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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학문신(漢學文臣)의 친림전강(親臨殿講) 제도 연구

        이연진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2022 유학연구 Vol.61 No.-

        본 연구는 문신들을 대상으로 친림전강(親臨殿講)의 형식을 통해 한어(漢語) 학습을 장려한 한학문신(漢學文臣) 제도의 운영규정을 검토해보고 그 특징을 파악해보고자 한다. 문신 전반을 대상으로 하여 유학적 식견을 배양하고자 했던 여타의 문신 전강(殿 講)제도와는 달리, 한학문신 제도는 그 대상과 목적이 비교적 뚜렷한 특성을 가진다. 한어능력에 재능이 있는 일부 문신을 선발하여 한어 구어능력을 배양하고자 하였다. 일반 문신 중 한어를 잘하는 자는 명·청나라의 사신으로 가거나 파견된 사신들을 접대하는 역할을 하였다. 역관만으로는 민감하고 변수가 많은 외교적 상황을대처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에 조선은 문신의 한어 능력을 국가적으로 배양하기 위해 한학문신 제도를 지속적으로 운영하였다. 조선후기 규정집과 영조대 전강등록의 한학문신 시행절목에 따르면, 해당 제도의 대상자는 당하관(堂下官) 중 29세 이상에서 48세 이하인 문신 중에서 선발하였다. 시험주기는 1년에 4차례, 1·4·7·10월 16일로 주기적으로 시행하였다. 시험시행 이전에 장소, 친림여부 등을 정하는 제반적인 운영절차는 전경문신(專經文臣) 의 규정에 의거하여 시행하였다. 전강을 통과하지 못한 한학문신에게는 재시험의기회를 주고 일정기간 동안 학습한 뒤, 학습여부를 확인하였다. 우등자에게는 포상으로 말을 하사하거나 6품으로 승진시키는 승륙(陞六)과 같은 인사상의 혜택을 주었다. 본 연구는 조선시대 한학문신 제도를 검토해봄으로써 문신의 특정 재능을 계발하고 제고(提高)한 문신재교육 정책의 일단(一端)을 살펴본 의미가 있다. 한학문신은파견, 사신접대 등의 외교활동과 질정관, 사역원 교수 등의 교육자로서의 역할도 담당하였다. 실제로 이러한 한학문신 제도를 통해 양성된 한학문신들은 중국과의 외교활동이나 한어교육을 관리·감독하는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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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대 전경무신(專經武臣)의 친림전강(親臨殿講) 연구

        이연진 온지학회 2022 온지논총 Vol.- No.73

        This study aims to explore a governmental policy called “Jeongyung-Mooshin(專經武臣,)” which is carried out by King Yeong-jo(英祖). The main text is based on Jeon’gang-dengrok(殿講謄錄) during King Yeong-jo(英祖) Regime. This research tried to find out the characteristics and discuss the meaning of the policy in what background it was activated. Jeongyung-Mooshin(專經武臣) had to take oral tests regarding the Seven Military Classics(武經七書) every four seasons each year. If they achieve high scores, they could be rewarded with a horse or promotion. On the other hand, those who failed to the test, they could be punished even to losing their post. In order to stabilize the unstable political situation such as a partisan fight, King Yeong-jo strengthened the royal authority and actively sought education measures for military officials. The king utilized Jeon’gang(殿講) carried out by king in which he could examine their knowledge and insight by face-to-face examination. Jeon’gang which took place every four time each year was the right method for the king to recognize their talent and make them study periodically. Such a in-service education for military officials would not have been possible without the king's academic excellence and academic maturity of Joseon society. 본 연구의 목적은 영조대 현직무신에게 무경학습을 장려한 전경무신(專經武臣)의 친림전강(親臨殿講) 제도 규정과 그 특징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법전규정과 영조대 실제 운영사항이 기재된 『전강등록(殿講謄錄)』을 중심으로 세부운영상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그 특징을 파악하고 영조대 전경무신 제도가 어떠한 배경에서 활성화되었는지 그 의미를 논의해보고자 하였다. 전경무신은 매년 분기별 4차례, 무경칠서(武經七書)에 대한 이해능력을 평가받아야 했다. 국왕은 친림전강의 방식을 통해 주기적으로 전경무신들과 대면하여 무경에 대한 이론적 지식을 묻고 자질이 있는 무신들을 계속해서 양성해갔다. 우등자에게는 누적성적에 따라 포상하였다. 연속 세 차례 우등자에게는 가자(加資)나 승륙(陞六)과 같은 인사 혜택을 주는 방식으로 포상하였다. 연속적으로 우등한 경우가 아닌 경우, 숙마(熟馬) 등을 하사하는 방식으로 누적성적에 따라 차등 시상하여 학습을 장려하였다.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면, 재시험을 시행하거나 정도에 따라 파직하였다. 당파 간의 싸움에서 왕위에 어렵게 즉위한 영조는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관료재교육 및 관리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하였다. 영조는 직접 대면하여 관료들의 견식(見識)을 알아볼 수 있는 친림전강의 방식을 선택하였다. 친림전강은 관료를 계속 교육하고 몸소 군사(君師)로서의 모범을 보일 수 있는 최적의 방식이었고, 영조는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그 결과는 영조대 각종 전강의 재정비 및 절목(節目)의 반포로 이어졌다. 무신재교육을 위해 영조는 전경무신 제도를 활성화하였다. 재능있는 젊은 무신을 선발하여 주기적인 평가를 통해 무경지식을 계속 배양해가는 시스템을 체계화하였다. 이러한 인재양성 시스템은 국왕의 학문적 탁월성과 조선사회의 학문적 성숙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 KCI등재

        조선후기 유생전강 운영 연구

        정지연 교육사학회 2019 교육사학연구 Vol.29 No.2

        This study focuses on examining the tendencies of the operation of Yuseang-jeon'gang(儒生殿講) in the late Joseon dynasty. From King Injo's reign to King Gyeongjong's(1623-1724), due to the many times regular Yuseang-jeon'gang was skipped, the king implemented the irregular Yuseang-jeon'gang and the regular Yuseang-jeon'gang supervised by the king. From King Yeongjo's reign to King Jeongjo's(1724-1800), Yuseang-jeon'gang was conducted without major interruptions. King Yeongjo preferred Dogi-jeon'gang(到記殿講), an irregular test, to Ilcha-jeon'gang(日次殿講), a regular test. King Jeongjo spilt the regular Yuseang-jeon'gang into Ilcha-jeon'gang and ChunChuDogi(春秋到記), a test originating from Dogi-jeon'gang. From King Sunjo's reign to King Cheoljong's(1800-1863), the core of Yuseang-jeon'gang was ChunChuDogi. While the focus of Yuseang-jeon'gang was supplementation of regular Yuseang-jeon'gang up until King Yeongjo's reign, starting from King Jeongjo's reign it changed to the stable conduct of Yuseang-jeon'gang by ChunChuDogi. 본고는 조선후기 유생전강의 규정 및 운영 과정을 검토함으로써 해당시기 유생전강 운영의 경향성을 파악하고자 했다.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인조-경종 연간(1623-1724) 유생전강은 다른 성균관 과시와 마찬가지로 간헐적으로 시행되었다. 이 시기 유생전강은 1년 6번의 시행 횟수를 채우지는 못했지만, 후대로 갈수록 장기간 결행하는 경우는 은사의 혜택이 큰 친림전강이나 불시의 도기전강을 실시하여 정기전강의 결행을 보완하였다. 영조‧정조대(1724-1800) 유생전강은 정기전강의 결행을 보완함과 동시에 유생들의 경학 공부를 장려하기 위한 방책으로 활용되었다. 영조는 정기의 일차전강보다는 불시에 시행하는 도기전강을 자주 실시함으로써 유생들의 경서 학습과 성균관 거재를 장려했다. 정조는 영조대 중반에 시행되었던 도기유생에 대한 분제강(分製講)을 춘‧추도기로 정식화하고 성균관 과시 중 가장 높은 위상을 확립시켰다. 정조는 일차전강에 관‧학 재임의 자원일경강(自願一經講)을 시행함으로써 사학 재임의 경학 공부를 장려하고, 상재생제술(上齋生製述)을 겸행함으로써 생원‧진사의 제술 실력을 향상시키는 방편으로 일차전강을 활용했다. 순조-철종 연간(1800-1863) 유생전강은 정조대까지 확립된 규정을 기본으로 하여 운영되었다. 이 시기 일차전강은 특정시기를 제외하고는 거의 운영되지 않은 반면, 춘‧추도기 전강은 대부분 1년 2번의 시행 횟수를 채우며 안정되게 운영되었다. 순조-철종 연간 장기간의 일차전강 결행에 대한 문제제기가 없었던 것은 춘‧추도기 전강을 통하여 전강 응시자의 은사 획득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영조대까지 유생전강이 정기전강의 결행을 보완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면, 정조대 이후 유생전강은 춘‧추도기의 설치를 통해 1년 2번의 안정적인 유생전강의 시행을 보장했다. 순조-철종대 유생전강은 영조‧정조대의 경서 학습 및 성균관 거재 장려 등과 같은 정책적 지향보다는, 유생들의 공부 경향을 인정하고 그에 따른 인센티브를 보장하는 방식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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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종․철종대 성균관 과시 운영 연구

        정지연 한국교육사학회 2019 한국교육사학 Vol.41 No.3

        This study aims to grasp the characteristics and change of the operation of the Seonggyungwan(成均館)-Guasi(課試) by examining its concrete aspects during King Heonjong’s reign through King Cheoljong’s reign(1834-1863). During this period, Ilcha-jeon’gang(日次殿講), a regular oral test, was seldom administered. Jeolilje(節日製), Hwanggamje(黃柑製), a regular written test, and ChunChuDogi(春․秋到記), a regular written and oral test, were more commonly implemented. Eungje(應製), an irregular written test, was also often implemented. The special benefits(恩賜) of the Seonggyungwan-Guasi were expanded during King Cheoljong’s reign than King Heonjong’s. During King Heonjong’s reign through King Cheoljong’s reign, the Seonggyungwan-Guasi was implemented according to the rules. Especially during King Cheoljong’s reign, the differences between the parts of the Seonggyungwan-Guasi became weaker. This was because the level of special benefits and the style of the written test of Seonggyungwan-Guasi were similar during King Cheoljong’s reign. As a result, during King Cheoljong’s reign, the Seonggyungwan-Guasi operations were quantitatively expanded in comparison to King Heonjong’s. 본고는 헌종․철종대(1834-1863) 성균관 과시 운영의 실제를 검토하고 그 운영상의 특징 및 변화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헌종․철종대 강서 과시는 춘․추도기 전강이 가장 높은 위상을 가지고 운영되었다. 봄과 가을의 춘․추도기 전강은 대부분 결행없이 시행되고 최고은사로 1명에게 직부전시를 내리는 법규대로 운영되었다. 통독 역시 법규대로 1년 11차 시행을 기준으로 하여 운영되었지만, 해당 은사 및 관․학의 기재생(寄齋生) 보충과 관련하여 강서 응시자 중심으로 운영된 것으로 짐작된다. 일차전강은 헌종대 전반(前半)에는 시행되지 않다가, 헌종이 친정을 시작한 7년(1841) 이후로 헌종8년(1842)부터는 적게는 1년에 1번, 많게는 1년에 5번 정도 시행되었다. 철종대에 일차전강은 시행되지 않았다. 헌종․철종대 제술 과시는 정규 과시인 절일제 및 황감제, 춘․추도기 제술은 결행없이 대부분 시행되었으며, 비정기 과시인 응제도 시행되었다. 헌종대의 응제는 주로 황단참반유생응제로 시행되었는데, 철종대는 황단참반유생응제 외에도 각종 응제를 시행하였다. 철종대는 헌종대와 마찬가지로 성균관 과시가 안정적으로 시행되었지만, 이전 시기에 비하여 제술 과시에서 최고은사가 비슷해지고 은사가 확대되며 시제가 동일화되는 변화가 나타난다. 이 과정에서 철종대는 제술 과시 간 위상이나 성격의 차이는 거의 사라지게 되었고, 과시에 의한 직부전시자 수가 증가하게 되었다. 헌종대 성균관 과시는 이전 시기의 운영 규정을 준수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반면 철종대 성균관 과시는 규정에 의하기보다는 최고은사가 상향 조정되고 은사가 확대되는 등 양적으로 확장된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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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 인조~숙종 대 성균관 과시의 운영

        최광만 교육사학회 2023 교육사학연구 Vol.33 No.1

        This study is to analyse the management state of Sungkyunkwan gwasi from Injo to Sukjong regime. The results of the analysis are as follows. First, the basic framework of Sungkyunkwan gwasi changed from Jeongang(殿講)/Jeolje(節製)/Yungang·Yuncha(輪講·輪次) to Jeongang/Jeolje/Tongdok(通讀) in the period. But the final change was completed in Sukjong regime. Second, the influence of Sungkyunkwan gwasi was increased, especially in Jeolje. The frequency of the examination in Injo regime regime was 0.6 a year. But it became 2.2 in Sunkjong regime. And the number of the honor students was expanded from 0.4 to 3.0 a year. Third, educational police function of Sungkyunkwan gwasi was enforced. Injo hold the examination on negative lines, but Sukjong made the best use of the examination as a educational policy means. And the tendency of Sukjong influenced on Yongjo and Jeongjo in 18th century. 본 연구는 인조~숙종 대 성균관 과시의 운영 상황을 분석한 내용이다. 주요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 후기 성균관 과시의 기본 틀이 마련되었다. 인조 대까지만 해도 정기 과시는 이전의 방식에 따라 전강/절제/생진윤강·윤차로 시행되었지만, 현종 대에 이르면 전강/절제/통독으로 변화한다. 그러나 숙종 1년(1675)에 통독이 폐지되고, 숙종 28년(1702)에 새로운 통독이 재개되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 변화의 완료 시점은 숙종 후기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성균관 과시의 영향력이 증가하였다. 인조~현종 대의 정기 과시는 규정된 횟수(전강 6회, 절제 5회)에 비하여 현저하게 낮은 수준(전강 1.3회, 절제 0.6회)이었다. 그러나 숙종 대부터 시행 빈도가 점차 증가하여, 숙종 전기에는 절제의 시행 빈도가 연평균 2.3회로 이전에 비하여 4배 증가하였고, 숙종 후기에는 친림전강을 강화하였다. 이에 따라 직부전시자도 인조~현종 대 연평균 0.4인에서 숙종 대에는 3.0명(전기 3.3인, 후기 2.7인)으로 7.5배로 급증하였다. 셋째 성균관 교육을 강화하기 위해 과시를 정책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하였다. 인조~현종 대에는 규정 내에서 제한된 방식으로 성균관 과시를 시행하는 소극적 접근에 머물렀지만, 숙종 전기에는 도기전강과 도기제술을 도입하고, 숙종 후기에는 통독을 재개하는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궁극적으로 강제겸비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숙종 대의 시도는 영조와 정조 대 성균관 과시 정책의 시발점이 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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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 대 전경무신(專經武臣) 제도의 운영 연구

        이연진 온지학회 2023 溫知論叢 Vol.- No.74

        This study examined the operation of “Jeongyung-Mooshin(專經武臣)” policy during Jeong-jo (正祖)'s regime. It tried to understand the characteristics and the meaning of this policy. Jeong-jo tried to actively operate the policy in the direction of increasing the effectiveness based on the Yeong-jo (英祖)’s regulation. The characteristics of the operation are as follows. It was conducted periodically four times a year, which was for enhancing education regarding the Seven Military Classics(武經七書) for military officials. The procedures were also done in accordance with the way Yeong-jo has done and were listed in the Code of Law, Daejeontongpyeon(大典通編), 1785, the ninth year of Jeong-jo’s reign. Jeong-jo actively managed Jeon’gang (殿講) performed directly by the king, all the time. He strictly managed the test results for ensuring that the policy was operated effectively. Those who failed the test were retested in order to check the level of learning. Punishment was imposed according to the grades. Meanwhile, promotion benefits were given if the performers were outstanding. The expansion of the king's discretion was to increase the effectiveness of the system operation. It shows the characteristics of in-service education for the military officials during Jeong-jo's regime. 본 연구는 정조 대 무신재교육 양상을 살펴보는 일환으로 정조 대 전경무신(專經武臣) 제도의 운영상 특징을 살펴보고 그 의미를 논의해 보고자 한다. 정조 대 전경무신 제도의 운영 특징은 기본적으로 영조 대에 마련된 관련 절목의 시행방침을 준수하면서 정조 나름의 재량이 발휘된 점이다. 예컨대 매년 분기별 4차례 주기적으로 전경무신을 시험한 기본원칙은 준수하고자 하였다. 정조는 직접 시험을 주관하는 친림전강의 방식으로 주기적인 시행 원칙을 고수하였다. 특정한 사유가 있어 시행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그 다음 차례에 이전에 실시하지 못한 전강까지 별도로 시행하였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영조 대 전경무신 관련 절목의 주요 원칙은 정조 대 『대전통편』의 전경전강 조항으로 법규화되었다. 한편 정조의 재량권이 가장 두드러진 사안은 전경무신들의 성적 처리방식이었다. 정조는 전경무신의 성적에 따라 포상과 처벌방식을 직접 관리하였다. 직접 무신들의 무경 능력을 평가하여 우수한 무신들을 발탁하는 한편 무신 전반의 무경 지식을 향상시키고자 처벌을 엄격히 하였다.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 무신을 처리하는 대표적인 방식은 해당 무경내용을 능숙히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입직시키는 것이었다. 영조 대는 불통자를 대개 의금부에서 관리하여 금추(禁推)하는 것으로 그쳤으나 정조는 병조의 책임 하에 해당자를 소속관아에 숙직시키고 재시험을 시행하여 그 학습 정도를 확인토록 했다. 재시험 성적 정도에 따라 수속(收贖) 등의 실질적인 처벌조치가 내려졌다. 한편 성적우등자가 특출할 경우 참하관은 참상관으로 승륙(陞六)하는 등의 인사상 혜택이 바로 주어졌다. 이러한 정조의 재량권 확대는 제도 운영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한 방향을 모색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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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조대 성균관 과시 운영 연구

        정지연 교육사학회 2019 교육사학연구 Vol.29 No.1

        This study focuses on examining the characteristics of the operation of the Seonggyungwan-Guasi(課試) by examining its concrete aspects during King Soonjo's reign(1800-1834). Ilcha-jeon'gang(日次殿講) was an oral test seldom implemented during King Soonjo's reign, except during the Crown Prince’s proxy period(1827.2.-1830.leap4.). Jeolilje(節日製), Hwanggamje(黃柑製), a written test, and ChunChuDogi(春‧秋到記), a written and oral test, were more commonly implemented. After Soonjo's 20th year as king, all candidates, even those who didn't boarded at Seonggyungwan, could take the written tests of Seonggyungwan without restriction. The special benefits(恩賜) were awarded to candidates based upon their grades. During the Crown Prince’s proxy period, Ilcha-jeon'gang as well as the other written tests were implemented without skipping. The Crown Prince elevated the class of the special benefits of Jeolilje and Eungje(應製) as a irregular writing tests. In Soonjo's 11th year as king, there were many disasters. King Soonjo tried to encourage the candidates by implementing irregular Seonggyungwan-Guasi. During King Soonjo's reign, the Seonggyungwan-Guasi was implemented by the rules. The Seonggyungwan-Guasi was operated consistently, but the written tests were regarded as more important than the oral tests. Due to this, the benefits of boarding at Seonggyungwan became weaker, and there was no the directivity of the policy maker. 본고는 순조대(1801-1834) 성균관 과시 운영의 실제를 검토하고, 그 특징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일차전강은, 왕세자의 대리청정 기간(1827.2.18-1830.윤4.22)에는 추행 등으로 결행이 없었지만 그 이외의 기간에는 거의 시행되지 못하였다. 춘‧추도기의 제술과 강서, 황감제 및 절일제는 국상이나 재해에 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순조대 내내 안정적으로 시행되었다. 순조20년(1820)부터는 모든 절일제가 통방외로 시행되었다. 제술 시제는 부(賦)가 빈번히 출제되었으나, 원점유생 절일제에 비하여 응시자가 확대되는 춘‧추도기 제술이나 황감제, 통방외 절일제에서는 상대적으로 표(表)의 출제가 많았다. 은사는 춘‧추도기와 황감제에서는 일반으로 직부전시 이하의 은사가, 절일제에서는 직부회시 이하의 은사가 내려졌다. 왕세자 대리청정 기간에는 기존의 황감제나 절일제뿐만이 아니라 일차전강이 결행없이 시행되었고, 원점유생 응제 및 여타의 응제가 시행되었다. 대리청정 기간에는 일차전강의 실시, 기존의 응제 및 절일제 은사의 상향 조정으로 직부전시자 수가 늘어났다. 순조11년(1811)에는 다른 시기와 달리 왕명에 의한 비정기적인 응제와 응강이 빈번하게 실시되었다. 당해는 재해가 연이어 발생했던 시기로, 순조는 비정기의 과시를 자주 시행하면서, 유생들의 동요를 가라앉히고자 하였다. 순조대 성균관 과시는 순조11년(1811)의 특정 기간을 제외하고는, 전 기간에 걸쳐 규정에 의한 운영을 견지하였다. 과시에 따른 은사의 등급이나 제술 과시의 통방외 결정 여부도 일관되게 운영되었다. 과시 운영의 규정은 대부분 정조대를 기준으로 한 것이었으며, 이것은 왕세자의 대리청정 기간에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통방외 제술 과시가 증가하였고, 춘‧추도기 전강이 거의 유일한 강서 과시가 되었다. 다만 이러한 변화에 이전 시기와 같은 정책결정자의 지향성 등이 나타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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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대 전경문신(專經文臣)제도 연구 - 『전강등록(殿講謄錄)』의 내용을 중심으로 -

        이연진 교육사학회 2020 교육사학연구 Vol.30 No.1

        This study aims to explore a governmental policy called “Jeongyung-Moonshin(專經文臣, Literati Officials who specialize in Five Classics,五經)”. The main text of this research is based on 『Jeon’gang-dengrok』(殿講謄錄, The Record of Oral Tests on Confucian Classsics) during the Yeong-jo(英祖) Regime(1724〜1776). The policy dictated the literati officials under the age of 37. They were excluded from the list at the age of 41 years old. The selected had to take oral tests on Five Classics(五經) every first month of the four seasons each year. Depending on the result of the test scores, those who achieved high scores were rewarded with horses. On the other hand, those who did not attend the examination were questioned by judicial authorities but even this did not entail any further punitive measures on their assessment. This paper tried to find out the meaning of the policy encouraging Literati Officials to master confucian books. The main purpose of this policy was for cultivating confucian knowledge and the performance ability of literati officials. 본 연구의 목적은 조선시대 문신권학제도 중 하나였던 전경문신(專經文臣)제도의 원칙과 그 실제를 살펴보고 그 특성을 분석하는 것이다. 즉, 당시 전경문신제도가 어떠한 배경 하에 법제화 되었는지, 그리고 그 규정들이 실제로 시행된 양상을 알아봄으로써 전경문신제도의 특징과 문신권학책으로서의 의미를 밝혀보고자 한다. 영조대 전경문신제도는 37세 이하의 문관을 선발하고 41세가 되면 시험에서 면제시킨 규정에서 알 수 있듯이 젊은 문관의 오경 학습을 장려하기 위해 시행되었다. 오경을 학습하게 한 것은 과거를 합격한 문관들에게 지속적으로 유학적 교양을 쌓기를 바랐기 때문이며, 오경의 학습은 넓게 보면, 앞으로 문관들이 담당하게 될 직무능력의 기본 소양을 배양하는 일이기도 했다. 오경의 전반적인 학습을 위해, 사계절의 첫 달인, 1, 4, 7, 10월에 오경을 돌아가면서 시험 보도록 하여 특정 책에 편중되지 않고 오경을 두루 익히도록 했다. 암송 위주 보다는 글의 뜻을 깊이 있게 학습하도록 임강으로 시험 보았다. 또한 학습한 경전을 토대로, 토론을 장려하기 위해 주강 등의 경연에 참여하도록 했다. 학업 권장의 차원에서 시험결과에 따라 포상으로 말을 주기도 하고 처벌로 추고(推考)하기도 하였는데, 인사고과에는 그 결과를 직접적으로 반영하지 않는 대신, 시험에서 면제받을 수 있는 예외적인 경우를 구체화하고, 전강에 참석하지 않은 자에 대한 벌은 가중하였다. 본 연구는 영조대 전경문신제도를 살펴봄으로써 강경 또는 제술 출신 배경에 상관없이 젊은 문관의 유학적 교양 및 직무능력의 소양을 배양하기 위해 운영한 조선시대 문신 권학정책의 특성을 이해하고자 한다. 전경문신제도의 의의와 그 위상은 전경문신 출신자들이 담당했던 관직 등의 진출 양상을 살펴보는 추후 연구를 통해 알아볼 것이다.

      • KCI등재

        조선전기 과시의 신설과정

        최광만(Choi, Kwang Man) 교육사학회 2013 교육사학연구 Vol.23 No.2

        본 연구는 조선후기 과시제도를 구성하는 개별 과시가 조선 전기에 어떠한 과정을 거쳐 신설되고 변화하였는지를 고찰하였다.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15세기의 과시는 성균관 유생을 대상으로 하는 춘추과시, 사학생과 각 도 교생을 대상으로 하는 도회가 있었다. 태종대에 권학사목 에 의하여 과시법이 모색되고, 세종대에 춘추과시와 도회 규정이 정비되면서 각각 과시로서 성립되었다. 세조대에는 경학교육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제술 중심의 과시는 약화되었지만, 예종대에 다시 재개되어 성종대에는 『경국대전』 <장권>의 규정으로 수록되었다. 둘째 16세기에는 다양한 과시가 마련되었다. 16세기의 과시들은 이전의 춘추과시·도회와 같이 『경국대전』의 과시를 계승한 유형, 윤강·윤차 및 승보와 같이 학교시가 과시로 변화된 유형 그리고 정시·전강과 같이 신설된 유형으로 구분된다. 승보는 일찍부터 과시로 운영된 듯하지만, 나머지 과시들은 주로 중종과 명종대에 과시로 법제화되었다. 이러한 과시의 신설 경향은 지속적으로 강화되었다. 셋째 조선전기에 다양한 과시가 신설된 요인은 표층적·심층적 두 측면에서 살펴 볼 수 있다. 표층적인 요인으로는 제술·고강 병행정책을 들 수 있다. 제술과 고강을 병행하려는 정책 때문에 제술로 평가하는 과시와 고강으로 평가하는 과시가 상호 상승작용을 일으킨 것이다. 또한 심층적인 요인으로는 교육진흥에 관한 당시의 인식을 들 수 있다. 조선전기의 교육당국은 유생들이 자발적으로 학교에 오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기본 인식이 있었고, 이 때문에 강한 인센티브를 주는 과시를 활용하였던 것이다. 이점에서 과시는 강제력을 동원하지 않으면서 교육을 진흥시키려는 고심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This study is to follow the estabishment of Gua-Si in 15C-16C of Jo-Seon Dynasty. Gua-Si means the test which evaluates the students, selects some ones and gives the incentive to enter themselves for the second or the last stage of national examination for recruiting bureaucrats. Conclusions are as follows. First, in 15C, only two Gua-Sis were established. Those were Chun-Chu-Gua-Si and Do-Hue. The former was for the students of Seong-Gyun-Gwan(National University) and the second was for the students of Sa-Hak(National Secondary Schools) and Hyang-Gyo(Public Distruct Schools). Second, in 16C, many new Gua-Sis appeared. For example, Jeon-Si? Jeon-Gang(for Seong-Gyun-Gwan), Yun-Gang?Yung-Cha (for Seong-Gyun-Gwan and Sa-Hak) and Seung-Bo(for Sa-Hak) were instituted. And the former Gua-Sis, eg. Chun-Chu-Gua-Si and Do-Hue were strengthened. Third, the factor of the increasing Gua-Sis was the educational policy which balanced the educuation of philosophy and literature. But the cognition of the educational authorities which guaranteed the autonomy of the students more deeply influenced the process. In short, Gua-Si was the product of the educational ado in the 15C-16C of Jo-S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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