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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

        죽막동 제사유적과 오키노시마 제사유적을 통해 본 5~6세기 백제와 왜의 해상 교류

        우재병(Woo Jae-Pyoung) 한국고대학회 2018 先史와 古代 Vol.- No.58

        5~6세기경, 백제와 왜 사이 해상 교류를 시사하는 결정적인 고고학적 자료는 죽막동 제사유 적에서 출토된 왜 양식 석제 모조품들이다. 이 석제 모조품들은 죽막동 제사에 왜 관리ㆍ상인 들의 참석 사례가 있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죽막동 제사유적에서 보이는 이러한 정황 은 5~6세기경, 백제와 왜 사이에 정치 경제적 연대 강화를 위한 새로운 외교적 노력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죽막동 제사유적이 백제 중앙이 관여한 국가적 제의 장소였다는 점은 백제 중앙 양식의 최상급 헌공품의 존재로부터도 충분히 인식할 수 있다. 4세기경, 백제 서해안 항로 상의 교역선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죽막동 제사는 시작되었다. 그런데 5세기 후엽경, 서울지역 백제 수도가 함락되고 공주로 천도하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죽막동 제사에서는 기능의 변환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에는 국가의 안정을 기원하는 제사 기능이 새롭게 추가 ㆍ강화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오키노시마 제사유적도 교역선의 안전 항행을 기원하는 왜의 국가적인 해안 제사유적 이었다. 그런데 오키노시마 제사유적은 현해탄 항로의 메인 루트에서 조금 떨어진 무인도에 형성된 제사유적이라는 독창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즉 오키노시마 섬은 왜 교역선의 일상적인 휴식 물자보급과 교역을 위한 장소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 제사유적은 5~6세기경 백제와 왜 사이 해상 교류의 실체를 입증하는 대규모 해안 제사유적이라는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있다. A decisive archaeological evidence indicating that Paekche and Wa engaged in maritime trade with each other around the 5-6C is the Wa-style miniature stone goods excavated from the Chungmakdong Ritual Site. These miniature stone goods clearly show that officials and merchants from Wa participated in rituals held at Chungmakdong. This means that there were new diplomatic efforts to strengthen the political and economic relationship between Wa and Paekche in the 5-6C. The existence of best quality Paekche-style offerings found at the Chungmakdong Ritual Site implies that the site was a venue for national rituals organized by the central government of Paekche. Rituals at Chungmakdong began around the 4C, to pray for the safety of the trading vessels that used the sea route along the west coast of Paekche. But in the late 5C, amidst the national crisis in which the capital of Paekche in the Seoul area was captured and the government had to move its capital to Kongju, it is presumed that the function of the Chungmakdong Ritual Site had changed. For instance, rituals wishing for national stability were newly added and further solidified. The Okinoshima Ritual Site was also a national seaside ritual site of Wa, established for safe navigations of its trading vessels. Yet, the Okinoshima Ritual Site is distinct in the sense that it is located at a deserted island quite far from the main route of the Genkai Sea. In other words, the Okinoshima Island was not a place for the Wa trading vessels to rest, trade, or receive materials. The two ritual sites, however, share a commonality in that they were both large-scale seaside ritual sites demonstrating the substance of maritime trade between Paekche and Wa during the 5-6C.

      • KCI등재후보

        만주와 한반도 선사시대 제사유적의 검토

        유태용 한국유라시아연구원 2023 유라시아문화 Vol.9 No.-

        제의 또는 의례란 종교적인 의식이나 일정한 법 또는 준칙에 따르는 예식 또는 예법을 가리키며, 조령(祖靈)에 대한 외경심과 조상숭배사상에 기반하여 조상을 추모하고자손의 번영을 도모하는 의례적 행위로서 제사의 기원을 추정할 수 있다. 한국 선사시대의 제사유적은 의례적 관점에서 돌돌림유적이나 환상열석, 환구유구, 매납유구, 대암유구 등에 대한 연구가 일부 이루어졌으며, 제사적 관점에서의 고고학적 연구는 거의다루어지지 못하였다.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적석총이나 돌돌림유적 또는 환구유구 등은 종교적이든 이념적이든 일정한 의식을 위해 준비된 일정한 공간에 해당할 것이며, 제사유적도 마찬가지로 제사의 예를 행하기 위한 특별한 공간 또는 장소에 해당하는유적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본 논문에서는 제사와 관련된 유구로 해석될 수 있는 적석유구나 수혈유구 같은한국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제사유적(祭祀遺蹟)에 대한 기초적인 검토를 하였다. 이는 이러한 제사유적의 연구를 통하여 이 땅에서 삶을 영위했던 한국 선사시대 사람들의 정신적 또는 이념적 측면에서의 정체성의 기원과 형성과정을 이해하는데 있어서기초적 연구가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만주와 한반도 일대의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제사유적은 28곳의 유적지에서 52기의 유구가 조사되었다. 만주지방에서는 내몽고 오한기 초모산유적ㆍ성자산유적, 요녕성 조양 반납산유적ㆍ동산취유적ㆍ능원 우하량유적ㆍ통화 토주자유적 등에서6기가 조사되었고, 한반도 북부지방에서는 함경북도 길주 평륙리유적, 평양시 룡성구역 화성동 당모루유적, 그리고 황해북도 연탄군 성매리 송신동유적 등에서 돌돌림유적등이 조사되었다. 중부지방에서는 양평 신원리유적, 하남 덕풍동유적, 오산 가장동유적등지에서 3기의 제사유적이 발굴되었다. 호남지방에서는 부안 계화도 산상유적, 담양성산리유적, 장흥 신풍유적 등 3곳에서 제사유적이 조사되었다. 영남지방에서는 대구동천동유적, 진주 평거동유적ㆍ상촌리유적ㆍ소남리유적, 산청 묵곡리유적, 밀양 금천리유적, 창원 상남유적, 마산 가포동유적, 김해 구관동유적, 부산 범방유적ㆍ다대동봉화산유적 등 13곳에서 모두 27기가 조사되었다. 제사유적의 입지는 만주지방에서는 혼강유역의 서안 충적대지에 조성된 통화 토주자유적을 제외하면, 내몽고 오한기 성자산유적이나 요녕성 조양 반납산유적 등에서와같이 주로 산정상부나 산등성이 같은 고지대에서 조사되었다. 반면에 한반도 제사유적은 부안 계화도유적이나 부산 다대동 봉화산유적 같은 극히 일부 사례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제사유적은 높은 고지대의 산상유적보다는 비교적 지대가 낮은 산등성이나가지능선의 정상부에 입지하거나 또는 진주 남강이나 경호강과 같은 강안의 충적대지에 주로 조성되는 경향이 있다. 선사시대 제사유구의 구조는 28곳 52기의 유구 가운데 석축유구, 적석유구, 소형제단유구, 대형암반, 수혈유구, 토석혼적유구, 구상+수혈유구 등 모두 7가지로 분류된다. 석축유구는 오한기 초모산유적이나 능원 우하량유적 등지에서와 같이 평평한 판석을 평적하는 평적형 석축유구와 통화 토주자유적이나 양평 신원리유적 등에서 조사된평탄대지 가장자리에 대형 할석을 열석으로 배치한 열석형 석축유구가 있다. 이외에도장흥 신풍유적 1호 적석유구나 밀양 금천리 ...

      • KCI등재

        우하량 유적을 통해 본 홍산문화의 제사체계 형성과 변화

        홍지혁(Hong Jihyeog) 동북아역사재단 2020 東北亞歷史論叢 Vol.- No.69

        홍산문화는 기원전 4,500~3,000년경 중국 동북지방에서 등장했다. 홍산문화는 중국 동북지역에서 제사가 처음 등장했고 제사가 사회 시스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측면에서 중요하다. 그러나 현재 홍산문화에 대한 연구는 홍산문화를 문명 혹은 국가로 정의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제사를 바라보고 있다. 이 연구에서는 홍산문화 제사체계의 변화에 대해서 연구하고자 했다. 이를 위한 연구 대상으로 우하량 유적을 정했는데 우하량 유적의 경우, 유구 및 유물의 형태 변화가 층위별로 비교적 뚜렷하다. 따라서 유물 및 유구의 형식분류를 통해 제사체계를 구성하고 그 변화를 고찰할 수 있었다. 우하량 유적은 제사 유구의 등장 이전에 어떠한 인간의 점유 흔적도 확인되지 않는데 이는 우하량 유적이 철저하게 제사의 목적으로 만들어졌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유구 및 유물에 대한 비용이 증가하는데 이는 제사의 강화를 나타내며, 이후 홍산문화가 붕괴되면서 제사유적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이 연구에서는 물질문화의 변화를 조망함과 동시에 제사고고학적 개념을 도입하여 그 변화에 대입하고자 했다. 그리고 캐서린 벨의 개념을 고고학적으로 일부 수정하여 도입했는데, 그 결과 홍산문화의 제사가 강화될수록 제사의 특성이 새롭게 등장하거나 강화되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홍산문화는 정치적인 위계가 보이기 이전의 제사를 조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위계가 뚜렷하지 않은 홍산문화 사회에서 제사가 어떻게 사회통합 및 분리에 기여했는지 탐구할 수 있다면, 홍산문화 사회체계에 대한 이해도 보다 깊어질 수 있을 것이다. The Hongshan culture appeared in northeast China, around 4500-3000 BC. Since ritual was a key factor of the Hongshan culture society, understanding ritual and ritual system of the Hongshan culture is important to understand Hongshan culture. However, the current stream of research regarding the Hongshan culture looks at ritual as a way to define Hongshan culture as a civilization or state.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investigate the changes in the ritual system of Hongshan culture. The Niuheliang ritual center is possible to organize the ritual system through the classification of structures and artifacts and to examine the change. The Niuheliang was only made for rituals. Also, as time passes, the cost of structure and artifacts increases, which indicates the strengthening of ritual. Finally, as Hongshan culture collapses, the ritual site of Niuheliang stopped to function. In this study, I introduce the concept of archeology of ritual and apply this concept when investigating the change of material culture. For this purpose, I used a partially modified concept of Catherine Bell to assess archaeological material culture. As a result, I confirmed that as the ritual of the Hongshan culture transforms, new characteristics of the ritual appear and such characteristics strengthen. Hongshan culture is important since it shows rituals precedenting the political hierarchies. By exploring how ritual contributed to social integration and separation in Hongshan culture society, of which the hierarchy is unobserved, this study contributes to deepen our understanding of the Hongshan culture social system.

      • KCI등재

        동아시아에서 본 한국 목간과 제사 유적-경산 소월리유적을 중심으로

        이성시 한국목간학회 2024 목간과 문자 Vol.- No.32

        이 글은 경산 소월리유적에서 출토된 신라 목간 및 공반 유물을 검토하여 그 제사유적으로서의 성격을검토한 것이다. 경산 소월리유적 수혈 107호에서 출토된 장대한 목간은 원래 소월리 부근에 둑을 만들어 논을 개발한지역의 畓(논)을 중심으로 경작지의 면적을 조사하였을 때의 기록 목간이었다. 그 목간을 논 개발에 관련된벽사 제사를 거행할 때 제구로 사용하는 비의 자루로 재이용한 것이었다. 6세기로 추정되는 신라 목간 외에도 수혈에서는 인면토기 및 도끼와 시루가 출토되었으며, 이들 역시 벽사 제사에서 제구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인면토기는 중국 한나라 때의 화상석에 보이는 도상이나 일본의 인면묵서토기 등의 지견을 바탕으로 하면서 한국의 민속학적 검토를 통해 신라시대부터 확인되는 귀신을 형상화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목간에는 제구로 2차 이용되었을 때 ‘堤’·‘柱’·‘四’자가 습서처럼 가필었는데, 이들 모두 벽사의 제사 행위에 관련된 상징적인 문자이며, ‘堤’는 논 개발에 관련하여 제사 대상을 상징하는 문자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柱’는 목간에 기록된 ‘堤’를 기점으로 ‘田’의 위, 아래의 위치 관계가 표시되어 있거나 ‘谷門’이라는 경계지역이 표시되어 있으므로 그 장소에서의 제사행위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四’에 대해서는 방위 내지는 제사공간을 표기한 것으로 추측하고 싶다. 경산 소월리유적 수혈 107호에서 출토된 유물을 통해 제사 성격은 논 개발에 따른 벽사 제사로 보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울러 유물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투각인면옹기형토기에 그려진 인면은 한반도에서 귀신이 형상화된 것으로 보아야 하며, 가장 오래된 유물자료로 주목해야 한다. This article examines the characteristics of wooden documents and associated materials excavated from Gyeongsan Sowolri Site as ritual site. The Long wooden document excavated from Pit No. 107 of Sowolri Site was originally a investiga tion record of the area of cultivated land near Sowolri centered on the paddy fields which were devel oped by building emban㎞ents. It was reused as the shaft of a broom for the ritual to ward off evil relat ed to paddy field development. In addition to the wooden document of 6th-century Silla Dynasty, human face earthenmware, an axe and a steamer were excavated from the pit. They also presumed to be used as ritual equipments for the ritual to ward off evil. By examining the relief sculpture of Han Dynasty, ink-painted human face pots of Japan and folklore of Korea, it can be assumed that the human face earthenware symbolizes evil spirit(鬼神). When the wooden document was reused, the letters such as ‘堤’·‘柱’·‘四’ were added as writing prac tice. They are the symbolic letters related to the ritual to ward off evil. In particular, ‘堤’ shows that the ritual was for the paddy field development. ‘柱’ is thought to indicate the positional relationship of being above or below ‘田’ or to be related to the ritual in the border area called ‘谷門’. ‘四’ may indicate four di rections or ritual space. Based on the relics excavated from Pit No. 107 of Gyeongsan Sowilri Site, there is no doubt that the ritual was to ward off evil for paddy field develepment. The most notable thing among the relics it the human face earthenware, which is the oldest relics described evil spirit(鬼神) in Korean Peninsu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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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안 죽막동 해양제사유적의 세계유산 가치와 등재 방향

        심승구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5 한국학논총 Vol.44 No.-

        This is written how to guide the plan on the World heritage of Maritime Ritual Remains in Jukmak-dong, Buan. It is located at 127 degrees 52 minutes of east longitude, 35 degrees 33 minutes of north latitude, on the cliff over Byunsan peninsula of west coast in Korea. The Ritual Remains in Jukmak-dong first found Dec, 1991 by excavation research is one of the representative maritime heritage praying the safety of sailing for sea deities. So far, the result of excavation research shows significantly the ancient maritime culture of East Asia. Nearby the coast of Jukmak-dong, the wisdom, technique and religious rite has been being performed nowadays. Those tradition has been the base of maritime civilizaion not only for Korea but also for the East Asia, even meaning as transnational maritime remains. Above all, the kinds, sizes and characteristics of the excavated remnants shows the scenery of coexistence between human and nature, which is its exceptional speciality. According to this, Jukmak-dong Maritime Ritual Remains is being focused in terms that it has common things and characteristics with Munakata(宗像) and Okinoshima(沖ノ島) remnants of Japan uploaded on the World heritage, 2009. 이 글은 변산반도에 위치한 죽막동 제사유적의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작성한 것이다. 동경 127도 52분, 북위 35도 33분에 해당하는 부안 죽막동 제사유적은 한반도 서해상 남쪽에 돌출된 변산반도의 절벽 위에 위치한다. 1991년 12월 처음 발굴 조사를 통해 밝혀진 죽막동 제사유적은 바다 신(海神)에게 항해의 안전을 위해 기원하는 대표적인 해양유산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현재까지 죽막동 제사유적에서 발굴 조사된 연구 결과는 고대 동아시아의 해양 문화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죽막동 해역 인근에서 항해, 어로, 교역을 맡은 뱃사람들의 지혜와 기술, 그리고 신앙 활동은 역사적 변용을 거쳐 현대에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그러한 전통은 한국은 물론 동아시아 해양 문명을 형성하는 기틀이 된 것으로 이해될 뿐 아니라 바다의 문화유산으로서 초국가적인(transnational) 의의를 갖는다. 특히 출토 유물의 종류와 규모, 그리고 성격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 제사의식이 이루어지는 등 인간과 자연이 함께 어우러져 온 해양 문화경관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예외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죽막동 제사유적은 지난 2009년 세계유산 잠재목록으로 등재된 일본의 무나카타(宗像)․오키노시마(沖ノ島) 관련 유산군(遺産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을 뿐 아니라 공통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된다.

      • 부안 죽막동제사유적 발굴조사진전보고

        한영희,이규산,유병하 한국고고미술연구소 1992 고고학지 Vol.4 No.-

        국립전주박물관에서는 전라북도 내 서해안지역의 유적분포 및 학술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자료를 얻기 위하여 지난 1991년 12월에 약 20일간 익산·옥구·김제·부안·고창군에 속하는 해안과 도서 지역을 대상으로 지표조사를 실시하였다. 특히 부안군 변산면 격포리 죽막동마을 뒤편의 해안절벽 위에서 삼국시대 토기편과 석제유공원판(石製有孔圓板)·선형품(蟬形品) 등 제사 관련 유물이 채집되어, 독립된 제사유적의 존재 가능성을 확인하였다. 이는 이제까지 우리나라에서 제사유물 및 유적에 관한 연구가 전무(全無)한 점에 비추어 볼 때 큰 성과라 아니할 수 없다. 그 후 유적의 규모 및 발굴 가능성을 검토한 뒤 1992년 5월 7일부터 6월 24일까지 약 50일간 정식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이 유적에서는 토기와 석제모제품(石製模製品)을 비롯하여 철기, 청동기 등 제사행위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삼국시대 유물이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다. 또한 그 외에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도자편이 산포하여 오랜 기간 동안 제사행위가 이루어진 곳으로 확인되었다. 발굴조사의 성과는 제16회 한국고고학전국대회에서 소개된 바 있지만, 그 내용이 조사 경과와 유적의 성격에 비중을 둔 간략한 것이었기 때문에 본고에서는 그동안의 정리 작업을 통해 얻은 성과를 학계에 보고하고자 한다. 출토유물의 수량이 방대하고 새로운 자료가 많으므로, 삼국시대에 국한하여 확실한 양상을 띠고 있는 제사유적 유물에 대하여 소개하였다.

      • 부안 죽막동 제사유적의 경관성과 정원적 가치

        ( Hong Gyun Kim ),( Yool Jin Park ),( Jae Hyun Rho ) 한국전통조경학회(구 한국정원학회) 2010 Journal of Korean Institute of Traditional Landsca Vol.8 No.-

        본 연구는 부안 죽막동 제사유적의 공간특성 및 장소성 그리고 경관성을 검토하는 한편, 주변 영향권의 조망경관적 특질을 논의하기 위해 시도되었다. 특히 죽막동 유적의 정원적 면모와 특성 및 가치를 재발견하고, 국가 지정문화재 더 나아가서 향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죽막동 유적은 현재까지 입증된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제사유적뿐 아니라 한국의 문화수준이 동아시아에서 최고였음을 입증할 수 있는 국내 대표 제사유적으로 홍보되고 보존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해 일차적으로 세부적인 고고학적 발굴시 정원적 유구의 흔적도 면밀히 검토되어야 하며, 전통정원적 공간과 시설로서의 죽막동 유적을 조명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또한 외적으로는 훼손 및 시설 추가로 인한 물리적·시각적 교란을 방지하기 위해 사적지 등의 국가 문화재로의 지정이 요망된다. 그 이후 주변 명승인 채석강과 연계한 해양경관지구로 보전지역을 점차 확대해 나가야 할 것이다. 향후 일본 오끼노시마 해양 제사 유적처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를 위한 정부와 학계의 대응전략도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이 경우 일본 오끼노시마 유적지와의 연계성을 부각시켜 한·일 공동 대응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전략의 추진도 검토해야 할 것이다. This study on the ritual remains in Jukmak-dong, Buan was carried out to rediscover its garden-oriented aspect, characteristic and value by examining it in terms of spatial characteristics, sense of place and landscape as well as discussing the landscape-view features of the influenced sphere. The study will eventually suggest the way to prepare the principal foundation that led to the designation of the area as UNESCO`s World Heritage. Jukmak-dong remains need to be promoted and preserved as the first marine ritual site in Korea todate, but also as the Korea representative ritual site to demonstrate the excellence of Korean culture in East Asia. First of all, the detailed archaeological discovery requires the close investigation about the remains of garden and the value as the traditional facility. From the exterior perspective, designation of the area as national cultural assets such as historic sites will prevent it from the physical and visual disturbance due to the damage and additional building. Only then, the protected area may be expanded to the marine landscape zone in association with River Chaseok, a nearby scenic spot. To ensure it can be designated UNESCO`s World Heritage, the solutive strategy of government and academy should be able to refer to the marine ritual site inOkinoshima, Japan. in this case, our connectivity with the remains of the remains of Okinoshima indicates that Korea in partnership with Japan will establish countermeasures to make the remains of both countries designated unesco`s world heritage.

      • 한계산성 天祭壇의 형태와 성격

        김도현 한국성곽학회 2013 한국성곽학보 Vol.23 No.-

        寒溪山城の中にある天祭壇は城郭内に位置した祭祀の遺蹟であったと推定することができる。その理由として, 他の地域山城内の祭祀遺蹟を綜合的に檢討してみた結果、祭祀遺蹟が位置した所は山城の內部、特に建物址がある所と近くにありながら、內部をよく見ることができ、山城外部の河川や主要な交通路などを一目で見渡すことができる所に位置されているということである。寒溪山城内の天祭壇と近い所の大闕垈と呼ばれる所に住居遺蹟が發見された点と、その周邊で發見された土器片は山城を維持していた高麗時代と朝鮮時代に祭壇の役割として機能した可能性を高めてくれる。そして、寒溪山城が關防遺蹟としての機能を廢した後、祭壇も放置され、ここを據點に仙思想と道敎、佛敎が習合された新宗敎を作った人がここを天に祭祀を執り行う祭壇として活用した可能性が高い。なぜなら、一般的に共同體のための祭壇を設置する所が村落や周邊の景觀をよく眺望できるところに設置された事例が多いので、太白山の天祭壇や三陟にある可谷山烽燧·陽野山烽燧の民間信仰の處所化の事例などを通じて過去に國家の祭場だったり、關防の遺蹟だった所がその本來の機能を廢した後、新宗敎や民間信仰の處所として活用された事例が多く發見される。これとともに以前の宗敎機能を廢しても以後に作られる宗敎祭場は以前に宗敎祭場だったところに彼らの祭場を設置した事例が多いからである。 寒溪山城내 天祭壇은 城郭내에 위치한 祭祀遺蹟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다른 지역 산성 내 제사 유적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본 결과 제사 유적이 위치한 곳은 산성 내부, 특히 建物址가 있는 곳과 가까우면서 내부를 잘 볼 수 있으며, 산성외부의 하천이나 주요 교통로 등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해 있다는 점이다. 寒溪山城내 天祭壇과 가까운 곳에 대궐터라 불리우는 곳에 주거 유적이 발견되었다는 점과 그 주변에서 발견된 土器片은 山城을 유지하였던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祭壇으로 기능하였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그리고 한계산성 내 천제단의 명문을 보면 仙○○, 道君子, 上帝, 佛者등 仙思想과 道敎, 佛敎思想이 내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천제단에 새겨진 명문 내 인물들이 고려시대에 활동한 인물이라면 당시 이와 같은 사상 경향을 국가나 민간 차원에서 수용하여, 祭儀를 행하였음은 醮祭나 八聖堂을 설치한 사례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한계산성을 고려시대에 주로 사용하였다는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종합해 보면 고려시대에 한계산성 내에서 하늘에 제사지내기 위해 설치하였던 天祭壇이었을 가능성도 고려해 볼 수 있다. 또한 한계산성이 관방유적으로서의 기능을 廢한 후 祭壇또한 방치되었다가 이곳을 거점으로 仙思想과 道敎, 佛敎가 習合된 新宗敎를 만든 사람들이 이곳을 하늘에 제사지내는 제단으로 활용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공동체를 위한 제단을 설치하는 곳이 마을이나 주변 경관을 잘 조망할 수 있는 곳에 설치된 사례가 많으며, 太白山天祭壇이나 삼척 가곡산 봉수·양야산 봉수의 民間信仰處所化사례 등을 통해 과거에 국가 제장이었거나, 관방 유적이었던 곳이 그 본래의 기능을 廢한 후 新宗敎나 民間信仰의 처소로 활용된 사례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이전의 종교 기능을 廢하더라도 이후에 만들어지는 종교 제장은 이전에 종교 제장이었던 곳에 그들의 祭場을 설치한 사례 또한 많다. 이와 함께 한계산성 천제단이 지닌 가치는 하늘에 제사를 지낸 聖所였다는 점과 산성 유적 내에 제사를 지낸 장소의 위치적 특징이 산성 내부와 외부를 잘 조망할 수 있는 곳이면서 주변에 건물 유적이 있는 곳에 위치한다는 점을 정립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 KCI등재

        신라의 加良岳 제사와 가야산 牛頭峰 유적 - 檀君유적의 이해를 위하여 -

        정동락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16 민족문화논총 Vol.64 No.-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possibility of whether Silla’s mountainous belief originated from Gojoseon and the position of Dangun relics found in Mt. Guwol or such. Also, this study investigates Silla’s Garyangak memorial service and the places for the ritual. Silla’s mountainous belief can be associated with that of ‘Chosun's drifting people(朝鮮遺民)’. Mt. Guwol’s Dangun Cheonwangdan(檀君天王祠), Mt. Myohyang’s Dangun-sa(檀君祠 : Dangun Shrine), and Mt. Mani’s Chamseongdan(塹星壇) are all representative examples of Dangun relics. These relics succeeded to Gojoseon’s mountainous belief, and the ritual places were all located on the top of the mountain. Garyangak was a mountain representing Gaya including Daegaya. In Daegaya, they held a memorial service for Mt. Gaya spirit(加耶山神) Jeonggyeonmoju(正見母主), the main character of the birth myth of that nation and propositus god of the royal family, as a national festival. The shrine must have been Jeonggyeonmoju Shrine(正見母主祠). After the collapse of Daegaya, Garyangak was incorporated into Silla’s national ritual system(祀典). ‘Udubong relics’ are located on the crest of Mt. Gaya. Earthenware or pottery pieces that have been collected there may have been generated in the process of playing in the mountain. However, roof tile pieces, the miniature horse making steel and earthen(鐵製·土製馬), or bronze bells prove that these relics must be places equipped with special characteristics. Udubong is estimated to be a ritual place for holding mountainous memorial services in Silla. There is a shrine(Jeonggyeonmoju Shrine) on the crest of Udubong, and Garyangak memorial service must have been held there. 이 글에서는 신라의 산악신앙이 古朝鮮에서 연원했을 가능성과 九月山 등 檀君유적의 입지를 정리하였다. 그리고 신라 加良岳 제사와 그 祭場을 검토하였다. 신라의 산악신앙은 ‘朝鮮遺民’의 그것과 연결될 수 있다. 九月山의 檀君天王壇, 妙香山의 檀君祠, 摩尼山의 塹星壇 등은 대표적인 단군유적이다. 이 유적들은 古朝鮮의 산악신앙을 계승하였고, 그 제장은 산 정상부에 입지한 공통성을 지닌다. 가량악(加耶山)은 대가야를 비롯한 가야를 대표하는 산악이었다. 대가야는 건국신화의 주인공이자 왕실의 시조신인 加耶山神 正見母主에 대한 제사를 國家祭典으로 거행했다. 그 神祠는 正見母主祠였을 것이다. 대가야 멸망 이후 가량악은 신라의 국가 祀典(小祀)으로 편입되었다. ‘牛頭峰 유적’은 가야산 정상부에 입지하고 있다. 이곳에서 채집되는 토기나 자기편은 遊山과정에 발생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기와편과 鐵製·土製馬, 청동방울 등은 이 유적이 특별한 성격을 지닌 곳임을 증언한다. 즉, 우두봉은 신라 산악제사의 제장으로 추정된다. 우두봉 정상에는 神祠(정견모주사)가 있었고, 이곳에서 가량악 제사가 거행되었을 것이다.

      • KCI등재

        백제 지역 출토 월요청자 및 관련 문제

        이군 ( Li Jun ) 백제학회 2018 백제학보 Vol.0 No.24

        본문은 한국 백제 유적에서 출토된 중국 조기 월요 청자를 통해, 그 연대와 분포지역, 기종, 용도 등 여러 방면을 고찰하였고, 중국 조기 월요 청자가 백제로 유입하게 된 방식과 해상 노선 등 기초적인 연구를 진행하였다. 동시에 변산반도와 죽막동 유적을 둘러싸는 해항노선상의 주요 위치와 그 역할에 대해 상세히 논하였다. 한국 백제지역에서 중국 六朝시기 100여 점의 도자기가 출토되었다. 그 중 중국 조기 월요 청자에 속하는 개체를 총 합한 수는 24점(편)이고, 주로 백제 한성시대의 수도 한성(현 서울), 그리고 웅진(현 공주), 사비(현 부여)의 세 수도를 중심으로 한 주변 지역의 토성유적, 생활유적, 고분과 제사유적 등에서 출토되었다. 그 중 한성에서 가장 출토가 많이 되었고, 월요 청자는 대부분 東晉의 것이며, 수도가 존재한 시기와 부합한다. 백제 지역에서 출토된 조기 월요 청자는 주로 浙江寧紹平原, 上虞曹娥江 중류 지역과 慈溪上林湖, 古銀锭湖區域의 것이다. 조기 월요 청자의 종류를 살펴보면, 완, 발, 관, 호, 호기, 벼루, 양 형기 등이고, 출토 기물의 기능으로 말하자면, 주로 식기, 盛贮器(불교그릇), 차구, 문방용구, 위생기구와 장식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출토 기물의 다양성은 당시 漢문화를 특징으로 한 중국 생활 방식과 풍습이 백제로 전파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문화 전파의 가장 두드러지는 현상은 한자와 서예 예술을 주 내용으로 하는 漢문화 전파와 중국 차 문화의 전파이다. 백제로 유입된 조기 월요 청자는 반드시 해외 교역 상품과 조공품으로서 유입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해야 하고, 당시 양국 관방과 민간의 왕래와 연관이 있다. 종합적으로 분석하면, 조기 월요 청자는 아래 4가지 방식으로 백제에 도달했을 가능성이 있다. 당시 관방 교역이 양국 교류의 주도적 역할을 하여 양국 사신과 수행원의 왕래가 빈번하였다. 조공기간에 수도 建康에서 지낸 백제 사신들이 청자 그릇을 구입해 돌아갔을 가능성이 굉장히 크다. 또한 동진의 권세 가 문이 백제의 사신을 응대 했을 때 준 선물일 가능성이 있다. 한편으로는 東晉 사신이 백제로 갔을 때, 최신 유 행하는 예물로서 백제의 관련 인사에게 선물로 주었을 가능성도 있다 동진시기 백제 승려들이 중국으로 가서 구법을 하였다. 또한, 중국 남방 도성 建康과 백제로 승려들이 빈번 하게 오고 갔으며, 동시에 중국 일상 용품의 도자기를 몸에 지니고 백제로 들어왔을 것이다. 한국에서 발견된 중국도자기 중 제사용품이 이를 증명한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한국에 현존하는 백제 사찰과 무령왕, 성왕왕릉 등의 유적들은 南朝 형식과 비슷한데, 이는 중국에서 여러 번 능숙한 공인들을 파견하여 기술을 전파하였고 장인 기술자들이 백제를 왕래할 때 일 상생활 용품 자기를 휴대하였다. 낙랑, 대방군의 유민과 당시 중국 遼東 등 내지에서 남하한 漢人 유민들이 한반도로 유입되었고, 황해남도 신천군과 주변을 중심지역으로 漢人 거주구역이 형성되었다. 이 지역에 중국 三國時期부터 東晉 전기까지 속 하는 월요 청자가 발견되었는데, 유민들이 정착하며 남긴 물건이다. 東晉-南朝시기 기존의 해상 노선이 막혀 백제와 중국 남방 사이에 한성, 웅진과 사비 등 지역을 출발지로 하는 새로운 노선을 개척했다. 한강 혹은 금강 하류를 지나면 강화만과 군산만에 다다른다. 이어 한반도 서해 안을 따라 남쪽으로 항해하고 황해를 건너 중국 淮河, 동남해안선에 도착해 해안선 남쪽부터 長江입구까지 다다르고 나서 다시 강을 따라 항해하면 수도 建康에 도착한다. 東晉말기와 南朝 劉宋시기 山東半島 成山角에서 황해를 건너 한반도 강화만에 도달하는 北南道 항로를 새로 개척했다. 변산반도는 위치적으로 자연 환경(풍랑)과 교통의 요충지이다. 백제와 중국 남방 사이의 새로운 해상 노선 상 선박이 통행하고 정박, 경유하는데 이상적인 곳이었기 때문에 백제 웅진과 사비 시대 원양 항해의 중심지 이자, 관문이다. 죽막동 유적 및 관련 유물로 보아, 변산반도는 중국, 왜 그리고 신라 등 외래 선박 혹은 “道逕百濟” 중국으로 가는 왜, 신라의 선박들이 정착하고 환승했으며, 좋은 해풍을 기다리고, 경유하는 곳일 가능성 이 있다. 또한 죽막동 유적은 분명 당시 선박이 정박할 때, 선원들이 제사를 지내며 기도를 올렸던 장소였을 것이다. By analyzing the dynasties, geographical presence, types of ware and functions, as well as the historical records of both China and South Korea, this paper aims to explore the medium, approaches and shipping routes of Yue Kiln Celadon Porcelain into Baekje, meanwhile illustrating the important role of Beonsan Peninsula and Jumakdong site on the shipping routes. More than 100 pieces of porcelain wares have been unearthed in Baekje, of which 24 are Yue Kiln Celadon Porcelain. Most of the porcelain is found in the then capital Seoul (today’s Seoul), and the city walls, residence sites, ancient tombs and worshiping sites in the neighborhood of Seoul, Woongjin (today’s Kongju), and Sabi (today’s Buyeo). Seoul witnessed the largest amount of porcelain unearthed. The dynasties of the Yue Kiln Celadon Porcelain roughly coincide with the existence of dynasties in history. The Yue Kiln Celadon Porcelain unearthed in Baekjae are mainly produced in Ningshao Plain of Zhejiang Province, in the middle reaches of Cao’e River of Shangyu City, Shanglin Lake and Guyindian Lake in Cixi City. A variety of different wares are found, including bowls, jars, pots, urinals, ink stones, sheep-shaped containers, etc. As regard to functions, there are table wares, storage containers, tea sets, stationeries, sanitary wares, decorative wares, etc. The diversity of the wares shows that the Chinese culture, living style and customs had get across to Baekje at that time, in particular the Chinese characters, calligraphy and the Chinese tea culture. The import of Yue Kiln Celadon Porcelain into Baekje should be a result of the frequent people-to-people exchanges between the two sides, both governmental and non-governmental, instead of via trade or as gifts from the Chinese government. Based on the historical records, there might be four approaches. The period has witnessed frequently two-way flows of diplomatic envoys and attaches. The envoys from Baekje might have bought celadon porcelain wares or received as gifts from their Chinese counterparts during their visit in China and brought them back home. Likewise, Chinese envoys in East Jin Dynasty might have brought porcelain wares to Baekje as gifts to local people. In East Jin Dynasty, a lot of monks from Baekje travelled to China to learn Buddhist doctrines. During their journeys, they also brought the porcelain wares they used in China back to Baekje. This view is evidenced by some Chinese porcelain unearthed in South Korea proven to be worshiping wares. The existing Baekje Temple and the tombs of King Muryeong and Seong in South Korea are similar with the tomb styles in the southern part of China. The above-mentioned fact and other historical records indicate that China had sent skilled craftsmen for many times to Baekje to teach local counterparts, and they might have taken porcelain wares and other daily necessities with them. The former residents in Lelang and Daifang Commanderies and in East and West Liao Kingdom migrated to the Korean Peninsula and thus formed a Han neighborhood with HwangHaeNamDo Shincheon Gun at its core. The Yue Kiln Celadon Porcelain dating to Three Kingdoms Period till early East Jin Dynasty discovered in this area could be left by those immigrants. In East Jin Dynasty, as the traditional shipping route was blocked, a new shipping route between Baekje and the southern part of China was explored, starting from Seoul, Woongjin and Sabi, traveling along Han River and Geum River and then flowing into Ganghwa Bay or Kunsan Bay, and all the way southward along the eastern coast of Korean Peninsula and across the Yellow Sea to reach the mouth of Yangtze River to Jiankang. In the late East Jin Dynasty, another “North-to-South” route was established via Shandong Peninsula, across the Yellow Sea, to the Ganghwa Bay in the Korean Peninsula. Due to its unique maritime environment and geographical location, Beonsan Peninsula had become an ideal stop-over and transfer station for ships travelling between Baekje and the southern part of China, as well as an important hub and gateway for long-distance shipping at that time. The discovery of Jumakdong site and the items inside could prove that Beonsan Peninsula was very likely the stop over and transfer stations for ships from China, Japan and Silla, or ships from Japan and Silla sailing to China via Baekje. And Jukmakdong site should be the worshiping venue for crews of those stop-over shi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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