스로 개혁의 가능성이 없다고 파악했다. 조선에 관해서도 조선은 매우 부패하고 조선인은 게으르므로 스스로 문명화할 수 없으며 시대의 대세로 보아 일본에 의한 병합은 어쩔 수 없다며 식민통치를 정당화했다. 그 밑바탕에는 조선사회를 ‘야만’사회로 보는 멸시감과 차별의식이 뿌리 깊게 깔려 있었다. 따라서 일본에 의한 ‘문명화’를 강조하며 침략을 합리화해 나갔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당시 일본정부나 대부분의 일본지식인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도쿠토미는 ‘제국주의’국가 일본의 전략을 미리 제시하고 그것을 선도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상황에 따라 구체적인 대외정책론을 변화시켜 나갔다. 러일전쟁과 ‘황화론’을 통해 ‘탈아론’이 논리적 현실성을 잃자 ‘동서문명조화론’을 내세웠으며, 제1차대전 후 일본이 중국에 대한 침략을 실행해나가자 ‘평화적 팽창주의’에서 ‘아시아주의’로 나아갔다. 그는 꾸준히 일본의 대외팽창을 합리화하고 이론화하며 일본제국주의와 운명을 같이했다고 볼 수 있다.

      • KCI등재

        일본 혐한 도서의 역사인식에 관한 연구

        이원우(Lee, WonWoo) 동아시아일본학회 2022 일본문화연구 Vol.- No.81

        이 논문은 오늘날 범람하고 있는 일본 혐한 도서를 이해함에 있어 단순히 반일-반한(혐한) 프레임에서 벗어나 보다 역사적 맥락에서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오늘날의 혐한 도서가 탄생하기에는 그 역사성이 충분히 있다. 일본이 제국주의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기도 전인 메이지 초기부터 한국(조선 조선인)에 대한 인식이 오늘날 혐한 도서 속의 내용과 그리 큰 차이가 없음을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혐한 도서 구조 또한 메이지 초기의 조선관련 글과 유사하다. 즉 한국(인)에 대한 비난 내지 폄하 → 유교 및 속국주의 비난 → 조선과의 결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문에서 검토한 혐한 도서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한국인은 거짓말과 이간질을 잘 한다. 그리고 무능력하다. 둘째, 한국인은 주자학 일변도의 유교를 신봉한 결과 그 폐해가 심각하며 그 연장선상에 중국에 사대하는 속국근성과 비열함을 지니게 되었다. 셋째, 최근 한일관계가 험악해지고 교착상태가 장기화됨에 따라 한국을 ‘반일국가’, 한국의 주장을 ‘반일행동’으로 일방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넷째, 한국을 대상으로 논지를 전개하다가 뜬금없이 중국을 비난하는 글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한중을 싸잡아 비난하다. 그리고 결론으로 한국과 거리를 두거나 관계를 맺지 말자고 한다. 한일관계 개선의 실마리는 한일 양국의 언론 매스컴이 상대방의 부정적인 측면을 부각시켜 국민을 오도하는 행태를 지양하고 긍정적인 측면, 장점 등을 전달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 필요가 있다. This paper aims to examine Japanese anti-Korean books in a historical context. There is sufficient historicality for today"s anti-Korean books to be born. It can be seen in Yukichi Fukuzawa"s Datsu-A Ron(脱亜論) that Japan had inculcated the anti-Korean awareness since the early Meiji period. In addition, the structure of the anti-Korean books is similar to that of texts concerning Chosun in the early Meiji period. It has the following logic: criticism or denunciation of Korea (and its people) → criticism of Confucianism and vulgarism → Japan ought to separate itself from Chosun. The characteristics of the anti-Korean books can be summarized as follows. First, Koreans are good at lying, mischief-making, and incompetent. Second, as a result of their one-sided belief in Zhu Xi’s doctrine as the orthodox interpretation of Confucianism, Koreans incurred a serious harm, and as an extension of it, they had an attitude of subjugation and meanness toward China. Third, as Korea-Japan relations have recently deteriorated with no progress made, Korea is unilaterally defined as an anti-Japanese nation and Korea"s claims as ‘anti-Japanese actions’. Lastly, there are many articles where they criticize China at once while they are denouncing Korea. Denouncing both countries strengthens their deep-seated antipathy that Japan should distance itself from Korea, or not make relationships with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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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개화파(朝鮮開化派)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쓰키아시다쓰히코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2 한국학연구 Vol.0 No.26

        본 논문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에 대한 이해, 그리고 조선개화파와 그 사상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기 위해서, 조선개화파와 후쿠자와의 관계에 관해 정리함과 동시에, 앞으로의 연구의 진전을 위해 몇 가지 문제제기를 시도하고자 한다. 후쿠자와는 1880년 조선개화파와의 교류가 시작됨과 동시에 조선의 ‘독립’에도 강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일본이 무력을 행사해서라도 조선을 ‘개조’하여 ‘독립’을 완수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청의 朝貢國의 지위에 있던 조선에서, 김옥균 등 ‘독립’을 부르짖은 급진개화파의 사상형성에는 후쿠자와의 ‘조선개조론’과의 관련성이 있었음은 틀림없다. 또한 김옥균 등이 갑신정변을 계획ㆍ실행함에 즈음하여, 후쿠자와로부터 얼마만큼의 협력이 있었는가, 현재의 단계에서 이를 단언할 수는 없지만, 앞으로 더욱 연구가 심화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김옥균이 일본망명 이후 저술한 『甲申日錄』의 사료적 가치의 문제와도 관련된다. 또한 본 논문은 후쿠자와의 「탈아론」에 관해서, 그것이 갑신정변 이후의 조선을 둘러싼 정세변화와 밀접히 결부된 담론이었음을 명백히 했다. 조선개화파의 사상은 갑신정변 후에 체계화를 이루는데, 여기에는 후쿠자와의 저작물로부터 적지 않은 영향이 있었음이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지적되어 왔다. 그러나 본 논문이 명확히 한 것처럼, 양자의 사유양식에 상당한 차이가 있었음도 사실이다. 한일비교 근대사상사 연구의 발전을 위해서, 조선개화사상과 후쿠자와 사상의 비교는 앞으로 더욱 연구를 전개시켜 가야 할 과제이다. 本論文は、福沢諭吉の「脱亜論」に対する理解、および朝鮮開化派とその思想に対する理解を深めるために、朝鮮開化派と福沢の関係について整理するとともに、今後の研究の進展のためにいくつかの問題提起を試みるものである。 福沢は1880年に朝鮮開化派との交流が始まるとともに、朝鮮の「独立」にも強い関心を持つようになり、日本が武力を行使してでも朝鮮を「改造」して「独立」を完遂させなければならないと主張した。 清の朝貢国の地位にあった朝鮮で、金玉均ら「独立」を唱える急進開化派の思想形成に、福沢の「朝鮮改造論」との連関性があったことは間違いない。 また、金玉均らが甲申政変を計画・実行するに際して、福沢からどれほどの協力があったのか、現在のところ断言はできないが、今後さらに研究が深められるべきである。 これは、金玉均が日本亡命後に著した『甲申日録』の史料的価値にかかわる問題にも繋がる。 さらに、福沢の「脱亜論」は、甲申政変後の朝鮮をめぐる情勢変化と密接に結びついた言説であることも本論文は明らかにした。 朝鮮開化派の思想は、甲申政変後に体系化を見るが、そこには福沢の著作物から少なくない影響があることは比較的早くから指摘されていた。 しかし、本論文が明らかにしたように、両者の思惟様式には相当な差異があることも事実である。 日韓比較近代思想史研究の発展のために、朝鮮開化思想と福沢の思想の比較を今後さらに研究を進めて行く必要が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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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半井桃水の政治小說の意義

        전엔자 한일군사문화학회 2010 한일군사문화연구 Vol.9 No.-

        日本の近代史は戰爭と切り離しては考えられない。1894年·1895年の日淸戰爭、1904年·1905年の日露戰爭、續いて1914年から1918年にかけての第一次世界大戰、そして1931年からはじまる15年戰爭としての日中戰爭·太平洋戰爭などの對外戰爭を起こしてきた。このように、日本の近代文學を考える際に、國民の精神と物質の兩面にわたって多大な影響を及ぼした戰爭の問題は避けることができないのである。しかし、戰爭と近代文學との關わりは、それ自體を直接主題としてあまり掘り下げられることはなく、近代文學史の總體からみればまだまだであると思われる。文學との關係においては、あくまで戰爭を對象として見據えつつ作品の內部に立ち入り、時代背景を踏まえて考察する。本稿では、半井桃水が近代の初期に政治小說を書いていたことの意義を再評價したい。半井桃水は明治初年から20年までの啓蒙期において、ジャ―ナリストとして活躍した。?口一葉の師として知られているが、桃水は日朝關係において見逃し難い見識を持っていた。半井桃水の初期の小說に『胡砂吹く風』があり東京朝日新聞に1891年から1892年まで連載している。韓國古典小說『春香傳』と『九雲夢』の手法を倣ったこの作品は主人公が日朝混血아で、朝鮮半島の獨立に手を貸して日淸韓の三國同盟を結ばせた上で英露の侵略を防ぐという、政治小說であった。そして、日淸戰爭前の周邊で繰り廣げられた日淸韓の出來事を踏まえた續編が見たいという讀者の要請により『續胡砂吹く風』を1893年から連載したが、桃水の理想は時代に?弄され崩れていき作品は中斷されたまま未完に終わってしまう。半井桃水の思いは、極東アジアの朝鮮·中國·日本が如何にすれば西歐の植民地と化せず、獨立して存續できるのかというものであった。同じような問題提起をした作品に1910年に旅順刑務所で執筆された安重根の『東洋平和論』がる。この作品は未完に終わってしまっているが、半井桃水の『胡砂吹く風』とともに現代日本につきつけられている問題性を持った作品と考えているので、福澤諭吉や夏目漱石の作品とともに比較檢討す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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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유교인식

        미야지마히로시 한국실학학회 2012 한국실학연구 Vol.0 No.23

        This paper will critically examine the understanding of Confucianism of Fukuzawa Yukichi(1835-1901), who was one of the leading enlightenment thinkers and is still highly regarded in Japan. He was born into a low-ranking samurai family. From an early age, he started to learn Chinese and developed some knowledge of Confucianism. Evidence for this can easily be found in his writings in which he often used Confucian terms when he introduced Western ideas or studies and when he translated new concepts into Japanese. Nevertheless, he took Confucianism as the biggest obstacle to the development of Japanese civilization, that is, westernization, and consequently attacked it throughout his life. He took this stance towards Confucianism because he only understood it in its pre-Tang dynasty form. He therefore failed to understand so-called Neo-Confucianism, which was formed after the Song Dynasty. He considered Japanese Confucianism during the Tokugawa period as the original form and did not know about Confucianism in China and Korea. This understanding of Confucianism led him to harbor negative perceptions about China and Korea. His famous essay "Datsu-A ron(Escape from Asia)" published in 1885 is directly related to his negative understanding of Confucianism. There are various views on Fukuzawa but in terms of his perception of Confucianism, they are the same as that of Fukuzawa himself. One of the most significant examples is the understanding of Confucianism of Maruyama Masao, who has exerted great influence on the study of Fukuzawa. 이 논고는 근대 일본의 대표적인 계몽사상가이자 지금도 일본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에 대해서 그의 유교인식을 검토한 것이다. 하급 무사 집안에서 태어난 후쿠자와는 어릴 때부터 한문을 배웠고 유교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교양을 갖고 있었다. 그가 서구의 사상, 학문을 일본에 소개할 때에도 새로운 개념을 번역하는데 있어서 유교적인 용어를 많이 사용했다는 사실을 그의 저작 중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일본의 문명화=서구화에 있어서 유교를 최대의 장해물로 삼고 평생 동안 유교를 공격했었는데, 그 원인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즉 그가 이해하던 유교는 주로 당나라시대 이전의 유교에 머무른 것으로 송나라시대 이후의 유교, 이른바 신유교에 대해서는 거의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는 사실과, 토쿠가와 시대의 일본 유교를 곧 유교 원래의 모습으로 이해함으로써 같은 시기 중국과 한국의 유교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유교 인식이 그 당시의 중국과 한국에 대한 인식을 대단히 부정적인 것으로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되는데, 그의 유명한 '脫亞論'도 이러한 유교 인식과 깊은 관계를 가진 것이었다. 후쿠자와에 관해서는 지금도 그 평가를 둘러싸고 여러 의견이 존재하지만 지금까지 후쿠자와 연구에 있어서도 유교에 관한 인식이라는 측면에서는 후쿠자와의 그것과 차이가 없다. 그 대표적인 경우로서 후쿠자와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온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의 유교 이해를 들 수 있다는 것도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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