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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朝鮮時代文人들의 豆滿江에 대한 認識과 文學的形象

        洪順錫 강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8 인문과학논집 Vol.19 No.-

        豆滿江은 白頭山에서 발원하여 중국의 동북지방, 러시아의 연해주 사이의 국경을 거쳐 동해로 흘러들어가는 강이다. 한민족에게 있어 두만강은 백두산과 함께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역사적으로 고려시대에는 尹瓘이 九城를 쌓아 영토를 확장하였던 곳이며, 조선시대에는 金宗瑞가 六鎭을 개척하여 강토를 굳건히 했던 곳이다. 현대사에선 만주·연변 지역과 더불어,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한민족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조선시대 전기에는 대장부의 기개를 펼치고 자긍심을 느끼게 했던 두만강이다. 그러던 두만강이 근대시기에는 <눈물 젖은 두만강>으로 노래되기까지 하였다. 현재의 우리에겐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으로 시작하는 <눈물 젖은 두만강>이 가장 익숙하다. 두만강은 중국, 러시아와 경계를 형성하는 자연물일 뿐 아니라, 한민족의 대표적인 상징물로 인식된다. 많은 한민족의 작가들이 두만강을 소재로 작품을 창작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 논문은 두만강이 조선시대 문인들에게 어떻게 인식되었는가를 살피기 위한 것이다. 조선시대의 史書와 文集類고문헌에서 두만강에 대한 기록을 발췌하여 정리하고, 이를 바탕으로 조선시대 문인들의 두만강에 대한 인식과 文學的形象을 살폈다. 그리고 이러한 두만강의 문학적 형상이 현대의 우리들에게 어떠한 의미를 제시하는 가를 밝혔다. 두만강은 시대에 따라 달리 인식되고, 형상화되었다. 중국과의 경계를 형성하고 있는 자연대상에서 확대되어 한민족의 역사 현실을 상징하는 시적 공간으로 인식된다. 朝鮮時代초기에는 자랑스런 한민족의 영토를 에워싸고 흐르는 강이며, 대장부의 기개를 펼칠 수 있는 공간으로 인식된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한민족이 회복해야할 영토에서 끊임없이 흐르는 역사의 강으로 인식된다. 일제강점기에서는 독립항쟁으로 얼룩진 공간으로 민족의 욕된 운명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 있다. 남북분단 이후의 현실에서는 한민족 통일에의 염원으로 형상화된다. 한민족에게 있어 두만강은 영원히 함께 해야할 역사 현실의 공간이요 정신적 안식처이다. Duman River runs from Baekdu Mountain down to East Sea via eastern China and the borderland between Yonhaejoo lands of Russia. With Baekdu Mountain, Duman River is taken as a representative symbol of Korean people, and many Korean writers have used Duman River as one of the most important subject matters for their literary works. This paper studies how Choseon Literary Men appreciated Duman River in their literary works. Choseon history books and anthologies, especially those mentioning Duman River, are used to research as to how Choseon literary men appreciated and symbolized Duman River. In addition this paper studies the influence of their appreciation to the contemporary literary trends. Duman River has been appreciated in different ways as time goes by. For Koreans Duman River is not merely a landmark for a national boundary but a poetic space symbolizing ancient and current cultural situations. During the early Choseon Period Durman River was recognized as an important symbol of national pride of prosperous Dynasty and of high-spirit of Choseon people. During the late Choseon Period Duman River was understood as a historical symbol appealing restoration of Korean national boundary and pride. During the period of Japan's colonial rule of Korea, Duman River was taken a blood-stained battlefield and a symbol of guilty feeling of Choseon people who could not stop Japanese control over their motherland. After the division of Korea into north and south, Duman River was a symbol of cherished wish of Korean people for reunification of Korean Peninsula. For Korean people Duman River has been eternally a scene of history and a space to find spiritual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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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세기 종사강학(從師講學) 사례연구: 『금양종사록(錦陽從師錄)』을 중심으로

        최광만 ( Kwang Man Choi ) 한국교육사학회 2014 한국교육사학 Vol.36 No.2

        본 연구는 황후간의 『금양종사록』을 기본자료로 하여, 18세기 전반에 안동에서 이루어진 종사강학의 사례를 분석한 내용이다. 종사 자체는 평생에 걸쳐 이어지지만, 종사강학은 일정기간 면대면으로 공부하는 강학유형을 말한다. 이러한 종사강학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 이들의 관계는 사제관계로 결합되고 강학 이후에도 방문, 서신교환, 강회 등을 통해 평생동안 그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본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금양종사강학이 이루어진 배경에는 세 가지 요인이 있었다. 우선 18세기를 전후해서 갈암학파가 영남 지역에 영향력을 확대했던 것을 들 수 있다. 갈암함파의 영향력은 비단 퇴계학파 권역만이 아니라 남명학파 권역까지 미쳤으며, 이 때문에 함안의 유생인 황후간이 안동의 밀암을 찾아 사제관계를 청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황후간이 밀암을 종사하게 된 데에는 당시 영남지역의 정치적 소외 그리고 중앙 중심의 과거정책으로 과 거를 통한 진출 가능성이 약화된 상황도 영향을 미쳤다. 위기지학과 과업공부는 사실상 두 가지 다른 공부가 되었고, 황후간은 이 가운데 위기지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위해 밀암을 찾았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결단은 단지 불안한 현실을 도피하는 행위가 아니라, 학자 본연의 자세를 확립하고 지방문화 순화의 중심역할을 수행하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하였다. 둘째, 금양종사강학의 강학과정을 분석하였다. 강학은 약 1달 동안 진행되었는데, 주요 교재는 『대학』과 『가례』였다. 강학은 평가, 강독, 문답으로 이루어졌다. 밀암은 이 기간 동안 황후간을 면밀히 평가하여 그에 따 라 강학을 진행하였고, 필요한 경우 추가설명이나 시범을 보이기도 하였다. 강독에서는 각 교재의 대강을 파악 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그것을 위기지학의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이를 위해 다양한 문답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셋째, 금양종사강학의 성격은 3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우선 금양종사강학은 위기지학의 입문과정이었다. 다음으로 진행방식의 측면에서 보면 학습자 위주로 진행되면서, 밀암과 황후간의 전인격적 사제관계가 형성되는 강학이었다. 마지막으로 밀암이 갈암학파의 2세대 인물이고, 갈암학파가 퇴계-학봉계열을 계승한 학맥이라 는 점에서 금양종사강학은 황후간을 퇴계학으로 입문시키는 강학이기도 하였다. This research is a case study of the Isagoge(從師講學) at Geum Yang. The Isogoge means the introductive education of Learning to become a sage(爲己之學). The duration of the Isogoge was for one month between Mil Am(密菴, the teacher) and Hwang, Hu Gan(黃後幹, the student) in the form of face-to-face education. This case shows the archetypal example of the Isagoge of Jo Seon in 18th century. The results are as follows. First, the backgrounds of the Isogoge can be seen from three dimensions. The appearance of Gal Am(葛庵) school, the increase of the recouncers of the state examination and a new vision of scholar activity in home town enabled the Isogoge. Second, the process of the Isogoge contained three activities. Evaluation, lectio(reading with comments, 講讀) and dialectic(exchanging question-answers, 問答) were main elements of the Isogoge. Third, the meanings of the Isogoge can be told from three points of view. The Isogoge was a successful introduction process to the Learning to become a sage, a whole personal and student-centered learning and an entrance to the Toe Gye school. This case study can be followed by some additional researches which examine the another cases and the educational networks of the provi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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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과 "회": 중국양명학의 엘리트 단계에서 민간화 단계로의 전화

        전명 퇴계학부산연구원 2011 퇴계학논총 Vol.18 No.-

        명나라 중기에서 말기에 걸쳐 중국양명학이 발생하게 된 상황 가운데 하나는 엘리트 단계에서 민간화 단계로의 전화과정이다. 중국 양명학에 있어서의 이러한 전화과정은 주로 정치와 경제의 중심인 강우 등의 지역에서발생하였다. 명 중후기 민간종사의 보편화 추세와 종족의 민중화 진행과정에서 각 향에서 주관하는 사학이나 사숙 또한 나날이 가숙 등과 같은 종족성의 사학조직을 매체로 교화와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것을 결합하였으니,이로부터 당시의 강학활동은 점차적으로 민간화되었다.그렇다면 회와 강은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회강"은 다만 강학의확대화에 지나지 않다. "회강"과 "강회"는 하나는 "강"에 중점이 있고, 하나는 "회"에 중점이 있다. 하나는 "강"을 학(學)으로 하고, 하나는 "회"를 학으로 한다. 학술면에 있어서는 "강회"보다는 "회강"의 범위가 크게 할 수 있으니, 이는 오늘날의 시민강좌와 유사하다. 그리고 "강회"는 오늘날의 대중문화제와 유사하다 할 수 있으니, 이는 일반적으로 그룹회의의 형식으로 드러난다. 학보다는 "회"에 오락성이 많고, 회에 비해 강이 보다 학술성을 띤다고 하겠다. "강"의 대상은 상대적으로 좁은 데 비해, "회"의 대상은 강보다는넓다. "회"의 주요 연결체는 종족이고, 중요무대는 사당이며, "회"의 주요대상은 족인(族人)이다. 또한 제사 같은 종족활동과 결합시켜 강회활동을 전개한다. 이에 비해, "강"의 주요 연결체는 사우(師友)이고, 주무대는 서원이며, 주로 동지(同志)를 대상으로 이루어진다. 또한 학을 밝히고 도를 증명하는 등 학술활동과 결합되어 강학활동이 전개된다.당시 전개되었던 왕학강회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사상의다원화 2. 수단의 다양화 3. 대상의 집단화 4. 강간의 유동화 5. 시간의 자유화 6. 입회의 규모화 7. 구조의 계층화 8. 교양의 생활화 9. 활동의 오락화 10. 의식의 종교화. 이 가운데 중심이 되는 것은 사상의 다원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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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동기시대 청천강 및 대동강유역의 취락과 문화접변 : 남한지역과의 관계를 겸하여

        이형원(Lee, Hyung-won) 중부고고학회 2014 고고학 Vol.13 No.2

        청천강유역의 청동기문화는 남한 가락동유형의 성립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으며 그 배경에는 주민의 이주가 상정되었다. 이는 둔산식주거지와 가락동식토기 이외에도 비둔산식주거지와 가락동식토기의 조합도 확인되는 점에서 남한 가락동유형의 성립과 전개양상을 다각도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대동강유역의 각형토기문화도 남한의 중부지역에 영향을 주었지만 그 영향은 약했다. 대동강유역 취락에서 청동기가 출토된 주거지가 주목된다. 청동기는 주로 대형주거지에서 확인된 점에서 거주인의 높은 위상과 직결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으므로 맥락에 따른 해석이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청동기가 나온 주거지는 모두 화재로 폐기된 점에서 볼 때, 계층화가 진행되어 가는 농경사회에서 나타나는 집단 간의 갈등과 대립의 산물로 추정된다. 다만, 이는 장제적인 측면에서 가옥장으로 볼 여지는 남아있다. 한편 일본 야요이시대 공동체 연구의 기본 개념에 해당하는 단위집단 또는 세대공동체론을 한반도 청동기시대의 사회고고학 연구에 적용할 때에는 신중해야 한다는 점도 지적했다. 청천강유역과 대동강 중하류역은 서로 다른 물질문화를 갖는 점에서 지역성이 발현된 곳이며, 두 지역의 사이에 위치하는 대동강 상류역은 문화접변이 일어난 점이지대에 해당한다. 이 점이지대의 토기상은 대동강 중하류역과 동일하지만, 주거구조는 청천강유역과 같은 양상이다. 대동강 상류역은 취사 및 저장용의 일상용 토기가 집단의 정체성과 밀접하다는 점에서 대동강 중하류역의 각형토기문화와 강한 문화적 동질성을 가졌으며, 청천강유역의 주거 양식을 수용한 것으로 추정했다. 이와 관련하여 향후 논의의 활성화를 위해 두 지역 간의 고고자료에서 문화접변 현상에 해당하는 점이지대가 확인될 때의 상황을 가설적으로 제시해보았다. This thesis is to review the Bronze Age settlements at the Cheongcheon River and Daedong River basins located in the northwest of the Korean peninsula. The Cheongcheon River basin and the Daedong River mid-and-downstream basin used to have different material cultures in the early Bronze Age. It has been found out that the upstream area of the Daedong River, which is adjacent to the two other areas, was a transitional zone, considering excavated potteries and dwelling structures. In addition, it is pointed out that it should be careful when applying unit group theory or multigenerational community theory, which are research concepts used in the studies on the Japanese Yayoi Age, to social researches of the Bronze Age on the Korean peninsula. Lastly, it examines excavation conditions of the Bronze Age remains from the dwellings and settlements. It is considered that dwellers had high social status from the size of their dwellings, but there can be other cases as well, which require more prudent analysis and judgment. From the fact that all dwellings with Bronze Age remains were on fire, there was likely to be conflicts and confrontation among different groups. But there is also possibility of “cremation of a body in its dwelling place” as a way of fune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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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말 두만강 지역의 유학자들-김노규(金魯奎)와 김정규(金鼎奎)를 중심으로-

        우경섭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4 한국학연구 Vol.0 No.32

        19세기 말 두만강을 건너 간도로 이주한 수많은 조선인들 중에는 상당수의 전통적 유학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가장 먼저 두만강 너머로 이주했던 함경도 북단의 유교 지식인들은 대체로 중앙 학계에서 栗谷 李珥와 尤菴 宋時烈에 의해 정립된 서인-노론 학맥을 계승하고 있었다. 송시열의 제자 鶴巖 崔愼과 農巖 金昌協 등이 이 지역에서 강학을 시작한 이래 그 문하에서 함경도 출신 유학자들이 본격적으로 배출되기 시작하였는데, 19세기 말~20세기 초 이 지역의 대표적 유학자인 鶴陰 金魯奎와 龍淵 金鼎奎 역시 송시열이 제시한 조선중화주의의 사상적 흐름 속에서 두만강을 중심으로 한 자신들의 생활세계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금수’인 서구의 침략에 직면했던 시대적 상황, 그리고 중국인들과 뒤섞여 거주하며 함께 항일운동을 전개해야 했던 역사적 경험은 한반도의 협소한 시야에 갇혀있었던 전통적 중화주의의 폐쇄성을 일정 정도 극복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들은 태생적 혈통 내지 지역보다는 유교문화에 대한 분발 여부가 화이분별의 주된 기준이라는 문화적 화이론의 기반 위에서, 조선이 중화문명의 계승자일 뿐 아니라 함경도 역시 문명의 중심지로 탈바꿈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화이의 可變性을 재확인하는데 그치지 않고, 화이가 시대에 따라 지역적으로 순환한다는 주장을 전개하며, 자신들이 거주하던 두만강 유역을 중화문명 부흥의 새로운 공간으로 인식하는 가운데 그 곳에서 유교적 이상사회를 건설하고자 노력하였다. 요컨대, 김노규와 김정규 같은 한말 함경도의 유교 지식인들에게 두만강은 청과 조선, 중화와 이적을 가르는 경계선이 아니었다. 그리고 아직까지 두만강 너머의 공간 또한 불우한 유랑의 땅이나 독립운동의 근거지로서 인식되지도 않았다. 지금의 함경북도 일원 및 연변 지역을 아우르는 새로운 중화세계의 건설, 그것이 그들의 꿈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이 20세기 초반 적지 않은 유학자들로 하여금 두만강을 건너 연변 지역으로 이주할 수 있게 만들었던 사상적 배경을 이루었다. 19世紀末期, 越過豆滿江移居間島的衆多朝鮮人中也包括了相當一部分的傳統儒教知識分子。尤其是最早遷居的咸鏡道北端的儒學者們, 他們基本上繼承了中央學系中栗谷李珥和尤菴宋時烈代表的西人-老論學脈。宋時烈的弟子鶴巖崔愼和農巖金昌協等在咸鏡道講學之後, 其門下開始正式培養咸鏡道的儒學者。19世紀末到20世紀初期, 咸鏡道的著名儒學者――鶴陰金魯奎和龍淵金鼎奎繼承了宋時烈的朝鮮中華主義思想, 并以此來認識他們所處的豆滿江地區的生活世界。 在遭受“禽獸”西歐侵略的時代背景下, 再加上與當地混居的中國人共同抗日的歷史經歷, 使他們從一定程度上克服了局限于韓半島狹小視野下的傳統中華主義的封閉性。他們不按天生的血統和地區來區分華夷, 而是以儒教文化的發展程度爲標準, 即以文化的華夷論爲本, 提出朝鮮不是僅有的中華文明繼承者, 咸鏡道也可以蛻變成文明中心的可能性。他們不僅重新確認了華夷的可變性, 還提出華夷隨時代變化在地區間循環的主張, 並且將他們所在的豆滿江流域視爲中華文明復興的新空間, 爲建設豆滿江的儒教理想社會而努力。 總而言之, 對金魯奎和金鼎奎等韓末咸鏡道的儒學者來說, 豆滿江並非淸朝和朝鮮, 中華和夷狄的分界線。而且, 將這片地區視作顛沛流離之地, 或獨立運動根據地的認識還未能成形。他們的夢想是以豆滿江下流的慶源爲中心, 在現今咸鏡北道一帶和延邊地區上建設起新的中華世界。正是在這種思想背景下, 20世紀初期有不少的儒學者跨越豆滿江而遷居延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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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ㆍ중학생의 자전거 임계강도 운동의 지속시간과 영향요인 분석

        이동규,이병근 한국운동과학회 2003 운동과학 Vol.12 No.4

        이동규, 이병근. 초·중학생의 자전거 임계강도 운동의 지속시간과 영향요인 분석. 운동과학, 제12권 제4호, 703-714. 2003. 본 연구의 목적은 초·중학생의 자전거 임계강도 운동의 지속시간과 영향요인을 비교 분석하여 임계강도의 유산소성 지표로서의 타당도를 검증하고 현장에서 정확한 임계강도 산출을 위한 지침을 제공하는 데 있다. 피검자는 초등학생과 중학생 남자 16명(12.7±1.2yrs), 여자 19명(13.0±1.8yrs), 총 35명이었다. 임계강도는 1∼10분에 탈진에 이르는 4회의 자전거 운동 후에 열량, 강도 및 시간의 함수 관계를 이용하여 산출하였다. 임계강도 수준에서 30분 동안 혹은 탈진까지 자전거 에르고미터 운동을 실시하는 동안 운동지속시간을 측정하였으며, 지속시간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을 분석하였다. 남자 초등학생과 중학생, 여자중학생은 CP가 AT보다 7.7∼13.8% 점도 크게 나타났으나 여자 초등학생은 오히려 AT가 4.4% 정도 크게 나타났다. 임계강도 운동의 지속시간은 남학생이 22.12±7.42분이고, 여학생이 20.08±7.20분으로 남학생이 다소 길었으며, 초등학생이 22.45±7.50분이고, 중학생이 19.50±6.90분으로 초등학생이 다소 길었으나, 유의한 차이가 나타나지는 않았다. 임계강도 운동의 지속집단간 CP 영향요인을 비교한 결과 단위체중당으로 무산소성 역치 수준이 높은 집단일수록 임계강도에서 지속하는 시간이 증가하였다. 임계강도 운동의 지속시간과 CP 영향요인간의 상관관계를 분석한 결과, 임계강도 운동의 지속시간은 단위체중당 평균AT(/kg)와 CP 추정을 위한 단위체중당 평균강도(W/kg)와는 유의한 정적 상관관계가 나타났다. 또한 CP 지속시간은 평균CP(W)와 CP추정 최저강도(W)와는 유의한 부적 상관이 나타났다. 결론적으로 초·중학생을 대상으로 임계강도의 개념을 적용한 결과, 임계강도가 무산소성 역치를 미미하게 과대평가 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나, 유용한 유산소성 파워의 지표로 활용할 수 있겠다. 임계강도 운동의 지속시간은 단위체중당 평균AT(W/kg)와 CP 추정을 위한 단위체중당 평균강도(W/kg)와는 정적 상관이 나타났으며 평균CP(W)와 CP추정 최저강도(W)와는 부적 상관이 나타났다. Lee, D.K., Lee, B.K. Effects factors and exorcise time at critical power of bicycle ergometer of primary and middle school students. Exercise Science. 12(4): 703-714, 2003. The purpose of this study were to analyze the effects factors and exorcise time at critical power of bicycle ergometer of primary and middle school students, and to provide the guidelines for the measurement of critical power. The subjects were consisted of 16 males(12.7±1.2 yrs), 19 females(13.0±1.8 yrs) on primary and middle school. The critical power were calculated by regression analysis according to the relationship among work, intensity and time after four cycle ergometer test to fatigue from 1 to 10 minute. We were measured bicycle ergometry exercise lime at CP for 30 minutes or fatigue. The main findings were as fellows; On male Primary, middle school students, CP were 7.7∼13.8% more higher than AT However, on female primary school students, AT was 4.4% more higher than CP Exorcise time at CP of male students was 22.12±7.42 minuts, that of female students was 20.08±7.20 minutes. As a results of comparison CP effects factors among exorcise time groups, the higher group of relative AT were more longer exorcise lime. On correlation analysis among exercise lime at CP and effects factors, exorcise time had a positive relationship with relative AT(W/kg), and relative average Intensity(W/kg) for CP measurement. Exorcise time had a negative relationship with CP(W), and lowest intensity(W) for CP measurement. It is concluded that CP was a little overestimate AT, but CP was useful index on aerobic power. Exorcise time at CP had a positive relationship with relative AT(W/kg), and relative average intensity(W/kg) for CP measurement, and had a negative relationship with CP(W), and lowest intensity(W) for CP measur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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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古代 滿洲의 ⽔路交通과 松花江

        이승호 백산학회 2023 白山學報 Vol.- No.127

        본고에서는 만주 지역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며 흐르는 松花江 수운에 주목하여, 부여와 고구려‧ 물길‧발해 등 고대 만주의 諸세력이 이러한 강의 ⽔路를 어떻게 활용하였는지 검토하였다. 먼저북류 松花江 중류 유역에서 성립‧발전한 부여를 중심으로 해당 시기 松花江 수운의 의미를 짚어보았다. 嫩江 유역에 위치한 ⽩⾦寶‧漢書 유적, 동류 松花江 유역의 望海屯 유적과 索離溝-慶華城 址 유적, 북류 松花江 유역의 楡樹 ⽼河深 유적 등 부여 문화와 관계된 주변의 ⽔邊 유적들을 검토하고, 이들 유적과 부여 문화의 관계가 松花江-嫩江 ⽔路를 통해 형성되고 연결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또한 古代의 만주 지역 수로교통 실례로서 『魏書』 勿吉傳에 전하는 ⼄⼒⽀의 사행길을 검토하였다. 당시 ⼄⼒⽀의 사행에 松花江-嫩江-洮兒河 수로가 활용되었던 사실에 주목하고, 당시 이러한 수로를 통해 대규모 물자 운반이 가능했음을 확인하였다. 松花江 수운은 고대 부여의 지배 영역을 이어 주던 교류망의 핵심이었으며, 고구려와 북방의 유목‧수렵 세력을 연결하였던 교통로였고, 勿吉이 국제 사회로 나아가는 창구이기도 하였다. 그리고이처럼 松花江을 중심으로 펼쳐진 북방 수운 교통을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통합적으로 운용하였던최초의 국가는 발해였다고 볼 수 있다. 고대 嫩江-松花江-⿊⿓江 수로는 만주 각 지역을 연결하는교통로이자 물자 유통의 혈맥이었다. This paper focuses on the water transportation of the Songhua River(松花江), which flows across the Manchuria region, and analyzes how ancient Manchurian states such as Buyeo, Goguryeo, Wuji (勿吉), and Balhae(渤海) used the waterway of the Songhua River. First, the water transport traffic of the Songhua River during that period was examined, focusing on Buyeo, which was founded and developed in the middle basin of the Songhua River flowing to the north. Baijinbao(⽩⾦寶)‧Hanshu(漢書) ruins located in the Nunkjang(嫩江) basin. The wanghaitun (望海屯) ruins and the suoligou(索離溝)-Qinghua(慶華) ruins in the east-flowing Songhua River basin. Laoshu(楡樹) Laoheshen(⽼河深) ruins in the north-flowing Songhua River basin. The relationship between ruins related to the Buyeo culture and the river that flowed around them was analyzed. This suggested the possibility that these ruins and the Buyeo culture were formed and connected through the Songhua River-Nunkjang waterway. And, as an example of water transportation in the ancient Manchurian region, the travel route of the Eulyeokji(⼄⼒⽀) reported in Wei Shu(魏書) Wuji Biography was reviewed. We paid attention to the fact that the Songhua River-Nunkjang-Taoer River(洮兒河) waterway was used in the travel of Eulyeokji according to the records, and confirmed that large-scale transportation of goods was possible through this waterway. Songhua River water transportation was the core of the transportation network that connected the ancient Buyeo dominions. This was a transportation route that connected Goguryeo with the nomadic and hunting countries of the north, and was also a window through which Wuji advanced into the international community. And Balhae was the first country to organically connect and integrate northern water transport centered on the Songhua River. The ancient Songhua River-Nunkjang-Heilongjiang(⿊⿓江) waterway was a transportation route connecting each region of Manchuria and a blood vessel for material distrib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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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인강은 누구의 강인가? : 뤼시앵 페브르의 독불 접경지역을 바라보는 시선

        박용희(Yonghee Park) 한국독일사학회 2021 독일연구 Vol.- No.48

        라인강은 스위스 중부의 알프스에서 발원하여 북해로 흘러드는 긴 강이다. 그 강을 따라 산재한 국가들이 역사 속에서 영토와 경계를 둘러싼 많은갈등을 겪었으리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중에서도 프랑스와 독일의 대결은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 글이 다루고자 하는 1차 대전 이후 프랑스와 독일은 강과 인근지역을 둘러싸고 분쟁의 와중에 있었다. 당시는 전례없는 상흔을 남긴 전쟁 직후였고 또 국경선을 둘러싼 갈등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 글은 이런 대결의 시기에 양국의 지식인들, 그중에서도 역사학자들이 보여준 모습에 주목하고자 한다. 영토를 둘러싼 분쟁에 전문가로 역사학자들이 개입하는 것은 드문 일이아니다. 사실 오늘날까지도 세계 도처의 분쟁지를 둘러싸고 역사학자들이소유권 주장을 위한 역사적 근거 마련에 나서는 일이 종종 일어나곤 한다. 프랑스와 독일의 경우에도 그러했다. 이 글이 다루는 1차 대전 이후에는 다수의 역사학자들이 라인지방을 역사적 자국 영토로 바라보고 이를 공공연히 주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한 뤼시앵페브르는 그들과 달리 이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찾고 있었다. 우선 그는 역사학자들의 정치적 참여에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라인강을 둘러싼 양국 역사학자들의 대결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으며, 또 그들의 라인강 인식이 대체로 편협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라인강을 그 누구의 강도 아니라 “중부유럽의 강”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었다. 그는 『라인강. 역사와 경제의 문제』이란 책을 통해 라인강을 둘러싼 다양한 문화와 민족의 공존의역사를 밝히고자 했다. 사실 이런 그의 시도가 학술적 의미를 넘어 분쟁지를 둘러싼 양국간의 화해와 공존을 위한 모색이었다는 점은 너무나 명백했다. 물론 그의 책은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없다. 책은 발간 후 대중적으로 크게 주목받지 못했으며 또 곧 관심의 대상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그가 양국역사학자들의 편협한 인식을 극복하고자 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될 수 있을것이다. 물론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의 주장도 한계를 가진다고 할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두 가지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위기의 시대에 평화와 화해, 공존을 부르짖은 선구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프랑스 애국주의자 그리고 자유주의적 지식인이었으며, 따라서 화해와 공존의 대상이어야 할 독일에 대해서는 결코 관대하지만은 않았다. 공존과 화해의 문제는 계속되는 고민으로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The Rhine River is a long river that originates from central Switzerland and flows into the North Sea. It can be assumed that there have been many conflicts over territories and boundaries in history along the river. Among them, the match between France and Germany is best known. In particular, after World War I, France and Germany were in the midst of serious disputes. It was right after the war, and the conflict over the border continued. This article focuses on the historians of both countries over the Rhine River and the border area during this confrontation. Historians often intervene in disputes over territories. Even today, historians often seek to lay historical grounds for claiming ownership over disputed areas around the world. Even after World War I, many French and German historians were looking for historical grounds to claim the Rhine region as their territory. However, unlike them, French historian Lucien Febvre was looking for a way to truly resolve the disputes over the Rhine River and nearby regions. First of all, he was critical of the political participation of historians. And he saw that most historians understand the history of the Rhine River too narrowly from their own national perspective, and as a result, they are in extreme conflict. Criticizing this attitude, he was arguing that the Rhine River is not a river in France or Germany, but a river in Central Europe. In a study dealing with the history of the Rhine River in the early 1930s, he tried to reveal the long history of coexistence of two nations surrounding the Rhine River. It should be said that his efforts were not simply academic, but a search for reconciliation and coexistence between the two countries. Of course, his book cannot be said to have been successful. Since its publication, the book has not received much public attention. However, it can be highly appreciated that he tried to overcome the narrow perception of historians from both countries. Of course, from today s point of view, it can be said that his argument has limitations. Because he was showing both sides at the same time. First of all, he showed a cry for peace, reconciliation, and coexistence in the era of confrontation between nations. At the same time, however, he was a French patriot and liberal intellectual. Therefore, he did not hide his negative perception of his opponent Germany. Co-existence and reconciliation will inevitably remain a constant concern about how it can be possi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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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족(羌族) 자수 문양을 응용한 제품 디자인 개발 -스타벅스 디자인 개발 사례를 중심으로-

        하아여,정원준 한국일러스아트학회 2021 조형미디어학 Vol.24 No.4

        The Qiang are one of the ethnic minorities with a long history living in the southwestern part of China. They have maintained a diverse and rich cultural appearance to this day. It was inscribed on the China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List. This study focuses on the Starbucks product design case using the Kangjok embroidery pattern as the main research object. First, the development process and characteristics of Qiang embroidery patterns through the literature review method, and then, through case analysis, an analysis of a new design language that combines Starbucks products and Qiang embroidery elements is attempted. take a look at Next, through a case-by-case comparison method, by combining elements of traditional Qiang embroidery with modern product design, a more diversified design format is created, while at the same time realizing the transmission of Qiang embroidery patterns, an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in the modern product design format. The results of this study indicate that the value of utilizing traditional elements and social luxury can be increased only when these regional differences and the individuality of the aesthetic object are sufficiently taken into account when the design of traditional crafts is borrowed. Qiang embroidery patterns are rooted in ancient traditional culture, and integrating them into modern product design will not only promote the development of traditional folk craft art, but also provide new ideas and inspiration to the field of modern design. 강족(羌族)은 중국 서남부 지역에 거주하는 오랜 역사를 지닌 소수민족 중 하나로, 오늘날까지 다양하고 풍부한 문화적 모습을 간직해 오고 있으며 특히 강족 자수(刺繡)는 강족의 문화를 전승하는 대표적인 문화 담지체로서 2008년 중국 무형문화유산목록에 등재되었다. 본 연구는 강족 자수 문양을 응용한 스타벅스 제품 디자인 사례를 주요 연구 대상으로 한다. 먼저 문헌 정리법을 통해 강족 자수 문양의 발전 과정 및 특성을 한 다음, 사례 분석법을 통해 스타벅스 제품과 강족 자수 요소를 결합한 새로운 디자인 언어에 대한 분석을 시도함으로써 강족 자수 요소가 현대 디자인에 부여하는 독특한 매력을 살펴본다. 그 다음은 사례 비교법을 통해 현대 제품 디자인에 강족의 전통 자수 요소를 결합하여 더 다원화된 디자인 형식을 생성함과 동시에 무형문화유산인 강족 자수 문양의 현대 제품 디자인 형식에서의 전승을 실현한다. 연구결과는 전통공예 디자인 차용 시 이러한 지역 간 차이와 심미 대상의 개성을 충분히 고려해야만 전통적 요소의 활용 가치와 사회적 사치를 높일 수 있을 것으로 알 수 있다.강족 자수 문양은 유구한 전통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를 현대 제품 디자인에 융합하는 것은 전통 민간공예 예술의 발전을 촉진할 뿐만 아니라 현대 디자인 영역에 새로운 아이디어와 영감을 제공할 것이다.

      • 강섬유로 보강된 초고강도 콘크리트의 뽑힘 실험에 의한 부착 거동에 대한 연구

        최창식,배백일,김경주,최현기 한국방재학회 2014 한국방재학회 학술발표대회논문집 Vol.2014 No.-

        최근의 콘크리트 공학의 발전은 콘크리트의 압축강도 상승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으며 연구자들은 이를 초고강도 콘크리트로 지칭하고 있다. 초고강도 콘크리트로 제작된 부재는 일반적으로 얇고 긴 형태를 가지게 되며 프리캐스트 콘크리트의 형태로 시공된다. 따라서 이러한 부재들은 적합한 부착 강도 및 앵커에 의해 서로를 연결시켜 줄 필요가 있다. 현재까지 초고강도 콘크리트의 제 성능에 대한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으나, 부착특성에 대한 연구는 활발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연구에서는 얇은 초고강도 콘크리트 부재에서 나타날 수 있는 쪼개짐 파괴를 막기 위해 섬유로 보강되었으며 반응성 분체 콘크리트로 제작된 초고강도 콘크리트의 부착강도를 파악하기 위한 실험을 단순 뽑힘 실험 방법을 통해 수행하였다. 실험에 사용된 콘크리트의 압축강도는 100~200MPa로 설정하였다. 콘크리트의 압축강도 뿐만 아니라 섬유의 보강효과, 피복 두께의 효과를 파악하기 위한 실험을 구성하였다. 대부분의 실험체가 철근의 길이 방향과 같은 방향으로 발생한 균열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러나 실험 결과 쪼개짐에 파괴시의 부착강도가 보통 또는 고강도 콘크리트에 비해 큰 부착강도를 보유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부착강도는 피복 두께에 크게 영향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피복두께의 증가에 대한 부착강도의 상승폭은 콘크리트의 강도 증가와 함께 감소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강섬유는 부착강도를 크게 증진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었으나 이 또한 콘크리트의 압축강도 증가와 함께 부착강도 증진율이 낮아지는 현상을 나타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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