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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배(Lee Dongbae) 부경대학교 인문사회과학연구소 2017 인문사회과학연구 Vol.18 No.2
이 논문은 비평적 담론 분석 방법을 사용하여 조총련의 국어교과서에 나타난 정치 이념과 정체성을 조사하였다. 분석 결과는 조총련의 정체성이 북한으로 치우쳐 있었고 북한에 대한 강한 소속감이 묘사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북한은 조총련 아동들 이 방문해야 할 이상적인 장소로 묘사되었고 조총련 멤버들이 북한을 위해 자원봉사 자로 일하는 것은 애국적인 행동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총련의 아동들은 북한의 아동들로 자라는 비젼이 제시되고 있었다. 아울러 조총련 학교에 대한 그들의 강한 애착심이 묘사되고 있었다. 집에서 조총련 학교가 멀리 있어도 충성스럽게 조총 련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또한 학생들은 조총련이 세운 조선 대학교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조총련의 산하기관과 동포들을 돕는 것을 강조하며 과외 활동으로 조총련이 운영하는 동포 생활상담소 지사를 방문하는 것을 기술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조총련 교과서는 북한의 김일성을 찬양하고 있으며 그가 태어난 만경대를 방문하여 그에 대한 존중심을 갖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이 논문은 비평적 담론 분석 방법을 사용하여 조총련의 국어교과서에 나타난 정치 이념과 정체성을 조사하였다. 분석 결과는 조총련의 정체성이 북한으로 치우쳐 있었고 북한에 대한 강한 소속감이 묘사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북한은 조총련 아동들 이 방문해야 할 이상적인 장소로 묘사되었고 조총련 멤버들이 북한을 위해 자원봉사 자로 일하는 것은 애국적인 행동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총련의 아동들은 북한의 아동들로 자라는 비젼이 제시되고 있었다. 아울러 조총련 학교에 대한 그들의 강한 애착심이 묘사되고 있었다. 집에서 조총련 학교가 멀리 있어도 충성스럽게 조총 련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또한 학생들은 조총련이 세운 조선 대학교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조총련의 산하기관과 동포들을 돕는 것을 강조하며 과외 활동으로 조총련이 운영하는 동포 생활상담소 지사를 방문하는 것을 기술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조총련 교과서는 북한의 김일성을 찬양하고 있으며 그가 태어난 만경대를 방문하여 그에 대한 존중심을 갖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이주철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2015 사총 Vol.85 No.-
In the late 1970s, North Korea was suffering economic difficulties due to the payable loans and trade costs to the West. To address this challenge, the North Korean regime implemented the Law of Equity Joint Venture, aiming at embracing advanced technology from abroad instead of reform and open-door policies such as that of China. During this period of time, however, the poor condition of the North Korean economy was already known among Korean residents in Japan while the South Korean economy was growing rapidly. Even Korean resident businessmen in Japan recognized challenges of the North Korean including debts to Japan. As it faced difficulties in starting equity joint venture businesses with the West due to financial obligations, the North Korean regime attempted to attract capitals and technologies of Korean resident businessmen in Japan. Against this background, Korean resident businessmen in Japan, who were members of the pro-Pyeongyang federation, took the lead of investment in and trading with North Korea instead of Japanese companies which were passive about trading with North Korea due to its debts. Korean resident businessmen in Japan who belonged to the pro-Pyeongyang federation were motivated by North Korea’s active promotion to invest into it, and they even intended to dominate in investment to North Korea while the amity between North Korea and Japan was being discussed. In particular, Korean resident businessmen in Japan focused on the seeming advantage of starting business with the same people even though they had no sufficient capital or experience for overseas trading. From 1984 to 1989, about 100 equity joint venture businesses were initiated. They invested into various sectors such as light industry, agricultural and marine products, mining industry, and service industry. The total investment amounted to about USD 0.1 billion, and individual investments about 1.15 million. The scale of investment that the North Korean regime desired back then was ten times larger than that of Korean resident businessmen in Japan that belonged to the pro-Pyeongyang federation, and it showed special interest in heavy chemical industry. This indicates that the North Korea regime was not satisfied with equity joint venture investment from small Korean resident businesses in Japan. After all, most of the equity joint venture businesses between North Korea and Korean resident businessmen in Japan ended in failure for quite complicated reasons. In the late 1980s, the North Korean economy was already suffering from shortage of materials and resources as well as the infrastructure including electric power. Besides, the Labor Party seized exclusive power over personnel affairs and work control of equity joint ventures. Arbitrary bureaucracy and non-fulfillment of contracts were also some of the major reasons. In the period of system transformation among the Soviet Union and socialist states in Eastern Europe, the North Korean regime failed carrying forward ‘open-door policies of China’ out of feeling of danger. In addition, loans from public funds for trading with or investment in North Korea such as long-term low-interest loan were available for Korean resident businessmen in Japan, which was one of the reasons of the failure of equity joint venture businesses. Although a small number of Korean resident businessmen in Japan that supported the pro-Pyeongyang federation invested into North Korea with a relatively small amount of capital in consideration of the pool of cheap labor and land, equity joint venture businesses ended up declining in the contradiction of the North Korean system and restraints of international society. 북한은 1978년부터 1984년까지 제2차 7개년 계획을 수행하였는데, 이 시점은 중국이 개혁개방을 시작한 시점과 같고, 남한경제가 급속하게 성장하여 북한과의 격차를 크게 벌린 시점이기도 하다. 북한은 중국과 같은 개혁개방 대신 합영법과 같은 정책적 시도를 했는데, 이 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관계를 맺은 것이 조총련계로 구분되는 재일동포 상공인들이었다. 따라서 북한의 전면적인 경제위기 이전 10여 년간 진행된 ‘북한식 개방정책’과 독점적 투자를 했던 조총련과의 경제관계에 대해 살펴보는 것은 1980년대 북한경제를 이해하는 데 의미 있는 일이다. 특히 조총련계 상공인의 대북 투자에 대한 이해는 북한 내부 경제상황과 북한의 경제정책, 북한의 대외 관계와 남북한 경제관계 등에 대한 이해를 높여주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북한은 1970년대 후반에 서방의 차관과 무역대금을 갚지 못함으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이 더욱 확대되었다. 채무문제로 인해 서방과의 합영사업이 진행되지 못하면서, 북한정권은 재일동포 상공인들의 자본과 기술을 유치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총련계 상공인들은 채무문제로 인해 북일무역에 소극적이던 일본기업을 대신하여 대북투자와 무역을 주도하게 되었다. 조총련계 상공인들은 북한의 ‘투자 유치’ 선전에 따라 투자 욕구가 발동되었고, 북한과 일본의 수교가 논의되는 상황에서 북한투자를 선점하려는 목적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조총련계 상공인들은 북한경제가 가진 여러 가지 문제에도 불구하고 같은 민족과의 사업이라는 편리한 측면을 주목하였고, 1984년부터 1989년까지 약 100여 건의 합영사업을 진행하였다. 이들의 투자는 경공업과 농수산물, 광업과 서비스업 등에 두루 투자되었는데, 주로 경공업 등 소규모 투자에 그쳤다. 북한정권이 희망하는 투자유치 희망사업의 규모는 조총련계 상공인 투자액의 약 10배에 달했고, 투자부문도 중화학공업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결국 북한정권과 재일동포 상공인의 합영사업은 대부분이 실패로 결말이 났는데, 그 원인은 대단히 복합적이다. 북한경제가 1980년대 후반에 이미 전력・수송 등의 인프라와 자재・원료, 외화 등이 부족한 상태에 빠져 있었고, 합영기업에 대한 노동당의 인사권과 작업 통제권 장악, 독단적 관료주의, 계약 불이행 등 다층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던 것이 합영사업 실패의 중요한 원인이다. 또 소련과 동구사회주의국가의 체제전환기에 북한정권이 위기감에 봉착하여 ‘중국식 개방정책’을 추진하지 못하였고, 서방과의 경제협력 단절과 북핵문제 등으로 인한 국제사회의 제재도 합영사업 실패의 배경이 되었다.
재일동포 사회의 통일운동: 민단, 조총련, 원코리아페스티벌을 중심으로
지충남 ( Choong Nam Ji ) 한국민족연구원 2015 민족연구 Vol.0 No.64
민단과 조총련의 모국성향은 친한국, 친북한이며, 원코리아페스티벌의 경우, 중립적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특히 민단과 조총련은 각각 남북한의 공인 및 공민단체라는 점에서 모국정부의 통일정책을 일방적으로 지지하고 홍보하는 통일운동에 주력하고 있다. 통일운동의 성과로는 첫째, 민단과 조총련은 통일운동의 전개를 통해 지지 세력의 결집, 회원들의 통일의지의 고취, 미래의 한반도 통일준비에 기여; 둘째, 민단은 32만명 회원을 기반으로 통일운동의 주도권 확보에 노력; 셋째, 조총련은 친북 해외동포와의 연대 강화; 넷째, 원코리아페스티벌은 통일과 축제의 접목을 통한 통일운동의 외연 확산, 자이니치(在日)의 통일의식 함양, 생활 중심의 통일운동을 전개하였다. 반면에 통일운동의 한계는 첫째, 민단과 조총련은 공히 타 단체의 통일운동에 무관심과 배척으로 일관하고 있으며, 동포 전체로의 확산에 미흡, 활동의 제약과 자율성 부족, 통합의 기제 역할 미흡;둘째, 원코리아페스티벌은 선언적 통일운동에 치중, 대중적 확산 미흡, 민단과 조총련의 견제를 받고 있다. 재일동포 사회에서 통일운동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통일논의의 개방성과 통일의식의 함양이 선행되어야 한다. 단체를 포함한 재일동포 사회의 한반도 통일에서의 역할은 중개자이며, 그리고 일본 사회의 한반도 통일에 대한 공감대 형성을 통해 긍정적 여론을 조성하는 것이다. The propensity of motherland in Mindan and Jochongryon includes pro-South Korea and pro-North Korea. In case of One Korea Festival, it is expressing a neutral position. Especially in that Mindan and Jochongryon are the official and civic organizations of South and North Korea, respectively, those are concentrating on unification movement that unilaterally supports and promotes the unification policy of the homeland government. As for the results of the unification movement, first, Mindan and Jochongryon combined supporters through the development in unification movement, encouraged members`` intention of unification, and contributed to preparing for the future unification of the Korean Peninsula. Second, Mindan strived to secure the initiative in unification movement based on 320,000 members. Third, Jochongryon reinforced the solidarity with pro-North Korea overseas residents. Fourth, One Korea Festival expanded the denotation of unification movement through the integration of unification and festival, promoted the unification perception in Korean Japanese, and developed the life-centered unification movement. On the other hand, as for the limitations of unification movement, first, Mindan and Jochongryon are being virtually consistent with indifference and exclusion in unification movement of other organizations, are insufficient in expansion into the whole countrymen, are lacking in restriction and autonomy of activity, and are inadequate for a role of mechanism in unification. Second, One Korea Festival is concentrating on the declarative unification movement, is insufficient in popular expansion, and is being checked by Mindan and Jochongryon. To vitalize unification movement in Korean Japanese society, there is a need to be preceded the openness of a discussion about unification and the promotion of the unification awareness. A role of Korean Japanese society including organization in the Korean peninsula unification is an intermediator and is what forms positive public opinion through creating the bond of sympathy for the Korean peninsula unification in Japanese society.
지충남(Choong-Nam Ji) 경희대학교 인류사회재건연구원 2017 OUGHTOPIA Vol.32 No.1
이 연구는 재일한인 사회의 통일운동의 성과와 한계를 비교하였다. 성과로는 첫째, 민단과 조총련은 조국 지향적 운동으로 한국 또는 북한의 통일정책 홍보와 지지를 통한 연대의 강화 및 세력 결집, 통일의지의 고취 및 통일준비에 기여하였다. 둘째, 중립화통일론은 남북한 통일론의 허구성 비판, 외세의 영향력 배제, 남한의 혁신계 및 대학생 통일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셋째, 한통련은 통일마당의 개최, 연방제 통일방안 지지, 남북한 및 재외동포와 연대를 통한 통일운동의 확산에 기여하였다. 원코리아페스티벌의 경우, 통일과 축제의 접목, 통일운동의 외연 확산, 자이니치 통일의식 함양, 생활중심의 통일운동을 전개하였다. 한계로는 첫째, 민단과 조총련은 타 단체의 통일운동을 배척하거나, 무관심하면서 이단적 통일론으로 인식, 동포 전체로의 확산 미흡, 정책과 활동의 자율성 제약과 비탄력성, 통합의 기제 역할 미흡. 둘째, 중립화통일론은 남북한 및 민단 · 조총련의 배척에 따른 대중성 확보의 미흡, 이상주의적 통일론, 남북한 정권의 역할 축소이다. 셋째, 한통련은 친북한적 통일운동 전개, 진보성향의 소수 참여, 민단의 한통련 배척으로 활동의 제약, 그리고 원코리아페스티벌은 선언적 통일운동에 치중, 대중적 확산 미흡, 민단과 조총련 견제, 민간단체의 제한적 활동 등이다. This study compares outcomes and limitations of the unification movement of Korean residents in Japan. In terms of the outcomes, first, as Mindan and Jochongryeon are the homeland-oriented movement, it contributed to reinforcing solidarity, gathering force, encouraging a unification will, and preparing for unification through publicizing and supporting unification policy in South Korea or North Korea. Second, the neutralization approach toward the unification criticized the fabrication of a unification theory in South and North Korea, ruled out the foreign influence, and had an impact on unification movement of the reformist circles and university students in South Korea. Third, Hantongryeon contributed to opening Tongil Madang, supporting a plan of federal unification, and spreading unification movement through the solidarity with South-and-North Korea and overseas Koreans. In case of One Korea Festival, it integrated the unification and festival, made the widespread extension in unification movement, promoted the Zainichi(在日) unification consciousness, and developed the life-centered unification movement. In terms of the limitations, first, Mindan and Jochongryeon are regarded as the heretical unification approach while excluding or neglecting unification movement in other groups, it is insufficient in the spread into the whole countrymen, has the restriction and in-elasticity of autonomy in policy and activity, and is inadequate for a role of mechanism in integration. Second, the neutralization approach toward the unification is unsatisfactory in securing popularity according to ruling out South-and-North Korea, Mindan and Jochongryeon, has an idealistic unification theory and a reduction in a role of the South-North Korean governments. Third, Hantongryeon has the restriction of activity due to the development in the pro-North Korean unification movement, to the participation of a progressive minority, and to the exclusion of Hantongryeon in Mindan. And One Korea Festival is biased to the declaratory unification movement, is insufficient in the popular diffusion, holds Mindan and Jochongryeon in check, and has restrictive activity in private organization.
박소연(Park So Youn) 서강대학교 생명문화연구소 2017 생명연구 Vol.43 No.-
본 연구에서는 두 개의 조국을 가지고 식민지배국인 일본에서 살아가고 있는 재일한국인 디아스포라의 경험적 삶을 탐구하기 위해 생애사적 연구방법론으로 접근했다. 본 연구는 재일한국인 1세중에 민단과 조총련 양쪽의 활동 경력을 갖고 있으며 귀화하지 않은 채 일본에서 거주하는 85세 여성노인을 대상으로 심층면담을 수행하였다. Mandelbaum(1973)이 제시한 삶의 영역(dimensions), 전환점(turnings), 그리고 적응(adaptation)으로 분석한 결과 다음과 같은 연구결과를 도출하였다. 삶의 영역은 [일본으로 입국한 보모로서의 생활], [점방 점원으로서의 생활], [결혼 후 조총련계 활동가의 아내로서의 생활], [경제를 책임진 여성가장으로서의 생활], [디아스포라로서의 생활]의 5개영역이었다. 삶의 전환점은 [일본으로 밀입국], [더부살이], [결혼], [조총련 활동], [한국국적 취득], [양돈일], [야간학교 입학]이었다. 삶의 적응전략으로는 [순응], [자기 삶을 기획하기 위한 인적 네트워크 구축], [억척스러움과 틈새시장 개척]으로 분석된다. 연구 참여자는 분단으로 인해 두 개의 모국을 갖게 되었지만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균형점을 찾은 디아스포라의 삶을 영위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연구결과를 토대로 디아스포라로서의 특수한 재일한국인의 경험적 삶과 이들에 대한 현지 적응 지원 및 보상 결여의 문제에 대해 논의를 했다. 마지막으로 국외 영사관을 중심으로 재일한국인 노인층의 현지적응을 지원하는 담당자와 주무부처 설치와 한국인학교를 중심으로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현지인들과 통합할 수 있는 교육의 필요성을 제안했다. In this study, I approached the life history research methodology to explore the empirical life of the Korean diaspora who has dual mother country and living in the colonial dominant nation. I performed in - depth interviews with elderly women aged 85 years living in Japan who have experience of both the federation of Korean Residents in Japan and Jochongryon among the 1st year residents in Japan. The dimensions, turnings, and adaptations of Mandelbaum (1973) were analyzed and the following results were obtained. The Area of life is composed of five dimensions [Living as a nanny who entered Japan], [Life as a fortunetelling shop clerk], [After the marriage, Life as a wife of pro-Pyongyang activist], [Living as a female breadwinner], [Life as a diaspora]. The turning point is composed of [Smuggled into Japan], [Freeload], [Marriage], [Activity of pro-Pyongyang], [Acquisition of Korean nationality], [Pork industry business and Self-made], [Entrance into Night school]. It could be analyzed [Adaptation], [The establishing of human network for planing own life], [Toughness and developing niche market] as the strategy of life adaptation. The research participant has dual mother country caused by division but he led life of diaspora who maintained the identity and had equilibrium point between the countries as korean. Based on the results of these researches, I discussed the special experience of diaspora and the problem of lack of compensation and support of local adaptation. Finally, I proposed the necessity of education to integrate with the local people while keeping the identity of the Korean consulate with Korean school as the center and the person in charge of supporting adaptation of Korean elderly in Korea.
문화서클운동의 정치성과 자이니치의 아이덴티티 -1950년대 서클지 『진달래』의 성격과 그 의의-
장인수 한민족문화학회 2018 한민족문화연구 Vol.61 No.-
At first Jindalle[『ヂンダレ』] was a circle magazine to propagate the legitimacy of North Korean regime. Kim Si-jong was the central figure. Workers, students, and patients in Korean Japanese community of Osaka gathered around him. They were living as a drifting people in Japan. They were almost the second-generation Korean Japanese, and they could not use well their mother tongue. At the time, North Korea was promoting an ideal place in Korean Japanese community. The Korean Japanese have required the extreme left struggle for their father’s country. They felt inferior compared to North Korea and activist in jail. And for that very reason, they felt the burden in writing. Kim Si-jong thought that it was important to write the specialty of Korean Japanese than the strange country. He tried to push his own idea by appealing to authority of the Japanese writers, for example Ono Touzaburo[小野十三郞]. Hydrogen bomb problems become an issue in the process. The members of Jindalle wrote about the placeness of Osaka, the certification of alien registration, the political discrimination, and the absolute poverty. At first they were mobilized, but they were gradually regained thier identity while participating in the offline assembly of Jindalle. They felt at home in there. Jindalle was their place. The argument in Jindalle was a struggle to keep their place against the intervention of 'General Association of Korean Residents'[朝總聯]. 『진달래』는 북한의 체제 정당성을 선전하기 위해 만들어진 1950년대 오사카 지역의 서클지이다. 김시종이 중심이었고, 노동자, 학생, 병인 등 지역사회의 자이니치들이 회원으로 활동했다. 그들은 일본 사회에서 ‘유민’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2세로서 조국에 대해 잘 알지 못했으며 모국어에도 서툴렀다. ‘조국’은 이상화 되어갔고, ‘조국’을 위한 일본 사회 내부에서의 극좌적 투쟁이 자이니치에게 강요되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조국과 투옥된 활동가들에 대한 열등감으로 시 쓰기에도 부담을 느끼게 되었다. 김시종은 일본 사회를 살아가는 자이니치 자신의 실존에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오노 도자부로 등 외부의 일본 작가들의 권위에 호소하면서 이 기조를 강화해갔다. 수소폭탄 문제는 그 과정에서 중요한 절충적 과제가 되었다. 오사카의 ‘장소성’, 외국인등록증 및 복지 면에서의 차별, 절대적 빈곤 등도 잇따라 이슈가 되었다. 『진달래』의 활동은 서클지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 그들은 애초 정치적 맥락에 ‘동원된 존재’였지만, 합평회, 연구회, 간담회 등을 거듭하면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찾아갔다. 그들은 이 모임에서 ‘안심감’을 경험했으며, 이 모임을 자신들의 ‘거장소(居場所)’로서 인식했다. 『진달래』논쟁은 ‘육전협’ 이후 노선전환으로 생긴 조총련의 간섭에서 자신들의 매체를 지키기 위한 투쟁의 성격이 있었다.
홍용희(Hong Yong-hee) 한국현대문학회 2009 한국현대문학연구 Vol.0 No.27
재일조선인 디아스포라 시는 ‘일본 사회 속의 북한 시’의 특성을 지닌다. 그것은 ‘재일조선문학가예술동맹’이 친북단체인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의’ 산하기구로서 조총련의 기본 지침과 방향성에 대한 문학적 실천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라는 점에서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한편, 일본의 재일본조선인문단은 재일본조선문학예술가동맹(문예동)이 1959년 6월 7일 결성되면서 조총련의 지도 아래 김일성과 조선로동당의 문예정책을 받드는 작가, 예술인 대오를 집중적으로 강화해 나간다. 이러한 상황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는 바처럼 재일조선인 시는 기본적으로 북한 시와 근원 동일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시 창작의 방법론은 물론 위상, 역할, 평가 등이 북한의 주체적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사상적 무기로서의 특성에 직접 대응되는 것이다. 재일조선인 디아스포라 시의 시적 양상을 주제의식에 따라 유형별로 나누어 보면, 대체로 일본사회에서의 정착과 시련, 조국에 대한 그리움, 김일성ㆍ김정일에 대한 송가, 남한 사회의 비판과 조국통일에 대한 염원 등으로 요약된다. 이러한 재일조선 디아스포라 시의 특성을 살펴보는 것은 한민족 문학권의 중심에 있으나 아직 우리에게 미답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재일조선인 디아스포라시의 현황과 위상을 확인하고 아울러 북한문학의 미래지향적인 변화에 순기능으로 작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늠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것이다. 재일조선인은 폐쇄적인 북한과 달리 자본주의 문화의 첨단을 직접 접할 수 있는 제 3의 공간에 거주한다는 분명한 변별성을 지닌다. 다시 말해, 재일조선인 디아스포라는 북한식 사회주의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 미적 거리를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재일조선인 디아스포라가 앞으로 전지구적 시장화에 대응해야 하는 북한사회의 개방화를 선도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점으로 파악된다. 또한, 이러한 논법은 재일조선인 디아스포라 문학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북한문학의 일방적인 영향권에 놓인 재일조선인 디아스포라 문학이 앞으로 폐쇄적인 북한문학의 변화에 적극적인 충격과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전도된 위상을 상정해 볼 수 있다. 재일 디아스포라는 세계정세의 흐름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와 더불어 북한 주민에 비해 남한과의 원할한 소통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재일조선인 디아스포라 시에 대한 논의는 이와 같은 한반도의 통일시대와 민족적 통합을 향한 미래지향적인 가능성에 대해 적극적으로 주목하고 평가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The poetry written by Korean-Japanese have characteristics of North Korean poetry in Japan society. That is directly appeared in the 'Art Community of Korean-Japanese literary people" which is the affiliate organization of 'Korean-Japanese Union', pro North Korean organization, and has an purpose on practicing literally about basic principle and direction of North Korean residents’ league in Japan. The platform of North Korean residents’ league in Japan suggests practice of reunification, protection of national interests of Korean-Japanese, contribution to world independency and so on based on the level as an subordinated organization of North Korea. On the other hand, Korean-Japanese Literature Artist Union is formed in June 7, 1959, writers and artists supporting Ilsung Kim and literature policy of North Korean political party are centered and Korean-Japanese literary world in Japan was developed. As you may know under this situation, the poetry of Korean-Japanese has identification in their roots with North Korean poetry. Status, role and evaluation as well as the methodology of poetry correspond to characteristics as ideological weapon for independent socialistic revolution of North Korea. As we divide the characteristics of Korean-Japanese poetry according to subject consciousness, they can be summarized as establishment of identity of Korean-Japanese, conflicts with Japan society, emphasis on mother tongue use, anti American feeling and criticism on South Korean society, desire of reunification, praise of Ilsung Kim and Jungil Kim, shaping of ordinary life and so on. Among this characteristics except poetry about ordinary life, other poetry have their role in teaching and enlightening ideological direction of Korean-Japanese society. When studying the characteristics of Korean-Japanese poetry, they are still in the center of the Han race literature range but they have importances because we can confirm the current situation and status of Korean-Japanese poetry which remains as unsolved field, along we can watch the possibility to work as pure function to the future directed change.
조총련계 재일상공인과 남한 기업인의 대북투자: 북한의 상업거래 관행을 중심으로
남근우 통일연구원 2017 統一 政策 硏究 Vol.26 No.2
This paper empirically analyzes the abnormal commercial transactions of North Korea that Korean resident businessmen in Japan and South Korean businessmen experienced during their trade with North Korea. Empirical studies on North Korean commercial practices are virtually absent. This article tries to characterize the causes, characteristics, and behavior of North Korean commercial transactions. By analyzing North Korea’s commercial transactions toward the South Korea, this study prepares for the forthcoming inter-Korean trade resumption. Although Korean resident businessmen in Japan and South Korean businessmen could gain the upper hand over the North in the past economic trades, many businessmen made a loss due to irrational commercial transactions of the North Korean. The business transactions of North Korean experienced by businessmen are a good preparation for the resumption of inter-Korean trade. In the future, Governments and businessmen should prepare thoroughly for North Korean commercial practices in order to prepare for the resumption of inter-Korean trade. 이 글은 북일무역과 남북교역이 중단된 2010년 이전을 중심으로 조총련계 재일상공인과 남한 기업인들이 북한과 교역과정에서 경험했던 북한의 비정상적인 상업거래 관행을 실증적으로 분석한다. 북한의 상업거래 관행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는 사실상 부재하다. 이 글은 이러한 한계를 극복해 이들이 경험했던 북한의 상업거래 관행의 원인, 특징, 그리고 행태를 유형화하여 향후 남북교역 재개에 대비하고자 한다. 과거 재일상공인과 남한 기업인들은 경제적으로 우월한 지위에서 북한과 경제사업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북한의 비정상적인 상업거래 관행을 극복하지 못하고 많은 피해를 입고 철수하였다. 향후 남북교역이 재개되면 북한의 잘못된 상업거래 관행은 저절로 근절될 것이라는 낙관은 금물이다. 재일상공인과 남한 기업인들이 북한과 사업하는 과정에서 경험한 북한의 상업거래 관행들은 남북교역 재개에 대비한 훌륭한 반면교사이다. 정부와 기업은 남북교역 재개를 대비하기 위해서 북한의 상업거래 관행에 대한 대비책을 철저하게 준비해야 할 것이다.
재일조선인의 대규모 북한 이주와 촉진 요인: 북한·조총련의 선전과 일본 내의 호응을 중심으로
한의석 성신여자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2024 국가와 정치 Vol.30 No.2
전후 일본을 떠나지 않고 계속 거주하던 재일조선인들이 1959년 12월부터 1984년7월까지 대규모로 북한으로 이주했다. 이른바 재일조선인 귀국사업 기간 동안 9만 3 천여 명의 재일교포들이 일본을 떠나 북한으로 향했는데 그들 중 대부분은 남한지역출신이었고, 특히 1960년과 1961년에 집중되어 있다. 이 연구는 재일조선인들이 북한 이주를 결심하게 된 배경과 주요 행위자를 제시함으로써 재일조선인 북송 사건을재조명하고 있으며, 특히 재일조선인들이 북한에서의 새로운 삶에 대해 큰 기대를 갖고 이주를 결심하게 된 배경을 확인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재일조선인 귀국사업의거시적 배경에는 북한의 경제적, 정치적, 외교적 이익과 일본의 경제적, 정치적 이익, 인도주의와 민족주의 등 다양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동하고 있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재일조선인들이 북한에서의 새로운 생활을 기대하고 이주를 확신하게 만든 정보와 선전, 북한에 대한 우호적 이미지와 낙관적 기대를 높인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가 있다. 이 연구는 재일조선인들의 대규모 북한 이주를 유인하기 위한 북한 및조총련의 선전과 노력, 그리고 일본 내에서 이에 호응하여 북한에 대해 묘사했던 긍정적인 메시지들을 제시함으로써 재일조선인들의 대규모 북한 이주를 촉진한 요인중 일부를 보여주고 있다. After the end of the World War II, almost 1.4 million Koreans lived in Japan went back to Korea but there still were around 600 thousands ethnic Koreans living in Japan. From December 1959 to July 1984, about 93,000 Korean (including Japanese wives) repatriated to North Korea, while most of them originally came from southern part of South Korea. Studies of the ethnic Korean repatriation from Japan emphasize that economic, political and diplomatic benefits motivated North Korea to decide the repatriation, and underline active roles of the Japanese government, the Japanese Red Cross Society and International Committee of the Red Cross. Including these factors, propaganda of North Korean government and promotion by the General Association of Korean Residents in Japan (Chongryon ) made ethnic Koreans in Japan decide to immigrate to North Korea. In addition, Japanese political parties, politicians, intellectuals, and mass media strongly affected ethnic Korean’s decision to repatriation to North Korea from Japan. This study explores contents of propaganda by North Korea and Chongryon , and news and images on North Korea delivered and created by Japanese politicians and media.
해방 후 재일조선 문학운동 -『조선 문예』와 『진달래』의 갈등을 중심으로-
마경옥 한국융합학회 2020 한국융합학회논문지 Vol.11 No.2
After the war, the circle literature movement took place in Japan around the 1950s. The subjects of the national movement, the Korean-Japanese, have produced and expanded their political rights and claims through circles and organs in conjunction with the literary movement. However, the results of analyzing the exchanges and conflicts between the political subjects of the Korean national movement and the literary circle movement as a concrete case to date are still insignificant. After liberation, the endless worries and confrontations to the post-colonialization of literary Koreans in Japan were analyzed as 'community with Republic of Korea and Japan', 'topic and creative language', and as 'conflict with Korean association in japan'. The process leading to dissolution was analyzed. The spirit of the era of Koreans in Japan in the 1950s identified in this paper is expected to suggest a new direction for the starting point of study of the humanities in Japan. 패전 이후 1950년대를 전후하여 일본에서는 서클문학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났고, 재일조선인 민족운동의 주체도 자신들의 정치적 권리와 주장을 문학운동과 연동하여 서클과 기관지를 통하여 생산·확장시켜왔다. 그러나 지금까지 재일조선인 민족운동의 정치적 주체와 문학서클 운동과의 교류, 갈등을 구체적인 사례로 분석 연구한 사례는 아직 미미한 실정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조련과 민전의 정치적 역학관계로 탄생한 ‘오사카 시인집단’ 기관지『진달래』와 노선전환에 따른 조총련의 ‘재일조선 문학회’ 기관지『조선 문예』의 성립과정과 두 잡지의 교류, 갈등, 해산 과정 등을 비교분석하여 그 실체를 규명했다. 즉, 해방 후 재일조선인 문학자들이 갖고 있었던 탈식민지화로의 끝없는 고민과 대립, 모순과 갈등의 실체를 ‘공화국공민과 재일’, ‘주제와 창작언어’등으로 분석하여 ‘조총련과의 갈등’으로 결국 해산에 이르는 과정을 분석하였다. 본고에서 파악된 1950년대 재일조선인들의 시대정신은 향후 재일조선인문학의 출발점 연구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줄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