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검색결과 좁혀 보기

      선택해제
      • 좁혀본 항목 보기순서

        • 원문유무
        • 음성지원유무
        • 원문제공처
          펼치기
        • 등재정보
        • 학술지명
          펼치기
        • 주제분류
          펼치기
        • 발행연도
          펼치기
        • 작성언어
        • 저자
          펼치기

      오늘 본 자료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더보기
      • 무료
      • 기관 내 무료
      • 유료
      • KCI등재

        일반논문 : 김명희(金命喜)와 청조(淸朝) 문사(文士)들의 척독(尺牘) 교류(交流) -『척독장거집(尺牘藏거集)』을 중심으로-

        천금매 연민학회 2010 연민학지 Vol.13 No.-

        본고는 최초로 척독집 『尺牘藏거集』의 내용과 가치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시도하였다. 이 척독집은 金魯敬, 金命喜가 淸朝 문사들로부터 받은 척독을 모아 편찬한 필사본이다. 현재 서울대 규장각에 유일본으로 소장되어 있다. 이 척독집에는 청조 문사 吳嵩梁, 周達, 葉志詵, 陳克明, 張深, 奏헌, 期葉琛, 汪喜孫, 劉喜海, 葉繼雯, 繆紹薪, 劉식, 繆博振, 陳用光 등 14명의 척독 28편이 수록되어 있다. 김노경에게 보낸 척독이 6편이고 김명희에게 보낸 척독이 22편이다. 이 척독들은 연경에 있음 때에 보낸 것도 있고 귀국 후에 보낸 것도 있다. 그동안 김노경과 김명희는 문집도 전하지 않고 연행록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교류의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웠고 지금까지 그들에 대한 연구는 미비하였는데 『尺牘藏거集』는 이 자료의 공백을 메워주고 있다. 이 척독집은 김명희와 청조 문사들 간의 문화교류, 나아가 김정희 형제, 부친 김노경까지 포함한 김씨 가문과 청조학단 간의 긴밀한 교류와 인맥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해준다. 무엇보다 19세기 초기 조선과 청조 학자들 간의 다양한 문화교류를 연구함에 있어 도움을 주는 자료로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 본고에서는 『尺牘藏거集』에 수록된 김명희에게 보낸 편지를 중심으로 김명희와 청조 문사들의 교류양상을 살펴보았다. 김명희는 1822년 동지사행의 정사인 부친 김노경을 따라 연경에 가서 吳嵩梁, 張深, 汪喜孫, 劉식 등등 많은 청조 학자 문인들과 교유하였으며 귀국 후에도 지속적인 척독교류를 하였다. 척독을 통한 양국 문사들의 교류를 살펴본다면, 청조 문사들의 편지는 안부가 위주이고, 김명희에 대한 깊은 우정과 그리움이 절실하게 깃들어 있다. 김명희와 청조문사들은 편지 왕래를 하면서 또한 서적, 금석문, 서예 및 기타 물품의 교류도 진행하였고, 일부 청조문사들은 편지에서 자신들의 문학관 시론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피력하기도 하였다. 또한 편지 속에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에 대한 평가와 요청, 경학과 시문에 대한 평가도 있어 아우 김명희를 통한 추사와 청조 문사들간의 교류를 확인할 수 있다. 김명희 일가족이 청조 문사들과 진행한 문화교류를 통해 한중 양국간의 우의과 이해를 증진시켰으며 양국 문화가 상호 전파되었으며 특히 조선의 문화적 위상을 높이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本文初步考察了《尺牘藏거集》的內容和價値, 倂以此資料考述了朝鮮金命喜和淸朝文人之間通過尺牘所進行的廣泛的文化交流。≪尺牘藏거集》收錄了淸朝文人寫給金魯敬和金命喜父子的尺牘, 這本尺牘集現收藏在首而大學奎章閣, 是抄本一卷。集中收錄了淸朝文人吳嵩梁, 周達, 葉志詵, 陳克明, 張深, 秦헌,期葉琛, 汪喜孫, 劉喜海, 葉繼雯, 繆紹薪, 劉식, 繆博振, 陳用光等14名的尺牘28篇。其中有6篇是寫給金魯敬的, 22篇是寫給金命喜的, 這些尺牘從內容上看有些是在北京時寫的,更多的是金命喜歸國之後寫的, 可以看出韓中文人之間的深厚友誼和長久的交流。尺牘藏거集》可以補充有關金命喜資料缺乏的空白, 對於硏究金命喜與淸朝文人的交流以及金命喜父子兄弟一家人與淸朝學界的緊密聯系和人際關系提供重要資料, 通過這本尺牘集可以更進一步考察到19世紀韓中兩國學者之間的廣泛的文化交流。他具有寶貴的資料價値。本文以《尺牘藏거集》爲主要資料, 考述了金命喜和淸朝文人之間的交流。金命喜在1822年근隨父親金魯敬去過淸朝首都北京, 那里結識了흔多淸朝文人, 倂與他們親密交遊。金魯敬是秋史金正喜的父親, 金命喜是秋史的弟弟。金正喜早在1809年근隨金魯敬來京, 與翁方綱, 阮元等淸朝文人交遊而盛名遠播, 흔多淸朝文人仰慕他, 因此金命喜入燕時也受到了熱情款待。歸國後也不斷地書信往來, 進行了廣泛長久的交流。從淸朝文人的此尺牘中可以看到對金命喜的深厚友情和眞切思念。還可以了解到他們通過尺牘進行了詩論和文學觀方面的學術交流, 進行了詩文、書畵、書籍、金石文等方面的文化交流。淸朝文人的尺牘中還涉及不少有關金正喜的內容, 由此可以看到金命喜, 及其一家人與淸朝文人之間的密切的廣泛的文化交流。這種文人間的個人交流, 不但加深了韓中兩國的友誼, 兩國的文化也得以互相傳播。

      • KCI등재후보

        楚亭朴齊家與淸文人文學交遊考述

        서의 영남대학교 중국연구센터 2012 중국과 중국학 Vol.17 No.-

        초정 박제가는 18세기 후기 조선의 저명한 문학가이며 실학자이다. 뛰어난 재능으로 정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4차례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는적극적으로 수많은 청조문사들과 접촉하고 교류하였다. 그들의 문학, 학술적 교류는 선명한 특징을 갖고 있으며 당대 청조 학계는 물론 조선문단에도 큰 영향을 끼쳤으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박제가와 청조 문인들의 교류는 다음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박제가는 18세기 조선 문인들 가운데 청조 문인들과 교류한 시간이 가장 길고 교류 범위도 가장 넓은 지식인이다. 4차례의 연행을 통해 그가 교류한 청조학자(척독 또는 시문으로 교류한 청조문인 3명포함)는 모두 168명이다. 둘째, 박제가와 교류한 청조 문인 중에는 당시 청조 문단의 걸출한 학자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紀昀, 李鼎元, 李驥元, 祝德麟, 孫星衍, 錢東垣, 洪亮吉, 陸費墀, 邵晉涵 등등이다. 셋째, 박제가는 특별히 청조 학자들과 시가이론, 시가 창작 방면의 교류를 중시하였다. 박제가가 청조 문인들과 가장 많이 교류한 내용이 바로 시가이다. 박제가와 청조 문인의 唱和는 총 24회에 달하고 그들이 주고받은 贈詩는 237수(1800년 이후에 창작한 시를 포함)에 달한다. 박제가와 청조 문인의 교류는 당시는 물론 후세의 조선과 청조에 큰 영향을 주었다. 첫째, 박제가는 중국문학, 특히 청조 당대 시인 및 작품을 조선에 소개하였고 동시에 조선의 당대 시인 및 작품들을 중국에 전파하였다. 우선, 박제가는 “회인시” 형식으로 청조의 저명한 문사들을 조선문단에 소개하여 청에 대한 인식을 넓히도록 하였다. 다음, 박제가는 중국에 사행가기 전과 4차례의 사행을 통해 자신과 조선의 친구들의 작품 및 조선의 일부 문헌들을 청조에 소개하였다. 이는 조선 문인들의 명성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청조 문인들이 조선 문인 및 문화에 대한 이해를 추진하였다. 둘째, 박제가와 청조 문인들이 구축한 학술인맥은 19세기 김정희와 청조문사들의 깊은 교류를 위해 길을 열어놓았다. 박제가나 김정희 모두 청조 학술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으며 조선의 학술적 시야를 넓히고 학술을 발전시키기 위해 크게 공헌하였다.

      • KCI등재

        1885년 曹廷杰의 만주 답사 —청말 漢人 지식인의 만주 인식과 邊政 개혁론—

        송인주 만주학회 2020 만주연구 Vol.- No.30

        This research clarifies the process of modernization in Manchuria Frontier in the Late Qing era through Cao Tingjie(曹廷杰)‘s investigative travels in Manchuria, 1885, and eventually, investigates how modern Chinese state changed Manchuria into his north-eastern frontier. Cao Tingjie served as a local civilian officer of Jilin and as historian during the late Qing Era. After 1860, the Russian Empire and colonized Amur basin and threatened the Qing’s sovereignty in Manchuria. For this reason, in 1885, Cao Tingjie investigated Qing-Russia Manchurian frontier and he recorded the reform agenda of the frontier defense in Manchuria for Qing court. In his reform agenda, Cao tingjie suggested economic reforms in Manchrian Frontier through the cultivation of wild lands and operation of gold mines in Amur River basin. Finally, Qing court adopted Cao tingjie’s reform agenda and started the policy of Manchurian frontier reformation in 1890s, including the operation of gold mines. Cao Tingjie’s investigation and records on Manchuria are rich resources on the Qing Dynasty’s modernization policies in Manchuria Frontier and Han Chinese scholars’ plans to evolve the Qing Empire’s birthplace into a ‘Chinese modern state’s north-eastern frontier. Consequently, Cao Tingjie’s investigative travel has importance for understanding Qing Empire’s Modernization policy in Manchuria. 본고는 1885년 조정걸의 만주답사를 통하여, 1880년대 청조의 만주 지역 변경 정책의 전환에 대해서 고찰하고자 한 글이다. 19세기 청조의 만주 지역 변경 정책은 대내적, 대외적으로 위기를 맞는다. 대외적으로 러시아 제국이 극동지역으로 동진하면서, 1860년 북경 조약을 통해 청조는 우수리 강 이동 연해주를 러시아에 할양한다. 대내적으로는 청조의 봉금정책이 이완되면서, 한인 유민들이 대거 만주로 유입되었고, 이로 인해 만주에서의 수렵 경제 시스템을 유지하려 했던 청조의 의도는 좌절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청조는 만주 변경에 대한 개혁 작업을 모색하게 되었고, 1885년 길림 당국은 조정걸을 청-러 변계 지역로 파견하여 그 곳의 정세를 조사하도록 하였다. 조정걸은 청말 만주 지역 역사를 정리한 역사학자이자, 1880~90년대 길림 지역의 행정을 책임졌던 실무 관료이기도 하였다. 그는 1885년 3월부터 9월까지 청과 러시아의 변계 지역인 우수리 강 유역과 흑룡강 하류 유역을 답사하였다. 그는 답사 과정에서 만주 변경 지역에서의 러시아의 형세와 식민 정책뿐만이 아니라, 만주 변경 지대의 한인, 조선인, 일본인 등 다양한 사람들의 거주 양상, 청조가 개국하는 과정에서 흑룡강 유역을 지배했던 흔적 등 다양한 사항들을 견문하였다. 이러한 실증 답사를 통해 조정걸은 만주 지역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고, 러시아의 진출로 위기에 봉착한 청조의 만주 지역 지배 체제를 어떻게 전환시킬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었다. 1886년 조정걸은 그가 만주 답사에서 조사한 것들을 토대로 16개조의 개혁안을 청조에 건의하였다. 그 주요 내용들을 보면 한인을 활용하여 토지를 개간할 것, 유명무실화된 흑룡강 지역 변경 부락들의 담비 가죽 공납을 중지시킬 것, 금광을 개발하여 국부를 증대시킬 것 등이다. 이러한 개혁안들은 그동안 청조가 전통적으로 만주 지역을 지배해 오던 방식을 사회, 경제적인 구조에서부터 전환시키자는 것이었다. 즉 팔기제도와 수렵 채집 경제 위주의 청조의 전통적 만주 지배 구조를 한인 중심의 토지 개간과 금광 개발 등을 골자로 한 구조로 전환하자는 것이었다. 조정걸의 개혁안의 일부는 청조가 받아들이지 못한 것도 있지만, 한인 이주를 통한 토지 개간과 금광 개발 등은 1880~1890년대 길림 당국에서 비교적 활발히 추진되었다. 청조는 이러한 통치구조 전환을 통해서 만주 지역을 제국형 근대국가로서의 청조의 ‘동북 변강’으로 전환시키고자 하였다. 그러한 점에서 1885년 조정걸의 만주답사와 그에 따른 16개조의 만주 통치 개혁안은 청대 변경사와 만주사 차원에서 의미가 있다고 보인다.

      • KCI등재

        19世紀末 淸朝의 基督敎 政策 變化―‘宣敎 8條 章程’(1871)과 陳其璋의 上奏에 대한 總理衙門 上奏文(1896)의 비교를 중심으로 ―

        최병욱 명청사학회 2007 명청사연구 Vol.0 No.28

        본 논문은 總理衙門이 1871년에 각국 공사에게 제출한 ‘宣敎 8條 章程’과 御史 陳其璋의 上奏文에 대한 1896년의 총리아문 반박 상주문을 비교 검토함으로써 19세기말 국제관계 인식의 발전에 따른 청조의 기독교 정책 변화를 살펴보았다. 선교 8조 장정은 天津敎案 이후 교안에 대한 구체적인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1871년에 청조가 입안하여 각국 공사에게 제출한 것으로 당시 양무관료들의 기독교에 대한 정책이 총체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1896년의 총리아문의 상주문은 1890년 이래 長江 유역에서 많은 교안이 발생하자 이것의 대책으로 御史 陳其璋이 상주한 것에 대한 총리아문의 반박 의견이다. 陳其璋의 상주문은 1871년에 총리아문이 제시한 선교 8조 장정과 유사한 내용이지만, 총리아문의 상주문은 이전과는 다른 기독교에 대한 대책을 보이고 있다. 1896년의 총리아문의 상주문은 北京條約 체결 이후 다양한 경험속에서의 敎務 처리와 교안 대책의 총체적이고 압축적인 기독교에 대한 정책으로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淸朝는 道光․咸豊 시기에 허용은 하되 제한된 기독교 금지 정책으로 일관했으며, 天津․北京條約 체결 이후에는 內地 선교가 허가됨에 따라 점차 허용된 범위 내에서 기독교 선교를 인정하며 그에 맞는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제기된 선교 8조 장정을 보면, 비록 기독교의 선교를 인정하고 명목상의 보호를 하고 있기는 하나, 전통적인 통제방식으로 기독교를 관리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선교 8조 장정을 제기한 1871년에 청조는 천진교안으로 인한 謝罪 사절 崇厚의 파견을 계기로 국제질서에 참여하게 되었고, 1880년까지는 외국과의 관계가 대표부를 유지할 만큼 개선되었다. 또한 청조 관리들도 국제법을 배워 외국과의 관계에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청조는 점차 근대 국제체제인 條約體制를 인식하고 국제사회의 일원임을 깨닫게 되면서 기독교 문제도 조약체제 속에서 해결하고자 했다. 또한 교안의 원인이 된 프랑스 保敎權을 배제하기 위해 교황청과의 외교관계를 수립하고자 하는 등 외교관계의 개선을 통해 기독교 문제를 풀어가려는 노력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나온 陳其璋의 상주를 반박한 총리아문의 상주문을 보면 청조가 점차 외교관계․조약․국제법 속에서 기독교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청조의 기독교 정책은 차츰 기독교와 선교사를 조약의 틀에서 인정하면서 변화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고, 조약 개정의 노력을 통해 선교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따라서 위와 같은 변화과정을 본다면, 청조가 전혀 변화되지 않는 기독교 정책을 실시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오히려 청조의 기독교 정책 역시 국제질서 인식의 발전속에서 부단한 변화를 보여주었다는 것을 설명해 주고 있다. 하지만 청조는 義和團運動 이후 조약 개정의 시기에도 시종 기독교를 왕조 체제 안에서 단속해야 할 종교로 여겼으며, 전통적 체제 하에서 기독교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 KCI등재

        연구논문 : 淸末 "韓淸境界地域" 行政體制 構築과 韓人 管理 -輯安,臨江,長白 地域을 중심으로-

        김택경 동국사학회 2013 동국사학 Vol.55 No.-

        본고는 淸末 鴨綠江 上流의 韓淸境界地域, 특히 輯安·臨江·長白 지역에서 淸朝에 의해 전개된 行政體制의 構築 過程과 韓人 管理의 樣相을 領土化라는 시각에서 살펴보았다. 압록강 중·하류 지역은 일찍이 19세기 70년대 중반 청의 행정기구가 설치되었고, 중국 내지로부터의 이주와 개발이 비교적 원활하게 추진되었다. 이에 비해 지리적 요인으로 인해 접근이 제한되었던 집안·임강·장백 지역은 20세기 초엽에 들어서야 청의 행정기구가 설치되었고, 이주와 개발 역시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19세기 중반 이후 집안·임강·장백 지역으로의 韓人의 이주는 지속되었고 규모도 점차 확대되었다. 한인의 이주로 이 지역의 성격은 크게 일변했다. 한인의 문제가 점차 수면에 떠오르게 되자 1902년 청조는 압록강 대안지역에 행정기구를 증설했다. 이에 따라 懷仁縣에서 집안현을, 通和縣에서 임강현을 분리시켰다. 1907년에는 ‘제2의 간도사태’를 방비하는 목적에서 임강 동쪽 長生堡·慶生堡와 백두산 龍岡 북쪽 지역을 관할하는 長白府가 설치되었다. 본고는 지방정부가 한인을 관리하는 구체적인 기제로 警察制度와 鄕約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지방정부는 근대적 경찰제도의 도입을 통해 이전 형식적이고 간접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던 한인의 관리방식을 직접적인 통제방식으로 전환시켰다. 향촌의 자치조직인 향약 역시 지방정부의 입지에 따라 재편되었다. 지방정부는 한인 향약을 재편함으로써 관할구역을 명확히 하고, 한인의 이주를 제한하려고 했다. 이와 같이 지방정부는 경찰제도의 설립과 향약의 재편을 통해 한인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한청경계지역에서 한인은 청조와 大韓帝國, 日本 삼국의 힘이 교차했던 문제의 초점이었다. 1899년 청은 대한제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하여 외교관계를 수립했으나, 한청경계지역에 이주한 한인을 어떻게 규정하고 관리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義和團 事件을 계기로 대한제국은 李容泰, 徐相懋 등을 파견하여 향약을 설치했으나, 청의 반발과 대한제국의 외교권 상실로 이들 향약은 결국 폐지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국이 되면서 輯安·臨江·長白 지역의 국제적인 정세는 또다시 일변했다. 奉天省 政府는 한인을 ‘화근’으로 인식했다. 일본이 한인의 보호를 구실로 청의 주권을 침해하거나 외교마찰을 일으킬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1907년 ‘間島問題’가 본격화되고 1910년 한일합방이 일어나면서 지방정부로서는 한인을 효과적으로 관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간도문제’의 확대를 우려한 봉청성 정부는 한인의 국적관리를 위한 규정을 신설하고 필요한 법제를 확충하는 등 한인에 대한 관리를 보다 강화했다. 本稿以領土化爲視角考察了淸末鴨綠江上遊的韓淸境界地域,尤其是輯安、臨江與長白這三個地區,行政體制的設置過程與韓人的管理情況. 在鴨綠江中下流地區,19世紀70年代中期已開始設立淸朝的行政機構,竝且中國內地而來的移民與土地開墾情況較爲活躍. 與此相反,因地理要素而難以進入的輯安、臨江和長白三個地區在進入20世紀初期以後,開始設立淸朝的行政機構,移民與開發才逐漸推行. 19世紀中期以來,闖進鴨綠江上流地區的韓人移民繼而不斷,其規模也愈來愈擴大. 由于韓人的移民,此地區的性質有了番天覆地的改變. 隨著韓人問題的表面化,1902年淸廷決定在鴨綠江對岸地區增設行政機構. 從懷仁縣和通化縣分別分設輯安縣和通化縣. 至1907年,爲防止“第二間島事態”的擴散,設置長白府,用之管轄臨江東長生堡、慶生堡地區與長白山龍崗北邊地區. 本稿作爲地方政府管理韓人的具體機制,考察了警察制度與向約. 地方政府通過警察制度的實施,把原有的形式化以及間接化的手段轉換成直接控制韓人的管理方式來實施. 向村自治組織的向約按照地方政府的意圖也進行改編. 地方政府通過韓人向約的改編,明確了管轄區域與權力範圍,竝限制了韓人的移民. 如此,地方政府利用警察制度與向約的機制將轉變對韓人的强度控制. 韓人是淸朝、大韓帝國與日本三國力量在韓淸境界相互聚焦的中心點. 1899年淸朝與大韓帝國簽訂通商條約而成立外交關系,但針對搬遷于韓淸境界地區的韓人,如何認同,즘樣管理,兩國尙未作出共同合意. 大韓帝國以義和團事件爲契機,派遣李榮泰和徐相懋等人設置向約,但由于淸朝的抗議與大韓帝國外交權的喪失,這些向約最終裁撤. 1905年,乙巳條約導致大韓帝國淪爲日本的保護國,引起輯安、臨江與長白三地區的國際形勢一大變動. 奉天省政府把韓人視爲“禍根”,認爲日本借用保護韓人爲由,會侵害淸朝的主權,挑起外交上的爭端. 1907年“間島問題”的沸騰與1910年韓日合邦的發生,迫使地方政府不得不有效地管理韓人. 憂慮間島問題擴大的奉天省政府制訂韓人國籍管理的規定,擴充有關法制,進一步地强化韓人管理.

      • KCI등재후보

        건륭연간(乾隆年間) 청조(淸朝)의 대외 전쟁과 제국체제 - 제1차 준가르 공격(1755) 사례를 중심으로 -

        이준갑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09 한국학연구 Vol.20 No.-

        본고는 중국역사상 유례가 없는 大一統을 달성한 건륭연간의 청대사회의 특성을 帝國體制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파악해 본 것이다. 淸朝의 帝國體制란 황제와 그의 수족인 관료집단과 군대라는 주체가 淸이 세계질서의 중심이라는 사상을 대내외적으로 전파하며 이를 수용하지 않는 국가나 민족에 대해서는 무력을 비롯한 여러 가지 강제수단을 동원하여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장치였다. 乾隆 20년(1755)에 전개된 청조의 제1차 준가르 공격은 건륭연간 청조의 제국체제가 작동하는 구체적 면모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였다. 이 전쟁에서 청조는 滿蒙將帥들을 배치하고 ‘以蒙制蒙’, ‘以滿制蒙’의 원리에 입각하여 청조의 지배기구를 통해 대규모로 군량을 조달하고 군사력을 동원함으로써 승리할 수 있었다. 준가르인의 내분과 투항은 청군에게 승리를 안겨준 또 다른 원인이었다. 그러나 준가르를 분할하고 지배체제를 재편하려는 청조의 의도는 아무르사나의 반란으로 좌절되었다. 이에 건륭제는 준가르는 犬羊이나 다름없다고 낙인찍고 보이는 대로 죽이도록 명령했다. 帝國體制의 정점이자 柔遠之仁, 內外共主ㆍ天下大君으로 粉飾한 皇帝이자 汗은 군사력을 바탕으로 他者 대해 철저하게 자기와 같아지기를 강요하였던 것이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outline the characteristic of Qing society, especially the Qianlong emperor's regime when the two different societies, agricultural society and nomadic society were unified by one emperor at the greatest realm in the Chinese history. In this study I have suggested the notion of Qing empire system in order to understand Qing society in a macro viewpoint. It was composed of three parts. (1) the manpower : emperor, bureaucrats, army (2) the ideology : Qing is the center of the world order (3) the means -economic, cultural, military power which can force other countries or nation to follow the will of Qing. Empire system was the device which the manpower spreaded the ideology into other countries or nation through economic, cultural, military power. Qing's blow to Zunghar in 1755 was one the most obvious accidents which revealed the characteristic of Qing empire system.

      • KCI등재

        『皇淸職貢圖』의 ‘大一統’ 세계

        송인주(SONG, In-Ju) 한국사학사학회 2018 韓國史學史學報 Vol.0 No.38

        본 연구의 목적은 『皇淸職貢圖』를 통해, 청조가 어떠한 논리로 자신들의 ‘大一統’ 이념에 대해서 서술하고자 했는지 설명하는 것이다. 『皇淸職貢圖』는 건륭 연간 청조 황제에게 조공하러 온 外國과 夷狄들의 복식과 양태를 圖像으로 그리고, 그들의 역사와 풍속에 대한 정보를 서술한 서적이다. 『皇淸職貢圖』가 역사 사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갖는 것은 청조가 中國 內地의 非漢人系의 사람들을 어떠한 논리를 가지고 통치를 했는지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본 연구에서는 『皇淸職貢圖』 중에서도 특히 ‘四川’ 지역의 非漢人系 사람들에 대한 묘사를 살펴보았다. 四川 지역은 청조의 영역 속에서 漢人들의 거주 지역으로 구분되었으나, 티베트 계를 비롯한 다양한 종족들이 거주하고 있는 공간이었다. 청조는 그 이전의 중화왕조들처럼 사천 지역의 다양한 非漢人系 사람들의 자치권을 박탈하고, 그들을 강하게 통제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非漢人系 사람들은 漢人에게 거주지를 빼앗기거나, 동화되기도 하였다. 『皇淸職貢圖』의 四川 지역의 非漢人系 사람들에 대한 묘사를 보면, 청조는 이들을 夷狄으로 여겼으며, 교화되어야 할 대상이었다. 이러한 청조의 논리는 그 이전의 중화왕조가 夷狄들을 대한 태도를 그대로 계승한 것이었다. 청조의 황제는 만주인 군주였지만, 四川을 비롯한 中原에 거주하는 非漢人系 사람들에 대해서는 자신을 ‘中華王朝의 皇帝’로 드러낸 것이다. 이러한 『皇淸職貢圖』의 非漢人系 사람들에 대한 서술 방식은 중국 근현대의 ‘소수민족’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서술 논리로도 계승되었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examining how Qing Empire described its ‘The Great Unity(大一統)’ world in Illustrations of Tributaries of Qing Empire(皇淸職貢圖). Illustrations of Tributaries of Qing Empire described foreigners and barbarians who paid tributes to Qing dynasty on Qianlong reign. Specially, it is important that this document explains how Qing empire recognized and ruled non-Han Chinese ethnic communities in China proper. This study focuses on the structure of description about non-Han Chinese ethnic communities of Sichuan(四川) in Illustrations of Tributaries of Qing Empire In Qing period, Sichuan was not only the habitation of Han Chinese but also diverse non-Han Chinese ethnic communities including Tibetan people. Like the majority of Chinese empires, Qing empire also strongly controlled these non-Han Chinese ethnic communities, and many of them had been acculturated to Han Chinese culture. The description about non-Han Chinese ethnic communities of Sichuan in Illustrations of Tributaries of Qing Empire presents Qing empire’s attitude about non-Han Chines people of Sichuan. Qing empire saw them as “barbarians” and “the target of edification(敎化).” This Qing attitude succeeded to that of Chinese empires including Ming empire. Qing emperors were Manchu people and also “barbarian”, non-Han Chinese people who inhabited in China proper was that of ‘the emperor of Chinese dynasty.’ This attitude and way of description in Illustrations of Tributaries of Qing Empire was succeeded to historical and cultural narrative of Chinese modern historians about non-Han Chinese ethnic communities in China proper.

      • KCI등재

        후지츠카 치카시(藤塚鄰)의 漢學과 北學派硏究의 視座 : 淸朝考證學 및 東洋學과의 遠近

        송호빈 근역한문학회 2023 한문학논집(漢文學論集) Vol.65 No.-

        Chikashi Fujitsuka(1879-1948) obtained and studied many materials related to Korea-China exchanges, including Hwadongchangsujib(華東唱酬集). He claimed to be the last descendant of traditional study of the Chinese classics(漢學), and as a teacher within the modern academic system of Imperial University, he became a pioneer in the study on Bukhak / Beixue School(北學派硏究) centered on Kim Jeong-hui(金正喜). His achievements still have a significant impact on Korea-China exchange research to this day. Therefore, it is necessary to examine the meaning of his research in the history of Korean classical literature under the theme of Bukhak/Beixue School(北學) through measuring the distance from the philology of the Ching dynasty(淸朝考證學) and Oriental studies(東洋學). 후지츠카 치카시(藤塚鄰) 학문의 두 축을 이루고 있는 것은 秋史의 청조고증학 수용과 연찬을 중심으로 한 北學(한중교류)에 대한 연구, 그리고 論語 ․ 中庸 를 비롯한 경전 텍스트에 대한 문헌학적 연구이다. 그러나 그의 저술목록과 자료에 대한 정리는 여전히 미완이며 우리는 후지츠카의 경학 연구에 관한 성과에 크게 주목하지 않아 왔다. 그의 경학 연구는 그 관점과 방법이 북학(한중교류) 연구의 그것에 伏流하기에 우리는 이에 대한 검토를 소홀히 할 수 없다. 후지츠카의 경학은 漢學, 그 가운데서도 좁은 의미의 漢學 정확히는 淸朝考證學이었다. 그는 宋學과 漢學을 경학사의 전개나 경학의 방법에서 있어 대등한 것으로 보지 않았으며 청조고증학을 객관적․과학적인 학문으로 여겼다. 그가 이러한 관점과 방법을 취한 배경에는 東京帝國大學 한(문)학 전공의 커리큘럼(학풍)이 자리잡고 있다. 후지츠카의 청조고증학 지향은 경학(사)에 대한 담론에만 머무르지 않고 논어 주석서에 대한 분석 나아가 한중교류 관련 자료의 연구와 집필의 스타일에도 반영된다. 그가 경학 및 한중교류에서 보여준 이러한 학문 경향은 경학사의 전개, 그 線上에서만으로는 온전히 파악되지 않는다. 그의 한학은 帝國主義와 함께 탄생한 이른바 東洋學에 이끌리며 그 모습을 왜곡시키거나 자리한 위치를 옮겨갈 수 밖에 없었다. 그의 北京 유학과 京城帝國大學 부임이라는 학문적 轉機는 모두 ‘제국’의 팽창과 연동된다. 후지츠카가 비록 제국주의와 침략전쟁에 적극 부용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그의 한학은 동양학이라는 地域學 속에 배태되어 있는 우월한 ‘발굴자’로서의 관념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었다.

      • KCI등재

        일그러진 초상 -조선지배층의 강희제상(康熙帝像)-

        하정식 ( Ha Jung-shik ) 연세사학연구회( 구 연세대학교 사학연구회 ) 2017 學林 Vol.39 No.-

        조선 연행사신의 견문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康熙帝像은 실제에 가까운 영명하고 위대한 군주일까, 아니면 무능하고 부패한 昏君이나 夷狄의 왕일까? 정신적으로 저항하면서 조공에 참여한 사신은 강희제의 사람됨과 거둥, 정책이나 치적, 청조사회의 안정과 번영 등 현지에서 견문한 사실에 대하여, 실상을 왜곡하거나 비판적인 언어로 아주 짧게 기록하였다. 또 청조 멸망을 기원하는 사신의 의식과 바람[所望]도 투영하였다. 그렇게 강희제와 청조 사회에 대한 이미지는 만들어졌고, 일그러졌다. 어린 강희제는 황제 역할을 못하는 허수아비로, 청년 강희제는 방탕, 무절제하고 불안정한 군주로, 장년 강희제도 황음하고 유희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는 昏君으로 묘사하였다. 황제의 순행은 유람이라고 비판했다. 황제의 소박한 복장이나 검소한 생활, 간편한 거둥은 군주의 위엄과 君臣의 分을 모르는 오랑캐의 추장으로 해석하였다. 드물게 황제의 통치 능력과 치적을 인정하는 경우에도 부정적인 요소를 함께 끌어다 희석시켰다. 金昌業과 부베는 같은 시기, 같은 환경과 다른 환경에서 강희제를 소개하였다. 김창업은 강희제가 자질과 능력, 성실성으로 청의 번영을 일궈낸 위대한 군주이지만 夷狄의 왕이라고 묘사, 평가를 제한했다. 부베는 강희제가 타고난 자질, 열성적인 수양과 연마, 근검절약과 성실성 등 제왕의 덕을 두루 갖춘 영명하고 위대한 군주라고 다소 부풀려 표현했다. 둘 다 연행사가 왜곡한 이미지를 수정하기에 족하다. 연행사절은 어떤 환경에서 견문하고 기록하였을까? 실제와 거리가 먼 일그러진 皇帝像은 제도의 한계에서 오는 제한된 정보 때문일까, 아니면 특정한 의식의 소산일까? 연행사절의 정보 탐지에 일정한 제약은 있었지만, 황제상을 왜곡할 만큼 정보가 부실하거나 부족하지 않았다. 聞見을 결정짓는 요소는 주자학적 명분론에 바탕을 둔 崇明反淸論과 小中華의식이었다. `인조반정`은 원죄였고 견고한 굴레였다. 사신의 의식으로는, 청조중국은 결코 中華일 수 없고, 夷狄의 세계이어야 했다. 이런 反淸·自尊意識은 청국에 대한 탐구나 학습의 동기를 억제했다. 현지의 견문은 중화 멸망의 확인이거나, 황제와 청나라가 얼마나 非中華인가에 대한 탐색이었다. 中華를 구현해가는 청국이란 실제를 견문하고 나서, 기록에는 관념 속의 청국, 胡·夷狄의 나라 청국[當爲]으로 바꾸어 기록, 전파하였다. 강희제의 인품과 업적, 그리고 청조정권의 안정과 번영이라는 실제는 긴 시간 속에서 점차 뚜렷해졌다. 선명해진 실제 앞에서 `청국=이적의 나라`라는 당위는 점차 희미해져 갔다. 숙종은 崇明反淸의식의 유지, 강화를 위한 기억의 장치로 大報壇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청조 문물이 내뿜는 빛과 바람은 시간과 함께 쌓이면서 반청의식을 퇴색, 풍화시켜갔다. 뒷날 英祖는 대보단 의례를 확대, 강화하지만, 기억과 장치의 老朽化가 진행되면서 淸朝大國觀이 형성되어갔다. 개방과 팽창이라는 세계사적 조류를 조선은 작은 우물 안에 의지하여 막아내고자 하였다. The view of ruling class in Joseon on the Kangxi Emperor and the society of Qing dynasty based on experience of Emissaries was distorted untruthfully. It was distinctly contrasted with image of Kangxi Emperor observed by Kim Chnag-Eop and J. Bouvet. The distorted view on Kangxi Emperor did not be caused by the lack of information of Emissaries but the strong consciousness of anti-Qing dynasty. The Emissaries were strongly restrained by the idea of `respect for Ming dynasty and opposite against Qing dynasty`. As the ruling power of Kangxi Emperor and the prosperity and stability of Qing dynasty was verified, the consciousness of anti-Qing dynasty was lagged, accordingly Joseon prepared the installation of Daedodan for propagation and continued to adhere to the idea of `respect for Ming dynasty and opposite against Qing dynasty`. The modification of distorted views on Kangxi Emperor needed to long time and hard efforts.

      • KCI등재

        청말길림광무(鑛務)와변경지배재편 —협피구(夾皮溝)와 삼성(三姓)을 중심으로

        송인주 만주학회 2022 만주연구 Vol.- No.33

        This paper clarifies the relation between the mining policy in Jilin(吉林) province and the reorganization of the Manchurian frontier in Late Qing period, 1860~1912. Jilin, the north-eastern frontier of the Qing empire, changed after 1860s due to, because Russian invasion and the Han Chinese illegal infiltration. The Qing dynasty began reforms aimed at to exploiting mines in Jilin province. Both the Jiapigou(夾⽪溝) and Sanxing(三姓) mines were crucial to the expansion of state power of Qing. In Jiapigou, the Qing government had to defend against ‘gold bandits(金匪)’ including the ‘Han Bianwai(韓邊外).’ From the 1880s, the Qing government embraced Han Bianwai society estabilishng Huadian province( 樺甸縣) in Jiapigou in 1910. In Sanxing, Qing empire had already estabilished rule over Tungusic native tribes including the Heje(赫哲), from the 17th century These tribes paid tribute to Qing empire with sable. However, after the Russian invasion in 1860s, these tribes broke away from the Qing, The Qing tried to recover state power in the downstream of Amur, which included Sanxing. Exploiting the mines became a crucial means of recapturing state power in Sanxing. The exploitation also helped develop a hunting economy into a mining market in the region. Through the above investigations of Jiapigou and Sanxing, this paper reveals the role mining policies can play in reestablishing state power and how such policies mattered during the Qing’s dominion in Manchurian frontier. 본고는 청말(1860~1912) 길림 지역의 광무(鑛務)와 청조의 동북 변경 지배 재편의 상관성에 대해 규명하고자 한다. 청조의 동북 변경이었던 길림지역은 19세기 중엽 이후 러시아를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의 도전과 한인(漢⼈) 유민의 이주로 큰 변화를 맞게 되었고, 청조의 길림 지배도 위기를맞게 되었다. 청조는 동북 변경의 지배체제를 전환하는 과정 중에서 광산자원의 개발에 주목하게 되었고, 광산 개발과 통제를 통해 변경 통치를 재편하고자 하였다. 본고에서는 길림 지역의 협피구와 삼성의 광산 지역을 통하여 청말 광무와 동북 변경 지배 체제 재편 작업이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음을드러낸다. 협피구 광무의 사례를 통해서는 청조가 19세기 중엽 이후 청조의 길림 통치에 심각한 문제로 대두된 한변외(韓邊外)를 비롯한 금비(金匪) 세력을 어떻게 포섭하고, 국가의 행정력을 침투시키려 했는지 규명하고자한다. 또한 삼성 광무를 통해서는 청조가 전통적으로 수렵채집 경제 지역이었던 삼성을 비롯한 흑룡강 하류 지역을 광산 개발을 통해서 어떻게 사회경제적으로 새롭게 변화시키면서 행정력을 강화시키려고 했는지 규명코자 한다. 그러한 두 지역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본고에서는 청말 동북 변경 지역체제 전환 작업에서 광산 개발과 통제 정책이 매우 중요한 요소였음을 밝히고, 청말 동북 변경 지배 체제 재편의 특수성에 대해서도 밝히고자 한다.

      연관 검색어 추천

      이 검색어로 많이 본 자료

      활용도 높은 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