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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金昌協의 <<五子粹言>>으로 보는 隋儒 王通

        노관범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20 규장각 Vol.57 No.-

        본 글은 김창협이 편찬한 『오자수언』을 통해 김창협의 주자학을 탐구하였다. <<五子粹言>>은 순경, 동중서, 양웅, 왕통, 한유 등 다섯 유학자의 순수한 언설을 선별한 문장 선집이다. 이들은 선진 공맹 유학 이후 송대 신유학 이전 시기의 중국 유학사 계보에서 거론되는 인물들이다. 공맹 유학과 송대 신유학 사이의 중국 유학에 대한 학문적 관심은 김창협이 추구했던 포괄적인 주자학, 곧 결과로서의 주희 텍스트가 아니라 과정으로서의 주희 텍스트를 체득하고자 했던 학문 태도와 관련이 있다. 이 중에서 수나라 유학자 왕통은 양한을 역사 모델로 하는 왕도정치를 추구했고 이로 인해 ‘양한이 삼대가 되기 부족한 줄 알지 못했다’는 주희의 비평을 들었던 인물이다. 김창협의 <<五子粹言>>으로 재현되는 왕통은 원칙적으로 주희의 관점에 따라 정화된 왕통이었으나 양한에 대한 왕통의 역사적 존중은 부분적으로 보존되었다. 주자학자 김창협의 왕통 선집 작업은 조선후기 낙학의 이채로운 학문적 조류의 하나였다.

      • KCI등재

        당말唐末 도통의식 변화 양상 ―왕통王通의 도통의식을 중심으로-

        이연정 한국중국문화학회 2022 中國學論叢 Vol.- No.76

        The idea of Daotong suggested by Confucius leads the stream of Confucian ideas that cover every philosopher’s spirits of the times. I, the researcher, has concentrated on the idea of Daotong appearing especially in the era of Suí and Tang dynasties shows a practical viewpoint of Daotong in which such figures as Xunzi and Wangtong were arranged as the successors of universal truth (道). Especially the Daotong system of Pirixiu is noticeable as he regarded Xunzi and Wangtong as the successors of universal truth (道). His thoughts of Daotong does not only state the position and stance of Confucian school during such chaotic period of Suí and Tang dynasties but also suggest a practical idea of Daotong. The center of such Daotong system suggested by Pirixiu represents the philosopher Wangtong. I try to look into the stream and pattern of the thoughts of Daotong late in Tang dynasty through Wangtong’s idea. 도통(道統)은 유가 정신 근간의 주된 흐름으로 시대마다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도통 의식은 공자로부터 제출되어 유가 사상의 흐름을 주도하는 영역으로 사상 철학자들의 시대정신을 표명한다. 도통관은 요(堯) – 순(舜)- 우(禹)- 탕(湯) – 문무(文武) - 주공(周公) - 공자(孔子) - 맹자(孟子)로 이어오는 계보가 정통으로 알려져 있으나 시대마다 도를 규명하는 내용과 성격이 다르기에 도를 계승하고 자처하는 자들도 다르게 배열된다. 기존의 도통에 대한 논의는 주로 한유 주희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고 정통계보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논자는 유가의 도가 정립되는 과정에서 수당(隨唐) 시기에 나타나는 특징적인 도통관에 주목하게 되었고, 이 시기에는 순자 왕통과 같은 서민계급의 인물들이 계보에 배치되는 실용적인 특성의 도통관이 정립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나, 순자(荀子)· 왕통(王通)을 도의 계승자라고 여긴 피일휴(皮日休)의 도통 계보가 주목할 만한데, 피일휴의 도통의식은 수당 혼란기의 유가의 지위와 입장을 표명해주고 있으면서 동시에 실용주의적인 도통관을 제시하고 있다. 그 계보의 중심에 ‘왕통(王通)이라는 사상가가 있는데 그의 사상을 통해 당말 도통의식의 흐름과 그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 KCI등재

        논문(論文) : 계몽의 딜레마 -점령시기 왕퉁자오(王統照)의 심리구조와 창작

        남희정 ( Hee Jeong Nam ) 중국어문연구회 2014 中國語文論叢 Vol.0 No.65

        王統照旣是繼承五四啓蒙主義思想的知識分子,又是組織文學硏究會的成員之一。他在早期創作當中,1920年代創作了一系列的問題小說,1930年代則創作了長篇小說≪山雨≫,這部作品被稱爲是具有典型性的農民小說而得到了好評。他的早期文學觀是主要以對愛, 美的信賴而作爲基礎的。但在1940年代占領時期的上海,他的作品反而開始包含了作者對本身所懷著的理想啓蒙主義的懷疑與絶望之情。戰爭爆發之前到達上海的王統照在此待到戰爭結束生活了十餘年,此期間對作者來說無論在精神上或在身體上都是條件最差的時期。占領時期的上海成了作者的理想被破壞的空間,他在此必須得開始重新摸索新的路徑,他陷入了理想與現實之間發生的內在矛盾之懸崖。因此,本論文將通過短篇小說集≪華亭鶴≫(1941)與未完的長篇小說≪雙淸≫(1943-1944)以及其他散文來考察占領時期作者所面臨的啓蒙之困境在他的創作中是如何體現的。王統照後期小說中尤爲突出的特點之一就是作者把自己投影到作品之中。在他的作品中,經常有具不同特點的兩個人物交差出現的布局,而這種二元對立的構造則象征著作者內心裏的相對點。從他所采用的素材或題材來看,王統照的後期小說給人以强調了神聖性或純潔性的强烈印象。像這樣强調道德性純潔的人物也反映了對抗戰無力的個人之苦惱。像這樣的特點也可以看作爲想逃離上海而不可逃脫的作者在心理, 環境上的雙重制約下所感受的困惑之反映。王統照後期作品中所表現出的懷疑與絶望之感可視爲擺脫抵抗的行爲而受到指責。在占領時期上海的知識分子的生存往往主要通過抵抗或與親日勢力的協作兩種生存方式被進行討論。但是我們需要擺脫用抵抗/協作的二元模式來討論知識分子的方式,我們得通過조出更爲複雜的社會性關系來具體分析知識分子的生存方式。

      • KCI등재

        元宗의 追崇問題

        장세호 한국사상문화학회 2009 韓國思想과 文化 Vol.50 No.-

        유가(儒家)가 이상적인 제도로 내세운 봉건제도는 종법(宗法)을 전제로 한다. 종법은 가족제, 가장제, 세습제 등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것은 존존(尊尊)의 원리에 기초한 적장자(嫡長子) 상속제도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가장은 가족을 통제하는 강력한 가장권을 가지게 된다. ‘가무이존(家無二尊)’ ‘가무이주(‘家無二主)’ 등의 표현이 단적으로 그 권력을 말해 준다. 가무이존은 바로 정통(正統)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정통은 가통(家統)을 바르게 하고, 왕통(王統)을 바르게 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가통의 측면에서는 한 가정에 두 아버지가 없는 것이며, 왕통의 측면에서는 두 임금이 없는 것이다. 유학의 본래 정신인 종법체제의 확립을 위하여서는 정통을 확립하여야 하는 것이다. 추숭문제(追崇問題)는 왕통과 가통의 문제 사이에서 발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왕위계승문제가 종법에서처럼 적장자가 계승을 하게 되면 애당초 문제가 발생되지 않는다. 그러나 왕통이라는 것은 꼭 적장자가 왕위를 승계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은 제왕가(帝王家)에서는 승통(承統)을 중시하기 때문에 승통하는 것에 따라 위인후자(爲人後者)의 예법을 적용시켜, 父子의 도리를 행하면 된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대통(大統)에 입계(入繼)하기 이전의 사가(私家)의 정에 너무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가통과 왕통을 엄연히 구별할 뿐만 아니라 왕통을 바로잡는 것이다. 그래서 인조(仁祖)의 경우도 정원군(定遠君)이 비록 선조(宣祖)의 아들이라고는 하나 인조가 선조의 왕위를 계승하였다면 당연히 정원군을 원종(元宗)으로 추숭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사계의 일관된 주장이다. Injo rised king for reforming the government. It is different to Senjo(宣祖) has succession by the Royal line. Injo set up a mausoleum in Chusong(追崇) Jongwonkun that daewonkun by Park ji ke and his disciple Yi ye kil and many people's suggestion. Therefore Jung won kun becomes Wonjong. But Sake considered as set up a mausoleum in Chusong(追崇) has problem. Being Park ji ke persistents from quote no reasons and blamed. Also, Sake persistents not Jongwonkun(定遠君) was set up a mausoleum in Chusong but Nengwondaekun that Injo's brother had to manage sacrificial rites. Sake's blamed persistense constructs by all that Chunchu kang mock's(春秋綱目) term. As two sun must not in the sky, two origin must must not in family is suggestion of Sake corrects tong. That is said keep in Jongtong(正統).

      • KCI등재후보

        한국사상(韓國思想)(철학(哲學)) : 원종(元宗)의 추숭문제(追崇問題)

        장세호 ( Se Ho Chang ) 한국사상문화학회 2009 韓國思想과 文化 Vol.50 No.-

        유가(儒家)가 이상적인 제도로 내세운 봉건제도는 종법(宗法)을 전제로 한다. 종법은 가족제, 가장제, 세습제 등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것은 존존(尊尊)의 원리에 기초한 적장자(嫡長子) 상속제도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가장은 가족을 통제하는 강력한 가장권을 가지게 된다. `가무이존(家無二尊)` `가무이주(`家無二主)` 등의 표현이 단적으로 그 권력을 말해 준다. 가무이존은 바로 정통(正統)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정통은 가통(家統)을 바르게 하고, 왕통(王統)을 바르게 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가통의 측면에서는 한 가정에 두 아버지가 없는 것이며, 왕통의 측면에서는 두 임금이 없는 것이다. 유학의 본래 정신인 종법체제의 확립을 위하여서는 정통을 확립하여야 하는 것이다. 추숭문제(追崇問題)는 왕통과 가통의 문제 사이에서 발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왕위계승문제가 종법에서처럼 적장자가 계승을 하게 되면 애당초 문제가 발생되지 않는다. 그러나 왕통이라는 것은 꼭 적장자가 왕위를 승계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은 제왕가(帝王家)에서는 승통(承統)을 중시하기 때문에 승통하는 것에 따라 위인후자(爲人後者)의 예법을 적용시켜, 父子의 도리를 행하면 된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대통(大統)에 입계(入繼)하기 이전의 사가(私家)의 정에 너무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가통과 왕통을 엄연히 구별할 뿐만 아니라 왕통을 바로잡는 것이다. 그래서 인조(仁祖)의 경우도 정원군(定遠君)이 비록 선조(宣祖)의 아들이라고는 하나 인조가 선조의 왕위를 계승하였다면 당연히 정원군을 원종(元宗)으로 추숭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사계의 일관된 주장이다. Injo rised king for reforming the government. It is different to Senjo(宣祖) has succession by the Royal line. Injo set up a mausoleum in Chusong(追崇) Jongwonkun that daewonkun by Park ji ke and his disciple Yi ye kil and many people`s suggestion. Therefore Jung won kun becomes Wonjong. But Sake considered as set up a mausoleum in Chusong(追崇) has problem. Being Park ji ke persistents from quote no reasons and blamed. Also, Sake persistents not Jongwonkun(定遠君) was set up a mausoleum in Chusong but Nengwondaekun that Injo`s brother had to manage sacrificial rites. Sake`s blamed persistense constructs by all that Chunchu kang mock`s(春秋綱目) term. As two sun must not in the sky, two origin must must not in family is suggestion of Sake corrects tong. That is said keep in Jongtong(正統).

      • KCI등재

        태조 삼년상을 통한 태종 왕통의 완성

        남지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16 규장각 Vol.49 No.-

        태종이 태조 삼년상을 통하여 王統의 완성을 마무리한 것을 검토한 글이다. 1408년 5월 태조가 74세로 졸하여, 아들 태종이 상주로서 태조 삼년상을 치렀다. 삼년상이 미리 정해져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백관이 易月로 禫除한 뒤에 대신들이 聽政을 청하였는데, 태종은 아직 49재와 장례가 끝나지 않았다고 불윤하였다. 9월 장례를 치른 뒤에 명 사신이 肉膳들기를 권한 것을 굳이 사양함으로써 상중임을 거듭 밝혔고, 중순 예조에서 祔廟 시기를 정하는 과정에서 삼년상이 공식 확정되었으며, 하순 明帝가 사신을 보내어 태조에게 賜祭 賜諡한 것을 계기로 삼년상을 내외에 천명하였다. 태종이 虞祭의 신주에 ‘皇考’라 씀으로써 ‘태조를 바로 이은 왕통’을 이미 천명하였고, 사시 받은 것을 ‘有明賜諡康憲’이라 改題하여 다시 온 천하에 밝히었다. 바로 그 날 민무구 형제의 죄를 낱낱이 밝히는 교서를 내려 그 용서할 수 없음을 확인하였다. 1409년 3월 태종은 모후의 齊陵에 한식제를 지내러 가기 전에 신덕왕후 貞陵을 도성 밖으로 옮겼다. 태종이 적통의 근거인 모후가 태조의 嫡妻임을 확인하고 (세자) 芳碩의 어미를 繼妃로 낮춤으로써 왕통의 바름을 내세우려는 것으로 읽힌다. 윤4월에 태조의 健元陵에 비를 세워 태종이 부왕 태조를 이은 자신의 공을 새김으로써 王統은 태종이 바랐던 대로 완성되었다. 小祥 후에는 6월에 하교하여 구언하는 등 정사에 의욕을 보이다가, 8월에는 세자에게 선위를 선언하였다가 추석 직전에 없는 것으로 되었다. 10월 하순에 명에 진헌마 1만 필을 보내기로 하였고, 태종은 바로 세밑에 건원릉에 친히 제사 모셨다. 1410년 3월 제릉을 배알하려 개성에 가 있으면서, 민무구 형제를 賜死하였다. 1410년 5월에 大祥, 7월 보름에 禫祭한 뒤에 하순에 종묘에 祔廟하고, 8월 초에 건원릉에 免喪을 아뢰면서 태종의 삼년상이 모두 마무리 되었다.

      • 예송논쟁에서 ‘천리(天理)’의이상주의와 ‘인사(人事)’의 현실주의

        김진윤 한국민족사상학회 2016 민족사상 Vol.10 No.3

        The Debate about manners(禮訟論爭) in Late Chosun(朝鮮) is the issues about the Legitimacy of king beyond external format on manners. When it comes to these days is the debate on realism and idealism. Hyojong(孝宗) is the second son on to be borned, but he is the eldest son about the Legitimacy of king. In the first the party of west had to win, in the second the party of south had to win. This argument is just the starting point polite way to adapt to reality, so different, different results. The party of west is taken by the positions of idealism than the value of Jus sanguinis in point of the ‘Tien li(天理)’. On the other hand the party of south shows realism of the Legitimacy of king in terms of the reality of power in point of the ‘Jén shih(人事)’. 조선 후기에 나타난 예에 관한 논쟁이 정쟁으로 화한 ‘예송(禮訟)’이라는 것은 단순한 예의 외적 형식의 문제를 넘어선 왕통(王統)과 혈통(血統)의 문제로 봐야 한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현실주의(現實主義)와 이상주의(理想主義)에 관한 논쟁이다. 효종이 혈통으로 보면 차남이지만 왕통으로 보면 대통을 이었으니까 현실적으로 장자라는 논리가 논쟁의 쟁점이다. 1차 예송은 서인의 혈통주의가 승리했고, 2차 예송은 1차 예송과 같이 대통을 이였다는 적통의 계승자라는 남인의 현실주의가 승리한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바로 예의 출발점이 서로 다르므로 현실에 즉응하는 방법이 다른 결과이다. 서인은 ‘예(禮)’의 두 가지 측면 중 ‘천리(天理)’에 보다 가치를 부여한 혈통주의인 이상주의의 입장을 취한 것이다. 반면에 남인은 ‘인사(人事)’의 측면에서 권력의 실체로서 왕통주의인 현실주의 입장을 나타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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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사상(韓國思想) 철학(哲學) : 미수 허목의 예송관

        장세호 ( Se Ho Chang ) 한국사상문화학회 2013 韓國思想과 文化 Vol.66 No.-

        유가의 계승제는 종법제도에서 나타나는 적장자 계승을 중시하고 있다. 적장자 계승은 조상의 대를 잇는 것을 바탕으로 하여 그 핵심적인 정신은 孝에 근거하고 있다. 그 계통을 잇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가통과 왕통에서는 尊을 중시한다. 즉 존의 대상이 바로 통을 승계할 경우에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물론 일반가정에서는 적장자 계승을 전제로 하여 존의 대상이 승계되지만 왕가의 경우에는 왕통을 계승하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일반인들의 계승하는 사례와 다르다. 왕위계승을 가장 우선적으로 보기 때문에 왕가에서는 일반인들처럼 적장자문제도 있고 왕위를 승계하는 이중적인 면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왕위를 일반인처럼 적장자로 계승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적장자는 아니지만 왕위를 계승한 경우에 여러 가지 유형이 있을 수 있다. 기해예송은 효종이 승하하고 인조의 계비이자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가 효종을 위하여 상복을 어떻게 입을 것인가가 문제가 된 것이다. 효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소현세자가 이미 왕위계승을 전제로 하여 세자의 위치에 있다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상복을 입는 문제는 소현세자를 적장자로 인정하느냐 아니면 왕통의 측면에서 왕위를 계승한 효종을 별개의 문제로 보느냐 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미수 허목은 효종이 조상의 정통을 계승하고 인조의 친아들이기 때문에 자의대비는 적장자의 경우에 해당하는 재최삼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기년복으로 결정된 것이 잘못이라는 것이다. Succession of Confucianism regards succession of eldest son in the clan rules system as important. Succession of eldest son that carries on a family line is based on filial duty. With carries on a family line, Family lineage and the Royal line is cosidered nobility. If object of nobility carried on line, It would appear concretely. In the original home object of nobility carried on line. but in the royal family is different with normal case. Because of succession to the throne regards preferentially, In royal family has twoflod. So there is case that the throne is succeed in eldest son. In the case The not eldest son and succession to the throne, there is many case. Kihaeyaesong is problem that Queen of Jayi is how to wear when Hyojong is dead. Before Hyojong sits on the throne, Sohyun already was proclaimed the crown prince and he was dead later. Problem of being in black is problem that recognition Sohyun as eldest son or recognition as Hyojong as another person. Misu Hu-molk assert that Queen of Jayi has to wear Jache Samnyun dress because Hyojong is succession to the throne and son. Being decided Kinyun dress is wr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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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사상 철학(韓國思想 哲學) : 백호 윤휴의 기해 예송관

        장세호 ( Se Ho Chang ) 한국사상문화학회 2015 韓國思想과 文化 Vol.76 No.-

        조선조 예송은 통을 바로 잡아야 된다는 정통(正統)에 대한 기본적인 사상을 바탕으로 발생한 것이다. 기해년에 효종이 승하하게 되자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가 어떠한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일어나게 된다. 효종을 왕통의 측면에서 인조의 대를 이은 왕위계승자로 대하여 상복을 입을 것인지 아니면 가통의 측면에서 계모로서 상복을 입을 것인가에 대한 논쟁인 것이다. 윤휴는 마땅히 참최삼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제왕가의 예는 사대부의 예와 다르기 때문에 왕통의 측면에서 참최삼년복을 입어야 된다는 것이다. 또한 종통과 왕통의 계승이 중(重)하기 때문에 군신의 의리를 내세워 참최삼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한다. 일단 왕위에 오르게 되면 이전의 사가(私家)에서 장자, 차자, 적자, 서자라는 것은 무의 미하다는 것이 윤휴의 주장이다. Choseon dynasty Yesong is occurred because of Tong has to reformed based on Jung tong. When Kihaenyun Hyjong is dead, argument is occurred about Hyjong`s stepmother Jayi queen which is in black. Argument is which Hyjong is considerd a successor to the throne in terms of the Royal line or Jayi is considerd stepmother in terms of family lineage. Yoonhoo assert she has to put on Chamche threeyears clothes because of properly case of Royal line is different case of nobleman. In other words she should put on Chamche threeyears clothes case of Royal line. Also succession of Jong tong and the Royal line is important. So she should put on Chamche threeyears clothes based on the relations of sovereign and subject. Yoonhoo`s opinion is that once sombody rised to the throne the eldest son, second son, legitimate son in a private house are meaningl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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